센티넬버스 AU



이 세상에 존재하는 센티넬과 가이드의 존재는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다. 어차피 이 세상에는 센티넬과 가이드라는 특이한 존재가 아니더라도 기이하고 신비한 능력을 부릴 수 있는 존재는 차고 넘쳤기에 그다지 조명을 받지 못했던 것도 사실일 것이다. 그래서 슈퍼맨이 센티넬이라는 것은 누구나 한번쯤은 ‘슈퍼맨이 심지어 센티넬이란 말이야?’ 라는 말을 하고 넘어갈 수밖에 없는 특이사항이었다. 우주 최강의 사내이자 유일한 크립토니안인 그가 센티넬이라니, 와 비슷한 느낌으로. 그리고 그것과 항상 세트로 붙어 다니는 말이 있었는데 ‘배트맨이 가이드란 말이야?’ 가 있었다.

슈퍼맨이 센티넬이라는 사실은 그가 평소에 하고 다니는 것을 보면 너무나도 뻔히 보이는 사실이었으나, 배트맨이 가이드라는 사실은 그가 직접 입 밖으로 꺼내지 않는 이상은 아무도 모를 일이었다. 저스티스 리그에 속해있는 히어로 중 센티넬의 수는 극히 적었는데, 슈퍼맨을 제외하고는 플래시가 유일했다. 센티넬의 수가 적은만큼 가이드의 수가 적은 것은 당연했다. 배트맨이 의도치 않게 가이드인 사실이 밝혀진 것은 - 어쩌면 너무나도 당연하게도 - 슈퍼맨 때문이었다.

수상한 레이저가 정확하게 슈퍼맨에게 쏘아졌고, 막상 레이저를 맞은 뒤에는 더욱 강해진 힘에 펄펄 날아다니던 슈퍼맨이었지만 5분도 지나지 않아 주체할 수 없이 폭발적으로 넘쳐흐르는 힘에 대지가 흔들렸다.


“하하하, 그래! 그거야! 정의의 편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 ‘그’ 슈퍼맨의 손에 직접 이 세계가 박살이 나는 거지!”


가까이 다가갈 수조차 없을 정도로 강력한 힘에 하나 둘 무릎을 꺾여갈 쯤, 어떻게 해서든 슈퍼맨의 힘을 억제한 것은 다름 아닌 원더우먼이었고,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그의 곁으로 뛰어든 배트맨의 모습에 누군가는 숨을 삼켰다. 올가미에 묶여 다가오지 말라고 소리치는 슈퍼맨의 얼굴은 자신에게 다가오는 배트맨의 모습에 더욱 일그러졌고, 히트비전을 어떻게든 억누르느라 실핏줄이 터져 덕지덕지 붉어져버린 흰자위가 흉흉하게 배트맨을 바라보았다. 놀라운 것은 슈퍼맨에게 가까이 다가가는 그 순간까지도 배트맨의 무릎은 멀쩡하다는 것이었고, 조심스럽게 슈퍼맨의 어깨에 팔을 뻗어 손을 올린 순간 울렁거리던 대지가 멈추고 칼같이 불던 바람이 멎었다.


“괜찮나, 클락?”


슈퍼맨, 클락은 굉장히 당황스러운 얼굴로 주먹을 쥐었다 펴기를 반복하며 눈을 깜빡였다.


“안 돼, 이럴 수는 없어!”


그의 계획은 완벽했고, 아마 그가 의도한대로 슈퍼맨의 손에 의해 세계가 파괴되었을 테지만 그가 간과한 것은 슈퍼맨의 주위에 슈퍼맨과 딱 맞는 가이드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이었다.



*



원래부터 배트맨은 이상하게 타인의 시선을 끄는 재주가 있었다. 존재감이라고 해야 할까, 무언가의 아우라 같은 그런 것이 있었다. 원래부터도 그랬는데 그것이 슈퍼맨을 진정시킨 가이드, 라는 수식이 더 붙어 엄청난 수준이 되자 오히려 당황한 것은 슈퍼맨이었다.

그 일이 있은 후 슈퍼맨은 이상할 정도로 배트맨의 눈치를 봤다. 혹 자신 때문에 배트맨이 더욱 곤란해진 상황이 된 것은 아닌가, 더 나아가 만약 이런 상황이 또 벌어진다면, 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이 머릿속에 가득했다. 그나마 슈퍼맨을 조금 기분 좋게 해주던 것은 배트맨의 가이드를 받았던 그 순간의 감각이 너무나도 선명하게 남아있다는 것이었다.


힘이 주체할 수 없이 폭주했던 그 순간은 마치 끝이 없는 낭떠러지에 떨어지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클락은 본능적으로 자신의 힘을 억누르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지 않으면 책상을 짚고 일어나는 것만으로도 책상이 박살나는 것은 물론이요, 누군가와 악수를 할 때 자신도 모르는 사이의 그 사람의 손뼈를 다 으스러트릴 수 있기 때문에. 그 때, 그 순간 배트맨이 자신에게 해주었던 것은 단순히 힘을 억누르고 제어할 수 있게 한 것뿐만이 아니라 가야할 길을 비춰준 것이었다. 본능적으로 힘을 억누를 필요 없이 순수하게 그냥 있는 그대로 존재할 수 있게 해주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느껴보는 감각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너무나 기분이 좋아서.


그 단 한 번의 접촉으로 바로 각인이 될 줄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결과였다.



*



사실 브루스는 자신이 클락과 각인이 되어버렸다는 사실을 일찍부터 알고 있었다. 단지 브루스 스스로가 그 결과에 대해 몹시 당황스러워하는 중이었고, 차마 클락을 더 챙겨줄 만한 여유가 없었기 때문에 어쩌다보니 클락이 자신의 눈치를 보는 상황에까지 와버린 것이다. 단 한 번의 접촉만으로도 각인이 되어버린 센티넬과 가이드, 라. 보통의 사람들이라면 그럴 수 있다지만 그것도 하필 슈퍼맨과 배트맨이라면 조금 신중해질 필요가 있었다.

눈을 감고 조금만 집중하면 클락의 심장소리가 들리는 경험은 신기하지만 불쾌함을 동반하기도 했다. 단순히 클락의 존재가 불쾌했기 때문이 아니라, 앞으로의 일에 대한 노파심과 조바심, 혹은 걱정 때문이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아직 클락은 자신과 확실하게 각인이 되었다는 사실을 모르는 듯 했다. 그렇다고 해서 앞으로 영원히 이 사실을 숨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아무리 클락이 자신의 힘을 제어하는 데 도가 텄다고 해도 센티넬에게는 필연적으로 가이드가 필요했다.

단 한 사람의 센티넬만을 위한 가이드. 브루스 웨인은 로맨티스트라고 할 수도 있었지만 쓸데없는 것에 감상에 젖을 만큼의 여유가 있는 남자는 아니었다. 특히나 그가 배트맨일 때는 더욱 그랬다. 브루스는 문득 모니터에 표시되어있는 날짜와 시간을 확인했다. 이렇게나 시간이 지났으면, 찾아올 법도 하건만. 클락이 브루스에게 첫 번째 가이드를 받은 이후로 열흘의 시간이 지났다. 클락의 심장소리는 들을 수 있었지만 아직까지 클락의 기분을 직접적으로 느낄 수 있다거나 하는 것은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자신이 클락과 한 것은 가벼운 접촉 한 번뿐이었고, 행여 그 단 한번만으로 각인이 되었다 한들 그 이상의 감각적, 감정적 공유는 없었기에. 그렇다고 이 이상 케이브에 가만히 앉아 있기만 하는 것은 클락에게 퍽 못할 짓이기도 했다.



*



“배츠! 오랜만이야.”

“그래, 오랜만이군.”


쏜살같이 달려온 플래시를 보며 배트맨이 넌지시 물었다.


“슈퍼맨은?”

“요새 슈퍼맨이 좀 이상하다니까.”

“이상하다고?”

“그래. 답지 않게 어깨가 축 쳐져있질 않나. 갑자기 벌떡 일어나다가 의자를 박살내지 않나.”

“…….”

“갑자기 아무런 일도 없는데 우주를 쌩쌩 돌아다니면서 날아다니지를 않나. 하여튼 요새 좀 이상… 아, 슈퍼맨!”


플래시 못지않은 속도로 쏜살같이 달려온 슈퍼맨 덕에 바람이 일자 배트맨의 망토가 펄럭였다. 무어라 더 말을 붙이기도 전에 재빨리 배트맨의 팔목을 낚아채 벽으로 밀어붙이는 슈퍼맨을 보며 플래시는 네가 그렇게 사람을 막 휘둘러대면 큰일 나! 라며 경악에 차 소리를 질렀고, 곧 불길한 소리가 나며 배트맨의 얼굴이 와락 구겨졌다. 슈퍼맨의 상태는 그 날과 별반 다를 것이 없어보였지만 그나마 다행인 것은 모든 것을 다 가루로 만들어버릴 만큼의 힘을 쏟아내고 있지는 않는다는 것이었다. 서둘러 플래시가 슈퍼맨의 팔에 매달려 그 팔을 떼어내려 노력했으나 소용없었다.

그러나 플래시도, 심지어 배트맨도 슈퍼맨이 지금 어마어마한 인내심을 발휘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기에 쉽게 다른 사람들도 부르지 못하고 지금 이 선에서 일을 마무리하기를 원했다.


“클락.”


배트맨은 천천히 그의 이름을 부르며 다른 팔로 그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이미 부러진 왼쪽 팔이 끊어질 듯 아팠지만 배트맨의 목소리에 떨림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강하고, 단호하게. 슈퍼맨의 이름을 부른 배트맨은 더욱 세게 끌어안으며 말했다.


“미안하군.”


그렇다고 이렇게 자네를 내버려둬서는 안 됐어. 길고 긴 숨이 이어지며 금방 고른 숨을 되찾은 슈퍼맨은 가만히 배트맨의 어깨에 이마를 묻었다.


“미안, 미안해. 브루스.”



*



배트맨은 왼쪽 팔이 부러지는 부상을 입었고, 슈퍼맨은 요새에 처박혔다. 그곳에 찾아가는 것은 브루스에게도 힘든 일이라 – 그것도 왼쪽 팔이 부러진 상태로는 더더욱 – 특단의 조치를 쓰기로 했다. 케이브에 가만히 선 브루스는 그저 속삭였다.


“당장 이리로 날아오지 않으면.”

“그것만은 참아줘.”

“…….”

“…….”

“내가 뭘 말할 줄 알기는 하나?”

“내가 상상할 수 있는 그 어떤 최악의 말로도 설명을 못하겠는걸.”


여전히 슈퍼맨의 얼굴이라고 하기보다는 클락 켄트의 얼굴에 가까운 모습에는 먹구름이 가득했고, 브루스는 그 모습이 퍽 웃겼다. 대체 언제부터 슈퍼맨이 배트맨의 눈치를 보며 살았나. 클락의 시선은 여전히 깁스를 하고 있는 브루스의 팔에 콕 박혀 있었다.


“일단 내 팔이 이렇게 된 건 자네 탓이 아니라 내 탓이니 제발 눈치 좀 그만 봐.”

“자네 탓이라니? 브루스, 나는…….”

“내 말을 먼저 가로채지도 말고 사람이 하는 말은 끝까지 들어.”

“미, 미안. 그런데 이건 내가 먼저 말해야겠어.”


브루스는 클락의 심장이 조용히, 그러나 세차게 뛰고 있음을 느꼈다. 어쩐지 처음 접촉을 했을 때 보다 더욱 진하게 느껴지는 감각에 브루스는 설마하니 자신의 심장도 마주 뛰고 있지 않을까, 하는 쓸데없는 걱정을 했다. 분위기에 휩싸인다는 말이 있지 않은가. 딱 그 꼴이었다.


“그래, 말해봐.”

“내가, 자네를 책임질 수 있게 해줘.”

“…….”


정말, 전혀 예상치도 못한 말에 브루스는 혹시 그 때의 충격으로 인해 클락이 머리를 어디에 세게 부딪힌 것은 아닌가, 지금 눈앞에 있는 남자가 ‘세계 최강의 남자’ 라는 수식어를 달고 있는 사람이 맞는가에 대해 잠시 고민해 볼 필요가 있었다.


“그건 내가 해야 하는 말 아닌가?”

“내 가이드는 내가 책임져야지.”

“자네가 날 책임져?”


어느 샌가 배트맨의 모습은 어디에 버려두고 브루스 웨인의 얼굴을 한 남자를 눈앞에 두고 클락은 등 뒤로 식은땀이 흐르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기자 월급에, 머리부터 발끝까지 검소함을 두른 ‘클락 켄트’가 ‘브루스 웨인’을?”

“……음, 그건.”

“고작 며칠 얼굴 못 봤다고 자기 가이드 팔을 부러트리는 센티넬이?”

“…….”

“이제 다시 한 번 말해보겠나?”


그제야 클락은 다시금 깨달았다.


“나 좀 책임져 주게, 브루스.”

“좋아.”


죽었다 깨어나도 ‘클락 켄트’는, ‘브루스 웨인’을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센티넬과 가이드, 라는 관계 그 이전에도.

글쎄, 혹 슈퍼맨과 배트맨이라면 또 모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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