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단브랜] 향
1.
이단과의 연애는 순항, 일까. 브랜트는 빼곡히 쌓여있는 서류의 마지막 서명란에 사인을 하며 종이를 넘겼다. 앞으로 사인을 해야하는 50장은 될 것이다. 브랜트는 손목을 코 끝으로 가져갔다. 코 끝에 남는 것은 옅은 스킨 향만 날 뿐이었다. 그래, 스킨 향 뿐. 브랜트는 볼펜을 신경질적으로 내려놓았다. 그 놈의 형질이 뭐라고.
이단과의 연애는 평범하디 평범했다. 브랜트는 그것이 무엇보다 만족스러웠다. 여타 다른 커플처럼 일이 끝나면 둘만의 시간을 보낸다. 보고 싶었던 영화를 다시보기 서비스를 통해 보며 말린 오징어를 씹으며 맥주를 마시는 휴일은 달콤하기 짝이 없었다. 제 옆을 가득 채우는 타인의 온기는 더할 나위 없었다. 이단과 브랜트는 수줍은 이십대가 아니었다. 순수함과는 거리가 먼게 당연한 것이었다. 즐길 수 있을 때 더 많이 즐겨야 하지 않겠는가. 더군다나 언제 이 세상에서 사라져 버릴 지 모르는 사람을 연인으로 두고 있으면 더더욱. 어쨌든 결과적으로 이단과의 연애는 평범했다. 아마, 그가 베타 형질의 사람이었다면 더더욱 평범했을지도 모른다.
브랜트에게는 한 가지 습관이 생겼다. 수시로 자신의 손목에 코를 묻었다. 바짝 예민해진 후각이 자신의 몸에 남아있는 그의 흔적을 찾으려 애썼다. 이단이 알파라서 불만이 생긴 것이 아니다. 자신이 베타이기 때문에 불만이 생겼다. 물론, 이 사실을 이단에게는 한 번도 말한 적 없다. 같은 형질인 벤지에게 털어놓은 게 전부였다.
"그렇게 말해도 나는 모르지만 말이야."
"내 말이."
"그래도 요새 다른 녀석들이 너랑 이단에 대해 떠들고 다니는 걸 보면, 뭐."
"내가 요새 무슨 생각을 하는 줄 알아?"
브랜트는 마치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굴렀다 온 사람처럼 굴었다. 벤지는 그런 브랜트를 보며 어깨를 으쓱여볼 뿐이었다. 이 양반은 매사 너무 심각해서 탈이야.
"말하지 않아도 알 거 같은데."
"솔직히 말해봐. 미친 거 같지?"
"너는 너무 네 자신한테 엄격해. 그렇게 생각할 수 있는게 뭐 어디가 어때서. 우린 베타잖아. 잘난 알파 애인이 생기면 나도 널 붙잡고 그럴 걸."
"하루만 오메가가 되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하루만 오메가가 되고 싶다."
"......"
"그렇지?"
벤지와 눈이 마주친 순간, 브랜트는 숨기지 않고 웃어보였다. 벤지, 넌 정말 괜찮은 친구야. 그걸 말이라고.
"오메가 향이 델리만쥬향이라던데 사실이야?"
"뭐?"
"아니, 아무것도."
SNS에서 그러길래. 브랜트는 뒷말을 삼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도 어김없이 브랜트는 손목 가까이 코를 대어보았지만, 여전히 스킨 향만 날 뿐이었다.
2.
브랜트는 괜찮을 것이라 생각했다. 이단은 함부로 다른 사람에게 눈을 돌리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정말이지 철저하게 헌신적인 애인이었다. 아주 가끔, 그 사실에 마음이 벅차기도 한 걸 보면 꼭 첫사랑을 하던 시절로 돌아간 거 같아 부끄러워졌다. 그래, 문제는 이단이 아니었다. 이단이, 그 존재도 우월한 우성 알파라는 사실이 문제였다. 브랜트는 자신이 형질로 두 번 고민할 일은 없다고 생각했었던 과거의 자신을 발로 차주고 싶었다. 지금도 아주 가끔, 브랜트에게 작업을 거는 남자들이 있긴 하지만 브랜트가 고개를 돌린 순간 모두 절로 꼬리를 내리며 멀어져갔다. 이단은 매번 브랜트의 구석구석에 제 흔적을 남기는 일에 열정을 다했다. 효과 한 번 끝내주네. 그러나 어느 순간, 브랜트는 자신에게 오메가까지 꼬인다는 사실을 알아채고는 신음했다. 이건 내 것이 아니라서요. 아니, 이단은 내 애인이니까 따지고 보면 이것도 전부 내 건 맞는데, 난 알파가 아니라고! 여기까지는 그래, 버틸 만했다. 브랜트는 대단한 인내심을 가지고 있는 스스로를 위로했다. 하지만 그것도 오래가지는 못했다.
- 브라보, 알파에게 문제가 생겼어.
"문제?"
- 어, 음, 그러니까.
"찰리, 뭔데."
음, 어, 그게, 말끝을 흐리는 벤지의 목소리에 복장이 터질 것 같았던 브랜트는 벤지를 다그쳤다.
"찰리."
- 오메가가 꼬였어.
"그게 뭐?"
- 내 생각이 맞다면...
설마, 브랜트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어째서 이런 곳에 그런 오메가가 있는거야? 브랜트는 다급한 손길로 가방을 뒤지기 시작했다. 어떤 미션이든 이런 변수는 생기기 마련이다. 결정적으로 IMF가 오메가 형질의 요원들을 뽑지 않는 이유는 순전히 히트싸이클 때문이었다. 물론 첨단 기술과 생명 과학의 발달이 가져다 준 슈퍼 억제제가 생기기도 했지만 미연에 방지해서 나쁠 것은 없다는 판단이었다. 브랜트는 푸른색을 띈 액체가 들어있는 병을 꺼내들었다. 만에 하나 히트싸이클 기간에 놓인 오메가를 만났을 때를 대비하기 위한 알파용 억제제였다. 부작용이라던가, 그런 것은 없었지만 브랜트는 그런 것들을 쓰기 꺼려했다.
"알파, 들려? 버틸 수 있어?"
- 브라보, 우리가 베타라서 그렇지, 지금 알파는 죽어가고 있을테니까 빨리 가!
"그 정도야?"
- 네가 베타임에 감사해라.
벤지의 말에 브랜트는 앓는 소리를 냈다. 하긴, 알파와 오메가에 대한 지식은 순전히 식자를 통해서만 배운 브랜트였다. IMF에 입사했을 때 간단한 교육을 받기도 하지만 교육은 어디까지나 교육일 뿐이었다. 브랜트는 서둘러 건물 내부로 진입했다. 이렇게 된 이상 모든 플랜을 뒤집어 엎어야 했다. 하, 브랜트는 큰 소리를 내며 웃고 싶은 심정이었다. 제 손으로 제가 짠 계획을 뒤집어 엎다니. 헌리, 당신의 말이 사실이었던 것 같네요. 나쁜 것만 배웠어, 쯧.
원래의 계획대로라면 이단이 건물 안으로 조용히 진입하여 메인 컴퓨터의 정보를 빼오는 것이었지만, 지금은 시간이 촉박했다. 브랜트는 검은 후드를 뒤집어 썼다. 최대한 얼굴을 가리며 최단 루트로 통하는 길목으로 향하며 앞을 가로막는 경비원들을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진압했다. 꽤 오랜만의 현장일이라는 사실만으로 온 몸에 아드레날린이 솟구치는 것 같았다. 아직 쓸만하지? 하며 말하는 브랜트의 귀에 벤지가 웃으며 말했다. 최고야! 눈에 보이는 골목만 돌아가면 바로 이단이 있을 것이다. 브랜트는 최대한 조심스럽게 진입했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잔뜩 젖은 흐느낌이 들리는 것을 애써 무시하며 커브를 돌았을 때, 브랜트는 인상을 찌푸릴 수 밖에 없었다. 다리에 총을 맞은 모양인지 피가 흐르는 허벅지를 제 손으로 감싸며 흐느끼며 울고 있는 작은 체구의 남자를 보며 브랜트는 혀를 찼다. 더러운 새끼들. 브랜트는 반드시 이 건물의 주인을 제 손으로 잡아들여야만 속이 후련할 것 같았다.
"찰리, 20분 뒤에 구조팀 좀 파견해줘."
- 무슨 일이야?
"아니, 네가 말했던 그 오메가. 찾았어. 찾았는데... 민간인 같아."
인이어를 통해 들리는 벤지의 욕설에 브랜트는 인상을 찌푸렸다. 브랜트는 서둘러 남자의 다리를 손수건으로 지혈해 준 뒤 벽에 기댈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조금만 기다려요."
오메가용 억제제는 없다는 사실이 못내 안타까웠다. 하지만 지금은 그보다 먼저 해야할 일이 있었다.
"찰리, 알파는?"
- 아마도 3블록 더 앞에. 거기서 신호는 나오고 있는데 반응이 없어.
브랜트는 서둘러 벤지가 알려준 대로 발을 옮겼고, 왼쪽 커브길을 돌려던 순간 불쑥 자신의 팔을 잡아당기는 강한 힘에 중심을 잡지 못하고 그대로 넘어졌다. 바닥에 굴러다니는 쓸데없는 소모품들이 등에 부딪히며 요란한 소리를 내었다. 숨을 들이키며 정면에 총을 겨눈 브랜트는 차마 다 삼키지 못한 숨을 그대로 토해냈다.
- 브라보, 괜찮아? 무슨 일이야?
"아, 괜찮아. 알파를 찾았어. 금방 미션 끝내고 나갈게. 넌 먼저 탈출 준비해."
- 괜찮지?
"괜찮아."
애써 쿵쾅거리는 심장을 다독이며, 브랜트는 자신의 어깨에 얼굴을 묻은 이단의 뒷머리를 천천히 쓰다듬었다. 평소와는 다르게 비정상적으로 높은 체온과 흐트러진 숨소리가 브랜트를 잔뜩 긴장시켰다. 브랜트는 서둘러 팔목 안 쪽에 넣어두었던 억제제를 꺼내어 장치를 해체하고는 이단의 목 뒤에 바늘을 꽂았다. 찰랑거리는 푸른 액체가 금방 다 녹아드는 것을 보고 브랜트는 조심스럽게 이단을 달랬다. 잔뜩 상기되어 있는 두 뺨을 감싸며 그의 이름을 부르며.
"괜찮아, 이제 다 괜찮아."
브랜트는 엉망이 되어버린 이단의 입술을 손가락으로 쓸었다. 브랜트의 손 위로 자신의 손을 올리며 시선을 맞추는 이단을 보며 브랜트는 쓰게 웃었다. 입술 만큼이나 엉망이 되어버린 손에는 잇자국이 잔뜩 나 있었다. 피가 흘러나올 정도로 자신의 손을 처참하게 짓씹은 이단을 보며 브랜트는 조심스럽게 이단에게 키스했다.
"그래, 잘 참았어."
이단의 눈의 초점이 돌아올 때까지 한참을, 브랜트는 이단을 달래었다. 다행스럽게도 미션은 이미 성공한 후였다.
3.
오메가의 호르몬에 반응하는 것은 지극히 본능적인 것으로... 브랜트는 방금 읽은 문장을 붉은색 펜으로 밑줄을 그었다. 베타는 오메가와 알파의 그 어떤 호르몬에도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그건 그렇지. 어느새 브랜트가 들고 있던 책은 하이스쿨에 다니는 학생의 것과 같이 변해 있었다. 아주 드물게, 우성 알파와 지속적으로 관계를 맺은 베타의 형질이 오메가로 변한 사례도 보고되고 있다... 흠, 베타가 오메가로... 뭐?
"...뭐해?"
"아, 깼어?"
잠에 잔뜩 취한 눈을 애써 뜨며 몸을 일으키는 이단을 보며 브랜트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 다행이다, 깨어나서. 이단은 그 날 이후 이틀 내리 잠만 잤다. 혹시 약에 대한 부작용은 있던 것은 아닌건지, 브랜트는 의료팀과 지원팀을 달달 볶아대었고, 한동안 IMF는 뿔난 수석 분석요원 밑에 힘겹게 굴러갔다. 본능을 이기는 일은 무척이나 어렵고 힘든 일입니다, 라는 그다지 만족스럽지만은 않은 답변을 얻어내고 나서야 얌전해진 브랜트는 사후 처리에 힘썼다.
"쉽게 배워보는 형질학...?"
"나는 베타니까."
"그게 뭐?"
"히트싸이클이니, 오메가니, 알파니. 그런 건 아무것도 몰라. 공감도, 이해도 못해. 그러니까... 이런 일이 또 생기면 그 땐 내 심장이 남아나질 않을 거 같아서 미리 공부해두려고."
그래야 네 바가지도 내가 안 긁을 거 아냐. 엄한 오메가한테 눈 돌린다고. 브랜트의 말에 이단이 미소 지었다. 임무 중에 자신에게 관심을 보이는 오메가는 수도 없이 만나봤지만, 이렇게 히트싸이클을 겪는 오메가를 본 것은 이단도 처음이었다. 모든 것을 집어 삼키는 무시무시한 본능에 정신이 아찔해졌다. 지금도 그 때만 생각하면 온 몸에 소름이 돋는 것 같았다.
"나, 실수했어?"
"아니."
브랜트의 말에 이단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여보았다. 그러나 자신을 보는 브랜트의 표정이 그리 좋아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은 이단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브랜트?"
"모르겠어."
"뭐가?"
"어쩔 수 없는거니까, 본능이라니까. 차라리 네가 이렇게 쓰러져있는 것보다는 그냥, 뭐. 그렇다고."
"안 그럴거야."
"이단."
"너 말고 다른 사람은 안기 싫어."
정 안되면 제 팔이나 다리를 총으로 쏠 준비까지 하고 있었다. 그나마 피가 날 때까지 손을 물어 뜯으며 버티던 중에 브랜트가 왔으니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분명 총을 쐈을 것이다.
"그건 너도 싫잖아."
"......"
"그러니까 표정이 그 모양이지. 싫은 말을 애써 하려고 노력하지마."
"...그래."
이단의 말에 후련한 얼굴로 돌아온 브랜트를 보며 이단은 손을 내밀었다. 브랜트는 지금 애 같이 구는 거냐며 타박하면서도 팔을 뻗어 이단의 손을 마주 잡았다.
"네가 베타라서 나도 힘든 거 알아?"
"왜?"
"네 앞에서는 '알파' 라는 이름의 매력은 도통 쓸모가 없어지거든. 소용이 없잖아. 그래서 순전히 '이단 헌트'의 매력으로만 승부를 봐야해. 무슨 뜻인지 알겠어?"
푸하, 드물게 큰 웃음을 터트리는 브랜트는 곧 의자에서 일어나 이단이 누워 있는 침대 옆에 자리를 잡았다. 브랜트는 천천히 이단의 손목을 들어올리고는 코를 가까이 대었다. 이단은 브랜트에게 그러한 습관이 생겼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한참을 그렇게 이단의 살결에 코를 묻고 있던 브랜트는 이단의 손목에 입을 맞추며 말했다.
"너무 매력적이라서 어쩔 줄을 모르겠네."
이단은 그 어떤 오메가보다도, 눈 앞에 서 있는 베타의 향이 이 세상에서 가장 달콤하다 확신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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