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R15.. 라고 말이나 할 수 있나. 이거.
비가 오지게도 오는 날이었다. 신기한 게 그렇게 비가 많이 오면서 기운이 우울하거나 착잡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교복 소매, 바짓단까지 너나 할 거 없이 잔뜩 말아 올리고 양말도 신지 않은 채로 신은 검은색 슬리퍼 차림을 한 토마스와 민호는 하늘만큼 칙칙한 검은색 장우산을 나눠쓰고는 발걸음을 옮겼다. 혹시라도 민호의 어깨가 젖지는 않을까 노심초사하며 우산을 기울이던 토마스를 보며 민호는 피식, 바람 소리를 내었다.
“꼴사나워, 저리가.”
“넌 내가 너 좋으라고 하는 짓도 막 욕하더라. 섭섭하게.”
“난 네가 지켜줘야 하는 계집애가 아니거든?”
“계집애는 아니지만 내가 지켜줘야 하는 사람은 맞지.”
불만스럽다는 듯 토마스를 올려다본 민호는 알았다는 듯 손을 내저으며 토마스의 옆으로 한 걸음 더 바짝 붙었다.
“민호.”
“왜, 영화나 드라마 보면 다 이러던데. 싫어?”
“아니.”
“단호박 같은 새끼….”
구멍이라도 뚫렸나, 중얼거리는 민호의 말에 토마스는 가만 가만 고개를 끄덕이는 것 외에는 딱히 할 말이 없었다. 이럴 때는 뉴트처럼 말주변이 좀 더 많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곧 도착지는 다가오는데 토마스의 머릿속은 뒤죽박죽이었다. 그 고민들은 오늘이 금요일이라는 것에부터 비롯되었다. 오늘이 하필 금요일만 아니었어도 토마스는 생각조차 못했을 법한 일이었다. 그런데 하필, 하필 금요일이라 그런다. 토마스는 내심 기대를 조금이라도 걸어볼 법 하지 않은가, 하며 스스로를 다독였다. 열여덟. 물론 성인은 아니지만 그래도 알 건 다 아는 나이인데. 혼자 푸는 건 그만하고 싶었다. 명색이 연인 사이라면 좀.
“…다 왔네.”
이런 저런 생각을 하는 사이 벌써 민호의 집 앞에 도착해버리고 말았다. 우산은 원래 토마스의 것이었음으로 민호는 얼른 현관문 앞으로 달려 나갔다. 그런 민호를 붙잡지도 못한 손이 처량하게 바닥으로 떨궈졌다.
“……그럼, 갈게.”
“…….”
침묵이 조금 길었나. 영 부자연스러운 자신의 행동에 토마스는 스스로를 질책했다. 이상하게 보였을 거야. 이번 주도 처량하게 집에서 혼자 보내야겠구나, 아아, 트리사. 나 또 병신 짓 했나봐, 어쩌지. 축 처진 어깨를 들 생각도 못하고 토마스는 뒤를 돌았다.
“야.”
“…응?”
“자고 가.”
“…….”
안 그래도 큰 토마스의 눈이 더 크게 동그래졌다. 토마스가 예상한 대사는 두 가지였다. 전에 잠깐 봤던 tv프로그램에서 그러던데 집에서 라면을 먹고 가지 않을래, 라고 묻거나 비가 오는 날, 비가 너무 많이 오네… 하며 자연스럽게 집 안으로 유도하는 것이 그린라이트라고 했었단 말이다.
“두 번 말 안 해, 병신아.”
토마스는 그대로 들고 있던 우산을 떨어트렸다.
그는 종종 착각할 때가 많았다. 사실 화끈하긴 저보다 그가 더 화끈했다.
*
대충 먼저 씻으라며 화장실 안으로 밀어 넣어진 토마스는 거울 속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며 볼을 꼬집었다. 화끈하게 달아오르는 뺨이 이것이 꿈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야.”
“으악!!!”
“…미친, 목소리는 존나 더럽게 커. 이거.”
품으로 던져진 것을 받아든 토마스는 놀란 토끼눈을 한 채로 뒤를 돌았다. 새하얀 면 티와 검은색 바지는 모던하고 심플한 것을 좋아하는 그의 성격과 한 치의 어긋남도 없었다. 얼른 씻고 나온 토마스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들여다보았다. 키는 토마스가 조금 더 클지는 몰라도 어깨라던가 몸집은 민호가 훨씬 …좋긴, 좋았다. 뭐, 이건 사실이니까. 토마스가 나오자 소파에 앉아있던 민호도 옷을 챙겨들고는 화장실로 향했다. 거실에는 이미 tv가 틀어져 있었기 때문에 토마스는 민호를 기다리는 동안 조금 심심함을 달랠 수 있다는 생각에 안심했다. 그렇게 생각한 것도 잠시 토마스는 조금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오늘은 금요일이니까. 내일은 토요일이고. 어차피 부모님은 일 때문에 바쁘셔서 집에 안 계시니까 전화할 필요 없고…. 온갖 이상한 생각을 하던 토마스는 그대로 양손으로 얼굴을 덮어버리고는 소파 위로 엎어졌다. tv에서 뭐라고 지껄이는 지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지금 중요한 것은 토마스가 민호의, 그러니까 애인의 집 소파에 앉아있다는 것이었다. 물론 민호의 집에 온 게 처음은 아니었지만 그때랑 지금이 어찌 같을 수 있을까.
달칵, 화장실의 문이 열리고 토마스는 얼른 몸을 일으켜 세웠다. 머리에 수건을 얹고 나오는 민호도 토마스와 똑같이 하얀 티에 회색 바지를 입고 있었다. 가끔 민호의 집에 놀러왔을 때 종종 봤던 모습이었지만 오늘은 조금 달라 보이는 분위기에 토마스는 침을 삼켰다. 달라 보이는 건 민호가 아니라, 민호를 보는 자신의 시선임이 분명함을 토마스 스스로도 자각은 하고 있었다. 자각만. 민호가 소파에 앉자 토마스의 심장이 벌렁벌렁 뛰는 것 같았다. 이런 기세로는 마라톤도 거뜬히 뛰고 올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었다. 분명 민호가 쓴 것과 같은 샴푸나 비누를 썼을 텐데, 이상하게 민호에게서 나는 향이 더 진했다. 물론, 자신은 벌써 샤워를 한지 15분이나 지났다는 사실도 아주 잘 알고 있었지만 말이다. 토마스는 민호의 머리 위 수건을 걷어 내었다. 촉촉하게 젖은 머리카락에서 물방울이 떨어져 내렸다. 뭐냐는 듯 쳐다보는 민호의 얼굴에 토마스는 수건으로 민호의 머리카락을 말려주기 시작했다. 거의 물기를 다 털어내고 나서야 토마스는 민호와 눈을 맞췄다. 쌍꺼풀 없는 장난기 넘치는 눈가 밑 두툼한 애교 살에 토마스는 절로 웃음이 났다.
토마스는 손에 쥐고 있던 수건을 바닥으로 떨어트렸다. 조심스럽게 민호의 뺨을 쥔 토마스는 그대로 민호의 입술에 제 입술을 맞대었다. 그런 토마스의 행동에 민호는 살며시 눈을 감고는 토마스의 손에 자신의 손을 겹쳤다. 부드럽게 입을 가르고 들어온 토마스가 장난스럽게 민호의 혀를 건들이자 그런 토마스의 행동에 입 꼬리를 말아 올린 민호가 장난치지 말라는 듯 토마스의 손등을 쳤다. 나름 복잡한 마음과 설렘이 겹쳤던 첫 번째 키스와는 다르게 이제는 본능적으로 더 깊은 것을 원하는 토마스의 마음을 이해한다고 말하기라도 하듯 민호는 부드럽고 익숙하게 토마스에게 맞춰주었다.
그때 민호의 발에 툭 하고 뭔가가 닿았다. 귀찮다는 듯, 방해가 될 것 같아 차버린 그것이 바닥으로 추락하며 둔탁한 소리를 냈다. 그러자 그때까지만 해도 언젠가 했던 예능프로그램의 재방송이 뚝 꺼지더니 큰 화면 가득 살색 가득한 스크린으로 가득 차는 것이 아닌가. 교태 가득한 여자의 신음소리에 토마스의 행동이 뚝 멈추고 말았다.
“…미안.”
민호는 리모컨을 차버린 자신의 발을 원망했다. 자연스레 민호의 몸 위에 올라타고 있던 토마스가 저 멀찍이 멀어지더니 가장자리에 다리를 모으고는 양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삭 덮어버리는 게 아닌가. 민호는 작게 시발을 외쳤다. 기껏 분위기 타나 했더니 빌어먹을, 다 말아먹었다.
“…미안합니다.”
“아니, …그 내가 미안해.”
조용해진 집 안에 신음소리는 여전히 흘러넘쳤다. 아니, 저걸 꺼야겠다는 생각은 들겠는데 지금 막상 움직이기가 영… 아, 모르겠다. 민호는 머릿속이 터져버릴 것 같았다. 자존심도 자존심이고 한 번 보기 좋게 말아먹은 분위기 때문에 다시 뭔가 하기에는 아닌 것 같았다. 하지만 또 섣불리 일어날 수가 없는 것이,
…섰다.
“…시발.”
보기 좋게 살짝 부푼 제 앞섬을 보니 민호는 머릿속이 새하얗게 질리는 것 같았다. 애인 새끼 눈앞에 두고 화장실에서 처량하게 처리해야하는 이 처지는 또 무슨 개 같은 처지인가. 민호는 신경질 적으로 토마스에게 리모컨을 던졌다.
“끄던가.”
민호의 목소리에 놀란 토마스는 동그란 눈으로 민호를 쳐다보았다. 민호는 한숨을 내쉬었다.
“아니면 계속 하던가.”
검지를 까딱이며 저를 부르는 민호의 모습에 토마스는 딸꾹질이 날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렇지만 또 다른 의미로 토마스는 심장이 요란하게 뛰고 있는 것을 느꼈다. 혀로 입술을 축이는 그 모습에 토마스도 똑같이 마른 입술을 핥았다. 토마스는 긴 팔을 뻗었다. 순식간에 민호의 발목을 잡아 끌어내린 토마스는 그대로 민호의 위에 올라타 그의 입술을 집어 삼켰다. 이젠 tv에서 뭐가 나오든 상관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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