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Impossible Mission Force, 통칭 IMF. 브랜트는 단 한 번도 조금 부끄러운 이 조직의 풀네임을 입 밖으로 꺼낸 적이 없었다. 서류의 맨 첫장 떡하니 찍혀있는 IMF의 로고를 바라보고 있던 브랜트는 곧 다시 펜을 들었다. 아직 처리해야하는 서류가 산더미 같았다.
2.
통계적으로 이 세상 인구의 절반은 뮤턴트라고 부르는 초능력자들이다. 뮤턴트들의 능력의 기원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초능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과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 단순히 A와 B로 나뉘어질 뿐이다. 본래 이 세상은 힘을 가진 자가 힘을 가지지 못한자를 지배하려는 본능적인 욕구를 지니지만, 그것도 다 옛날 이야기다. 요즘은 누구나가 다 먹고 살기 힘들다. 오죽하면 청년 실업률이 하늘을 찌르겠는가. 아, 이건 다른 이야기.
뮤턴트들의 능력은 사람마다 발현되는 경우가 조금씩 달랐다. 크게는 선천적 뮤턴트와 후천적 뮤턴트로 나눌 수 있는데, 선천적 뮤턴트에는 유전으로 능력을 물려받은 모든 경우가 해당된다. 후천적인 경우는 또 다시 두 가지로 나누어지는데, '누군가에 의한 강제적인 능력 발현'과 '계승'이 있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전자는 실험, 약물복용 등으로 억지로 능력을 개방한 경우고 후자는 자신의 능력을 타인에게 물려준 경우에 해당된다.
브랜트는 선천적으로 능력을 물려받은 뮤턴트였다. 어머니는 평범한 인간이었지만, 아버지는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어마어마한 능력을 가졌다고 하는데, 브랜트는 그것이 어머니의 과장이 섞인 러브스토리의 결과는 아닌지 진지하게 고려해봐야 했다. 남들처럼 평범하게 교육과정을 다 마치고 평범한 기업의 회사원을 꿈꾸던 브랜트는 대학교 졸업 이후 바로 CIA로 편입되었다. 이게 무슨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소린가, 싶다가도 그 다음날부터 얼떨결에 CIA에 출근 도장을 찍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브랜트는 실소를 터트렸다.
능력을 가지고 있는 뮤턴트의 대부분은 국가 소속 연합, 기관 등으로 편입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물론 평범한 기업에 취직해서 잘 먹고 잘 사는 경우도 많다. 억만, 아니 조만장자 토니 스타크도 뮤턴트지만 평범하게 - 아니, 평범하지는 않나? - 스타크 인더스트리에서 떼돈을 벌고 있으니 말이다. 국가 기관의 인구 비율은 뮤턴트가 월등히 많았다. 그들이 악착같이 뮤턴트들을 국가 기관으로 편입시키는데에는 이유가 있다. 이 세상에 이름 한 번 날려본 범죄자들의 거의 대부분이 뮤턴트였기 때문이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던가. 뮤턴트가 저지른 범죄는 뮤턴트가 처리해야만 했다. 하긴, 그래야지. 뮤턴트의 능력은 천차만별이다. 그 중에는 분명 별 볼일 없는 능력도 있었지만 단 한번에 사람의 목숨을 앗아갈 수 있는 능력도 많았다.
브랜트는 CIA의 현장요원직으로 발령 받았다. 화려하고 튀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그의 성격과는 다르게 브랜트의 능력은 화려한 편이었다. 염동력. 브랜트가 가지고 있는 초능력의 종류였다. 직접 손을 대지 않고도 자신의 의지대로 사물을 옮길 수 있는 능력. 브랜트는 자신의 능력이 꽤 마음에 들었다. 누군가는 이 능력을 이용해 어떤 범죄를 어떻게 저지를 지 고민할 판에, 브랜트는 가만히 입을 벌리고 칫솔을 움직여 이빨을 닦는데 쓰곤 했다.
브랜트가 IMF의 존재를 알게 된 것은 CIA에 입사한 지 7년이 되었을 적이었다. 나름 현장직에서 활약하고 있는 브랜트에게 IMF가 스카웃 제의를 한 것이었다. IMF는 CIA와 비슷하면서 달랐다. 그들은 훨씬 더 위험하고 중대한 일을 다뤘고, 거의 모든 요원이 뮤턴트라고 알려져있다. 따지고 보면 CIA나 FBI에서 양성된 뮤턴트 요원들을 쏙쏙 채간다고 타 기관들에게 미운털이 콕콕 박힌 조직이라는 소문이 허다했다. 그럼에도 IMF가 그렇게 뻔질나게 CIA에 모습을 비출 수 있는 이유는 애초에 CIA에서 훌륭한 성과를 이룬 뮤턴트를 스카웃하는 게 IMF의 일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결정하는 것은 그 사람의 몫이다. 원하지 않는다면 쭉 CIA에 남아있어도 상관은 없었다. 그러나 브랜트는 IMF로 이직했다. 단순히 연봉이 더 높다는 이유였다. 브랜트가 이직을 하던 날, CIA의 현장 총괄 팀장은 심심찮게 브랜트를 갈구었다. 그깟 돈 때문에 의리를 저버려! 브랜트는 코웃음쳤다. 그럼 월급 더 주시던가요. 팀장은 말이 없었다. 모르긴 몰라도 브랜트는 자신의 역량을 이 세상의 그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이었다.
3.
그리고 브랜트는 딱 3년 뒤, 자신의 선택을 미치도록 후회했다.
4.
IMF에 입사하고 가장 먼저 한 것은 테스트였다. IMF는 철저하게 능력 계급사회라는 소문이 자자했다. 첫 입사 때 받는 뮤턴트 테스트에서 얻은 점수로 요원의 등급이 나뉜다는 것이다. 등급이라는 것은 원래 높을 수록 좋은 대우를 받는 것이 당연했다. 그러나 브랜트는 나이에 비해 사회 생활에 대해 빠삭하다는 게 흠이라면 흠이었다. 브랜트는 아주 적당한 수준으로 테스트를 통과했다. 한 마디로,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브랜트의 등급은 A-였다. 그래도 A네. 그 때만 해도 몰랐다. IMF의 80% 이상이 A등급 요원이라는 것을. 그러나 브랜트는 딱히 별다른 감흥은 없었다. 등급에 대한 욕심은 없었다.
브랜트는 전에 다니던 CIA와는 다르게 IMF의 정보, 분석부로 발령받았다. 브랜트의 능력은 철저하게 현장에서 훨씬 더 유용한 능력이었으나 A등급이기에 분석부로 발령했다는 것이 상부의 판단이었다. 브랜트는 순순히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이 세상에 같은 능력을 가진 사람은 꽤 많이 존재하는 법이었다. 같은 IMF내에 염동력을 가진 사람만 벌써 다섯 손가락을 채웠다. 그것도 같은 입사 동기들 중에서 말이다. 브랜트는 그들 중 4번째였다. 가장 뛰어난 염동력을 지닌 요원의 이름은 린지였는데, 그녀는 돌연 무척 기쁘다는 얼굴로 그 '이단 헌트'에게 교육을 받게되었다며 동기들을 한 바탕 뒤집어놓았다.
"이단 헌트?"
"모르니?"
모른다며 고개를 끄덕인 브랜트는 동기들의 모임이 흡사 이단 헌트의 팬미팅이 된 것은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모든 이들이 하나같이 입을 모아 그를 찬양하는 것을 새겨들었다. 그를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IMF의 기둥이자, 존재 의의. 그 어떤 불가능한 미션도 성공해내는 전설적인 현장요원이라는 말이 대부분이었다. 브랜트는 마치 어머니가 아버지의 능력에 대해 이야기를 해주었을 때와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뮤턴트 한 사람을 위해 조직이 존재한다고? 그게 가능한가?
아무튼, 그 날은 린지를 축하하기 위해 모인 자리였다. 당사자가 그렇게 좋다는 데 찬물을 끼얹어봤자 좋을 것은 하나도 없었다. 브랜트는 자신과 같은 능력을 가지고 있는 린지의 성공을 기원했다.
5.
린지가 죽었다.
6.
"브랜트."
"네, 국장님."
"나랑 같이 가줘야 할 일이 있을 것 같네."
브랜트는 국장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브랜트는 서둘지 않고 천천히, 느리지만 확실하게 한 발자국 씩 승진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그리하여 브랜트는 최연소 치프 분석요원이라는 타이틀을 거머쥐었고, 국장의 수행원이 되었다. 브랜트의 등급은 여전히 A등급이었다.
요즘들어 IMF가 시끌시끌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소문으로는 대통령이 고스트 프로토콜을 발동시켰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설마. 브랜트는 고개를 저었다. 이제와 IMF가 해체된다면, 무슨 일이 벌어날 지는 아무도 몰랐다.
"대통령께서 고스트 프로토콜을 발동하셨네."
성질 같아서는 욕이라도 한 마디 하고 싶었으나 브랜트는 참아야만 했다. 옆에는 IMF의 현 국장이 자리를 잡고 있었고, 브랜트의 맞은편에는 '그' 이단 헌트가 앉아있었다.
"윌리엄 브랜트입니다."
그럴 줄 알았다면, 브랜트는 국장을 따라 그 벤에 오르지 않았을 것이다.
7.
한 조직의 수장이 사살당한 일은 역대 최악이었다.
8.
"다시 한 번 정식으로 소개하죠. 윌리엄 브랜트, A-등급 분석 요원입니다."
이단은 굳이 제 등급을 강조하는 브랜트를 바라보았다. IMF에서 등급은 곧 직함이고, 미미해졌지만 아직까지는 남아있는 계급 사회의 신분이었다. 누가 뭐래도 이 팀의 리더는 S+등급인 자신임이 틀림 없는데. 다른 요원들에게 과시하고 싶은가, 하면 또 그것은 아닌게 엄연히 이단의 팀에서 브랜트의 등급은 가장 낮은 등급이었다.
A등급은 총 4가지 등급으로 또 나뉜다. A-, A, A+, A++. 쓸데없이 A++까지 만들어 놓은 데에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다. IMF의 80%가 넘는 요원이 A등급의 요원이었으니 그들을 또 나눌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참고로 벤지는 A++등급, 제인은 S- 등급의 요원이었다. 그런 사람들 틈에 A- 등급의 요원이 제 등급을 과시한다? 고려해 볼 가치도 없는 이야기였다.
등급을 강조하며 인사를 건넸던 것 외에도, 이단은 브랜트에게 점점 더 의문을 가지게 되었다. 브랜트는 종종 눈에 띌 정도로 이단을 바라보았고, 이단은 그것이 분석 요원의 습관과도 같은 것이라 생각하며 넘겼지만, 벤지가 그의 시선이 부담스럽지 않냐며 물었을 때는 다시금 돌이켜 봐야 했다. 그러나 이단은 곧 브랜트가 왜 그렇게 자신을 관찰하려 들었는지 알 수 있었다.
"린지는, 훌륭한 요원이었습니다."
그렇죠? 이단은 눈 앞으로 떠오르는 머그컵을 보며 조심스레 고개를 끄덕여보았다. 그 이름은, 이단의 가슴 속에 드물게 남아있는 상처의 이름이었다.
9.
이단은 무너지기 직전의 건물을 바라보며 숨을 삼켰다. 보통 이단이 맡는 임무는 극단적인 경우가 많았다. 주로 범인들을 사살하여도 좋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는 그런 임무들. 그러나 오늘은 상황이 전혀 달랐다. 폭발이 일어난 건물은 IMF의 모든 염동력 뮤턴트들이 동원되어 붕괴를 막고 있었고, 그 건물 안에는 아직 수십명의 민간인이 남아있었다. 구출, 임무라. 이단은 자신이 얼마만에 구출 임무를 맡게 되었는지 가늠해보려다 포기했다. 그럴 시간도 부족한 상황이었다.
브랜트 또한 염동력 뮤턴트였기 때문에 현장으로 불려나갔고, 무너지는 건물을 지탱하는 하나의 기둥 역할을 맡게 되었다. 그 사이 이단과 제인 등의 현장요원들이 민간인을 구출하는 임무를 맡았다. 대략 주어진 시간은 약 25분. IMF의 염동력 뮤턴트라고 해봤자 브랜트를 포함해 단 7명 뿐이었다. 급하게 다른 정부 기관들에 염동력 요원들의 파견을 요청했지만 그들이 시간에 맞춰올 수 있을지는 확언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런 건 어벤져스에게 시켜야 하는 거 아니에요?"
"글쎄, 바쁜가보지."
이단의 말에 제인은 코웃음을 쳤고, 진입 사인과 동시에 전속력으로 건물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이단 헌트의 능력은 복합적 신체 강화 능력이었다. 기타 다른 신체 강화형 뮤턴트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월등하게 높은 재생력을 가지고 있는 세포능력은 그를 전설적인 현장요원의 자리에 앉혀주기에 충분했다. 이단은 심장에 총을 맞았던 날을 떠올렸다. 그건 다시 생각해도 정말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아무튼 요점은, 이단은 심장에 총을 맞고도 죽지 않는 유일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IMF의 존재 의의가 이단 헌트라는 말은 100% 과장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이단이 불사신인 것은 아니었다. 단지 세포의 재생능력이, 세포가 죽는 속도보다 빠르기에 그가 지금까지 걸어다닐 수 있는 것이다.
가령, 100M를 2초에 뛸 수도 있다. 물론 그 다음에는 터질 것 같은 심장을 달래주어야만 한다. 이렇듯 모든 뮤턴트들의 능력은 무한정인 것이 아니며, 전지전능하지도 않았다. 대체적으로 뮤턴트들은 일찍 단명했다.
"후."
이단은 제 멋대로 요동치는 심장을 진정시키기 위해 천천히 심호흡을 했다. 벌써 온 몸에 땀이 가득찼다. 붕괴하기 직전의 건물을 어떻게든 유지시키고 있는 요원들도 곧 그 힘이 다할 것이다.
"얼마나 남았어?"
- 3분도 안 남았어. 이단 곧 탈출해야해.
"정 아니면 뛰어내릴게. 남아있는 민간인은?"
- 생체신호는 더 이상 잡히지 않는데 확신할 수는 없어. 그게...
"벤지, 말해."
- 엄마를 찾아달라며 아이가 울고 있기는 하지만... 내 말 잘 들어, 이 아이 엄마가 이미 예전에 탈출했을지 아닐지는 아무도 모르는 법이야. 너도 이제 나와야만 해. 브랜트도 더 이상 못 버틴다고 그랬다고.
그러니까 이제 그만 나와, 이단. 이단은 벤지의 말에 소리내어 웃어보였다. 괜찮아, 나 안 죽어. 태연한 이단의 목소리에 아무 말 없이 건물을 지탱하는 데에만 집중하던 브랜트의 의식이 한 순간 흐트러졌다.
- 이단, 나와요. 이제 정말 한계야.
"엄살 떠는 거야, 브랜트?"
- 로니가 쓰러졌어요. 이제 정말 무리라고요! 이 건물을 받치고 있는 요원은 날 포함해봤자 이제 다섯도 안 돼요. 이대로는 30초도 못 버틴다고요!
가쁜 숨을 몰아쉬는 브랜트의 목소리를 들으며 이단은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30초만 더 버텨봐. 브랜트는 욕을 내뱉었고, 이단은 또 다시 소리내어 웃었다. 이단은 서둘러 건물의 모든 곳을 돌아다녔다. 혹시라도 찾아보지 않은 곳이 있는 것은 아닌지. 사람의 목소리를 놓친 것은 아닌지. 그리고 그런 이단의 노력은 한 사람의 생명을 더 구할 수 있었다. 이단은 정신을 잃은 중년 여성의 몸을 안아들고는 재빨리 박살난 창문의 근처로 왔다.
"있어, 던진다!"
- 뭐? 있어? 아니, 자, 잠깐만! 비행팀!!
이단은 망설임 없이 그녀의 몸을 밖으로 떨어트렸다. 민간인 구조의 가장 근본적인 원칙이다. 구출은 현장팀이, 인수는 비행팀이 맡는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이단도 같이 건물에서 탈출하려던 순간, 짚고 있던 건물의 바닥이 와르르 무너지며 시야가 가라앉았다.
- 이단, 이단!!
절규와도 같은 브랜트의 목소리에 이단은 신음했다. 커다란 콩크리트 덩어리에 짓뭉개진 다리에 감각이 없었다. 쯧, 이단은 혀를 찼다. 산산조각이 난 다리는 30분도 지나지 않아 재생이 될 게 뻔했지만 이렇게 짓눌린채로는 재생이고 뭐고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이단은 머리가 둘로 쪼개질 것 같은 고통에 시야가 반짝였다. 상처가 재생된다고, 아픔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이단은 그 모든 것을 아무렇지 않은 척 '견디는' 훈련을 받았을 뿐, 그것이 실제로 고통을 줄여주는 것은 아니었다.
- 이단, 들려요?
"...들려."
- 이제 건물을 지탱하고 있는 요원이 셋 뿐이에요.
"그래, 알았어. 가."
- 뭐...?
"가라고."
이단은 조금씩 몸을 비틀어 적당히 숨을 쉴 수 있을 만한 공간은 만들어내었다. 다행인 건 누워있는 이단의 등을 다 품을 수 있을 정도의 틈이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곧 있으면 CIA와 FBI의 염동력 뮤턴트들이 도착할 것이다. 실신해버린 IMF의 요원들 대신, 그들이 이 건물을 들어올리면 이단은 충분히 희망적으로 구조될 수 있었다. 뭐, 죽지는 않으니까.
- ...하.
"브랜트."
- 짜증나.
뭐? 이단이 그게 무슨 뜻이냐며 되묻기도 전에 엄청난 진동과 함께 지반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무슨 일이야! 벤지의 비명소리와 더불어 시끄럽게 귀를 찌르는 고함소리에 이단은 표정을 구겼다. 인정사정없이 흔들리는 건물더미에서 콘크리트 조각과 모래들이 쏟아져내렸다. 그러나 곧, 거짓말처럼 모든 소음이 사라졌다. 모든 구조물들이 허공에 떠오르는 느낌과 동시에 이단의 몸도 저절로 허공으로 뜨기 시작했다. 자연스럽게 콘크리트 덩어리들 사이에 낀 다리가 빠져나왔고, 어마어마한 고통과 함께 부러지고 조각난 모든 상처들이 재생되기 시작했다. 서둘러 현장으로 진압한 비행요원팀에 의해 건물 더미의 바깥으로 빠져나온 이단은 믿을 수 없는 광경에 혀를 내둘렀다. 장장 7명이 달라붙어 받치고 있던 건물을 홀로 지탱하고 서 있는 브랜트를 보며 이단은 무사히 그들이 발을 디디고 서 있는 지면과 같은 곳에 발을 붙였다.
"브랜트."
이단은 자신과 시선을 맞추는 브랜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천천히 브랜트가 허공에 뻗은 손을 아래로 내리자 박살난 건물의 모든 파편이 지면으로 떨어지기 시작했고, 이내 모든것이 무너져 내리며 굉음과 함께 먼지가 날렸다. 이단은 그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괜찮냐는 벤지의 목소리도, 대체 이게 어떻게 된거냐는 또 다른 요원의 말도.
그저, 브랜트가 단단히 화가 났다는 사실만 인지할 수 있었다.
10.
윌리엄 브랜트는 A-등급의 요원에서 S+ 등급의 요원으로 등급이 변경되었다.
그는 순순히 입사 테스트 때 성심성의를 다 하지 않은 것에 대해 자백했다.
11.
그 뒤로 이단은 사흘동안 브랜트를 볼 수 없었다. 마지막으로 이단이 본 브랜트는 자신에게 어마어마할 정도로 화가 나 있었다. 건물 붕괴사건 이후로 브랜트의 이름은 쉼 없이 IMF의 내부에서 오르락 내리락 했다. S+등급의 요원은 IMF 내부에서도 손에 꼽았다. 그런데 정작 당사자가 그 사건 이후로 자취를 쏙 감춰버려 의아해하던 찰나 벤지에게서 연락이 왔다.
"여보세요."
- 지금 당장 의무실로 와, 빨리.
다급해보이는 벤지의 목소리에 이단은 서둘러 의무실로 달려갔다. 그리고 그곳에는 그렇게 오매불망 찾아다니던 브랜트가 침대 위에 누워있었다. 사해얗게 질린 피부와 보랏빛이 다 된 입술을 보며 이단은 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며 벤지를 다그쳤고, 벤지는 다짜고짜 이단에게 물었다.
"너 O형이지?"
"맞아."
"빨리 와서 수혈이나 해 줘, 혹시 알아. 네 피는 적혈구나 백혈구도 뛰어나서 더 좋을지."
이단은 더 이상 묻는 것을 그만두기로 했다. 그저 브랜트의 곁에 앉아 벤지에게 팔을 내줄 뿐이었다. 움푹 꺼져버린 볼과 눈이 안 그래도 늘 인상을 쓰고 있는 그의 얼굴을 이상하리만치 초라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이제 무슨 일인 지 설명해주겠어?"
피도 제공해주는데. 이단의 말에 벤지가 고개를 저었다. 능숙하게 이단의 팔에 바늘을 꽂은 벤지는 자리에 앉아 팔짱을 끼며 말했다.
"말도 마. 지금까지 브랜트가 토해낸 피가 콜라병으로 다섯병은 족히 될 거야."
그 날, 화려한 신고식을 거친 뒤 브랜트가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피를 토해내는 것을 벤지가 발견하지 않았으면 브랜트는 그대로 사망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하긴, 무리했잖아. 혼자서 그 건물을 들었다고. 그리고 절대로 너는 부르지 말라고 한 걸 내가 불렀으니 이제 난 또 욕을 듣겠지. 오래 살겠어, 아주 오래. 은근히 말투가 평소와는 다르게 날이 서있다는 것을 깨달은 이단은 넌지시 벤지에게 시선을 던졌고, 벤지는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정말 모르겠어? 이단, 넌 우리한테 사과해야해."
"사과?"
"그래."
"다시 생각해봐, 너 브랜트나 내가 그 상황에 놓여있다고 하면 어떡할건데?"
"그거야 당연히 구하러-"
"그래, 바로 그거다."
이단은 벤지의 말에 동의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어보였고, 벤지는 내 그럴 줄 알았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넌 너무 네 목숨을 쉽게 보는 경향이 있다니까. 나머지는 브랜트한테 물어봐, 곧 깨어날 거 같으니까. 확실히 네 피가 더 좋은 거 같긴 하다."
자리에서 일어나는 벤지를 보며 이단은 벤지를 붙잡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으나, 그러지 않았다.
12.
이단은 의식을 되찾은 브랜트에게 실컷 얻어 맞았다.
주먹이나 손바닥이 아닌 온갖 날붙이들로. 이래서야 원, 서커스가 다 무서워질 지경이었다.
13.
사과의 의미로 이단이 타온 커피를 마시며 브랜트는 아무 말 없이 자신의 팔에 꽂힌 바늘을 노려보았다. 이단은 사람 좋은 얼굴로 웃어보이며 브랜트의 곁에 앉았다.
"꺼져."
"영영 얼굴 안 볼거야?"
"CIA로 돌아갈까봐."
"이미 늦었어, 브랜트. S+급 요원을 IMF가 놓아줄리 없잖아."
꼬박꼬박 붙이던 높임말도 한 번에 떼어낸 브랜트를 보며 이단은 어깨를 으쓱여보았다. 이단은 브랜트에게 새로 작성된 브랜트의 신상 보고서를 건네주었다. 브랜트는 이단에게서 받아든 보고서를 받아들고는 한숨을 쉬었다.
"그냥 A- 등급으로 돌아가고 싶은걸."
"브랜트."
"왜."
"날 왜 구한거야?"
이단의 물음에 브랜트는 아무런 표정도 지어보이지 않았다. 이전처럼 화가 난 표정도, 뭣도 아닌 무표정으로 커피잔을 내려다보던 브랜트는 이단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처음 IMF에 들어왔을 때, 나는 이단 헌트가 누군지 모르는 A- 요원이었지. 그래, 이거 내가 일부러 그런거야. 귀찮은 일 하기 싫어서 대충 봤어, 테스트. 아무튼 린지는 S급 요원이었고. 곧 너에게 교육을 받게 되어서 너무 기쁘다며 모든 동기들에게 술을 샀지. 알고 있겠지만 나는 린지랑 같은 입사 동기거든. 그 날 나는 처음으로 너에 대해 알았어. 차마 내 입으로는 할 수 없는 부끄러운 수식어들을 주렁주렁 잘도 달고 다니더라."
"내가 원해서 붙여달란 거 아니야."
브랜트가 돌연 웃음을 터트렸다. 이단은 진심으로 브랜트에게 억울하다며 항의하고 있었고, 브랜트는 어처구니 없다는 얼굴로 웃었다.
"네 프로필을 봤어."
"어떻게?"
"너랑 한 팀이 되기 전까지 전 국장님 수행원이었던 거 몰라서 물어? 넌 현장에서 발품팔고 난 뒤에서 캐내는게 일이었잖아."
이단은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여보았다. 이단의 모든 신상 정보 및 보고서 등은 같은 S+ 등급의 요원이 아닌 이상은 열람조차 할 수 없도록 설정되어 있을것이다. 그러나 국장의 권한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지는 법이다.
"아프다며. 그, 재생될 때 말이야."
브랜트의 말에 이단은 고개를 끄덕여보았다. 요원들이 신상 보고서를 숨기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그 곳에는 그들의 약점이 고스란히 적혀 있었다. 이단이 브랜트에게 건네준 그의 신상 보고서에도 마찬가지였다. 몇 천, 몇만 톤이 넘는 물체를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고 옮길 수 있다는 능력에 부여된 리스크는 장기 손상이었다. 중력을 거스르는 일이 고스란히 몸의 부담으로 이어진 것이다. 이렇듯, 뮤턴트의 신상 보고서에는 그들의 모든것이 담겨 있었다. 이단의 것도 마찬가지였다. 생긴 상처가, 생기지도 않았던 전처럼 완벽하게 복원은 되나 고통은 변함이 없다. 그리고 세포가 재생되는 과정에서 체온이 극도로 높아져 장기들이 까맣게 타버린다. 물론 그것도 다시 재생된다.
"맞아, 아프지. 그걸 견디기 위해 훈련을 받았고."
"그래서 그랬어."
아픈 건 싫잖아. 죽는 것과는 별개로 말이야. 이단은 물끄러미 브랜트를 바라보았다. 브랜트는 적당히 미지근해진 커피가 마음에 드는 모양인지 호로록 소리를 내며 마셨다.
14.
브랜트는 무사히 퇴원했다.
15.
브랜트는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어, 그 동안 아버지의 능력을 의심해서 미안하다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