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안 쓴지 너무 오래돼서 재활치료라도 할 겸
이단 헌트는 어린애가 아니었다. 순간의 감정에 휩쓸려 다닐 사람이 아니라는 뜻이다. 스스로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도 있었고, 주변의 평도 그러했다. 다소 욱하는 성질이 있기는 했으나 그건 어디까지나 필요에 의한 호승심 정도로 치부하고 있다. 그러나 요즘은 그런 평이 무색할 정도로 아주 쉽게 갈팡질팡하고 있는 제 모습을 보며 이단은 쓰게 웃었다. 눈 앞에 펼쳐진 광활한 바다 위 덜렁 놓여진 작은 조각배 하나. 이단은 스스로가 이렇게까지 내몰린 적이 있나, 싶을 정도로 아주 잠깐이지만 고민에 빠졌다. '고민'은 이단 헌트와 어울리지 않는 단어 중 하나다. 이단은 자신을 그렇게까지 내모는 존재가 더 있을 줄은 몰랐다. 그러니까, 그녀 이후로.
- 오늘도 쓸데없는 짓 하기만 해봐.
"너무 딱딱하게 구는 거 아냐?"
- 헌트.
음, 조금 화가 났나. 이단은 속으로 웃음을 삼켰다. 예쁘게 말린 입꼬리를 브랜트가 보고 있었다면 아마 멀쩡하게 서 있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이봐, 브랜트."
- 왜?
"만약 오늘 내가 보고서대로 일을 마치면 뭘 해줄거야?"
인이어 너머로 무겁게 내려앉는 침묵에 이단이 웃음을 터트렸다. 이단은 충분히 브랜트의 모습을 그려낼 수 있었다. 오늘은 무슨 색 셔츠를 입었냐고 물었을 때 옅은 푸른색 셔츠를 입었다고 대답해주던 멋드러진 목소리가 떠올랐다. 넥타이는, 브랜트는 딱히 화려한 것을 좋아하는 편은 아니었으니 무난한 것일테고, 진한 블랙톤이 섞인 네이비칼라의 수트려나. 난처하게 웃고 있을 정보 분석부의 상황실이 떠오른 이단은 애써 터져나오는 웃음소리를 지우려 하지 않았다. 그들은 이미 IMF의 전설적인 현장 요원이 사실은 못난 일곱 살 악동이라는 사실을 그와 같이 한 첫번째 임무부터 알고 있을 터였다. 이단은 예상되는 모범 답안을 입모양으로 말해보았다. 보고서대로 해야하는 건 원래 원칙이고, 그래야만 하는 건데 무슨 거지같은 말을 하는 거야? 말을 마치고는 또 혼자 키득거리느라 바쁜 이단의 인이어는 여전히 조용했다.
"...브랜트?"
이상하게 침묵이 길어지는 탓에 이단은 혹시 브랜트가 신경성 혈압 이상으로 인해 쓰러져버린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물론 아주 쓸데없는 걱정이다. 미약하지만 아주 깊은 한숨소리가 들렸다.
- 뭘 원하는데?
아, 이건 예상 못했는데. 이단은 하마타면 손에 쥐고 있던 총을 떨어트릴 뻔했다. 대신 안전장치를 해제한다는 게 도로 걸어버려 다시금 해제하는 수고를 들여야만 했다. 거의 체념한 것과 같은 목소리에 이단은 드물에 말을 잇지 못했다. 곧 들어가야해! 경쾌한 벤지의 목소리에 이단은 퍼뜩 정신을 차리고는 말했다.
"나랑 데이트하자."
- ......흠.
"벤지가 재밌는 영화가 개봉했다고 그러던데. 영화관 앞에 새로 오픈한 레스토랑 세트 메뉴가 썩 괜찮대."
- 그 녀석은 언제 또 거길 간 건데?
"글쎄?"
음, 이것도 역시 예상 못한 거야. 이단은 원래 계획적으로 행동하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어느정도 제 머릿속에서 그림이 그려질 정도의 판을 즐겼다. 가볍게 총을 쥔 손을 돌린 이단은 두 개의 입구 앞에서 서성였다. 왼쪽은 브랜트가 지시한 곳, 오른쪽은, 그냥 이 쪽으로 가면 좋을 것 같다는 그런 감.
- 참 잘했어요, 도장을 찍어주는 것도 내 일이라면.
이단은 두 번 망설일 것도 없이 왼쪽으로 몸을 틀었다.
"제발 지급된 장비 좀 도로 가져오라는 말을 하기에도 지치네요."
한숨을 내쉬며 첫번째 서럽을 연 큐는 그 속에 빼곡히 쌓여있는 빈 종이를 꺼내들었다. 애초에 본드가 장비를 도로 가져올 것에 대한 기대는 저버린 지 오래였는지, 정말 서랍 가득 비어있는 하얀 A4용지가 빼곡히 채워져있었다. 익숙한 듯 시말서 폼을 실행한 큐는 본드에게는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그 안의 내용을 빼곡히 채워나갔다. 어차피 본드가 장비를 잃어버리거나, 버리고 오는 경위는 거기서 거기라 전 시말서의 내용을 은근슬쩍 복사하여 붙이면 될 것이지만 이 모든 보고서를 읽는 M이 여간 깐깐한 게 아니었다. 안 그래도 요새 MI6가 미운털이 하나씩 박히고 있어 예산 확보에 어려움이 있다는 것을 이 요원이 알고 있으려나 몰라.
"큐."
"...보고 끝나셨으면 가셔도 돼요."
더 이상 할 말 없는데요, 라는 분위기를 풀풀 풍기는 어린 청년의 마른 등을 보며 본드는 손톱만큼의 미안함이 들기는 했다. 일부러 버리고 오는 것이 아니었지만 어쩌다보니 항상 큐가 지급해준 장비들은 늘, 언제나 본드의 손을 떠나 있었다. 그렇기에 본의 아니게 큐를 조금 더 괴롭게 만드는 본드는 큐브랜치의 공공의 적이나 다름 없었다. 특기가 부활인 전설적인 현장요원 더블오세븐의 처지가 큐브랜치에 들어서는 순간 밉상에 지나지 않으니 누가 들으면 퍽 웃긴 이야기였다. 하긴, 그것도 다른 누구도 아닌 큐이기에 가능한 일일지도 모르는 법이다. 어쨌거나 이 어린 청년, 쿼터마스터는 이 큐브랜치의 수장이자 그들 모두의 직속 상관이나 다름없었으니 말이다.
"그러고보니 내일 건강검진있는 거 아나?"
본드의 입에서 '건강검진'이라는 말이 나오자마자 큐브랜치에 야속하다는 듯한 탄성이 울려퍼졌다. 굳이 떠올리고 싶지 않은 사실을 떠올리게 해 준것에 대한 작은 원망이니라. 본드는 그런 큐브랜치를 둘러보더니 옅은 미소를 지었다. 예의 여자들이 껌뻑 죽는다는 그 매력적인 얼굴로 말이다.
"네, 있죠. 건강검진이라는 탈을 쓴 요원 자격테스트요."
"과외라도 해줄까?"
생각도 못했던 말에 큐는 슬쩍 본드를 바라보았다. 여전히 읽기 힘든 그의 표정에 큐는 본드가 대체 무슨 의도를 가지고 그러는 지 이해할 수가 없다는 얼굴을 해보였다.
"내일 사격 테스트에서 제일 점수가 낮은 더블오 요원보다 높은 점수가 나오면 다음 미션에서 무조건 장비를 수습해오겠네."
순간적으로 반짝이는 큐의 눈빛에 본드는 기어코 깊은 웃음을 내보이고 말았다. 이 어린 청년의 머릿속에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너무 뻔히 보였으니 말이다. 딱히 큐를 무시하려는 생각은 없었으나, 그에게 동기를 부여해주는 것은 좋은 의도라고 자기 합리화의 과정을 거쳐 뱉은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루어졌던 사격 테스트에서 제일 낮은 점수는 97점이었다. 애초에 더블오 요원이 100점 만점을 받지 못한 것이 웃음거리, 혹은 문제가 될 수 있는 소재였으나 7점도 적을 쓰러트리기만 하면 그만이긴 했으니 가볍게 넘어갈 수 있는 문제이기도 했다.
큐는 가만히 본드를 바라보았다. 본드는 그것이 승낙의 표시라고 생각했다.
▩
"96점, 이라."
이번에 새로 더블오섹션에 배치된 요원의 점수였다. 본드는 당연하다고 말할 필요도 없이 만점을 기록했고, 다른 요원들도 비슷한 수준이었다. 본드와 큐의 기묘한 내기는 어느새 MI6에 쫙 퍼지고 말았다. 사실은 사실이니 아니라 해명할 필요도 없었고, 이 일로 인해 큐가 망신을 당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애초에 하지 않았다. 본드는 왠지 모르게 그 날 보았던 큐의 눈빛을 잊을 수 없었다. 그 때부터 본드는 가능한 그 젊은 쿼터마스터의 뒤를 캐보았지만 워낙 높은 보안레벨 - 아무래도 그가 직접 설정한 방화벽- 때문에 번번히 막혀버려 나름 애를 먹었다. 큰 내기에는 구경꾼도 많은 법이었다. 어느새 시험장이 바글바글 해질 정도로 소문을 듣고 온 요원들을 보며 본드는 MI6도 참 한가한 조직인 것 같다며 웃었다. 그들과 다르게 큐브랜치 요원들의 표정은 대부분이 울상이었다.
애초에 현장 요원들과 데스크 요원들의 상성은 별로 좋은 편이 아니었다. 모든 임무에 현장 요원과 데스크, 즉 서포트 요원이 한 명씩 팀을 이루어 작전을 수행함에도 불구하고 그 두 직함의 차이는 여간 쉽게 극복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아서라, 본드와 큐만해도 그에 걸맞는 완벽한 표본이라고 할 수 있었다. 전설적인 더블오 요원인 제임스 본드와, MI6 최연소 쿼터마스터의 조합은 상상하기에도 무서울 정도라는 소문이 돌 정도였다. 하긴, 본드는 큐와 처음 만난 날을 떠올리며 미소 지었다. 그 큰 배는 어찌된 영문인지 잊혀지지 않았다.
"재밌나보군."
"한가하십니까?"
"가볍게 무시할 수 있을 만한 소문이 아니라서 말이지."
제일 잘 보이는 곳에 자리를 잡은 말로리를 보며 본드는 팔짱을 꼈다. 그 사이에 모든 준비가 끝난 모양인지 큐는 사격대에 섰다. 사격대 위에 올려진 총을 슬쩍 바라본 큐는 기록을 하고 있는 요원을 불렀고, 요구사항을 전달했다. 그는 큐의 요구사항을 수락했고, 사격대 위에 있던 총을 싹 치우기 시작했다.
"뭐하는 거지?"
"총을 바꾸고 싶다고 했답니다."
"총을?"
태너의 말에 말로리는 의외라는 얼굴을 해보였고, 태너는 곧 큐의 이름으로 등록된 총기 자료를 보여주었다.
"총이 있어? 쿼터마스터에게?"
의외의 사실에 태너에게서 건네받은 총기 허가 자료를 슥 훑어보는 동안 규칙적으로 울리는 총소리에 본드는 고개를 들었다. 여덟발의 총성은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가벼운 심호흡과 함께 큐가 빈 탄창을 내려놓으며 새로운 것으로 바꿔끼는 동안 시험장에는 적막한 침묵이 돌았다. 그 누구도 함부로 입을 벙긋할 수 없는 분위기였다.
"여덟발에 78점."
"저 친구 쿼터마스터 맞습니까?"
"이제까지 007의 뒤를 커버해 준 쿼터마스터 큐 요원이 맞네만."
큐는 98점이라는 점수를 기록했다.
▩
큐브랜치의 모든 요원들의 얼굴에 웃음꽃이 가득폈다. 그도 그럴것이, 자신들의 수장인 쿼터마스터가 아주 시원한 융단폭격을 현장 요원들 사이로 떨어트린 탓이었다. 큐는 아주 당연하다는 듯 행동했고 믿지 못하겠다는 듯 고개를 젓는 요원들을 보며 한 쪽으로 치워둔 시험용 총을 들어 다섯발을 더 쏘았다. 다섯발에 49점. 표적의 중앙은 거의 너덜너덜해져 있었다. 아까와 비슷한 수준으로 우수한 성적에 누군가는 탄성을 내두르는 동안 큐는 헤드셋을 벗으며 웬일로 안경을 빼고 렌즈를 낀 눈으로 본드를 빤히 바라보았다. 본드는 그제야 큐에게 걸었던 내기가 떠올랐다. 다음 미션에서는 무슨 일이 있어도 장비를 회수해와야만 했다.
"체력 점수는 형편없는데 사격을 그렇게 잘 한다고?"
"욕이에요, 칭찬이에요?"
그도 그럴것이 전반적인 큐의 테스트 결과는 아주 상극을 띄고 있었다. 큐브랜치 요원들은 전용 IT시험에서는 기하급수적인 점수와 속도를 기록하며 그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영역에 들어섰으면서 체력 테스트는 일반인보다 아주 조금 나은 수준이었다. 그것을 증명하기라도 하든 뻐근한 어깨를 빙빙 돌리며 본드의 손에 있던 테스트 결과 서류를 확 채간 큐는 꽤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설마 한 입으로 두 말하진 않을거죠?"
"그래, 알았어."
그제서야 큐의 얼굴에 의기양양한 미소가 떠올랐다. 본드는 다른 의미로 아주 조금 당황스러웠다. 저렇게 활짝 웃는 얼굴을 본적이나 있던가. 본드가 기억하는 큐의 얼굴은 나이에 맞지 않게 늘 찌푸린 고약한 표정들 뿐이었다. 저렇게 웃으니 꼭 제 나이 같아보이거나, 훨씬 어려보였다. 그러고보니, 나이가 몇이더라. 스물 일곱? 여덟? 본드는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어리긴 어리군.
"콜트?"
"M1911이요."
"뭐라고 새겨져 있나?"
"사랑하는 이에게."
큐는 아예 본드에게 자신의 총을 건넸다. 척 보기에도 관리가 잘 된 멋드러진 총에는 큐의 말대로 새겨져있었다. 사랑하는 이에게, 홈즈.
"...홈즈?"
"형이 준 거예요."
"퀜틴 홈즈라."
본드의 말에 큐는 드물게 기가막히다는 얼굴로 본드를 바라보았다. 어떻게 알았어요? 아까 총기 허가증 봤어. 잘 어울리는 이름이야.
"MI5에 있었나?"
"잠깐이요. 형이 좀 도와달라고 해서."
"그 형이 마이크로프트라고 하면 큐브랜치가 뒤집어지겠군."
"갑자기 나한테 왜 그렇게 관심이 많아요?"
불만스럽게 톡 쏘는 큐를 보며 본드는 예의 그 멋드러진 미소를 지으며 큐의 콜트를 다시 그의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갑자기라니, 서운한 걸. 나는 원래 내 쿼터마스터에게 관심이 많았어. 네가 모르고 있었을 뿐이지."
내일 네 앞으로 택배 하나 올테니 잘 쓰게. 할 말만 끝내고 훅 사라져버리는 본드의 뒷모습을 보며 무슨 택배냐고 묻기도 전에 큐는 다시금 본드가 한 말을 되새겨 볼 필요가 있었다. 애석하게도, 큐는 그 의미를 아주 나중에서야 알아차렸다.
▩
Dear. My Quartermaster.
James. B
다음날, 큐의 앞으로 배달된 콜트에는 그렇게 새겨져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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