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혼자서 차를 몰고 달리는 고속도로의 풍경은 꽤 브랜트의 마음에 들었다. 새벽같이 차를 몰고 나온탓에 이제 막 얼굴을 드러내는 태양을 보며 브랜트는 선글라스를 꼈다. 오픈카를 타고 달리는 젊음의 패기는 없어도 좋다. 그냥 활짝 문을 열어놓고 적당히 교통법규에 걸릴듯 말듯 아슬아슬한 속도로 달리면 어느새 마음이 뻥 뚫렸다는 사실을 자각하게 된다. 그러나 그것이 꼭 오랜만에 나선 드라이브 때문이라는 법은 없었다. 열심히 달리던 자동차를 도로의 한 귀퉁이에 세웠다. 다리가 무거워졌다. 브랜트는 이상하리 만치 어두운 하늘을 창 밖으로 올려다봤다. 해가 뜨다가 만 것이다. 곧 흐린 구름이 잔뜩 몰려들었다. 툭, 정확히 브랜트의 뺨으로 떨어진 빗방울에 브랜트가 희미한 미소를 짓는다. 우는구나, 그래. 브랜트는 서둘러 차의 창문을 모조리 닫았다. 거세진 빗줄기가 창문을 따라 흘러내린다. 그것은 누구의 눈물일까. 브랜트는 씁쓸하게 읖조렸다. 그녀의 눈물인가. 그는 눈물과는 어울리지 않는데. 아니, 그래도 그녀와 관련된 일이라면 그라도 눈물을 흘리겠지. AM 6:19. 브랜트는 자신의 핸드폰으로 걸려온 전화를 무시했다.
▩
"브랜트가 전화를 안 받아."
벤지의 착잡한 목소리에 이단은 평소와 같은 표정을 지으러 노력했지만 여전히 이어지지 않는 전화에 하마타면 핸드폰을 집어 던질 뻔 했다. 그러나 그는 가까스로 이성을 부여 잡았다. 브랜트는 다섯 살 짜리 꼬마가 아니다. 그는 충분히 똑똑하며, 이성적이다. 이상하게 오늘따라 그 사실을 무시하는 머리에 이단은 가만히 눈을 감았다. 아침부터 재수없게 내리는 비가 울적함을 더 불러 일으키는 것 같은 기분이다.
"여보세요, 브랜트?"
환희에 찬 벤지의 목소리에 이단은 저도 모르게 벤지의 핸드폰을 뺏어 들었다. 뭐하는 거냐며 자신을 바라보는 벤지를 보며 이단은 가만히 쉿, 하고 읊조릴 뿐이었다.
"브랜트."
- 이상하네, 벤지한테 걸려온 전화였는데.
"어디야?"
- 오늘부터 휴가인 거 몰랐어요? 꼭두새벽부터 쉬러왔어요. 왜 아무도 내가 휴가라는 사실을 몰라?
핸드폰 너머로 실없이 웃는 브랜트의 목소리에 이단은 갈팡질팡했다. 아무 일 없다면 다행이지만. 그 말이 계속 입 안에 맴돌았다.
- 혹시 '견우와 직녀' 알아요?
"알아."
- 그럼 오늘이 그 둘이 만나는 날이란 것도 알아요?
이단은 얼른 달력을 확인했다. 기구하게도 그 자리는 브랜트의 자리였으며, 엄연히 '윌리엄 브랜트'의 달력이 놓여 있었다. 음력 7월 7일. 오늘의 날짜에 동그랗게 표시되어 있는 파란색 원을 보며 이단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래서?"
- 내가 아는 사람 중에 견우가 있어요.
"......"
- 견우가 있으니까 당연히 직녀도 있죠.
"브랜트."
- 그런데 왜 두 사람은 만나지 못할까요? 까마귀도 있는데.
푸흐, 작게 웃는 브랜트의 웃음소리에 이단은 당장이라도 소리를 지르고 싶은 마음이었다. 이단은 멍청이가 아니었다. 브랜트가 하고 싶은 말이 어떤 건지 정도는 아주 쉽게 알 수 있었다.
- 까마귀 날개가 부러져서 그런가.
"너 어디야, 당장 말해."
애석하게도 브랜트의 위치는 추적이 불가능했다. 대체 어떻게 조치를 취해놓은 건지는 몰라도 그 사실 하나만으로 이단의 속은 뒤집어지기 일보직전이었다.
- 이단.
"...듣고 있어."
- 일 년에 하루 뿐이에요. 두 사람이 만날 수 있는 건.
그리고 그 날, 나 같은 까마귀는 필요 없어요. 그 후 바로 끊어진 전화에 이단은 아무말도 하지 못했다. 이상하게 머릿속이 새하얬다. 이상하게도.
▩
미련하긴. 브랜트는 홀로 남겨진 차 안에서 박장대소를 터트렸다. 그렇지 않으면 지금 당장이라도 시속 180을 달리다가 어디에 박아버릴 것 같은 기분이었다. 브랜트는 창 밖으로 보이는 호텔을 올려다봤다. 휴가를 이런 식으로 보내는 것도 나쁘진 않지. 브랜트는 대충 싼 짐 가방을 들고는 호텔로 들어갔다. 반갑게 인사를 하는 프론트의 직원을 보며 브랜트는 능청스럽게 인사했다.
"혹시 818호 있을까요?"
브랜트의 물음에 직원은 잠시 기다리라 말했다. 브랜트는 천천히 로비를 둘러보았다. 그 때도 이렇게 생겼었지. 저기 소파는 이번에 새로 들인건가.
"올해도 오셨네요."
직원의 말에 브랜트는 조금 놀란 눈치였지만 희미하게 웃어보일 뿐이었다. 간단한 체크인 서류를 작성하고 있는 틈에 얼른 브랜트에게 키를 넘겨준 직원을 보며 브랜트는 모든 비용을 현금으로 지불하며 말했다.
"기억하신다는 게 놀랍네요."
"매 년 오시잖아요. 그럼 기억할 수 밖에 없죠."
"비밀입니다?"
"그럼요."
브랜트는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브랜트는 천천히 한 걸음, 한 걸음 818호로 향하는 발걸음을 내딛었다. 아까보다 훨씬 무거워진 다리에 엘리베이터 앞에서 문 앞까지 도착하는데 얼마나 걸릴지 가늠조차 되지 않았다. 지금 자신이 움직이고 있는 건지에 대한 확신도 없었다. 이제까지 브랜트가 겪었던 수많은 일 중, 유일하게 브랜트의 다리를 잡아끄는 것은 하나뿐이었다. 이상하지, 미련하고. 브랜트는 가볍게 심호흡을 한 뒤 방 문을 열었다. 깔끔한 방 안을 둘러보며 브랜트는 한숨을 쉬었다. 그 날도 이랬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브랜트는 바로 앞의 모퉁이 뒤, 새하얀 침대에도 아무것도 없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다행스럽게도, 침대 위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비는 여전히 내리고 있었다.
▩
"그냥 휴가 갔다면서? 국장님한테도 확인 했어. 1박 2일. 길어질 거 같으면 2박 3일까지."
확실히 그 브랜트가 아무런 말도 없이 훌쩍 휴가를 떠났다는 사실이 조금 이상하긴 했지만, 이단이 이렇게까지 반응을 할 줄은 몰랐다. 평소의 이단과는 무척이나 다른 모습에 당황한 것은 제인과 벤지였다. 이상하게 루터는 평소와 똑같이 행동했다.
"칠석, 오늘이 칠석이지."
"칠석이요? 견우와 직녀가 만나는 날?"
'알타이르성과 베가성이 만나는 날이지."
"낭만도 없어?"
가볍게 쏘아 붙이는 제인을 보며 벤지는 어깨를 으쓱여볼 뿐이었다.
"그게 뭐, 중요한 날인거야?"
"브랜트가 임무를 실패한 날."
"......"
"그럼..."
줄리아가, 벤지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이단은 태연한 척을 하려 애썼다. 줄리아가 살아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은 자신과 브랜트 뿐이었다. 미안하다며 위로의 말을 전하는 벤지를 보며 이단은 혼란에 빠졌다. 그녀를 지키겠다는 결심을 한 순간부터, 이단의 마음 속에 그녀의 존재는 마치 귀중한 보물상자와도 같은 그런 느낌이었다. 열어보고 싶지만 함부로 열어서는 안되는 그런, 그런 존재. 처음에는 보물상자를 단지 묻어둬야 한다는 사실이 너무 힘들었다. 얼마든지 열어볼 수 있고, 가질 수 있었는데 이제는 그러지 못한다는 박탈감과 허무함이 이단을 집어삼켰다. 그러나 이단은 그런 감정에 익숙한 사람이었다. 박탈감, 허무감, 슬픔. 그 모든 것을 단 며칠만에 묻어버려야만 하는 사람이었다.
그렇게 숨겨둬야만 하는 상자를 왜 굳이 브랜트가 들춰내려고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에게도 줄리아가 죽었다고 거짓말을 한 것에 대한 복수일까. 한 번 잊어버리는 것은 쉬워도 두 번 잊어버리는 것은 어렵다. 그러나 이단이 혼란스러운 이유는 따로 있었다. 깊숙하게 묻혀있던 상자가 꺼내어졌어도, 그 상자를 열어볼 생각보다 그 상자를 꺼내어 자신에게 열어보라 하는 그에게 먼저 마음이 움직였다.
이단은 가만히 신음했다. 그가 의도적으로 자신에게 복수를 했으리라 생각할 수는 없었지만, 실로 이보다 더 괴로운 일은 없었다. 자칫 잘못하면 상자가 두 개가 되어버릴지도 모른다. 이단은 그 사실이 무서워졌다.
"이단?"
"...가봐야겠어."
서둘러 재킷을 챙겨 회의실을 나가버리는 이단을 보며 그 누구도 뭐라하는 사람은 없었다.
▩
브랜트는 한참을 가만히 침대에 누워 있었다. 딱히 잠이 오는 것도 아니었고, 잠이 올 것 같지도 않았다. 비는 어느정도 그쳤는지 선선함과 물기가 가득한 바람이 불어오는 것을 지켜봤다.
매년, 한 해도 빠짐없이 브랜트는 매년 이 호텔을 찾았다. 이단과 줄리아가 묵었던 방을. 눈을 감으면 그 날의 기억들이 머릿속에 둥둥 떠다닌다. 행복하게 웃으며 케이크에 불을 붙이며 축하를 하던 두 사람의 모습이나, 그런 그들을 보며 한 편의 부러움을 내비쳤던 그들이나. 브랜트에게 있어서 그 모든것은 아픈 손가락이다. 실제로 줄리아가 죽지 않고 멀쩡히 살아있다는 사실과는 관계가 없었다. 브랜트는 팀원을 잃었고, 자신의 능력을 의심해야만 했고 그것은 충분히 괴로웠다. 일주일은 총도 들지 못했다. 브랜트는 스스로가 그렇게 나약할 줄은 몰랐다. 사람은 누구나 실수를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그 범주에 자신은 포함되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그 때까지만 해도 충분히 행복해보였던 그들의 평화를 깨버린 것은 자신이라는 생각에 잠을 자지 못했다.
이단에게 모든 사건의 진실을 들었을 때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왜 자신에게까지 거짓말을 했는지에 대한 화도 나지 않았다. 그러나 그 뒤로 며칠간은 무기력하게 살아있는 송장 같았다. 그 사실을 들키지 않으려 부단히 노력도 했다.
이게 다 오늘 비가 와서 그래. 브랜트는 애써 스스로를 위로해본다. 가뜩이나 심란한 마음에 쏟아지는 빗줄기는 푸석해진 마음을 촉촉하게 적셔주지 못하고 아프게 때리곤 한다. 다 흡수하지 못한 물줄기가 넘쳐 흐른다. 브랜트는 그 사실이 괴로웠다. 스스로를, 스스로가 통제할 수 없는 그 상황이 미치도록 싫었다. 이단에게 견우와 직녀의 이야기를 해준 것도 홧김이다. 그리고 지금와서야 후회하고 스스로를 욕한다. 왜 그랬냐, 멍청아. 브랜트는 고민했다.
그 순간,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브랜트는 깜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나며 베개의 뒤를 살폈으나 총이 있을리가 만무하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바짝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그러나 금방 방문자의 모습을 확인하고는 당장에라도 비명을 지르고 싶었다.
- 여기 있는 거 다 아니까, 문 열어.
브랜트는 8층에서 뛰어내릴까 진심으로 고민했다.
"여긴 어떻게 알았어요? 왜 왔어?"
- 문 열어주면 대답해줄게.
"그러니까 더 열기 싫은데요."
- 브랜트, 진심으로 말하는 건데 내가 문을 열고 싶지 않아. 네가 열어주길 바래.
농담도 못해. 브랜트는 떨리는 손을 애써 감추며 천천히 문을 열었다. 지금 이 상황에 절대로 보고 싶지 않은 인물 0순위에 올라가 있는 사람이 눈 앞에 있다는 사실이 절망적이었다. 문을 열었지만 이단은 문 안으로 들어오지 않았다. 그저 가만히 그 자리에 서서 브랜트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여긴 어떻게 알았어요?"
"네가 갈만한 곳은 다 뒤져봤어. 네 집, 은신처, 별장 등 전부."
"...그럼 왜 왔어요?"
"네가 직녀 찾아가라며. 그래서 찾으러 왔잖아."
브랜트는 진심으로 질색이라는 얼굴을 내비치며 뒤로 물러섰다. 지금 그게 말이 되는 소리입니까? 사무적인 태도로 돌아가버린 브랜트를 보며 이단은 슬쩍 어깨를 으쓱였다.
"그 날, 줄리아를 떠내보낸 건 내가 스스로 선택한거야."
"......"
"네가 내 선택까지 모조리 떠안을 필요는 없어. 이 일에 더 이상 네 감정을 소비하지 마."
이단은 꽤나 신중하게 말을 고르고 있었다. 브랜트가 그 일에 얼마만큼이나 매달려 있는지, 그간 얼마나 괴로움에 파묻혀 살았는지는 그의 얼굴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브랜트에게 처음으로 줄리아가 살아있었다는 말을 했을 때 그가 내비친 것은 일종의 사막의 오아시스 같은 것이었다. 그 정도로 브랜트는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깊은 곳에 파묻혀 있었다. 한 편으로는 그런 브랜트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대체 무어라고 이 일에 그렇게까지 매달리나. 그러나 이단은 말을 삼켰다. 명백하게 이단도 어느정도 두려워하고 있었다. 천하의 그 이단 헌트가.
"나도 몰라요."
"-브랜트."
"나도 내가 왜 이 일에 이렇게까지 매달리는 지 모르겠어요. 그런데 어쩌라는 거예요. 눈만 감으면 그 날이 떠오르는데. 줄리아가 살아있어서 다행이다, 그런데 그 때까지 내가 굴러야만 했던 그 거지같았던 시간은, 누가. 누가-"
보상해줍니까. 이런식으로 생각하는 내가 싫다고요, 알아요? 머리가 아픈 듯 얼굴을 감싸는 브랜트를 보며 이단은 천천히 방 안으로 한 걸음을 내딛었다.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이단은 조심스럽게 브랜트를 품에 안았다. 어쩌면, 이 일은 이단이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어려운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아주 단순하게 브랜트는 위로를 받고 싶었던 건지도 모른다. 다른 모두가, 평범한 사람들이 나누는 대화나 위로, 그 모든 단순한 행동들을. 이단은 그제야 자신이나 그가 서툰 대화를 하고 있는 지 깨달았다.
평범하지 않은 일을 한다고 해서 그들이 특별한 것은 아니다. 지치면 힘들고, 아프면 쉬어야 하는 보통의 평범한 존재다. 아주 가끔, 그들의 주변 세상은 그들에게 다른 사람들과는 차별되는 남다름을 원한다. 그에 맞추어 제 감정을 숨기는 일이 익숙하다고 해서 아프지 않은 것이 아니다. 이단은 브랜트가 왜 굳이 그 상자를 꺼내려 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어쩌면 그것은 브랜트의 마지막 몸부림이었을지도 모른다.
"미안해."
"왜 당신이 사과해요."
"미안할 짓을 했으니까."
그래도 이번엔 늦지 않게 찾아왔잖아. 그걸로 올해는 봐주면 안 될까. 이단의 말에 브랜트는 이단의 어깨에 이마를 기댔다. 헛소리하고 있네. 이단은 그저 가만히 브랜트의 등을 토닥였다.
"많이 기다렸어, 베가?"
"...시끄러워요."
이단은 저 멀리 바람이 부는 창 밖을 바라보았다. 다행스럽게도 비는 더 이상 내리지 않을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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