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의 새벽은 매우 조용하다.
앞으로 몇시간 뒤면 금새 소란스러워지겠지만, 지금만큼은 아니다. 이단 헌트는 높은 곳을 꽤 좋아하는 편이었다. 발 밑이 아득한 곳에 서 있으면 저 밑의 세상은 눈곱만큼 작아 보인다. 그렇게 되면 한 눈에 모든 세상이 다 들어차게 된다. 그는 그 넓은 세상이 한 눈에 들어온다는 풍만한 만족감이 좋았다.
칠흑같은 어두운 밤보다는 약간 흐릿한 새벽이 훨씬 좋다. 그래야만 움직이는 것들이 보이기 때문이다. 그가 보통의 사람과는 남다른 재주가 있다고 한들 어디까지나 인간의 영역에 발을 들이고 있는 생명이었다. 눈을 감으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귀를 막으면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슬쩍 밝아져오는 저 어딘가의 하늘은 영롱한 보랏빛이다. 그 때가 되면 살아있음을 느낀다. 꽤 낭만적이지 않은가. 비웃음을 당한다고 할지라도 그는 그렇게 생각해야만 했다. 그렇지 않으면 제 감정은 이미 다 말라 퍼석해진 나뭇잎과 같을 것이다.
부지런한 사람들이 벌써부터 출근길을 서두른다. 이단의 두 눈에 담긴 세상이 활발하게 생기를 띄어간다. 그는 그 순간을 꽤 마음에 들어했다. 모름지기 세상은 죽어있는 것보다는 살아있는 게 훨씬 아름다운 법이다. 비록 한 편으로는 추악함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아주 가끔, 이단은 평범한 사람이 살아가는 삶에 대해 생각해본다. 재수없게 들릴지는 몰라도 이단 헌트는 무엇이든 다 잘해낼 자신도 있었고, 능력도 있었다. 이것이 훈련에 의해 만들어진 자신의 모습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지금이라도 일선에서 물러난다면 무엇을 하고 살까, 하는 걱정은 잠시 미루어 놔도 괜찮을 만큼 부족한 것이 없다. 그러다 소리 없이 웃는다. 어차피 그러지도 않을 거잖아. 맞는 말이다. 평범하게, 무엇이든 할 수 있는 그였지만 그는 그런 삶을 고르는 것을 잠시 미뤄둔다. 미룰 뿐이다. 아예 선택하지 않는다고 한 적은 없다.
사람은 얼마든지 감정적인 인간이 될 수 있고 감성적인 인간이 될 수 있다. 그게 자신이라면 좀 의아하게 생각하겠지만 어쨌든 자신도 사람이니까. 그럴 수 있다. 사실은 되도록이면 그렇게 행동하지 않으려고 할 뿐이다.
이단은 가만히 눈을 감았다. 지금쯤이면 옆에서 너 답지 않다고 잔소리를 해줄 사람이 그리웠다. 많이 보고 싶었다. 명백하게 이단 헌트는 외로움을 타고 있었다. 오늘따라 감정 조절이 잘 되지 않는 이유는 아주 간단했다. Happy Birthday! 집으로 돌아오기 전 폭죽을 터트리며 환하게 웃던 벤지의 얼굴이 생각나 웃음이 나왔다. 어떻게 알았어? 라는 질문은 굳이 하지 않았다. 그 자리에는 루터도, 제인도, 심지어 헌리도 있었다. 그들이라면 무엇이든 못할까. 그러나 그 자리에 있어야할 아니, 있었으면 하고 바랬던 사람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후부터 이상하게 마음이 텅 비어버린 것처럼 공허했다.
그와의 관계를 이렇다 정의내릴 수 있을만한 근거라고 해야할까, 사실같은 게 부족했다. 사랑을 속삭이는 것도 아니고, 정식으로 '연인'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런 점에서 이단은 '윌리엄 브랜트'라는 남자가 낯설기만 하다. 이단은 확실한 것을 좋아하는 편은 아니었다. 스스로도 그렇게 평가하기도 하고, 주위에서 다들 자신을 평가하라 하면 이단 헌트에게 있어 철저한 계획성 또는 100% 라는 것은 찾아보기 힘들것이라 대답할 것이다. 놀라울것도 없다. 실제로도 그렇기에. 자신은 100%보다 99%의 나머지 1%를 더 선호한다. 그러나 그 대상이 브랜트라면 달라진다. 이단은 브랜트에게 100%의 확신을 갖길 원하고 있었다. 줄리아 이후로 처음이다. 이단은 그 사실이 혼란스러우면서도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사람이니까 외로움을 타고, 사람이기에 타인의 손길이 그립다. 애정을 갈구한다. 그 대상이 남자라거나, 뭐 그런 사실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적어도 이단 헌트에게는 그렇다.
오늘만큼은 남들과 평범한 하루를 보내고 싶다. 그러나 그의 주변의 세계가 그를 그렇게 내버려둘지는 의문이다. 아직까지 핸드폰은 반응이 없다. 이단은 기다리고 있었다. 이 세상에서 이단에게는 단 한사람 뿐인 '브랜트'를.
"나 보고 싶었어?"
어쩌지, 요원 자격 박탈인데. 표정 관리가 안 돼. 이단은 빠르게 주위를 살폈다. 그나마 어스름한 새벽은 환한 대낮보다는 어둡다. 워낙 눈썰미가 좋은 그였지만 오늘은 태연하게 넘어가 줄것이다. 그를 보면 무슨 말을 하지. 무슨 말을 해줘야 하지. 이단의 세계가 뒤집혀지고 구른다. 멍청하게 서 있던 몸이 기운다. 이단에게 있어 브랜트라는 사람은 그런 존재였다. 멀리서 보아도 절대로 한 눈에 다 들어오지 않는 사람.
"어디 갔었어?"
"일이 있어서."
그에게 한 발자국 다가가자 갑작스러운 불안감이 이단을 덮쳤다. 옅은 화약 냄새와, 먼지냄새는 그와 어울리는 향내는 아니다. 이단은 급하게 브랜트에게 달려가서 그의 상태를 살폈다. 평소의 깔끔하던 모습은 온데간데 없이 짧은 머리에는 먼지와 거미줄이 한 가득 엉켜있고, 아끼던 재색빛 정장은 이리저리 헤져있었다. 이단은 아프지 않게 그의 양 팔을 쥐었다. 손바닥을 축축하게 적시는 것이 그의 피일리는 없다는 생각을 하며.
"브랜트."
"미스터 헌트, 너에게 도착한 선물이 있어."
희미하지만 브랜트는 웃고 있었다. 가까이서 봐야만 알 수 있을만큼 아주 옅게. 그의 목소리에서 잔뜩 피곤이 묻어나왔지만 그는 별로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아보였다. 이단은 신중하게 대답했다.
"그래, 말해봐."
"일단 나 좀 집에 데려다줘."
"그리고?"
"그리고 한 숨 자자. 원한다면 오늘 하루 종일 자도 좋아. 난 그럴 수 있어."
"...그래서?"
"그래서는 무슨 그래서야. 이렇게까지 말했는데 모르겠어?"
브랜트는 가볍게 이단의 양 뺨을 손으로 감쌌다. 조심스럽게 내려앉는 숨소리가 머릿속을 가득 채운다. 닿을 듯 말듯, 아슬아슬한 거리에 있는 그의 입이나 코가 닿은 피부가 간지럽다.
"선물이라고. 오늘 나랑 밤새도록 뒹굴자니까. 영화 보고 싶으면 말해. 벤지한테 받아달라고 하던가... 아니면 영화관에 갈까?"
이단은 드물게 멍청해진 얼굴을 브랜트에게 내비쳤지만 정말로 멍청하게 그 자리에서 일은, 이라는 질문은 하지 않았다. 브랜트는 그 점이 만족스럽다는 듯 웃었다.
"그게 내 선물이야?"
"생일 축하해. 그리고 미리 말해두는데 내가 왜 이 꼴인지는 묻지마. 알려고도 하지마."
"그건 좀 힘든데."
"네 선물 만드느라 힘들었으니까 그렇게만 알아둬."
"아하-. 그러니까 지금 오늘 너를 내가 독점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기 위해 이 꼴이 됐다, 이거지? 내 선물, 윌리엄 브랜트의 시간?"
활짝 웃고있는 입술 위로 브랜트의 손가락이 내려 앉았다. 이단은 굳이 그 손가락을 치우려 하지 않았다.
"오늘따라 왜 이렇게 말이 많아? 술 마셨어?"
"좋아서 그래. 생일이잖아."
이단은 브랜트의 손을 치우는 대신 그대로 입술을 내밀어 그의 손가락 입을 맞췄다. 끝내주는 생일 선물도 받았으니까. 브랜트는 딱히 대답하지 않았다. 이단에게 붙잡힌 손을 빼내려고도 하지 않았고, 불편하거나 싫다는 기색을 내비치지도 않았다. 어슴푸레하게 밝아오는 저 어딘가의 하늘을 보며 이단은 브랜트의 손을 절대로 놓치지 않겠다는 듯 힘주어 쥐었다. 브랜트는 딱히 아프단 말도 하지 않았다. 이단은 그게 그가 자신에게 말하는 방식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애초에 100%의 확신은 필요가 없는 것이다. 1%의 가능성만 있어도 충분하다. 이단은 그 1%에 대해 아주 강한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오늘은 운이 좋은 날이다. 하려는 모든 일이 다 잘될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기대심이 싹텄다. 그렇다면 그에게 말해봐도 좋지 않을까. 1% 뿐이었지만, 이단은 마치 100%인냥 확신에 가득 차 있었다. 브랜트라면 아무 말도 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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