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마스는 민호와 같이 지낸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미로 안에서는 그 누구보다 그를 잘 이해하고 있다고 자부했다. 물론, 토마스는 미로 안에서 뿐 아니라 미로 밖에서도 그를 이해하고, 그와 더 가까워지기를 원하는 사람이었다.
그들에게는 법칙이 있었다. 기억을 잃어버린 그들은 제 나름대로의 날짜를 정했다. 최초의 공터인, 알비가 그것을 시작했고 그 뒤로 뉴트와 갤리, 그리고 민호가 그 체계를 완성했다고 한다. 토마스는 오늘이 정확하게 몇 월 며칠인지는 몰랐지만 그들이 말하기로 오늘은 5월 21일이라고 했다. 그리고 유독, 민호의 얼굴에 그림자가 든 날이기도 했다.
미로 속으로 들어가는 그들을 배웅하는 것은 항상 뉴트의 몫이었는데, 토마스의 기우를 증명이라도 하듯 그 날은 뉴트가 미로로 들어가려는 민호의 팔을 붙잡았다.
“오늘은 가지 않아도 괜찮아, 민호. 아무도 뭐라고 할 사람 없어.”
“러너가 미로 안을 안 뛰면 쓰나.”
“…….”
“난 괜찮아, 뉴트. 그런 얼굴 하고 있으면 있던 기운도 다 날아가 버릴 거 같으니 썩 치워. 가자, 토마스,”
“어, 어.”
거의 울상을 짓는 것 같은 뉴트의 표정에 오히려 토마스의 속이 개운하지 않았다. 저 멀리 뛰어가는 민호의 등과 뉴트의 얼굴을 번갈아 보자 그제야 뉴트는 아직 출발하지 않은 토마스를 꾸중이라도 하듯 얼른 민호의 뒤를 따라가라며 가볍게 토마스의 어깨를 쳤다.
“민호를 부탁해.”
토마스는 굳이 뉴트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그것은 뉴트가 다시금 되새겨주지 않아도 토마스가 해야 하는 절대적인 것이었으니까.
*
그 날도 딱히 특별한 것은 없었다. 그냥, 아주 미묘하게 벽의 위치가 어디서부터 어디로 밀려났다거나, 하는 그런 사소한 것이었다. 대강의 정보를 기억한 토마스는 서둘러 글레이드로 발걸음을 돌렸다. 한참을 또 달리자, 어느 시점에서 민호가 발을 딱 멈췄다. 토마스는 민호의 행동에 적잖이 놀라며 걸음을 멈췄다. 적어도, 토마스가 알고 있는 민호는 - 쉬는 시간과, 점심시간을 제외하고는 - 절대로 미로에서 뜀박질을 멈추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아무런 말도 없이 한 자리에 멈춰 다른 미로의 벽과 별반 다르지 않은 벽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민호…?”
“그는 나보다 키가 컸어.”
“…….”
“나보다 발걸음이 빨랐을지도 몰라.”
토마스는 민호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민호는 토마스를 바라보지 않았다. 그저 미로의 벽을 보며 중얼거렸다. 간혹 가다 토마스가 알아듣지 못하는 말을 하는 걸로 봐서는 아마도 한국어를 좀 섞어 말하는 것은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었다. 토마스가 기억하기로 민호가 한국어를 쓰는 이유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아무도 한국어를 알아듣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주로 욕을 하는 것이었고 또 다른 하나는, 아무도 자신이 말하는 것을 몰라주기 바랄 때 한국어를 썼다.
토마스는 딱히 멍청한 소년이 아니었기 때문에, 대략적으로 이 상황을 유추할 수 있었다. 미로로 들어올 때 지었던 뉴트의 표정이나, 지금 민호의 표정이나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5월 21일. 토마스는 왠지 모르게 오늘이 기억 속에 유난히 깊게 새겨질 것 같았다.
“민호.”
“…….”
“가야해, 곧 해가 저물 거야.”
“…돌아가지 말까?”
민호의 말에 토마스는 말문이 막혔다. 옅게 웃으며 토마스에게 던진 말은 한국어도 아닌 영어였으며, 명백하게 토마스는 민호의 말을 알아들었다. 그렇지만 토마스는 그것이 진심인지, 아니면 거짓인지 분간할 수가 없었다. 적어도 미로 안에서는 그를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고 자부하고 있던 것이 산산조각이 나는 순간이었다.
“뭘 그렇게 놀라고 그래, 당연히 거짓말이지.”
“민호.”
“왜.”
어디서 튀어나온 용기인지, 아니면 겁 모르는 무식함인지는 모르겠지만 어느새 토마스는 민호의 팔을 단단히 잡고 있었다. 혹시라도 진짜로 사라져 영원히 다시 잡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무서워.”
“무슨….”
“매일 아침 미로로 들어오는 것, 언제 죽임을 당할지도 모르는 곳에서 쉬지 않고 달린다는 것. 그렇지만, 그 무엇보다도 널 잃는 건 더 무서워.”
“…….”
“그러니까, 그러니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
“힘들면 힘들다고 말해. 아프면 아프다고 말해줘. 울고 싶으면 울어도 된다고. 여긴 나 밖에 없어, 민호. 아니, 그… 이젠 나라도 있어, 라고 말해야하나…?”
“…신입 주제에 건방지긴. 헛소리하고 있네. 나 그렇게 약한 놈 아니야, 이 멍청아.”
“알아, 민호는 강하니까.”
싱긋 웃는 토마스의 얼굴을 보며 민호는 조금 놀라면서도,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어찌됐든 글레이드에 들어온 것도, 러너가 된 것도 며칠 되지 않은 초짜한테 위로를 받은 것은 사실이었다. 민호는 토마스의 눈을 피해 다시 한 번 미로의 벽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다시금 다짐하기로 했다. 네가 살지 못한 시간만큼, 악착같이 살 거야. 내가.
“늦었어. 가자, 토마스.”
“응.”
골목을 돌자 글레이드로 돌아가는 문이 민호와 토마스를 반겼다. 그 입구 혹은 출구 앞에 삼삼오오 모여 있는 글레이드의 아이들을 보며 민호는 - 한국말로 - 욕을 하는 것 같았다.
“뉴트 녀석, 유난 떨고 있기는.”
자세히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는 몰라도 토마스는 정말로 오늘을 잊어버릴 수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에게 있어 그 일은 순전히 토마스 자신이 없었던 과거의 일이었다. 그들만 알고 있는 사실에 조금 속상해하면서도, 이제 다시는 그런 일을 만들지 말자고 다짐했다. 아직 문이 닫히기 전의 여유가 조금은 있어 뜀박질을 멈추고 조금씩 걸어가는 토마스의 앞을 가로막은 민호가 다른 아이들이 들리지 않도록 가만히 속삭였다.
“솔직히 오늘 좀 넘어갈 뻔 했어. 아차, 싶었거든.”
“…?”
“참, 그리고 나도 똑같아. 그건 좀 무서울지도.”
“……뭐?”
한 발 먼저 글레이드로 돌아간 민호의 등을 멍청하게 보던 토마스는 아차, 하고는 전속력으로 민호의 뒤를 따라잡았다. 그리고는 놀란 가슴에 한층 뛰어버린 목소리로 민호의 이름을 불렀다. 토마스는 얼굴이 홧홧 달아오르는 것 같았다. 토마스는 아까 했던 말을 정정해야할 것 같았다. 토마스는 멍청이다, 그것도 이 세상 제일가는 멍청이였다. 아까 홧김에 민호에게 뱉은 말이 코러스처럼 머릿속을 울리지 않나, 아주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토마스는 지금 민호가 마지막으로 한 말의 의미를 확인하지 않으면 정말로 세계 제일의 멍청이가 될 것 같았다. 잔뜩 붉어진 얼굴로 민호의 이름을 외치던 그 날은 정말 평생 토마스의 머릿속에 길이 남을 날이었다.
어느 년도인지는 모르는 글레이드의 5월 21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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