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레이드에 살고 있는 소년은 고작 셋이 전부였다. 뉴트는 가만히 알비와 갤리의 얼굴을 돌아보았다. 그 둘을 포함해 자신까지 전부 셋. 이 세 명이 고작이었다. 소년들은 멍청하지 않았다. 물론 겁을 집어 먹어 하루나 이틀은 엉엉 울며 보내더라도 최소한 삼일 째 되던 날에는 자신의 이름과 함께 살아남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 지 정도는 이해했다.
맨 처음 이곳에 온 사람은 알비였다. 그리고 그 다음으로 온 사람은 뉴트였는데, 살아남은 사람을 기준으로 해서 그렇지 사실 뉴트의 앞에는 한 사람이 더 있었다. 한 달에 한번 박스를 통해 새로운 아이가 올라온다는 것을 직접 겪고, 보기도 한 뉴트는 곧 이 글레이드의 한 일부가 되어 살아가기 시작했다. 혼자보다는 둘이, 둘 보다는 셋이 살아남기에는 많은 도움이 되었다. 그리고 위로가 되었다. 세삼 이 곳에 혼자 한 달을, 아니 그 이상을 보냈어야 할 알비의 지난날이 안쓰러웠다. 그리고 오늘은 갤리가 올라오고 난 지 딱 한 달이 되는 날이었다.
적막한 글레이드에 소란스러운 사이렌 소리가 울려 퍼졌다. 아무리 들어도 익숙해지지 않는 소음에 귀를 틀어막은 뉴트는 얼른 박스가 올라오길 기다렸다. 박스가 다 올라오고 서둘러 박스로 다가간 아이들은 박스의 문을 열고는 그 자리에 못이라도 박힌 듯 서있었다.
“……뭐야, 쟤 왜 저래.”
갤리의 말에 뉴트는 뒷목이 서늘해짐을 느꼈다. 보통 박스의 문이 열리면 어리둥절하며 겁에 잔뜩 질린 아이의 얼굴이 튀어나오기 마련이었는데, 이번에 올라온 아이는 그렇지 않았다. 꼼짝도 하지 않고 박스 구석 자리에 웅크리고 누워있는 모습이 딱 봐도 어딘가 잘못되었다. 보다 못한 알비가 얼른 박스 안으로 뛰어들었다.
“이봐, 정신 차려.”
“…….”
“알비…?”
“가서 이불 펴고 불 붙여, 얼른!”
“으, 응!”
다급한 알비의 목소리에 서둘러 달려간 뉴트와 갤리는 알비가 시키는 대로 그나마 멀쩡해 보이는 천을 깔고 그 근처에 모닥불을 지폈다. 서둘러 아이를 안아 들고 온 알비는 조심스럽게 아이를 눕히고는 수건에 물을 적셔 아이의 이마에 올려주었다. 모닥불의 열기 때문이 아니더라도 아이의 몸은 충분히 뜨거웠고, 밭은 숨을 내쉬고 있었다.
“괜찮을까…?”
“…괜찮길 빌어야지.”
박스에서 올라오자마자 아픈 아이는 이 아이가 처음이었기 때문에 적잖이 당황한 모양인지 알비의 얼굴에도 그림자가 졌다.
참 왜소한 아이였다. 얼핏 본 생김새는 자신이나 갤리, 알비와도 전혀 다른 생김새였다. 아마도 동양의 먼 나라의 아이가 아닐까 싶었다. 키는 셋 중에 가장 작았던 자신보다도 작아보였고, 덩치는 알비의 반도 되지 않는 것 같았다. 이렇게 왜소하기 때문에 아픈 걸까. 뉴트는 아이가 꼭 무사히 깨어나길 바랐다.
그 이후로 3일이나 지났지만 아이는 깨어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첫 날보다는 꽤 상태가 좋아졌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가만히 지켜보기만 하던 갤리도 영 마음에 걸리는 듯 무슨 일을 하다가도 아이의 모습을 보러 왔지만 차도가 없는 아이의 모습에 혀를 차고 저 멀리 가버렸다. 조만간 무덤을 하나 만들어야 할지도 모르겠다는 갤리의 말에 뉴트는 왠지 모르게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다. 뉴트는 아이의 이름도 몰랐다. 아이의 눈은 무슨 색인지도 몰랐고, 아이의 목소리는 들어보지도 못했다. 이곳이 하루하루 살아남기가 힘든 곳이라는 것은 잘 알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이 아이가 어떤 아이인지도 모르는데 떠나보내기란 참 어려운 일이었다. 하고 싶지도 않았다.
일주일 가까이 지나자 알비도 포기한 듯 보였다. 뉴트는 겁이 났다. 정말 이대로 아이가 죽어버리는 것은 아닐까. 그간 아이를 제일 열심히 돌본 뉴트는 최선을 다해 아이를 간호했다. 오늘 밤이 고비일지도 모른다. 오늘 밤이 지나도 아이가 깨어나지 못하면, 소년들은 괴로운 선택을 해야 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렇게 되지 말라고 기도를 거듭한 뉴트의 바람을 알아주기라도 했는지, 그 날 저녁 아이는 가까스로 눈을 떴다.
“고마워.”
어눌한 발음으로 말을 꺼낸 아이는 알고 있었다. 자신을 위해 소년들이 어떤 노력을 했는지 모두 알고 있었다. 기껏해야 열 넷밖에 되지 않았던 소년들은 그 날 서로를 얼싸안고 울었다.
그렇게 일주일을 꼬박 앓은 아이는 무럭무럭 자랐다. 그들 중 가장 많이 먹었고, 가장 많이 움직였다. 대체 자기가 언제 아프기라도 했냐고 말할 만큼 그들 중 누구보다 더 빠르고 강하게 성장했다.
“얼마나 무서웠는지 알아? 정말로 죽는 줄 알았어.”
“갤리는 널 포기할 뻔 했다고.”
“왜 나한테만 그래? 솔직히 너도 그랬잖아.”
“그래, 그랬단 말이지.”
“아, 아니라니까!”
뉴트는 갤리를 놀리는 것에 부쩍 재미를 붙인 모양인지 쉼 없이 갤리를 놀렸고, 소년들은 그 나이 또래에 걸맞게 장난을 치며 웃으며 놀았다.
*
“민호…?”
“…뉴트….”
뉴트는 당장에 들고 있던 바구니를 던져내고는 민호에게 달려갔다. 새하얗게 질린 민호의 얼굴에 뉴트는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것 같았다. 처음 글레이드에 온 이후, 민호는 어디 아픈 곳 하나 없이 건강하게 지냈다. 왜소해보이던 몸과는 달리 꽤 완력을 쓸 줄 아는 아이였고, 왜소한 만큼 민첩한 모양인지 달리는 것만큼은 넷 중 가장 빠르게 달릴 수 있었다. 그렇게 민호가 아팠었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고 살았는데, 글레이드의 적막함을 물러낼 정도로 아이들이 올라왔을 때쯤 민호는 또 다시 앓기 시작했다.
처음 이곳에 올라왔을 때보다 심하게 앓는 민호를 보며 뉴트는 잠도 못자고 민호의 곁을 지켰다. 그래도 드문드문 정신을 차리고 뉴트와 심심찮게 장난을 치는 민호의 모습에 뉴트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조심스럽게 그의 입으로 수프를 흘려주고, 물을 먹이고 나서 그의 팔과 다리를 한참동안 주물렀다. 무슨 연유에서인지 빳빳하게 굳은 그의 손과 발을 보니 마음이 편히 놓이지 않아서였다.
“…간지러워.”
“내가 정말 너 때문에 못살겠다.”
“걱정할 거 없다니까.”
“걱정 안 되게 생겼냐? 너는 무슨 생긴 건 그리버도 때려잡게 생겼으면서 이렇게 비실비실해?”
“하하, 내가 그리버도 때려잡게 생겼어?”
작게 웃는 민호의 말에 뉴트는 입을 다물었다. 아니, 사실 그런 얼굴은 알비와 갤리가 좀 더 그렇게 생겼다. 처음 올라왔을 때보다 근육도 붙고 나름 키도 큰 민호지만 여전히 그때 그 시절 넷 중에서는 가장 왜소했다. 항상 그것이 불만이었는지 민호는 자기보다 한 뼘은 큰 갤리 앞에서 기를 죽이는 법을 몰랐다. 그런 민호가 가소롭다는 듯 웃는 갤리의 행동은 다툼에 일조하는 짓밖에 안됐지만 말이다.
“앞으로 더 클 거야.”
“퍽이나.”
“큰다면 크는 거야. 갤리만큼 커서 네가 걱정하는 일 따위는 없게 만들어 줄 거야.”
“흥, 웃기시네.”
뉴트는 코웃음을 쳤다. 민호가 갤리만큼 크려면 키부터 족히 한 뼘 반은 더 커야 했고, 근육도 한참이나 더 붙어야만 했다. 물론 십대 소년들이 어디까지 클 수 있는지는 모르지만, 뉴트는 민호를 놀리며 말했다.
“넌 한국인이라서 안 돼.”
“뭐냐, 너 지금 나 한국인이라고 무시 하냐.”
“그렇게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마, 네 표정 완전 못났거든, 큭큭.”
“[못돼 처먹은 놈.]”
“뭐?”
“아니, 아무것도.”
가끔 못 알아듣는 말을 하는 걸 보면 분명 민호가 한국말을 하는 것 같은데 이상하게 뉴트는 그것이 퍽 좋지만은 않았다.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닥 좋은 말이라고는 생각이 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너 나 욕했지.”
“아닌데.”
“했잖아.”
“아니거든!”
결국 시끄럽다며 아무것도 들지 않은 가방을 던진 갤 리가 씩씩거리기 전 까지, 뉴트와 민호는 계속 끝이 없는 말다툼을 이어갔다.
휴전 선언을 한 뉴트가 먼저 민호의 옆에 눕자, 민호가 조용히 웃었다.
“진짜야, 두고 봐.”
“…….”
“알비나 갤리보다 더 크고 건강하고, 강해져서…. 내가 널 여기서 꼭 데리고 나갈 거야.”
“민호.”
“많이 아프면, 아픈 만큼 클 수 있댔어.”
“…….”
“잘 자, 뉴트.”
*
미로에서 돌아온 민호와 토마스를 반갑게 맞은 뉴트는 얼른 두 사람에게 물을 건넸다. 먼저 가서 씻겠다며 뛰어가는 민호의 등을 보며 뉴트는 고작 몇 년 전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이곳에 있는 그 누구보다 강해지겠다는 말. 민호는 자신이 내뱉은 말은 죽어도 지키겠다는 듯, 또 꼬박 앓고 나서는 무지막지한 속도로 먹기 시작했다. 갤리도 그것을 보고 기겁을 할 정도로 기백이 엄청나서 뉴트는 크게 웃으며 뒤집어졌다. 작작 먹으라는 알비의 말은 귓등으로도 듣지 않고 어마어마한 양을 꿀꺽 삼킨 민호는 돌연 돌발선언을 했다. 러너가 되겠다고. 그런 민호의 말에 기함을 친 알비와 갤리가 민호를 뜯어 말렸지만 어찌나 그 고집이 황소고집인지 제 의견을 굽히지 않던 민호는 기어코 미로 속으로 발을 들였다. 그리고 그것이 지금까지 이어져오고 있는 것이었다.
지나가던 길에 갤리와 소소한 시비가 붙은 모양인지 민호와 갤리, 토마스 이렇게 셋이서 다툼 아닌 다툼을 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괜히 뉴트는 가슴이 벅차오름을 느꼈다.
민호는 이제 갤리와 비교해서도 밀리지 않을 만큼 자랐다. 물론 갤리보다는 조금 작은 편이었지만 덩치로는 밀리지 않을 만큼 그 작고 왜소했던 아이가 자란 것이다. 뉴트는 괜히 멋쩍어져서는 가만히 고개를 숙였다. 반드시 여기서 데리고 나가 주겠다는 민호의 말이 귓가를 맴돌았다. 어쩌면, 어쩌면 정말로 가능한 일일지도 모른다.
“이봐, 뉴트!”
“…어! 왜?”
“갤리 녀석 좀 말려봐, 난 가서 씻고 싶다고.”
“뭐야, 갤리. 왜 또 우리 민호한테 시비야?”
“우리 민호? 나 참, 기가차서.”
“들었지? 우리 부대장이 날 좀 아껴야 말이지. 그럼 여기 있는 토마스랑 재밌는 시간 보내, 친구.”
그러고 가버리는 민호의 이름을 억울하게 부르는 토마스의 모습을 보며 한참을 웃은 뉴트는 가만히 사라지는 민호의 등을 바라보았다. 많은 것을 짊어지고 있는 그의 등은 그의 말 그대로였다.
소년은 아팠던 만큼, 자라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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