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니까... 우리, 괜찮은 거죠?"


브랜트의 물음에 이단은 그저 말 없이 웃어 보일 뿐이었다. 브랜트는 마침내 마음 속 깊은 곳에 박혀 있던 커다란 돌덩어리를 언덕 밑으로 굴려보낼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렇지만 브랜트는 쉽사리 눈 앞에 놓인 초대장을 들지 못했다. 자신이 그럴 자격이 있는 걸까. 그래도 되는걸까, 하는 끊임없는 물음을 하며 브랜트는 애써 이단과 눈을 마주치려 하지 않았다. 


"고마워요."


그렇지만, 그건 받을 수 없어요. 애써 뒷말을 삼킨 채 핸드폰을 들지 않은 채로 자리에서 일어나는 브랜트를 붙잡은 것은 이단이었다. 그러나 그는 브랜트를 한 번 잡았을 뿐, 핸드폰을 가져가라는 그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가만히 브랜트를 보며 한참을 말 없이 웃더니 브랜트의 팔을 이끌며 술을 마시러 가자고 했다.


"네?"

"술이나 마시러 가자고. 그 정도도 같이 못 해?"


마음 같아서야 지금 당장에라도 그 자리를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이 굴뚝같았으나 브랜트는 딱 한 번만, 딱 한 번만이라도 생각 없이 무작정 행동해보자고 생각했다. 큰 돌덩이가 굴러가다 또 다른 돌부리에 걸린 것 같았다. 그 돌부리의 정체가 무엇인지 브랜트는 확신할 수 없었다.





이단 헌트. 이 남자의 끝은 어디인가. 정말 머리부터 발 끝까지 완벽으로 무장하고 있는 남자의 모습에 브랜트의 미간에 주름이 하나 둘 더 늘어나기 시작했다. 주량이 약하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지만 이단의 앞에서는 명함도 내밀지 못할 것 같았다. 벌써 즐비하게 늘어져 있는 술병을 보며 브랜트는 혀를 찼다. 축축 늘어지는 몸을 억지로 빳빳하게 허리를 세워 앉아 그를 바라보니, 아까부터 뭐가 그리 재밌는지 자신이 무어라 내뱉은 말에 간간히 대답을 하거나 호응을 해주거나 하는 그 이상의 행동은 하지 않았다. 술집에 들어선 순간부터 떠들고 있는 것은 브랜트 혼자라는 말이었다. 


"당신은 뭐 할 얘기 없어요? 이래봬도 당신에 대해서 궁금한 게 꽤 많아요."

"나에 대해서 말인가?"

"실제로 만나게 될 줄은 꿈에도 상상 못했으니까."


그렇게 말하며 브랜트는 쓰게 웃었다. 아직도 그 때의 일이 눈 앞에 선선했다. 벌써 꽤 오래전의 일임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눈 앞에 아무렇지 않게 그 일의 장본인이 있음에도 자꾸만 브랜트의 눈 앞에는 과거의 이단 헌트가 아른거렸다. 그의 사랑스러운 부인과 함께. 이제와서 그 일이 사실은 그녀를 지키기 위한 속임수였으며, 이단은 또 다른 새로운 임무 때문에 일부러 교도소에 들어가야만 했다, 라는 얘기를 들어도 실감이 나지 않았다. 생각해보면 국장이란 사람도 너무하지 싶었다. 자신이 그 일 때문에 어떤 개고생을 해야만 했는데. 죽지 마시지 그러셨어요. 그랬으면 지금 이 일에 대해서 개 같이 따지고 이딴 직장 때려치는 건데. 쓸모없는 소모적인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질 동안 이단은 역시나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원래 그렇게 말이 없어요?"

"조금."

"하긴, 조금 과묵한 이미지긴 해."


그래도 그녀의 앞에서 웃을 땐 참, 근사했는데. 브랜트는 드디어 자신이 취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 말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은 게 천만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벌써 시계는 자정을 넘어 새벽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술집에는 여전히 사람이 많았다. 슬슬 추태를 보이기 전에 일어나야 하는 게 정답이다. 이번 임무를 수행하느라 고생도 많이 했으니, 술 한잔 못사주겠냐는 생각에 지갑을 꺼내며 일어서려던 찰나, 처음으로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동안 수고했어, 브랜트."


그는 그 말만 툭 던지고서, 다시 술잔을 들이켰다. 브랜트는 일어서지도, 앉지도 못한 매우 어정쩡한 자세로 이단을 바라보았다. 점차 지갑을 쉰 손이 덜덜 떨리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이나 한건지, 브랜트는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당신은, 끝까지..."


순식간에 온몸을 지배한 오한에 다리가 풀려 다시금 제자리에 주저 앉자 미친듯이 웃음이 나왔다. 비록 깔깔대며 웃지는 못했지만 브랜트의 어깨는 그 여파로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브랜트는 그제야 조그마한 돌부리에 걸린 커다란 돌이 아주 힘차게 저 아래로 굴러떨어지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이단 헌트. 그는 참,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을 온전히 내버려두질 않는다. 그가 의도하지 않았음에도 실컷 브랜트가 마련해 놓은 깜깜한 작은 방에 들어와 불을 켜고는 방에 있는 모든 것들을 어지럽히고 유유히 떠나버린다. 최악이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그의 앞에서는 한 없이 작아지는 자신을 어떻게 해볼 수가 없었다. 오늘은 그 정점을 찍는 날인가. 실실 웃고 있는 브랜트의 눈가가 발갛게 달아올랐다.  


"그러니까 굳이 애써서 떠날 필요 없어."


너는 그냥, 여기 있으면 돼. 아무도 너를 탓할 사람은 없으니까. 작지만 강하게 울려퍼지는 그의 목소리에 브랜트는 가만히 그를 바라보았다. 그가 마신 것도 브랜트가 마신것과 같이 술은 술인 모양이었는지 아까보다는 꽤 말이 많아진 이단이 툭툭 무어라 말을 뱉었지만 그게 온전히 들리지는 않았다. 이미 브랜트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그 어떤 말보다, 제일 듣고 싶은 말을 이미 들었기에 귀를 막아버렸는지도 모른다. 


"줘요."

"...뭐?"

"핸드폰, 달라고요. 그거 내 거 잖아요."


자신의 말에 드물게 활짝 미소를 짓는 이단을 보며 브랜트는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그의 손에서 검은색 휴대폰을 받아 후드 주머니에 넣고는 비어있는 그의 술잔에 술을 채워주었다. 


"대신 나랑 한 가지 약속해요."

"약속? 뭔데?"


그의 술잔에 술이 가득한 것을 확인한 뒤 자신의 술잔에도 술을 가득 따른 브랜트가 술잔을 들자 이단도 얼떨결에 술잔을 들어 잔을 부딪혔다. 청아한 소리와 함께 잔의 표면을 넘칠듯 말듯 아주 꽉 차게 담긴 술을 한 입에 털어넣은 브랜트가 술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나한테는 절대로 거짓말 하지 않기로. 그 어떤 거짓말도."


이단이 고개를 끄덕인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브랜트는 진심으로 웃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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