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요새들어 IMF의 수석 분석요원 윌리엄 브랜트의 행동이 수상하다. 벤지는 차근차근 공을 들여 한 문장이 적혀있는 모니터를 빤히 바라보다 슬쩍 브랜트의 옆모습을 훑어보았다. 첫번재 가설, 사실은 이게 가장 유력하다. 윌리엄 브랜트에게 연인이 생겼다. 벤지는 친절하게 키보드의 느낌표를 두 번이나 눌러주었다. 그럼 다시 돌아와서 첫번째 가설의 첫번째 근거. 근래 들어 브랜트가 웃는 날이 많아졌다. 어쩔때는 시도때도 없이 웃어서 드디어 우리의 수석 분석요원이 머리가 이상해진 것은 아닐까 구급차를 부르려고 한 적도 있었다. 그런 브랜트를 보며 도대체 뭐가 그렇게 좋아서 웃는거야, 하고 물으면 열 중에 열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하는 무척이나 믿기지 않는 대답을 하곤 했다.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알겠지만 브랜트가 대놓고 웃는 날은 절대로 그냥 넘어가는 일이 없는 지옥과 같은 날이라는 것을 잘 알것이다. 그런 그가 시도때도 없이 웃는다? 분명히 뭔가가 있는 것이 분명하다.
첫번째 가설의 두번째 근거. 웃는 날이 많아진 것도 모자라 이젠 통화까지 한다. 평소에 설정해두는 기본 벨소리 제 1번은 어디다 버려두고 상큼하게 울리는 벨소리에 참지 못하고 박장대소를 하는 자신을 보며 브랜트는 화도 내지 않았다. 벤지는 브랜트가 혹시나 외계인에게 납치되어 뭔가를 당한 것은 아닐까, 하는 드라마를 써보기도 했다. 몰래 통화를 엿듣는 것은 예의가 아닌지라 하지 않았다. 물론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할 수 있다는 반증이 되기도 하지만 후환이 두렵다. 누가 뭐래도 브랜트는 IMF의 국장 대리직을 맡고 있는, 어찌보면 한낱 현장요원 신분인 자신과는 맡고 있는 공기가 달랐다. 물론 그게 무조건적으로 좋다는 것은 아니다. 자신이었다면 절대로 안 할거라고 난리를 쳤을 게 분명했다.
이야기가 새고 있다. 다시 돌아와서 첫번째 가설의 세번째 근거. 굳이 세번째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 브랜트가, 그 윌리엄 브랜트가, 아기자기하고 귀여운 악세사리를 달고 다닌다. 느낌표 3개. 아니, 5개. 속속히 제보가 들어오고 있다. 가장 결정적인 제보로 어느 날의 회의에서 브랜트가 꺼낸 수첩에 달려 있던 곰인형. 무려 곰인형! 곰인형!!! 갑자기 진행이 멈춘 회의 상황에 의아함을 느낀 브랜트가 무슨 일 생겼냐는 말에 아주 용감한 -벤지는 만약 그, 아니면 그녀를 본다면 아낌없는 찬사를 보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요원이 브랜트의 수첩을 가리켰고, 브랜트는 수첩에 달린 곰인형을 보고는 옅게 웃으며 말했다고 한다.
"아, 미안합니다. 깜빡해서."
이만하면, 충분하지 않은가.
2.
그 뒤로도 브랜트는 여전히 수상한 행동을 반복적으로 하고 있었다. 말이 수상한 행동이지, 사실 첫번째 가설을 인정하면 지극히 당연한 행동들이었다. 그러니까 브랜트에게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사랑스러운 여자친구가 생긴 것이다. 암암리에 IMF의 수석 분석요원이 절찬리 연애 중이라는 사실이 퍼졌고, 그 사실을 모르는 것은 브랜트 뿐인 것 같았다.
오늘도 어김없이 미션을 수행하고 있는 이단의 팀을 백업하기 위해 관리탑에서 열심히 열을 올리고 있던 브랜트는 고래고래 소리를 외치던 와중 울린 전화에 그 자리에서 딱, 굳어버렸다. 그 벨소리는 마이크를 통해 벤지나 이단의 귀에도 들렸다. 평소와는 다른 벨소리, 음. 그렇군. 벤지가 혼자 수긍하고 있을 때쯤, 이단이 투덜거리는 듯 말했다.
"누군 현장에서 고생하는데, 누군 연애하느라 즐겁나보군."
- 그거 지금 나한테 하는 소리에요? 연애?
"그럼 아니야?"
- 그게 무슨 헛소... 윽, 지금부터는 당신 마음대로 해도 상관없으니까 알아서 해요. 어차피 당신 사전에 실패라는 단어는 없으니까 성공시켰다고 알고 있을게요.
"뭐? 이봐, 브랜트-"
- 브랜트 아웃.
이단은 통신이 끊긴 인이어를 믿을 수 없다는 듯 손으로 눌러보았으나, 들리는 것이라고는 벤지의 웃음소리 뿐이었다.
3.
이단은 드물게 화가 나 있는 듯 했다. 아니, 화가 나있다기 보다는 꼭 마치 누군가에게 서운하다는 듯 굴고 있었다. 벤지는 당장 내일 아침 해가 서쪽에서 뜰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 누구도 아닌 이단 헌트가 뭐 어디 다른 사람에게 서운한게 있다고? 정말? 하긴, 요새 브랜트가 하는 걸 보면 그럴만도 하다. 애인이 생겼으면 말이라도 해주면 좀 좋은가. 그래도 다른 누구보다 돈독한 팀워크를 다지고 있다고 생각하면 나름 서운한 처사이긴 했다. 하지만 이단이 이런 걸로 브랜트에게 서운해할리가 없다. 벤지는 그냥 단순히 항상 이단이 먼저 끊던 통신을 브랜트가 먼저 끊어버리니 심통이 난 것으로 결론지어 버렸다.
"브랜트, 이번 작전-"
"어, 어. 알았어, 미안해. 잘못했어. 지금 갈까? 응? 어, 울지마! 뚝. 알았어, 갈게. 응?"
"...브랜트?"
"이단?"
브랜트는 사무실에 올리가 없는 요원 명단 1순위에 올라가 있는 이단을 발견하고는 굉장히 놀란 얼굴로 이단을 바라보았다. 이단은 이단대로 방금 브랜트의 통화 내용을 듣고는 상황을 파악하지 못해 혼란스러운 상태였다.
"여긴 어쩐 일이에요? 당신이, 사무실에?"
"그보다 간다니? 어딜?"
"아-. 맞아, 저 오늘은 먼저 가보겠습니다."
"뭐? 다음 작전 브리핑이 있다며."
"무슨 소리에요? 아니, 그보다 당신이 언제 브리핑에 대해 신경이나 썼다고. 제인이라 루터한테 물어봐요. 그거라면 아까 전달해놨으니까."
서둘러 본부를 나가버리는 브랜트의 뒷모습을 보며 이단은 정말 자신과 어울리지 않는 종이 뭉치를 찢어버렸다.
4.
모두의 궁금증이 폭발하기 바로 직전, 사건은 터졌다.
딱히 임무 중에 터진 사건은 아니었다. 아주 우연히 길을 지나가다 폭발 사고에 휘말린 브랜트는 곧바로 응급실로 실려갔다. 하필 폭발의 중심 근처에 있었던 것이 화근이었다. 다행스럽다고 해야할지 목숨은 건졌지만 의식 불명에 오른팔에 금이 간 상태로 구급차에 실려 들어온 브랜트를 보며 벤지는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응급실의 문을 바라보았다. 제인과 이단의 표정도 별반 달라보이지 않았다. 이것이 정말 우연에 의해 일어난 사고인지, 아니면 브랜트를 노리고 일어난 사건인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 브랜트가 의식을 되찾을 때까지 이단의 팀은 잠정 대기 상태였다. 지금 당장이라도 밖으로 나가 브랜트를 저렇게 만든 자들에게 복수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한결같은 마음으로 참아내야만 했다.
때 마침 울리는 벨소리에 벤지는 하마타면 들고 있던 브랜트의 자켓을 떨어트릴 뻔했다. 계속 울리는 전화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벤지는 핸드폰을 이단에게 내밀었다. 이단은 한숨을 한 번 내쉬고는 차분한 마음을 가지려 노력했다. 짧은 시간안에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수를 떠올린 이단은 천천히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 ......
"여보세요?"
- ...아빠?
이단은 궁지에 몰린 표정으로 모두를 바라보았다.
5.
세상에, 그 누가 알았을까. IMF의 수석 분석 요원 윌리엄 브랜트에게 딸이 있을 거라는 사실을 누가 알았을까.
느낌표 다섯개, 물음표 다섯개.
브랜트는 다행스럽게 몇 시간 지나지 않아 바로 정신을 차렸으나, 눈 앞에 펼쳐진 상황을 확인하고는 다시 눈을 감고 싶다는 강한 충동에 사로잡혔다.
"아빠, 많이 아파?"
"...괜찮아."
"아프지마."
"쉬, 아빠 괜찮다니까."
금이 간 오른팔을 들어올리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알아차리고는 힘겹게 왼팔을 들어올린 브랜트는 작은 아이의 머리를 연신 쓰다듬었다. 브랜트의 손을 꼭 잡고 있는 아이의 뒤로 지금 가장 보고 싶지 않은 얼굴이 셋-. 브랜트는 들리지 않게 한숨을 내쉬었다.
"리나, 아저씨들한테 인사 했어?"
"...아직."
"아빠가 뭐라그랬지?"
"어른들한테는 인사 잘 하라고 그랬어."
"옳지."
그치만 오늘은 나중에 하자. 아빠가 너무 졸려. 브랜트는 넌지시 이단을 바라보았고, 이단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브랜트는 아이의 손등에 입을 맞추고는 다시 잠들었다.
6.
아이의 이름은 리나 브랜트. 윌리엄 브랜트의 하나뿐인 딸이었다.
7.
"절대 안 돼."
너무나도 완고한 태도에 브랜트는 한 순간, 이 상황에 자신과 이단을 대입하고 있었다. 안 돼, 절대 무리야. 예산이 없다고, 이 거지같은 팀 리더, 하며 이단에게 욕을 퍼부으면서도 꼬박꼬박 이단의 뒷처리를 해주는 제 모습이 스쳐 지나가자 브랜트는 너무나도 자신의 인생이 처절하게 느껴졌다. 아니, 이럴때가 아니지. 브랜트는 최대한 불쌍한 표정을 지으며 두 손을 고이 모았다.
"딸, 응?"
"난 그 아저씨 싫어."
"그니까 왜 그렇게 이단이 싫은건데?"
"자기 혼자 세상 살고 있잖아."
"......"
정말이지, 이렇게 완벽한 대답을 할 줄은 몰랐던 브랜트는 그대로 딱 굳어버렸다. 오, 맙소사. 브랜트의 기억 속, 딱히 이단이 리나에게 잘못한 것은 없던 걸로 알고 있다. 그런데 어쩌다가 하나뿐인 딸 아이가 누구나 다 존경하고 좋아해하는 '이단 헌트'를 싫어하게 되었는가.
"아빠는 내가 지킬거야."
Holy shit.
8.
"푸하하하-!!"
"...진짜로?"
"큭, 크큭, 세상에. 이거 완전 특종이야. 동네 사람들!"
"닥쳐, 벤지."
"넌 꼭 나한테만 그러더라."
그러면서도 차마 웃음을 숨길수가 없는지 볼에 빵빵하게 바람을 불어넣고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벤지를 보고 있노라니, 브랜트는 없던 혈압도 오를 것 같은 기분이었다. 오늘도 IMF의 수석 분석 요원으로 출근도장을 찍자마자 리나에게 걸려온 전화의 내용은 무척이나 당황스러운 것이었다.
- 그 아저씨 바꿔줘.
"이단?"
"나?"
"아니, 아니. 안 돼, 안 그럴거야. 리나, 학교는 갔어?"
- 아저씨 바꿔주면 갈게.
"리나 브랜트! 학교 가야지."
- 딱 한마디만. 응?
절절하게 애원하는 아이의 목소리에 어떤 아버지가 마음이 흔들리지 않을 수 있을까. 브랜트는 이건 절대로 하면 안된다는 짓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골백번은 더 알면서도 기어코 핸드폰을 이단에게 넘겼다. 그 일이 얼마나 큰 후폭풍을 몰고 올지는 뻔히 알고 있었으면서도.
"그래. 나 바꿔달라며?"
- ......
"...리나?"
- 우리 아빠한테 손 끝 하나라도 대기만 해요!
"...내 인생은 망했군."
옆에서 중얼거리는 목소리에 이단은 무심코 방심하다 웃음이 터질뻔한 것을 고이 눌러두었다. 머리가 아프다는 듯 인상을 잔뜩 찡그리는 브랜트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이상하게 심술을 부리고 싶은 마음이 생겨났다. 이단은 무척이나 밝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이미 늦었어, 꼬마 아가씨."
- 네?!
"학교 잘 다녀와, 리나. 이따 집에서 보자."
"뭐?!"
- 뭐라구요?!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은 이단은 정말이지 태연한 얼굴로 브랜트에게 물었다.
"뭐?"
브랜트는 지금 당장 병가를 내고 싶은 마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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