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집 안으로 들어온 브랜트와 리나의 표정이 똑같이 썩어있는 것을 보고도 뻔뻔하게 미소를 지은 이단은 두 사람을 거실로 안내했다. 현관을 들어서자마자 식욕을 돋구는 냄새에 브랜트는 설마 이단 헌트가 가정집에서 요리를 한 건 아니겠지, 라는 굉장히 이단과는 어울리지 않는 상상을 해보았으나 그것은 상상으로 그치지 않았다. 식탁 다리를 부러트릴 정도로 차려져 있는 진수성찬에 브랜트는 침을 꼴깍 삼켰다.


"자백제 탔어요?"

"대체 날 뭘로 보고 있는거야?"

"이단 헌트요."


그러면서도 브랜트는 뭐가 그리 웃긴 건지 슬쩍 미소를 지으며 리나를 의자에 앉혔다. 리나의 표정은 벌써부터 뚱, 해져 있는 것이 자칫하다가는 무슨 폭발을 일으킬지 몰라 조마조마했다. 식탁 맨 끝에 앉아있는 리나와 그 양 옆으로 마주보고 앉은 브랜트는 이 상황이 무척 웃기다고 생각했다. 설마하니, 진짜로 이 두 사람이 또 다시 한 공간에 있게 될 줄이야. 리나는 애꿎은 식탁 위의 요리만 뚫어져라 바라봤다.


"리나. 이단한테 인사해야지."

"우으... 안녕하세요..."

"안녕."


브랜트는 결국 참지 못하고 큰 웃음을 터트렸다.




14.

웃긴 거 취소. 브랜트는 예상 외로 바짝 날이 서 있는 듯한 식탁 위의 공기에 금방이라고 체할 것 같은 기분이었다. 작게 한숨을 쉰 브랜트는 결국 두 사람을 중재해야 하는 역할을 스스로 자처했다.


"이러다 오늘 저녁에 변기 붙잡고 속을 다 게워낼 거 같으니, 그만합시다."

"아빠, 어디 아파?"

"어제 뭐 잘못 먹었어?"


브랜트는 생각 외로 죽이 잘 맞는 두 사람을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리나, 솔직하게 얘기해봐. 이단이 왜 그렇게 싫은건데? 아니, 아니지. 먼저 이거부터 물어보자. 대체 아까 이단한테 했던 말이 무슨 뜻이야?"

"아빠는 너무 둔해."

"-리나, 그거 반칙이야."


뜬금없이 치고 들어오는 이단의 목소리에 브랜트는 정말이지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두 사람을 번갈아보았다. 이거, 그거 아니지? 그치? 


"우리 놀리는데 그렇게 힘쓸 필요 없어요, 이단. 뭐가 그렇게 당신을 재밌게 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윌리엄 브랜트."

"네?"

"공적으로는 전혀 안 그러면서, 사적으로는 그렇게 둔해?"


챙그랑, 리나가 손에 쥐고 있던 포크를 떨어트리는 소리가 꼭 어느 드라마의 BGM같아 브랜트는 온 몸에 소름이 끼쳤다.


"리나는 어린아이지. 어린아이의 눈은 굉장히 정확해, 브랜트. 그런 아이가 나한테 경계심을 보이는 이유가 뭔지 한 번이라도 생각해 본 적 있어? 그보다, 왜 그렇게 장난으로만 치부하는거야. 아무리 나라도 상처받는다고. 왜, 네가 애 아빠라서? 아니면 상대가 나라서?"

"......"

"자, 그럼 이제 우리 수석 분석 요원이 어떤 대답을 나한테 가져다줄지 궁금한데. 시간이 더 필요한가? 아니면 상황을 분석할 만한 근거가 더 필요해? 그럼 자료를 더 제공해주지. 그게 벌써 몇년 전이더라. 우리가 러시아의 핵탄두를 바다에 떨어트렸던 때. 내가 줄리아를 떠나보냈을 때, 때마침 내 눈 앞에 나타난 사람이 누구지? '윌리엄 브랜트'라고 하는 분석 요원이라고 알고 있는데. 내가 틀렸다면 정정해주길 바래. 반 년이 넘도록 내가 진실을 숨겨서 괴롭게 만들었다는 사실은 미안해. 아직도 그렇게 생각해. 그런데 그 때, 다른 누구보다 줄리아가 살아있다고 했을 때 가장 기쁜 표정을 지었던 사람도 바로 너야. 그 때 깨달았어. 이 녀석이라면 괜찮겠다. 이 사람이라면 좋겠다. 그럼 여기서 문제. 나, 이단 헌트는 지금 윌리엄 브랜트에게 뭘 하고 있는거지?"


이단은 그렇게 말하고는 굳이 대답을 들으려 한 것은 아니라는 듯 태연하게 자신이 만든 스파게티를 포크에 말아 한 입 먹었다. 브랜트는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무심코 리나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리나의 얼굴은 꼭 토마토라도 된 것처럼 새빨개져 있었다. 브랜트는 당황한 기색을 숨기지도 못한채 리나에게 물었다.


"너 얼굴이 왜 그렇게 빨개?"

"이런 엄청난 고백을 옆에서 들었는데 어떻게 안 그래? 와, 나는 이 세상에서 내가 우리 아빠를 제일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나봐. 

브랜트는 쥐구멍에 숨고 싶었다.




15.

폭풍같은 저녁 식사시간이 지난 후, 리나를 방으로 올려보낸 브랜트는 산더미같은 설거지를 치우기 위해 셔츠 소매를 걷었다. 그러자마자 등 뒤로 콕콕 박히는 어딘가 다정하면서도 따가운 시선에 브랜트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뭘 그렇게 봐요?"

"그냥."


소스가 잔뜩 묻어 있던 접시가 세정제에 의해 깔끔하게 씻겨나가는 것을 보는 기분이란 아주 묘했다. 평소에는 이런 걸 보면 기분이 썩 괜찮았는데. 어떻게 식사를 마쳤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이단의 폭탄 선언 이후 리나는 놀랍도록 이단에 대한 시선이 달라졌으며 이제는 둘이 아주 마음이 잘 맞는다. 그런 둘을 바라보고 있는 브랜트의 마음은 이상하게 뒤숭숭했다. 어쨌든 쏟아진 물은 다시 주워담을 수 없다. 윌리엄 브랜트는 이단 헌트의 '고백'에 무엇이든 좋으니 대답을 해야만 했다. 어쩌다 일이 이 지경이 되었지? 하긴, 이단이 말한 것을 토대로 생각해보면 리나의 발언이 그렇게 이상하지는 않다. - 아니, 사실 이상한건 맞다. - 어린아이의 눈은 정말 정확하고 깨끗하구나, 따위를 중얼거리던 찰나 이단이 던진 물음의 파괴력은 상상을 초월했다.


"리나 친모였다는 요원 말이야. 혹시 그녀를 좋아하기라도 했어?"

"-네?!"

"그러면 나한테는 가망이 없다는 거잖아."


브랜트는 아마도, 지금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멍청한 표정을 짓고 있을 거라 확신했다. 그녀를 좋아했냐고? 브랜트는 세삼 그 이단 헌트가 참으로 귀여운 질문을 한다고 생각했다. 이미 이렇게 생각한 순간, 끝이라는 것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브랜트는 스스로를 멍청하지 않다고 생각했지만, 이상하게 이단의 앞에서는 꽤 멍청한 모습을 자주 보인다고 생각했다. 


"내가 뭐라고 대답해줬으면 좋겠어요?"


손에 묻은 물기를 털어내며 뒤를 돌아본 브랜트를 보며 이단은 아무 말 없이 잔잔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외전-1

이단 헌트와 윌리엄 브랜트의 첫 데이트는 리나 브랜트의 백신 예방 접종을 위한 병원 나들이였다.




외전-2.

어느 날 리나가 울먹이며 브랜트의 다리에 매달리며 물었다. 아빠, 내 이름은 이제 리나 헌트야? 나는 브랜트가 좋은데.

브랜트는 기절할 뻔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