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간적으로 덮쳐온 기억의 파도는 무척이나 거세어서, 브랜트는 온 몸이 휘청거리는 것을 겨우 다잡았다. 두통은 기본으로 따라 붙었다. 브랜트는 욕을 곱씹었다. 물이 쏟아져 축축해진 바닥을 내려다보며 브랜트는 자신의 손에 쥐고 있는 꽃 한 송이를 바라보았다. 깨진 유리병 조각에 스쳐 상처가 난 손가락에서 피가 흘러나왔지만 그런 건 신경 쓸 처지가 아니었다. 이단 헌트. 브랜트는 그의 이름을 불렀다.
파트너. 하하, 파트너. 브랜트는 상처가 잔뜩 난 손에 붕대와 데일밴드를 붙이며 다짐했다. 그와의 관계는 이미 끝이 났다. 그저,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수긍하지 않았을 뿐이다. 어쩌면 이제 우리 그만 헤어지자, 라는 말에 아무런 이의도 없이 그래, 좋아, 하고 헤어져버릴 수 있는 사이다. 브랜트는 가슴이 먹먹했다. 그 날 이후로 쭉, 너무 소중해 버리지 못한 꽃 한 송이가 처량해보였다. 마치 자신의 처지처럼. 이단에 대한 분노는 금방 사그라들고, 주체할 수 없는 서글픔에 말문이 막혔다.
이미 떠났구나. 없던 사실이 되어버렸구나. 브랜트는 만약의 경우를 생각해봤다. 내가, 내가 만약 영원히 기억을 잃어버린 척하며 그에게 매달린다면 그가 받아줄까? 브랜트는 웃음을 터트렸다. 한심하긴. 그랬다. 브랜트는 지금 자신의 모습이 무척이나 꼴불견이라고 생각했다. 그가 깔끔하게 정리하길 원한다면 그렇게 해주는 게 도리이다. 브랜트는 충분히 그렇게 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
브랜트는 아무렇지 않은 모습으로 출근했다. 이미 그 안에는 자신을 되찾은 윌리엄 브랜트가 성을 내고 있었지만 브랜트는 최대한 티를 내지 않으려 노력했다. 화려한 것을 좋아하는 그의 성미답게 아주 잊지 못할 날을 만들어주는 거야. 그럼 좀 후련하겠지. 브랜트는 회의실에서 자신을 발견한 벤지를 보며 싱긋 미소 지었다.
"브랜트?"
"내 치프가 되어본 기분이 어땠어?"
"...어?"
"벤자민 던, 선배."
이래뵈도 브랜트는 벤지에게 무척이나 고마워하고 있었다. 그래도 이제껏 벤지가 도와주지 않았더라면 기억을 잃었던 브랜트는 IMF, 그것도 이단의 팀에서 뱅글뱅글 겉돌았을지도 모른다. 두뇌 회전이 빠른 벤지는 금방 상황을 파악하고는 감격에 겨운 얼굴로 브랜트를 끌어안았다.
"워, 왜 이래?"
"브랜트-으-!!"
보고 싶었어, 네가 얼마나 그리웠는 줄 알아? 네 잔소리도 이제 사랑스러워 할 수 있어. 미안해, 다음 임무에 절대로 이단이 뭘 부탁하든 들어주지 않을게. 맹세할게. 브랜트, 사랑해. 다시 돌아와줘서 고마워- 랩을 하듯 속사포처럼 말을 내뱉는 벤지를 보며 브랜트는 당황스럽다는 얼굴로 벤지를 달랬다. 벤지는 절대로 떨어지지 않겠다는 듯 브랜트에게 매달렸고 브랜트는 곤란하다는 얼굴을 하면서도 웃고 있었다.
"진짜로?"
"응?"
"진짜로 다음 임무에는 내 말 잘 들을거야?"
"물론이지!!"
브랜트는 그게 비록 1시간, 아니 10분뒤면 없던일이 될 약속이라 할지라도 좋았다.
"당장 이단에게 연락해야겠어."
잽싸게 핸드폰을 드는 벤지를 막은 것은 브랜트였다. 브랜트는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벤지에게 고개를 저어 보였다. 벤지는 영문을 모르겠다며 브랜트에게 말했다.
"왜? 이 기쁜 사실을 빨리 알려야지! 이단이 지금까지 얼마나-"
"하나만 물어보자, 벤지."
"뭔데?"
"우리가 다시 만날 수 있을까?"
벤지는 브랜트의 표정을 살폈다. 그리고는 브랜트가 장난을 하거나, 빈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리고는 브랜트의 어깨를 쥐었다. 벤지는 두 사람이 그러지 않기를 바랬다. 이단 헌트가 기억하고 있던 윌리엄 브랜트가 없는 지난 한 달간, 옆에서 지켜보는 사람이 다 괴로울 정도였다. 브랜트가 무엇에 대해 불안을 느끼는 지는 벤지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기회만 되면 제인이 이래서는 안 된다고 이단에게 늘 말했다. 아무리 자신들이 알던 '그' 브랜트가 아니더라도 그는 모든 사실을 알아야할 자격이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단은 그 사실을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 벤지는 이단이 자신의 앞길도 가늠하기 힘든 상태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네가 물었잖아."
"......"
"그 날, 이단이 고백하던 날. 그렇게 대답한 건 너였잖아, 브랜트."
"-그랬었지."
"그럼 이번엔 네가 먼저 물어봐."
정 힘들면 내가 도와줄게. 벤지는 브랜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커플 사이에 낀 베스트 프렌드의 역할은 여러모로 피곤한 법이다. 하지만 벤지는 부디 이 일이 잘 마무리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이단의 속내를 브랜트에게 곧이 곧대로 알려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건 선을 넘는 행동이었다. 브랜트라면 충분히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다. 저래뵈도 수석 분석요원이니까. 벤지는 모든 게 잘 될거라 믿었다.
▩
하얀 붕대가 여러 겹 감겨있는 브랜트의 손가락에 입을 맞추며 이단은 잔뜩 성이 난 얼굴로 브랜트를 바라보았다. 기억이 돌아온 것은 좋은데 손은 또 왜 이 모양인지. 브랜트는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다는 뻔뻔한 얼굴로 이단의 이마에 슬며시 자신의 이마를 맞대었다.
"네가 잘못한거야."
"그래서 아무 말도 안 하고 있잖아."
"얼굴은 뭔가 터트리기 일보 직전인데."
이단은 곤란하다는 듯 미간을 찌푸리며 웃었고, 브랜트는 고소하다는 듯 입꼬리를 올렸다.
"나 갖고 싶은 거 있어."
브랜트는 문득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다 무언가 떠올랐다는 얼굴을 하고는 이단을 바라보았다. 이단은 굉장히 의외라는듯 브랜트를 바라보았다. 이제껏 브랜트는 이단에게 그 어떠한 것도 요구하지 않았다. 특히 금전적인 면에서는 더욱 그랬다. 그랬기에, 다른 사람들과 별반 다르지 않는 연애의 순수한 첫 경험의 문턱에 선 이단의 심장이 간지럽게 뛰었다. 브랜트는 자신의 가방에서 생기를 잃고 시들어버린 새하얀 꽃을 꺼내 이단에게 주었다.
"어제 꽃병을 깨트렸는데 바로 시들어버려서-"
진심으로 아쉽다는 듯 꽃을 내려다보는 브랜트를 보며 이단은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이 한꺼번에 몰아쳤다. 브랜트의 꽃은 3년 전 그대로였다. 비록 생기를 잃어 고개를 숙여버렸지만 이단에게는 그조차 사랑스러웠다. 조심스럽게 브랜트에게서 꽃을 건네받은 이단은 자신의 재킷 앞 주머니에 꽃을 꽂았다. 그걸 본 브랜트가 뭐하는 거냐며 꽃을 빼려고 했지만 멀찍이 물러선 이단 때문에 허공에 팔을 휘두르는 것으로 그쳤다.
"얼마든지."
이단은 벌써부터 자신이 선물한 새하얀 장미꽃을 한아름 받아들 브랜트를 생각하며 미소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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