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건 분명 토마스가 러너가 된지 며칠 되지 않아서 생긴 일이었다. 마음 한 구석, 토마스의 속내는 민호에 대한 여러 가지 감정으로 복잡하게 꼬여있었다. 물론 그 밖에도 어쩌다 이곳으로 오게 됐는지에 대한 고찰이 먼저였지만, 지금은 그것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까딱 잘못해서 살해당할 위기를 넘기게 되었고, 그리버에게 찔린 자의 최후를 직접 눈으로 본 토마스는 그날 밤 이상한 꿈을 꾸었다. 이곳으로 온지 얼마 안 돼서 전혀 기억을 하지 못하는 여자아이가 나오는 꿈이나 이상한 연구소가 나오는 꿈을 주로 꾸긴 했지만 그 날 만큼은 전혀 다른 꿈이었다. 너무나도 현실과 같은 꿈이었기에, 토마스는 지금 글레이드에 있는 자신의 모습이 꿈인 것은 아닐까 착각할 정도였다.
제대로 먹고 씻고 깔끔하게 차려입은 토마스의 모습은 딱 그 나이, 열여섯의 모습이었다. 그리고 문득 시선을 던진 길의 끝에는 익숙한 뒷모습이 우뚝 서 있었다. 토마스는 본능적으로 그것이 민호의 등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젠 하다하다 꿈속에서까지 그의 등을 쳐다보게 된 꼴이라니. 토마스는 자조적인 웃음을 지었다. 토마스는 더 이상 민호의 등을 지켜보는 것에 대해 질렸다고 말할 수 있었다. 러너가 되고 난 이후부터 그랬다. 물론 민호는 러너들의 대장이며, 이 글레이드의 기둥인 사람으로 아무것도 모르는 초짜인 자신을 이끌고 보호해주는 것이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었지만, 토마스는 그것에 싫증이 났다. 하루라도 빨리 그의 옆에 서고 싶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토마스는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그런 무의식이 꿈에 반영이라도 된 듯, 토마스 자신이 한심해져야만 했던 이유의 원인이 민호의 옆에 모습을 드러냈다.
알고 있었다. 그를 보는 민호의 시선이 어딘지 모르게 다르다는 것을. 토마스는 무척 똑똑한 아이였다. 그렇기에 이 무의식을 조종하는 것쯤은 별 거 아닌 일이었다. 다정해 보이는 두 사람의 사이를 갈라놓았던 그 날을 불러들였다.
그 땐, 그리버에게 찔려 정신을 놓아버린 자의 말로를 지켜보기에 급급했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벤을 끌고 가는 민호의 모습에 초점을 맞추자 신기하게도 토마스의 시선엔 민호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토마스는 자신이 얼마나 어리석은 짓을 했는지 깨달았다. 차라리 보지 않았으면 더 좋았을 것을, 알면서도 사실은 다 알고 있으면서도 자신의 생각에 못을 박아 넣는 짓을 스스로 하다니. 얼마나 어리석은가.
토마스는 눈을 떴다. 어떻게든 그 꿈에서 벗어나기 위해 정신 나간 짓이라고 욕해도 별에 별 짓을 다했다. 꿈에서 깬 토마스는 도저히 이대로는 다시 잠을 잘 수 없을 것 같아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슴푸레 새벽녘이 밝아오고 있는 하늘이 오묘한 분위기를 띄며 토마스의 가라앉은 마음을 그나마 위로라도 해주는 것 같았다.
“…….”
간단하게 산책이라도 할 겸 주위를 돌아보다 미로 앞에 서 있는 사람의 그림자에 토마스는 발걸음을 멈췄다. 절로 쥔 주먹에 힘이 들어가고 다 부러진 손톱이 토마스의 손바닥을 세게 찔렀다. 토마스의 속이 한 번 더 뒤집어지는 꼴이 된 것이다. 토마스는 자신이 똑똑한 아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지금 복장이 다 뒤집어 질 것 같은 노릇이었다. 똑똑한 만큼, 인정하고 싶지가 않았다. 이미 떠나보낸 아니, 이미 이 세상 사람도 아닌 자에게 질투라는 하찮은 감정을 내보여야 한다는 사실에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슬퍼?”
“…….”
토마스의 존재를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 놀란 기척도 없이 토마스의 얼굴을 바라보는 민호의 모습은 확실히 어딘가 달라 보였다. 강인한 모습 뒤에 감춰진, 그도 그래봤자 아직 어린 소년이라는 이면이 보였다.
“내가 죽였으니까.”
“민호.”
“내가 밀어 넣었으니까.”
토마스를 비켜 굳게 닫힌 미로에 시선을 던진 민호는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토마스는 가만히 민호의 옆에 자리를 잡았다. 다리를 모으고 그 사이에 얼굴을 박은 민호는 토마스의 부름에도 얼굴을 들지 않았다.
“민호, 울….”
“…닥쳐.”
“…….”
반사적으로 튀어나오는 민호의 대답에 토마스는 순간 웃음을 터져 나오려는 것을 가까스로 참았다. 좀 더 민호의 곁에 가까이 붙은 토마스는 민호의 어깨에 자신의 어깨를 맞붙게 했다. 이러면 조금이라도 위로가 되지 않을까 싶은 마음에서 우러난 행동이었다. 섣부른 말로 그를 함부로 위하려고 하는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그저 민호가, 그가 자신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알아줬으면 했다.
“…내가, 대신 곁에 있어줄게.”
“…….”
“벤처럼 뛰어난 러너는 아니더라도….”
“야.”
아까와는 영 딴판으로 되살아난 민호의 목소리에 토마스는 마른침을 삼켰다. 지금과 같은 상황은 꼭 민호가 자신을 호되게 혼을 낼 때나 일어날 법한 상황이었다. 토마스는 어쩔 줄 몰라 하며 민호의 얼굴을 이리저리 쳐다보았다.
“그 녀석 대신이 어디 있어.”
“민호….”
“그 녀석은 그 녀석이고, 너는 너야. 대신이라는 말은 하는 게 아니야. 너도 이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사람이니까.”
“…….”
“두 번 다시는 잃고 싶지 않으니까.”
새벽녘이라 잘 보이지 않던 민호의 짓무른 눈가를 보자 토마스는 가슴이 너무 아팠다. 조심스럽게 엄지손가락으로 민호의 눈가를 어루만진 토마스는 싱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미안해. 바보 같은 소리해서.”
“알면 됐어.”
민호는 얼른 토마스의 옆 자리에 엉덩이를 붙였다. 아까와는 확 달라진 얼굴로 미로를 바라본 민호는 무언가 다짐이라도 한듯 고개를 크게 한 번 끄덕여보였다. 그러고는 한 쪽 입 꼬리를 싹 말아 올리며 토마스를 쳐다보았다.
“알았으면, 신입. 내일부터는 2시간씩 트레이닝이야. 군소리하기 없기.”
“윽, 그런 게 어디 있어! 평소의 두 배잖아!”
“내가 그렇게 말하면 그런 줄 알아.”
토마스는 최대한 잔뜩 울상을 짓고는 불쌍한 척 민호를 바라보았다. 한참 민호를 관찰한 결과 중 하나에서 비롯된 행동인데, 민호는 은근히 우는 얼굴에 약하다는 사실이었다. 그게, 뉴트 한정이라면 한정이지만 말이다.
“그게 내 옆에서 달릴 수 있는 가장 빠른 길이야.”
비명을 지를 뻔했다. 속내를 들켰다는 변명도 뭣도 할 새도 없이 멱살이 잡힌 토마스의 얼굴 바로 앞에 민호의 얼굴이 놓여있었다. 진지하고 올곧게 뻗은 민호의 시선에 토마스는 자신의 시선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눈을 이리저리 굴리다 결국 눈을 감아버렸다.
“그러니 죽지 마.”
가볍게 내려앉은 숨결이 따뜻하기만 했다. 마치, 이것이 살아있는 사람의 숨결이라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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