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좀 같이 가자니까!"
"그러니까 내가 왜 그래야 하는데."
저런, 저런. 또 시작이군. 여유로운 손길로 방패를 닦던 스티브는 수건을 내려놓고는 저 멀리 복도의 끝에서부터 걸어오고 있는 두 사람을 보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울트론의 침공을 어떻게든 막아낸 이후로 어벤져스 타워는 한동안 조용했었다. 죽은 줄로만 알았던 피에트로가 기적적으로 생환하고 나서 며칠은 시끌시끌하기도 했지만 그것도 잠깐 뿐이었다. 사망 판정을 받았던 그가 어떻게 다시 살아날 수 있었는가에 대해서는 아무도 아는 바가 없다. 심지어는 비전도 인간의 생명력이란 참으로 대단한 것이라며 순수하게 놀라워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였을 뿐이다. 피에트로가 다시 살아났다는 사실 자체로도 기적은 확실했으나, 그는 3개월 동안 침대에 누워만 있었다. 하긴 그 상태에서 멀쩡히 돌아다녔다면 그게 더 웃기지. 몇 번은 다시 죽을 고비를 넘기기도 했고, 우여곡절을 수십번이나 겪고서야 그는 무사히 자리에서 일어날 수 있었다. 그리고 그의 옆에는 아주 당연하다는 듯 완다가 있었고, 바튼도 있었다.
스티브는 피에트로가 막 사망했을 때, 바튼의 얼굴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잊을래야 잊을수도 없다. 허무함, 죄책감, 슬픔 등 만감이 교차하며 그와는 대조되게 살아 숨쉬는 작은 아이를 들고 있는 그의 얼굴을. 바튼은 매일 같이 피에트로의 병실에 갔다. 주로 그가 잠든 새벽시간에 병실에 들어가 한참을 서성이다 그냥 나오고는 했지만, 피에트로는 그가 자신의 병실을 찾는다는 소식을 완다에게 들었을 것이다. 그 사실을 본인이 직접 얘기를 꺼낸 모양인지 언벤가부터는 아예 피에트로의 병실에 죽치고 앉아 있었다.
피에트로의 병실은 쉴드의 새로운 기지 내부에 있던 것이라, 스티브도 종종 찾아가고는 했었는데 그 때 마다 병실의 문을 열어준 것은 바튼이었다. 완다는 새로운 어벤져스 육성 훈련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터라 하루종일 같이 있어주지 못한다는 까닭에 와 있는 것이라 설명하는 바튼을 보며 피에트로는 순전히 나 때문이 아니었던 거예요? 하며 깐족대었고, 결국 바튼이 항복선언을 했다. 그래, 너 얼른 나으라고 왔다. 됐냐? 피에트로는 그 말이 무척이나 듣기 좋다는 듯 함박웃음을 지었고, 스티브는 고개를 갸웃할 수 밖에 없었다. 두 사람이 언제부터 이렇게 사이가 좋았더라. 그러나 스티브는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다. 현 어벤져스의 멤버와 임시 어벤져스의 멤버가 친하게 지낸다는 것은 더할나위 없이 좋은 소식이었다.
"오, 세상에. 스티브, 당신 좀 귀엽네요."
언젠가 피에트로와 바튼이 부쩍 친해졌다는 사실을 나타샤에게 말했을 때 그녀의 반응은 스티브를 당황시키기에 충분했다. 나타샤는 아끼는 총을 손질하며 웃었다.
"호크아이는 제 곁을 그리 쉽게 내주는 남자가 아니에요. 3년을 같이 지냈으면서 아직도 모르겠어요?"
그랬던가? 스티브가 기억하고 있는 바튼은 꽤 유연한 남자였다. 다소 성격이 거친면도 있지만, 악한 것은 아니었고 둥글어야 할 때와 모나야 할 때를 잘 알고 있는 남자였다. 스티브의 반응을 보며 나타샤는 여전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뭐, 원래 클린트가 당신을 좋아해서 당신은 그런 걸 잘 못 느꼈을지도 모르겠네요."
그는 원래 좀 취향이 독특해요. 토르보다 묠니르를 더 좋아할걸요? 이런, 스티브는 방심하고있다 나타샤의 말에 잇몸을 드러내며 웃었다. 그게 벌써 몇주전인가. 피에트로는 바튼의 정성어린 간호에 모든 부상을 이겨내고는 병실을 떠날 수 있었다. 이미 훌륭하게 한 차례의 전투를 치른 바가 있으니 스티브는 별 무리없이 그를 바로 훈련 프로그램 참여자 리스트에 이름을 올렸고, 당연한 수순으로 그의 전담 요원의 이름에 바튼의 이름을적었다.
"싫어요."
"...음?"
프로그램의 참여자 명단을 본 바튼은 매우 단호하게 스티브에게 자신이 맡을 훈련요원을 바꿔주던가, 아니면 교관 요원을 부임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스티브는 조금 당황한 티를 숨기지 못한채로 말했다.
"아니, 나는 자네 둘이 마음이 잘 맞는다고 생각했는데?"
"마음이 잘 맞는것과 훈련을 시키는 것은 다른 이야기죠. 그러다 파토나는 꼴 못 보셨습니까? 아, 이건 커플얘기네요. 논외."
"바튼...?"
"차라리 제가 완다를 맡을테니 냇한테 전해주세요. 네가 피에트로를 맡으라고."
평소에 부탁이라고는 잘 하지 않는 그였기에, 스티브는 얼떨결에 알았다고 했으나 문제는 또 다른 곳에 있었다. 언제 소식을 들은 건지 이번에는 뿔이 난 피에트로가 달려와서는 성을 내었다.
"왜 제 교관이 노땅이 아니에요?"
"......"
"나탸사는 완다 교관이잖아요."
스티브는 피에트로에게 바튼이 너 맡기 싫대, 라고 솔직하게 말해줘야 하나 수초간 고민했다. 그 뒤로 한참을 서로 싸우던 둘을 중재시킨 것은 나타샤였다. 나타샤는 현명하게 교관 바튼 하에 훈련 요원 피에트로&완다 막시모프의 이름을 올려 제출하였고, 바튼은 욕을 했다. 바른 말을 써야지. 나타샤가 바튼을 보며 비웃는 것이 왠지 모르게 조금 창피해진 스티브는 당분간은 절대로 팀원들에게 입조심하라고는 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했을 뿐이었다.
▩
우여곡절 끝에 나타샤가 다시 완다를 맡게 되었고, 피에트로는 고스란히 바튼의 몫이 되었다. 요즘 쉴드 내에서는 피에트로와 바튼이 하루의 반나절 이상을 함께 보낸다는 빅 이슈에 들떠 있었다. 피에트로는 훈련 요원 프로그램에도 참여해야 했지만, 주기적으로 재활 훈련도 해주어야만 했다. 그 모든것을 지켜보는 사람이 다름 아닌 바튼이었으니, 그들의 입장에서는 재밌는 이야기임이 틀림 없었다.
바튼은 꽤나 철저하기로 유명했다. 그가 어벤져로서 하는 노력과 고집은 상상을 초월한 것이었다. 쉴드내에 그것을 모르는 사람의 수가 적을 정도였다. 그런 바튼에 비하면 피에트로는 상당히 유연하고, 융통성이 넘치는 사람이었다. 술자리에서 만큼은 죽마고우가 될 수 있는 둘이라도, 쉴드 내에서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그들의 예상과는 전혀 다르지 않게, 그 둘은 훈련 시간만 되면 용과 호랑이가 되어 으르렁거렸고, 훈련인지 실전인지 모르는 대련을 통하여 화를 풀었다.
피에트로는 바튼이 자신의 상대가 될 수 있을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도 그럴것이, 그를 볼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었다. 그래서 대련이 있을때마다 코웃음을 쳤다. 나는 캡틴도 보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노땅. 그러나 피에트로가 한 가지 간과한 것이 있다면,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스티브보다 눈이 좋은 사람이 바튼이라는 것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바튼이 피에트로를 완전히 볼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인가 바튼의 손에 잡힌 피에트로는 당황스러움을 숨기지도 못한채로 엎어치기 한 판을 당하고 나서야 그 잘난 입을 꾹 다물었다.
"뭐, 어떻게..."
"왜, 예상 못했어?"
이 씨, 얄미워. 자신을 보며 비죽이는 바튼을 보며 피에트로는 얼른 움직여 발을 걸었다. 그것은 예상하지 못했는지 꽤나 우스꽝스러운 소리를 내며 자신의 위로 엎어진 바튼을 보며 피에트로는 비명을 질렀다.
"아, 왜 내 위로 쓰러지는 건데!"
"누가 발 걸랬냐, 이 멍청아!"
그 둘을 바라보던 완다만이 한심하다는 듯 웃고 있을 뿐이었다.
▩
"아, 아파. 살살해, 완다."
"안 그러면 내일 근육통 올지도 몰라."
"으, 진짜 너무하지. 살살하는 법이 없어, 노땅은."
피에트로의 등에 파스를 붙여주던 완다는 조심스러운 손길로 피에트로의 흉터를 어루만졌다. 원형에 가까운 형태로, 일그러진 화상자국들은 아마도 평생 피에트로에게 남아있을 것이었다. 피에트로는 가만히 완다를 내려다보며 별 거 아니라는 듯 말했다.
"다 나았잖아. 이제 하나도 안 아프다니까."
"그래."
완다는 장난스레 파스가 붙어있는 피에트로의 등을 손바닥으로 찰싹, 소리가 나도록 쳤고 피에트로는 앓는 소리를 내며 침대위로 고꾸라졌다.
"피에트로."
"왜."
"그가 그렇게 좋아?"
피에트로는 자신의 옆에 누워있는 완다의 얼굴을 천천히 살펴보았다. 완다의 표정은 평소와 다름없었다. 그 사실에 아주 조금, 안도하며 말했다.
"그러는 너는?"
"난 좋아."
그는 내가 일어설 수 있게 해준 사람이니까. 피에트로는 쌍둥이라는 존재가 왜 영혼을 나누어가진 존재라 불리는 지 통감했다. 자신의 손을 꽉 쥐는 완다의 손을 다른 손으로 살살 쓰다듬으며 미소 지었다.
"아주 많이."
▩
바튼은 숨을 쉬는 것도 잊은 사람처럼, 정면의 과녘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팽팽하게 당겨진 시위는 한 치의 떨림도 없었고, 화살은 정확하게 과녘을 향해 있었다. 실수는 없어, 하면 안 돼. 바튼은 습관적으로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바튼의 숨이 멈춘 찰나의 순간, 시위를 당기고 있던 손을 놓았고 화살은 물결을 치며 과녘을 향해 날아갔다. 바튼은 화살이 과녘에 꽂히는 소리를 좋아했다. 과녘을 빚맞추는 법이 없는 그에게, 화살이 박히는 소리는 성공을 의미한다. 그러나 화살이 날아간지 한참이 지났지만 그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피에트로."
마치 마법을 부린 것 처럼, 바튼의 앞에 소리소문없이 나타난 피에트로의 모습에 바튼은 드물게 긴 한숨을 내쉬었다. 피에트로는 당연히 바튼이 화를 내거나, 또 쓸데없는 짓을 했다며 한 소리 할 줄 알았다. 그러나 바튼은 묵묵히 한숨을 내쉬고는 피에트로의 손에 들린 화살을 가져갈 뿐이었다. 그의 얼굴은 무척이나 침착했고, 차분했다.
"노땅...?"
"...실수한 줄 알았잖아."
"아니, 그-"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는 실수해서는 안 돼. 그게 내 일이야.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야."
바튼은 화살을 화살통에 다시 넣었다. 오늘은 훈련 없어. 그러고는 돌아서는 바튼의 앞을 가까스로 막은 피에트로는 울상을 짓고 있었다. 바튼은 무심코 자신이 사소한 실수를 저질렀다는 생각을 했다. 자신의 책임을 굳이 다른이의 어깨에까지 올릴 필요는 없다. 겁부터 잔뜩 주다니. 교관 실격이군.
"미안해, 그럴 생각은 아니었어. 나는 그냥."
"됐어. 다음에 또 이런 장난을 하면 그 땐 네 팔이 날아갈지도 몰라."
펑, 장난스레 말하는 바튼을 보며 피에트로는 웃지 않았다.
그 뒤로 피에트로는 절대로 바튼이 활을 쏠 때에는 근처에도 가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멀리서 그런 바튼의 모습을 가만히 지켜볼 뿐이었다. 바튼은 어느 순간부터 지긋지긋하게 따라붙는 시선이 이상할 정도라고 생각했다. 그러면서도 딱히 피에트로를 부를만한 이유를 만들지 못해 묵묵히 활만 쏘았다. 아, 이건 빗나갔군. 몇번째인지 모를 시위를 놓자마자 바튼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러나 바튼의 예상과는 다르게 화살은 정가운데에 꽂혔다. 바튼은 피에트로를 바라보았다. 처음에 있던 그 자리에 가만히 서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피에트로와 눈이 마주쳤다고 생각한 순간, 바튼은 피에트로를 불렀다.
"이리와."
피에트로는 순순히 바튼의 곁으로 왔다. 그가 근처에 오자마자 확 끼치는 단내를 맡으며 바튼은 장난스레 말했다.
"내가 알고 있는 사람중에 당뇨에 걸린 사람이 있는데, 잘 때 말고 6시간에 한 번씩 인슐린을 맞지 않으면 죽는 녀석이 있어."
"...어, 어."
"작작 먹어라."
바튼은 질색하는 피에트로의 머리를 거칠게 쓰다듬고는 말했다.
"사람이라면 실수를 할 수도 있어, 그렇지?"
"...그렇지."
"그런 내가 실수를 하지 않도록 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에 감사해."
고맙다. 살아있어줘서. 그 순간, 피에트로는 머리를 얻어맞은 것처럼, 머릿속이 새하얬다. 그에게 이런 말을 들을 줄이라고는 상상도 못하고 있었다. 그 때, 그 선택은 순전히 자신의 선택이었고 그 결과로 바튼과 소년은 목숨을 구했다. 피에트로는 바튼이 자신의 병실에 왜 눌러 살았는지도 얼추 짐작하고 있었다. 한 번은 그에게 더 이상 오지 않아도 된다, 라고 말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피에트로는 지금 바튼이 말하는 '실수'가 순전히 화살이 빗나간 것을 말하는 게 아니란 것을 깨달았다.
"그러니까, 안 그래도 된대도 그러네. 언제까지 날 꼬맹이로 볼 생각인거야?"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며 자신을 올려다보는 바튼을 보며 피에트로는 그에게 입을 맞췄다. 미안, 완다. 나 죽을지도 몰라. 그러나 한 편으로, 피에트로는 절대로 두 번 다시는 죽지 않을 것이라 다짐했다. 자신의 삶이, 자신이 살아있다는것이 바튼에게, 그만한 의미가 있다면 얼마든지 다시 한 번 죽어도 악착같이 살아날 것이다.
"좋아. 나도 할 말 있어."
"......."
"나 노땅 많이, 좋아해."
피에트로는 활짝 웃어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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