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od Bye, 애런."
이름이 가지는 의미는 특별하다. 리드는 10년 가까이 알아온 소중한 팀원들, 연인사이가 된지 3년이 되어가는 애인의 이름도 불러본 적이 없다. 반대로 그건 팀원들도 마찬가지였다. 다들 자신을 리드라 불렀고, 유일하게 JJ만이 자신을 스펜스라고 부른다.
"리드?"
"사실 난 당신을 애런이라고 부르기가 겁나요."
이상한 징크스, 불운이라고 불러도 될 만큼 '이름'에 관한 여러가지 일을 겪고난 후, 리드는 소중한 사람의 이름을 부르기가 두려웠다. 마지막으로 이름을 부른 사람은 블레이크였다.
"혹시라도 하치의 이름을 부르면 하치도 떠나갈까봐."
그러나 리드는 그렇게 말하며 웃었다. 뼈가 있는 말을 사실은 그냥 해보는 말이에요, 라는 그런 겉치레로 치장하면서. 하지만 리드도 알고 있었다. 이런 말로 하치를 속일 수 없다는 것쯤은. 그럼에도 거짓말을 한다.
"불렀잖아, 방금."
"불렀죠, 방금."
"무슨 의미야?"
"글쎄요."
하치는 천천히 리드의 앞에 섰다. 리드는 여전히 웃고 있었다. 평소와 같이 어린아이의 개구진 웃음이 아닌, 도저히 속을 알 수 없을 것 같은 그런 표정으로.
"간단한 실험이죠."
"실험?"
"하치가 제 곁을 떠나지 않으면 성공하는 실험이요."
맥없이 풀어지는 리드의 표정을 보며 하치는 은근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난, 나랑 헤어지려고 그러나, 했지. 하치의 말에 리드가 펄쩍 뛰며 손사레를 쳤다. 그게 무슨 소리에요? 난 그런 말 한 적 없어요! 하치는 그러고 싶어요? 순식간에 주객이 전도가 된 상황에 어이가 없어진 하치의 손이 허공을 떠돌았다. 그러자 리드가 크게 웃음을 터트리며 하치의 손을 잡았다. 됐어요, 떠나지나 마요. 약속. 평소와 같이 개구지게 웃는 리드를 보며 하치는 꽉 쥐고 있는 리드의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리드는 부글부글 끓는 속을 애써 진정하려 노력했지만 이미 터진 화산의 분화구는 어떻게 해도 막을 방법이 없었다. 단 한번도 누구에게 이렇게 악감정을 가지거나, 화를 내려고 한 적은 없다. 태어나서 처음 해보려고 하는 일에 두려움도 앞섰고, 여러가지 감정이 까맣게 뒤엉켰다.
"내가 만만해요?"
"뭐라구요?"
"당신은 내가 만만하냐고요."
리드의 얼굴에 웃음기가 가득했다. 사람이 화를 낼때는 울거나, 소리를 지르며 뭔가를 다 때려부수거나. 화를 내며 웃는 건, 싸이코패스나 하는 짓 아닐까. 지금까지 봐왔던 수많은 연쇄살인범들의 얼굴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갔다. 리드는 자신을 보며 당혹스러움을 여실하게 내보있는 헤일리를 보며 웃었다. 보는 눈이 많았다. 헤일리는 물론이고, 하치도 당연하다는 듯 있었다. 하긴, 그건 정말 두말 할 것 없이 당연한 것이었다.
헤일리와 하치가 이혼을 한지 벌써 2년 가까이 지나고 있었다. 이혼한 가정이 재결합을 할 확률은 생각보다 낮지 않다. 당신이 나의 사랑이 아닌 것 같아 갈라섰더니, 당신밖에 없더라. 리드는 이 모든 일련의 과정을 1년 4개월이 넘도록 보고 있었다. 일주일, 못해도 2주일에 한번 씩 하치는 잭을 만나 시간을 보냈고 얼마 전 부터는 리드도 그 자리에 동참하게 되었다. 잭에게는 굳이 이야기하지 않았지만 - 리드의 의견이었다. - 헤일리는 그 놀라운 여자의 감으로 진작 알고 있었다.
"왜요? 나는 가만히 당하고만 있어야 해요? 당신이 이제껏 짓밟아온 내 자존심이 이제는 더 이상 못참겠다네요. 당신이 하치의 전부인일지는 몰라도 그건 말 그대로 전부인이잖아요. 이혼 소송도 다 마친 게 벌써 2년 전이잖아요. 남남이잖아. 그런데 대체 언제까지 이 사람 옷자락을 붙잡고 매달릴거예요? 당신 수입도 그다지 적지 않고, 하치가 충분히 당신에게 괜찮은 액수의 양육비도 주잖아요. 이제와서 '하치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러니까 다시 돌아와달라거나 '잭을 위해서', 라는 말은 더 이상 하지마세요."
"리드-."
"사람들이 많이 오해하는 부분 중에 제일 짜증나는 건, 내가 무슨 하치를 악질적으로 이용해 먹으려고 남자랑 사귀는 인간으로 만들었다는 말도 안되는 음모론이죠. 왜 이 모든 걸 내 탓으로 돌리죠? 아, 하치를 사랑하니까? 그럼 애초에 이혼을 하지 말았어야죠! 결과적으로 내가 하치를 사랑할 수 있는 발판을 만들어준 건 당신이 찍은 그 이혼 서류라는 걸 정말 몰라서 그래요?"
"......"
"나는 이제껏 많이 참아왔고, 이해하려 노력했어요. 그런 나를 처참히 짓밟고 무시한 건 당신이에요. 일부러 당신이 내 앞에서 하치를 애런이라고 부를 때, 꼭 그게 당신의 고유 권한인 것처럼 의기양양하게 구는 것도 그만해요. 짜증날 지경이거든요."
수많은 말을 한꺼번에 뱉어낸 리드는 천천히 숨을 들이쉬고 내쉬었다. 리드는 아무렇게나 널부러진 자신의 가방을 메고는 습관적으로 가방끈을 세게 쥐었다.
"이런 모습, 하치도 처음 보겠죠. 그간 많이 참으려고 애썼거든요. 나는 하치를 사랑하지만, 하치는 나만큼 나를 사랑해주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요."
"리드!"
"그렇지 않으면 헤일리가 여기 와서 이럴리가 없잖아요!!"
"......"
"그녀에게 충분히 나를 사랑한다고 했을까? 사실은 당신도 그녀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건 아닐까, 영원한 불안함 속에 매일같이 내 발로 걸어들어가는 기분 알아요? 하면 할수록 나만 구차해지네요. 참는 사람이 이기는 거라고 했는데. 그래요, 당신이 이겼어요. 이만 꺼져줄테니 둘이 알아서 이야기 하세요. 내일 봐요, 애런."
차라리 욕이라도 할 줄 알았으면. 더 모질게 말할 줄 아는 재주라도 있었으면. 리드는 급하게 하치의 집에서 나왔다. 급한 마음에 턱턱 걸리는 발걸음에 넘어질 뻔한 위기를 여럿 넘기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막상 내일 정말로 하치가 헤어지자고 하면 견딜수나 있어서 그런 말을 하고 나온건지. 한심하기 짝이 없다. 결국 모퉁이를 돌아 그 자리에 주저 앉았다. 사람들이 많이 지나다니지 않는 시간대라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픈 마음에 핸드폰을 들어 전화번호부를 뒤져보았지만 막상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기가 무서웠다. 그 누군가가 전화를 받으면, 받아주는대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술에 취한 사람처럼 주정을 부릴 것 같았다. 한참이나 그 자리에 주저앉아있던 리드는 문자가 도착한 핸드폰 화면을 바라보았다.
[미안해.]
무엇이? 자신을 그만큼 더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아니면, 사랑하기 때문에? 울음이 나올 것 같은 기분이었지만 신기하게도 쏙 들어가버렸다. 망설임없이 다음 발걸음을 내딛는 얼굴은 평소와 다름 없었다.
속이 쓰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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