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타트렉 AU




  1.

  “자네는 내일부터 우주함선 'The Glade'의 함장이라네, 토마스군. 아니, 캡틴 토마스. 앞으로도 스타플릿의 미래를 밝혀주는 별이 되어주게나.”

 

  토마스는 자신의 귀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올해로 토마스는 고작 스물 넷 밖에 안 된 새파랗게 어린 청년이었다. 그런 애송이가 함선에 올라탈 수 있는 크루의 자격을 얻을 수 있는 것으로도 과분할 지경인데 함선의 함장이라니. 토마스는 제독의 방을 나와서 제 볼을 아주 세게 꼬집어보았다. 새된 비명이 흘러나올 정도로 아팠다. 이건 꿈이 아니었다. 토마스는 지금 만세 삼창이라도 할 수 있을 정도로 부푼 가슴을 주체할 수 없었다.

 

  “토마스!”

  “트리사!”

 

  저 멀리서 뛰어오는 소꿉친구를 단번에 안아든 토마스는 어쩔 줄 몰라 하며 웃었다. 트리사의 긴 갈색 머리카락이 토마스의 뺨을 간지럽혔다. 그녀는 아주 환한 미소로 가볍게 토마스의 콧등에 입을 맞췄다. 아주 경사스러운 일이 있을 때만 해주는 것으로, 토마스는 그것이 그녀가 해줄 수 있는 최고의 찬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축하해, 캡틴 토마스.”

  “벌써부터 그렇게 부르지 마. 이상하게 긴장 돼.”

  “그럼, 당연히 긴장해야지.”

 

  트리사의 말에 토마스는 그저 웃을 뿐이었다. 지금은 마냥 기쁜 마음이 넘쳐흐를 뿐이었다.

 

  “그건 그렇고 해주고 싶은 말이 있어. 큼큼, 잘 부탁합니다, 캡틴 토마스. 내일부터 우주함선 ‘The Glade’의 통신 장교를 맡게 되었습니다.”

  “…진짜?”

  “그럼!”

  “세상에! 정말 축하해!!”

 

  이번엔 토마스가 먼저 트리사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어렸을 때부터 20년이 넘게 소꿉친구로 자란 그들에게는 거리낌 없는 애정 표현이었다. 이젠 거의 서로가 남매라고 생각될 정도로 생각하고 있을 정도니 말 다했다. 토마스는 아무래도 오늘 자신의 운세는 최고조일 것이라고 장담했다. 최연소 함장. 생각만 해도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렇다, 토마스는 스타플릿의 최연소 함장이 된 것이다. 자신만의 함선을 가졌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둘도 없는 소꿉친구와 같이 그 배에 오른다. 이것이 기쁘지 아니하면, 대체 어떤 일이 기쁘단 말인가.

 

  “정말 괜찮을까…?”


  하지만 기뻐하던 것도 잠시, 트리사는 금세 짐짓 심각한 얼굴을 하며 토마스를 멈춰 세웠다. 토마스는 그런 트리사의 행동에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다는 뜻으로 어깨를 으쓱였다.

 

  “글레이드호 말이야. …유명하잖아.”

  “…하긴.”

 

  우주함선 ‘The Glade.’ 통칭 글레이드호. 스타플릿의 가장 작은 함선으로 손꼽히는 탐사용 함선 중 하나였다. 사실 처음 들었을 때는 토마스는 다른 의미로 제 귀를 의심해야만 했다. 글레이드호라고 하면 3년 전 우주에서 있었던 대형사고 이후로 멈춰버린 역사의 한 조각이라고 불렸다. 그리고 모든 크루들이 제일 배정받기 싫어하는 0순위 함선이었다.

  그럼에도, 토마스는 그 모든 사실보다 그냥 함장이 되었다는 사실이 무척이나 기뻤다. 그리고 덧붙이자면 토마스에겐 글레이드호에 들어가고 싶어 하는 이유도 있었다. 물론 그것은 크루로서 탑승하고 싶었던 것이 사실이지만, 함장이라고 나쁠 것은 하나도 없었다. 3년 전 사고 이후, 글레이드호에는 함장이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운항을 하지 못한 것이다. 그러나 이제 글레이드호에는 토마스라는 함장이 생겼다. 이는 곧 글레이드호가 다시 우주를 항해할 시간이 왔다는 것이다.

 

  “잘해보자, 트리사.”

  “그래.”

 

  토마스는 자신이 있었다. 이래봬도 스타플릿의 수석이란 수석은 모두 꿰차고 있는 자신이 아닌가. 물론 성적이 좋다고 다 모범적인 함장이 되는 건 아니었지만, 어쨌든. 그리고 무엇보다 든든한 지원군인 트리사가 있었다. 글레이드호의 크루들도 하루 빨리 항해를 하고 싶어 할 것이다. 오랫동안 비워져있던 그들의 함장 자리를 얼른 채워주고 싶었다.

  오늘은 일찍 자자. 그리고 내일을 준비하는 거야. 토마스는 서둘러 기숙사로 돌아갔다.




  2.

  “항해는 무슨 얼어 죽을 항해.”

 

  우주함선 ‘The Glade’의 함장으로 임명받은 지 어언 스물다섯 시간. 토마스는 지금 기관실에 한 발자국도 디뎌보지 못했다.

 

  일어나자마자 한 짓이라고는 제복을 갖춰 입고 당당한 발걸음으로 함선으로 향했다. 그리고 입성했다. 자신이 책임지고 운항을 맡을 함선의 내부에. 나름 토마스는 첫 날 함선의 내부를 상상해보았다. 첫 날이니까 다들 그래도 예복을 갖추어 입고 새로운 함장을 맞이해줄 줄 알았다. 그런데 이게 웬걸. 함선에 발을 딛자마자 쏟아지는 시선들이란 가히 웬 이방인이 들어왔네, 정도였다. 그들 중 몇몇 성격 좋아 보이는 크루들이 다가와 먼저 인사해주지 않았더라면 토마스는 첫날부터 바보 함장이라는 수식어를 달았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글레이드호의 일등 조종사이자, 가장 온화해 보이는 청년의 이름은 벤이었다. 벤은 토마스와 트리사에게 차근차근 글레이드호의 내부를 안내해주었다. 다른 크루들과 다르게 벤은 토마스에게 할 수 있을 만큼 최대한 함장에게 걸맞은 대우를 해주었다. 상관에 대한 예우를 다하는 벤을 보며 토마스는 벤에게 먼저 말을 놓으라고 했고, 벤은 괜찮겠냐며 한 번 묻고는 토마스가 사석에서는 그래도 괜찮다며 다시 허락하자 언제 그랬냐는 듯 토마스를 몇 년 지기 친구처럼 대해주었다. 토마스는 그런 벤을 보며 속으로 눈물을 삼켰다.

 

  그리고 지금, 가장 중요하다고도 할 수 있는 기관실에 도착하자마자 토마스가 받은 것이라고는 문전박대였다.

 

  “갤리, 이래봬도 우리 함선의 함장이야.”

  “지랄. 우리 함장은 3년 전에 죽었거든.”

 

  작게 한숨을 쉬며 곤란한 얼굴을 하며 웃어 보이는 벤을 보며 토마스는 짐짓 심각한 얼굴을 해보였다.

 

  3년 전, 글레이드호에 있었던 대형 사고는 스타플릿의 역사에 한 획을 긋는 사건으로도 유명했다. 그 전까지만 해도 글레이드호는 가장 규모가 작은 함선일지는 몰라도 스타플릿의 최고 함선이라 불리는 다섯 함선 중 하나였다. 그 정도로 명성이 자자했다. 함선이 작은 만큼 워낙 적은 크루들만이 승선할 수 있었기에, 오히려 그들은 그 어떤 함선의 크루들보다 돈독했다고 알려져 있었다.

  토마스는 글레이드호의, 그들의 함장이 어떤 사람인지 잘 알고 있었다. 이름은 알비. 토마스가 가장 존경하는 교관 중 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알비는 3년 전 최악의 우주사고 후 목숨을 잃었다. 자신이 아끼고 아끼는 크루들을 살리고 말이다.

  글레이드호에 함장으로 임명 받았을 때, 토마스는 정말 뛸 듯이 기뻤다. 세상에서 가장 존경하던 교관이 운항한 함선. 자신의 크루들을 모두 살리고 순직한 글레이드호의 영웅. 토마스는 그를 닮고 싶음과 동시에 그를 이기고 싶었다.

  분명 각오하고 있던 일 중 하나였다. 글레이드호의 많은 이들이 아마도 알비를 잊지 못하고 있을 것이라는 것쯤은 예상하고 있었던 사실이다. 하지만 막상 이렇 게 그 사실을 직면하니 토마스는 자신감이 조금 떨어진 것 같았다. 그런 토마스의 심정을 눈치 챈 듯 트리사가 토마스를 조심스레 달래주었다. 토마스는 조금 용기를 내어 기관실의 문을 두드렸다.

 

  “아직 글레이드호의 많은 크루들이 전 함장을 잊지 못한 사실은 잘 알고 있습니다. 내 존재로 인해 불편을 끼쳤다면 죄송합니다. 하지만, 이것만은 분명히 말해야겠습니다. 이 시간 이후로 이 글레이드호의 함장은 바로 저, 토마스입니다. 갤리라고 하셨죠. 기관장님, 함장 명령입니다. 문 여세요, 라고 말하고 싶지만.”

  “…토마스.”

  “인정받고 싶습니다. 제독이나 다른 함장들의 인정도 중요하지만, 나는 그 무엇보다 이 글레이드호의 크루들인 당신들에게 인정받고 싶습니다. 당신이 전 함장을 잊지 못하는 것, 당연합니다. 나도 잊지 못하니까요. 이 세상에서 제일 존경했던 교관님을 말입니다.”

 

  여전히 묵묵부답으로 굳게 닫힌 문 앞에서 토마스는 말없이 웃었다. 그들이 느꼈던 아픔, 절망감, 슬픔. 그 모든 것들을 토마스도 조금은 느낄 수 있었다. 첫 번째 관문이다. 알비의 가르침 중 하나였다. 진정한 함장이 되기 위해 필요한 관문은 총 세 가지. 그 중 제일 중요하고, 제일 먼저해야하는 것은 크루들의 믿음을 사는 것이다.

 

  “함장이 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총 세 가지죠. 믿음, 용기, 그리고 지식. 알비 교관님은 제게 그 셋 중 제일 중요한 것은 믿음이라 가르쳐주셨습니다. 그러니 제가 당신의 믿음을 얻을 수 있는 기회라도 주십시오.”

 

  토마스는 가만히 문에 얹고 있던 손을 거두었다. 안에서 무엇을 하는 지 알 겨를이 없으니 정체 모를 기계 엔진 소리만 들리는 것 같았고, 토마스는 조금 실망한 얼굴을 하곤 트리사를 바라보았다. 트리사는 그런 토마스에게 넌 최선을 다했다며 위로해주었다.

 

  “우리 못생긴 기관장님은 그렇게 다루는 게 아니야.”

 

  뒤에서 들린 목소리에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본 토마스의 품으로 열쇠 꾸러미가 던져졌다.

 

  “뉴트.”

  “가끔 보면 벤 너도 좀 심술궂은 면이 있어. 우리 새내기 함장님한테 그런 장난치면 못 써요. 너도 열쇠 가지고 있잖아?”

 

  뉴트라 불린 청년의 말에 토마스는 완전 얼이 빠진 얼굴로 벤을 올려다보았다. 그런 토마스의 시선에 벤은 좀 무안한 모양이었는지 시선을 피하다 트리사와 정면으로 마주치자 어색하게 웃으며 사과를 전했다.

 

  “미안. 그냥 네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 싶어서. 네 말대로 우리들은 아직 알비를 잊지 못했으니까.”

 

  뉴트는 벤의 말이 끝나자마자 토마스의 어깨에 팔을 올리며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장난기가 가득한 앳된 얼굴에 토마스는 함장의 체통 따위는 이미 저 멀린 던져버린 지 오래였다. 뉴트는 그런 토마스를 보며 싱긋, 웃어보였다. 이 세상에서 웃는 얼굴이라고는 트리사가 제일 예쁜 줄 알았던 토마스는 새롭게 배운 사실을 머릿속에 새겼다.

 

  “난 우리 함장님 마음에 드는데. 이름이 뭐라고?”

  “토마스. 토마스에요.”

  “뭘 그렇게 딱딱하게 구시나. 내 이름은 뉴트야. 토마스라, 그럼 토미라 불러도 되겠네?”

 

  토마스는 살며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연한 금빛 머리카락에 새하얀 피부는 어느 여자아이의 것보다 좋아보였다. 똑 부러진 인상에 새하얀 가운이 굉장히 잘 어울렸다. 가운 앞주머니 위 달린 명찰에 적힌 이름은 Newt. 뉴트였다. 토마스는 그 이름을 알고 있었다. 3년 전 글레이드호의 1등 조종사였던 크루의 이름이었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지금은 의료 쪽으로 방향을 돌려 아예 장교 자리를 꿰차고 있을 정도의 실력가라고 들었는데. 그런 것 치고는 상당히 어려보이는 외모에 토마스는 무심코 뉴트를 빤히 쳐다보고 말았다. 토마스의 시선에 뉴트가 자기 얼굴에 뭐가 묻었냐고 물어보지 않았다면 토마스는 한참이나 더 뉴트의 얼굴을 바라봤을 것이다.

 

  “못난이 기관장, 빨리 문 열어. 안 그러면 내가 열고 들어간다!”

  “…누가 못난이 기관장이야!”

  “오우, 안녕. 오랜만이야, 갤리.”

  “난 안녕하지 못하다. 썩 꺼져.”

 

  뉴트의 말 한마디에 굳게 닫혔던 문이 벌컥 열리는 것을 보고 토마스는 입이 떡 벌어진 채로 뉴트를 바라봤다. 뉴트는 토마스에게 저 녀석은 이렇게 다루는 것이라며 윙크를 하고는 토마스의 품에 있던 열쇠를 가리켰다.

 

  “기관장. 이래봬도 함장이라고.”

  “…….”

  “스타플릿 최고 수석 기관장님.”

  “알아!”

 

  갤리는 싱글벙글 웃고 있는 뉴트를 한 번 쏘아본 후, 토마스를 힘껏 노려보았다. 그 시선이 어찌나 따가운지 토마스는 무심코 목이 뻣뻣하게 굳는 것 같았다.

 

  “잘 들어, 애송이 함장. 만에 하나 글레이드호에 흠집이라도 났다가는 넌 그 날로 제삿날인줄 알아.”

  “에이, 항해하다보면 그럴 수도 있지!”

  “넌 좀 닥쳐봐!”

 

  토마스는 지금 왜 자신이 이 둘의 싸움에 끼어들어 있는 처지가 된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나자 본격적으로 갤리가 뉴트를 물어뜯을 기세로 덤벼들었고, 뉴트는 그걸 아주 우아하게 피해 다녔다.

 

  “저 둘이 원래 저래. 꼭 초등학교에 온 것 같지?”

  “아…. 그, 그래.”

 

  그런 둘을 보며 인자하게 웃는 벤을 보며 토마스는 얼핏 벤에게서 그리운 엄마의 모습을 겹쳐볼 수 있었다.

 

  “자, 그럼 제일 중요한 녀석을 만나러 가볼까? 토미.”

 

  뉴트의 말에 토마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3.

  “민호는?”

 

  아까와는 다르게 뉴트와 같이 함교로 돌아오자 짐짓 분위기가 달라져 있는 것을 토마스는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꼭 그 시선이 ‘어떻게 저런 놈이 그 갤리를 설득할 수 있었던 거지?’ 라는 시선이었다. 토마스는 조금 어색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아마도 방에 있을 거야.”

 

  뉴트의 질문에 이어진 벤의 대답에 뉴트의 얼굴이 한 순간 서글퍼졌다. 아까까지만 해도 그렇게 화사하게 웃던 아이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가히 무서우리만큼 울상이 되어버린 얼굴에 토마스는 자신의 마음이 다 아픈 것 같은 그런 느낌이었다. 토마스는 짧게 탄식했다. 뉴트의 얼굴이 그렇게 슬퍼질 법한 일인 것이 당연했다. 토마스는 비워져 있는 일등 항해사의 자리로 시선을 옮겼다. 그 자리의 주인이자 앞으로 자신의 옆에서 자신을 보좌해줄 민호는 일찍이 이 글레이드호의 일등 항해사로 한 때는 토마스의 직속상관이었던 사람이기도 했다.

 

  스타플릿에는 다양한 종족이 교관과 생도로 생활하고 있었다. 토마스는 순수한 인간이었으며, 알비도 그러했다. 하지만 민호는 그렇지 않았다. 민호는 스타플릿에서 가장 희귀한 종족 중 하나인 벌칸인이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하프의 하프인 벌칸. 4분의 1만이 벌칸의 피가 흐르는 벌칸계 지구인이었다. 원래 대체적으로 벌칸들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이성적이고 원리원칙에 어긋나는 일은 하려고 하지도 않으며, 다른 종족과의 교류도 워낙 적은 탓에 혼혈이 태어나는 것이 희귀한 종족 중 하나인데 그런 종족의 피가 4분의 1밖에 섞이지 않은, 한 마디로 말하자면 벌칸의 손자인 그가 얼마나 생도들의 구설수에 오르락내리락 했는지는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본디 사회적 동물이라는 것이 자신과 같은 것은 품으려 하고, 자신과 다른 것은 배척하려 하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다른 종족의 피가 섞인 민호가 다른 생도들과 어울려 다니지 못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거기다 아무리 지구인에 가깝다 해도 벌칸인은 벌칸인인지라, 민호는 그 어떤 사람보다 월등히 강하고 똑똑했다. 그렇기까지 하니, 다들 민호와 어울려 다니려 하질 않았던 것이다.

  뻔하디 뻔한 이야기였지만, 그들 중 유일하게 민호와의 친분을 자랑하는 사람이 바로 알비였다. 우스갯소리로 알비가 항상 하고 다니던 말이 있었는데, 모든 벌칸인이 민호 같았으면 이미 벌칸은 멸망하고 없었을 것이라는 농담을 하고 다니기도 했다.

  알비가 글레이드호에 함장이 되었을 때, 무척 당연하다는 듯 민호는 일등 항해사가 되었다. 다시는 볼 수 없는 최고의 조합이라고 불리는 만큼 그들에 대한 스타플릿의 기대치는 월등히 높았고, 그들은 보란 듯이 글레이드호를 스타플릿의 최고 탐사선을 만들어내기 까지 했다.


  그게 3년 전, 그 사고가 일어나기 전까지의 일이었다. 그 당시 사건 보고서에는 이렇게 적혀져 있었다.

 

  - 우주력 2384년. 4월.

  글레이드호는 탐사 도중 무장을 준비하고 있던 로뮬루스인들의 함선에 의해 파괴당했으며 사상자는 총 7명. 당시 일등 항해사였던 민호의 기록에 따르면 함장의 모습을 본 마지막 사람은 본인이며, 함장은 크루들을 살리기 위해 자신을 희생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에 스타플릿에서는 자신을 희생하고 총 43명의 크루를 살린 글레이드호 함장 알비에게 명예 순직 훈장을 수여한다.

  

  민호는 알비의 가장 믿음직한 일등 항해사인 동시에 가장 친한 친우였으며, 그의 마지막을 지켜본 유일한 사람이었다.

 

  글레이드호가 그 이후로 탐사를 멈추고 정거장에서 잠들어 있던 큰 이유 중 하나는 물론 그들을 이끌 함장이 없다는 이유도 있었으나, 일등 항해사였던 민호가 항해를 포기했다는 이야기가 떠돌았기 때문이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민호는 알비의 죽음을 자신의 책임이라 생각하고 자신의 방에 틀어박힌 지가 벌써 3년이라는 것이다.

 

  “그의 방은 어디에 있어?”

  “미리 말해두겠는데. 그 녀석 고집은 정말 황소고집이야. 갤리보다 더 하다고.”

  “뭐. 그 정도는 나도 알아. 그리고 정 그러면 그 땐 네가 도와주면 되잖아. 아까처럼.”

 

  뉴트는 토마스의 대답이 조금 마음에 든 듯 울상인 얼굴은 집어치우고 다시 싱긋 웃으며 토마스를 민호의 방으로 안내했다. 벌써부터 크루를 부려먹을 생각을 하다니, 글러먹었네, 라는 뉴트의 말을 토마스는 내 크루들이니까, 라는 말로 일축했다. 그 말에 뉴트는 돌연 그 자리에 멈춰 섰다.

 

  “민호를, 데리고 나와 줘. 부탁이야.”

  “…물론이지.”

 

  차마 뉴트에게는 다 말하지 못했지만 토마스에게는 반드시 민호가 제 옆에 있어야만 하는 이유가 있었다.

  민호의 방 앞에 도착했을 때, 뉴트는 거의 비명을 지를 기세로 민호의 방문을 쳐다보았다. 뉴트의 시선을 따라 토마스의 시선이 도착한 그곳에는 민호가 있었다. 단정하게 예복을 갖춰 입고 가볍게 뒷짐을 지고 자신을 바라보는 민호의 모습에 토마스는 조금 어깨가 움츠러드는 기분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뉴트가 바람 소리가 날 정도로 달려가서는 민호에게 달려들었다.

 

  “민호!!”

  “뛰다 넘어지면 네가 그렇게 자랑하는 코 깨진다, 멍청아.”

 

  뒤늦게 다가온 토마스를 보며 민호는 가벼운 목례로 인사를 대신했다. 예전 그 위풍당당했던 민호의 모습과 전혀 달라진 게 없어 보이는 모습에 토마스는 그가 진정으로 꿈꿔오던 완벽한 함선의 모습이 하나씩 갖춰지고 있다는 사실에 벅찬 감동을 느꼈다. 어디 도망이라도 갈까 민호의 옆에 꼭 붙어 있던 뉴트를 조심스럽게 떼어낸 민호는 진지한 얼굴로 토마스를 바라보며 말했다.

 

  “함장이 된 것을 축하드립니다. 토마스.”

  “고맙습니다. 앞으로 잘 부탁합니다, 민호.”

  “…아니요.”

 

  민호의 말에 뉴트도 놀란 듯 그게 무슨 소리냐며 민호의 팔을 붙잡았다. 민호는 굳이 뉴트의 팔을 떼어내려 하지 않았다. 그저 시선은 가만히 토마스를 마주한 채로 여전히 그 단정해 보이는 강단 있는 얼굴로 말을 이었다.

 

  “오늘부로 글레이드호에서 떠나겠습니다.”


 

 

  4.

  “짐은 미리 제 기숙사로 보내두었으니, 바로 글레이드호에서 하선하겠습니다.”

  “민호!”

 

  청천벽력 같은 민호의 말에 토마스는 영혼이 날아가는 것 같은 경험을 하고 있었다. 이건 말도 안 돼. 장난일거야. 장난이라고 말해줘. 영혼 없이 웃어 재끼는 토마스를 보며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트리사가 얼른 토마스의 어깨를 흔들어 토마스를 현실 세계로 끌어 올렸다.

 

  “허락 못합니다.”

  “…….”

  “함장 명령이에요. 난 글레이드호의 일등 항해사는 당신 아니면 인정 안 할 겁니다.”

  “…미쳤습니까?”

  “안 미쳤습니다. 스타플릿에는 제가 연락해서 당신의 짐 모두 다시 귀환조치 시킬 테니 이 함선에서 한 발자국도 나갈 생각하지 마세요, 민호.”

  “잘한다, 토미!”

 

  금세 민호의 옆에서 토마스의 옆으로 옮겨 붙은 뉴트는 꽤 섭섭한 얼굴이 섞인 조금 차가워 보이는 표정으로 민호를 쏘아보았다. 그런 뉴트의 행동에 당황한 듯 하면서도 여전히 꿋꿋하게 토마스를 노려보던 민호가 작은 한숨을 쉬었다.

 

  “내가 그렇게 가르쳤습니까?”

  “뭐가요.”

  “이게 보자보자 하니까…. 토마스 생도. 내가 함장이란 존재는 본디 크루들에게 명령을 내리면 다 되는 줄 아는 허접한 존재로 가르쳤냐고 묻는 겁니다.”

  “아니요. 당신은 절대 그렇게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민호 교관. 그렇지만 크루는 함장의 명령에는 따라야 한다는 스타플릿의 법이 있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아는 건 민호 교관일 텐데요. 그리고 저 이제 생도 아닙니다. 함장이라고요. 그리고 점점 예전 버릇 나오시네요. 그냥 말 편히 하시죠? 전 당신이 예전에 저한테 했던 말 똑똑히 기억하는데. 방송으로 해드릴까요?”

  “…까불면 죽는다 했다.”

  “이래야 당신이지.”

 

  민호의 굳은 얼굴에 점점 금이 가는 것이 눈에 훤했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상황으로 분위기가 흘러가자 뉴트는 가만히 트리사의 옆에 서서 으르렁 거리는 토마스와 민호를 바라보았다. 꼭 저와 갤리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아 기분이 새로웠다. 항상 저와 갤리를 바라보던 벤의 기분이 이러한가, 새롭게 배울 수 있었다.

 

  “빌어먹을 애새끼….”

  “거, 말버릇 험한 거 아직 못 고치셨나 봅니다.”

 

  결국 먼저 시선을 돌린 것은 민호였다. 묘하게 승리감에 도취된 토마스는 팔짱을 끼고는 민호를 바라보았다. 좀만 더 있었으면 팝콘이라도 구워왔을 법 했던 뉴트는 말도 안 된다는 말만 중얼거렸다. 보다 못한 트리사가 먼저 토마스에게 물었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인지 설명해 줄 사람? 둘이 아는 사이야?”

 

  트리사의 말에 동시에 트리사를 쳐다본 토마스와 민호의 표정은 분명하게 극과 극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내 생도였으니까.”

  “내 교관이었으니까.”

  “그럼 네가 예전부터 말한 그 교관이….”

  “맞아. 민호야.”

 

  와, 트리사는 감탄을 금치 못했다. 곧 자신은 낄 자리가 아닌 것 같다며 뉴트와 같이 함교로 돌아가 버리고 말았다. 뉴트는 왜 자기까지 끌고 가냐며 아우성이었지만 이 일은 토마스에게 맡기면 될 것이라는 한 마디에 얌전히 트리사를 따라 나섰다.

 

  “내가 당신의 가르침 중 이거 하나만은 똑똑히 배웠다고 말하죠. 절대로 포기하지 않을 겁니다.”

  “……왜?”

  “약속했잖아요! 5년 안에 함장이 되면 내 항해사가 되어주기로.”

  “내가 항해사를 못하겠다면.”

  “내가 아는 당신은 이렇게 약한 인간이 아니니까 그런 말 함부로 하는 사람 아니란 거 알아요.”

  “못해.”

  “…….”

  “못한다고.”

  “싫어요!”

  “억지 부리지 마!”

  “싫다니까!!”

 

  도저히 안 되겠다 싶은 모양인지 한 대만 갈겨줘야겠다고 생각한 민호가 팔을 움직이자 재빨리 그 팔을 잡아챈 토마스가 민호를 벽으로 밀어 붙였다. 팔을 들어 올리려는 자와 그 팔을 올리지 못하게 내려 누르려는 자의 쓸모없는 소모전이 한참 지속될 동안 토마스와 민호는 서로를 묵묵히 노려다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 먼저 입을 연 것은 토마스였다.

 

  “내 항해사는 당신이 아니면 안 된단 말이에요. 이렇게까지 말해도 모르겠어요?”

  “…….”

  “왜 그 사람은 되고 나는 안 되는 건데요?”

  “토마스.”

  “왜 알비는 되고 나는 안 되는 건데요!”

  “톰!”

  “…….”

 

  흥분했던 모양인지 거친 숨을 몰아쉬던 토마스는 단단히 붙잡고 있던 민호의 팔을 놔주고는 민호에게서 한 발자국 물러섰다. 미안해요, 실수했어요. 고개를 숙이고 손으로 이마를 짚은 토마스의 목소리는 한 없이 서글프게 들렸다.

 

  “…그런 말을 하려던 건 아니었는데.”

  “…내 말 잘 들어.”

  “…….”

  “난 두 번 다시 내 함장이 죽는 꼴을 보고 싶지 않아. 처음에는 그게 알비였고. 너는 더더욱 싫어. 알아들어?”

  “민호….”

  “너 나 좋아한다고 했지.”

 

  토마스는 민호의 말에 심장이 멎은 것 같았다.  그래, 그랬다. 그랬기에, 토마스는 무슨 일이 있어도 민호를 자신의 일등 항해사로써, 자신의 옆에 두고 싶었던 것이다. 처음 만난 순간부터 토마스는 민호에 대한 자신의 마음을 확신했다. 그리고 정말 끈질기게 민호에게 자신의 온 마음을 쏟아 부었다. 그러던 중 민호가 알비와 함께 우주로 떠난다고 했을 때는 삼일 내내 밥도 못 먹고 하루 종일 기숙사에 틀어박혀 살았다. 그 때 민호가 토마스에게 해준 약속이 아니었더라면 토마스는 스타플릿을 관뒀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 정도로 그 때, 스무 살 토마스에게는 중요하고 심각한 문제였다. 그 날 이후, 이 약속 하나만 계속 새기면서 5년을 버텼다. 그리고 지금에서야 그 꿈에 거의 다다랐는데, 그런데….

 

  “…그걸 아는 사람이 그래요?”

  “그러니까 그러지.”

 

  토마스는 민호에게 도리어 묻고 싶었다. 자신이 그걸 이해해 줄 만큼 정신적으로 성숙한 사람일 것이냐고, 진정으로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냐고. 토마스 스스로의 대답은 NO. 절대 아니었다.

 

  “그러니까 옆에 있어주면 안 돼요?”

  “…너.”

  “그렇게 되지 않도록 당신이 옆에 있어주면 안 되는 거냐고요. 그럼 이렇게 생각해봐요. 당신이 내 곁에 없는 데 내가 어디 가서 우주의 먼지라도 되어버리면! 그걸로 당신은 괜찮은 거냐고요.”

  “대체 그런 비논리적인 말이 어디 있어!”

  “여기 있어요. 여기! 몰라요, 당신은 나한테 이해를 구하려고 하는 건지 몰라도 난 전혀 이해 못하니까 그런 줄 알아요. 나는 욕심도 많고, 당신 같은 어른도 아니고, 또…. 무엇보다 내가 그냥 당신을 엄청 좋아하니까!!”

  “…….”

  “안 죽을 거예요. 죽어도 안 죽을 거고 당신이 죽으라고 해도… 는 조금 생각해보겠지만 아무튼 아니, 안 죽어. 안 죽는다고. 그러니까 한 번만 나한테 져주면 안 돼요…?”

 

  처음과 달리 조금은 삐딱한 자세로 팔짱을 끼고 토마스의 말을 듣고 있던 민호는 토마스의 밑도 끝도 없는 장황한 말에 질렸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너 내가 도대체 몇 번이나 져주고 있다고 생각하냐?”

  “…네?”

  “…단 한 번도, 져본 적 없는 주제에.”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다는 멍청한 얼굴을 하고 있는 토마스의 팔을 툭, 쳐낸 민호는 그대로 함교로 발걸음을 돌렸다.

 

  “…민호?”

  “뭐하십니까? 다들 함교에서 기다립니다.”

  “…….”

  “토마스 함장님.”

 

  언제 그랬냐는 듯, 토마스의 얼굴이 어린 아이처럼 환해졌다.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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