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렌은 괴로운 탄성을 터트리며 눈을 떴다. 텐트 밖에서 벌써 사람들이 아침을 맞이하는 소리가 들렸다. 아직 잠기운이 다 가시지 않은 모양인지 어설프게 눈을 비비며 일어나던 글렌은 자신의 허리를 감고 있는 단단한 팔을 보며 숨을 삼켰다. 떨어진 시선 끝 오랜만에 곤히 자고 있는 데릴을 보니 절로 웃음이 나왔다. 그러다 곧 속옷만 덜렁 입고 있는 꼴에 얼굴이 확 달아오르고 말았다.
“…….”
곧 뒷목이 서늘해지며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 같았다. 아침 날씨는 이상하리만큼 쌀쌀했다. 조심스럽게 데릴의 팔을 치우려 하자 짧은 욕설과 함께 데릴이 눈을 떴다.
“아, 깼어요? 미안해요, 깨우려고 한 게 아니라….”
“시끄러워.”
“…그, 미안….”
갑자기 입술을 겹쳐오는 그 덕분에 글렌의 뒷말은 자연스레 먹히고 말았다. 버둥거리는 글렌의 위로 올라타 그를 밀어붙이는 데릴의 모습에 글렌은 마치 어젯밤이 되풀이 되는 것 같아 난처해졌다. 데릴이 훌륭한 사냥꾼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같은 남자인데 이렇게 체격 차이가 날 줄은 몰랐다. 혹시라도 그가 다칠까봐 진심으로 밀어내지도 못하는 글렌의 주먹은 데릴에게 있어 그저 솜방망이에 불과했다. 글렌의 턱을 거칠게 잡아 올린 데릴은 말 그대로 글렌의 입술을 집어 삼켰다. 도망가려는 혀를 붙잡아 옭아매고 그의 입안을 원하는 만큼 실컷 헤집으며 놀았다. 가끔 참을 수 없이 흘러나오는 비음 섞인 신음소리가 미치도록 색스러웠다. 어설프게라도 맞춰보려는 글렌의 노력이 가상해 데릴은 최대한 상냥하게 그의 입술을 탐했다. 물론 그것은 데릴의 기준에서였지, 글렌의 기준에서는 전혀 상냥하지 않았다는 것이 흠이었다.
“아… 침, 이거든요…! 읏, 데릴…!”
글렌은 속으로 지금까지 살면서 단 한 번도 믿어본 적 없는 신의 이름을 부르짖었다. 체격 차이만 많이 나면 될 것이지…. 글렌은 고개를 저었다.
“꼬마야, 여기가 누구 텐트지?”
“…데릴 씨 텐트죠….”
“그래. 내가 나가기 전엔 아무도 이 근처로 안 와.”
이대로라면 정말 생명의 위협을 느낄 것 같은 글렌은 죽을힘을 다해 데릴을 밀어 내었다. 다행히 데릴은 순순히 물러나주었고, 글렌은 텐트의 구석으로 물러났다.
“나도 알고 있지만 아침은 너무하다고요. 오늘은 가서 식료품도 가져와야 하고….”
“뭐?”
“…네?”
“방금 뭐라고 했어.”
“식료품을 가져와야….”
순식간에 무거워진 데릴의 분위기에 글렌은 숨을 죽였다. 가끔, 글렌에게 있어 데릴은 무척이나 낯선 존재였다.
글렌은 데릴이 좋았다.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좋았다. 그에게 목숨을 빚진 정도도 꽤 많았고, 도움은 수도 없이 받았다. 그러나 그것 외에도 그에게 끌리는 이유는 여러 가지였다. 글렌은 데릴이 온전히 데릴로써 살아남기를 바랐다. 그러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들과 하하 호호 떠들며 어울릴 정도는 되지 못할지언정 시선이 닿는 곳에는 있어야 했다. 글렌은 데릴이 그가 자신을 표출하는 것만큼 날카로운 사람은 못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는 작은 여자아이를 위해 꽃을 따줄 정도로 상냥했고, 말은 모질게 해도 그들이 정신을 차리고 스스로를 다독일 수 있을 정도로 다정한 사람이었다. 데릴은 단지 표현하는 방법을 모를 뿐이다. 글렌만이, 그것을 알고 있었다.
“내가 뭐라고 했지?”
“데릴, 내 말 좀 들어봐요. 내가 가야해요.”
“넌 그렇게 말하고 가서는 하마타면 저 세상 사람이 될 뻔했어, 알아? 거지같은 새끼들한테 붙들려갔을 때는 또 어떻고. 나 외에, 네 몸에 손대는 것들은 그 누구라도 용서하지 않아. 그런 일을 만들 가능성을 주는 사람들 모두.”
“데릴.”
데릴은 가끔, 이 조그마한 동양인 꼬마 녀석이 너무 두려웠다. 데릴에게 있어 글렌은 잃는 것이 두려울 만큼 소중한 사람이었다. 항상 소중히 여기는 것은 모두 잃어버린 데릴이었기에 지금 살아있는 순간에도 절대로 무엇을 잡지는 말자고 생각했다. 소중한 것, 지키고 싶은 것 사소한 것 하나라도 만든 순간, 그것을 앗아가는 이 빌어먹을 세상에 신물이 났다. 마지막으로, 이번만큼은 제 목숨과 맞바꿔서라도 지키고 싶은 것이 하나 생겼는데, 글렌은 이런 데릴의 속을 너무 훤히 꿰뚫고 있다. 그리고 데릴에 대해서는 모든 것을 알았다. 자신을 모질게 대해도 그것이 상냥함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것을 알았고, 이렇게 결국 자신이 화를 내어도 그는 갈 것이다. 가야만 했으니까. 그리고 자신은 그를 보내주겠지. 이 모든 일련의 과정을, 글렌은 다 알고 있었다.
“아니, 내 이름 부르지 마.”
“데….”
“그 망할 다리를 움직이지도 못하게 만들기 전에.”
글렌은 데릴의 말에 살짝 놀란 듯 했지만, 이내 침착하게 천천히 데릴에게로 다가왔다. 가볍게 데릴의 뺨을 감싼 손의 체온이 이상하리만큼 따뜻했다. 그대로 무릎을 꿇은 채로 그의 이마, 콧등에 조심스럽게 입을 맞춘 글렌은 아예 데릴의 얼굴을 두 손으로 살며시 감싸 쥐었다.
“살고 싶어요, 데릴.”
“…….”
“당신과 같이 살고 싶어요. 이 세상이 다 글러먹었어도 상관없어요. 당신만, 당신만 같이 있어주면 돼요. 그러기 위해서라면 난 뭐든 할 수 있어요.”
입술에 가볍게 맞닿고 떨어지는 글렌의 입술을 빤히 바라보던 데릴은 다시 한 번 그의 입술을 탐했다. 글렌은 천천히 데릴의 목을 감싸 안으며 그의 품에 자신을 맡겼다.
“……그, 달릴 수는 있게 해줘요….”
한창 글렌의 목에 입술을 묻은 데릴이 웃는 것이 피부로 생생하게 느껴졌다. 긴장한 탓인지 잘게 떨리는 허리를 그의 탄탄한 손이 붙잡아주었다.
“좋아.”
글렌은 조심스럽게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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