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7시 정각. 갤리는 마법처럼 눈을 떴다. 분명 어젯밤에…. 허벅지를 무겁게 짓누르는 무게에 느릿하게 고개를 돌리니 자신의 허벅지를 베개인 냥 베고서는 세상모르게 자고 있는 토마스의 얼굴이 보였다. 그 얼굴이 어찌나 멍청해 보이는 지 갤리는 절로 한숨이 나왔다. 아직 잠이 덜 깨서 그런지는 몰라도 세상이 느리게, 느리게 움직이는 것 같았다. 그리고 곧, 갤리의 우렁찬 고함소리에 토마스의 눈이 떠졌다.
“당장 못 일어나, 이 똘추 새끼들아!!”
“뭐야, 불났어?!”
“아오, 머리야…….”
갤리의 고함소리에 동시에 머리를 든 세 남자가 좀처럼 눈을 뜨지 못한 채로 갤리를 쳐다보았다. 잠기운에 휘청 이던 토마스가 몸을 지탱하기 위해 바닥을 손으로 짚자 파삭, 하는 소리와 함께 무언가가 손바닥을 콕콕 찔렀다. 곧 자리에서 일어나기 위해 몸을 일으킨 뉴트의 발에 채여 맥주병이 넘어졌다. 한심하다는 듯 두 사람을 보고 웃던 민호는 뉴트가 쏟은 맥주에 미끄러져 그대로 TV장에 머리를 박았다.
“씹, 존나 아파…….”
민호의 말이 끝나자마자 미친 듯이 웃어 재끼는 뉴트와 토마스의 얼굴을 보며 갤리는 슬슬 혈압이 올라가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엉망진창으로 어질러진 거실, 고급 카펫 위 쏟아진 맥주, 토마스가 웃을 때마다 흩날리는 과자 부스러기.
“이 머저리들아!!!!!!”
오전 7시 10분. 폭풍처럼 몰아드는 갤리의 잔소리가 섞인 고함 소리와 함께 그들의 아침이 시작되었다.
2.
“그 넓은 집에서 혼자 살 생각이야?”
“잘 모르겠어.”
알비의 말에 갤리는 어깨를 한 번 으쓱이더니 흘러내린 가방을 고쳐 매었다. 부모님의 사정에 의해 이번 학기가 시작될 때부터 혼자 살게 된 갤리는 무식하게 넓기만 한 자신의 집을 떠올리며 한숨을 쉬었다.
“글레이드잖아? 좋게 생각하라고.”
“너무 넓어.”
“그러니까 같이 살 사람을 구해보는 게 어떻겠냐고.”
작게 한숨을 쉰 갤리는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글레이드라 하면, 위키드 대학교의 학생들이라면 누구나 살고 싶어 하는 top 1순위 주택가가 모여 있는 구역이었다. 수업 시작 10분 전에 일어나도 지각을 하지 않을 수 있는 마법의 집, 넓고 쾌적한 집으로 유명한 주택가였으나 그 명성이 그러하듯, 상상을 초월하는 집값에 실제로 글레이드 내부에 살고 있는 학생은 몇 되지 않았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갤리는 쉽게 룸메이트를 구할 수가 없었다. 괜히 다른 아이들의 입에 자신의 이름이 오르락내리락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긴, 부모님이랑 같이 사는 것도 아니고 혼자 그 글레이드의 주택에 산다니. 무슨 영화 속에서나 나올 법한 이야기지.”
“…….”
“내가 한 번 알아봐줄까?”
“뭐?”
“믿을만한 녀석으로 말이야.”
“고마워, 알비.”
“뭘.”
싱긋 웃는 알비의 얼굴에 갤리는 어딘지 모르게 안심이 되었다. 적어도 알비라면 이 위키드 대학교에서 가장 믿을 수 있는 녀석으로 꼽을 수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이런 생각을 했던 것도 이때뿐, 갤리는 앞으로 닥쳐올 자신의 운명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
수업이 끝나자마자 집으로 돌아온 갤리는 텅 비어있는 넓은 집에 기운이 쭉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나름 부유한 가정에 외동아들로 태어나 자란 터라 원래 형제라는 것이 없었기에 외로움은 그다지 느끼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이건 경우가 좀 다른 모양이었다. 정말 쓸데없이 넓은 집이었다.
대충 가방을 소파에 걸어놓고는 물을 마시기 위해 거실로 가던 도중, 뜬금없이 울리는 벨소리에 발걸음을 멈췄다. 택배, 시킨 것 없고. 찾아올 손님? 그런 게 있을 리가. 미심쩍은 눈으로 현관문을 열자 갤리를 반기는 것은 꽤 오랜만에 보는 녀석이었다.
“안녕.”
“뉴트?”
“알비가 그러던데. 같이 살 사람 구한다면서?”
“…….”
“그래서 왔어.”
양 손 가득 빵빵하게 부푼 가방을 들고 햇살같이 웃는 아직 어린티를 벗지 못한 소년의 얼굴에 갤리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대로 현관에 돌처럼 굳어버렸다.
“아니, 그, 이렇게 갑작스럽게….”
“오, 저기 있다. 뉴트!”
“늦었잖아, 민호.”
뉴트의 뒤를 이어 한 사람 더 갤리의 집을 찾아왔다. 딱히 친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어쨌든 얼굴과 이름 정도는 알고 있는 녀석이었다. 갤리는 현기증이 일어날 것 같았다. 알비, 알비인가. 이 모든 사건의 원흉은.
“와준 건 고마운데, 미안하지만….”
“뉴트, 민호!”
“꼴지야, 토마스.”
갤리는 그대로 현관문을 닫아버렸다. 빠른 손놀림으로 잠금 장치까지 완벽하게 설정한 갤리는 지금 벌어진 상황이 꿈이길 바라며 다시 거실로 발걸음을 돌렸다. 그러자 쿵쾅거리며 현관문을 두들기는 소리와 함께 왁자지껄한 녀석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꿈이, 아니었다.
“갤리! 이봐!”
“우리 사이에 이러기야?”
“우리 사이가 뭔데!”
이러다가는 민원이라도 들어올 것 같아서 얼른 다시 문을 연 갤리는 단호한 얼굴로 그들을 쫓아내리라 다짐했다. 죽어도 저 문제아 셋과는 함께 동침을 하고 싶지 않았다. 뉴트가 찾아왔을 때 혹시, 설마 했지만 정말 저 둘을 끼고 왔을 줄이야.
뉴트는 알비의 친한 친구 중 한 명이었다. 워낙 생긴 것이 얌전하니 사내아이 치고는 곱상하게 생겨서 대학교의 얼굴 마담으로 불리는 수준이었다. 소문에 의하면 뉴트는 이미 글레이드에서 살고 있다고 들었는데, 굳이 여기까지 찾아온 이유는 뭐란 말인가.
그 뒤로 찾아온 녀석은 민호였다. 그래, 여기까지는 이해할 만 했다. 뉴트에게는 알비보다도 더 돈독한 사이인 친구가 하나 더 있었는데, 그 친구가 민호였다. 듣기로는 한국에서 태어나 어렸을 때 미국으로 이민을 온 녀석이라는데 그 때부터 뉴트와 친구사이였다고 한다. 아시아인이라는 이유 하나 때문에 돋보일 만도 했는데, 그보다 그를 더 돋보이게 하는 것은 단순하게 생겨먹었어도 과 수석의 자리를 한 번도 놓친 적이 없는 미친놈이라고 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둘을 쫓아 여기까지 따라온 멍청하게 생긴 녀석의 이름은 토마스였다. 최근 위키드 콤비 - 뉴트와 민호를 함께 부를 때 사용하는 말이었다. - 가 위키드 트리오가 되었다는 소문이 사실이었나 보다. 이번에 편입으로 들어온 얼빵한 새내기 하나가 기어코 저 두 사람과 어울리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애초에 갤리가 룸메이트를 구하기 꺼려했던 이유도, 괜히 다른 아이들의 이야깃거리가 되고 싶지 않아서였는데 이래가지고는 빼도 박도 못하게 위키드 4인조의 이름으로 불리게 생겼다. 그것만은 죽어도 사양이다.
“우리 사이가 뭐긴. 이제부터 한 집에서 같이 살 사이지.”
“꺼져.”
“섭섭하게 이러기야?”
“뭐야?”
“자꾸 이러면 우리 위키드 4인조라고 퍼트리고 다닐 거야.”
갤리는 뉴트의 말에 말문이 막혔다. 갤리와 알비가 친구였던 시간이 긴 만큼, 사실 뉴트와 얼굴을 보고 지낸지도 꽤 오래되었는데, 갤리는 뉴트가 천생 선해 보이는 얼굴을 가지고 이 세상 둘도 없을 못된 새끼라는 것을 기억해냈다. 어찌나 영악한 녀석인지 모르는 녀석들이 불쌍했다.
“애초에 넌 이미 글레이드에서 살고 있잖아. 왜 여기까지 와서 헛짓이야?”
“너 나 없이 쟤네 둘 데리고 살 수 있겠어?”
아니. 즉답을 하는 갤리를 보며 뉴트가 싱긋 미소 지었다. 갤리는 뉴트가 찾아 온 순간부터 이미 자신은 완벽하게 말린 것이라는 생각밖에 할 수 없었다.
주여, 이 어린양을 돌보소서.
“와, 집 끝내준다. 그래서? 우리 방은 어디야?”
지금 당장이라도 갤리는 부모님의 품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그럼에도, 금세 소란스러워진 집을 보며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쉬며 살며시 웃는 갤리의 얼굴을 보고도 뉴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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