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호의 하루 일과는 다른 글레이드의 아이들에 비하면 꽤 단순했다. 새벽같이 일어나서 문이 열리는 미로 안을 토마스와 함께 하루 종일 달리고 온다. 그리고 문이 닫힐 때쯤 돌아온다. 여기까지가 대부분의 아이들이 알고 있는 것이었다. 그래서 민호의 하루 일과는 한 마디로 압축할 수 있었다. 달린다. 어쨌든 그는 러너였으니까 말이다.

  그런데 대부분의 아이들이 아는 것과는 다르게, 민호의 하루 일과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뉘는데 하나는 그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줄기차게 미로 안을 뛰어다니는 것과, 또 다른 하나는 저녁 식사 시간 이후 웬만한 아이들은 출입하지 못하는 지도 보관실에 드나든다는 것이다. 그리고 항상 그런 민호의 곁에는 한 사람이 더 있었는데, 바로 뉴트였다.

 

  민호와 뉴트의 사이는 참으로 각별해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두 사람은 알비와 갤리를 포함한 ‘최초의 글레이더’ 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있었다. 물론 제일 먼저 글레이드 안에서 혼자 끔찍한 한 달을 보낸 것은 알비였지만, 다섯 명 까지는 그렇게 부르는 것 같았다. 안타깝게도 나머지 한 명은 이미 글레이드에는 없었다.

 

  여느 날과 다름없이 미로에서 돌아온 민호는 그대로 초원을 가로질러 뉴트가 일하고 있는 밭으로 뛰어갔다. 근심과 걱정이 가득한 표정으로 뛰어가는 민호의 모습에 다른 아이들이 무슨 일이 생긴 거 아니냐며 기겁을 했다. 그런데 밭에 도착하자마자 뉴트의 모습을 확인한 민호가 크게 한숨을 쉬며 숫자를 툭, 뱉는 것이 아닌가.

 

  “3.”

  “…음, 6.”

  “뭐?”

  “6. s.i.x.”

 

  누가 봐도 눈이 부시다고 표현할 수 있을 정도로 해맑게 웃는 뉴트의 얼굴에 민호는 할 말을 잃어버린 듯한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정말이야?”

  “방금 생각이 바뀌었어. 8.”

 

  민호는 뉴트의 말에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흔들며 숲 쪽으로 걸어갔다.

 

  “어디가?”

  “씻으러.”

  “음, 민호. 나 또 생각이 바뀐 것 같아. 10!”

  “작작해라! 14!”

 

  민호의 외침에 뉴트가 삽을 떨어트리고는 꺄르르, 하고 웃는데 근처에 있던 아이들은 대체 저 둘이 무슨 짓을 하는 건지 당최 이해를 하지 못하겠다는 얼굴로 둘을 번갈아 보았다. 시선을 느낀 건지 아이들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뉴트는 별 일 아니라는 듯 어깨를 한 번 으쓱 하더니 바구니를 들고 민호의 뒤를 쫓아 본부 쪽으로 걸어갔다.

 

  그 뒤로도 민호와 뉴트의 알 수 없는 숫자 놀음은 계속 되었다. 저녁을 먹을 때에나, 잠에 들 때까지 멈추지 않는 숫자는 점점 커져만 갔고, 곧 100을 넘어갈 것 같았다. 그런 두 사람을 보며 토마스는 입이 근질거리는 것 같았다. 묻고 싶은데, 뭔가 묻기 꺼려지는 기분이랄까. 오묘한 느낌을 받으며 그 날 하루가 저무는 것을 본 글레이드의 아이들은 하루를 마무리 지었다.

 

  “120.”

  “오, 꽤 높은데? 137.”

  “…가자, 토마스.”

 

  토마스는 아무 말도 못하고 민호의 뒤를 따라 미로로 들어갔다. 한참을 달리던 도중 점심을 먹기 위해 잠시 쉬기로 한 토마스는 그제야 민호에게 이제까지 궁금했던 것을 물을 수 있었다.

 

  “대체 뉴트랑 뭐 하는거야?”

  “…뭐?”

  “얼굴 마주칠 때 마다 외치는 숫자 말이야. 점점 커지기만 하던데.”

 

  샌드위치를 크게 한입 베어 문 민호는 토마스의 말 중, ‘커진다.’ 라는 말이 들려오자 목이 막혔는지 기침을 하며 컥컥댔다. 깜짝 놀란 토마스가 얼른 민호에게 물을 건넸고, 민호는 다행이도 샌드위치에 의한 질식사는 면할 수 있었다.

 

  “알아서 뭐하게.”

  “궁금하잖아.”

  “뉴트한테 물어봐. 그 녀석, 진짜….”

 

  말을 하면서 무언가를 떠올린 모양인지 얼굴이 확 달아오른 민호는 얼른 고개를 휙휙 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어나, 신참.”

  “어? 아직 반도 못 먹었는데…!”

 

  토마스의 큰 한숨이 미로 안에 울렸다. 참 바보같은 짓을 했다고 생각했다.

 


  *

 

 

  주린 배를 문지르며 글레이드로 돌아오자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환하게 웃으며 둘을 반긴 뉴트는 어김없이 민호를 보며 숫자를 말했다. 그 숫자는 벌써 200을 넘었다.

 

  “205. 됐어?”

  “아니, 부족한 거 같아. 민호. 214.”

  “뉴트…. 내 몸은 하나라는 걸 알아둬.”

  “그럼, 물론이지.”

 

  민호가 먼저 씻기 위해 숲속을 향해 가자, 토마스는 결국 뉴트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그를 붙잡았다.

 

  “대체 그 숫자들, 뭐야?”

  “응?”

  “민호랑 주고받는 거. 민호한테 물어보니까 너 보고 물어보라고 그러던데.”

  “민호 표정은 어땠어?”

  “썩 좋았던 것 같진 않은데.”

 

  토마스의 말에 뉴트가 눈을 찌푸리며 웃었다. 기분이 나빠 보이기보다는 오히려 좋아 보이는 그 웃음에 토마스는 고개를 갸웃했다.

 

  “뭐긴 뭐야, 내가 그와 밤을 보내고 싶은 횟수지.”

  “……뭐?”

  “이봐, 토마스. 어린애같이 굴 거야?”

  “…….”

  “다른 애들한테는 비밀이야.”

 

  쉿, 하는 제스처를 보인 뉴트는 금세 민호의 뒤를 쫓아갔고 방금 들은 말의 의미를 해석하는데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지식을 동원하던 토마스는 미로가 닫히는 소리와 함께 그 자리에서 펄쩍 뛰며 척에게로 달려갔다. 분명 뉴트가 말하는 주체는 그가 아닌데 창피함은 그의 몫인지, 토마스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고 그런 토마스의 얼굴을 보며 척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어디 아파? 라고. 토마스는 차마 열 살 남짓 되어 보이는 척에게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어 그저 입을 다물었다.


  그런 토마스의 입이 뻥 뚫린 순간은, 다름 아닌 다음 날 아침 민호에게 건넨 뉴트의 숫자가 300을 넘어갔을 때였다. 토마스는 꼭 봐선 안 될 것을 훔쳐본 어린 소녀처럼 귀를 붉히며 비명을 지르고는 미로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왜 저러냐는 민호의 말에 뉴트는 그저 웃으며 민호에게 입을 맞추며 속삭였다.

 

  “글쎄, 소년이 남자가 되려나?”

 

  이해하지 못했다는 얼굴로 뉴트를 바라본 민호의 귓가에 낮은 목소리로 뉴트가 무어라 속삭이자, 아까의 토마스와 비슷한 얼굴로 미로 속으로 뛰어 들어가는 민호의 등 뒤로 뉴트가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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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토마스는 민호와 같이 지낸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미로 안에서는 그 누구보다 그를 잘 이해하고 있다고 자부했다. 물론, 토마스는 미로 안에서 뿐 아니라 미로 밖에서도 그를 이해하고, 그와 더 가까워지기를 원하는 사람이었다.

 

  그들에게는 법칙이 있었다. 기억을 잃어버린 그들은 제 나름대로의 날짜를 정했다. 최초의 공터인, 알비가 그것을 시작했고 그 뒤로 뉴트와 갤리, 그리고 민호가 그 체계를 완성했다고 한다. 토마스는 오늘이 정확하게 몇 월 며칠인지는 몰랐지만 그들이 말하기로 오늘은 5월 21일이라고 했다. 그리고 유독, 민호의 얼굴에 그림자가 든 날이기도 했다.

 

  미로 속으로 들어가는 그들을 배웅하는 것은 항상 뉴트의 몫이었는데, 토마스의 기우를 증명이라도 하듯 그 날은 뉴트가 미로로 들어가려는 민호의 팔을 붙잡았다.

 

  “오늘은 가지 않아도 괜찮아, 민호. 아무도 뭐라고 할 사람 없어.”

  “러너가 미로 안을 안 뛰면 쓰나.”

  “…….”

  “난 괜찮아, 뉴트. 그런 얼굴 하고 있으면 있던 기운도 다 날아가 버릴 거 같으니 썩 치워. 가자, 토마스,”

  “어, 어.”

 

  거의 울상을 짓는 것 같은 뉴트의 표정에 오히려 토마스의 속이 개운하지 않았다. 저 멀리 뛰어가는 민호의 등과 뉴트의 얼굴을 번갈아 보자 그제야 뉴트는 아직 출발하지 않은 토마스를 꾸중이라도 하듯 얼른 민호의 뒤를 따라가라며 가볍게 토마스의 어깨를 쳤다.

 

  “민호를 부탁해.”

 

  토마스는 굳이 뉴트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그것은 뉴트가 다시금 되새겨주지 않아도 토마스가 해야 하는 절대적인 것이었으니까.

 

 

  *

 

 

  그 날도 딱히 특별한 것은 없었다. 그냥, 아주 미묘하게 벽의 위치가 어디서부터 어디로 밀려났다거나, 하는 그런 사소한 것이었다. 대강의 정보를 기억한 토마스는 서둘러 글레이드로 발걸음을 돌렸다. 한참을 또 달리자, 어느 시점에서 민호가 발을 딱 멈췄다. 토마스는 민호의 행동에 적잖이 놀라며 걸음을 멈췄다. 적어도, 토마스가 알고 있는 민호는 - 쉬는 시간과, 점심시간을 제외하고는 - 절대로 미로에서 뜀박질을 멈추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아무런 말도 없이 한 자리에 멈춰 다른 미로의 벽과 별반 다르지 않은 벽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민호…?”

  “그는 나보다 키가 컸어.”

  “…….”

  “나보다 발걸음이 빨랐을지도 몰라.”

 

  토마스는 민호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민호는 토마스를 바라보지 않았다. 그저 미로의 벽을 보며 중얼거렸다. 간혹 가다 토마스가 알아듣지 못하는 말을 하는 걸로 봐서는 아마도 한국어를 좀 섞어 말하는 것은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었다. 토마스가 기억하기로 민호가 한국어를 쓰는 이유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아무도 한국어를 알아듣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주로 욕을 하는 것이었고 또 다른 하나는, 아무도 자신이 말하는 것을 몰라주기 바랄 때 한국어를 썼다.

  토마스는 딱히 멍청한 소년이 아니었기 때문에, 대략적으로 이 상황을 유추할 수 있었다. 미로로 들어올 때 지었던 뉴트의 표정이나, 지금 민호의 표정이나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5월 21일. 토마스는 왠지 모르게 오늘이 기억 속에 유난히 깊게 새겨질 것 같았다.

 

  “민호.”

  “…….”

  “가야해, 곧 해가 저물 거야.”

  “…돌아가지 말까?”

 

  민호의 말에 토마스는 말문이 막혔다. 옅게 웃으며 토마스에게 던진 말은 한국어도 아닌 영어였으며, 명백하게 토마스는 민호의 말을 알아들었다. 그렇지만 토마스는 그것이 진심인지, 아니면 거짓인지 분간할 수가 없었다. 적어도 미로 안에서는 그를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고 자부하고 있던 것이 산산조각이 나는 순간이었다.

 

  “뭘 그렇게 놀라고 그래, 당연히 거짓말이지.”

  “민호.”

  “왜.”

  

  어디서 튀어나온 용기인지, 아니면 겁 모르는 무식함인지는 모르겠지만 어느새 토마스는 민호의 팔을 단단히 잡고 있었다. 혹시라도 진짜로 사라져 영원히 다시 잡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무서워.”

  “무슨….”

  “매일 아침 미로로 들어오는 것, 언제 죽임을 당할지도 모르는 곳에서 쉬지 않고 달린다는 것. 그렇지만, 그 무엇보다도 널 잃는 건 더 무서워.”

  “…….”

  “그러니까, 그러니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

  “힘들면 힘들다고 말해. 아프면 아프다고 말해줘. 울고 싶으면 울어도 된다고. 여긴 나 밖에 없어, 민호. 아니, 그… 이젠 나라도 있어, 라고 말해야하나…?”

  “…신입 주제에 건방지긴. 헛소리하고 있네. 나 그렇게 약한 놈 아니야, 이 멍청아.”

  “알아, 민호는 강하니까.”

 

  싱긋 웃는 토마스의 얼굴을 보며 민호는 조금 놀라면서도,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어찌됐든 글레이드에 들어온 것도, 러너가 된 것도 며칠 되지 않은 초짜한테 위로를 받은 것은 사실이었다. 민호는 토마스의 눈을 피해 다시 한 번 미로의 벽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다시금 다짐하기로 했다. 네가 살지 못한 시간만큼, 악착같이 살 거야. 내가.

 

  “늦었어. 가자, 토마스.”

  “응.”

 

  골목을 돌자 글레이드로 돌아가는 문이 민호와 토마스를 반겼다. 그 입구 혹은 출구 앞에 삼삼오오 모여 있는 글레이드의 아이들을 보며 민호는 - 한국말로 - 욕을 하는 것 같았다.

 

  “뉴트 녀석, 유난 떨고 있기는.”

 

  자세히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는 몰라도 토마스는 정말로 오늘을 잊어버릴 수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에게 있어 그 일은 순전히 토마스 자신이 없었던 과거의 일이었다. 그들만 알고 있는 사실에 조금 속상해하면서도, 이제 다시는 그런 일을 만들지 말자고 다짐했다. 아직 문이 닫히기 전의 여유가 조금은 있어 뜀박질을 멈추고 조금씩 걸어가는 토마스의 앞을 가로막은 민호가 다른 아이들이 들리지 않도록 가만히 속삭였다.

 

  “솔직히 오늘 좀 넘어갈 뻔 했어. 아차, 싶었거든.”

  “…?”

  “참, 그리고 나도 똑같아. 그건 좀 무서울지도.”

  “……뭐?”

 

  한 발 먼저 글레이드로 돌아간 민호의 등을 멍청하게 보던 토마스는 아차, 하고는 전속력으로 민호의 뒤를 따라잡았다. 그리고는 놀란 가슴에 한층 뛰어버린 목소리로 민호의 이름을 불렀다. 토마스는 얼굴이 홧홧 달아오르는 것 같았다. 토마스는 아까 했던 말을 정정해야할 것 같았다. 토마스는 멍청이다, 그것도 이 세상 제일가는 멍청이였다. 아까 홧김에 민호에게 뱉은 말이 코러스처럼 머릿속을 울리지 않나, 아주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토마스는 지금 민호가 마지막으로 한 말의 의미를 확인하지 않으면 정말로 세계 제일의 멍청이가 될 것 같았다. 잔뜩 붉어진 얼굴로 민호의 이름을 외치던 그 날은 정말 평생 토마스의 머릿속에 길이 남을 날이었다.

  

  어느 년도인지는 모르는 글레이드의 5월 21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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년은 가만히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머릿속에 새겼다. 하나라도, 조그만 것 하나라도 더 많이 기억해 두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다. 그래야 다시 사랑하는 이들의 곁으로 돌아갔을 때 자신이 무엇을 보고, 듣고, 느꼈는지를 자세히 얘기해줄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청년, 릭 톰슨은 그래서 인지 꽤 자잘한 습관들을 많이 가지고 있었다.

 

  첫째로, 도착한 곳의 지도를 소장하는 것이었다. 수많은 곳을 돌아다니다 보면 자연스레 어느 곳은 잊혀지기 마련이었다. 그는 그것이 탐탁지 않아 그가 한 번이라도 발을 들인 곳의 지도를 꼭 가방에 넣어두었다.

  둘째로, 그 지도에 짧은 단어 몇 개라도 기록을 해놓는 것이었다. 이것도 첫 번째 습관과 마찬가지로 그가 발을 들인 곳을 기억하기 위함이었는데, 좀 더 세세한 경험을 적는 일기를 대신했다. 참 쓸데없이 감성적인 것도 있었고 어느 곳은 그 나름 좋았다, 싫었다, 를 표시한 모양이 그려져있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것은 릭이 하루도 빠짐없이 하는 행동들 중 하나였는데 손목에 차고 있는 꽤나 많은 시계들을 손질하는 것이었다.

 

  그러고 보면 릭은 꽤 많은 시계를 가지고 있었다. 손목에만 이미 손가락을 다 접을 정도로 차고 있었다. 릭이 차고 있는 여러 개의 시계는 제각기 다른 시간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리고 그 시계의 뒷면에는 그 시간이 어느 나라의 시간인가가 새겨져 있었다.

 

  세계 최고의 검잡이들의 나라 오스트리아. 릭은 오스트리아에서 있었던 일을 회상했다. 꽤나 성격이 제각각인 세 형제를 만난 기억이 떠올랐다. 형제임이 분명하면서도 따로 노는 셋을 보며 신기해하다가도 어느 이야기에서는 서로 맞추기라도 한 듯 합을 이루는 모습을 보니 형제는 형제구나, 라는 것을 세삼 느꼈다. 그 중 가장 곱상하게 생긴 청년이 기억에 남는데, 그것은 그가 꽤 릭을 부려먹었기 때문이었다.

  또 하나는 령을 볼 줄 아는 신비한 아이가 사는 나라 조선의 시계였다. 조선은 다른 나라와 다르게 언어가 특이해 익히는 데 시간이 꽤 많이 걸렸지만, 어색해도 이러니저러니 많은 이야기를 한 것 같았다. 소년은 천진난만하게 웃으며 릭의 어깨를 가리키며 한 마리의 작은 분홍색 아기돼지가 당신을 지키고 있네, 하며 말했다. 그 순간부터 어째 영 어깨가 무거웠지만 분홍색 아기돼지라. 릭은 괜히 기분 좋은 웃음을 지었던 걸로 기억했다.

  세 번째 시계는 아름다우면서도 위험한 도시의 나라였는데, 이곳에서 만난 마피아 패거리들에게 하마타면 큰일 날 뻔했던 기억이 있었다. 그들 중 릭이 잘 알고 있는 아이와 같은 나이의 청년이 있었는데 그 어린 나이에 여러 가지 학위를 가지고 있는 흔히 말하는 천재였다. 그들에게 쫓기던 도중 그 청년이 구해주지 않았더라면 아마 릭은 총알받이가 되었을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이런 식으로 꽤 기억에 깊이 남은 나라들의, 혹은 꽤나 자주 들르게 되는 나라의 시간으로 흐르고 있는 시계들이 많았는데 딱 하나. 시간이 멈춰있는 시계가 있었다. 투박하고 무거워보이는 다른 시계들과는 달리 얇은 가죽 끈에 매달린 시계의 바늘은 마치 고장이라도 난 것처럼 꼼짝도 하지 않았다.

 

  릭에게는 또 다른 습관이 하나가 또 있었는데, 여행을 시작하자 마음먹고 새로운 나라로 발걸음을 디딜 때마다 그 시간이 멈춰있는 시계의 유리에 입을 맞추는 것이었다. 자신이 사랑해 마지않는 한 청년이 선물해준 그 시계는, 그 청년이 자신에게 시계를 주었던 그 시간 그대로 멈춰있었다.

 

  항상 그랬듯, 이번에도 여행을 떠나기 전 시계에 입을 맞추던 릭은 가만히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머릿속으로 돌아가고 싶어 했던 그의 나라를 떠올렸다. 그리고 누구보다 상냥한 웃음으로 말을 건네는 그의 얼굴을 떠올렸다.

 

 

  기다려주오, 사랑하는 나의 챌피.

 

 

  릭은 가만히 눈을 감았다. 다시 눈을 뜨면 사랑하는 그의 얼굴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번에는 그에게 시계를 선물해주자고 생각했다.

 

  다시금 여행의 첫 발을 디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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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날도 여전히, 미로 속을 열심히 파헤치고 다니던 토마스는 제 앞을 뛰어가는 민호의 등을 끈질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새내기 러너인 토마스에게 있어 민호가 저의 그 끈질긴 시선을 이미 진작부터 눈치 채고 있었다는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는 풀리지 않는 의문이었다. 평소와 다름없는 뜀박질로 미로의 문을 통과하고 나서 무심코 달리던 것을 멈춘 토마스는 순간적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버릇인지 습관인지 항상 문을 통과하기 전이나 통과하고 난 후, 가볍게 몸을 푸는 민호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가만히 제 두 무릎에 손을 대고 숨을 몰아쉬던 민호의 모습에 토마스가 천천히 민호에게 다가갔다.


  “민호?”

  “…….”

  “…민호!!”


  그대로 고꾸라지는 민호의 몸을 뛰어난 반사 신경으로 받아낸 토마스는 힘없이 쓰러진 민호의 몸을 안아들고는 다급한 목소리로 본부로 뛰어 들어갔다. 멀리서부터 민호가 쓰러진 것을 본 글레이드의 모두가 토마스의 뒤를 따랐고, 토마스는 얼른 본부 내부로 들어가 간이침대에 민호를 눕혔다. 뒤이어 서둘러 들어온 제프가 민호의 상태를 살피기 시작하자 다들 긴장되는 목소리로 하나둘 씩 제프에게 물음을 던졌다.


  “제프, 민호 괜찮은 거야?”

  “뭐가 문제인거야, 제프.”

  “제프….”

  “헤이, 너희들 모두 닥쳐봐. 난 진짜 의사가 아니라고.”


  제프의 신경질적인 목소리에 다들 기가 죽은 듯 입을 꾹 다물었다. 하지만 그들이 이렇게 엄청난 반응을 보이는 것도 실로 당연한 일이었다. 3년간, 그 지옥 같았던 3년간 단 하루도 빠짐없이 미로를 드나들던 글레이드 내 최고의 버팀목이자 기둥인 민호에게 무슨 사소한 일이라도 잘못되는 날에는 글레이드의 모두는 희망을 잃는 것과 다름없는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뭐, 이러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 아무래도 최근 푹 쉬는 것을 본 적이 없는 것 같아. 피로가 쌓여서 몸살이 난 것 같으니 다들 조용히 하고 민호가 푹 쉴 수 있게 도와주기나 해.”

  “알았어, 뭘 하면 돼?”

  “죽, 죽 끓일까?”

  “약초는?”

  “민호를 돕고 싶어?”

  “당연하지!”

  “그럼 당장 여기서 꺼져.”


  제프의 말에 다들 알았다는 듯 일제히 본부에서 하나 둘 물러나기 시작했다. 조심스럽게 민호가 메고 있던 벨트와 장갑을 푼 제프는 그나마 멀쩡한 천을 민호의 몸에 덮어주었다. 꺼지라는 제프의 말에도 꺼지지 않아도 용서가 되는 뉴트와, 사실 꺼져야 하지만 꺼지지 못하는 토마스가 그 자리에 계속 남아 민호를 지켜보았다.


  “우리가 민호에게 너무 많은 짐을 맡긴 걸까.”

  “그럴 수도 있지.”


  덤덤하지만 꽤 복잡해 뵈는 표정으로 말하는 뉴트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던 토마스는 세삼 자신의 가슴에 메어져 있는 벨트의 무게가 꽤 무거워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윽고 자신을 쳐다보는 뉴트의 시선에 토마스는 어깨를 움찔거리며 뭐 할 말이라도 있냐며 뉴트를 바라보자, 뉴트는 크게 한숨을 쉬며 토마스의 어깨를 두드렸다.


  “여긴 내가 지킬 테니까 너도 얼른 가서 쉬어. 당분간 미로에는 들어가지 않아도 되니까 그만큼 너도 푹 쉬고.”

  “하, 하지만….”

  “제프가 뭐라고 했지?”

  “…알았어.”


  흡사 꼬리고 귀고 축 늘어진 강아지처럼 기운이 하나도 없이 돌아가는 토마스의 뒷모습을 보면서 뉴트는 결국 헛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제프에게서 물수건을 건네받은 뉴트는 가만히 민호가 누워있는 침대 옆 의자에 몸을 맡겼다.


  “…멍청하긴. 너도 참 멍청해, 민호.”


  가만 가만 조심스러운 손길로 민호의 얼굴을 닦아주던 뉴트는 그제야 조금 안심된다는 표정으로 조용히 말을 이었다.


  “쓰러질 정도면 오늘 아침에는 그냥 쉬겠다고 하면 될 것이지. 바보같이 우직해서는. 요령피우는 법을 몰라요.”


  한참동안 그 행동을 반복하던 뉴트는 멀찍이 느껴지는 따가운 시선들에 휙, 고개를 돌렸다. 아니나 다를까 꺼지라고 한지가 언젠데 다들 벽 뒤에 숨어서는 이쪽을 훔쳐보는 꼴이 얼마나 웃긴지 뉴트는 큰 소리로 웃고 싶은 심정이었다. 숨을 생각이나 있는 건지 열댓 명이 넘는 놈들이 전부 하나 둘 머리를 내밀고는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데 역시 그 중에서도 단연 돋보이는 것은 토마스였다. 최대한 눈에 힘을 실어 따가운 시선으로 그들과 눈을 맞추니 언제 벽 뒤에 숨었냐는 듯 꽁무니 빼고 도망가는 아이들의 모습에 뉴트는 웃음이 터져 나오는 것을 넘어 머리가 지끈거리는 것을 느꼈다. 그렇게 민호가 좋을까. 뉴트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러나 다들 도망가는 와중에도 뚝심 있게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 있던 토마스와 눈이 딱 마주치자 뉴트는 질리고 말았다. 사실 제일 골칫덩어리이자 문제가 되는 놈이 저 놈인데 저렇게 버티고 있는 꼴을 보니 저 녀석을 데리고 그 위험한 미로를 돌아다녔을 민호의 피로감이 뉴트를 덮쳐오는 것 같았다.


  “토마스.”

  “…응.”

  “이리와.”


  뉴트의 말에 얼른 그의 곁으로 간 토마를 보며, 뉴트는 다 들리도록 큰 한숨을 쉬고는 토마스의 손에 쥐고 있던 물수건을 건네주었다.


  “만에 하나 민호 귀찮게 굴면 내일 이 자리에 누워있는 것은 네가 될 거야.


  토마스는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뉴트가 일어난 자리에 앉았다. 아무래도 밖에 있는 녀석들을 통제하는 것은 딱 제 일인 모양이었다.


  뉴트가 나간 뒤로 해가 꼴딱 질 때까지 눈을 뜨지 않는 민호를 마음 졸이며 열심히 간호하던 토마스는 아직도 깨지 않았냐는 뉴트의 말에 거의 울상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푹 자는 걸 거야, 라는 위로의 말에 토마스는 꼭 그래야 한다는 듯 세차게 고개를 흔들었다.

  글레이드에 완벽한 밤이 찾아왔을 때쯤, 괴로운 듯 신음을 흘리는 민호 때문에 가슴이 철렁한 토마스는 민호의 손을 꽉 잡았다. 어렵사리 눈을 뜬 민호가 쩍쩍 갈라지는 목소리로 물을 찾자, 얼른 물을 떠준 토마스의 행동은 미로에서 달릴 때보다도 더 빨라보였다. 물을 두 컵이나 비운 민호는 어질어질한 머리를 손으로 짚으며 중얼거렸다.


  “…워.”

  “…뭐?”

  “…춥다고.”


  민호의 말에 정신이 번쩍 든 토마스는 근처에 있는 천이란 천은 다 긁어모아 겹겹이 민호의 몸 위에 조심스럽게 덮어주었다. 그래도 토마스의 눈에는 한참 모자라 보이는 터라 토마스는 자신이 입고 있는 티셔츠라도 벗어야 하나 갈팡질팡했다.


  “멍청한 놈.”

  “…어?”

  “너 같은 놈을 보고 둔하다는 거야. 내가 한 말 못 들었어?”

  “…….”

  “…추워, 신참.”


  곤란하다는 듯 웃는 민호의 모습에 토마스는 그 방을 비추고 있던 램프의 불을 껐다.


  

  *



  다음 날 아침, 민호가 누워있던 침대에서 벌떡 일어난 토마스는 혹여 누구라도 올까 서둘러 옷을 꿰입고는 침대 옆 의자에 앉았다. 그러자 잠을 자고 있지 않은 모양이었는지 민호가 웃는 소리가 작게 들렸다.


  “웃겨.”

  “웃지 마.”

  “웃긴데?”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자신도 좀 멋쩍었던 모양인지 뒷머리를 긁적이며 웃던 토마스는 저 멀리서 들려오는 여러 명의 발소리에 귀를 쫑긋 세웠다. 저것들은 잠도 없나. 토마스는 서둘러 민호를 덮은 천과 함께 그를 한꺼번에 안아들었고, 민호가 뭐라 할 새도 없이 뒷문으로 달려갔다.


  “…토마스. 머리 울려.”

  “미안.”

  “토 나올 것 같다고!”

  “미안, 미안.”

  “…아, 이 시발!”

  “미안해, 미안해!!”


  토마스가 향한 곳은 다름 아닌 숲 속 깊은 곳에 있는 그들만의 요새였다. 웬만한 아이들은 출입금지인 오두막 안으로 들어간 토마스는 서둘러 자리를 만들고는 민호를 눕혔다. 달려오는 내내 온갖 욕과 저주를 퍼붓는 민호는 정말로 상태가 안 좋았던 모양인지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서는 죽여 버리겠다는 협박도 잊지 않았다.

  그래도 이곳에 있으면 귀찮게 구는 아이들은 보지 않을 테니 한 편으로 안심한 토마스는 그 귀찮게 구는 아이들의 범주 안에 자신이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 조심스럽게 이불을 덮어주려는 데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나더니 곧 머리를 가격하는 둔탁한 물체에 토마스는 그대로 민호의 옆으로 쓰러졌다.


  “환자한테 무슨 짓이야.”

  “뉴, 뉴트…! 아니, 아무 짓도 안 했어!”

  “부탁이야, 뉴트. 나 좀 살려줘.”

  “민호!”


  억울하다는 듯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토마스를 보면서 킥킥 거리던 민호는 가만히 뉴트를 올려다봤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그릇과 함께 물을 담은 컵이 올려진 쟁반을 내려놓은 뉴트는 아직도 엎어진 토마스를 발로 연신 차며 말했다.


  “또 헛짓거리 하다 들켜봐, 그럼 미로 안으로 넣어버릴 거야.”

  “아니라니까!”

  “푹 쉬어, 민호.”

  “고마워.”

  “너희 둘 정말 이러기야?”


  웃음을 참지 않는 민호를 보며 한숨을 쉬던 토마스는 얼른 몸을 일으켜 자리에 앉았다. 기가 팍 죽어버린 토마스를 보며 웃음을 멈춘 민호는 작게 한숨을 쉬며 검지를 까딱였다.


  “이리와, 토마스.”


  토마스가 천천히 다가오자 민호는 그대로 토마스의 티셔츠 자락을 쥐며 그에게 입을 맞췄다. 꽤 깊은 입맞춤 뒤에 그 특유의 눈이 접히는 웃음을 지어보인 민호는 가만히 토마스에게 속삭였다.


  “내 감기 가져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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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규님(@BBQ_Gyu)의 죽음 루이스 x 사이퍼 히카르도 au 썰을 멋대로(!) 풀어봤습니다. 

* 루이바레 연애해(

 

 

 

 

 

 

  다시 눈을 뜨기 전 마지막 기억은 아마도 눈이 부실정도로 팍, 하고 터진 자동차의 헤드라이트. 어린 소년은 가만히 자신의 눈에 손을 대어보았다. 선명하게 느껴지는 손의 감촉에 조그맣게 한숨이 내쉬어진다. 어린 소년, 히카르도 바레타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긴장을 놓으면 훅, 하고 끝도 없이 아래로 떨어질 것 같은 불길한 기분에 잔뜩 긴장한 어깨가 무겁기만 했다.

쉼 없이 걸어도 끝이 없어 보이는 검은 길은 작은 소년의 한숨을 더욱 무겁게만 했다. 항상 저의 작은 손을 꼭 잡아주시던 어머니의 손이 생각나 히카르도는 괜히 울고 싶은 기분에 휩싸였다. 그렇게 한 없이 걷기만 했을까, 저 멀리서 어른으로 보이는 그림자가 보였다. 히카르도는 단숨에 그 곳까지 뛰어갔다.

 

  “저기…!”

  “…….”

 

  히카르도는 작은 손으로 앞에 있던 그림자의 옷을 꽉 쥐었다. 그런 히카르도의 손에 천천히 그림자가 히카르도를 돌아보았고, 히카르도는 그림자의 얼굴에 그 옷을 잡고 있던 손을 놓을 생각도 하지 못한 채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새카만 옷을 두르고 있는 남자의 피부는 꼭 책에서나 봤던 뱀파이어의 그것같이 창백하니 희멀건 했고, 가늘게 길어진 눈은 붉게 빛나는 것이 퍽 섬뜩하게만 느껴졌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이상하리만치 괴리감이 느껴지는 옅은 푸른빛 머리카락은 참으로 이상하게 따뜻한 하늘이 생각나게 만드는 것이었다.

  꼼짝도 할 수 없는 어린 아이를 두고, 그 무섭도록 차가운 시선을 던지는 검은 그림자는 아이와 손에 들고 있던 책을 뒤적여보았다.

 

  “이름은?”

  “…바레타, 히카르도… 바레타요….”

 

  예의상 물어본 것이라 이미 어린 소년의 이름을 찾아낸 그는 아이와 책 속에 적힌 이름을 번갈아보았다. 히카르도 바레타의 이름 밑에는 아직 빨간 줄이 그어져있지 않았다. 그것은 곧, 이 아이가 길을 잘못 들었다는 의미와도 같았다. 남자는 여전히 그 무심한 얼굴로 탁, 소리가 나도록 책을 덮었다. 그 소리가 시발점이 되었는지 가만히 있던 히카르도는 기어이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어찌나 우렁찬 울음인지 혹은 남자가 이만한 나이의 아이를 이 세계에서 본 것이 오랜만인지 우는 아이의 울음을 달래주지 못해 어찌할 줄을 몰랐다. 남자는 조심스럽게 히카르도와 시선을 맞췄다.

 

  “왜 울어?”

  “여기 온통 까맣고 무서우니까…. 그리고 아저씨도…….”

 

  울기라 바쁜 히카르도는 남자의 얼굴이 미묘하게 변한 것을 눈치 채지 못했다. 남자는 천천히 히카르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어머니와 아버지같이 따뜻한 손이 아닌 차디 찬 손이었지만 히카르도는 그것만으로 조금 떨림이 멈추는 것 같았다.

 

  “형이라고 불러주면 엄마 아빠가 계신 곳 까지 데려다줄게.”

  “정말?”

  “자, 약속.”

 

  히카르도는 남자가 내민 새끼손가락을 빤히 바라보다 얼른 자신의 손가락을 걸었다. 남자는 천천히 일어나면서 히카르도의 작은 손을 꼭 쥐었다. 그리고는 지금까지 히카르도가 걸어왔던 길을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형은 여기서 혼자 살아?”

  “아니.”

  “다행이네.”

  “…왜?”

  “혼자면 외롭잖아.”

 

  남자는 히카르도의 말에 돌연 걸음을 멈추었다. 그런 남자의 행동에 히카르도도 가만히 걸음을 멈추고 남자의 얼굴을 한 없이 순수한 아이의 눈으로 바라보았다. 남자는 히카르도의 작은 몸을 한 번에 안아 올리고는 가던 길을 갔다.

 

  “나보다 어린 주제에 말은 엄청 많은 산발머리 하나랑, 그 산발머리가 좋아 죽는 바람돌이 꼬맹이랑 같이 살아.”

  “그게 뭐야.”

 

  그러면서도 남자의 이야기가 퍽 재밌는 모양인지 히카르도는 연신 남자의 말에 꺄르르, 웃었다.

 

  “형, 이름은 뭐야?”

  “…알고 싶어?”

  “응, 날 도와준 착한 형이니까.”

  “……. 루이스야, 루이스.”

 

  히카르도는 가만히 그 조그만 입으로 남자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루이스는 말없이 그런 히카르도를 바라보았다. 과연 네가, 다시 이곳으로 돌아왔을 때도 나보고 착한 형, 이라며 말할 수 있을까. 루이스는 히카르도의 정수리에 조심스럽게 입을 맞췄다.

 

  “형 추워?”

  “아니.”

  “근데 손이 엄청 차갑네.”

 

  그 작은 두 손으로 루이스의 손을 꽉 쥐며 온기를 전해주는 아이의 모습에 루이스는 퍽, 웃음이 나올 것 같았다. 호호 불어가며 얼른 따뜻해져라, 하는 히카르도에게 굳이 그래봤자 안 따뜻해져, 라며 어린아이의 환상을 부수는 일은 하지 않았다.

  루이스는 곧 길의 끝이 다가옴을 느끼고 히카르도를 내려주었다. 반짝이며 빛이 나는 이 저승길의 입구이자 출구인 곳을 바라보던 히카르도가 가만히 루이스를 보자, 루이스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기로 들어가면, 부모님을 만날 수 있을 거야.”

 

  상냥한 웃음과 어투로 히카르도를 달래주던 루이스는 히카르도의 손을 놓았다. 그러자 히카르도는 놓인 손과 루이스의 손을 번갈아 보며 다시 루이스의 손을 꽉 쥐었다.

 

  “또… 만날 수 있어?”

 

  한껏 기대를 품은 순수한 아이의 눈에 루이스의 방금까지 상냥했던 얼굴을 싹 지우고는 처음 히카르도를 만났을 때와 같은 서늘하기 짝이 없는 얼굴과 어투로 무심하게 말했다.

 

  “아니.”

 

  순식간에 바뀐 자신의 태도에 놀란 히카르도를 보며 루이스는 억지로 히카르도의 등을 출구로 밀었다. 출구 바로 앞에서 하염없이 뒤를 돌아 자신을 바라보는 어린 아이를 보며 가볍게 손을 흔들며, 루이스는 아이에게는 들리지 않을 목소리로 말했다.

 

  “부디, 다시는 오지 마라.”

 

  이윽고 완전히 출구를 지난 히카르도는 꼭 놀이기구를 타는 것 같이 들뜨는 기분을 느끼며 가만히 눈을 감았다. 멀어져 가는 의식 속, 태어나서 처음으로 본 남자의 얼굴을 그려보았다. 다시는 볼 수 없을까, 아이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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