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씩 과거의 기억이 돌아오고 있다는 자각은 하고 있었다. 가끔 미로 속을 달리다 보면 지금 자신이 달리고 있는 곳이 미로인가, 아니면 절벽으로 향하는 길인가 헷갈릴 때도 종종 있었다. 그럴 때면 어김없이 누군가 다리를 붙잡는 기분이 들었다. 절대 이곳에서 나가게 해주지 않을 거야, 라고 비명을 지르는 것처럼 꽉 옭아매진 다리에는 힘이 하나도 들어가지 않았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지만, 가끔 꿈을 꾼다. 아마도 과거 어느 한편의 기억일 것이다. 꿈속에서 민호는 자신의 모습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보여줘도 상관없다는 듯, 여기저기 놓인 유리에 비친 자신의 모습은 한 없이 어린 아이의 모습이었다. 아마도, 글레이드에 온지 얼마 안 됐을 때의 모습과 비슷할 것이다. 꿈속에는 익숙한 얼굴이 여럿 보였다. 그 중에서도 단연 돋보이는 것은 토마스였다. 자신의 모습도 깔끔하니 나름 관리를 잘 받고 있는 몸이구나, 라고 생각했지만 어린 토마스의 모습은 그런 자신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말끔했다.
때때로 하루 종일 사방이 막힌 유리관에 앉아 벽에 손을 얹고 있으면 토마스는 웃으면서 다가왔다. 유리벽이 조금 두꺼운 모양인지 토마스의 말이 분산되어버려 조금 안타까움을 느꼈다. 관 밖에는 토마스와 똑같은 옷을 입은 어른들이 많았지만, 그들은 자신에게 관심조차 주지 않았다. 오로지 이곳에서 자신에게 관심을 주고 있는 것은 토마스 하나뿐이었다. 이렇다보니 민호는 지금 자신이 꿈을 꾸고 있는 건지, 아니면 정신을 놓아 버린 건지 헷갈렸다.
모습은 어린아이의 모습일지 몰라도 그 안에 있는 민호는 글레이드 안에서 3년을 악착같이 버텨낸 자였다. 처음 토마스가 그들과 같이 일을 했다고 했을 때 느꼈던 배신감은 평생이 지나도 지울 수 없는 것이다. 그러면서 동시에 민호는 스스로에게 의문점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머리로는 토마스에 대해 조금이라도 배신감이 들었다는 생각을 하면서, 가슴으로는 그를 미워할 수가 없었다. 그가 스스로 이 미로 안으로 뛰어들었기 때문이라고 하기엔 동기가 부족했다. 토마스는 끝까지 말해주지 않았다. 그가 왜 이 미로로 들어오게 됐는지에 대해. 민호는 그 의문을 풀어야만 자신의 길을 선택할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민호는 과거의 어린 자신의 모습에 스스로를 감추고 과거의 토마스를 관찰했다. 한 번 기억을 읽은 지금의 모습과는 어딘지 모르게 사뭇 달랐다. 오히려 3년이나 더 어렸음에도, 훨씬 성숙한 어른의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다가도 종종 유리관 앞에서 자신과 눈을 맞추며 이야기를 할 때는 영락없는 어린아이의 모습이 되어 있었다. 그냥 단순히 토마스에게는 친구가 필요했던 것일까. 그를 관찰할수록 의문점은 깊어만 갔다.
꿈을 꾸는 날이 많아질수록 기억은 선명해졌다. 민호는 자신이 원래 글레이드에 올라올 만한 실험체가 아니었다, 라는 사실을 알아내었다. 글레이드로 보내지더라도 수많은 검사를 더 하고, 결과를 지켜봐야 올려 보내질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어른들은 역겨운 말을 했다. 너는 축복받은 아이라고. 민호는 치를 떨었다. 얼핏 보인 토마스의 얼굴이 퍽 슬퍼보였다.
마지막으로 꿈을 꾼 날은 정말 현실 같아서 민호는 그 감각을 떨쳐낼 수가 없었다. 꿈을 꾸기 시작하자마자 숨이 막혀 죽을 것 같았다. 죽어도 고통 없이 죽기를 바랐다. 아, 이제 죽는구나, 이제 꿈에서 깨어나겠구나, 하고 생각했을 즈음, 큰 소리가 나며 유리관의 문이 열렸다. 문이 열리자마자 쏟아져 내린 폭포와 같은 물살에 민호의 몸이 힘없이 쓸려갔다. 온 몸이 축축하게 마지 물 먹은 솜처럼 무겁기만 했다. 자신의 얼굴을 감싸는 차가운 손이 없었더라면 민호는 아마 그 때 죽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흐릿한 시야 사이로 보이는 것은 토마스였다. 잔뜩 일그러진 얼굴을 하고 그렁그렁 눈물을 매달고 자신을 보고 있던 것은, 그 어린 토마스였다. 토마스는 민호를 꼭 끌어안고는 연신 미안하다며 중얼거렸다. 민호는 할 수만 있다면 토마스에게 그것은 네 잘못이 아니야, 라고 말이라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토마스가 너무 안쓰러워 보였다.
“내가 바란 건 이런 게 아니었는데…….”
아까부터 울려대는 비상등이 영 거슬렸다. 안 그래도 작은 토마스의 목소리가 민호의 귀에 제대로 들어오지 않았다. 토마스는 민호를 업었다. 축 늘어진 민호의 몸을 업고 몸을 가누는 것이 영 쉽지는 않아보였지만 토마스는 천천히 한 걸음, 한 걸음 걸었다.
“민호. 염치없지만, 딱 하나만… 부탁할게.”
민호는 딱히 대답을 할 수 없었다. 목소리는 나오지 않은 지가 이미 오래였고, 조금이라도 방심하면 금방 정신을 놓아버릴 것 같았다. 민호는 기를 쓰고 버텼다. 토마스의 말을 들어야만 할 것 같았다.
“너에 대해 전부 잊어버려도…. 나에 대해 전부 잊어버려도 좋아. 아니, 차라리 나에 대해선 전부 잊어버려. 그리고 우리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자. 유리관 속이 아닌, 서로의 옆에서…. 서로 만나지도 않았던 것처럼.”
철제 박스 앞에 선 토마스는 문을 열고 그 안으로 들어갔다. 최대한 조심스럽게 민호의 몸을 눕힌 토마스는 민호의 손을 끌어 당겨 입을 맞췄다.
“내가 갈 때까지, 우리 다시 시작할 때 까지…. 죽지 말고 건강하게. 살아있어야 해. 너라면 그럴 거라고 믿어.”
“…….”
“토마스. 내 이름은, 토마스야.”
요란한 소리를 내며 철제 박스가 위로 상승하기 시작했고, 민호는 그대로 몸이 붕 떠오르는 것을 느끼며 기절했다.
그리고 동시에, 꿈에서 깨어났다.
“…….”
꿈에서 깨어난 민호는 말 그대로 엉망진창이었다. 머릿속은 복잡하니 이리저리 엉켜있었다. 과연 이것이 진짜 기억이라고 할 수 있을까. 중요한 건, 민호는 이제 확실하게 말할 수 있었다.
민호는 토마스를 용서했다.
서둘러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민호는 토마스에게로 달려갔다. 아침이 밝아오고 있었기에 뛸 준비를 하고 있던 토마스에게로. 토마스는 민호의 얼굴을 보며 반갑게 인사를 건네려다, 민호의 얼굴을 보며 입을 다물어버렸다.
“민호, 무슨 일 있….”
“어때?”
“…뭐?”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보니까 느낌이 어때. 이젠, 네가 원하는 대로 됐어?”
토마스는 민호의 말에 입을 다물어버렸다. 민호는 그것으로 확신했다. 민호의 기억이 완전하게 거짓인 것은 아니었다는 것을.
“그래, 네 말대로 살아있었다. 네가 올라올 때까지 살아있었어.”
“…민호.”
"어때, 이제 후련해?"
“…….”
“…멍청한 새끼.”
민호는 최대한 천천히, 그리고 조심스럽게 토마스의 손을 잡았다. 꿈 속 마지막, 토마스가 민호에게 했던 것처럼 그의 손등에 입을 맞췄다. 그 직후 민호의 시야에 들어온 토마스는 꿈속의, 그 옛날 자신을 구해줬던 어린 아이의 모습 그대로였다.
아무런 표정 없이 굳어있던 토마스의 얼굴이 무너져 내렸다. 참 이상한 얼굴이었다. 형편없이 울고 있는 주제에, 뭐가 좋은 건지 실실 웃고 있는 표정에 민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마, 자신도 그의 표정과 비슷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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