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날도 여전히, 미로 속을 열심히 파헤치고 다니던 토마스는 제 앞을 뛰어가는 민호의 등을 끈질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새내기 러너인 토마스에게 있어 민호가 저의 그 끈질긴 시선을 이미 진작부터 눈치 채고 있었다는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는 풀리지 않는 의문이었다. 평소와 다름없는 뜀박질로 미로의 문을 통과하고 나서 무심코 달리던 것을 멈춘 토마스는 순간적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버릇인지 습관인지 항상 문을 통과하기 전이나 통과하고 난 후, 가볍게 몸을 푸는 민호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가만히 제 두 무릎에 손을 대고 숨을 몰아쉬던 민호의 모습에 토마스가 천천히 민호에게 다가갔다.
“민호?”
“…….”
“…민호!!”
그대로 고꾸라지는 민호의 몸을 뛰어난 반사 신경으로 받아낸 토마스는 힘없이 쓰러진 민호의 몸을 안아들고는 다급한 목소리로 본부로 뛰어 들어갔다. 멀리서부터 민호가 쓰러진 것을 본 글레이드의 모두가 토마스의 뒤를 따랐고, 토마스는 얼른 본부 내부로 들어가 간이침대에 민호를 눕혔다. 뒤이어 서둘러 들어온 제프가 민호의 상태를 살피기 시작하자 다들 긴장되는 목소리로 하나둘 씩 제프에게 물음을 던졌다.
“제프, 민호 괜찮은 거야?”
“뭐가 문제인거야, 제프.”
“제프….”
“헤이, 너희들 모두 닥쳐봐. 난 진짜 의사가 아니라고.”
제프의 신경질적인 목소리에 다들 기가 죽은 듯 입을 꾹 다물었다. 하지만 그들이 이렇게 엄청난 반응을 보이는 것도 실로 당연한 일이었다. 3년간, 그 지옥 같았던 3년간 단 하루도 빠짐없이 미로를 드나들던 글레이드 내 최고의 버팀목이자 기둥인 민호에게 무슨 사소한 일이라도 잘못되는 날에는 글레이드의 모두는 희망을 잃는 것과 다름없는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뭐, 이러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 아무래도 최근 푹 쉬는 것을 본 적이 없는 것 같아. 피로가 쌓여서 몸살이 난 것 같으니 다들 조용히 하고 민호가 푹 쉴 수 있게 도와주기나 해.”
“알았어, 뭘 하면 돼?”
“죽, 죽 끓일까?”
“약초는?”
“민호를 돕고 싶어?”
“당연하지!”
“그럼 당장 여기서 꺼져.”
제프의 말에 다들 알았다는 듯 일제히 본부에서 하나 둘 물러나기 시작했다. 조심스럽게 민호가 메고 있던 벨트와 장갑을 푼 제프는 그나마 멀쩡한 천을 민호의 몸에 덮어주었다. 꺼지라는 제프의 말에도 꺼지지 않아도 용서가 되는 뉴트와, 사실 꺼져야 하지만 꺼지지 못하는 토마스가 그 자리에 계속 남아 민호를 지켜보았다.
“우리가 민호에게 너무 많은 짐을 맡긴 걸까.”
“그럴 수도 있지.”
덤덤하지만 꽤 복잡해 뵈는 표정으로 말하는 뉴트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던 토마스는 세삼 자신의 가슴에 메어져 있는 벨트의 무게가 꽤 무거워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윽고 자신을 쳐다보는 뉴트의 시선에 토마스는 어깨를 움찔거리며 뭐 할 말이라도 있냐며 뉴트를 바라보자, 뉴트는 크게 한숨을 쉬며 토마스의 어깨를 두드렸다.
“여긴 내가 지킬 테니까 너도 얼른 가서 쉬어. 당분간 미로에는 들어가지 않아도 되니까 그만큼 너도 푹 쉬고.”
“하, 하지만….”
“제프가 뭐라고 했지?”
“…알았어.”
흡사 꼬리고 귀고 축 늘어진 강아지처럼 기운이 하나도 없이 돌아가는 토마스의 뒷모습을 보면서 뉴트는 결국 헛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제프에게서 물수건을 건네받은 뉴트는 가만히 민호가 누워있는 침대 옆 의자에 몸을 맡겼다.
“…멍청하긴. 너도 참 멍청해, 민호.”
가만 가만 조심스러운 손길로 민호의 얼굴을 닦아주던 뉴트는 그제야 조금 안심된다는 표정으로 조용히 말을 이었다.
“쓰러질 정도면 오늘 아침에는 그냥 쉬겠다고 하면 될 것이지. 바보같이 우직해서는. 요령피우는 법을 몰라요.”
한참동안 그 행동을 반복하던 뉴트는 멀찍이 느껴지는 따가운 시선들에 휙, 고개를 돌렸다. 아니나 다를까 꺼지라고 한지가 언젠데 다들 벽 뒤에 숨어서는 이쪽을 훔쳐보는 꼴이 얼마나 웃긴지 뉴트는 큰 소리로 웃고 싶은 심정이었다. 숨을 생각이나 있는 건지 열댓 명이 넘는 놈들이 전부 하나 둘 머리를 내밀고는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데 역시 그 중에서도 단연 돋보이는 것은 토마스였다. 최대한 눈에 힘을 실어 따가운 시선으로 그들과 눈을 맞추니 언제 벽 뒤에 숨었냐는 듯 꽁무니 빼고 도망가는 아이들의 모습에 뉴트는 웃음이 터져 나오는 것을 넘어 머리가 지끈거리는 것을 느꼈다. 그렇게 민호가 좋을까. 뉴트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러나 다들 도망가는 와중에도 뚝심 있게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 있던 토마스와 눈이 딱 마주치자 뉴트는 질리고 말았다. 사실 제일 골칫덩어리이자 문제가 되는 놈이 저 놈인데 저렇게 버티고 있는 꼴을 보니 저 녀석을 데리고 그 위험한 미로를 돌아다녔을 민호의 피로감이 뉴트를 덮쳐오는 것 같았다.
“토마스.”
“…응.”
“이리와.”
뉴트의 말에 얼른 그의 곁으로 간 토마를 보며, 뉴트는 다 들리도록 큰 한숨을 쉬고는 토마스의 손에 쥐고 있던 물수건을 건네주었다.
“만에 하나 민호 귀찮게 굴면 내일 이 자리에 누워있는 것은 네가 될 거야.”
토마스는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뉴트가 일어난 자리에 앉았다. 아무래도 밖에 있는 녀석들을 통제하는 것은 딱 제 일인 모양이었다.
뉴트가 나간 뒤로 해가 꼴딱 질 때까지 눈을 뜨지 않는 민호를 마음 졸이며 열심히 간호하던 토마스는 아직도 깨지 않았냐는 뉴트의 말에 거의 울상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푹 자는 걸 거야, 라는 위로의 말에 토마스는 꼭 그래야 한다는 듯 세차게 고개를 흔들었다.
글레이드에 완벽한 밤이 찾아왔을 때쯤, 괴로운 듯 신음을 흘리는 민호 때문에 가슴이 철렁한 토마스는 민호의 손을 꽉 잡았다. 어렵사리 눈을 뜬 민호가 쩍쩍 갈라지는 목소리로 물을 찾자, 얼른 물을 떠준 토마스의 행동은 미로에서 달릴 때보다도 더 빨라보였다. 물을 두 컵이나 비운 민호는 어질어질한 머리를 손으로 짚으며 중얼거렸다.
“…워.”
“…뭐?”
“…춥다고.”
민호의 말에 정신이 번쩍 든 토마스는 근처에 있는 천이란 천은 다 긁어모아 겹겹이 민호의 몸 위에 조심스럽게 덮어주었다. 그래도 토마스의 눈에는 한참 모자라 보이는 터라 토마스는 자신이 입고 있는 티셔츠라도 벗어야 하나 갈팡질팡했다.
“멍청한 놈.”
“…어?”
“너 같은 놈을 보고 둔하다는 거야. 내가 한 말 못 들었어?”
“…….”
“…추워, 신참.”
곤란하다는 듯 웃는 민호의 모습에 토마스는 그 방을 비추고 있던 램프의 불을 껐다.
*
다음 날 아침, 민호가 누워있던 침대에서 벌떡 일어난 토마스는 혹여 누구라도 올까 서둘러 옷을 꿰입고는 침대 옆 의자에 앉았다. 그러자 잠을 자고 있지 않은 모양이었는지 민호가 웃는 소리가 작게 들렸다.
“웃겨.”
“웃지 마.”
“웃긴데?”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자신도 좀 멋쩍었던 모양인지 뒷머리를 긁적이며 웃던 토마스는 저 멀리서 들려오는 여러 명의 발소리에 귀를 쫑긋 세웠다. 저것들은 잠도 없나. 토마스는 서둘러 민호를 덮은 천과 함께 그를 한꺼번에 안아들었고, 민호가 뭐라 할 새도 없이 뒷문으로 달려갔다.
“…토마스. 머리 울려.”
“미안.”
“토 나올 것 같다고!”
“미안, 미안.”
“…아, 이 시발!”
“미안해, 미안해!!”
토마스가 향한 곳은 다름 아닌 숲 속 깊은 곳에 있는 그들만의 요새였다. 웬만한 아이들은 출입금지인 오두막 안으로 들어간 토마스는 서둘러 자리를 만들고는 민호를 눕혔다. 달려오는 내내 온갖 욕과 저주를 퍼붓는 민호는 정말로 상태가 안 좋았던 모양인지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서는 죽여 버리겠다는 협박도 잊지 않았다.
그래도 이곳에 있으면 귀찮게 구는 아이들은 보지 않을 테니 한 편으로 안심한 토마스는 그 귀찮게 구는 아이들의 범주 안에 자신이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 조심스럽게 이불을 덮어주려는 데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나더니 곧 머리를 가격하는 둔탁한 물체에 토마스는 그대로 민호의 옆으로 쓰러졌다.
“환자한테 무슨 짓이야.”
“뉴, 뉴트…! 아니, 아무 짓도 안 했어!”
“부탁이야, 뉴트. 나 좀 살려줘.”
“민호!”
억울하다는 듯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토마스를 보면서 킥킥 거리던 민호는 가만히 뉴트를 올려다봤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그릇과 함께 물을 담은 컵이 올려진 쟁반을 내려놓은 뉴트는 아직도 엎어진 토마스를 발로 연신 차며 말했다.
“또 헛짓거리 하다 들켜봐, 그럼 미로 안으로 넣어버릴 거야.”
“아니라니까!”
“푹 쉬어, 민호.”
“고마워.”
“너희 둘 정말 이러기야?”
웃음을 참지 않는 민호를 보며 한숨을 쉬던 토마스는 얼른 몸을 일으켜 자리에 앉았다. 기가 팍 죽어버린 토마스를 보며 웃음을 멈춘 민호는 작게 한숨을 쉬며 검지를 까딱였다.
“이리와, 토마스.”
토마스가 천천히 다가오자 민호는 그대로 토마스의 티셔츠 자락을 쥐며 그에게 입을 맞췄다. 꽤 깊은 입맞춤 뒤에 그 특유의 눈이 접히는 웃음을 지어보인 민호는 가만히 토마스에게 속삭였다.
“내 감기 가져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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