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R15.. 라고 말이나 할 수 있나. 이거.





  비가 오지게도 오는 날이었다. 신기한 게 그렇게 비가 많이 오면서 기운이 우울하거나 착잡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교복 소매, 바짓단까지 너나 할 거 없이 잔뜩 말아 올리고 양말도 신지 않은 채로 신은 검은색 슬리퍼 차림을 한 토마스와 민호는 하늘만큼 칙칙한 검은색 장우산을 나눠쓰고는 발걸음을 옮겼다. 혹시라도 민호의 어깨가 젖지는 않을까 노심초사하며 우산을 기울이던 토마스를 보며 민호는 피식, 바람 소리를 내었다.

 

  “꼴사나워, 저리가.”

  “넌 내가 너 좋으라고 하는 짓도 막 욕하더라. 섭섭하게.”

  “난 네가 지켜줘야 하는 계집애가 아니거든?”

  “계집애는 아니지만 내가 지켜줘야 하는 사람은 맞지.”

 

  불만스럽다는 듯 토마스를 올려다본 민호는 알았다는 듯 손을 내저으며 토마스의 옆으로 한 걸음 더 바짝 붙었다.

 

  “민호.”

  “왜, 영화나 드라마 보면 다 이러던데. 싫어?”

  “아니.”

  “단호박 같은 새끼….”

 

  구멍이라도 뚫렸나, 중얼거리는 민호의 말에 토마스는 가만 가만 고개를 끄덕이는 것 외에는 딱히 할 말이 없었다. 이럴 때는 뉴트처럼 말주변이 좀 더 많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곧 도착지는 다가오는데 토마스의 머릿속은 뒤죽박죽이었다. 그 고민들은 오늘이 금요일이라는 것에부터 비롯되었다. 오늘이 하필 금요일만 아니었어도 토마스는 생각조차 못했을 법한 일이었다. 그런데 하필, 하필 금요일이라 그런다. 토마스는 내심 기대를 조금이라도 걸어볼 법 하지 않은가, 하며 스스로를 다독였다. 열여덟. 물론 성인은 아니지만 그래도 알 건 다 아는 나이인데. 혼자 푸는 건 그만하고 싶었다. 명색이 연인 사이라면 좀.

 

  “…다 왔네.”

 

  이런 저런 생각을 하는 사이 벌써 민호의 집 앞에 도착해버리고 말았다. 우산은 원래 토마스의 것이었음으로 민호는 얼른 현관문 앞으로 달려 나갔다. 그런 민호를 붙잡지도 못한 손이 처량하게 바닥으로 떨궈졌다.

 

  “……그럼, 갈게.”

  “…….”

 

  침묵이 조금 길었나. 영 부자연스러운 자신의 행동에 토마스는 스스로를 질책했다. 이상하게 보였을 거야. 이번 주도 처량하게 집에서 혼자 보내야겠구나, 아아, 트리사. 나 또 병신 짓 했나봐, 어쩌지. 축 처진 어깨를 들 생각도 못하고 토마스는 뒤를 돌았다.

 

  “야.”

  “…응?”

  “자고 가.”

  “…….”

 

  안 그래도 큰 토마스의 눈이 더 크게 동그래졌다. 토마스가 예상한 대사는 두 가지였다. 전에 잠깐 봤던 tv프로그램에서 그러던데 집에서 라면을 먹고 가지 않을래, 라고 묻거나 비가 오는 날, 비가 너무 많이 오네… 하며 자연스럽게 집 안으로 유도하는 것이 그린라이트라고 했었단 말이다.

 

  “두 번 말 안 해, 병신아.”

 

  토마스는 그대로 들고 있던 우산을 떨어트렸다.

  그는 종종 착각할 때가 많았다. 사실 화끈하긴 저보다 그가 더 화끈했다.

 

  *

 

  대충 먼저 씻으라며 화장실 안으로 밀어 넣어진 토마스는 거울 속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며 볼을 꼬집었다. 화끈하게 달아오르는 뺨이 이것이 꿈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야.”

  “으악!!!”

  “…미친, 목소리는 존나 더럽게 커. 이거.”

 

  품으로 던져진 것을 받아든 토마스는 놀란 토끼눈을 한 채로 뒤를 돌았다. 새하얀 면 티와 검은색 바지는 모던하고 심플한 것을 좋아하는 그의 성격과 한 치의 어긋남도 없었다. 얼른 씻고 나온 토마스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들여다보았다. 키는 토마스가 조금 더 클지는 몰라도 어깨라던가 몸집은 민호가 훨씬 …좋긴, 좋았다. 뭐, 이건 사실이니까. 토마스가 나오자 소파에 앉아있던 민호도 옷을 챙겨들고는 화장실로 향했다. 거실에는 이미 tv가 틀어져 있었기 때문에 토마스는 민호를 기다리는 동안 조금 심심함을 달랠 수 있다는 생각에 안심했다. 그렇게 생각한 것도 잠시 토마스는 조금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오늘은 금요일이니까. 내일은 토요일이고. 어차피 부모님은 일 때문에 바쁘셔서 집에 안 계시니까 전화할 필요 없고…. 온갖 이상한 생각을 하던 토마스는 그대로 양손으로 얼굴을 덮어버리고는 소파 위로 엎어졌다. tv에서 뭐라고 지껄이는 지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지금 중요한 것은 토마스가 민호의, 그러니까 애인의 집 소파에 앉아있다는 것이었다. 물론 민호의 집에 온 게 처음은 아니었지만 그때랑 지금이 어찌 같을 수 있을까.

  

  달칵, 화장실의 문이 열리고 토마스는 얼른 몸을 일으켜 세웠다. 머리에 수건을 얹고 나오는 민호도 토마스와 똑같이 하얀 티에 회색 바지를 입고 있었다. 가끔 민호의 집에 놀러왔을 때 종종 봤던 모습이었지만 오늘은 조금 달라 보이는 분위기에 토마스는 침을 삼켰다. 달라 보이는 건 민호가 아니라, 민호를 보는 자신의 시선임이 분명함을 토마스 스스로도 자각은 하고 있었다. 자각만. 민호가 소파에 앉자 토마스의 심장이 벌렁벌렁 뛰는 것 같았다. 이런 기세로는 마라톤도 거뜬히 뛰고 올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었다. 분명 민호가 쓴 것과 같은 샴푸나 비누를 썼을 텐데, 이상하게 민호에게서 나는 향이 더 진했다. 물론, 자신은 벌써 샤워를 한지 15분이나 지났다는 사실도 아주 잘 알고 있었지만 말이다. 토마스는 민호의 머리 위 수건을 걷어 내었다. 촉촉하게 젖은 머리카락에서 물방울이 떨어져 내렸다. 뭐냐는 듯 쳐다보는 민호의 얼굴에 토마스는 수건으로 민호의 머리카락을 말려주기 시작했다. 거의 물기를 다 털어내고 나서야 토마스는 민호와 눈을 맞췄다. 쌍꺼풀 없는 장난기 넘치는 눈가 밑 두툼한 애교 살에 토마스는 절로 웃음이 났다.


  토마스는 손에 쥐고 있던 수건을 바닥으로 떨어트렸다. 조심스럽게 민호의 뺨을 쥔 토마스는 그대로 민호의 입술에 제 입술을 맞대었다. 그런 토마스의 행동에 민호는 살며시 눈을 감고는 토마스의 손에 자신의 손을 겹쳤다. 부드럽게 입을 가르고 들어온 토마스가 장난스럽게 민호의 혀를 건들이자 그런 토마스의 행동에 입 꼬리를 말아 올린 민호가 장난치지 말라는 듯 토마스의 손등을 쳤다. 나름 복잡한 마음과 설렘이 겹쳤던 첫 번째 키스와는 다르게 이제는 본능적으로 더 깊은 것을 원하는 토마스의 마음을 이해한다고 말하기라도 하듯 민호는 부드럽고 익숙하게 토마스에게 맞춰주었다.


  그때 민호의 발에 툭 하고 뭔가가 닿았다. 귀찮다는 듯, 방해가 될 것 같아 차버린 그것이 바닥으로 추락하며 둔탁한 소리를 냈다. 그러자 그때까지만 해도 언젠가 했던 예능프로그램의 재방송이 뚝 꺼지더니 큰 화면 가득 살색 가득한 스크린으로 가득 차는 것이 아닌가. 교태 가득한 여자의 신음소리에 토마스의 행동이 뚝 멈추고 말았다.

 

  “…미안.”

 

  민호는 리모컨을 차버린 자신의 발을 원망했다. 자연스레 민호의 몸 위에 올라타고 있던 토마스가 저 멀찍이 멀어지더니 가장자리에 다리를 모으고는 양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삭 덮어버리는 게 아닌가. 민호는 작게 시발을 외쳤다. 기껏 분위기 타나 했더니 빌어먹을, 다 말아먹었다.

 

  “…미안합니다.”

  “아니, …그 내가 미안해.”

 

  조용해진 집 안에 신음소리는 여전히 흘러넘쳤다. 아니, 저걸 꺼야겠다는 생각은 들겠는데 지금 막상 움직이기가 영… 아, 모르겠다. 민호는 머릿속이 터져버릴 것 같았다. 자존심도 자존심이고 한 번 보기 좋게 말아먹은 분위기 때문에 다시 뭔가 하기에는 아닌 것 같았다. 하지만 또 섣불리 일어날 수가 없는 것이,

  …섰다.

 

  “…시발.”

 

  보기 좋게 살짝 부푼 제 앞섬을 보니 민호는 머릿속이 새하얗게 질리는 것 같았다. 애인 새끼 눈앞에 두고 화장실에서 처량하게 처리해야하는 이 처지는 또 무슨 개 같은 처지인가. 민호는 신경질 적으로 토마스에게 리모컨을 던졌다.

 

  “끄던가.”

 

  민호의 목소리에 놀란 토마스는 동그란 눈으로 민호를 쳐다보았다. 민호는 한숨을 내쉬었다.

 

  “아니면 계속 하던가.”

 

  검지를 까딱이며 저를 부르는 민호의 모습에 토마스는 딸꾹질이 날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렇지만 또 다른 의미로 토마스는 심장이 요란하게 뛰고 있는 것을 느꼈다. 혀로 입술을 축이는 그 모습에 토마스도 똑같이 마른 입술을 핥았다. 토마스는 긴 팔을 뻗었다. 순식간에 민호의 발목을 잡아 끌어내린 토마스는 그대로 민호의 위에 올라타 그의 입술을 집어 삼켰다. 이젠 tv에서 뭐가 나오든 상관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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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토마스는 하루에도 몇 번이나 건조한 숨을 처량하게 내뱉었다. 통산 34전 33패 1무. 단 한 번도 제가 아닌 민호의 입에서 먼저 서로의 애정을 확인하거나 하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는 것이다. 그나마 1무라도 있는 것이 딱 한 번 해주긴 해줬는데 그것도 확실한 것은 아니었다. 토마스는 듣고 싶었다. 낯간지럽게 사랑한다, 어쩐다, 이런 말이 아닐지라도 그냥 딱 한번이라도 좋으니 민호가 먼저 표현을 해줬으면 좋겠다.


  “땅이 다 꺼지겠다, 토미. 무슨 일이야?”

  “좋아하는 사람한테 좋아해, 라고 듣는 일이 이렇게 어려운 일인 줄 알았나.”

  “그거야 당연하지.”

  “…당연하거야?”

  “애초에 우리가 어느 계집애들이랑 연애하는 줄 알아?”


  거기다 네 상대는 그, 민호라고. 뉴트의 지적 아닌 지적에 토마스는 더욱 큰 한숨을 쉬었다. 어지럽게 꼬인 토마스의 속과는 달리 글레이드의 날씨는 화창하기만 했다. 그걸 보자 속이 더 꼬이는 것 같았다.


  “나는 몇 번이라도 해 줄 자신 있는데….”

  “나도.”


  토마스의 옆에 다리를 모으고 앉은 뉴트는 주위에 널려있던 꽃과 풀을 꺾어 엮기 시작했다. 의외로 손재주가 좋은 뉴트는 금세 그럴듯한 화환을 만들어냈다.


  “너나 나나 무슨 고생이냐.”


  어린아이처럼 웃는 뉴트의 모습에 토마스는 뉴트의 쪽으로 몸을 돌려 뉴트가 하는 것을 똑같이 따라했다. 뉴트는 제 것을 만드는 와중에도 토마스에게 이것저것 가르쳐주었다.


  “이런 거라도 선물할까.”

  “그러다가 미로로 쫓겨날지도 몰라.”

  “역시 그럴까.”


  토마스는 울상을 지으면서도 계속 손을 꼬물딱, 꼬물딱 움직였다. 뉴트는 그런 토마스를 보며 뭐가 그렇게 웃긴지 웃음을 멈출 줄 몰랐다. 척한테 줄까, 뉴트에게 잠깐 배운 솜씨로 금세 그럴듯한 화환을 만든 토마스는 그래도 고맙다고 한마디라도 해줄 척의 얼굴에 웃음이 나왔다.


  “뭐하냐?”

  “으악!!”


  뒤에서 들린 목소리에 깜짝 놀란 토마스는 그대로 손에 들고 있던 화환을 던져버리고 말았다. 아차, 싶어 하늘로 높이 날아간 화환을 바라보던 토마스는 제 손이 닿기도 전에 민호가 그 화환을 잡아채는 것을 똑똑히 보고는 경악했다.


  “너도 뉴트 따라하냐? 애한테 이상한 거 가르치지 마, 뉴트.”

  “내가 뭘.”

  “아니, 그….”


  민호는 토마스를 흘끗 쳐다보더니 손에 쉬고 있던 화한을 토마스의 머리 위에 올려놓았다. 다행히 모자란 감은 없이 들어가는 화환을 보던 민호는 슬쩍 웃으며 토마스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뭐, 나쁘진 않네.”


  그러고는 뒤를 돌아 가버리는 민호를 보며 뉴트 또한 조금 당황한 모양인지 토마스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나 쟤 저러는 거 처음 봐.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토미?”


  뉴트를 돌아본 토마스는 입에 풀칠이라도 한 건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 자리에 못이 박힌 듯 붙어있었다. 그런 토마스의 심정을 이해하기라도 한다는 듯 뉴트가 고개를 젓더니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좋겠다? 좋아하는 사람한테 애정표현도 받고?”

  “나 지금 꿈 속인거지? 그치?”

  “정신 차려, 토미. 그거 하나 가지고 기절까지 하면 남자 체면이 뭐가 되냐!”


  이미 저 멀리 날아가고 있는 정신 줄을 제대로 잡지도 못한 채 토마스는 미친 듯이 주변에 있는 꽃들을 꺾기 시작했다. 야, 이 미친놈아, 하는 뉴트의 목소리에도 굴하지 않았다. 토마스는 자신의 얼굴이 쉽게 붉어지지 않는다는 점이 오늘에서야 천만다행인 것처럼 느껴졌다.


  그 날 저녁, 좀 피곤했던 민호는 일찍이 해먹에 몸을 뉘였다. 쉴 때만큼은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도록 해주자는 글레이더들의 배려로 민호는 가장 안전하고, 가장 조용한 곳에서 쉴 수 있었다. 금방이라도 잠에 빠질 것 같아 가만히 눈을 감은 민호는 금세 잠에 빠져들었다. 한 번 잠에 들면 다음 날 아침까지는 쉽게 깨지 않으려고 하는 민호는 잠결에 바스락 거리는 소리를 들어도 굳이 눈을 뜨려하지 않았다. 아까운 수면시간을 방해받고 싶지 않았다.

  딱히 누군가가 깨워준 게 아니어도 매일 새벽 똑같은 시간에 일어난 민호는 몸을 일으키자마자 피부에 닿는 간지러운 감촉에 눈을 비볐다.


  “…미친.”


  해먹 가득 제 몸 위에 뿌려진 꽃과 꽃잎들에 민호는 바람 빠진 웃음을 흘렸다. 글레이드의 들판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작고 아기자기한 꽃들이 민호가 몸을 움직일 때마다 따라다녔다.


  “귀여운 짓 하기는.”


  결국 크게 웃음을 터트린 민호는 자리에서 일어나 최대한 조심스럽게 꽃을 털었다. 가장 크고 예쁜 꽃을 셔츠 앞주머니에 보기 좋게 꽂은 민호는 그대로 해먹 가득 뿌려진 꽃을 양손 가득 안아 들었다. 서둘러 민호는 목적지로 가는 발걸음을 더욱 빨리했다. 목적지에 도착한 민호는 비장한 듯, 그 앞에 섰다.


  “야.”

  “……. 민호?”


  잘 자다가 자신을 부르는 민호의 목소리에 눈을 뜬 토마스는 느릿느릿 눈을 비비며 몸을 일으켰다. 어느 정도 시야가 깨끗해지자 토마스는 민호를 올려다보고는 할 말을 잃어버렸다. 양손 가득 꽃을 가득 안고 있는 그의 모습은 토마스의 말을 빼앗아 가기에는 충분하고도 남는 것이었다.


  “잘 잤냐?”

  “어, 어….”

  “선물이다.”


  민호는 양손 가득 안고 있던 꽃을 토마스에게 떨어트렸다. 들판에 핀 꽃이란 꽃은 다 꺾어가지고 온 건지 한참을 떨어지는 꽃을 보며 민호는 토마스가 봤던 그 어떤 미소보다 환하게 웃어보였다.

 

  “깼으면 빨리 빨리 움직여, 곧 문이 열릴 거야.”


  뒤돌아가는 민호의 모습에 토마스는 지금 당장 온 동네방네 소리를 치며 뛰어다니고 싶은 심정이었다. 잘 됐네, 하며 웃어 보이는 뉴트를 한 번 끌어안아주고는 서둘러 민호의 뒤를 쫓아가는 토마스의 옷에서 작은 꽃잎들이 떨어져 내렸다.





 

  조금씩 과거의 기억이 돌아오고 있다는 자각은 하고 있었다. 가끔 미로 속을 달리다 보면 지금 자신이 달리고 있는 곳이 미로인가, 아니면 절벽으로 향하는 길인가 헷갈릴 때도 종종 있었다. 그럴 때면 어김없이 누군가 다리를 붙잡는 기분이 들었다. 절대 이곳에서 나가게 해주지 않을 거야, 라고 비명을 지르는 것처럼 꽉 옭아매진 다리에는 힘이 하나도 들어가지 않았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지만, 가끔 꿈을 꾼다. 아마도 과거 어느 한편의 기억일 것이다. 꿈속에서 민호는 자신의 모습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보여줘도 상관없다는 듯, 여기저기 놓인 유리에 비친 자신의 모습은 한 없이 어린 아이의 모습이었다. 아마도, 글레이드에 온지 얼마 안 됐을 때의 모습과 비슷할 것이다. 꿈속에는 익숙한 얼굴이 여럿 보였다. 그 중에서도 단연 돋보이는 것은 토마스였다. 자신의 모습도 깔끔하니 나름 관리를 잘 받고 있는 몸이구나, 라고 생각했지만 어린 토마스의 모습은 그런 자신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말끔했다.

  때때로 하루 종일 사방이 막힌 유리관에 앉아 벽에 손을 얹고 있으면 토마스는 웃으면서 다가왔다. 유리벽이 조금 두꺼운 모양인지 토마스의 말이 분산되어버려 조금 안타까움을 느꼈다. 관 밖에는 토마스와 똑같은 옷을 입은 어른들이 많았지만, 그들은 자신에게 관심조차 주지 않았다. 오로지 이곳에서 자신에게 관심을 주고 있는 것은 토마스 하나뿐이었다. 이렇다보니 민호는 지금 자신이 꿈을 꾸고 있는 건지, 아니면 정신을 놓아 버린 건지 헷갈렸다.

  

  모습은 어린아이의 모습일지 몰라도 그 안에 있는 민호는 글레이드 안에서 3년을 악착같이 버텨낸 자였다. 처음 토마스가 그들과 같이 일을 했다고 했을 때 느꼈던 배신감은 평생이 지나도 지울 수 없는 것이다. 그러면서 동시에 민호는 스스로에게 의문점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머리로는 토마스에 대해 조금이라도 배신감이 들었다는 생각을 하면서, 가슴으로는 그를 미워할 수가 없었다. 그가 스스로 이 미로 안으로 뛰어들었기 때문이라고 하기엔 동기가 부족했다. 토마스는 끝까지 말해주지 않았다. 그가 왜 이 미로로 들어오게 됐는지에 대해. 민호는 그 의문을 풀어야만 자신의 길을 선택할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민호는 과거의 어린 자신의 모습에 스스로를 감추고 과거의 토마스를 관찰했다. 한 번 기억을 읽은 지금의 모습과는 어딘지 모르게 사뭇 달랐다. 오히려 3년이나 더 어렸음에도, 훨씬 성숙한 어른의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다가도 종종 유리관 앞에서 자신과 눈을 맞추며 이야기를 할 때는 영락없는 어린아이의 모습이 되어 있었다. 그냥 단순히 토마스에게는 친구가 필요했던 것일까. 그를 관찰할수록 의문점은 깊어만 갔다.


  꿈을 꾸는 날이 많아질수록 기억은 선명해졌다. 민호는 자신이 원래 글레이드에 올라올 만한 실험체가 아니었다, 라는 사실을 알아내었다. 글레이드로 보내지더라도 수많은 검사를 더 하고, 결과를 지켜봐야 올려 보내질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어른들은 역겨운 말을 했다. 너는 축복받은 아이라고. 민호는 치를 떨었다. 얼핏 보인 토마스의 얼굴이 퍽 슬퍼보였다.

  마지막으로 꿈을 꾼 날은 정말 현실 같아서 민호는 그 감각을 떨쳐낼 수가 없었다. 꿈을 꾸기 시작하자마자 숨이 막혀 죽을 것 같았다. 죽어도 고통 없이 죽기를 바랐다. 아, 이제 죽는구나, 이제 꿈에서 깨어나겠구나, 하고 생각했을 즈음, 큰 소리가 나며 유리관의 문이 열렸다. 문이 열리자마자 쏟아져 내린 폭포와 같은 물살에 민호의 몸이 힘없이 쓸려갔다. 온 몸이 축축하게 마지 물 먹은 솜처럼 무겁기만 했다. 자신의 얼굴을 감싸는 차가운 손이 없었더라면 민호는 아마 그 때 죽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흐릿한 시야 사이로 보이는 것은 토마스였다. 잔뜩 일그러진 얼굴을 하고 그렁그렁 눈물을 매달고 자신을 보고 있던 것은, 그 어린 토마스였다. 토마스는 민호를 꼭 끌어안고는 연신 미안하다며 중얼거렸다. 민호는 할 수만 있다면 토마스에게 그것은 네 잘못이 아니야, 라고 말이라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토마스가 너무 안쓰러워 보였다.

 

  “내가 바란 건 이런 게 아니었는데…….”


  아까부터 울려대는 비상등이 영 거슬렸다. 안 그래도 작은 토마스의 목소리가 민호의 귀에 제대로 들어오지 않았다. 토마스는 민호를 업었다. 축 늘어진 민호의 몸을 업고 몸을 가누는 것이 영 쉽지는 않아보였지만 토마스는 천천히 한 걸음, 한 걸음 걸었다.


  “민호. 염치없지만, 딱 하나만… 부탁할게.”


  민호는 딱히 대답을 할 수 없었다. 목소리는 나오지 않은 지가 이미 오래였고, 조금이라도 방심하면 금방 정신을 놓아버릴 것 같았다. 민호는 기를 쓰고 버텼다. 토마스의 말을 들어야만 할 것 같았다.


  “너에 대해 전부 잊어버려도…. 나에 대해 전부 잊어버려도 좋아. 아니, 차라리 나에 대해선 전부 잊어버려. 그리고 우리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자. 유리관 속이 아닌, 서로의 옆에서…. 서로 만나지도 않았던 것처럼.”


  철제 박스 앞에 선 토마스는 문을 열고 그 안으로 들어갔다. 최대한 조심스럽게 민호의 몸을 눕힌 토마스는 민호의 손을 끌어 당겨 입을 맞췄다.


  “내가 갈 때까지, 우리 다시 시작할 때 까지…. 죽지 말고 건강하게. 살아있어야 해. 너라면 그럴 거라고 믿어.”

  “…….”

  “토마스. 내 이름은, 토마스야.”


  요란한 소리를 내며 철제 박스가 위로 상승하기 시작했고, 민호는 그대로 몸이 붕 떠오르는 것을 느끼며 기절했다.

  그리고 동시에, 꿈에서 깨어났다.


  “…….”


  꿈에서 깨어난 민호는 말 그대로 엉망진창이었다. 머릿속은 복잡하니 이리저리 엉켜있었다. 과연 이것이 진짜 기억이라고 할 수 있을까. 중요한 건, 민호는 이제 확실하게 말할 수 있었다.

  민호는 토마스를 용서했다.


  서둘러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민호는 토마스에게로 달려갔다. 아침이 밝아오고 있었기에 뛸 준비를 하고 있던 토마스에게로. 토마스는 민호의 얼굴을 보며 반갑게 인사를 건네려다, 민호의 얼굴을 보며 입을 다물어버렸다.


  “민호, 무슨 일 있….”

  “어때?”

  “…뭐?”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보니까 느낌이 어때. 이젠, 네가 원하는 대로 됐어?”


  토마스는 민호의 말에 입을 다물어버렸다. 민호는 그것으로 확신했다. 민호의 기억이 완전하게 거짓인 것은 아니었다는 것을.


  “그래, 네 말대로 살아있었다. 네가 올라올 때까지 살아있었어.”

  “…민호.”

  "어때, 이제 후련해?"

  “…….”

  “…멍청한 새끼.”


  민호는 최대한 천천히, 그리고 조심스럽게 토마스의 손을 잡았다. 꿈 속 마지막, 토마스가 민호에게 했던 것처럼 그의 손등에 입을 맞췄다. 그 직후 민호의 시야에 들어온 토마스는 꿈속의, 그 옛날 자신을 구해줬던 어린 아이의 모습 그대로였다.

  아무런 표정 없이 굳어있던 토마스의 얼굴이 무너져 내렸다. 참 이상한 얼굴이었다. 형편없이 울고 있는 주제에, 뭐가 좋은 건지 실실 웃고 있는 표정에 민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마, 자신도 그의 표정과 비슷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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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글렌/민호 형제기반.

  * 초큼 욕설주의






  민호는 자신이 연인이라는 존재를 만들게 된다면 적어도 남자는 만들지 말아야지, 라는 생각을 은연중에 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자신이 호모포비아냐, 라고 물으면 그건 또 아니었다. 그랬다면 진작 가정이 무너졌어야 했다.


  “형, 나왔…….”

  “아, 왔어? 으, 민호 왔잖아요! 데릴, 좀!!”

  “애들은 가라.”

  “또 지랄이냐.”

  “이게 매형한테.”


  민호는 지금 코라도 파고 싶은 심정이었다. 아니, 차라리 팝콘을 사올까. 혹시 또 아나, 실시간으로 성인 방송을 볼 수 있는 기회일지도 모르는데. 물론 이런 말을 했다가는 하나밖에 없는 형이 식탁을 뒤집어엎을 것이 뻔했기 때문에 민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우리 형이 좋아?”

  “꼬우면 너도 애인 만들던가.”

  “…….”


  이런 시발. 항상 느끼는 거지만 저 인간은 존나 재수 없다. 아니 어쩌다 천사 같은 형이 저런 망나니한테 꼬여서 매번 그렇게 잘 가꿔놓은 몸을 헌납해야 하는지 민호로써는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 점이었다. 하지만 그러면 뭐하나. 그런 형이 저 인간이 좋다는데 별 수 있나. 민호는 고개를 저으며 방금 막 카톡이 온 핸드폰을 봤다. 


  - ^^v

 

  발랄한 이모티콘과 함께 전달된 셀카사진. 하나 밖에 없다는 불알친구는 지 애인 자랑하느라 바빠서 민호의 속을 또 한 번 뒤집어 놓으니 볼장 다 봤다.


  - 넌 그 못생긴 놈 어디가 그렇게 좋냐?

  - 못생겼으니까 귀엽지.


  에라이, 시발. 말을 말아야지. 이런 이유들 때문에 민호의 가치관은 여느 평범한 사람들 보다 훨씬 진취적이고 개방적이었다. 그러니까 간단하게 말하자면 평범한 연애를 거부하는 사람이 네 명, 커플이 두 쌍. 그 커플 지옥 속 민호 혼자만 솔로천국이었다.


  “…나도 남자친구 사귈까.”


  툭, 가방을 대충 거실 한 편에 내려놓은 민호는 그대로 2층에 있는 방으로 올라갔다. 방문이 닫히기 전, 그게 무슨 소리니, 하며 절규하던 형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민호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컴퓨터를 켜고 헤드셋을 쓴 민호는 음악의 볼륨을 최대로 켰다.

  아무리 그래도 좀, 형의 프라이버시는 보장해줘야 하지 않나. 싶었기에.


  저녁 먹으라는 소리에 헤드셋을 내려놓고 대충 방을 나간 민호는 식탁에 앉았다. 아주 자연스럽게 반대편에 형과 데릴이 앉았다. 뭐, 이것도 가족의 형태라면 형태라고 할 수 있는 것이었으니 딱히 나쁘지 만은 않았다. 그냥 민호가 알고 있는 것 한 가지는 저 매형이라는 놈은 형에게 미쳐있다. 그게 좋은 쪽이면 좋으련만.


  “뉴트는 잘 지내?”

  “지 남친 자랑하는 데 바빠서 짜증나.”

  “아, 그 싸가지 없는 꼬맹이.”

  “그러는 당신은 재수 없는 아저씨 쪽이고.”

  “네가 글렌 동생이니까 참는 거지 아니었으면 진작 넌 내 손에 죽었어.”

  “형, 이 인간이랑 헤어져.”

  “…….”


  험하게 이를 가는 소리가 들리자 민호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그래, 열에 한번은 이렇게 자기도 한 번씩 선물을 줘야하지 않겠는가. 그게 가족 간의 도리인데. 원래 이런 꼴이다 보니 글렌은 딱히 어느 쪽에도 편을 들지 않았다. 어찌 보면 가장 합리적이고, 가장 현명한 선택이었다.


  “야, 너 진짜 애인 없어?”

  “뭔 상관.”

  “이게 신경을 써 줘도 지랄이야. 너 때문에 글렌이 울잖아. 지 동생한테는 애인도 안 생긴다고.”

  “내가 언제 그랬다고 그래요?! 이 인간이 이젠 없는 말까지 지어내?”


  또 시작이네. 대충 밥을 우겨넣던 민호는 안 그래도 요새 달라붙는 파리 한 마리 때문에 눈살을 찌푸렸다.

  이름은 토마스. 키는 뉴트만하나, 얼굴은 꽤 반반하게 생기긴 했는데 어딘지 모르게 멍청한 구석이 있는 놈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민호도 덥석 연애를 하고 싶은 마음이 있긴 했지만 상대가 남자니까 두고 보고 있는 거다. 다 하늘로 돌아가 버리셨지만 그래도 아들이라고 있는 것들 두 놈 다 자식새끼도 못 볼 판이면 부모님이 좀 슬퍼하시지 않을까 하는 구차한 변명과 함께.


  “상엽이형.”

  “응?”

  “이 새끼 좋아해?”

  “야.”

  “……좋아하지?”

  “야, 넌 또 왜 끝이 물음표야.”


  숟가락을 내려놓은 민호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카톡창을 열었다.


  - 야, 너 갤리랑 어떻게 사귀게 됐냐.

  - 그냥 바로 넘어트렸는데.

  - 이런 미친놈.


  민호는 자신에게 달라붙은 녀석이 토마스 같이 좀 모자라 보이는 놈이라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본의 아니게 토마스에게 모질 게 군 것 같아 좀 미안해졌다.


  “형.”

  “왜?”

  “나 좋다는 사람한테, 그 녀석이 같이 밥 먹자고 했는데 밥 먹었다고 같이 안 먹고, 같이 하교 하자는데 집 반대쪽이라 하고 돌아오고, 전화번호 가르쳐달라 그랬는데 내거 말고 갤리 녀석 거 가르쳐줬거든?”

  “…민호야.”

  “응?”

  “그 아이가 그렇게 싫니?”

  “…….”

  “야, 철벽도 작작 쳐야 하는 거야.”


  민호는 다시 카톡을 켰다.


  - 야, 너 토마스 전화번호 알아?

  - 네가 갤리 번호 가르쳐 준 그 녀석? 그러고 보니 뒤질래, 우리 갤리 전화번호 함부로 팔고 다니게.

  - …닥치고 전화번호나 내 놔.

 

  뉴트에게서 토마스의 전화번호를 받은 민호는 한참이나 고민했다. 이걸 보내야해, 말아. 사실 아까 형의 반응이 생각보다 훨씬 심해서 민호는 진심으로 토마스에게 좀 미안해졌다. 그 녀석, 내 전화번호도 모를 텐데. 한참을 문자를 썼다 지웠다, 를 반복한 민호는 결국 전송 버튼을 눌렀다.


  - 야, 이게 내 번호야. 딴 놈 거 가르쳐줘서 미안하다.


  이 정도면 됐겠지, 하고 핸드폰을 내려놓는 순간 울리는 벨소리에 민호는 깜짝 놀라 뒤집어질 뻔 했다. 분명 액정에 찍힌 번호는 토마스의 것이었다.

 

  “뭐 이런 미친놈이.”


  민호는 핸드폰의 배터리를 그대로 분리해버렸다. 민호는 그 때 눈치를 챘어야 했다. 토마스가 단순히 멍청하고 모자라 보이는 게 다가 아니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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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벽같이 일어난 민호는 조심스럽게 뉴트가 자고 있는 쪽으로 다가갔다. 이상하게 잠이 없는 아이들이 몇몇 일어나 있었기에 민호에게 인사를 건넸고, 민호는 눈짓으로 아이들에게 답했다. 아직 곤히 자고 있는 것 같은 뉴트의 모습에 민호는 어딘지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별 일 아니라는 듯, 이제 나갈 준비를 하려 뒤를 돈 순간, 팔목을 잡은 손에 숨을 삼켰다.


  “…그렇게 귀여운 짓 하고 어딜 가려고?”

  “깨있었냐.”


  싱긋 웃는 뉴트의 얼굴에 민호는 꽤 복잡한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그 표정을 싹 지워버렸다.


  “민호.”

  “…왜?”

  “오늘은 안 가면 안 돼?”

  “뉴트.”

  “내 곁에 있어줘.”


  민호는 뉴트의 부탁 아닌 부탁에 진심으로 동요하기 시작했다. 그것이 뉴트의 눈에도 뻔히 보였는지 뉴트는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민호의 어깨를 두드렸다.


  “농담이야. 얼른 가서 도시락도 싸고….”

  “뉴트.”

  “…응?”

  “곁에 있어달라고 하면, 있어줄 수 있어.”


  예상하지 못한 말이었는지 진작 웃고 있던 뉴트의 얼굴이 조금씩 굳어가기 시작했다. 민호는 그런 뉴트가 안쓰러웠다. 많은 아이들을 통솔하는 위치에 있는 녀석들은 알게 모르게 제 진심을 숨겨야만 하는 법이었다. 하물며, 비슷하거나 같은 위치에 있는 녀석들에게까지 속내를 다 드러내는 법이 없었다. 그들 중, 뉴트는 그게 제일 심한 아이였다. 민호는 원체 말이 없고 무뚝뚝해 보이는 성미라 티가 덜 났다는 것이 맞는 말이었다. 오늘은 그것이 정점을 찍는 날이라 생각한 민호는 아침부터 뉴트의 상태를 확인하러 온 것이었다.

  오늘은, 뉴트가 글레이드로 온 지 딱 3년이 되는 날이었다.


  “괜찮아, 괜찮아. 뉴트.”


  민호는 얼른 뉴트를 데리고 지도 보관실로 향했다. 가는 도중 오늘은 미로에 들어가지 않겠다는 민호의 청천벽력 같은 소리에 글레이드가 뒤집어졌지만 알비가 얼른 아이들을 통제해주었다. 적잖이 충격을 받은 모양인지 뉴트는 가면서 아무 말도 없었다. 손끝에서 전해져오는 현저히 낮아진 체온에 민호는 속으로 혀를 찼다.

  지도보관실에 들어가자마자 민호는 대충 근처에 있는 천을 아무거나 집어 뉴트에게 덮어주었다. 딱히 민호는 뉴트가 나약한 인간이라거나 하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인간은 언제든 강해질 수 있고, 약해질 수 있는 존재였다. 민호는 충분히 그런 뉴트를 이해할 수 있었다.

 

  “알고 있었구나. 오늘이 무슨 날인지.”

  “그래. 그리고 두 달 뒤면 나도 똑같을 거야.”


  뉴트는 천천히 손을 뻗어 가만히 민호의 가슴 위에 올려놓았다. 마치 심장 고동소리를 느끼고 싶다는 듯, 조심스럽게 내려앉은 뉴트의 손이 미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얼핏 본 뉴트의 얼굴은 아무런 표정이 없었다. 가끔 민호는 뉴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짐작조차 되지 않을 때가 있었는데 지금이 바로 그 짝이었다. 민호는 조심스럽게 뉴트의 뺨을 감싸 쥐었다. 작은 얼굴이 투박하고 거친 손 한편에 딱 들어왔다.


  “무슨 생각 해?”


  아무 대답도 하지 않는 뉴트의 얼굴을 보며 민호는 엄지손가락으로 가만가만 뉴트의 눈 밑을 쓰다듬었다. 꼭 지금 당장이라도 눈물이 뚝 떨어질 것 같이 발갛게 부은 눈가가 안쓰럽기만 했다.


  “민호.”

  “응.”

  “나, 살 수 있을까?”


  살고 싶어, 죽고 싶지 않아. 밑 빠진 독처럼 뉴트의 감정이 쏟아지다 못해 흘러 넘쳐 오르는 것이 민호의 눈에도 훤히 보였다. 민호는 서둘러 뉴트의 몸을 끌어안았다. 아까도 느꼈던 거지만 꼭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것처럼 서늘하기만 한 체온에 오한이 드는 것 같아 불안한 마음이 기어 올라왔다.


  “왜 못 살아. 네가 왜 죽어. 내가 그렇게 내버려둘 거 같아?”

  “여기 온 지 벌써 3년이야. 3년이라고, 민호. 나 살고 싶어. 이딴 곳에서 죽고 싶지 않아.”

  “…뉴트.”

  “…그런데 죽는 것보다 더 무서운 게 있어.”


  뉴트는 부드럽게 민호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겹쳤다. 애정 어린 연인의 행동이 아닌 서로의 호흡과 온기를 나누려는 그 행동에 민호는 가만히 뉴트의 등을 쓰다듬었다.


  “내가 죽고 난 다음에, 너한테서 잊혀지는 거야.”


  기어코 눈물을 참아내고는 억지로라도 환하게 웃는 뉴트의 얼굴에 민호는 본인이 다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이럴 때마다 항상 뉴트에게 해주던 말이 있었다.

절대로 이곳에서 널 데리고 빠져나갈 거야, 내가 널 잊을 일은 없을 거야. 민호는 새삼스레 그런 말들이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3년이란 시간은 그렇게 길고, 긴 시간이었다.


  “오늘은 말 안 해줄 거야?”

  “…….”

  “날 이곳에서 데리고 나가주겠다고. 날 절대로 잊지 않을 거라고. 난….”

  “오늘은 좀 다른 말을 해볼까 하고.”

  “민호….

  “약속해. 여기서 빠져나갈 때도 함께 빠져나갈 거고, 죽더라도 함께 죽을 거라고.”

  “…….”

  “혼자 내버려두지 않을게.”


  민호의 말에 뉴트의 얼굴이 심하게 일그러졌다. 자신은 그런 말을 바란 게 아니라는 듯, 짐짓 화를 내는 것 같은 표정이었지만 뉴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넌 가끔 비겁해, 뉴트.”

  “…내가?”

  “네가 죽고도 내가 살아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비겁해.”

  “…….”

  “약았어.”


  마지막 말은 진심으로 내뱉은 말인 것 같아 뉴트는 눈을 찡그리며 웃었다. 여전히 자신의 얼굴을 감싸고 있는 민호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올려놓았다. 자신의 것보다 한층 따뜻한 온기가 손으로 스며들어오는 기분에 어깨가 한 층 가벼워졌다.


  “내가 살아야 너도 사는구나.”

  “그렇게 되지.”

  “…진짜 약은 게 누군데.”


  뉴트의 말에 민호는 특유의 장난스러운 웃음을 지어보였다. 뉴트는 가볍게 민호의 뒷목을 끌어당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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