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건 분명 토마스가 러너가 된지 며칠 되지 않아서 생긴 일이었다. 마음 한 구석, 토마스의 속내는 민호에 대한 여러 가지 감정으로 복잡하게 꼬여있었다. 물론 그 밖에도 어쩌다 이곳으로 오게 됐는지에 대한 고찰이 먼저였지만, 지금은 그것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까딱 잘못해서 살해당할 위기를 넘기게 되었고, 그리버에게 찔린 자의 최후를 직접 눈으로 본 토마스는 그날 밤 이상한 꿈을 꾸었다. 이곳으로 온지 얼마 안 돼서 전혀 기억을 하지 못하는 여자아이가 나오는 꿈이나 이상한 연구소가 나오는 꿈을 주로 꾸긴 했지만 그 날 만큼은 전혀 다른 꿈이었다. 너무나도 현실과 같은 꿈이었기에, 토마스는 지금 글레이드에 있는 자신의 모습이 꿈인 것은 아닐까 착각할 정도였다.

  제대로 먹고 씻고 깔끔하게 차려입은 토마스의 모습은 딱 그 나이, 열여섯의 모습이었다. 그리고 문득 시선을 던진 길의 끝에는 익숙한 뒷모습이 우뚝 서 있었다. 토마스는 본능적으로 그것이 민호의 등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젠 하다하다 꿈속에서까지 그의 등을 쳐다보게 된 꼴이라니. 토마스는 자조적인 웃음을 지었다. 토마스는 더 이상 민호의 등을 지켜보는 것에 대해 질렸다고 말할 수 있었다. 러너가 되고 난 이후부터 그랬다. 물론 민호는 러너들의 대장이며, 이 글레이드의 기둥인 사람으로 아무것도 모르는 초짜인 자신을 이끌고 보호해주는 것이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었지만, 토마스는 그것에 싫증이 났다. 하루라도 빨리 그의 옆에 서고 싶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토마스는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그런 무의식이 꿈에 반영이라도 된 듯, 토마스 자신이 한심해져야만 했던 이유의 원인이 민호의 옆에 모습을 드러냈다.

  

  알고 있었다. 그를 보는 민호의 시선이 어딘지 모르게 다르다는 것을. 토마스는 무척 똑똑한 아이였다. 그렇기에 이 무의식을 조종하는 것쯤은 별 거 아닌 일이었다. 다정해 보이는 두 사람의 사이를 갈라놓았던 그 날을 불러들였다.

  그 땐, 그리버에게 찔려 정신을 놓아버린 자의 말로를 지켜보기에 급급했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벤을 끌고 가는 민호의 모습에 초점을 맞추자 신기하게도 토마스의 시선엔 민호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토마스는 자신이 얼마나 어리석은 짓을 했는지 깨달았다. 차라리 보지 않았으면 더 좋았을 것을, 알면서도 사실은 다 알고 있으면서도 자신의 생각에 못을 박아 넣는 짓을 스스로 하다니. 얼마나 어리석은가.

  

  토마스는 눈을 떴다. 어떻게든 그 꿈에서 벗어나기 위해 정신 나간 짓이라고 욕해도 별에 별 짓을 다했다. 꿈에서 깬 토마스는 도저히 이대로는 다시 잠을 잘 수 없을 것 같아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슴푸레 새벽녘이 밝아오고 있는 하늘이 오묘한 분위기를 띄며 토마스의 가라앉은 마음을 그나마 위로라도 해주는 것 같았다.

 

  “…….”

 

  간단하게 산책이라도 할 겸 주위를 돌아보다 미로 앞에 서 있는 사람의 그림자에 토마스는 발걸음을 멈췄다. 절로 쥔 주먹에 힘이 들어가고 다 부러진 손톱이 토마스의 손바닥을 세게 찔렀다. 토마스의 속이 한 번 더 뒤집어지는 꼴이 된 것이다. 토마스는 자신이 똑똑한 아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지금 복장이 다 뒤집어 질 것 같은 노릇이었다. 똑똑한 만큼, 인정하고 싶지가 않았다. 이미 떠나보낸 아니, 이미 이 세상 사람도 아닌 자에게 질투라는 하찮은 감정을 내보여야 한다는 사실에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슬퍼?”

  “…….”

 

  토마스의 존재를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 놀란 기척도 없이 토마스의 얼굴을 바라보는 민호의 모습은 확실히 어딘가 달라 보였다. 강인한 모습 뒤에 감춰진, 그도 그래봤자 아직 어린 소년이라는 이면이 보였다.

 

  “내가 죽였으니까.”

  “민호.”

  “내가 밀어 넣었으니까.”

 

  토마스를 비켜 굳게 닫힌 미로에 시선을 던진 민호는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토마스는 가만히 민호의 옆에 자리를 잡았다. 다리를 모으고 그 사이에 얼굴을 박은 민호는 토마스의 부름에도 얼굴을 들지 않았다.

 

  “민호, 울….”

  “…닥쳐.”

  “…….”

 

  반사적으로 튀어나오는 민호의 대답에 토마스는 순간 웃음을 터져 나오려는 것을 가까스로 참았다. 좀 더 민호의 곁에 가까이 붙은 토마스는 민호의 어깨에 자신의 어깨를 맞붙게 했다. 이러면 조금이라도 위로가 되지 않을까 싶은 마음에서 우러난 행동이었다. 섣부른 말로 그를 함부로 위하려고 하는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그저 민호가, 그가 자신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알아줬으면 했다.

 

  “…내가, 대신 곁에 있어줄게.”

  “…….”

  “벤처럼 뛰어난 러너는 아니더라도….”

  “야.”

  

  아까와는 영 딴판으로 되살아난 민호의 목소리에 토마스는 마른침을 삼켰다. 지금과 같은 상황은 꼭 민호가 자신을 호되게 혼을 낼 때나 일어날 법한 상황이었다. 토마스는 어쩔 줄 몰라 하며 민호의 얼굴을 이리저리 쳐다보았다.

 

  “그 녀석 대신이 어디 있어.”

  “민호….”

  “그 녀석은 그 녀석이고, 너는 너야. 대신이라는 말은 하는 게 아니야. 너도 이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사람이니까.”

  “…….”

  “두 번 다시는 잃고 싶지 않으니까.”

 

  새벽녘이라 잘 보이지 않던 민호의 짓무른 눈가를 보자 토마스는 가슴이 너무 아팠다. 조심스럽게 엄지손가락으로 민호의 눈가를 어루만진 토마스는 싱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미안해. 바보 같은 소리해서.”

  “알면 됐어.”

 

  민호는 얼른 토마스의 옆 자리에 엉덩이를 붙였다. 아까와는 확 달라진 얼굴로 미로를 바라본 민호는 무언가 다짐이라도 한듯 고개를 크게 한 번 끄덕여보였다. 그러고는 한 쪽 입 꼬리를 싹 말아 올리며 토마스를 쳐다보았다.

 

  “알았으면, 신입. 내일부터는 2시간씩 트레이닝이야. 군소리하기 없기.”

  “윽, 그런 게 어디 있어! 평소의 두 배잖아!”

  “내가 그렇게 말하면 그런 줄 알아.”

 

  토마스는 최대한 잔뜩 울상을 짓고는 불쌍한 척 민호를 바라보았다. 한참 민호를 관찰한 결과 중 하나에서 비롯된 행동인데, 민호는 은근히 우는 얼굴에 약하다는 사실이었다. 그게, 뉴트 한정이라면 한정이지만 말이다.

 

  “그게 내 옆에서 달릴 수 있는 가장 빠른 길이야.”

 

  비명을 지를 뻔했다. 속내를 들켰다는 변명도 뭣도 할 새도 없이 멱살이 잡힌 토마스의 얼굴 바로 앞에 민호의 얼굴이 놓여있었다. 진지하고 올곧게 뻗은 민호의 시선에 토마스는 자신의 시선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눈을 이리저리 굴리다 결국 눈을 감아버렸다.

 

  “그러니 죽지 마.”

 

  가볍게 내려앉은 숨결이 따뜻하기만 했다. 마치, 이것이 살아있는 사람의 숨결이라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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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그르오그르

* 토민호기반 약간의 뉴트갤


  






  글레이드에는 세 가지의 규칙이 있었다. 

  첫째로는 남에게 빌붙지 말 것. 스스로 일하고 살아남아야만 했다. 둘째로는 절대 다른 아이들을 해치지 않을 것. 살아남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협동심이 중요한 법이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절대로 미로 건너편으로 넘어가지 말 것.

  하지만 이 세 가지 외에도 또 하나, 숨겨져 있는 규칙이 하나 더 있었다.

 

  “절대로 밤에 혼자서 숲 속을 돌아다니지 말 것.”

  “왜?”

  “토마스, 난 네가 호기심이 무척 많은 녀석이라서 마음에 들기도 하지만 가끔은 곤란하기도 한 것 같아.”

 

  미묘하게 찡그린 웃음을 짓는 뉴트의 얼굴에 토마스는 어깨를 으쓱해보이고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토마스에게 있어 뉴트는 꽤 괜찮은 선생님이었다. 뉴트나 알비가 없었으면 이 글레이드에서 소위 말하는 왕따를 당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뒤통수에 따갑게 달라붙는 시선의 주인이 갤리라는 것쯤은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

 

  “갤리는 대체 왜 날 그렇게 싫어하는 거야?”

  “글쎄.”

 

  토마스는 또 한 번 멍청한 물음을 할 뻔 했다. 뉴트는 참 괜찮은 선생님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토마스의 그 넘쳐나는 호기심을 자극하는 촉진제이기도 했다. 뉴트만 보면 이 글레이드에는 아직도 자신이 모르는 수많은 비밀이 많은 것 같단 말이었다.

 

  “넌 꼭 답을 알면서도 나한테 안 알려주더라.”

  “내가?”

  “응.”

  “오, 예리한데.”

  “뉴트.”

  “장난이야, 장난. 갤리 녀석이 질투가 많아서 그래.”

  “…질투?”

 

  뉴트는 가볍게 토마스의 어깨를 두들기고는 갤리 쪽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가던 도중 뒤를 돌아 다시 토마스 쪽을 본 뉴트는 짐짓 엄한 얼굴로 다시금 토마스에게 했던 말을 번복했다.

 

  “명심해, 토마스. 혼자 숲으로 기어들어갔다가 날 만나면 다행이겠지만, 그 녀석은 그렇지 않아. 그 녀석은 인내심이 좀 부족하거든. 절대로, 절대로 밤에 혼자서 숲 속에 가지마. 그러다, 잡아먹혀.”

  “…잡아먹힌다고?”

 

  의미심장하게 웃는 뉴트의 얼굴에 뒷목에 한기가 내려앉은 기분을 느낀 토마스는 조심스럽게 뒷목을 쓸어보았다. 토마스는 자신의 최대 장점이자 최대 단점인 호기심이 고개를 집어넣지 못하고 내밀기만 하는 것이 눈에 훤히 보였다. 민호에게 물어보면 대답해줄까, 하는 의문을 품고 토마스는 프라이에게 달려갔다. 곧, 저녁 먹을 시간이었다.

 

 

  *

 

 

  딱히 토마스는 뉴트의 경고를 무시하려고 했던 것이 아니었다. 그러니까 간단하게 말해서 그의 경고를 무시해야지, 하고 무시하려고 한 게 아니라는 말이다. 그냥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었다, 라고 밖에 말할 수 없었다. 그냥 단순히 그날따라 잠이 깨버린 걸 어찌하란 말인가. 잠은 통 오지 않고 미로는 굳게 닫혔으니 가서 뛸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다른 아이들의 잠을 방해하고 싶지는 않았기에 쥐 죽은 듯이 자리에서 일어난 토마스는 조심조심 숲 속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냄새.”

 

  주위가 어두운 터라 시각 외의 감각들이 바짝 곤두선 것 같았다. 아침에는 통 느끼지 못했던 것들이 속속히 느껴지곤 했다. 숲 입구에서부터 강렬하게 풍겨오는 비릿한 냄새는 토마스의 신경을 자극하기에는 충분했다. 글레이드로 올라오고 나서 부쩍 많이 맡는 냄새였다. 토마스는 잔뜩 긴장한 채로 숲 속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

  “…….”

 

  토마스는 본능적으로 자신의 앞에 누군가가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 무엇보다 입구에서부터 풍겨오던 비린내가 한층 진해진 탓에 토마스는 절로 인상을 찌푸렸다. 곧 어둠에 적응한 눈에 사람의 인영이 보이기 시작했다. 토마스는 침을 삼키며 뒤로 한발자국 물러났다.

 

  “[뭐야, 신입. 죽고 싶어서 환장했냐?]”

  “…민호?”

 

 토마스의 귀에 익숙지 않은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은 글레이드 안에 딱 한 사람 밖에 없다. 오로지 그 만이 쓰고 그 만이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 아까부터 설마 하던 토마스의 직감이 딱 들어맞는 순간이었다.

 항상 미로를 같이 달리던 그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익숙해진 시야 사이로 들어온 민호의 모습은 너무나도 색달랐다. 까무잡잡하게 탄 피부가 이상하리만치 새하얗게 빛나고 있었고, 멀리서 봐도 한 눈에 들어오는 금빛 눈동자는 토마스의 발걸음을 붙잡았다.

 

  “뉴트한테 못 들었냐? 밤엔 절대로 숲 속에 들어오지 말라고.”

  “…….”

  “그러다 잡아먹힌다고.”

 

  민호는 천천히 토마스의 곁으로 다가왔다. 토마스는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서있기만 할 뿐이었다. 단순히 겁에 질린 것인지, 아니면 머리로 이해를 못하는 상황에 대한 경외심인지는 토마스 자신도 몰랐다. 토마스는 바로 앞에 보인 민호의 모습에 숨을 삼켰다. 금빛 눈동자는 꼭 고양이의 것같이 날카로워져 있었고, 그의 입술 주변은 형편없이 더러워져있었다.

  뭐라고 말을 꺼내기도 전에 땅에 등을 처박은 토마스는 능숙하게 자신의 위로 올라타는 민호를 보며 두 팔을 어린아이처럼 막 휘둘렀다. 간단하게 토마스의 두 팔을 제압한 민호는 토마스의 목덜미 언저리에 코를 박았다.

 

  “뭐, 뭐하는 거야…!”

  “네가 내 식사시간을 방해했잖아.”

  “아니, 그 나는 딱히 그러려던 게 아니고….”

  “토마스.”

  “…어, 어?”

  “시끄러워.”

 

  괜히 딸꾹질이 날 것 같은 기분에 토마스는 잔뜩 울상을 지었다. 이대로 정말 확, 잡아먹히는 것은 아닌가 싶은 기분이었다. 그런 토마스의 얼굴을 보며 싱긋 웃는 민호의 얼굴에 토마스는 그대로 얼어붙었다. 저렇게 친절하게 - 토마스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 웃는 민호의 얼굴은 상상도 못하고 있었다.

 

  “먹게 해주면 기분 좋은 거 해줄게.”

  “뭐, 뭐?!”

 

  가볍게 손가락으로 토마스의 중심부를 가리킨 민호의 표정 없는 얼굴에 토마스의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용량 초과다. 그러니까, 이런 민호는 토마스가 생각하고 있던 민호와는 너무나도 달랐다. 낮과 밤의 모습이 너무나도 달라 괴리감이 느껴지는 그의 모습에 토마스는 순간적으로 민호의 몸을 잡아당겨 순식간에 위치를 뒤바꿨다.

  

  “워, 진정해봐, 민호. 난 지금 머리가 터질 지경이거든?”

  “왜 싫어?”

  “아니, 싫은 건 아니고… 가 아니라!”

 

  민호는 자신의 어깨를 가볍게 누르고 있는 토마스의 팔을 한손으로 쥐더니 입술 쪽으로 끌어당겨 가볍게 입을 맞췄다. 생경한 그 감촉에 토마스는 온몸에 소름이 돋을 지경이었다.

 

  “너한테서 좋은 냄새나.”

 

  게임 셋. 끝이었다.

 

 

  *

 

 

  “하하하, 그러니까 그대로 민호한테 홀랑 잡아 먹혔다, 이 말이지? 미치겠다, 하하!”

  “…….”

 

  깔깔거리며 뒤로 넘어가는 뉴트의 모습에 토마스는 똥이라도 씹은 표정을 하고는 뚱하게 그를 쳐다보았다. 목이고 팔목이고 이리저리 붕대를 두른 토마스의 모습은 처량해 보이기까지 했다.

 

  “왜 제대로 설명 안 해준 거야? 얼마나 놀란 줄 알아?”

  “그래서 좋은 짓 했잖아.”

  “…윽, 그건….”

  “내가 모를 줄 알았어?”

 

  뉴트의 말에 가볍게 한숨을 쉰 토마스는 한 쪽 눈을 찡그리며 그에게 물었다.

 

  “그럼 너도 그거야?”

  “응.”

  “예상은 했지만…. 실제로 보고 들으니 놀랍네.”

 

  토마스는 가볍게 목을 문지르고는 오늘은 어딘가 한층 부드러워진 것 같은 시선에 고개를 돌렸다. 역시나 그 시선의 끝에는 갤 리가 있었다. 그 잠깐의 틈에 토마스는 똑똑히 봤다. 갤리의 팔목에 감겨 있는 붕대를 말이다.

 

  “뉴트, 혹시 갤리는….”

  “내 거야.”

  “…….”

 

  원래부터 웃는 것이 웬만한 여자아이들 못지않게 눈부신 그였는데, 살며시 보인 그를 꼭 닮은 금빛 눈동자에 토마스는 갤리와 뉴트를 번갈아보았다. 왠지 지금 보니 꼭 갤리의 처지랑 자신의 처지가 똑같지 않은가. 가볍게 한숨을 쉰 토마스는 자리에서 일어나서는 흙이 묻은 바지를 털었다.

 

  “토마스.”

  “…응?”

  “어땠어?”

  “……. 뉴트.”

  “알았어, 안 물을게.”

 

  장난스럽게 웃으며 갤리가 있는 쪽으로 발걸음을 돌린 뉴트의 등을 쳐다보던 토마스의 얼굴에 서서히 미소가 번졌다.

 

  어땠냐고?

  평생가도 어젯밤은 절대로 못 잊을 거다. 평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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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로에서 뛸 때만큼은, 그 때만큼은 토마스는 이 세상 누구보다 자유롭다고 느꼈다. 참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미로에 갇힌 주제에, 그런 사실과는 상관없이 미로 안을 뛰어다닐 때는 그 어떤 사람보다 활기차고 생기가 넘치는 사람이 토마스였다. 토마스는 무척이나 호기심이 많은 소년이었다. 딱 그 나이 소년의 모습에 맞게 궁금한 것은 못 참는 성격이었고, 해보고자 하는 일이 있으면 꼭 해야만 하는 성미를 가진 소년이었다. 그가 우기고 우겨 러너가 된지 며칠 지나지 않아, 토마스에게는 또 다른 흥밋거리가 생겼는데 그게 바로 민호였다.

 

  “…뒤통수 뚫리겠거든?”

  “아, 미안.”

 

  토마스는 말하고 행동하는 것에 거침이 없었다. 그런 토마스의 시선이 처음에는 그저 단순한 호기심에서 비롯된 것이겠거니, 하고 안일하게 생각하고 있던 민호는 끈질기게 붙어먹는 소년의 시선에 어찌할 줄을 몰랐다. 할 말이 있냐는 자신의 말에 딱히 없다며 고개를 젓는 토마스의 멱살을 쥐고 서너 대 후려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너 대체 나한테 원하는 게 뭐야?”

  “원하는 거? 딱히 없는데.”

  “그럼 사람 좀 그만 쳐다봐, 기분 이상하다고.”

  “내가 그렇게 쳐다봤어?”

 

  민호는 생각하는 것을 그만두었다. 호기심이 왕성한 십대 소년의 면모와는 다르게, 어느 구석인지는 모르겠지만 토마스는 은근히 막돼먹은 꼬마 녀석의 심보도 가지고 있었다. 딱히 그것이 잘못된 것은 아니었기에 민호도 넌지시 불만을 토로하는 것에 그쳤지, 뭘 더 어쩌랴 싶은 것은 아니었다. 여기까지가 일반적인 아이들이 알고 있는 두 사람의 관계로, 사실 토마스와 민호의 관계는 그다지 얕지만은 않았다. 민호는 토마스가 다른 아이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똑똑하고 영악한 녀석이라는 사실을 아주 잘 알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토마스는 민호에게 있어 여러가지 의미로 골머리를 썩히게 만드는 사람 중 하나였다. 한 가지 예를 들자면 둘 밖에 없는 미로 안에서의 일을 들 수 있었다.

 

  “이봐, 민호.”

  “왜.”

  “여기 녀석들은… 그, 어떻게 처리해?”

  “…….”

 

  뛰던 발걸음을 멈춘 민호는 어이가 없다는 듯, 혹은 대체 무슨 헛소리를 지껄이는 거냐는 짐짓 굳은 표정을 지으며 토마스를 돌아보았다. 이제껏 신입들이 멍청하고 어이없는 짓을 굴 때가 종종 있기는 했지만, 이런 경우는 또 처음이었다.

 

  “뭘 어떻게 처리해. 여기 여자가 있는 것도 아니고.”

  “그럼, 역시….”

  “역시는 뭘 역시야. 이상한 소리 하지 말고 뛰어.”

  “나 궁금한 거 있는데.”

  “뭐.”

  “키스해도 돼?”

  “뭐야?”

 

  순식간에 미로의 벽으로 밀려난 민호의 등이 평탄치 못한 벽에 부딪히며 둔탁한 소리를 냈다. 미묘하게 위에 머문 시선이, 눈동자가 빤히 자신을 쳐다보는 것이 이상했고, 묘하게 긴장감이 몰려오는 것 같았다.

 

  “[미친 새끼가 뭐라는 거야, 저리 꺼져.]”

  “그렇게 말해도 난 못 알아듣는다고. 해도 괜찮은 거지? 그치?”

  “뭘 괜찮아! 웃기지 말고 저리 꺼…!”

 

  잠시의 틈도 주지 않겠다는 듯, 서툴게 부딪혀온 입술은 그렇게 민호의 입술을 집어 삼켰다. 억지로 벌어진 입 사이로 어색하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능청스러운 혀의 움직임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콱 혀를 깨물어버릴까 생각했다가 점점 자연스러워지는 혀놀림에 괜히 승부욕이 불타오른 민호 또한 물러서지 않았다. 먼저 고개를 돌리는 쪽이 지는 거다. 민호는 속으로 온갖 욕을 곱씹으며 토마스의 목에 팔을 둘렀다. 생각해보니, 뺀 지 꽤 된 것 같은데. 이렇게 막무가내로 부딪혀 오면 참 곤란한 일이었다.

  

  “…….”

  “…발정 났냐.”

  “그렇다고 하면 어쩌려고 그런 걸 물어봐?”

  “그러게, 물어본 내가 똘추지.”

  “미로 닫힐 때까지 얼마나 남았지?”

  “미쳤지, 신입. 진짜로 돌았지?”

  “아, 왜. 낮에는 그리버도 잘 안 돌아다니잖아.”

  “이 새끼가 몇 번 미로 왔다 갔다 했다고 여기가 제 집 같은 모양인데 정말로 네 집으로 만들어줄까?”

 

  민호의 거친 말투에 토마스가 싱긋 웃더니 민호의 얼굴 옆 벽을 손바닥으로 짚으며 귓가에 속삭였다.

 

  “나 좀 봐주라, 민호.”


  이러니까 골치 아프다는 거다. 특히 이번 신입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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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레이드에 살고 있는 소년은 고작 셋이 전부였다. 뉴트는 가만히 알비와 갤리의 얼굴을 돌아보았다. 그 둘을 포함해 자신까지 전부 셋. 이 세 명이 고작이었다. 소년들은 멍청하지 않았다. 물론 겁을 집어 먹어 하루나 이틀은 엉엉 울며 보내더라도 최소한 삼일 째 되던 날에는 자신의 이름과 함께 살아남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 지 정도는 이해했다.

 

  맨 처음 이곳에 온 사람은 알비였다. 그리고 그 다음으로 온 사람은 뉴트였는데, 살아남은 사람을 기준으로 해서 그렇지 사실 뉴트의 앞에는 한 사람이 더 있었다. 한 달에 한번 박스를 통해 새로운 아이가 올라온다는 것을 직접 겪고, 보기도 한 뉴트는 곧 이 글레이드의 한 일부가 되어 살아가기 시작했다. 혼자보다는 둘이, 둘 보다는 셋이 살아남기에는 많은 도움이 되었다. 그리고 위로가 되었다. 세삼 이 곳에 혼자 한 달을, 아니 그 이상을 보냈어야 할 알비의 지난날이 안쓰러웠다. 그리고 오늘은 갤리가 올라오고 난 지 딱 한 달이 되는 날이었다.

 

  적막한 글레이드에 소란스러운 사이렌 소리가 울려 퍼졌다. 아무리 들어도 익숙해지지 않는 소음에 귀를 틀어막은 뉴트는 얼른 박스가 올라오길 기다렸다. 박스가 다 올라오고 서둘러 박스로 다가간 아이들은 박스의 문을 열고는 그 자리에 못이라도 박힌 듯 서있었다.

 

  “……뭐야, 쟤 왜 저래.”

 

  갤리의 말에 뉴트는 뒷목이 서늘해짐을 느꼈다. 보통 박스의 문이 열리면 어리둥절하며 겁에 잔뜩 질린 아이의 얼굴이 튀어나오기 마련이었는데, 이번에 올라온 아이는 그렇지 않았다. 꼼짝도 하지 않고 박스 구석 자리에 웅크리고 누워있는 모습이 딱 봐도 어딘가 잘못되었다. 보다 못한 알비가 얼른 박스 안으로 뛰어들었다.

 

  “이봐, 정신 차려.”

  “…….”

  “알비…?”

  “가서 이불 펴고 불 붙여, 얼른!”

  “으, 응!”

 

  다급한 알비의 목소리에 서둘러 달려간 뉴트와 갤리는 알비가 시키는 대로 그나마 멀쩡해 보이는 천을 깔고 그 근처에 모닥불을 지폈다. 서둘러 아이를 안아 들고 온 알비는 조심스럽게 아이를 눕히고는 수건에 물을 적셔 아이의 이마에 올려주었다. 모닥불의 열기 때문이 아니더라도 아이의 몸은 충분히 뜨거웠고, 밭은 숨을 내쉬고 있었다.

 

  “괜찮을까…?”

  “…괜찮길 빌어야지.”

 

  박스에서 올라오자마자 아픈 아이는 이 아이가 처음이었기 때문에 적잖이 당황한 모양인지 알비의 얼굴에도 그림자가 졌다.

 

  참 왜소한 아이였다. 얼핏 본 생김새는 자신이나 갤리, 알비와도 전혀 다른 생김새였다. 아마도 동양의 먼 나라의 아이가 아닐까 싶었다. 키는 셋 중에 가장 작았던 자신보다도 작아보였고, 덩치는 알비의 반도 되지 않는 것 같았다. 이렇게 왜소하기 때문에 아픈 걸까. 뉴트는 아이가 꼭 무사히 깨어나길 바랐다.

 

  그 이후로 3일이나 지났지만 아이는 깨어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첫 날보다는 꽤 상태가 좋아졌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가만히 지켜보기만 하던 갤리도 영 마음에 걸리는 듯 무슨 일을 하다가도 아이의 모습을 보러 왔지만 차도가 없는 아이의 모습에 혀를 차고 저 멀리 가버렸다. 조만간 무덤을 하나 만들어야 할지도 모르겠다는 갤리의 말에 뉴트는 왠지 모르게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다. 뉴트는 아이의 이름도 몰랐다. 아이의 눈은 무슨 색인지도 몰랐고, 아이의 목소리는 들어보지도 못했다. 이곳이 하루하루 살아남기가 힘든 곳이라는 것은 잘 알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이 아이가 어떤 아이인지도 모르는데 떠나보내기란 참 어려운 일이었다. 하고 싶지도 않았다.

 

  일주일 가까이 지나자 알비도 포기한 듯 보였다. 뉴트는 겁이 났다. 정말 이대로 아이가 죽어버리는 것은 아닐까. 그간 아이를 제일 열심히 돌본 뉴트는 최선을 다해 아이를 간호했다. 오늘 밤이 고비일지도 모른다. 오늘 밤이 지나도 아이가 깨어나지 못하면, 소년들은 괴로운 선택을 해야 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렇게 되지 말라고 기도를 거듭한 뉴트의 바람을 알아주기라도 했는지, 그 날 저녁 아이는 가까스로 눈을 떴다.

 

  “고마워.”

 

 어눌한 발음으로 말을 꺼낸 아이는 알고 있었다. 자신을 위해 소년들이 어떤 노력을 했는지 모두 알고 있었다. 기껏해야 열 넷밖에 되지 않았던 소년들은 그 날 서로를 얼싸안고 울었다.

 그렇게 일주일을 꼬박 앓은 아이는 무럭무럭 자랐다. 그들 중 가장 많이 먹었고, 가장 많이 움직였다. 대체 자기가 언제 아프기라도 했냐고 말할 만큼 그들 중 누구보다 더 빠르고 강하게 성장했다.

 

  “얼마나 무서웠는지 알아? 정말로 죽는 줄 알았어.”

  “갤리는 널 포기할 뻔 했다고.”

  “왜 나한테만 그래? 솔직히 너도 그랬잖아.”

  “그래, 그랬단 말이지.”

  “아, 아니라니까!”

 

  뉴트는 갤리를 놀리는 것에 부쩍 재미를 붙인 모양인지 쉼 없이 갤리를 놀렸고, 소년들은 그 나이 또래에 걸맞게 장난을 치며 웃으며 놀았다.


 

  *


 

  “민호…?”

  “…뉴트….”

 

  뉴트는 당장에 들고 있던 바구니를 던져내고는 민호에게 달려갔다. 새하얗게 질린 민호의 얼굴에 뉴트는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것 같았다. 처음 글레이드에 온 이후, 민호는 어디 아픈 곳 하나 없이 건강하게 지냈다. 왜소해보이던 몸과는 달리 꽤 완력을 쓸 줄 아는 아이였고, 왜소한 만큼 민첩한 모양인지 달리는 것만큼은 넷 중 가장 빠르게 달릴 수 있었다. 그렇게 민호가 아팠었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고 살았는데, 글레이드의 적막함을 물러낼 정도로 아이들이 올라왔을 때쯤 민호는 또 다시 앓기 시작했다.

  처음 이곳에 올라왔을 때보다 심하게 앓는 민호를 보며 뉴트는 잠도 못자고 민호의 곁을 지켰다. 그래도 드문드문 정신을 차리고 뉴트와 심심찮게 장난을 치는 민호의 모습에 뉴트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조심스럽게 그의 입으로 수프를 흘려주고, 물을 먹이고 나서 그의 팔과 다리를 한참동안 주물렀다. 무슨 연유에서인지 빳빳하게 굳은 그의 손과 발을 보니 마음이 편히 놓이지 않아서였다.

 

  “…간지러워.”

  “내가 정말 너 때문에 못살겠다.”

  “걱정할 거 없다니까.”

  “걱정 안 되게 생겼냐? 너는 무슨 생긴 건 그리버도 때려잡게 생겼으면서 이렇게 비실비실해?”

  “하하, 내가 그리버도 때려잡게 생겼어?”

 

  작게 웃는 민호의 말에 뉴트는 입을 다물었다. 아니, 사실 그런 얼굴은 알비와 갤리가 좀 더 그렇게 생겼다. 처음 올라왔을 때보다 근육도 붙고 나름 키도 큰 민호지만 여전히 그때 그 시절 넷 중에서는 가장 왜소했다. 항상 그것이 불만이었는지 민호는 자기보다 한 뼘은 큰 갤리 앞에서 기를 죽이는 법을 몰랐다. 그런 민호가 가소롭다는 듯 웃는 갤리의 행동은 다툼에 일조하는 짓밖에 안됐지만 말이다.

 

  “앞으로 더 클 거야.”

  “퍽이나.”

  “큰다면 크는 거야. 갤리만큼 커서 네가 걱정하는 일 따위는 없게 만들어 줄 거야.”

  “흥, 웃기시네.”

 

  뉴트는 코웃음을 쳤다. 민호가 갤리만큼 크려면 키부터 족히 한 뼘 반은 더 커야 했고, 근육도 한참이나 더 붙어야만 했다. 물론 십대 소년들이 어디까지 클 수 있는지는 모르지만, 뉴트는 민호를 놀리며 말했다.

 

  “넌 한국인이라서 안 돼.”

  “뭐냐, 너 지금 나 한국인이라고 무시 하냐.”

  “그렇게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마, 네 표정 완전 못났거든, 큭큭.”

  “[못돼 처먹은 놈.]”

  “뭐?”

  “아니, 아무것도.”


  가끔 못 알아듣는 말을 하는 걸 보면 분명 민호가 한국말을 하는 것 같은데 이상하게 뉴트는 그것이 퍽 좋지만은 않았다.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닥 좋은 말이라고는 생각이 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너 나 욕했지.”

  “아닌데.”

  “했잖아.”

  “아니거든!”

 

  결국 시끄럽다며 아무것도 들지 않은 가방을 던진 갤 리가 씩씩거리기 전 까지, 뉴트와 민호는 계속 끝이 없는 말다툼을 이어갔다.

  휴전 선언을 한 뉴트가 먼저 민호의 옆에 눕자, 민호가 조용히 웃었다.

 

  “진짜야, 두고 봐.”

  “…….”

  “알비나 갤리보다 더 크고 건강하고, 강해져서…. 내가 널 여기서 꼭 데리고 나갈 거야.”

  “민호.”

  “많이 아프면, 아픈 만큼 클 수 있댔어.”

  “…….”

  “잘 자, 뉴트.”


 

  *


 

  미로에서 돌아온 민호와 토마스를 반갑게 맞은 뉴트는 얼른 두 사람에게 물을 건넸다. 먼저 가서 씻겠다며 뛰어가는 민호의 등을 보며 뉴트는 고작 몇 년 전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이곳에 있는 그 누구보다 강해지겠다는 말. 민호는 자신이 내뱉은 말은 죽어도 지키겠다는 듯, 또 꼬박 앓고 나서는 무지막지한 속도로 먹기 시작했다. 갤리도 그것을 보고 기겁을 할 정도로 기백이 엄청나서 뉴트는 크게 웃으며 뒤집어졌다. 작작 먹으라는 알비의 말은 귓등으로도 듣지 않고 어마어마한 양을 꿀꺽 삼킨 민호는 돌연 돌발선언을 했다. 러너가 되겠다고. 그런 민호의 말에 기함을 친 알비와 갤리가 민호를 뜯어 말렸지만 어찌나 그 고집이 황소고집인지 제 의견을 굽히지 않던 민호는 기어코 미로 속으로 발을 들였다. 그리고 그것이 지금까지 이어져오고 있는 것이었다.

 

  지나가던 길에 갤리와 소소한 시비가 붙은 모양인지 민호와 갤리, 토마스 이렇게 셋이서 다툼 아닌 다툼을 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괜히 뉴트는 가슴이 벅차오름을 느꼈다.

 

  민호는 이제 갤리와 비교해서도 밀리지 않을 만큼 자랐다. 물론 갤리보다는 조금 작은 편이었지만 덩치로는 밀리지 않을 만큼 그 작고 왜소했던 아이가 자란 것이다. 뉴트는 괜히 멋쩍어져서는 가만히 고개를 숙였다. 반드시 여기서 데리고 나가 주겠다는 민호의 말이 귓가를 맴돌았다. 어쩌면, 어쩌면 정말로 가능한 일일지도 모른다.

 

  “이봐, 뉴트!”

  “…어! 왜?”

  “갤리 녀석 좀 말려봐, 난 가서 씻고 싶다고.”

  “뭐야, 갤리. 왜 또 우리 민호한테 시비야?”

  “우리 민호? 나 참, 기가차서.”

  “들었지? 우리 부대장이 날 좀 아껴야 말이지. 그럼 여기 있는 토마스랑 재밌는 시간 보내, 친구.”

 

  그러고 가버리는 민호의 이름을 억울하게 부르는 토마스의 모습을 보며 한참을 웃은 뉴트는 가만히 사라지는 민호의 등을 바라보았다. 많은 것을 짊어지고 있는 그의 등은 그의 말 그대로였다.


  소년은 아팠던 만큼, 자라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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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7시 정각. 갤리는 마법처럼 눈을 떴다. 분명 어젯밤에…. 허벅지를 무겁게 짓누르는 무게에 느릿하게 고개를 돌리니 자신의 허벅지를 베개인 냥 베고서는 세상모르게 자고 있는 토마스의 얼굴이 보였다. 그 얼굴이 어찌나 멍청해 보이는 지 갤리는 절로 한숨이 나왔다. 아직 잠이 덜 깨서 그런지는 몰라도 세상이 느리게, 느리게 움직이는 것 같았다. 그리고 곧, 갤리의 우렁찬 고함소리에 토마스의 눈이 떠졌다.

 

  “당장 못 일어나, 이 똘추 새끼들아!!”

  “뭐야, 불났어?!”

  “아오, 머리야…….”

 

  갤리의 고함소리에 동시에 머리를 든 세 남자가 좀처럼 눈을 뜨지 못한 채로 갤리를 쳐다보았다. 잠기운에 휘청 이던 토마스가 몸을 지탱하기 위해 바닥을 손으로 짚자 파삭, 하는 소리와 함께 무언가가 손바닥을 콕콕 찔렀다. 곧 자리에서 일어나기 위해 몸을 일으킨 뉴트의 발에 채여 맥주병이 넘어졌다. 한심하다는 듯 두 사람을 보고 웃던 민호는 뉴트가 쏟은 맥주에 미끄러져 그대로 TV장에 머리를 박았다.

 

  “씹, 존나 아파…….”

 

  민호의 말이 끝나자마자 미친 듯이 웃어 재끼는 뉴트와 토마스의 얼굴을 보며 갤리는 슬슬 혈압이 올라가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엉망진창으로 어질러진 거실, 고급 카펫 위 쏟아진 맥주, 토마스가 웃을 때마다 흩날리는 과자 부스러기.

 

  “이 머저리들아!!!!!!”

 

  오전 7시 10분. 폭풍처럼 몰아드는 갤리의 잔소리가 섞인 고함 소리와 함께 그들의 아침이 시작되었다.

 









  2.

  “그 넓은 집에서 혼자 살 생각이야?”

  “잘 모르겠어.”

 

  알비의 말에 갤리는 어깨를 한 번 으쓱이더니 흘러내린 가방을 고쳐 매었다. 부모님의 사정에 의해 이번 학기가 시작될 때부터 혼자 살게 된 갤리는 무식하게 넓기만 한 자신의 집을 떠올리며 한숨을 쉬었다.

 

  “글레이드잖아? 좋게 생각하라고.”

  “너무 넓어.”

  “그러니까 같이 살 사람을 구해보는 게 어떻겠냐고.”

 

  작게 한숨을 쉰 갤리는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글레이드라 하면, 위키드 대학교의 학생들이라면 누구나 살고 싶어 하는 top 1순위 주택가가 모여 있는 구역이었다. 수업 시작 10분 전에 일어나도 지각을 하지 않을 수 있는 마법의 집, 넓고 쾌적한 집으로 유명한 주택가였으나 그 명성이 그러하듯, 상상을 초월하는 집값에 실제로 글레이드 내부에 살고 있는 학생은 몇 되지 않았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갤리는 쉽게 룸메이트를 구할 수가 없었다. 괜히 다른 아이들의 입에 자신의 이름이 오르락내리락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긴, 부모님이랑 같이 사는 것도 아니고 혼자 그 글레이드의 주택에 산다니. 무슨 영화 속에서나 나올 법한 이야기지.”

  “…….”

  “내가 한 번 알아봐줄까?”

  “뭐?”

  “믿을만한 녀석으로 말이야.”

  “고마워, 알비.”

  “뭘.”

 

  싱긋 웃는 알비의 얼굴에 갤리는 어딘지 모르게 안심이 되었다. 적어도 알비라면 이 위키드 대학교에서 가장 믿을 수 있는 녀석으로 꼽을 수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이런 생각을 했던 것도 이때뿐, 갤리는 앞으로 닥쳐올 자신의 운명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

 

  수업이 끝나자마자 집으로 돌아온 갤리는 텅 비어있는 넓은 집에 기운이 쭉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나름 부유한 가정에 외동아들로 태어나 자란 터라 원래 형제라는 것이 없었기에 외로움은 그다지 느끼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이건 경우가 좀 다른 모양이었다. 정말 쓸데없이 넓은 집이었다.

  대충 가방을 소파에 걸어놓고는 물을 마시기 위해 거실로 가던 도중, 뜬금없이 울리는 벨소리에 발걸음을 멈췄다. 택배, 시킨 것 없고. 찾아올 손님? 그런 게 있을 리가. 미심쩍은 눈으로 현관문을 열자 갤리를 반기는 것은 꽤 오랜만에 보는 녀석이었다.

 

  “안녕.”

  “뉴트?”

  “알비가 그러던데. 같이 살 사람 구한다면서?”

  “…….”

  “그래서 왔어.”

 

  양 손 가득 빵빵하게 부푼 가방을 들고 햇살같이 웃는 아직 어린티를 벗지 못한 소년의 얼굴에 갤리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대로 현관에 돌처럼 굳어버렸다.

 

  “아니, 그, 이렇게 갑작스럽게….”

  “오, 저기 있다. 뉴트!”

  “늦었잖아, 민호.”

  

  뉴트의 뒤를 이어 한 사람 더 갤리의 집을 찾아왔다. 딱히 친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어쨌든 얼굴과 이름 정도는 알고 있는 녀석이었다. 갤리는 현기증이 일어날 것 같았다. 알비, 알비인가. 이 모든 사건의 원흉은.

 

  “와준 건 고마운데, 미안하지만….”

  “뉴트, 민호!”

  “꼴지야, 토마스.”

 

  갤리는 그대로 현관문을 닫아버렸다. 빠른 손놀림으로 잠금 장치까지 완벽하게 설정한 갤리는 지금 벌어진 상황이 꿈이길 바라며 다시 거실로 발걸음을 돌렸다. 그러자 쿵쾅거리며 현관문을 두들기는 소리와 함께 왁자지껄한 녀석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꿈이, 아니었다.

 

  “갤리! 이봐!”

  “우리 사이에 이러기야?”

  “우리 사이가 뭔데!”

 

  이러다가는 민원이라도 들어올 것 같아서 얼른 다시 문을 연 갤리는 단호한 얼굴로 그들을 쫓아내리라 다짐했다. 죽어도 저 문제아 셋과는 함께 동침을 하고 싶지 않았다. 뉴트가 찾아왔을 때 혹시, 설마 했지만 정말 저 둘을 끼고 왔을 줄이야.

  

  뉴트는 알비의 친한 친구 중 한 명이었다. 워낙 생긴 것이 얌전하니 사내아이 치고는 곱상하게 생겨서 대학교의 얼굴 마담으로 불리는 수준이었다. 소문에 의하면 뉴트는 이미 글레이드에서 살고 있다고 들었는데, 굳이 여기까지 찾아온 이유는 뭐란 말인가.

  그 뒤로 찾아온 녀석은 민호였다. 그래, 여기까지는 이해할 만 했다. 뉴트에게는 알비보다도 더 돈독한 사이인 친구가 하나 더 있었는데, 그 친구가 민호였다. 듣기로는 한국에서 태어나 어렸을 때 미국으로 이민을 온 녀석이라는데 그 때부터 뉴트와 친구사이였다고 한다. 아시아인이라는 이유 하나 때문에 돋보일 만도 했는데, 그보다 그를 더 돋보이게 하는 것은 단순하게 생겨먹었어도 과 수석의 자리를 한 번도 놓친 적이 없는 미친놈이라고 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둘을 쫓아 여기까지 따라온 멍청하게 생긴 녀석의 이름은 토마스였다. 최근 위키드 콤비 - 뉴트와 민호를 함께 부를 때 사용하는 말이었다. - 가 위키드 트리오가 되었다는 소문이 사실이었나 보다. 이번에 편입으로 들어온 얼빵한 새내기 하나가 기어코 저 두 사람과 어울리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애초에 갤리가 룸메이트를 구하기 꺼려했던 이유도, 괜히 다른 아이들의 이야깃거리가 되고 싶지 않아서였는데 이래가지고는 빼도 박도 못하게 위키드 4인조의 이름으로 불리게 생겼다. 그것만은 죽어도 사양이다.

 

  “우리 사이가 뭐긴. 이제부터 한 집에서 같이 살 사이지.”

  “꺼져.”

  “섭섭하게 이러기야?”

  “뭐야?”

  “자꾸 이러면 우리 위키드 4인조라고 퍼트리고 다닐 거야.”

 

  갤리는 뉴트의 말에 말문이 막혔다. 갤리와 알비가 친구였던 시간이 긴 만큼, 사실 뉴트와 얼굴을 보고 지낸지도 꽤 오래되었는데, 갤리는 뉴트가 천생 선해 보이는 얼굴을 가지고 이 세상 둘도 없을 못된 새끼라는 것을 기억해냈다. 어찌나 영악한 녀석인지 모르는 녀석들이 불쌍했다.

 

  “애초에 넌 이미 글레이드에서 살고 있잖아. 왜 여기까지 와서 헛짓이야?”

  “너 나 없이 쟤네 둘 데리고 살 수 있겠어?”

 

  아니. 즉답을 하는 갤리를 보며 뉴트가 싱긋 미소 지었다. 갤리는 뉴트가 찾아 온 순간부터 이미 자신은 완벽하게 말린 것이라는 생각밖에 할 수 없었다.

 

  주여, 이 어린양을 돌보소서.


  “와, 집 끝내준다. 그래서? 우리 방은 어디야?”

 

  지금 당장이라도 갤리는 부모님의 품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그럼에도, 금세 소란스러워진 집을 보며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쉬며 살며시 웃는 갤리의 얼굴을 보고도 뉴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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