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단추부터 잘못됐어. 속된말로 말하면 존나 잘못됐다고. 브랜트의 몸이 주르륵, 벽을 타고 흘러내렸다. 브랜트는 발치에 흩어진 서류 종이들의 수를 가늠해보았다. 발을 헛딛으며 제 손으로 직접 허공에 뿌려버린 서류들이 엉망진창으로 섞여버렸다. 브랜트는 그 중에 제일 글자가 많이 적혀있는 서류 한 장을 집어들었다. 정말 쓸데없이 빼곡하게 적혀져 있는 글자 사이로 익숙한 이름이 보였다. 코발트, 핸드릭스, 러시아. 이게 첫 단추는 아니지만. 그래도 첫 단추에 이어진 일이긴 하지. 망할, 여기는 왜 추운거야. 각종 서류를 보관해 놓은 창고는 정말 혀를 내두를 정도로 구식이었다. 모든 자료와 정보를 빠짐없이 암호화 작업을 거쳐 데이터베이스에 1차로 저장 후, 2차로 종이 문서로 된 자료들을 보관실에 저장해놓는다. 중요도는 이 쪽이 훨씬 높은 편이었다. 편집 작업을 거치지 않은 순수한 원본이 대부분인 곳이다. 

편집 작업을 거치지 않은 '원본'이라는 것은 줄리아가 살아있다는 정보가 이 곳에 있다는 소리와도 같았다. 내가 이걸, 진작 알았더라면. 그 일이 있고 나서 3년이 지나서야 브랜트는 이 곳에 발을 들일 수 있었다. 오늘이 그 감격스러운 첫 발걸음이었는데. 핸드폰은 도통 쓸모가 없고, 내부에는 열을 일으킬 수 있는 물건이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전선도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은, 컴퓨터도 찾을 수 없다는 말이다. 여기 온다고 한 마디라도 하고 올 걸. 브랜트는 뒤늦게 후회했지만 곧 그것이 얼마나 쓸모없는 생각인지 깨달았다. 엉망진창으로 섞였다 한들, 그 모든 서류를 정리한 것은 브랜트 본인이었다. 빠른 손놀림으로 서류를 모두 정리한 브랜트는 엉덩이를 털었다. 먼지는 없었지만 그냥 그래야 할 것 같았다. 


크로아티아. 브랜트는 할 수 있다면 그 이름을 지워버리고 싶었다. 브랜트에게 있어 일이 꼬이기 시작한 원인이자, 시발점. 하지만 쉽게 그 이름을 지울 수는 없을 것이다. 그것이 있기에, 지금의 브랜트가 있는 것이니. 한 마디로 말하자면 흑역사지, 흑역사. 브랜트는 어느샌가부터 크로아티아의 일을 그런식으로 치부하고는 했다. 솔직히 말해서 그 일은 자신의 손으로 어떻게 해볼 수 없는 영역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받아들인 순간, 마음이 편해지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꽤 뻔뻔해졌다. 그것은 스스로도 인정하는 부분이었다. 브랜트는 상당히 뻔뻔해졌다. 다른 누구도 아닌 이단에게.


브랜트는 이단에게 딱히 특별한 감정을 가지고 있던 것은 아니었다. 그 흔한, 동경이라거나 존경심마저도. 모두들 이단을 존경하고 우상시한다. 지금까지 전적으로 보나, 뭐로 보나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브랜트는 스스로 그러지 않기로 했다. 그냥, 그랬다. 그러면 더, 특별해보일까.


"헛소리도 늘었지."


그래, 그렇다. 뻔뻔해진 건 좋은데 이상한 헛소리까지 늘었어. 브랜트는 신음하며 머리를 짚었다. 통제할 수 없는 것은 불편하기 짝이 없다. 브랜트는 그런 종류의 것을 싫어했다. 같은 이치로 사실 이단 헌트라는 인간 자체에 대해서도 별 호감은 없어야 했다. 없었어야만 했다. 나와는 다르기 때문인가. A라는 뻔한 답이 보이는 문제에 대하여 브랜트는 A라는 대답을 내놓을 것이고, 이단은 A'라는 대답을 내놓을 것이다. 아니, 혹은 B라는 대답을 내놓겠지. 


"그게 매력적인가."


글쎄, 매력적인가? 음, 그럴수도. 브랜트는 서류를 한 장 넘겼다. 이단 헌트, 기혼. 아마 자신의 사무실이라면 빨간펜으로 크게 동그라미를 쳐야하는 부분일 것이다. 이게 더 매력적인 부분으로 적용되는 건 아니고? 브랜트는 킬킬거리며 웃었다. 순간 온 몸을 덮쳐오는 한기에 몸을 떨었다. 애써 잊으려 했던 사실이 기억났다. 춥네. 창고는 하나의 커다란 냉장고나 다름 없었다. 얇은 셔츠 바람인 브랜트는 양 팔을 감싸쥐었다. 확, 이 서류들을 다 태워? 그랬다가는 헌리에게 쫓겨나가는 건 물론이고, 무슨 일을 당할지조차 모르지만.


브랜트는 다시금 서류를 한 장 더 넘겼다. 사실 원래 이곳에 들어오면 제일 먼저 하고 싶었던 것이었다. 브랜트가 이단의 옆에서 그를 본 것은 사실 몇 년 되지 않았다. 간간히 전해져 오는 소문 따위로 그를 접한 게 전부였다. 그래서였을까. 브랜트는 자신의 눈으로 직접 이단이 해온 일을 전부 확인하고 싶었다. 


"그녀가 죽였단 말야?"


장난 아니네. 요원으로 스카우트해도 될 수준인데. 브랜트는 자신이 지금 영화의 각본을 읽는 것은 아닌가, 라는 생각을 했다. 하긴, 그들의 삶이 영화와 비슷하다고 해도 무방했다. 다른 점이라면, 결과적으로 그들은 아무도 죽지 않지만 현실은 다르다. 

시간이 지날수록 서류는 바닥을 드러내었고, 브랜트는 하얀 숨을 내뱉었다. 졸려. 브랜트는 고개를 저었다. 총을 맞아 죽는 건 생각해 본 적 있지만 얼어죽는 건 생각해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가까스로 몸을 일으킨 브랜트는 다시금 문을 열어보았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사실 이 모든 사단이 난 것은 순전히 브랜트가 미끄러져 넘어지면서 잠금장치를 건드린 것이다. 원래 이 문이 안에서는 문을 열 수 없게 되어있다는 것이 아주 큰 문제라면 문제지만. 있는 힘껏 문을 두드렸지만 택도 없었다. 소리를 치는 건 별로 남아있지 않은 기력 마저 소실시키는 일이니 일찍이 할 생각을 접었다.


그 날도 꽤 추웠는데. 브랜트는 물에 빠진 생쥐꼴로 기차를 쫓던 밤을 떠올렸다. 그러고보면 이단과 같이 함께한 임무에서 브랜트는 숱하게 물에 빠지곤 했다. 지금 생각하기에, 이단은 그것을 꽤 즐기는 것 같았다. 브랜트는 유독 추위에 약했는데 세 겹이나 겹겹이 입은 정장이 물을 먹으면 그렇게 무겁고 차가울 수가 없었다. 


- 일부러 그러는 거지?

- 글쎄.

- 이단!


아, 주마등이다. 이건 주마등이야. 브랜트는 손을 비볐다. 따뜻해진 두 손이 볼에 닿자 또 다른 기억이 단편적으로 떠오른다. 그러고보니 이단이 즐기는 것은 물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물에 빠지고 난 후다. 


- 뭘 그렇게 봐?

- 브랜트, 하얀색보다 검은색이 더 야해.

- 나 좀 그만 놀려. 네가 애야? 좋아하는 여자애 괴롭히듯 굴지 말라고.


그 말에 이단은 허리를 제껴가며 웃었다. 이단의 웃음소리가 더욱 커질수록 브랜트의 얼굴은 구겨졌다.


- 들켰네.


"미친."


아니야, 이건 안 좋은 기억이야. 나는 모른다. 나는 모른다. 다시 차가워진 손에 브랜트의 기분도 팍 식었다. 이래서는 무슨, 뻔뻔하다고나 할 수 있나. 브랜트는 무릎을 세우고는 다리를 모아 끌어안았다. 그 뒤로는 어떻게 됐더라. 어떻게 되긴. 그냥, 그런거지. 그 뒤로 딱히 변한 건 없었다. 무언가 더 진전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그냥, 그렇게. 평소와 다름없이. 하나, 한 가지 변한게 있다면.


"추워."


내가, 널 기다린다는 거겠지. 이게 좋은건지 나쁜건지는 모르겠다. 브랜트는 다리에 얼굴을 묻었다. 


"브랜트."


갑작스럽게 열린 문 덕에, 문에 등을 기대고 있던 브랜트의 몸이 그대로 뒤로 넘어갔다. 바닥과 충돌하기 전, 먼저 브랜트의 등을 단단히 받쳐주는 팔 덕에 브랜트는 꽤 편한 자세로 이단에게 몸을 기대고 누워 그를 바라보았다. 


"진짜로 와주니까 그러는 걸지도."

"요새 책상에만 앉아있으니까 진짜 바보가 되어버린 건 아니지?"

"흐응."

"이봐, 브랜트. 농담 아니야."


몸이 차잖아. 감기 걸리겠어. 팔을 빼내는 것과 동시에 그대로 브랜트의 몸을 끌어안은 이단을 보며 브랜트는 옅게 미소 지었다.





'A > J. R'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단브랜/스트릿갬블]  (2) 2015.10.05
[이단브랜벤지] 그의 속사정  (0) 2015.10.03
[이단브랜] [버키&바튼]  (0) 2015.10.01
[이단브랜]  (0) 2015.09.29
[스팁바튼/이단브랜] 시선 끝  (2) 2015.09.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