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진정으로 운명의 상대를 만나 사랑을 나눌 때 비로소 멈추어있던 시간이 흐르고 자연의 섭리를 따라가는 법칙. 누군가는 마치 드라마나 소설 속에서 나올 법한 로맨스라며 눈을 반짝였지만 할 조던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로맨스는 무슨 얼어 죽을 로맨스.

시간이 멈춘다는 것은 말 그대로의 의미를 지닌다. 실제로 아무리 많은 시간이 흘러도 생체 시간은 그대로 성장을 멈추어 더 이상 늙지 않게 되는 것이다. 할은 자신이 그런 부류에 속해있다는 것만으로도 대체적으로 만족스러웠다. 실제로 할은 21세 이후로 지금까지 눈가에 주름 하나 생기지 않았고, 어느 곳 하나 늙고 병들어 삐걱거리는 곳이 없이 아주 건강한 상태로 곧 서른을 마주 보게 되었다.

아주 가끔 오지랖 부리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참견하길, 그렇게 평생을 늙지도 죽지도 않고 살면 외롭지 않느냐는 말을 하고는 했지만 정작 할은 그런 사람들의 말에 매우 심드렁한 반응을 보였다. 외로울 일이 뭐가 있어? 사람이야 새로 만나고 사귀면 되는 거잖아? 실제로 할은 이제껏 만난 모든 사람과의 인연이 2년 이상 지속된 적이 없었다. 구태여 그렇게 만들었다. 2년 이상을 가지 못하도록.


답지 않게 무서워서 그러는 건 아니고?”

무섭긴 뭐가 무서워.”

진심으로 사랑한 상대가 네 소울메이트가 아니면 그 사람은 늙어가겠지만 너는 그렇지 않고 홀로 남겨질 거 아냐.”


그런 거 아니야. 그러나 할도, 그의 절친한 친구 배리도 사실은 알고 있을 것이다. 그가 말한 것이 전부 사실임을. 당장 눈앞의 배리만 해도 그랬다. 배리는 그런부류에 속한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에 평범하게, 자연스럽게 인생을 걸어 나갈 사람이었다. 지금 당장이야 몇 살 차이나지 않아 보인다고 해도, 앞으로 몇 년 안에 그와의 시간이 벌어질 것이다. 사실 이것만으로도 이미 할에게는 충분히 괴로울 만 했다.

시간이 멈춘 사람들은 서로 딱 들어맞는 소울메이트를 한 공간에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딱, 하고 느낌이 온다고 했다. 직접적으로 들은 것은 아니었고 그저 어디선가 주워들은 이야기였는데, 그랬는데.


내 이름은 브루스 웨인.”


생각과는 다르게 현실에서는 빠르게 브루스 웨인? 그 인간이 누군데? 라고 바로 쏘아붙였지만 실제로 할은 그 때 자신의 정신이 반쯤은 나가 있었다는 것을 시인해야만 했다. 부러진 팔의 고통보다도 심장을 단번에 작살로 꿰뚫어진 것처럼 강렬한 통증은 이제껏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종류의 감각이었기에.

슈퍼맨을 데리러 간다며 바람처럼 사라져버린 그의 뒷모습을 황망하게 바라보며 나보다 정신 나간 인간도 있었네, 하며 중얼거리는 것과 동시에 할은 아직도 얼얼한 심장 근처를 손바닥으로 문지르며 생각했다. 저 녀석은 뭐 느끼는 거 없대? 이렇게 뼈저리게 아플 정도의 강렬함이라면 할과 브루스는 서로가 서로의 소울메이트임이 틀림없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기에는 방금 전까지 마주보고 있던 브루스의 모습이 그 전과 별반 다를 것이 없었기에.

 

다크사이드 침공이 있고 난 후, 서로 진득하니 마주 앉아 이야기를 나눌 만큼 사이가 좋은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애초에 거기 있던 모두가 서로 초면이었을 것이다. - 빠르게 각자 할 말만 하고 헤어져버려 결국 마지막까지 할은 브루스에게 묻지 못했다. 여전히 애매한 감각만을 남긴 채 쿵쾅거리는 심장소리만이 귓가를 어지럽혔다.

할 조던의 노트북 검색창에는 며칠 째 '브루스 웨인'이라는 검색어가 남아있었다.




2.

"우리 할 얘기가 있는 거 같은데."


정확히 말하자면 해야만 하는 이야기지. 배트맨은 자신의 앞을 가로막은 그린랜턴을 바라보았다. 적당히 비슷한 눈높이의 시선이 허공에서 맞부딪히며 마치 스파크가 일 듯 강렬한 인상을 준다. 할은 그 감각마저 여실히 느껴졌다. 그야 그도 그럴 것이 브루스 웨인을 처음 본 이후로 벌써 한 달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한 달, 한 달이라고! 할 조던은 최근 열흘간 고담에 가서 녹색 빛 폭죽쇼라도 펼치던가 하늘에 녹색의 커다란 박쥐, 혹은 조커의 얼굴이라도 그려줘야 그 잘난 낯짝을 보여줄까, 하는 고민들로 뜬 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정말 바로 어제까지만 해도 도저히 못 참겠다며 고담에 배트맨 = 브루스 웨인, 이라는 공식을 환하게 비춰줄까 하다 관뒀다. 할은 단순히 짜증이 좀 났을 뿐이지, 철없는 열 살짜리 어린아이는 아니었으므로.


그게, 중요한가?”

……?”


혼자서 속으로 지난 며칠간의 시간을 떠올려보던 할은 순간 자신이 들어서는 안 될 말을 들은 것처럼 당황스럽기 그지없다는 표정을 해보였다.


이봐.”


나는 별로 늙고 싶은 생각은 없어. 차라리 잘 된 거 아닌가? 너도 영원히 젊고 건강하게 살 수 있으니.”

무슨 말을 그렇게 해?”

사실을 말했을 뿐이지.”


할은 벅차게 뛰던 심장이 한 순간에 바닥으로 툭 떨어진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실망? 배신감? 딱 꼬집어 말할 수 없는 감정 때문에 화가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아하, 그러니까 그 쪽은 영원히 젊게 오래오래 살고 싶으시다, 이거지? 지난 며칠간의 시간이 전부 허송세월이었다는 것이 뼈저리게 느껴졌다. 그래, 좋다 이거야. 나도 그러니까! 분통이 터진 속과 다르게 겉으로 드러난 할의 모습은 차분했다. 너무나도 차분해 얼음장 같을 정도로.


그래, 평생 혼자 살아라. 나중에 네가 늙어 죽고 싶다고 해도 나 찾을 생각은 하지 말고.”


자신이 내뱉은 말임에도 그 온도가 너무나도 시려, 순간 다른 사람이 말을 한 건 아닐까 하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할은 재빨리 회의실을 빠져나왔지만 배트맨은 한 동안 회의실에 덩그러니 남아있을 뿐이었다.

 

 

요 며칠간, 할 조던은 브루스 웨인에 대한 것이라고는 찌라시 한 글자도 빠짐없이 찾아보았다. 게 중에는 차마 두 눈을 뜨고 못 봐줄 정도로 더러운 것도 몇 있었다. 할은 스스로의 연애 경험도 순수하고 깔끔한 편은 아니라고 인정할 정도였지만 브루스의 평가에 비하면 새 발의 피라는 것을 깨달았다.

<고담의 황태자>. 누가 붙인 별명인지는 몰라도 브루스에게 그 이름은 너무나도 당연한 것이었다. 그만큼 어울리는 별명 또한 없을 것이다. 그럼, 배트맨은?


…….”


아서라, 내가 왜 이런 걸 신경 쓰냐. 자기가 싫다는데. 할은 인터넷 사용기록을 말끔히 지워버렸다. 더 이상 검색창에 브루스 웨인이라는 검색어는 남아있지 않았다. 그러나 한 편으로는 꼭 비에 푹 젖고서는 샤워를 하지 않은 것처럼 온 몸이 물을 먹은 솜처럼 무거웠고, 짜증만 솟구쳤다. 이래서야 시도도 하기 전에 차인 사람 같잖아. 누가? 내가? 의기양양하게 브루스에게 평생 혼자 외롭게 살라는 독설을 내뱉고 왔지만 다시 한 번 돌이켜보니 그것은 그 스스로에게 한 말이나 똑같았다. 브루스가 없으면, 자신의 소울메이트가 없으면 혼자 외롭게 평생을 죽지 않고 떠돌아다녀야 하는 것은 할도 마찬가지였다.

그렇다고 할이 지금까지 소울메이트를 만나 자연스럽게 늙어 죽는 것이 소원이었냐, 하면 또 그것은 아니었다.


머릿속이 온통 브루스 생각뿐이다. 여기도 브루스, 저기도 브루스. 할을 더욱 짜증나게 하는 것은 그렇게 신경질을 부리고 짜증을 부리면서도 언제 내쳐졌냐는 듯 다시금 세차게 뛰는 심장이었다. 의지의 그린랜턴! 퍽이나. 차라리 브루스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그랬더라면.

 

그 외로움이 무엇인지 알기도 전에 스쳐 지나갔을 텐데. 어떻게 된 게 지금이 더 외로울까.

 

 

너 솔직히 말해봐. 대체 무슨 일이냐니까?”

알게 뭐야.”


쌓인 스트레스를 풀기에 적합한 상대라고는 배리가 최고였다. 배리는 그런 친구였다. 자신의 스트레스를 받아줄 샌드백, 이런 게 아니라 자신의 스트레스를 풀 실마리를 제공해주는 친절한 친구. 그리고 유일하게 할의 소울메이트가 누구인지 알고 있는 사람.

할은 종종 배리를 불러 싸구려라도 좋으니 펍에 기어들어가 자리를 잡고는 맥주를 마신다. 시원한 맥주가 기도를 타고 흘러들어가는 느낌은 언제나 새롭고 짜릿했다.


, 브루스랑 잘 안 돼?”

잘되고 자시고!”

깜짝이야. 소리는 왜 지르고 그래?”


보아하니, 잘 안 되는 것 같네. 혼자 말하고 혼자 수긍하는 배리를 보며 할은 그 얄밉게 웃는 친구의 얼굴에 표정을 구겼다. 자신의 소울메이트가 배트맨이라며 호들갑을 떨던 친구는 눈에 띄게 풀이 죽어있었다. 배리는 그런 할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했다.

안 그래 보여도 할은 정이 많다. 시원하고 호쾌한 성격에는 은근한 다정함이 있어 인간관계도 나쁜 편은 아니었다. 단지, 그 성격이 그런 만큼 내뱉는 말도 시원하다. 좋게 말해 시원한 거다. ‘브루스 웨인이라면 몰라도 배트맨은 그런 할에게는 사실상 천적이나 다름없다. 할은 늘 그놈의 박쥐가 먼저, 라며 말을 시작하지만 배리가 보기에는 할이 먼저 시작한 거다. 물론, 할에게는 비밀이었다.


혼자 오래오래 젊게, 건강하게 살고 싶으시단다. 고상한 박쥐께서.”

너도 그렇다며?”

……그랬었지.”

소울메이트를 직접 눈으로 보니까 생각이 바뀌었어?”

.”


그것도 완전, 완벽하게. 테이블에 머리를 박는 할을 보며 배리는 새삼 놀라워했다. 브루스와 어떻게 뭐라도 하지를 못해서 안타까워하는 할이라니.


이래서야 내가 무슨 그 놈한테 한 눈에 반한 거 같잖아!”

아니야?”

아니거든!”

맞는 거 같은데.”

!”


그럼 화를 내지 말던가. 배리는 할의 손에 들린 맥주잔을 뺏어 테이블 바닥에 내려놓았다. 할의 주량이 약한 편은 아니었고, 주정도 그리 심한 편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나 하나만 물어보자.”

.”

그래서 네가 정말로 원하는 게 뭔데?”

원하는 거?”

그래. 평범한 인간처럼 사는 것 자체를 원하는 거야, 아니면 브루스랑 잘되고 싶은 거야? 사실 너도 알고 있겠지만 둘 다 고르든, 그냥 브루스랑 잘되고 싶은 거든 말이야, .”


, 브루스한테 반한 거 맞아. 그렇지? 배리의 물음에 할이 다시 한 번 테이블 바닥에 이마를 박았다. 태어나서 이렇게 쪽팔린 적 처음이야, 라며 중얼거리는 할을 보며 배리는 그저 웃어 보일 뿐이었다. 하긴, 세상에, 할 조던이 태어나서 처음 만난 남자에게 반하다니. 그것도 단 한 번에! 기분 좋은 미소를 짓던 와중 배리는 문득 의문이 들었다. 그것은 자신과 할, 둘 모두가 간과하고 있던 것이었다. 너무나도 당연하게, 아무렇지 않게 넘겨버린.


있지, .”

또 뭐.”

세상에 소울메이트는 단 한 사람만 있는 게 아닌 거야?”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소울메이트는 인생에 단 한명…….”

그렇지만 브루스는……. 아무리 적게 봐도 브루스는 30대가 넘었어! 어떻게 나이가 든거지?”


할은 찬물을 뒤집어 쓴 것 같았다.

할 조던의 소울메이트는 브루스 웨인이나, 브루스 웨인의 소울메이트는 할 조던이 아닐 수도 있었다.




3.

반드시 두 사람 사이에 연애감정이 존재할 필요는 없다. 사랑의 의미는 무궁무진했기에 흔히들 서로 다른 두 사람이 만나 교류하며 각별한 감정을 나누는 것도 사랑이라 할 수 있었고, 하나의 공동체에 속해서 비롯되는 감정의 교류도 사랑이라 할 수 있다. 이를테면 가족애, 형제애라던가. 브루스 웨인의 첫 번째소울메이트는 후자의 경우였다.

브루스 웨인의 두 번째 양아들이자 제 2대 로빈 제이슨 토드.’ 그는 브루스의 소울메이트이었었다.’

 

브루스와 제이슨은 서로 사랑하였지만 그것이 흔히들 말하는 연애감정의 사랑이라고 하기에는 부적절했다. 자신의 핏줄도 아니었지만 브루스는 제이슨을 진짜 친아들처럼 아꼈고, 제이슨도 브루스를 친아버지처럼 따랐다.

 

조커가 제이슨을 죽이기 전까지는.

 

가족이라는 하나의 집단에 속해 서로에게 애정을 가지고 있던 브루스와 제이슨은 자연스럽게 시간의 흐름에 따라 나이가 들었다. 사실 제이슨이 아직 성인이 채 되기도 전에 일이었기 때문에 실제로 나이가 든것은 브루스뿐이었다. 그 때 당시만 해도 고담에서는 브루스의 소울메이트를 찾느라 눈에 불이 켜져 있었다. ‘브루스 웨인의 소울메이트라니. 그 당시만 해도 세간에서 소울메이트는 반드시 서로 연애감정을 가지고 사랑을 나누는 로맨틱한 관계라고 알려져 있었기에, 브루스의 소울메이트라 하면 당연히 웨인가의 안주인이 될 사람이라는 인식이 강했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브루스는 자신의 소울메이트를 숨기는 일이 아주 수월했다. 아무도 그의 소울메이트가 제이슨이라는 사실을 몰랐었기 때문에.

 

제이슨은 한 번 죽었다 살아난 몸이다. 최초로 죽음을 맞이하였을 때 브루스와 제이슨의 인연은 끝이 난 것이다. 그랬기에 제이슨이 다시 부활하여 살아 돌아왔음에도, 브루스는 더 이상 늙지 않았다. 운명의 실이 끊어진 사이. 더 이상 제이슨은 브루스의 소울메이트도 아니었거니와, 브루스에게 사랑이라는 감정이 어떠한 형태로 남아있는지는 그 누구도 몰랐기에. 브루스는 너무나도 애매하게 늙었다. 젊지도, 그렇다고 늙지도 않은 애매함의 시간 속에 홀로 남겨졌다.

 

브루스는 차라리 잘됐다는 생각을 하고는 했다. 그래, 평생 혼자 살아라. 언젠가, 할에게서 들은 말이었다. 브루스는 자조적으로 웃었다. 원래 그러려고 했어. 차마 그렇게 대답하지 못했던 것은 예상하지 못했던 할의 태도 때문이었다. 어째서 화가 난 거지? 브루스는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눈앞의 남자를 바라보았다.


, 내 소울메이트 아니었어?”

할 조던. 내가 분명히 그 사실은 중요하지 않다고…….”

그럼 나는 네 소울메이트가 아닌 거야?”


언제나 할의 표정을 읽기 쉬웠던 것은 아니다. 생각하고 있던 것보다 할 조던이라는 남자는 거침없이 자신을 표출하는 것에도, 숨기는 것에도 능했다. 감정을 숨기며 행동은 그것과는 전혀 다른 액션을 취하는 것이 표현 방식에 비해 최근 할의 감정은 그 누구도 한 번에 알아차릴 수 있을 정도로 티가 확 났다. 바로 지금도. 할의 드러낸 감정은 명백한 실망이었다. ? 어째서?


그래, 네 말이 맞아.”

…….”

나도 처음에는 평생 소울메이트 같은 거 필요 없다고. 젊고 건강하게 영원히 살 수 있으면 좋은 거 아니냐는 생각을 했었어.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고.”

조던.”

내가 지금 제일 화가 나는 건, 네가 소울메이트가 필요 없다는 사실도 아니고 자꾸 한심한 너드 같이 구는 나 자신도 아니야. 내가 네 소울메이트가 아닐 수도 있다는 사실이 제일 화가 난다고.”


할이 자신에게 느끼는 감정은, 자신이 제이슨에게 느꼈던 감정과 그 종류부터가 달랐다. 브루스가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바로 그 부분이었다. 브루스에게 있어 제이슨은 소중한 가족이었고, 두 번째 아들이었지만 할은, 할 조던이라는 남자는.


지금 나를 사랑하기라도 한다는 거야?”


결론부터 말하자면 브루스 웨인은 할 조던의 소울메이트였고, 할 조던은 브루스 웨인의 소울메이트였다. 처음 만났을 때 할이 느꼈던 감각을 고스란히 브루스도 느끼고 있었다. 할은 자신이 받은 충격에 스스로를 수습하기 급급했던지라 브루스를 살필 여유가 없었을 뿐이었다. 물론 그것은 브루스도 마찬가지였다.

소울메이트는 인생에 단 한명, 제이슨뿐이라고 생각했던 브루스에게 할의 존재는 존재 자체만으로도 브루스를 뿌리부터 흔들었다. 그러나 브루스는 그럴 수 없었다. 그래서는 안 됐다. 결과적으로 제이슨을 죽게 만든 것은 자신이었기 때문에, 브루스는 절대로 그럴 수 없었다. 제이슨의 용서를 구하는 것을 둘째치더라도 타인에게 애정을 갈구하고, 애정을 바라며 다시금 황망하게 버려진 그 애매한 세상에서 벗어나려는 시도조차 브루스에게는 허용된 것이 아니었다. 브루스는 그래야만 했다.

홀로, 외로이, 아무도 없이. 브루스는 웃었다. 감히 할을 비웃기 위해 웃은 것이 아니었다. 자조였다.


어떻게 안 할 수 있는데?”


안타깝게도 브루스는 그 문제의 해답을 모르고 있었다.

심지어 그 배트맨조차도.




4.

악몽은 배트맨에게, 브루스 웨인에게는 없어서는 안 되는 단짝과도 같은 것이었다. 꿈의 시작은 언제나 같은 장면에서 시작한다. 행복하고 단란한 가정, 상냥하고 다정한 아버지와 어머니. 한 발의 총성, 그 뒤에 연이은 두 번째 총성. 브루스의 손에 쥐어진 것은 진주 한 알 뿐이었다.

 

최근에 꾸는 꿈은 이제껏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던 것으로, 나와서는 안 되는 사람이 등장한다. 그린랜턴, 할 조던. 최근 브루스의 꿈에 무단으로 침입한 남자의 이름이었다. 브루스의 기분을 더욱 이상하게 만드는 것은 분명 자신의 꿈속에 나오는 할 조던의 옆에는 브루스 웨인이 있다는 것이었다. 현재 자신이 가지고 있는 얼굴보다 조금 더 나이가 든 얼굴로. 무의식중에 이러한 미래를 원하고 있었던 것이 꿈으로 나타난 것이라고 하기에는 브루스의 정신력은 그렇게 허술하지 않다. 브루스는 스스로 그렇다는 것을 알고 있다.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이제껏 단 한 번도 꿈에 나온 적이 없는 것이 현실이라는 것을.

단란한 시간을 보내며 걸어가는 할 조던과 브루스 웨인의 뒤를 쫓는 배트맨의 그림이란 얼마나 어색하고 이상할까. 브루스는 한 번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 이것이 진정으로 자신이 원하는 수많은 미래의 모습 중 한 가지인가를.

 

 

최근 할 조던의 기분은 몹시, 매우, 아주 나쁘다. 지나가는 사람이 얼추 보기에도 확 드러나는 탓에 다들 어지간해서는 할에게 말조차 걸지 않았다. 물론 배리는 괜찮았다. 배리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괜찮았으니까.

며칠 전 할은 그린랜턴의 차림 그대로 배리의 집을 쳐들어와 한참동안 잠만 잤다. 드물게 풀이 죽은 할을 위해 이불을 덮어주기까지 했으나 할의 기분은 영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한 시간 쯤 지났을 까 갑자기 온 몸에서 초록색 빛을 내뿜으며 반드시 찾아내서 내가, 까지 외치는 할의 입을 틀어막은 배리가 뜻하지 않게 소리를 질렀다.


! 가서 한 대 치기라도 할 거야? 정신 좀 차려라. 너 정말 왜 이래?”

그걸 알았으면 내가 이러고 있겠냐.”

소울메이트란 거, 그렇게 대단한 거야?”

내가 모르긴 몰라도 정말 몰라서 까분 게 쪽팔릴 만큼.”


아쉽게도 배리는 시간이 멈춘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할에게 완벽하게 공감을 해줄 수는 없었다. 그것과는 별개로 진심으로 사랑을 한다는 건 안다. 꽤 오랜 시간동안 할과 친구 관계를 이어왔지만 이렇게까지 행동하는 것은 또 처음인지라 당황스러운 것은 배리도 마찬가지이긴 했다. 최근 몰랐던 사실을 하루에 하나 씩 알아가는 기분이었다. 소울메이트는 반드시 한 사람이어야 하는 것도 아니었고, 베스트 프렌드가 이렇게 골머리를 썩혀가면서 까지 타인을 좋아한다는 것도 그렇고.


하루가 일 년 같아.”

?”

배리.”

그래.”

나 늙어가고 있다고.”


그게 무슨 뜻이냐고 묻기도 전에 평상복으로 돌아온 할의 모습을 보며 배리는 그의 눈이 깊고 깊은 수심에 잠긴 것을 보았다. 할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놀랍게도 그것은 분명하게도 미소였다. - 말했다.


, 늙고 있다고.”

 

할 조던은, 브루스 웨인을 진심으로 좋아하고 있다는 사실까지도.

 

 

배리 앨런이 느끼기에, 할 조던과 브루스 웨인의 사이는 이 이상 더 좋아 보이지 않을 수가 없었다. 멈추어 있던 시간이 흐르고 있다는 갑작스러운 충격적인 고백 이후, 할은 보통의 평범한 그 모습 그대로 돌아왔다. , 아무렇지도 않아 보인다는 말이었다. 그것은 다른 사람들 눈뿐만 아니라 배리의 눈에도 그렇게 보여 오히려 당황한 것은 자신이었다.

 

원래 배트맨은 와치타워에 늘 모습을 드러내던 사람은 아니었다. 그는 말마따나 바쁜 사람이었고, 그를 와치타워에서 볼 수 있는 것은 기껏해야 일주일에 사흘정도였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배트맨이 와치타워에 발걸음을 하는 날이 점점 늘어나면서 아주 자연스럽게 그의 곁에 할이 머물렀다. 도대체 어떻게 그린랜턴과 배트맨이 저렇게까지 사이가 좋아졌냐는 소문이 온 동네방네 퍼졌고, 당사자들 또한 그 사실을 모를 리가 없음에도 그 둘의 사이는 어쨌거나 처음 만났을 때보다는 훨씬 좋아보였다.


대체 언제까지 귀찮게 할 셈이야?”

내가 너를 좋아하고 있다는 걸 네가 인정할 때까지.”


아마 이런 대화를 듣지 못했다면 두 사람이 혹여 연인관계가 된 것을 비밀로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착각도 했을 것이다. 배리는 절대로 엿들으려고 한 것이 아니었다. 들렸을 뿐이다. 그린랜턴은 그 예의 잘생기고 뻔뻔한 얼굴을 배트맨의 얼굴 앞에 들이밀며 적극적인 구애 아닌 구애를 하고 있었고, 배트맨은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그것을 무시했다.


할 조던.”

우리 사이에 뭘 그렇게 딱딱하게 성까지 붙여서 부르시나. 그냥 불러봐, 할이라고.”

…….”

불러보라니까.”

뻔뻔한 것도 정도가 있지.”

나 원래 이런 사람이잖아.”


기가 차다는 한숨은 곧바로 튀어나왔고, 그린랜턴 또한 그것을 너무나도 당연하게 여기고 있어 무엇이 잘못된 상황인지를 전혀 짐작조차 못하게 만들었다.


네가 나한테 한 말은 기억도 못하는 건가?”

사과할게. 그건 내가 해서는 안 될 말이었어.”

내가 알던 할 조던이라는 남자가 맞는 지 궁금해지는데.”

원래 다른 누구를 좋아하면 사람은 바뀌는 법이잖아.”

이봐, 조던. 내 소울메이트는…….”

내가 아니어도 좋아.”


지금 딱 하나 아쉬운 것이 있다면, 온전히 그의 표정을 보고 싶은데 그럴 수 없다는 것이었다. 배트맨을, 브루스 웨인을 사랑하게 된 순간부터 할은 늘 그것이 아쉬웠다. 카울에 가려져 입 밖에 보이지 않는 모습은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 그의 모습을 더욱 부각시킨다. 언제나 굳게 닫힌 입술은 활짝 미소 짓는 법이 없었기에.


……마음대로 해.”


그래봤자 난 늙지도 않겠지만, 하며 그림자에 녹아들어가듯 방을 빠져나가는 배트맨의 모습을 보며 그린랜턴이 혀를 찼다.


좀 예쁜 말만 하면 어디 덧나?”


그럼에도 완강하게 거부당하지 않았다는 사실만으로도 할의 기분은 굉장히 들떠있었다.

 

 

수도꼭지에서 흘러나오는 물을 아무런 의미도 없이 바라보다 살며시 다가온 기척에 배트맨은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꽤 복잡한 표정을 짓고 서 있는 플래시를 보며 한숨을 숨기지 않았다.


많이 피곤하지?”

부정은 못하겠군.”

그 녀석이 원래 그러잖아. 네가 이해해 줘.”


플래시의 용건이 고작 그 정도가 아니라는 것쯤은 쉽게 알 수 있었다. 배트맨은 어서 말해보라는 듯 플래시를 재촉하지 않았다. 느긋한 시간이 오가고 한참이나 말을 고른 플래시가 배트맨, 브루스에게 물었다.


정말로 네 소울메이트는 할이 아닌 거야?”

…….”

할이 맞다고 해도, 할이 아니라고 해도, 그 녀석에게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을게. 약속해.”

네가 조던에게 말하지 않을 거란 것쯤은 나도 알아. 다만…….”

다만?”


플래시는 브루스가 이미 충분히 지쳐있다는 것을 쉽게 알아챌 수 있었다. 브루스가 이렇게 쉬이 감정을 내비치는 것은 그를 처음 만난 이래로 최초의 일이었으며, 아마도 마지막이 될 일이었다. 브루스는 천천히 자신의 얼굴을 가리고 있던 카울을 벗었다.


내 소울메이트는 이미 죽었어. 그런데…….”


이미 한 번 시간이 흘렀다 멈춘 몸은, 이제야 겨우 시간이 흐르기 시작한 할의 것보다 훨씬 반응이 빠르게 나타났다. 카울 아래 감춰져 있던 브루스의 얼굴은 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무척이나 지쳐보였고, 또한.


나는 늙어가고 있지.”


브루스의 미소는 건조하기만 했다.




5.

리그 활동이 항상 힘들었던 것은 아니었다. 알고 보니 별 것 아닌 문제들도 꽤 있는 편이었고, 심각한 일이다가도 눈 깜짝할 사이에 자연적으로 위험상황 자체가 소멸해버리기도 했다. 그러나 슈퍼맨, 원더우먼, 배트맨. 이렇게 셋이 모일 일이라고 하면 이야기가 조금 다르다.

무거운 분위기가 감도는 테이블 앞에 앉아 할은 배트맨이 어둠의 도시를 지키는 기사가 아닌 그저 고담의 황태자인 브루스 웨인인 채로 있었다면, 하는 상상을 했다. 혹시 알아. 그냥 브루스 웨인이라면 히어로 그린랜턴이 조금 꼬시기 쉬웠을지도 모르잖아?


슈퍼맨과 슈퍼걸, 원더우먼과 플래시가 우선 한 조로 전면에서 행동 하도록.”

공격에만 집중해도 괜찮겠어?”

우리에게는 아무런 정보가 없어. 자네들한테는 미안한 말이지만 수고 좀 해줬으면 좋겠군.”

걱정하지 마세요. 크립토나이트가 아닌 이상 아무 문제없으니까!”


슈퍼걸의 말에 배트맨은 고개를 끄덕였다. 할은 세발자국 뒤에서 그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을 뿐이었다. 아무런 능력도 없는 고작 기껏해야 지구의 인간일 뿐인 남자가 종족도, 신념도 다른 수많은 타인의 집단의 중심에 서 지시를 내리는 상황이 신기할 법도 했다. 물론 따지고 보면 할도 기껏해야 지구의 인간일 뿐이다. 특이한 것이 있다면 그린랜턴으로 선택 된지구의 인간이라는 것이리라.


랜턴.”

…….”

그린랜턴.”

, . 미안.”


뜻밖의 부름에 다른 생각을 하고 있던 할은 곧장 배트맨과 시선을 맞추었다. 공식적인 때문이라고 해도 배트맨이 그린랜턴을 먼저 호출한 것은 저스티스 리그가 창설된 이래 최초의 일이었다.


너는 나랑 같은 조로 움직일 거야.”


그러니까 지금 나한테 데이트 신청하는 거지? 가까스로 그 말을 생각하는 것에 그친 할은 너무나도 눈부신 미소로 웃고 있었다.

 

 

배트맨!!”

오지 마!”


아슬아슬하게 눈가 위로 찢겨진 상처에서 피가 흐르는 탓에 한 쪽 시야가 말썽이었다. 무서울 정도로 불어나는 가지를 칼로 쳐내며 어떻게 해서든 뿌리 쪽으로 다가가려는 자신의 움직임을 철저하게 막아내는 탓에 자꾸만 아래쪽으로 끌려가는 배트맨을 영영 놓쳐버릴 것 같았다.


그 누구의 잘못도 아닌 일임은 확실했다. 애초에 그들은 이 적에 대한 알고 있는 것 자체가 지극히도 적었으며, 이번 미션은 해결보다는 탐사에 더 주력을 두고 있던 탓에 모체로 보이는 곳에만 전범위로 공격과 방어가 가능한 히어로들이 배치되었고 후방에서는 탐색과 정보 수집에 탁월한 능력을 가진 히어로들이 배치되었다. 그린랜턴은 혹시라도 있을 비상사태에 그들을 보호하기에 매우 적합하다, 는 의견 하에 배트맨과 같은 조가 되었다.

탐사를 나오기 바로 직전 사실 그린랜턴은 자신과 같은 조가 될 예정이었다는 배리의 말에 할의 눈썹이 삐죽 솟았다. 그린랜턴을 후방에 남기는 것을 추천한 것은 다름 아닌 플래시였고, 배트맨은 별로 마음에 들어 하지 않은 듯 했으나 슈퍼맨과 원더우먼이 그리 하기를 권했기 때문에 플래시의 의견은 결국 수용되었다.

다른 히어로도 분명 있었으나 콕 집어서 그린랜턴을 말하는 자신을 바라보는 배트맨의 시선이 그리 곱지만은 않았으니 이번 일이 끝나면 각오를 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배리의 비장한 각오에 고개를 기울인 것은 할이었다.

결과적으로 플래시가 권했던 제안 덕분에 더 많은 히어로들이 아무런 피해도 없이 도망칠 수 있었던 것은 사실이나, 그를 대신하여 배트맨이 희생한다는 것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모체라고 생각했던 것이 사실은 모체의 눈속임이었고, 탐색을 하던 곳의 뿌리가 사실상 뇌의 역할을 하는 곳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배트맨은 당장 그린랜턴에게 모두를 데리고 피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그는 명령을 내리는 것과 동시에 바닥으로 배트랭을 던졌다. 가지에 랭의 표면이 부딪히자 폭발이 일어나고 불길이 일었지만 그것도 잠시 바닥이 크게 흔들리더니 아래에서 솟구치는 뿌리와 가지 때문에 모든 것이 순식간에 엉망진창이 되었다. 고작해야 배트랭 하나와 마찰되어 폭발되었다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규모가 큰 폭발이 곳곳에서 일어났고, 굉음과 함께 사방에서 가지들이 솟구쳤다.

그린랜턴이 대부분의 히어로들을 안전한 곳에 옮겨주고 왔을 때에는 이미 한 차례 폭발이 일어난 뒤였기에 그 와중에도 악착같이 그것들의 공격을 피하고 있는 배트맨의 모습을 발견하고는 쏜살같이 뿌리로 향했다.


배트맨!”


그를 빼내오기 위해 반지에서 뻗어져나간 광선은 도중에 두꺼운 벽에 막혀 산산이 부서졌다.


이봐, 슈퍼맨. 들려?”


설상가상으로 분명 통신기가 망가진 적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지원을 부를 수 있는 상황조차 되지 않았다. 탐색 조의 전투인원이라고 해봤자 손에 꼽히는 편이었다.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사이보그가 이 모든 상황을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이었다커다란 전기톱이 살벌한 소리를 내며 가지들을 쳐냈고, 금방 길을 튼 그 사이로 그린랜턴은 배트맨의 곁으로 다가갔다.

아무리 강한 그린랜턴이라 할지라도 무수히 쏟아져 나오는 가지들을 일일이 다 쳐내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도중에 발목을 잡혀 땅에 처박혀졌을 때에는 진심으로 짜증을 내며 반경에 있던 가지들을 모두 커다란 망치로 짓눌러버리기도 했다. 위험순위가 배트맨에서 그린랜턴으로 변경된 모양인지 일제히 랜턴을 향해 퍼부어지는 공격에 배트맨은 그 짧은 틈을 이용하여 빠져나오려 했지만 단단히 자신의 발을 파먹은 가지들 사이에서 벗어나기란 쉽지 않았다.

이대로라면. 아주 잠깐 망설이는 사이 날카로운 비명소리에 그 쪽을 바라보자 한쪽 눈을 손으로 덮은 그린랜턴을 보자마자 배트맨은 더 이상 고민할 것도 없이 배트랭을 들었다.


배트맨!!”

오지 마!”


어느새 자신의 발목을 잡아 당겨 자꾸만 지하로 끌고 가는 가지들을 보며 배트맨은 정확히 자신의 다리 밑을 향해 배트랭을 던졌고, 동시에 커다란 폭발음과 함께 몸이 튕겨 나가떨어지는 감각을 뼈저리게 느꼈다. 안타깝게도 배트맨은 비행 능력이 없었기에 그대로 바닥에 처박히거나 운이 좋으면 어느 가지에 걸려 매달릴 수도 있었다.


, 이 멍청이가!!”


아마도 그 전에 먼저 자신의 몸을 받아줄 존재가 있으니 그럴 일은 없었을 테지만 말이다. 반지의 힘으로 만들어졌다고 해도 타격이 아예 없던 것은 아닌 모양인지 그의 가슴 부근에 찍힌 핏방울에 시선을 둔 배트맨이 말했다.


반창고라도 만들어서 붙이지 그래.”


유틸리티 벨트에 그런 건 없어서. 짧게 덧붙이는 말에도 그린랜턴은 반응이 없었다. 이쯤 되면 어떤 말이라도 해야 하는 시점일 텐데. 침묵을 고수하는 그를 보며 배트맨은 알만하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이런 곳에서까지 그 문제에 대해 언급해야할 필요성이 있나?”

날 짜증나게 만들려는 게 아니면 더 이상 말하지 마.”

아니, 너는 알아야해.”

!”

네가 진심으로 사랑하고자 하는 사람이 이런…….”


이런, ? 라고 되묻기도 전에 자신의 팔을 세게 잡아당기는 힘에 휘청거린 그린랜턴의 눈앞으로 날카로운 가지에 꿰인 배트맨의 모습이 들어찼다. 순간 할은 자신의 눈을 더럽힌 피 때문에 그렇게 보이는 것은 아닐까, 하는 헛된 상상을 했다.


브루스!!”


그 다음 그린랜턴의 눈앞에 펼쳐진 것은 모든 것을 불살라버리는 붉은 빛 광선이었다.

 

 

총성은 늘 그렇듯 두 발이 울렸다. 그러나 브루스의 손에 들린 것은 진주가 아닌 반지였다. 총성이 한 발 더 울리고, 브루스는 그 총알이 자신의 가슴을 꿰뚫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


브루스는 천천히 손을 들어올렸다. 헛것을 보는 것이 아니라면 분명히 브루스의 손에는 그린랜턴의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다른 사람의 손에도 끼울 수 있는 물건이던가. 브루스는 천천히 손을 내려놓았고, 그 손은 반지의 주인인 남자의 손 위로 떨어졌다. 브루스는 자신이 맨 얼굴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이제껏 할의 앞에서 고스란히 맨 얼굴을 드러낸 적은 기껏해야 처음 만났을 때가 전부였으니, 이제는 더 이상 속일 수 있는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나한테 할 말이 많지?”

그냥 더 자면 안 되겠나?”

안 되고말고.”


어느새 자신의 손을 꼭 붙잡은 채로 시선을 마주치는 할을 보며 브루스는 결국 자신이 패배했음을 인정했다.


내 첫 번째 소울메이트는 죽었어.”

그런…….”

다시 살아나긴 했지만.”

…….”

그 이후로 그 아이는 더 이상 내 소울메이트가 아니었어. 그 아이는 조커의 손에 죽었고, 나는 그 아이를 지키지 못했지. 그 아이를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도 분명 있었지만, 그것보다…… 나는 또 한 번 더 소울메이트를 잃기 싫었어.”


브루스는 천천히 할의 손에서 자신의 손을 빼내었다.


이제 알겠나? 네가 진심으로 사랑하고자 하는 사람은 이런 구제불능이라는 걸.”


잃기 전에 차라리 없는 것을 택할 만큼. 브루스는 그 사실을 인정했지만, 구태여 그 사실을 다른 누군가의 앞에 드러내기를 거부했다. 배리의 앞에서 지독히도 피곤하고 지쳐있었던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두려움을 무기 삼아, 어둠을 방패삼는 배트맨에게 브루스 웨인이 약점이 되는 일은 얼토당토 않는 일이었다.


나에게 중요한 건 그거야. 이 모든 이유에도 불구하고 브루스, 네가 날 사랑하고 있는가. 지금까지 대체 뭘 들은 거냐고 할 거지? 그럴 필요 없어. 다 들었는데 나한테는 별로 필요한 이야기가 아니거든. 나한테 필요한 건 이거지.”


부드럽게 브루스의 손에 깍지를 낀 할이 조심스럽게 브루스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그의 표정은 그 전에 지어보였던 어떠한 표정보다도 부드러웠고, 다정했다.


네 소울메이트, 나 맞아?”


브루스는 뭘 굳이 그런 걸 묻느냐는 표정을 하였지만 이내 곧 살며시 미소 지으며 말했다.


아니면 어쩔 건데?”

, .”

맞아.”


진심으로 싫증을 내는 할의 얼굴에 무심코 헛웃음이 터진 브루스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내 소울메이트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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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이슨은 너무나도 익숙하게 저장고에서 숙성된 와인 병을 꺼내 들고는 무식하게 마개를 따 나발을 불며 걸음을 옮겼다. 지나치게 넓은 복도에 유일하게 제이슨의 발걸음 소리만 울렸다. 아무거나 집어온 탓에 이게 몇 년이나 숙성된 와인인지 조차 모른다. 그러나 설마하니, 브루스 웨인의 대 저택의 와인 저장고에 ‘싸구려’라는 것은 있을 수 없는 노릇이다. 향을 음미하고 천천히 입 안에서 혀를 굴리며 와인을 마시는 품위 있는 행동과는 다르게 제이슨은 억지로 목구멍 안으로 고급 와인을 밀어 넣었다. 사실 이렇게 마셔봤자 전혀, 조금도 취하지 않는다는 것은 웃긴 일이다. 억지로 사람을 살려놓더니, 괴물이 됐잖아. 제이슨의 입가에 한 단어가 맴돈다. ‘괴물’, ‘괴물’.

익숙한 방 문 앞에 자연스럽게 발걸음이 멈추었다. 이미 다 마시고 텅 비어버린 병을 차마 버리지도 못하고 어정쩡하게 들고 있는 폼으로. 저택과 제이슨의 모습은 어딘지 모르게 낮과 밤의 모습과 비슷하게 보였다. 감히 어디가 어떻게 비슷하냐하면, 서로의 영역에 침범하는 것이 지독하게도 어리석다는 것이 비슷했다.

방의 문은 또 다른 잠금장치로 잠겨있었지만 제이슨은 그 잠금장치를 푸는 법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확신은 없었다. 조심스럽게 문 앞에 와인 병을 내려놓은 제이슨이 잠금장치의 앞에 바짝 입술을 붙이고는 그 누구에게도 들리지 않을 만큼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작게 덜컹거리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자 제이슨의 얼굴이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구겨졌다. 마음 한 지편에서 불이 붙은 분노가 순식간에 제이슨을 집어 삼켰다. 그러니까, 대체, 왜! 제이슨은 부러 쿵쾅거리며 방 안으로 들어갔지만 익숙한 뒷모습이 보이자 자기도 모르게 발걸음을 우뚝 멈춰 세우고 말았다.

그의 전신을 충분히 감싸 안을 수 있을 정도로 넓은 침대에는 보기에도 고급스럽고 편안한 이불 속에 파묻혀 있는 브루스 웨인이 있었다. 이미 새벽이 한참 세상에 머물고 있는 시간인지라 ‘타인’을 눈앞에 두고도 미동조차 하지 않는 모습이 기분을 이상하게 만들었다. 지금이라도 당장 일어나 침입자가 누구인지 확인을 해야 하는 눈은 굳게 닫혀있었고, 그 답지 않게 새근거리는 숨소리가 제이슨의 기분을 더욱 이상하게 만들었다. 심지어 제이슨이 그의 곁에 자리를 잡고 앉을 때 까지만 해도 브루스는 그저 잠만 잘 뿐이었다. 충동적으로 브루스를 양 팔 안에 가둔 제이슨이 마음속으로 물었다. 이래도 깨어나지 않을 생각인거야? 브루스가 대답하지 않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제이슨은 천천히 고개를 숙여 브루스에게 입을 맞췄다. 그와 동시에 굳게 잠겨 있던 눈이 부드럽게 열리며 이 세상의 그 어떤 바다보다 차가우면서 따뜻한 세상이 제이슨을 반겼다.


“……피곤해.”


잠에 잔뜩 취한 브루스의 목소리는 카울을 쓰고 있는 배트맨의 것을 닮아있었다. 그에게 묻고 싶은 것이 많다. 대체 어째서 아직도 웨인 저택의 보안 프로그램에 ‘제이슨 토드’가 인식되어 있는 것인지. 그러나 제이슨은 그에게 그런 것을 묻는다는 것 자체가 아무런 의미가 없는 행동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브루스는 제이슨의 멱살을 바짝 잡아당겨 느리지만 확실하게 입술을 훑어 내고서는 아예 제이슨을 자신의 옆에 매다 꽂아버렸다. 눈 깜짝할 새에 브루스의 옆에 처박힌 제이슨은 코웃음을 쳤다.


“……빌어먹을.”


제이슨은 자신의 가슴에 얼굴을 묻은 채 잠이 든 브루스를 보며 밀려 내려간 이불을 다시 끌어올렸다. 새삼 얇은 천위에 닿은 맨 피부가 따뜻하다 못해 뜨겁다는 사실을 깨닫기 전까지, 제이슨은 단 한숨도 자지 못했다.

잘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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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락은 몹시도 긴장하여 쿵쾅거리는 심장소리가 차마 그의 귀에 들어가는 것이 부끄러워져 떡 벌어진 어깨를 억지로 움츠리며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아, 언제부터 이런 멍청이가 된 거지. 이래서는 정말이지 굿모닝, 스몰빌! 하며 놀림을 당해도 할 말이 없다. 딱 봐도 고급스러운 향이 물씬 풍기는 와인이 담긴 잔을 한 입에 싹 비워버리면 될까, 라는 정말이지 멍청한 생각도 아주 조금 들었다. 크립토니안은 쓸데없이 별 이상한 곳에서도 힘을 내지. 술은 좀 취해도 되잖아. 클락은 축축하게 젖은 손을 연신 바지춤에 주물러댔다.

이 세상에 두려울 것 하나 없는 남자, 슈퍼맨이 왜 이렇게 긴장을 하는가 하니 오늘은 다름 아닌 ‘슈퍼맨’, 혹은 ‘데일리 플래닛’의 기자 클락 켄트로써가 아닌 ‘평범한 남자‘ 클락 켄트의 신분으로 브루스의 집에 첫 발을 디딘 날이었다. 당연히 긴장할 수밖에! 클락은 자신이 브루스와 새로운 연애를 시작한지 3개월 하고도 26일째란 사실을 기억하고 있었다.


“어디 불편한 곳이라도?”


브루스는 진심으로 그렇게 묻고 있었고 클락은 차마 너무 긴장해서 토가 나올 것 같다는 말을 할 수 없었다. 대신 결국에는 손에 들린 와인 잔을 깔끔하게 원 샷으로 넘겨버리는 기행을 저지르며 호두까기 인형처럼 뻣뻣한 발걸음으로 브루스의 앞에 섰다.


“아니요.”

“전혀 안 믿기는데.”

“그렇죠? 아니, 네, 으음…….”

“이봐, 미스터 켄트. 진정 하라고.”


그러니까, 이러면 안 되는데. 클락이 가장 걱정하던 것은 수십 년까지는 아니더라도 적당히 터울이 있는 그와의 나이차에서 비롯되는 ‘무언가’였다. 그것은 사용하는 언어가 될 수도 있었고, 풍겨오는 기품이나 분위기가 될 수도 있었다. 직접적으로 말하자면 그에게 어리기만 한 연하 애인이라는 포지션이라던가. 그러나 연하라면 연하만의 끈기와 패기로 얼버무릴 수 있는 것도 많다. 클락은 그 사실을 방패삼아 브루스의 양 팔을 손으로 단단하게 붙잡고는 바로 입을 맞췄다. 부드럽게 서로 오가는 숨이라던가, 한 번 짧게 들이키는 것만으로 코를 마비시켜버리는 고가 브랜드의 향수라던가. 계속 마음 속 어디 한 구석에서는 엑셀을 밟으라고 요동치는 것을 겨우겨우 진정시키며 바쁘지 않게, 보채지 않으며, 느긋하게, 천천히. 클락은 탄성과도 비슷한 숨을 내뱉었다. 상상 이상으로 만족스러운 흡사 포만감 -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굶주렸을지도 모르는 법이었다. - 과도 같은 황홀한 기분은 대체 어디에서부터 비롯되었는가, 조금 고민해 볼 필요는 있었지만 말이다.


“이제 좀 괜찮아졌나?”

“…아주 많이요.”

“슈퍼맨이 키스하기 전에 동공이 요동칠 정도로 긴장하는 남자라는 걸 온 세상이 알아야 하는데.”

“네, 네. 그래요, 저 굿모닝 스몰빌, 이랍니다. 그렇지만 어떡해요. 첫 키스잖아요. 긴장이 안 될 수가 있나.”

“정말 순수한 의미로 첫 키스는 아니잖아?”

“브루스.”


클락이 보기에 브루스는 다소 얄미운 얼굴로 웃고 있었다. 그러나 동시에 브루스가 자신의 넥타이를 바짝 잡아당기며 입을 맞추는 탓에 콧등에서 안경이 살짝 밀려났다. 가볍게 입을 맞추고 떨어져 나가는 사이를 아쉬워하던 찰나, 브루스가 제법 나른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럼 방금이 두 번째 키스네.”

“나 사고 치게 만들려고 작정했죠, 지금?”

“칠 수는 있고?”

“브루스, 난 가끔 당신이 너무 싫더라.”

“그래? 난 아닌데.”


아, 진짜. 이건 다 당신 탓이야. 클락은 엉성하게 걸쳐져 있던 안경을 거칠게 잡아 빼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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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코 의도한 것도 아니었고, 원했던 일도 아니었지만 어쨌거나 명백하게 죽었다 살아 돌아온 것은 사실이다. 제이슨은 그 자체가 불쾌하게만 느껴졌던 적도 있었다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기억해냈다.

지금은? 그걸 말이라고 해? 불쾌하지. 다 낡아빠진 소파에 몸을 기울이고 곰팡이가 필 듯 말듯 눅눅한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별로 집중할 필요도 없이 남자가 있는 곳이나 그 주변이나 몹시도 조용한 탓에 고른 숨소리가 퍼지고 사그라지는 반복적으로 움직이고 있는 것이 들렸다. 제이슨은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며 가늠해본다. 저 천장에 곰팡이가 피는 것이 먼저일까? 아니면, 아니면?


빌어먹을. 제이슨은 바닥에 누워있는 남자의 숨소리가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무엇이 마음에 들지 않았냐하면, 금방이라도 아예 사라져버릴 것 같이 너무나도 작다는 것이었고 남자의 주변을 감싸고 있는 공기의 냄새가 너무나도 불쾌했고 짜증이 난다는 것이었다.

제이슨은 그 공기의 냄새를 역겨울 만큼 잘 알고 있었다. 결코 지워지지 않을 죽음과 가까운 냄새. 그 땐 몰랐지. 한 번 죽고 살아본 후에야 남자의 곁에는 늘 이런 냄새가 지독하리만큼 풍기고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 누구 마음대로. 그건 안 되지. 절대 안 돼. 제이슨은 가볍게 몸을 일으키고는 남자의 곁에 바로 누웠다. 남자는, 그는, 정말로 곧 죽을 사람처럼 가만히 눈을 감고 누워있었으나 소파 위에서 들었던 것보다는 조금 더 생기 있게 들리는 숨소리에 눈곱만큼의 안도감을 느끼며 제이슨은 둥글게 등을 말고서는 그의 곁에 쥐 죽은 듯이 소리죽여 누웠다.


언젠가, 그 언젠가에는 당신을 바라보며 누운 적도 있었는데. 제이슨의 얼굴이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듯 울상이 되었다가 눈 깜짝할 사이에 딱딱하게 굳어 차가워진다. 하루에도 수십 번, 남자에 대해 생각할 때마다 정신 이상자처럼 왔다 갔다 하는 감정의 높낮이에 처음에는 많이 혼란스러워했던 적도 있었던 것을 안다. 그러나 여전히 마음 한 구석에는 가장 작고도 큰 의문점이 남아있다는 것 또한 안다. 제이슨은 아주 조심스럽게 남자의 얼굴을 바라볼 수 있게 몸을 돌렸다. 둥글게 만 등은 여전했다. 남자의 곁에 누워있는 동안 그 등이 펴질 일이 있기나 할까.


브루스. 제이슨은 결코 소리 내어 남자의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입을 다물고 그 이름을 속으로 중얼거리며 혼란스러운 감정을 감내하면 마지막에는 누군가 자신을 향해 묻는다. 그 목소리의 주인이 누구인지는 모른다. 그 자신일수도, 혹은 브루스일수도 아니면 그 빌어 처먹을 자식일지도 모르는 법이었다.

어쨌거나 분명한 것은, 그 목소리는 자신을 향해 묻는다. 무엇을 원하는 거야? 제이슨은 그 물음에 입을 다물어버렸다. 그 스스로도 확신할 수 없었다. 그의 숨을 자신의 손으로 끊기를 원하는 것인지, 아니면-.


“……밤에 늦게 자면 건강에 안 좋다.”


그 시리도록 차가운 다정한 눈이 자신을 바라보기를 원하는 것인지. 제이슨은 그저 두 눈을 깜빡일 뿐이었다.

무슨 상관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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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세컨대 클락은 배트맨의 정체를 함부로 훔쳐본 적이 없었다. 대체 어떻게 슈퍼맨의 투시 능력은 납을 사용하면 막을 수 있다는 정보를 구한 것인지는 몰라도 그의 카울에는 얇지만 납 처리가 되어 있었다. 아마도 평생을 배트맨만큼 철저하고 완벽한 사람을 볼 수 있을 리가 없을 것이라는 생각을 할 정도였다.

그의 얼굴을 볼 수 없는 만큼 클락은 그의 주변 것들에 더 감각을 곤두세우고는 했다. 예를 들면 여느 때와 다름없어 보이는 발차기의 지축이 되는 발의 부츠 밑창이 바닥에 쓸리는 소리라던가-. 별 쓸데없는 것에 절로 쫑긋 세워지는 감각의 촉을 어떻게 해도 도무지 손을 쓸 수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배트맨이 의심이 가득한 눈초리로 슬금슬금 자신의 곁에 가까이 오지 않는다는 것을 느꼈을 때였다.

그가 자신의 정체를 아는지 궁금해지려던 찰나, 클락은 그와는 전혀 어울릴 것이라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희미한 단내를 맡았다. 그 달콤한 향기는 절로 입 안에 군침이 돌게 만들 정도로 향긋했다. 초콜릿? 그러나 분명 초콜릿의 향기라고 하기에는 조금 더 달게 느껴지는 향에 클락은 굉장히 의외라는 얼굴로 배트맨의 어깨를 붙잡고는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중얼거렸다.


“…맛있는 냄새가 나. 단 내가.”


배트맨과 만난 지 약 4개월 만에 처음으로, 그가 당황하는 것을 느낀 클락 또한 그 못지않게 당황하여 횡설수설할 동안 슈퍼맨이 배트맨에게서 ‘맛있는 냄새’가 난다고 한 사건은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널리 퍼지고 말았다.

그 뒤로 배트맨은 이상한 무리들의 표적이 되었다. 이상한 무리라 하면은, 대표적으로는 그린랜턴과 플래시가 있었고, 샤잠과 사이보그도 퍽 궁금하다는 얼굴로 배트맨의 뒤를 졸졸 쫓아다녔으나 돌아오는 것이라고는 짜증과 한숨이 섞인 꾸짖음뿐이었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의 원흉이 된 슈퍼맨은 반경 5m 안 접근금지 명령을 받았으며, 혹 그것을 어길시 휘황찬란한 초록빛 세상을 구경시켜주겠다는 그의 협박 아닌 일방적인 통보에 천하의 슈퍼맨도 얌전히 꼬리를 접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클락의 코끝에는 여전히 배트맨에게서 느껴지는 달콤한 향이 선명하다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강렬하게 느껴졌다. 그린랜턴은 달콤한 냄새는커녕 쓸데없이 향이 짙은 향수 냄새만 풀풀 풍기는 것 같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플래시는 그 향수가 보통의, 일반적인 직장인의 월급으로는 감당하기 힘든 브랜드의 제품이라는 것을 눈치 챘으나 입을 다무는 것을 택했다.





최근 클락에게는 새로운 취미가 생겼다. 데일리 플래닛에 퍽 상큼한 소문이 돌았다. 요새 들어 클락의 자리에서 단 내가 며칠 째 빠지지 않고 풀풀 풍긴다는 소문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클락의 자리에는 이곳저곳의 수많은 간식거리들이 책상 한 가득 쌓여있었다. 비단 클락의 자리뿐만이 아닌 그 주변 동료들의 책상에도 가득했다. 도넛부터 시작해서 쿠키, 케이크, 마카롱…. 그 종류도 워낙 많아 일일이 다 셀 수 없을 정도였다. 덕분에 신경질적인 표정으로 자판을 두드리는 경우가 많은 ‘기자’들의 사무실에 아주 조금이나마 웃음꽃이 폈다. 거의 매일같이 군것질을 사오기 시작하는 클락을 보며 로이스는 한 가지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었는데, 원래 클락은 단 것을 그리 즐기는 편이 아니었다. 그런 그가 하루에 다 먹기도 벅찬 양의 디저트들을 사오는 것이 궁금할 수밖에. 심지어 클락은 그 많은 것들 중 한 두 개 정도 먹을까 말까했다. 디저트들은 대부분 다른 사람의 뱃속으로 들어갔고, 클락은 그저 그 디저트가 담겨있던 상자를 빤히 보며 미간을 살짝 찌푸릴 뿐이었다.

클락이 사온 디저트의 맛은 훌륭했고, 로이스는 체중이 2kg이나 늘었다며 푸념을 내뱉을 뿐이었다.


“대체 무슨 일이야?”


늘어난 체중이 아슬아슬하게 3kg을 채우기 전에 로이스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클락을 바라보았다. 오늘도 여전히 클락의 자리에는 새로운 케이크 박스가 놓여있었고, 클락은 유심히 그 상자를 들여다볼 뿐이었다. 물론 그 안에 들어있던 케이크는 벌써 누군가의 뱃속으로 들어간 지 오래였다.


“뭔가, 좀 더…….”

“더?”

“달면서 달지 않은 듯한 냄새가 나는 게 뭘까?”

“클락?”

“초콜릿은 아니었는데.”

“클락.”

“응?”


로이스는 클락의 앞에 가볍게 손가락을 튕겨 소리를 내었고, 클락은 그제야 로이스를 바라보았다. 도수가 너무나도 높게 맞춰져있는 안경알에 비친 그의 새파란 눈은 전에 없던 호기심에 깊게 잠기어 더욱 반짝였고, 로이스는 그 사실 자체를 꽤 흥미롭게 여겼다.


“어떤 걸 찾는 거야?”

“음, 말로 설명하기가 어려워. 적당히 달지만 그렇다고 코끝을 찌를 정도로 달지는 않아. 그 향이 너무 은은해서 금방 잊혀져버릴 것 같다가도 익숙하게 계속 맴돈단 말이지.”

“정말 어려운 걸.”

“그렇지?”


요컨대 클락은 그 자신이 설명한 그러한 향기를 내는 종류의 디저트를 찾고 있었고, 벌써 며칠 째 동네의 모든 디저트 전문점을 뒤졌지만 그 향기의 단서조차 잡지 못한 채 방황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요 며칠 클락이 사온 디저트는 모두 한두 번쯤은 이름을 들어본 적이 있는 상표가 있는 집의 것이었고, 로이스는 손뼉을 치며 클락의 어깨를 두드렸다.


“고담으로 향하는 다리 끝에 있는 가게는 가봤어?”

“음?”

“팬케이크 집말이야.”


아, 아아. 클락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곧장 고개를 다시 갸웃거렸다. 그 가게가 있다는 것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지만 어쩐지 그 가게는 그에게 어울리지 않을 것이라는 편견이 알게 모르게 깔려 있었다. 클락은 자신의 편견이 어디에서부터 비롯되었는가를 곰곰이 생각했다. 왜 그라면 좀 더 크고, 이름만으로도 유명한 곳의 향이 어울릴 것이라 생각했는가.

클락은 곧장 자리에서 일어났고, 그의 반동 때문에 덜컹거리는 의자를 대신 잡아준 로이스의 뺨에 입을 맞추며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쏜살같이 달려 나갔다. 클락의 눈은 방금 로이스가 발견했던 것보다 더욱 더 반짝이고 있었다.





가게에 점점 가까워질수록 익숙하게 코끝을 간질이는 향은 분명히 그의 것이었다. 정확히는 그의 곁에서 머물던 희미한 그 달콤한 향기였다. 클락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가게로 들어섰고, 가게 안은 확실히 바깥에서 느껴지던 것보다 훨씬 강하고 진한 향이 클락의 전신을 휘감았다.

겨우 한 두 자리 있을까 한 아주 조그마한 가게에는 보통의 가게에서 풍겨오는 달콤한 설탕이나 크림의 향기에 더해져 독특한 시럽의 향기가 물씬 풍겼다. 시나몬? 클락은 비로소 너무나도 희미했던 그 향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향수와 뒤섞여 은은하게 그를 감싸고 있던 공기 중에 퍼져있던 것은 명백히 시나몬 향기였다. 너무나도 희미하지만 꾸준히 자신의 향기를 어필하던 그의 정체를 알아내자 클락의 얼굴에도 미소가 번졌다.


“무엇으로 드릴까요?”

“아, 음……. 모카 시럽으로 주세요. 크림은 빼고.”

“드시고 가실 건가요?”

“네.”


다행히 자리가 있었기에 클락은 망설임 없이 자리에 앉았고, 주문한 팬케이크가 나오는 동안 연신 화사한 미소를 지으며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점심시간이라고 하기에는 늦은 시간인지라 길거리에 걸어 다니는 사람의 수는 그리 많지 않았다. 꽤 오래간만에 느껴보는 느긋함에 푹 젖어있을 때 쯤, 클락은 아주 의외의 인물이 가게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멍청한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미스터 웨인?”


그 이름조차 입에 담기가 생소한 남자는 정말이지 어울리지 않는 곳에 발걸음을 했다는 생각이 들 때 쯤, 클락은 본능적으로 그대로 가게를 나가려는 브루스의 팔을 붙잡았다.


“잠깐, 웨인…… 배트……?”

“주문하신 케이크 나왔습니다.”


주문 대를 앞에 두고 오묘한 신경전이 아주 잠깐 스쳐 지나가고, 브루스는 클락 대신 그의 접시를 받아들며 말했다.


“항상 시키던 것으로 부탁드립니다.”

“시나몬 시럽 크랜베리 팬케이크 맞으시죠?”


브루스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고, 클락은 여전히 그의 팔을 붙잡고 있었다.

놀랍게도, 그것은 가까운 미래에 다시금 회상하게 될 그들의 첫 번째 데이트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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