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그만할까?" 

브랜트의 한숨에 드물게 이단이 얼굴을 구겼다. 뭘? 너무나도 뻔한 물음에 브랜트가 한껏 미소 짓고는 이단의 가슴팍을 검지로 꾹 찍어 눌렀다. 

"뭐긴 뭐야. 너랑 나지." 
"브랜트." 
"지쳤어, 나." 

생각지도 못한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생각하려고 애쓴 적이 없는 브랜트의 말에 이단은 순식간에 눈앞이 깜깜해지는 것을 느꼈다. 이단은 완강하게 거절했다. 싫어. 안 돼. 그러자 브랜트가 얼굴을 구기며 빈정거리며 쏘아붙였다. 

"이제 와서 나한테 뭐라도 생겼어?" 
"이제 와서라니." 
"이제 와서, 지." 

계륵이야? 남 주자니 아깝고. 이단은 브랜트의 말에 저도 모르게 화를 내며 브랜트의 팔을 세게 움켜쥐었다. 여전히 단단한 팔의 근육은 그대로였지만 처음 그 팔을 잡았을 때보다는 얇아져 있다는 것을 깨달은 이단은 눈을 치켜떴다. 

"묻는 말에 솔직하게 대답해." 
"이단-" 
"뭐가 문제야." 

브랜트는 이단의 팔을 아프지 않게 정중히 떼어내고는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 거기까지야. 이 이상은 묻지도, 알려고 하지 마. 명백한 거절에 이번엔 눈앞이 새하얘졌다. 
신은, '이단 헌트'라는 인간이 다른 인간을 사랑하는 것을 원치 않는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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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망소재주의

 

 

 

 

 

스팍은 예의 그, 감정도 없는 벌칸이었다. 스팍에게 있어 감정이란 표출하는 것 자체가 불필요한 것 중의 하나였다. 굳이 그걸 꺼내보이지 않아도 충분히 살 수 있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슬픈 일이 닥쳐 질질 짠다고 상황이 더 나아지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그런 스팍이 태어나서 지금까지 흘린 눈물은 딱 3번, 3번 뿐이었다. 

  

사랑하는 모행성, 벌칸이 파괴되던 날 스팍은 어머니를 눈 앞에서 잃었다. 조금만 더 제 곁에 붙여놓을 것을 한참이나 후회했다. 뻗은 손이 맞닿았다면 지금 그의 어머니는 저를 보며 여전히 그 아름다운 미소로 웃어주실 것이라고도 생각해봤다. 그러나 그것은 다 부질없는 짓이었다. 스팍은 사랑했지만, 사랑한다고 제대로 말도 건네지 못한 제 어머니를 눈 앞에서 잃어버렸다.  

그 때도, 스팍은 울지 않았다. 최대한 감정을 억누르고 이성을 찾았다. 눈 앞이 일렁이고 있다는 것은 느꼈었지만, 절대로 눈물을 흘리는 일은 없었다. 그것은 불필요했으며, 만약 자신이 눈물을 흘려 어머니가 살아 돌아온다면 수십번, 수백번도 더 울어줄 수 있었다. 스팍에게 있어 눈물이란 그런 의미였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아마도 자신이 눈물을 흘리는 순간은 이제는 한 명밖에 남지않은 소중한 혈육인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라고 그리 생각했다. 단정은 지을 수 없었다. 스팍은 제 스스로 그 때가 되서 자신이 눈물을 보일지 확신이 들지 않았다. 

  

그런 스팍이 처음으로 눈물을 보인 상대는 아이러니하게도 짐 커크였다. 

 

엔터프라이즈호가 지구로 추락하는 도중 기적적으로 살아남았을 때, 다른 모두는 하늘에 기도를 했고 기적이라며 웃었지만 스팍은 그러지 못했다. 기적, 그런 것은 세상에 없었다. 아니, 있다 한들 논리적이지 못한 그 추상적인 것을 벌칸의 머리는 이해하지 않으려고 했다. 서둘러 달려간 곳에는 기적과 맞바꾼 것이 있었다. 

 

손을 뻗으면 바로 닿을 수 있는 거리였는데, 단단하게 두 사람의 사이를 갈라놓은 유리벽에 스팍은 한순간에 절망감에 휩싸이는 것 같았다. 이상한 일이었다. 아니, 이것은 언젠가 한번 겪어본적이 있는 아픔이었다. 가슴이 무뎌지고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아 머릿속이 새하얘지는 이 느낌은 언젠가 이미 한번 쓰라리게 겪어본 고통이었다.  

 

"어떻게하면 감정을 조절할 수 있는거야, 스팍?" 

"..모르겠습니다." 

 

그러는 당신의 앞에 있는 저 또한, 지금 이 것을 무엇이라고 불러야하는 지 모르겠습니다, 함장님. 차마 이 말은 마음 속 깊은 구석으로 밀어넣었다.    

 

"죽는 게 두려워."

 

유리벽 위로 조심스럽게 얹어진 그의 손에 자신의 손을 갖다댄 것은 무의식중에 그러했던 일이었다. 벽을 사이에 두고 두 손이 맞닿은 순간, 희미하게 짐이 웃는 것 처럼 느낀것은 비단 스스로의 착각이라고 생각할 정도였다. 자신의 눈앞에서 사라져가는 함장의 생명을,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스팍의 눈에서는 기어코 눈물이 떨어졌다.

 

"내가, 그 때 왜 널 구하러 돌아갔는지.. 이해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

"..왜냐하면 우린 친구이기 때문입니다."

 

친구, 매우 낯선 단어였다. 짐 또한 스팍의 입에서 그런 단어를 들을 날이 오다니 스스로도 놀란 눈치였다. 씩, 웃은 그의 생명은 기어코 그 안에서 사라져버렸다. 힘 없이 미끄러지는 짐의 손을 보며 스팍은 고통에 일그러진 비명을 질렀다. 절대로 용서할 수 없는 자의 이름을 부르며 새하얘진 머리로 뛰쳐나간 이후의 기억은 안타깝지만 잘 기억나지 않았다.

 

 

*

 

 

기적적으로 짐은 살아났다. 마지막에 스팍이 이성을 다시 되찾았기에 망정이지 안 그랬으면 짐을 살릴 수 있는 기회 조차도 날려먹을 뻔했다. 스팍은 그 때 깨달았다. 그 순간, 짐의 생명이 사그라든 그 순간부터 칸을 잡았을 때 까지의 제 행동은 엄밀하게 말하자면 전혀 벌칸답지 않은 행동이었으며, 그것은 퍽이나 인간의 모습과 가까웠다. 그리고 주체할 수 없었던 그 감정은 이제서야 비로소 확실해졌다. 아마도 그것은 '친구'라는 개념보다는 좀 더 깊숙한, 좀 더 조심스러운 것이라고 생각했다.

 

우후라와 헤어진 것은 그로부터 얼마 안되서였다. 그녀는 지쳐보였다. 말이 지쳐보인 거지, 사실은 그녀도 알고 있었다. 스팍이 그 정도로 짐의 일에 분노하며 심지어 눈물까지 보이리라고는 전혀 상상도 못했던 일이었다. 스팍은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방금 전, 짐을 어떻게 생각하냐는 제 질문에 스팍은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것은 거짓말보다 좀 더 고약한 것이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스팍에게 우후라가 싫으냐고 물으냐면 대답은 아니오, 였다. 그녀는 다른 사람들과 다르게 스팍과 좀 더 오래, 심도있는 대화를 이어갈 수 있는 몇 안되는 사람이었고 무슨 일이 생기던지 저에게 따뜻한 품을 빌려주는 사람이었다. 그녀와의 입맞춤은 세상 그 어떤 시간보다 평화로웠고, 쾌락을 즐기지 않는 벌칸에게 있어 딱 한 순간, 짧은 즐거움을 주는 것이기도 했다. 그랬던 그녀가 물은, 짐을 어떻게 생각하냐는 말에 스팍은 입은 다물어버렸다.

 

스팍은 아직도 그 질문에 대해 대답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명백한 해답을 찾지 못했기에.

 

 

*

 

 

해답을 찾았다.

그것은 '친구'가 아니라 좀 더 깊숙하고 더 다정하고 사랑스러운 것이었다. 그 이름은 '사랑'이었고, 그에 어울리는 단어는 '친구'가 아닌 '연인'이었다.

 

"짐, 벌칸은 거짓말을 못한다는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또, 또. 그 소리.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로 들어서 잘 알아."

"그렇다면 제가 당신한테서 느끼는 이 감정과 마음이 '애정'이라는 사실은, 거짓이 아니겠군요."

 

퍽이나, 로맨틱하다. 벙 찐 짐의 입에서 나온 첫번째 대답이었다.

그 뒤로 곧바로 스팍은 짐에게 손목을 붙들려 맥코이에게 불려갔다. 매우 놀란 얼굴로 어디 머리라도 다친 거 아니냐며 호들갑을 떠는 짐의 말에 옅게 웃으면서 대답했다.

 

"저는 머리를 다치지 않았으며, 당신이 들은 말은 모두 사실입니다."

"마미, 나 지금 헛것을 보고 있는 걸까?"

"꼬맹아, 너 나한테 약 먹인 거 아니지? 지금 내 눈 앞에서 그 빌어먹을 홉고블린이 웃고 있는데?"

 

오, 세상에.

스팍의 말을 듣고 난 후 이어진 짐의 두번째 대답이었다.

 

그 뒤로 정확히 사흘하고도 3시간 43분 2초 후, 짐의 세번째 대답이 있었다.

 

 "스팍, 넌 좀 더 사랑을 표현하는 방법을 배워야겠어." 

"..짐, 저는 벌칸-" 

"쉿." 

 

그러니까, 배워보자고. 

 

 

* 

 

 

시간이 흘러, 흘러 짐은 엔터프라이즈호의 함장 자리를 내려놓았다. 세월이 원인이었다. 80년, 길면 90년이라는 한정적인 인간의 수명은 이럴 때 매우 치명적이었다. 어느새 새월은 흘러 짐은 꽤나 나이가 든 중년의 나이가 되었다. 스타플릿의 추천을 받아들인 짐은 스타플릿의 교관이 되었다. 스팍은 원래 교관이었기에 다시 복직하는 것이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난 왜 인간인걸까."

"인간이 아닌.. 예를 들면 벌칸인 당신의 모습은 상상하기 힘들군요, 짐."

"스팍, 나 늙어가고 있어."

"...."

"젠장, 스팍. 나 죽어가고 있다고."

"압니다, 짐. 괜찮습니다."

 

요새들어 짐은 꽤나 우울해져있는 상태였다. 더 이상 옛날의 자기 모습이 아니라는 것에서 밀려오는 자괴감을 견디기가 힘든 모양이었다. 아니, 사실은 그것보다도 더 큰 이유가 있었다.

 

"내가 널 두고 어떻게 가지, 스팍?"

 

스팍은 조심스럽게 짐의 몸을 끌어안았다. 가슴팍에 내려앉은 그의 얼굴에서 눈물이 흐르고 있던 모양인지 금세 스팍의 옷이 눈물을 머금어 축축해졌다.

 

 

* 

 

 

안녕, 스팍. 친애하는 나의 스팍에게. 

네가 이 편지를 발견 했을 때, 아마도 나는 네 곁에 없겠지?

음..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네.

나, 내가 죽어가고 있다고 말한 그 날을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후회할 거라는 거 알아? 정말이야. 후회하고 있어. 너에게 그런 말을 하는 게 아니었어. 굳이 그 사실을 환기 시켜 줄 필요 없었는데 괜히 내가 말을 꺼내서는.. 하지만 조금 속상했어. 아니, 조금이 아니지. 많이. 나는 인간이고 너는 벌칸이잖아. 너를 두고 떠나는 나도 속상하고, 나를 떠내보내는 너도 속상할테니까.

 

내 몸은 이제 너무 늙어버렸고, 내 잘난 얼굴도 할아버지가 다 되어있더라고. 짐 커크 다 죽었다, 싶더라.

있잖아, 스팍. 나 죽는게 무서워, 아직도. 처음 그렇게 느낀 그 때는 너무 어린 나이에 내 모든 생을 마감한다는 사실이 너무 두려웠어. 그게 말이 되는 일이야? 요새 세상에 방사능 과다 노출로 죽는 사람이 어딨냐고! 우주는 한 없이 넓은데! 이 제임스 커크가 20대도 못 넘기고 죽다니. 하지만 지금은 그 반대네. 다 늙어서 죽는다는 게 무섭다. 너를 남기고 가는 게 무서워. 그렇다고 바로 따라오라는 거 아니야. 그럼 혼난다! 그럼 넌 그러겠지? 짐, 벌칸은 인간보다 최소 3배의 근력과 신체능력을 자랑하는 종족으로 제가 당신에게 혼이 날 가능성은... 어때, 좀 닮았어?

 

난 네가 처음으로 나한테 사랑해, 하고 속삭여준 날을 난 아직도 기억하고 있어. 으, 닭살. 오그라들지만 사실이야. 그 날은 평생 잊지 못하는 날이 될거야. 물론 그 날 밤도. 하하, 그치? 그러니까 다른 사람 만나라고는 죽어도 안 할거야. 나는 이기적이니까. 너의 마음은 모두 내 것이었으면 좋겠고, 그 사랑은 온전히 다 나의 것이었으면 좋겠어. 나는 그래. 나는 내 모든것은 널 사랑하고, 널 받아들이고 있으니까.

 

한가지 너와 약속하고 싶은 게 있어. 있지, 스팍. 내가 네 곁을 떠나고 난 후에.. 반드시 꼭 네 곁에 내가 있을게. 그럼 넌 또 그러겠지. 벌칸은 사후세계를 믿지 않습니다. 사후세계는 매우 비논리적입니다. 하지만 난 믿어. 오늘부터라도 믿지, 뭐. 그러니까 꼭 내가 네 곁에 있을거야. 항상 너를 지켜줄게. 그러니까 슬퍼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네가 하고 싶은 일 다 해보고 다 즐기고 오란 말이야. 난 참을성이 굉장한 사람이니까 기다릴 수 있어. 아니, 네 옆에 내가 있는다고 했으니까 그 일들 나도 다 할거야.

 

휴, 이제 편지 쓰는 것도 지친다. 팔이 아프네. 아직 하고 싶은 말이 많지만 그 무엇보다 이 사실을 기억해줬으면 좋겠어.

 

스팍, 사랑해. 이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도 더, 더 많이.

내가 사랑하는 나의 하나뿐인 First Officer.

 

 

짐의 장례식에서 조차 눈물을 흘리지 않던 스팍은 기어코 편지를 손에 쥐고 눈물을 흘렸다. 짐이 스팍을 사랑한 만큼, 스팍도 짐을 사랑했다. 그의 모든 것은 짐의 것이었다. 그러니 스팍의 두번째 눈물도 당연히 그의 것이었다. 스팍은 말 없이 눈물만 흘렸다.

 

 

*

 

 

매일 하루에 한번, 스팍은 그 편지를 읽어보았다.

 

그 이후로 더 많은 시간이 흘렀다. 이제 엔터프라이즈호와 운명을 같이 했던 선원들도 몇 안 남아있었다. 가장 최근에는 맥코이의 장례식에 갔었다. 다시는 자신을 망할 초록 홉고블린이라고 부를 사람이 없어졌다는 사실이 마음 한켠을 쓸쓸하게 했다. 그 때는 인종차별적 발언이라고 그 말을 들을 때마다 싸우곤 했었는데, 돌이켜 지나보면 그 세월들이 전부, 인간이 말하는 소중한 추억이라는 것이었다는 것을 깨달아가고 있는 중이었다.

 

그의 장례식에서 스팍은 우후라를 만났다. 그녀 또한 흘러가버린 세월에 많이 늙은 모습이었다. 오랜만에 스팍은 그녀와 함께 저녁을 같이 했다.

 

"나는 짐을 질투했어요, 스팍. 나는 볼 수 없었던 당신의 모습을 볼 수 있다는 사실이 그 때의 나에게는 굉장히 자존심에 거슬리는 일이었으니까요. 하지만, 지금은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당신을 받아들여준 사람이 다른 사람도 아닌 짐이니까요. 누가 뭐래도 그는 우리의 존경스러운 캡틴이었고, 친구니까요. 잘됐어요, 스팍."

 

스팍이 돌아간 바로 다음 날, 우후라 역시 짐의 곁으로 떠나갔다.

 

 

*

 

 

자신의 방 창가에 놓인 의자에 앉은 스팍은 조심스러운 손길로 짐이 남기고 간 마지막 편지를 펼쳤다. 그의 편지를 읽는 스팍의 눈은 예전같지 시야가 맑지 못했다. 스팍은 이제 자신에게도 그 날이 왔음을 느꼈다. 마지막 순간이 왔음을. 편지의 마지막 줄을 읽고 난 후, 스팍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 모든것이 까만 그의 세상에 단 하나, 밝은 빛이 들었다. 예나 지금이나 그 어떤 모습이라도 사랑스러운 제 연인의 모습이었다. 짐은 스팍에게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웃어보였다. 꼭 어린아이처럼.

 

이제 당신을 만나러 갈 수 있겠군요, 짐.

 

스팍의 세번째 눈물 역시, 그의 모든 것은 짐 커크의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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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07. 13


어떻게든 살아남았다는 사실에 감사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소중했던 모든 것을 잃어버려 오랫동안 잊고 살았던 '가슴 아픔' 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다시금 깨달았다. 베인은 무자비한 남자였지만, 그렇다고 감정이 없는 목석은 아니었다. 그녀의 말은 틀린게 하나도 없었다. 베인은 그녀를, 탈리아를 사랑했다. 허나, 탈리아는 베인에게 안녕을 고했고 이제 그녀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다. 그 사실이 베인을 너무나도 슬프게 만들었다. 마스크를 벗어버리고 그녀의 뒤를 따라갈까 생각도 했었고, 소중한 그녀를 앗아간 그에게 복수를 할까 생각했지만, 모든 tv가 '브루스 웨인'이 죽었다는 방송을 하고 있었다. 그러자, 세상이 정말로 허무해졌다. 사실, 베인은 믿지 않았다. 그가 죽었다고? 그는 죽음에서도 살아나온 남자다. 고작 이런일로 죽을리가 없지, 하면서도 그를 찾을 수 있는 방법이 없어진 것은 사실이었다. 


베인은 하수구를 떠돌며 어떻게든 목숨을 부지하고 있었다. 그는 원래 무척이나 강인한 전사였기 때문에 하루 이틀 먹지 못한다고 죽는 것은 아니었다. 빨리 이 지긋지긋한 도시에서 떠나고 싶었지만 고담시는 어찌보면 철벽의 요새와 같았다. 그렇게 베인은 산 것도, 그렇다고 죽은 것도 아닌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그런 베인에게 기회가 찾아온 것은 정말 우연이었다. 평소처럼 이런 저런 오지를 떠돌아다니면서 허무한 시간을 보내고 있던 참에, 베인은 우연히 길가에 서 있는 경찰차에서 내리는 청년을 보았다. 그 청년은 경찰복을 입고 있지 않았지만 아주 자연스럽게 경찰차에서 내리며 차의 주인으로 보이는 경찰에게 고맙다는 듯 말하고 있었다. 


"정말 돌아오지 않을 생각이야, 존?"

"아마."

"국장님도 아쉬워하시잖아. 네 덕분에 이 도시를 구할 수 있었다고."

"내 덕분이 아니지. 그건, 순전히 베트맨 덕분이었어."

"네가 그 때 지하에 파묻혀 있던 경찰들을 구해준 건 사실이잖아."

 

청년은 어깨를 으쓱해보이고는 차의 주인인 경찰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고는 자신이 가던길을 갔다. 베인은 그들의 대화를 통해, 그 청년이 한 때 경찰이었으며, 지하에 갇힌 멍청한 경찰 3천여명을 구한 장본인이라는 것을 아주 쉽게 알 수 있었다. 딱히 지금와서 그에게 분풀이를 하려는 것은 아니었으나, 아무런 목적도 없이 살고 있는 베인에게 그 날의 일은 사소한 것이라도 커질 수 있는 불꽃이었다. 베인은 서둘러 그의 뒤를 쫓았다. 그리고 그가 으슥한 산동네로 들어가는 것을 보았으며, 베인은 그가 '브루스 웨인'을 만나는 것을 목격했다. 그 사실을 알자마자 베인은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럼 그렇지, 그가 죽을리가 없다. 그가, 그 베트맨이. 

그 청년은 웨인을 만나 한껏 시시덕거렸다. 잘 들리지 않는 웨인의 말에 아주 환한 웃음을 지어보이는 그의 모습을 보며 웨인 또한 환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것을 보자, 베인은 속이 뒤틀리는 것만 같았다. 자신에게서 탈리아를 빼앗아간 남자는, 또 다른 소중한 것을 찾아 곁에 두고 행복해하는 꼴이라니. 거의 다 죽어갔던 복수심이 타오르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에게도 탈리아를 뺏긴 자신의 기분을 한껏 느끼게 해주고 싶었다. 

 

꽤나 오래간만에 베인의 삶에 목표가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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