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07. 12


그 날 이후, 존의 삶은 달라졌다면 참 많이 달라졌을 것이고, 아니라면 또 아닐 것이다. 

 

고담시를 구한 영웅 베트맨, 브루스 웨인이 사라지고 난 뒤에 존 블레이크는 그에게서 어마어마한 것을 물려받았다. 정작 그것을 처음 발견했을 때는 무척 가슴이 뛰었고 뭐라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장난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것은 그 때, 그 한 때였다. 막상 존은 이 다음 혼자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섣불리 단정지을 수는 없었다. 그가 정말로 자신이 그의 뒤를 이어가기를 원하는지, 아니면 그냥 당신의 정체를 알고 있던 한 청년에게 남긴 유산같은 것인지는 단지 이렇다할 추측만 할 뿐, 사실은 아무도 모를 일이었다.

 

존은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를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불의를 보면 참을 수 없는 사람, 감정 조절을 해야만 하는 사람, 거짓 웃음으로 자신을 무장하고 있는 사람. 자신이 베트맨의 정체를 안 것은 단순히 운이 좋아서, 혹은 감이 좋아서였다. 그냥 찍었던 문제의 답이 맞았던 것이다. 그런 자신이 그의 뒤를 잇는다, 라고 말할 수 있을 만한 인간인가. 존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이 세상의 영웅, 유일한 베트맨은 브루스 웨인, 그 한 사람 뿐이다.

 

결과적으로 존은 브루스에게 받은 모든 것을 손에서 내려놓았다. 너무 버겁고, 무거운 것이었다. 고작 스무살 중반이 된 청년에게는. 

그곳은 때때로 베트맨이 생각나거나 아니면 브루스 웨인이 생각나거나, 그 날의 일이 생각이 나면 심심찮게 둘러보러 오는 곳이 되었다. 그곳으로 들어갈 때 심심하면 시원한 폭포세례도 한 번 맞아주는 것도 기분 전환의 일종이었다. 그리고 몇 분, 몇 시간을 그 곳에서 많은 생각을 해보고 나서 다시 밖으로 나갔다. 

 

 

*

 

 

"어서오세요."

 

경찰을 그만두고 나서 존은 돈을 벌어야만 했다. 아무리 짠 월급이라고 해도 고정된 수입이 있던 경찰을 그렇게 망설임 없이 그만둔 것은 후회하지 않았지만 그 후의 일이 막막한 것은 사실이었다. 그런 사정을 아는 고아원 원장님은 웨인가의 저택으로 들어와 같이 살자고 했지만 존은 혼자만의 공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하루에 한 번, 꼬박꼬박 아이들을 만나러 갔다. 저택에서 그리 멀지 않은 카페에 직원으로 일하고 있는것도 벌써 수개월이었다. 그동안 존의 생활은 무의미한 시간 보내기의 연속이었다. 그래도 혹시 몰라 자기관리에는 시간과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그래도 여전히, 근본적으로 제일 궁금했던 문제의 답은 나오지 않은 채 였다.

 

"어서오.."

"여기 있어서는 안 되는 사람이 있군."

 

습관적으로 포스기계를 보고 있던 존은 절대로 잊을 수 없는 그 목소리에 깜짝 놀라 기함을 쳤다. 


"...브루스 씨?"

 

고급스러운 옷차림에 딱 봐도 상류층이라는 분위기를 실컷 풍기고 있는 사람은 정말 환상이 아니었다. 검은 모자를 쓰고 선글라스를 끼고 있는 그는 아무리 숨기려 해도 브루스 웨인이었다. 그는 주위를 얼핏 둘러보고는 검지 손가를을 입술에 올려놓으며 조용히 하라는 제스쳐를 취했고, 존은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이 고담시에서 브루스 웨인이 베트맨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손에 꼽을 정도였고, 자신을 포함한 그 모든 사람들은 당연히 그가 죽은 줄 알고 있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브루스 웨인'이 죽은 건 고담시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다. 


"시간 되나?"

"....."

"얘기를 좀 하고 싶군."

 

존은 당당하다 못해 뻔뻔스러운 작자의 얼굴에 차오르는 헛웃음을 숨길 생각도 못하고 그대로 흘려버렸다. 


"곧 있으면 점심시간이니, 조금만 기다리시죠."



*



대충 유니폼을 정리한 존은 앞치마만 벗어두고 그가 앉아있는 자리로 향했다. 존은 그가 다른 사람의 시선이 모이기 힘든 구석자리를 참 잘도 찾았다고 생각했다.


"얼굴에 다 쓰여있군. 이 카페 회사소유였어. 그러니 자리나 메뉴같은 건 아주 잘 알고 있지."

"그렇게 티가 났습니까?"

"조금. 그나저나, 별로 놀라는 얼굴이 아니군."

"충분히 놀랐습니다. 영락없이 당신이 죽은 줄로만 알고 있었으니까요."


왠지 모르게 목이 막히는 기분이라 존은 눈 앞에 놓인 아이스티를 서둘러 들이켰다. 달콤쌉사름한 향이 입안을 맴돌았다.


"그래서, 내가 준 선물은?"

"그게 선물입니까?"

"선물이지. 그곳은 내, 베트맨의 모든 것이니까."

"..왜 저한테 주신 겁니까?"

"답을 알고 있으면서 묻는군."

"저는.."


존은 이제 한 가지 결론 밖에 내릴 수 없었다. 그가 원한 것은 명백하게 존이 그의 뒤를 물려받기를 원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 자체에 알 수 없는 긴장감과 무게감을 느낌 존은 고개를 저었다. 


"브루스. 당신이 내 어떤 면을 보고 그렇게 해줬으면 좋겠는지 모르겠지만.. 아니요, 나는 못해요."

"내가 처음 봤던 존 블레이크는 이런 청년이 아니었어. 난 벌써부터 옛저녁에 네가 이 고담시를 지킬것이라고 생각했지 이런 카페에서 일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고."

"당신이 원하는 것이 얼마나 어렵고 힘든일인지 당신이 제일 잘 알면서 그런 소리를 하다니 뻔뻔하군요."

"그러니 자네를 선택했지."

"왜죠? 나는 당신의 절반도 닮지 않았어요. 아니, 못한거죠. 당신이 더 잘 알잖아요. 저는 베트맨과 닮은 점이 하나도 없습니다."

"꼭 닮았다고 해야하나? 큰 착각을 하고 있는 모양인데, 이 일을 할 사람은 너 밖에 없어. 너만이, 이 고담시의 사람들이 모르는 모든 사건의 진실을 알고 있지."


그의 말에 존은 그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선글라스에 가려져있다 한들, 그의 눈은 올곧을 것이며 이 곳에 온 순간부터 자신만을 정직하게 바라보고 있을 것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존은 무거운 한숨을 내쉬며 꼭 칭얼대는 어린아이처럼 중얼거렸다.


"이봐요, 당신이 날 선택해준 건 고마워요. 내가 옛날에도 말했지만 당신은 원래 영웅이니까. 그리고, 그.. 제가 말했습니까? 생각해보니 안한 것 같은데.. '브루스 웨인'을 처음 본 곳은 고아원이지만, '베트맨'을 처음 본 곳은 길거리였습니다. 아버지가 노름빚으로 제 눈 앞에서 살해당했다고 말했던 거 기억하죠? 그 때 사실은 저도 죽을 운명이었습니다. 아니, 정확히는 팔려나갈 운명이었겠죠. 그들은 돈이 되는 걸 원했으니까. 그 때 절 구해준 게, 베트맨이거든요. 그러고 나서 말씀드린 것처럼 고아원에 가서 당신을 만났을 때, 저는 확신했죠."

"그건 처음 듣는 이야기가 맞군."

"그래요, 아무튼.. 저는 그럴 만한 사람이 아니라는 겁니다."

"어째서 그렇게 확신하는 거지?"

"저는 누굴 구한다거나 하는 큰 일을 할 사람이 아닙니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나는 자네가 그 때 수많은 사람의 목숨을 구한 것을 알고 있어."

존은 기어코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그 때, 그 대폭동 사건 때 확실히 잘난체를 해보자면 존은 수많은 사람들을 구했다. 존이 한 일은 누가 봐도 영웅적인 일이라고 할 수 있었다. 존은 그 때 무서울 것이 없었다. 자신이 믿고 있는, 절대로 부숴지지 않을 다이아몬드 같은 영웅이 강인하게 서 있었기 때문이다. 오로지 자신의 영웅이라고 생각했던 사람을 도와서 할 수 있는 일은, 할 수 없어도 할 수 있게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 땐 당신이 있었으니까."

"그래, 솔직하게 말해봐. 네 변명을 듣는 것도 꽤 재밌지만."

"..당신 사람이 참 못됐습니다."

"그런 말 자주 듣지."

 

이미 동난 아이스티잔을 멀뚱히 바라보던 존은 한참 동안 허공에 손가락을 놀리며 망설이다 차마 그의 눈을 마주보며 얘기하진 못하고 고개를 푹 숙이며 개미가 기어갈 듯한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그래요, 당신이 없으니까 못한다구요."


존은 필요했다. 예전부터 그가 자신이 그의 뒤를 이어줄 것을 바라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이렇게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은 존에게는 브루스 웨인이, 그의 영웅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스스로 생각해도 자신은 아직 많이 어렸다. 가치를 판단하는 일에도 사소한 감정에 휘말리기 쉬운 존재였다. 그렇기에, 존은 그가 필요했다. 자신의 길을 이끌어 줄 존재가.


"오늘 저녁에 시간 되나?"

"..네?"

"한동안 바쁠거야. 이왕이면 얼른 그만 둬."

"뭐라고요?"

 

부끄러운 고백 뒤 들려오는 것은 비웃음도 아닌 일방적인 통보였다. 물론 그가 존의 영웅은 맞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갑자기 이렇게 행동해도 되는 건가.


"아니, 잠깐만요. 한동안 바쁘다니요? 누가요? 당신?"

"아마도."

"뭘 하실 생각입니까?"

"저택은 고아원에게 줘버렸으니, 너랑 나랑 같이 새로 살 집을 구해야겠지. 이왕이면 그 동굴 근처에."

"....."


순간 존은 자신의 귀를 의심할 수 밖에 없었다. 누가 누구랑 같이 살 집? 아무런 대꾸도 못하고 있던 존에게 그는 아주 상냥하고 다정해보이는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왜, 싫은가?"

"아, 아니.. 그게 아니라."

"내가 필요하다며. 사실 원래 그러려고 온 거긴 한데, 네가 그렇게 열혈히 나를 원한다고 말까지 해줬으니 내가 왜 내 후계자를 마다하겠나. 돈이라면 걱정하지 말게나. 사실 너는 모르는 네 이름으로 된 계좌에 내 유산이 꽤 많이 있거든."

"제가 언제 열혈히..!"


화악 달아오르는 얼굴을 주체하지 못하고 아예 고개를 돌려버린 존의 미간은 있는 힘껏 구겨져 있었고, 브루스는 다 식어버린 커피를 홀짝이며 은은히 미소 짓고 있었다.


"어쨌든, 고담시로 돌아온다는 말씀이시네요."


그는 천천히 커피잔을 내려놓으며 존을 향해 여전히 웃는 얼굴로 조그맣게 속삭였다.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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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07. 07


만에 하나 너를 다시 볼 수 있다면 온 힘을 다해 때려 눕혀 주겠노라, 스스로 비장한 다짐을 했으나 차마 그러진 못했다. 어쩌면 너무 안일하게 생각했을지도 모른다고, 그렇게 생각했다. 물론 다시 만나자마자 있는 힘껏 주먹을 내질렀지만 그 이상은 하지 못했다. 마음 속 깊이 묻어둔 너를 향한 내 온갖 불평 불만과, 너를 원망하는 말을 꺼낼 수 있는 기회였음에도 하지 않았다. 아니, 하지 못했다.

 

에릭은 피할 수 있음에도 자신의 주먹을 피하지 않았다. 그건 분명히 알 수 있었다. 그정도 쯤, 가볍게 맞아주지 하는 오만이 보인 것 같아서 속이 한 번 더 끓었으나 그건 더 이상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마음 속 깊이 아끼고 아껴두었던 감정이 저도 모르게 미친듯이 새어나올까봐 온 몸이 떨렸다.

 

그리고 그것을 또 후회하게 됐다.

기회가 있을 때 해뒀어야 한다. 욕이든, 뭐든. 조금이라도 더 많은 시간을 에릭과의 대화로 보냈어야 했다. 미래에서 온 오래된 친구도 사라져버린 지금, 곁을 지켜주는 건 예나 지금이나 행크밖에 없었다. 하나뿐인 동생인 레이븐도, 소중한 친구도 없었다. 

 

찰스는 다시 약에 손을 대지 않았다. 여전히 그의 다리는 움직이지 않았지만, 다른 사람의 생각을 읽는 것은 눈 하나 깜빡이는 것 만큼 쉬웠다. 그는 소중한 생명들을 구하는 일을 다시 시작했다.

학교는 다시 세워졌고 즐거운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흘러 넘쳤다. 오랜 친구의 부탁도 잊지 않았다. 그가 소중하게 생각했을, 후에는 자신에게도 소중하게 될 제자들을 찾았다. 

 

그러나 여전히, 찰스의 마음 속은 텅 빈것 같이 공허하기만 했다. 

 

 

 

*

 

 

 

"교수님."

"왜?"

"그리우세요?"

 

허여멀건 하게 생긴 게 사람 귀찮게 하는 건 귀신같이. 찰스는 차마 내뱉지 못할 말을 속으로 곱씹었다. 슬쩍 올려다보며 눈치를 주는 것이, 그러는 너는? 이라는 질문을 담고 있었다. 행크는 옅게 웃으면서 대답했다.

 

"저는 그리운데요."

"솔직해서 좋네."

"교수님도 그렇게 해보시지 그래요."

 

행크는 가볍게 찰스의 휠체어를 밀었다. 산책을 하던 도중 행크를 먼저 돌려보내고는 석양으로 인해 붉게 물든 초저녁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가슴 한 구석이 누가 일부러 찌르는 것처럼 따가웠다. 아마 처음으로, 그가 자신에게 마음의 문을 연 곳이 이 자리일 것이다. 찰스는 묵묵히 속으로 온갖 험한 말과 욕을 되뇌었다. 정작 본인이 눈 앞에 있으면 하지도 못할 말들을, 가득.

 

"망할 놈, 나쁜 자식. 천하에 못된 놈. 적어도, 이 꼴을 냈으면.."

 

찰스는 끝내 말을 잇지 못했다. 그것은 순수한 찰스의 속마음이었으며, 간절하게 바라는 염원이었다. 그 본인 외에는 결코 그 어느 누구도 이루어 줄 수 없는, 그런 꿈. 

 

"그럼 어쩌라는 건가."

"......" 

"오랜만에 보러 왔더니 듣는 말이라곤 욕 밖에 없군, 찰스."

"...넌 좀 들어도 싸."

 

헛웃음이 나왔다. 곁에 다가오는 그의 발걸음 소리가 다 헛된 꿈인 것 같아서 꿈이라면 빨리 깨고싶다고 생각했다. 무릎 위로 묵직하게 올라오는 무게감에 찰스는 숨을 들이켰다. 깜짝 놀란 찰스는 얼른 그것을 집어 던졌고, 무겁게만 보였던 헬멧은 저 멀리 담을 넘어 날아가버렸다.

 

"에릭?"

"그걸 그렇게 던져버릴 줄은 몰랐는걸."

"놀랐잖아!"

"뭐, 자네 주려고 가져온 것은 맞네만."

 

찰스는 놀란 눈으로 에릭을 바라보았다. 정말로 오랜만에 본 에릭의 모습은, 그 옛날 정말로 하나밖에 없다고 생각했던 친구의 모습을 닮아있었다. 에릭은 천천히 찰스의 휠체어를 밀기 시작했다. 찰스는 언제 깨져버릴지 모르는 평화에 혼자서 숨죽여야만 했다. 물론, 그와 다시 이렇게 걸을 수 있다는 것은 오랫동안 염원하던 일이었지만 그것은 결코 이루어질 수 없기에, 염원이라고 한 것이다. 

 

"꿈이야?"

"꿈이었으면 좋겠나?"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드는데."

"꿈일지도 모르지."

 

정원을 빙 돌아 다시 둘이 만난 곳으로 돌아왔을 때, 에린은 천천히 담장에 기대섰다. 찰스는 아직도 이 상황을 어떻게 생각해야할지 갈피를 잡지 못한 상태였다. 갑작스럽게 다시 나타난 에릭과, 그의 마지막 방어구인 헬맷을 자신한테 준 에릭. 어디까지가 현실이고 어디까지가 꿈인지 분간해 낼 자신이 없었다. 그저 모든것이 현실이었으면 좋겠다고 바라고, 또 바랬다.

 

"이제 자네랑은 싸울 이유가 없을 것 같다고 생각했어."

"....."

"그럼 저 헬맷도 필요없을 테고, 내가 자네에게 부탁하고 싶은 것을 들어줄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

"부탁?"

"그래, 부탁이 있어. 두 가지. 하나는, 저 헬맷이 없어도 내 머릿속에 들어오지 말 것."

"에릭."

"물론 네가 그러지 않을 것이라는 걸 알아. 또 하나는."

 

에릭은 찰스의 손을 붙잡고 그와 눈을 맞추었다. 그리고 꽤나 오랜만에 보는 것 같은 옅은 미소를 지어보였다.

 

"네 곁에 있고 싶은데."

"...그게 내 허락이 있어야만 하는 일인가?"

"옛날엔 몰라도 지금은 그렇지. 그리고 무엇보다 그 어린 짐승은 네가 없으면 나 혼자 다루기가 벅차다고."

 

찰스는 순간 곤란해하는 행크의 얼굴이 눈에 선해서 웃음이 터져나왔다.

 

"내가 싫다고 하면 어쩌려고 그래?" 

"그럼 허락해 줄 때 까지 계속 부탁해보려고 그랬지."

"거짓말."

"너무 뻔했나?"

"그래. 넌 내가 그걸 거절하지 못할 것이라는 걸 아주 잘 알고 있겠지. 그러니까 네가 나쁜놈이라는 거야."

"네가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것이라고 확신했기 때문이지."

 

에릭은 가볍게 자신의 머리를 검지 손가락으로 두드렸고, 찰스는 그것이 지금은 그의 머릿속을 들여다봐도 괜찮다는 뜻임을 알았다. 진지한 에릭의 눈빛에 찰스는 결국 손쉽게 백기를 들며 항복선언을 했다. 그의 생각을 읽지 않아도 충분히, 그가 무슨말을 하고 싶은지 모를만큼 찰스는 어리숙하지 않았다. 

 

"그래, 맞아. 나도 너와 같은 생각이지."

"그럼 yes, 라고 알지."

"좋아, 그럼 나도 조건이 있어."

"뭐지?"

 

찰스는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에릭의 뺨에 올려놓았다. 차가운 그의 피부에 지금까지 간직하고 있던 찰스의 온기가 한꺼번에 빨려들어가는 느낌이 생생했다.

 

"다신 혼자서 멋대로 떠나지 말게. 벌써 쓸쓸한 건 참기 힘든 나이가 됐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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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06. 11



눈 앞에 놓인 먹잇감을 먹지도 못하고 하염없이 바라만 봐야 하는 정글의 맹수들의 기분이 이렇게 더러운 것이었다니. 오, 라이언. 나는 이제 그대를 이해할 수 있어. 그 생각을 불러 일으키는 장본인이 들었다면 되도 않는 소리를 지껄인다고 타박을 줄 만큼 한심한 생각을 하며, 임스는 말 그대로 임스에게 있어 '먹잇감'을 눈 앞에 두고도 손가락만 빨고 있었다. 


"well, 달링? 넌 날 너무 애타게 하는 것 같아."


임스의 말에 아서가 코웃음을 치며 임스를 바라보았다. 아서가 알고 있는건지 잘 몰랐다. 그의 그런 표정 하나, 하나가 임스를 더욱 애타게 만드는 데 치명적인 일조를 한다는 것을. 아마 그것을 모르고 하는 것이라면 그는 여우탈을 뒤집어 쓴 인간이었고, 그것을 알고 그러는 것이라면 그는 그냥 여우인 것이다.

아서는 천천히 재킷을 벗어 의자 위에 걸쳐놓았다. 깔끔한 블랙 정장안에 비친 회색 안감조차 그에게는 완벽하게 어울렸다. 조끼까지 벗어 재킷 위에 올려놨을 때는 이미 그 얼굴에 한 가득 미소가 흘러넘쳤다.


"정말 구제불능인 건 알고 있었지만, 넌 진짜 빌어먹게 구제불능이야."

"그게 내 매력이지."


몸에 딱 맞는 흰색 와이셔츠에 검은 정장바지, 분에 넘치게 화려한 것은 아니지만 적당히 눈길을 끄는 붉은 넥타이. 한달음에 달려나가 그의 구석구석을 제 입으로 맞추고 싶은 것을 먹잇감이라 하지 뭐라고 부르겠는가. 완벽하다. 지금의 아서는 임스에게 있어 더할 나위 없이 완벽했다.


"그래서, 언제 침대로 기어올거야? 굶주림이 지나치면 맹수가 아니더라도 사나워진다고."

"아니면 네가 내려오던가."

"오, 기꺼이."


얼른 침대에서 뛰쳐나간 임스는 말 그대로 아서를 안아 올렸다. 무겁지도 않은 모양인지 한번에 허리를 잡아 올리고는 방금전까지 그의 뒤에 있던 식탁에 그를 올려놓았다. 아서의 넥타이에 손가락을 끼워넣어 쑥 잡아당기는 손길은 급하면서도 급하지 않아 보였다. 충분히 즐길만큼의 여유는 가지고 있다는 뜻이었다. 아서는 임스의 그런 점이 마음에 들었다. 정말이지, 빌어먹게도 매력적이었다.


"달링, 혹시 검은색 셔츠도 있어?"

"음, 아마도?"

"그럼 다음엔 그걸 입어줘."

"또 무슨 상상을 하는 거야?"

"그건 그 때 보여주지."


한 없이 웃음 짓고 있는 임스의 얼굴에 아서는 굳이 그 생각이 무엇인지 듣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아서는 천천히 고개를 숙였고, 그에 답하듯 임스가 그의 입술을 얼른 훔쳐냈다. 천천히 셔츠의 단추를 푸르는 손길이 이상하게 간지러워 키스를 하고 있는 동안에도 끊임없이 웃음히 새어나왔다.

 

"네가 이렇게 웃는다는 걸 나만 안다는 게 제일 마음에 들어."

"내가 성격이 좋진 않지."

"난 네가 그걸 잘 알고 있다는 것도 마음에 들지. 우리 달링은 너무 겸손해서 탈이라니까. 그리고 지나치게 똑똑해."

"그건 너도 마찬가지야, 임스."

"그래서 내가 싫어?"

"그럼 너는 내가 싫다고 한 건가?"

 

그럴리가, 정색을 하며 자신을 쳐다보는 임스의 얼굴을 부드럽게 두 손으로 감싼 아서는 나른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럴 줄 알았어. 

 

"어머니께서 그러셨지. 막 살아도, 잡혀살진 말라고. 그런데 다 글러먹었군, 그래."

 

단추를 다 푸른 셔츠를 펼치자 드러난 아서의 맨 살에 입술을 묻으며, 임스는 웃음을 흘렸다. 까칠한 수염에, 적당히 뜨거워진 숨결에 아서의 허리가 잘게 떨렸다.


"그러니 날 붙잡은 만큼, 날 만족시켜줘, 달링."

"얼마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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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라는 것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단지 흥미가 없을 뿐, 이라고…… 우겼지만 그래, 안다. 그게 바로 사랑을 모르는 것이라는 걸. 그럼에도 리드는 자신이 인생을 살아가는데 있어 별 문제가 될 거라고는 전혀 의심조차 하지 않았다. 어렸을 때부터 사랑을 주는 거나 받는 것은 필요에 의해 이루어지는 일일 뿐, 딱히 무리하여 하지 않아도 되는 것쯤으로 치부하고 있었으니. 그런 것까지 일일이 신경 쓰기에 세상일은 너무나도 험하고 지치는 일투성이였다. 머리 아픈 일을 굳이 하나 더 늘릴 필요는 없지 않은가.

그런 리드에게 있어 그녀는 최초이자 아마도 마지막일 ‘사랑’이었다.

 

“다른 사람과 사랑하는 법을 알고 있기는 해요?”

 

그래서 상냥하게 웃어 보이는 그녀에게 차마 더 말을 붙일 수 없었다. 구구절절하게 당신만이 나에게는 사랑이었어요, 라고 나름의 로맨틱한 고백을 한 번 더 해볼 법도 하건만 이상하게 말이 나오지 않았다. 리드는 자신이 하고 있는 것이 분명 사랑이라 생각했고, 그렇게 여겨왔다. 그러나 그것을 대놓고 앞에서 부정하는 물음에 차마 대답을 할 수 없었던 탓이리라.

 

“당신은 나를 사랑하고 있는 게 아니라 나를 편하게 생각하고 있을 뿐이에요. 친구처럼, 직장동료처럼. 물론 그것도 사랑이에요. 사랑의 한 종류죠. 그렇지만 리드, 내가 당신에게 원하는 사랑은 달라요.”

“다르군요.

“네, 다르죠.”

 

그래, 그것은 그녀의 말이 백번 옳았다. 리드는 다른 사람을 그렇게 사랑하는 방법을 몰랐다. 더불어 사랑을 받는 방법도 몰랐다. 구태여 그것을 구걸하지도, 요청한 적도 없이 더욱 그랬다. 항상 감정보다 빠른 이성은 이럴 때도 빠르게 다시금 자리를 잡는다. 리드는 그 순간에서조차도 그녀에게 해야 할 마지막 말을 고민했다.

 

“나는 당신을 사랑했으니까 정말로 당신이 행복하길 바라요.”

“…저도 그래요, 라고 하면 안 되는 거겠죠?”

“안 될 이유는 없죠. 리드, 당신은 잘못하고 있는 게 아니니까요.”

 

리드는 그제야 비로소 자신이 그녀를 사랑할 수 있었던, 사랑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다시금 깨달았다.

 

“당신이 할 수 있는, 당신이 원하는 사랑을 할 수 있는 사람을 만나길 바랄게요.”

 

그녀와의 이별은 아쉽고도 슬프지만 그녀를 더 이상 붙잡아놓을 이유도, 재간도 없었다. 리드는 그렇게 첫 번째 사랑을 겪었다. 더욱 아쉬웠던 것은 그녀와의 이별이 진심으로 아쉽고 슬프게 느껴지는 것과는 별개로 그것이 빠르게 자신의 안에서 잊혀지고 사라질 것이라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리드는 자신에게 두 번째 사랑이 그렇게 빨리 찾아올 거라는 것은 전혀 상상도 못했다. 아마 그것은 그녀도 모르지 않았을까.

 

리드가 지향하고 있는 ‘사랑’의 방향은 남들에게는 ‘사랑’이라고 인식되기가 조금 어려운 정도였다. 다른 사람들과의 그 어떠한 관계보다도 더 편안함을 추구하는 게 리드의 사랑이었다. 남들에게 하기 어려운 이야기를 조금 더 관심 있게 들어줄 사람. 옆에 같이 서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의지가 되는 사람. 그런 사람을 더 찾으려 의식해서 그랬는지는 몰라도, 그가 자신에게 먼저 말해주기 전까지만 해도 리드는 그가 자신에게 있어 그런 사람인 줄 전혀 몰랐다.

 

“그런 관계는 사랑이 아닌 걸까요?”

“글쎄. 그건 그 사람이 어떻게 받아 들이냐에 따라 다르지 않겠어?”

 

홧김이었다. 그러나 그 행동은 그라면 자신이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 지 한 번에 알아줄 것이라는 강한 믿음이 밑바탕이 된 행동이었다.

 

“하치는 어떨 거 같아요?”

“사랑이라고 생각해.”

 

이 사건의 범인은 바로 그 혹은 그녀야, 라고 말하듯 평소의 그와 별반 다를 게 없는 태도와 목소리에 리드는 순간 찬물에 뒤집어 쓰인 듯 정신이 번쩍 들었다.

 

“어떡해요?”

“뭐가?”

 

당신을 사랑하게 될 것 같아요. 리드는 차마 거기까지는 말할 수 없어 그저 입을 일자로 꾹 다물 뿐이었다. 단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감정의 파도가 너무 거세게만 느껴졌다. 리드는 서둘러 하치의 사무실을 빠져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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