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 뭐라고?”

“못 들은 척 하는 거야, 아니면 정말로 못 들은 거야?”

“그야 당연히…….”


월리는 지금 자신이 꿈을 꾸고 있는 것은 아닌가에 대하여 조금 고민해볼 필요성을 느꼈다. 분명 그들이 있는 곳은 와치타워 한복판이었고, 다른 사람들도 있었다. 초기 멤버 일곱 명만 들어갈 수 있는 회의실이긴 했어도 분명한 것은.


“오늘 저녁에 시간 되냐고 물었는데.”


배트맨에게 데이트 신청을 받았다는 것이다.


*


사실 공식적으로 발표된 것은 아니었고 - 애초에 그럴 일이 있을 리가 만무했지만 - 알고 있는 사람도 극히 적은 편이었지만 배트맨과 플래시는 연인 사이이다. 어쨌든 이것은 명백한 사실이었다.

처음 고백을 한 것은 월리였다. 원래 ‘플래시’는 ‘배트맨’에게 동경 이상의 마음을 품고 있었을지도 모르는 노릇이었다. 그러던 것이 배트맨은 브루스 웨인이었다, 라는 사실을 접하게 되자 그것이 기폭제가 된 듯 자각하지도 못한 감정들을 하나 둘 헤아리며 꽤 허덕였었다.

브루스 웨인. 그 누가 그를 모르겠는가. 브루스가 배트맨인지 모르던 시절의 일이다. 월리는 그가 정말이지 다른 세상에 살고 있는 사람이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온갖 화려한 것에 파묻혀있음에도 제 빛을 잃어버리지 않는 당당한 사람. 사람들은 그를 아주 이름 높은 장인이 세공해놓은 다이아몬드라 칭찬했지만, 월리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누가 뭐래도 그는 원석 그 자체였다. 그의 세공은 다른 누군가가 해주는 것이 아닌 브루스, 그가 직접 자신을 깎아가며 보여주는 것이며 그랬기에 그 주위로 수많은 다른 보석들이 즐비해도 그 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것이라고. 월리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래서 그렇게 생각만 해왔을 뿐이었던 게 그가 자신이 생각했던 것처럼 원석 그 자체라는 것을 확인받았을 때는 마음이 벅차기까지 했다. 매끄럽게 깎아내린 면은 더없이 화려하고 반짝이는 브루스 웨인을, 거칠고 투박하게 깎여진 면은 어둠의 기사를. 월리는 딱히 그 어느 쪽이 브루스 웨인의 진정한 모습이다, 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양 쪽 모두가 브루스였고, 놀랍게도 월리는 모든 쪽을 다 좋아했다. 그저 배트맨이자 브루스 웨인이고, 브루스 웨인이자 배트맨인 한 남자를 좋아했다.


이제 와서 말하는 거지만 월리가 브루스에게 고백하기까지 무려 3주라는 시간이 걸렸는데, 사실 이 고백도 정말 홧김에 해버린 거라 그 때 일만 생각하면 월리는 본의 아니게 조금 창피해졌다. 우연히 다이애나와 존과 다른 몇몇 리그원들과 함께 한가롭게 와치타워에서 TV를 보고 있을 때의 일이었다. TV에서는 브루스 웨인이 나왔고, 이야기의 주제는 자연스럽게 브루스 웨인으로 흘러갔다.

배트맨이 브루스 웨인이라는 걸 알고 있는 다이애나나 존, 월리는 입을 여는 것보다는 다무는 것이 현명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나 다른 리그원들은 그가 배트맨이라는 걸 몰랐으니 자기들이 알고 있는 사실을 하나 둘 꺼내기 시작했다. 브루스 웨인을 직접 본 적이 있다는 얘기서부터 들은 얘기들까지 하나 둘 풀어놓던 와중 사건은 누군가가 ‘배트맨이랑 브루스 웨인이 혹시 연인은 아니더라도 그에 가까운 사이가 아닌가!’ 라는 의혹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월리는 차마 웃을 수 없었다. 마치 연예계의 찌라시와 같은 뜬구름 없는 소문들이 하나 둘 퍼져나가며 점차 이야기의 수위가 높아지기 시작하더니 곧 브루스 웨인은 고담의 황태자지만 부모가 물려준 자산에 기대어 사는 유흥가의 탕아일 뿐이라는 결론이 지어지고 있을 때였다. 이미 다이애나의 표정은 험악해졌다고 해도 무방했지만 쉽게 나설 수는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왜 브루스 웨인이 그런 소문에 휩싸이는가 하면, 브루스 그 스스로가 그렇게 자신을 포장하기 때문이었다. 철저하게 배트맨과 브루스 웨인을 분리시키기 위해 스스로 방탕한 재벌집 도련님 이미지로 위장하는 브루스의 노력을 헛되게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가만히 있으라는 법은 없지 않은가.


“그렇다고 해서 모르는 사람을 함부로 욕해도 되는 건 아니야.”

“…네?”

“난 그런 사람들이 나와 같은 편에 속해있다는 사실이 별로 기분 좋지 않은 걸.”


평소 월리의 성격과 태도를 생각하면 이번 사건은 굉장히 유별날 정도로 그 답지 않았다는 것을 월리 스스로도 인정하지만, 분명한 것은 다이애나가 그랬다면 문제가 커졌을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렇다면 틀림없이 그의 귀에도 직접 이야기가 들어갔을 것이고.


“지금 뭐하는 거지?”


…라는 사태가 일어날 것임이 분명했다.


“플래시, 잠깐 따라오도록.”


월리는 자신이 왜 초등학교에서 혼나는 어린 아이의 심정이 되어야만 하는지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꾸중을 듣는다고 할까, 아무튼, 어쨌든. 그러나 회의실로 들어선 순간, 월리는 공기가 바뀌었음을 본능적으로 알았다. 브루스, 배트맨의 분위기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유했으니 말이다.


“배츠, 나는…….”

“알아.”

“응?”

“너는 내가 일부러 멍청한 재벌집 도련님 연기를 해야만 한다는 걸 알면서도 다른 사람이 그걸 욕하는 게 싫은 거지.”

“…그렇지.”

“너같이 나를 있는 그대로 봐주는 사람이 있으니까 그 짓 하는 것도 생각보다 나쁘지는 않아. 그래도 거기서 더 있었다가는 이상한 소문이 돌았을 거야. 네가 개인적으로 브루스 웨인과 친분이 있다던가……. 듣고 있나, 플래시?”

“있잖아, 브루스.”

“…….”

“나 역시 네가 좋아.”


정말이지 뜬금없는 고백이었지만 너무나도 월리다움을, 브루스는 알고 있었다.


“나는 별로 연애하기 좋은 타입은 아닌데.”

“음, 역시 이런 점까지 좋네.”


그리고 그렇게, 연인이 되었다.


*


“솔직히 너무 무리하는 거 아니야? 라고 물어야 할 타이밍이긴 한데 별로 무리하는 것 같지도 않고 당연해보여서 놀랍다.”

“흠.”


통째로 빌린 고급 레스토랑의 가장 전망이 좋아 보이는 자리에 앉아 고담의 야경을 한 눈에 내려다보며, 월리는 열다섯 번째 접시의 스테이크를 말끔히 해치웠다.


“그래도 역시 알프레드가 만들어준 쿠키가 제일 맛있는걸.”

“알프레드에게 쿠키를 서른 판이나 구워달라고 할 수는 없잖아.”

“하긴 그건 그래.”


특수한 능력을 가진 탓에 정말 어마어마한 칼로리를 섭취해야만 버틸 수 있는 월리에게 알프레드 수제 쿠키란, 서른 판을 먹어도 사실 모자라긴 했다.

둘만의 시간을 보내게 된 건 상당히 오래간만이었고, 나름 힘을 주고 왔다는 티가 팍팍 나는 월리를 보며 브루스는 웃었다. 솔직히 말해서 비웃음 - 연인 사이에도 비웃음, 이라는 게 존재하는 지는 의문이다. - 당한 것 같았지만 그마저도 기분이 썩 나쁘지 않은 걸 보니 데이트의 효과란 실로 대단했다.

텅 비어있는 레스토랑의 분위기는 좋으면서도 영 적응이 되지 않았다. 굳이 평범하게 식당을 예약하는 것이 아닌, 통째로 건물을 빌리는 곳에 약속을 잡는 것은 월리를 위한 배려였다. 브루스의 이미지야 이미 입소문을 탈대로 타서 썩 더 나빠질 것도 없었지만 월리는 달랐다.


“상관없지 않을까?”

“갑자기 무슨 말이야?”

“브루스 웨인의 애인이 월리 웨스트라는 걸 온 세상이 알아도 상관없지 않을까, 해서.”

“글쎄.”

“별로 상관없는 이야기는 아닌 것 같네. 있지, 브루스. 난 배츠인 너도 좋고, 브루스 웨인인 너도 좋아. 그러니까 난 정말로 상관없어. 사실 차라리 알아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때도 많다고. 누구씨 말처럼 별로 연애하기에 좋은 타입은 아니니까.”

“그래?”

“농담이야. 그런 거 거짓말일게 당연하잖아.”


브루스는 아무렇지 않은 표정을 지어보였지만, 아무렇지 않지 않다는 걸 월리는 알고 있었다. 딱히 정말로 불만이 있어서 그런 말을 한 건 아닌데. 월리는 와인 잔을 내려놓았다.


“그게 그런 뜻이 아니라…….”

“나는 별로 좋은 생각이 아니라고 생각해.”

“응, 알았어.”

“만약 그랬다가 천하의 브루스 웨인을 꼬신 남자가 대체 얼마나 대단한 남자기에, 하면서 달려들 사람들이 싫어서.”

“…어?”

“월리 웨스트. 너만 나를 좋아하는 게 아니야.”


우와, 처음 들었다. 옛날에도 한 번 이런 적 있었는데. 온 세상이 빠르게, 빠르게 지나가서 여기가 어딘지 도통 모르겠던 그런 적이. 월리는 혹시 자기가 무의식중에 온 몸을 떨고 있지는 않을까 새삼 염려했다. 브루스는 배트맨이지만, 이런 고층 레스토랑의 창문이 다 깨져버리면 분명 다칠 테니까.


“내 어디가 좋아?”

“다 말해주기에는 오늘 밤이 부족할 텐데.”

“그런 건 누구한테 배웠어?”

“세상이 가르쳐줬지.”

“치사해.”

“왜?”

“나도 배울래.”

“안 돼. 너는 너 자체로, 월리 웨스트라서 좋은 거니까.”

“아, 진짜 치사해.”


월리는 점점 비워져가는 브루스의 와인 잔을 바라보며 열여섯 번째 스테이크 접시를 빤히 바라보았다.

큰일 났어. 정말, 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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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사랑은 아니었다. 그랬으면 좋았겠지만 사실 그럴 수는 없었다. 이미 그와 처음으로 만났을 때 자신의 나이는 삼십을 넘겼고, 그도 그와 비슷했다. 기껏해야 한두 살 정도의 차이였을 뿐이었다. 자신의 첫 번째 사랑은 누가 봐도 로이스였지만, 그의 첫 번째 사랑은 누구인지 아무도 몰랐다. 있기는 했을까, 하는 물음이 없던 것도 아니었지만 언젠가 그가 속삭여준 말은 틀림없는 사랑의 속삭임이었다.

어쩌면 그의 첫 번째 사랑이 자신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그러면 얼마나 좋을까. 자신의 첫 번째 사랑은 타인이었으면서 그에게 그의 첫 번째 사랑이 자신이길 바라는 건 이기적이라고 생각하였으나, 그는 자신을 그렇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이 세상에 유일한 존재였다. 이성을 잃어버린 자신을 잠재울 수 있는 이는 그 말고도 몇 있었지만, 이성을 잃어버리게 하는 존재는 그 하나뿐이었다.

그는, 브루스 웨인은 클락 켄트에게 그런 존재였다. ‘조절’, ‘인내심’, ‘자제심그것들은 클락이 이 세상의 그 누구보다 자신있어했던 것의 이름이었다. 그렇지 않았으면 금방이라도 클락은 그들의 세계에서 쫓겨났을 것이고, 그 어떠한 곳에도 발을 붙이지 못했을 것이리라.

우스운 이야기였지만 그랬기에, 클락에게 있어 순위를 매기고자 하면 브루스가 첫 번째였다. 물론 브루스에게는 비밀이었다. 그의 애인이 되기 위한 제 1 조건이 그것이었다. 절대로 이 세계보다 브루스 웨인을 먼저 생각하지 말 것. 클락은 그러겠노라 했지만 그리 하지 않았다는 것을 아마 브루스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아니, 그는 알고 있었다. 아무렴. 이제껏 제일 많이 싸우게 된 원인이 그것이었으니 말이다. 그래도 클락은 할 수 있는 만큼 그러려고 무던히도 노력했다. 그것을 알아주기 바란다는 자신의 말에 브루스가 고개를 끄덕였으니 말이다.


브루스가 원래부터 무턱대고 막무가내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그는 뛰어난 탐정이었고, 훌륭한 지략가였지만 동시에 무모했다. 좋게 말하면 용기가 가상하다고 할 수 있었지만 클락의 눈에는 늘 불구덩이로 뛰어드는 나방 꼴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랬기에 그가 더욱 매력적이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이제 와서 하는 이야기지만 클락에게 브루스가 매력적이지 않아 보일 때가 손에 꼽을 수 있을 만큼 적었을 것이다.


그에게는 적이 너무 많았다. 많아도 너무 많았다. 배트맨일 때야 고담의 모든 빌런이 그의 적이었고 나아가 외계의 잠재적인 위협도 적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브루스 웨인일 때도 적이 많았다. 어떻게 해서든 그의 명성에 흠집을 하나라도 더 내보려고 아등바등 애를 쓰는 구더기들이 득실거리는 것은 물론이요, ‘웨인의 힘을 점점 더 견제하기 시작한 세상의 시선도 그랬다. 클락은 그 모든 것이 너무나도 부조리하다고 생각했다. 그가 배트맨이어서, 라는 이유도 물론 있었으나 어찌하여 웨인에게 이리도 세상이 쓴 시선을 보이는가에 대해서.


그래서 브루스 웨인의 가슴을 꿰뚫은 총알이, 고작 그 작은 쇳덩이 하나가.


브루스는 그렇게 죽어서는 안 됐다. 웨인 엔터프라이즈의 사업이 번창하는 것을 축복하기 위한 파티장에서 그렇게 허무하게 죽어서는 안 되었다.

언젠가 브루스는 자신에게 자신의 꿈, 정확히는 악몽에 대해 말해준 적이 있었다.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웨인에게 일어난 비극을 알고 있었다. 불행하게도 브루스 또한 그 운명의 굴레를 벗어날 수 없었던 모양이었다. 토마스 웨인이 사망했던 때와 똑같이 허술하기 짝이 없는 권총 한 자루 때문에, 그 탓에.


제발, 브루스. 제발…….”


이 세상의 그 누구보다 그의 비명소리가 가장 크고 가장 처절했으리라. 브루스의 생명이 사라지는 1, 1초가 절망의 연속이었다. 그 이전에도 이러했던 순간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으나 그럴 때마다 반드시 브루스는, 배트맨은 다시 돌아올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기에. 그랬기에 괜찮았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그럴 수 없을 것이다. 클락은 인정할 수 없었다. 인정하기 싫었다.


브루스는 천천히 손을 들어 올려 클락의, 슈퍼맨의 눈을 손바닥으로 가려주었다. 슈퍼맨은 함부로 다른 사람에게 눈물을 보여서는 안 되었고, 브루스가 배트맨이라는 사실은 그가 죽는 그 순간까지도 함구해야만 하는 사실이었다. 그를 위해서도, 그의 아이들을 위해서도.

슈퍼맨이 다시 눈을 떴을 때, 그의 하늘은 이미 저물어있었다.

 

브루스를 죽인 남자는 그 자리에서 고든에게 검거되어 경찰서로 연행되었다. 그 모든 일련의 과정을 슈퍼맨은, 클락은 그저 바라만 보고 있었다. 바라만 볼 수밖에 없었다. 그 속은 이미 문드러져 썩어가고 있음이 분명했지만 그럴 수밖에 없었다.

 

미워하지 마. 나도, 그 누구도.

 

브루스의 마지막 부탁을 차마 어길 수 없었기에.

 

 

*

 

 

붉은 망토의 영웅이 자취를 감추었다.

 

브루스 웨인의 장례식은 그리 성대하게 치러지지는 못했다. 브루스 웨인은 죽었지만, 배트맨은 죽지 않았다. 그의 첫 번째 아들이 그 이름을 물려받았다. 슈퍼맨은 브루스 웨인의 장례식에 클락 켄트로 나타났다. 언젠가 브루스가 선물이라고 가져다주었던 고급 브랜드의 검은 정장을 입고, 남들이 보기에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두꺼운 렌즈의 안경을 끼고. 붉은 망토는 찾아볼 수 없었다. 그 이후로 영원히.

알프레드는 클락이 브루스의 관에 자신의 망토를 같이 묻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의 주인이 그것을 원할 리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말리지 못했다.

 

어느 누군가는 그렇게 예상했었다. 배트맨을 잃어버린 슈퍼맨이 미쳐 날뛸 것이라고. 그러나 슈퍼맨은 미쳐 날뛰지 않았다. 단지 그 이름을 버렸을 뿐. 애석하게도 클락은 자신이 발을 딛고 서 있는 그들의 세계가 너무나도 미웠지만, 너무나도 사랑스러웠다. 지금 와서 돌이켜보니, 이 세계를 자신보다 더욱 더 많이 사랑한 것은 브루스였다. 그랬기에 클락은 브루스가 사랑한 그 세계를 함부로 부술 수 없었다.

미워하지만 사랑했고, 부술 수 없지만 지킬 수도 없었다. 그랬기에 클락은 슈퍼맨의 이름을 버렸다. 딱히 정체를 숨기려는 노력도 하지 않았다. 클락은 수트를 입지도 않은 채로 허공을 날아다니며 태양빛에 몸을 맡겼지만 채워지지 않는 허무함이 금방이라도 자신의 모든 것을 집어삼킬 것 같았다.

 

클락은 브루스와 함께했던 시간을 되새겼다. 금방이라도 잔뜩 찌푸린 표정으로 목소리만큼은 다정하게 그 멍청한 안경 좀 벗고 이리 좀 와보라고 속삭여줄 것만 같았다. 브루스가 죽은 뒤, 그 뒤를 따라가려는 생각을 아예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할 수 없었다. 영특한 그의 아들들이 브루스가 가지고 있던 크립토나이트를 전부 숨겨버렸으니 할 수 없었다.

먹지 않아도, 숨을 쉬지 않아도 살 수 있는 몸이 원망스러웠다. 영원한 불로불사의 몸은 아니었지만 훨씬 더 길고 오랜 세월을 살 수는 있었다.

 

할 말이 있어.”

 

기실 이 시점에서 클락이 제일 보기 어려웠던 이들 중 하나가 바로 데미안이었다. 그러나 그러면 그럴수록 데미안은 끈질기게 클락을 불러 세웠고 망토가 없다는 것을 깨달을 때마다 클락의 체크무늬 셔츠를 잡아 당겼다. 클락은 데미안과 대화를 나누는 것이 불편한 것은 아니었다. 두려웠고, 무서웠다. ‘슈퍼맨이었던남자를 두렵게 만들 수 있는 존재, . 지금으로서는 데미안이 유일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데미, 아니, 로빈, 나는…….”

따라와, 이 겁쟁이.”

 

어쩐지, 브루스가 말하는 것 같은 걸. 클락은 반쯤 울상을 지으며 얌전히 데미안에게 끌려갔다. 사실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도망칠 수 있었고, 영원히 데미안과 마주칠 수 없을 수도 있었겠지만 그러지 못한 것은 순전히 데미안이 브루스의 아들이기 때문이었다.

데미안을 따라 간 곳은 배트맨의 케이브였다. 클락이 제일 발걸음하기 꺼려했던 장소. 브루스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추억의 장소. 입구에서 멍청하게 서 있는 클락을 내버려두고 데미안은 익숙하게 컴퓨터를 조종했다. 몇 번의 잠금 화면을 차례대로 푼 데미안은 무수히 많은 자료를 모니터에 띄우며 말했다.

 

내가 죽었을 때, 아버지가 했던 방법이래.”

 

이거 녹화되고 있는 거야?

글쎄.

하하, 그럼 기념으로 말해볼까. 브루스, …….

끌 거야.

 

브루스!

도대체 몇 번을 말해야 해? 이 모습일 때는 그 이름으로 부르지 말라니까.

 

사람이 왜 이렇게 무모해! 그러다가, 그러다가 잘못되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럴 일은 없었을 거야.

어떻게 그렇게 확신하는데?

네가 그렇게 내버려두지 않을 거잖아.

…….

그렇지?

너 정말 못됐다…….

 

, 아아.

뭐하고 계세요?

……아무것도.

 

클락.

 

사랑해.

, 말했다!

…….

이번 내기는 내가 이겼어! 돈 내놔, .

 

극복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거 알아. 그렇다고 외면하는 것만이 답은 아니잖아. 그렇지, 보이스카웃?”

 

화면 가득 넘쳐흐르는 사랑하는 이의 얼굴을 보며 클락은 그저 말없이 그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클락은 웃고 울었다. 우스꽝스러운 얼굴을 하고는.

 

*

 

붉은 망토의 영웅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는 더 이상 붉은 망토를 두르지 않았다.

그는, 슈퍼맨은 메트로폴리스의 수호신이며 고담의 기사였다.

 

검은 망토가 물결치듯 춤을 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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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티넬버스 AU



이 세상에 존재하는 센티넬과 가이드의 존재는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다. 어차피 이 세상에는 센티넬과 가이드라는 특이한 존재가 아니더라도 기이하고 신비한 능력을 부릴 수 있는 존재는 차고 넘쳤기에 그다지 조명을 받지 못했던 것도 사실일 것이다. 그래서 슈퍼맨이 센티넬이라는 것은 누구나 한번쯤은 ‘슈퍼맨이 심지어 센티넬이란 말이야?’ 라는 말을 하고 넘어갈 수밖에 없는 특이사항이었다. 우주 최강의 사내이자 유일한 크립토니안인 그가 센티넬이라니, 와 비슷한 느낌으로. 그리고 그것과 항상 세트로 붙어 다니는 말이 있었는데 ‘배트맨이 가이드란 말이야?’ 가 있었다.

슈퍼맨이 센티넬이라는 사실은 그가 평소에 하고 다니는 것을 보면 너무나도 뻔히 보이는 사실이었으나, 배트맨이 가이드라는 사실은 그가 직접 입 밖으로 꺼내지 않는 이상은 아무도 모를 일이었다. 저스티스 리그에 속해있는 히어로 중 센티넬의 수는 극히 적었는데, 슈퍼맨을 제외하고는 플래시가 유일했다. 센티넬의 수가 적은만큼 가이드의 수가 적은 것은 당연했다. 배트맨이 의도치 않게 가이드인 사실이 밝혀진 것은 - 어쩌면 너무나도 당연하게도 - 슈퍼맨 때문이었다.

수상한 레이저가 정확하게 슈퍼맨에게 쏘아졌고, 막상 레이저를 맞은 뒤에는 더욱 강해진 힘에 펄펄 날아다니던 슈퍼맨이었지만 5분도 지나지 않아 주체할 수 없이 폭발적으로 넘쳐흐르는 힘에 대지가 흔들렸다.


“하하하, 그래! 그거야! 정의의 편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 ‘그’ 슈퍼맨의 손에 직접 이 세계가 박살이 나는 거지!”


가까이 다가갈 수조차 없을 정도로 강력한 힘에 하나 둘 무릎을 꺾여갈 쯤, 어떻게 해서든 슈퍼맨의 힘을 억제한 것은 다름 아닌 원더우먼이었고,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그의 곁으로 뛰어든 배트맨의 모습에 누군가는 숨을 삼켰다. 올가미에 묶여 다가오지 말라고 소리치는 슈퍼맨의 얼굴은 자신에게 다가오는 배트맨의 모습에 더욱 일그러졌고, 히트비전을 어떻게든 억누르느라 실핏줄이 터져 덕지덕지 붉어져버린 흰자위가 흉흉하게 배트맨을 바라보았다. 놀라운 것은 슈퍼맨에게 가까이 다가가는 그 순간까지도 배트맨의 무릎은 멀쩡하다는 것이었고, 조심스럽게 슈퍼맨의 어깨에 팔을 뻗어 손을 올린 순간 울렁거리던 대지가 멈추고 칼같이 불던 바람이 멎었다.


“괜찮나, 클락?”


슈퍼맨, 클락은 굉장히 당황스러운 얼굴로 주먹을 쥐었다 펴기를 반복하며 눈을 깜빡였다.


“안 돼, 이럴 수는 없어!”


그의 계획은 완벽했고, 아마 그가 의도한대로 슈퍼맨의 손에 의해 세계가 파괴되었을 테지만 그가 간과한 것은 슈퍼맨의 주위에 슈퍼맨과 딱 맞는 가이드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이었다.



*



원래부터 배트맨은 이상하게 타인의 시선을 끄는 재주가 있었다. 존재감이라고 해야 할까, 무언가의 아우라 같은 그런 것이 있었다. 원래부터도 그랬는데 그것이 슈퍼맨을 진정시킨 가이드, 라는 수식이 더 붙어 엄청난 수준이 되자 오히려 당황한 것은 슈퍼맨이었다.

그 일이 있은 후 슈퍼맨은 이상할 정도로 배트맨의 눈치를 봤다. 혹 자신 때문에 배트맨이 더욱 곤란해진 상황이 된 것은 아닌가, 더 나아가 만약 이런 상황이 또 벌어진다면, 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이 머릿속에 가득했다. 그나마 슈퍼맨을 조금 기분 좋게 해주던 것은 배트맨의 가이드를 받았던 그 순간의 감각이 너무나도 선명하게 남아있다는 것이었다.


힘이 주체할 수 없이 폭주했던 그 순간은 마치 끝이 없는 낭떠러지에 떨어지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클락은 본능적으로 자신의 힘을 억누르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지 않으면 책상을 짚고 일어나는 것만으로도 책상이 박살나는 것은 물론이요, 누군가와 악수를 할 때 자신도 모르는 사이의 그 사람의 손뼈를 다 으스러트릴 수 있기 때문에. 그 때, 그 순간 배트맨이 자신에게 해주었던 것은 단순히 힘을 억누르고 제어할 수 있게 한 것뿐만이 아니라 가야할 길을 비춰준 것이었다. 본능적으로 힘을 억누를 필요 없이 순수하게 그냥 있는 그대로 존재할 수 있게 해주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느껴보는 감각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너무나 기분이 좋아서.


그 단 한 번의 접촉으로 바로 각인이 될 줄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결과였다.



*



사실 브루스는 자신이 클락과 각인이 되어버렸다는 사실을 일찍부터 알고 있었다. 단지 브루스 스스로가 그 결과에 대해 몹시 당황스러워하는 중이었고, 차마 클락을 더 챙겨줄 만한 여유가 없었기 때문에 어쩌다보니 클락이 자신의 눈치를 보는 상황에까지 와버린 것이다. 단 한 번의 접촉만으로도 각인이 되어버린 센티넬과 가이드, 라. 보통의 사람들이라면 그럴 수 있다지만 그것도 하필 슈퍼맨과 배트맨이라면 조금 신중해질 필요가 있었다.

눈을 감고 조금만 집중하면 클락의 심장소리가 들리는 경험은 신기하지만 불쾌함을 동반하기도 했다. 단순히 클락의 존재가 불쾌했기 때문이 아니라, 앞으로의 일에 대한 노파심과 조바심, 혹은 걱정 때문이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아직 클락은 자신과 확실하게 각인이 되었다는 사실을 모르는 듯 했다. 그렇다고 해서 앞으로 영원히 이 사실을 숨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아무리 클락이 자신의 힘을 제어하는 데 도가 텄다고 해도 센티넬에게는 필연적으로 가이드가 필요했다.

단 한 사람의 센티넬만을 위한 가이드. 브루스 웨인은 로맨티스트라고 할 수도 있었지만 쓸데없는 것에 감상에 젖을 만큼의 여유가 있는 남자는 아니었다. 특히나 그가 배트맨일 때는 더욱 그랬다. 브루스는 문득 모니터에 표시되어있는 날짜와 시간을 확인했다. 이렇게나 시간이 지났으면, 찾아올 법도 하건만. 클락이 브루스에게 첫 번째 가이드를 받은 이후로 열흘의 시간이 지났다. 클락의 심장소리는 들을 수 있었지만 아직까지 클락의 기분을 직접적으로 느낄 수 있다거나 하는 것은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자신이 클락과 한 것은 가벼운 접촉 한 번뿐이었고, 행여 그 단 한번만으로 각인이 되었다 한들 그 이상의 감각적, 감정적 공유는 없었기에. 그렇다고 이 이상 케이브에 가만히 앉아 있기만 하는 것은 클락에게 퍽 못할 짓이기도 했다.



*



“배츠! 오랜만이야.”

“그래, 오랜만이군.”


쏜살같이 달려온 플래시를 보며 배트맨이 넌지시 물었다.


“슈퍼맨은?”

“요새 슈퍼맨이 좀 이상하다니까.”

“이상하다고?”

“그래. 답지 않게 어깨가 축 쳐져있질 않나. 갑자기 벌떡 일어나다가 의자를 박살내지 않나.”

“…….”

“갑자기 아무런 일도 없는데 우주를 쌩쌩 돌아다니면서 날아다니지를 않나. 하여튼 요새 좀 이상… 아, 슈퍼맨!”


플래시 못지않은 속도로 쏜살같이 달려온 슈퍼맨 덕에 바람이 일자 배트맨의 망토가 펄럭였다. 무어라 더 말을 붙이기도 전에 재빨리 배트맨의 팔목을 낚아채 벽으로 밀어붙이는 슈퍼맨을 보며 플래시는 네가 그렇게 사람을 막 휘둘러대면 큰일 나! 라며 경악에 차 소리를 질렀고, 곧 불길한 소리가 나며 배트맨의 얼굴이 와락 구겨졌다. 슈퍼맨의 상태는 그 날과 별반 다를 것이 없어보였지만 그나마 다행인 것은 모든 것을 다 가루로 만들어버릴 만큼의 힘을 쏟아내고 있지는 않는다는 것이었다. 서둘러 플래시가 슈퍼맨의 팔에 매달려 그 팔을 떼어내려 노력했으나 소용없었다.

그러나 플래시도, 심지어 배트맨도 슈퍼맨이 지금 어마어마한 인내심을 발휘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기에 쉽게 다른 사람들도 부르지 못하고 지금 이 선에서 일을 마무리하기를 원했다.


“클락.”


배트맨은 천천히 그의 이름을 부르며 다른 팔로 그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이미 부러진 왼쪽 팔이 끊어질 듯 아팠지만 배트맨의 목소리에 떨림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강하고, 단호하게. 슈퍼맨의 이름을 부른 배트맨은 더욱 세게 끌어안으며 말했다.


“미안하군.”


그렇다고 이렇게 자네를 내버려둬서는 안 됐어. 길고 긴 숨이 이어지며 금방 고른 숨을 되찾은 슈퍼맨은 가만히 배트맨의 어깨에 이마를 묻었다.


“미안, 미안해. 브루스.”



*



배트맨은 왼쪽 팔이 부러지는 부상을 입었고, 슈퍼맨은 요새에 처박혔다. 그곳에 찾아가는 것은 브루스에게도 힘든 일이라 – 그것도 왼쪽 팔이 부러진 상태로는 더더욱 – 특단의 조치를 쓰기로 했다. 케이브에 가만히 선 브루스는 그저 속삭였다.


“당장 이리로 날아오지 않으면.”

“그것만은 참아줘.”

“…….”

“…….”

“내가 뭘 말할 줄 알기는 하나?”

“내가 상상할 수 있는 그 어떤 최악의 말로도 설명을 못하겠는걸.”


여전히 슈퍼맨의 얼굴이라고 하기보다는 클락 켄트의 얼굴에 가까운 모습에는 먹구름이 가득했고, 브루스는 그 모습이 퍽 웃겼다. 대체 언제부터 슈퍼맨이 배트맨의 눈치를 보며 살았나. 클락의 시선은 여전히 깁스를 하고 있는 브루스의 팔에 콕 박혀 있었다.


“일단 내 팔이 이렇게 된 건 자네 탓이 아니라 내 탓이니 제발 눈치 좀 그만 봐.”

“자네 탓이라니? 브루스, 나는…….”

“내 말을 먼저 가로채지도 말고 사람이 하는 말은 끝까지 들어.”

“미, 미안. 그런데 이건 내가 먼저 말해야겠어.”


브루스는 클락의 심장이 조용히, 그러나 세차게 뛰고 있음을 느꼈다. 어쩐지 처음 접촉을 했을 때 보다 더욱 진하게 느껴지는 감각에 브루스는 설마하니 자신의 심장도 마주 뛰고 있지 않을까, 하는 쓸데없는 걱정을 했다. 분위기에 휩싸인다는 말이 있지 않은가. 딱 그 꼴이었다.


“그래, 말해봐.”

“내가, 자네를 책임질 수 있게 해줘.”

“…….”


정말, 전혀 예상치도 못한 말에 브루스는 혹시 그 때의 충격으로 인해 클락이 머리를 어디에 세게 부딪힌 것은 아닌가, 지금 눈앞에 있는 남자가 ‘세계 최강의 남자’ 라는 수식어를 달고 있는 사람이 맞는가에 대해 잠시 고민해 볼 필요가 있었다.


“그건 내가 해야 하는 말 아닌가?”

“내 가이드는 내가 책임져야지.”

“자네가 날 책임져?”


어느 샌가 배트맨의 모습은 어디에 버려두고 브루스 웨인의 얼굴을 한 남자를 눈앞에 두고 클락은 등 뒤로 식은땀이 흐르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기자 월급에, 머리부터 발끝까지 검소함을 두른 ‘클락 켄트’가 ‘브루스 웨인’을?”

“……음, 그건.”

“고작 며칠 얼굴 못 봤다고 자기 가이드 팔을 부러트리는 센티넬이?”

“…….”

“이제 다시 한 번 말해보겠나?”


그제야 클락은 다시금 깨달았다.


“나 좀 책임져 주게, 브루스.”

“좋아.”


죽었다 깨어나도 ‘클락 켄트’는, ‘브루스 웨인’을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센티넬과 가이드, 라는 관계 그 이전에도.

글쎄, 혹 슈퍼맨과 배트맨이라면 또 모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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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클락은 자신의 뒤 쪽에 따라붙는 끈질긴 시선에 진땀을 뺀 적이 한 두 번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 시선은 묘하게 집요하면서도 악의적이지는 않았지만, 아주 가끔은 눈에 띄게 살기를 띄고 있을 만큼 무시무시했고 어느 날은 너무나도 담백하다 못해 바짝바짝 피가 마르는 기분에 빠져들게도 만들었다. 클락은 그 시선의 주인공이 브루스라는 것을 거의 확신했다. 아니, 브루스가 맞을 것이다. 차마 정말로 그 시선의 주인공이 브루스라는 사실을 두 눈으로 확인하기가 두려워, 두려워…?


“…….”


그래, 그것은 명백한 두려움이었다. 아니, 아닌가. 아, 모르겠다. 툭, 하고 터져 나온 한숨에 다이애나가 무슨 걱정거리라도 있는 것은 아니냐는 물음을 던졌지만 클락은 차마 대답할 수 없었다. 연인의 시선이 신경 쓰여 밤잠을 설친다는 이야기를 한다면 분명 두고두고 놀림 받을 것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기에.







어느 샌가부터 브루스의 손에 작은 수첩이 들려 있다는 것을 클락은 물론이요, 워치타워의 모두가 알고 있었다. 그러나 대놓고 브루스에게 그것이 무어냐고 묻기에는 안타깝게도 그리 용감한 사람은 없었다. 아무렴, 상대는 그 브루스 웨인이었고, 배트맨이었다. 그가 허투루 하는 일은 아무것도 없을 것이라는 근거 없는 믿음은 그들 모두에게 존재했다.

수첩의 크기는 앙증맞은 것처럼 보이면서도 생각 외로 적당했다. 딱 그의 양복 주머니에 쏙 들어갈 것 같은 크기의 수첩이 유선이 아닌 무선 노트라는 것까지는 알아내는 데 성공했다. 이쯤 되면 그의 연인이라는 타이틀을 거머쥔 슈퍼맨이자 동시에 데일리 플래닛의 ‘기자’ 클락 켄트는 한 번 쯤은 브루스에게 물어볼 법도 했다. 그게 무엇이냐고. 클락이 그러지 못했던 것은 언젠가 수첩을 펼쳐보던 브루스의 얼굴에 희미하게 걸쳐진 미소 때문이었다. 솔직히 말해서 그 때 봤던 그의 표정은 클락에게 꽤나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런 표정을, 언제 봤더라. 브루스의 이름으로 예약된 고급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다가 자신이 실없는 농담을 던졌을 때? 아니, 아마 그 때도 웃는 것보다는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표정을 구긴 적이 더 많지 않을까. 그러다보니 그것이 무엇이냐고 물을 만한 타이밍을 놓쳤고, 이제껏 의문은 의문으로만 남아있었다.

브루스는 항상 수첩을 들고 다녔지만 모두의 앞에서 그 수첩을 펼쳐본 적은 없었다. 자, 그럼 여기서 또 문제. 투시 능력을 가지고 있는 클락 켄트는 왜 브루스의 수첩을 보지 못했을까? 아서라. 수첩의 겉면에는 아주 얇지만 납으로 된 철판이 붙어있었다. 클락은 그 수첩에 크립토니안을 사살할 수 있는 51가지 방법이라도 쓰여 있는 것은 아닌가 아주 잠시 고민했다. 이렇다보니 월리나 다이애나가 대체 브루스의 수첩의 정체가 무어냐고 아무리 클락에게 물어본다 한들 답을 구할 수가 없었다. 클락 본인도 오리무중이었기에.


“대체 그게 뭐야?”


나이스, 월리.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지만 아마 모두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터였다. 하긴 이럴 때 그가 아니면 대체 누가 쉽게 진실을 캐려고 하겠는가. 그것도 브루스 웨인을 상대로. 알게 모르게 그들의 시선이 브루스를 향했고, 브루스는 그들의 시선이 자신이 아닌 그의 수첩을 향하고 있다는 것을 아주 쉽게 알 수 있었다. 브루스는 드물게 입 꼬리를 말아 올리며 웃었다. 오, 월리의 탄식에 클락은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등골이 오싹해지는 기분이었다.


“비밀이야.”


그러면 그렇지. 저 당당하고도 뻔뻔하지만, 그이기에 납득을 안 하려야 안 할 수가 없는 것이다. 존은 대놓고 혀를 찼다. 클락의 눈에는 명백하게 브루스가 지금 상황을 즐기고 있다는 것이 보였다. 아주 가끔이지만, 브루스는 참 짓궂은 소년의 태를 내기도 했다. 지금이 바로 그랬다.







“대체 요새 왜 그래?”


클락은 용기를 내었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말끔한 정장 차림을 하고 있는 그의 한 손에는 노트가 들려있었고, 다른 한 손에는 샤프가 들려있었다. 회의실에는 클락과 브루스뿐이었고, 그것은 곧 절호의 기회라는 뜻이었다. 브루스의 손은 유연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큰 선을 긋는 것처럼 보이다가도 짧게 글씨를 쓰는 것처럼 이리저리 춤을 추었다. 보지는 못해도 소리는 들린다. 클락은 샤프심이 종이에 그어져 선을 남기고 가루가 되어 흩날리는 소리마저 들을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뭐가?”


손을 멈춘 브루스가 뭐가 문제냐는 듯 바라보자 클락은 단숨에 말문이 막혔다. 자네가 요즘 나를 보는 시선이 이상해. 아니, 이건 좀 자의식 과잉 같고. 그 수첩에는 대체 뭐가 있는 거야? 정말로 크립토니안을 사살하기 위한 51가지 방법이라도 적혀있는 거야? 한참이나 말을 고르고 있던 클락의 사고를 정지시킨 것은 팟, 하고 터진 브루스의 웃음 소리였다. 그 다음 순간 클락은 자신의 품으로 쏙 들어온 수첩을 하마타면 놓칠 뻔 했다. 먼저 가보지. 브루스는 클락이 그 내용물을 채 확인하기도 전에 재빠르게 사라져버렸고, 회의실에는 멍청한 얼굴로 한 손에 수첩을 든 클락만 덩그러니 서 있을 뿐이었다. 브루스의 수첩은 마치 판도라의 상자 같았다. 한 번 시작했으면 끝을 봐야지. 클락은 조심스럽게 수첩을 열었다. 첫 페이지에는 지금으로부터 약 1달 정도 전의 날짜가 적혀있었다. 브루스가 처음 수첩을 들고 다녔던 때랑 비슷했다. 그 다음 페이지는-.


“…….”


클락의 예상대로, 브루스의 수첩은 판도라의 상자였다. 그러나 브루스의 수첩에는 희망만이 담겨있었다. 클락의 마음을 촉촉하게 적시는 희망만이.

형태가 막 뚜렷한 것은 아니었지만 한 페이지에 적으면 한 개, 많으면 세 개까지 빼곡하게 그려져 있는 것은 다름 아닌 클락 자신의 모습이었다. 근 한 달 동안 왜 브루스가 자신을 그리 집요하게 관찰했는지 드디어 알 수 있었다. 수첩 속에 그려진 클락의 모습은 참 다채로웠다. 웃고 있기도 했고, 시무룩해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화를 낸다거나 하며 얼굴을 구기는 그림은 별로 없었다. 클락은 자신의 귀가 이미 새빨갛게 물들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브루스의 시선에 비친 ‘클락 켄트’는, 이렇게 생긴 것이었다. 딱히 힘을 주지 않아 부드럽고 유연하게 휘는 선은, 언젠가 클락이 보았던 브루스의 미소와도 얼핏 닮아 있어서-.


- Who is he?


마지막 장을 펼치자 휘갈겨 쓴 문체로 적혀진 문장을 보고 나서도 한참이 더 지난 후에야, 클락은 발을 뗄 수 있었다. 쿵쾅거리는 심장 속도에 맞춰 발걸음 소리도 점점 커져만 갔다. 날아갈 수도 있었겠지만 뛰는 것을 택한 것은 마지막 인내심이었다. 지금 날아갔다가는 얼마나 많은 벽과 문을 깨부술지 장담할 수조차 없었다.

얼마나 뛰었을까. 그만큼 뛰어봤자 숨이 차기는커녕 평안하고 고르기만 한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며 얼른 집무실의 문을 연 클락은 가만히 의자에 앉아있는 브루스를 보자마자 그에게 달려들었다. 정말 말 그대로 커다란 강아지 한 마리처럼 그의 위로 달려든 탓에 하마타면 의자 째로 넘어갈 뻔한 일에 대한 소리 없는 꾸중을 당하고 나서야 브루스의 뺨과 입에 키스를 할 수 있었다.


“나는 너의, 너만의, 클락 켄트야.”


깊고 깊은 푸른 눈이 산뜻하게 휘어지며 바다의 파도가 물결쳤다. 브루스는 가만히 파도에 몸을 맡겼다.







클락은 데일리 플래닛으로 온 소포를 하나 받았다. 보내는 사람의 이름은 적혀 있지 않았다. 척 봐도 커다란 액자 같아 보이는 직사각형의 소포를 뜯어보자마자 클락의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하나같이 탄성을 터트렸다.


“누군지는 몰라도 진짜 잘 그렸는걸.”


액자 속 클락은 미소 짓고 있었다. 클락은 또 한 번 자신의 귓가가 새빨갛게 달아오르는 것을 느끼며 크나큰 액자를 품에 꼭 끌어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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