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클락은 자신의 뒤 쪽에 따라붙는 끈질긴 시선에 진땀을 뺀 적이 한 두 번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 시선은 묘하게 집요하면서도 악의적이지는 않았지만, 아주 가끔은 눈에 띄게 살기를 띄고 있을 만큼 무시무시했고 어느 날은 너무나도 담백하다 못해 바짝바짝 피가 마르는 기분에 빠져들게도 만들었다. 클락은 그 시선의 주인공이 브루스라는 것을 거의 확신했다. 아니, 브루스가 맞을 것이다. 차마 정말로 그 시선의 주인공이 브루스라는 사실을 두 눈으로 확인하기가 두려워, 두려워…?


“…….”


그래, 그것은 명백한 두려움이었다. 아니, 아닌가. 아, 모르겠다. 툭, 하고 터져 나온 한숨에 다이애나가 무슨 걱정거리라도 있는 것은 아니냐는 물음을 던졌지만 클락은 차마 대답할 수 없었다. 연인의 시선이 신경 쓰여 밤잠을 설친다는 이야기를 한다면 분명 두고두고 놀림 받을 것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기에.







어느 샌가부터 브루스의 손에 작은 수첩이 들려 있다는 것을 클락은 물론이요, 워치타워의 모두가 알고 있었다. 그러나 대놓고 브루스에게 그것이 무어냐고 묻기에는 안타깝게도 그리 용감한 사람은 없었다. 아무렴, 상대는 그 브루스 웨인이었고, 배트맨이었다. 그가 허투루 하는 일은 아무것도 없을 것이라는 근거 없는 믿음은 그들 모두에게 존재했다.

수첩의 크기는 앙증맞은 것처럼 보이면서도 생각 외로 적당했다. 딱 그의 양복 주머니에 쏙 들어갈 것 같은 크기의 수첩이 유선이 아닌 무선 노트라는 것까지는 알아내는 데 성공했다. 이쯤 되면 그의 연인이라는 타이틀을 거머쥔 슈퍼맨이자 동시에 데일리 플래닛의 ‘기자’ 클락 켄트는 한 번 쯤은 브루스에게 물어볼 법도 했다. 그게 무엇이냐고. 클락이 그러지 못했던 것은 언젠가 수첩을 펼쳐보던 브루스의 얼굴에 희미하게 걸쳐진 미소 때문이었다. 솔직히 말해서 그 때 봤던 그의 표정은 클락에게 꽤나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런 표정을, 언제 봤더라. 브루스의 이름으로 예약된 고급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다가 자신이 실없는 농담을 던졌을 때? 아니, 아마 그 때도 웃는 것보다는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표정을 구긴 적이 더 많지 않을까. 그러다보니 그것이 무엇이냐고 물을 만한 타이밍을 놓쳤고, 이제껏 의문은 의문으로만 남아있었다.

브루스는 항상 수첩을 들고 다녔지만 모두의 앞에서 그 수첩을 펼쳐본 적은 없었다. 자, 그럼 여기서 또 문제. 투시 능력을 가지고 있는 클락 켄트는 왜 브루스의 수첩을 보지 못했을까? 아서라. 수첩의 겉면에는 아주 얇지만 납으로 된 철판이 붙어있었다. 클락은 그 수첩에 크립토니안을 사살할 수 있는 51가지 방법이라도 쓰여 있는 것은 아닌가 아주 잠시 고민했다. 이렇다보니 월리나 다이애나가 대체 브루스의 수첩의 정체가 무어냐고 아무리 클락에게 물어본다 한들 답을 구할 수가 없었다. 클락 본인도 오리무중이었기에.


“대체 그게 뭐야?”


나이스, 월리.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지만 아마 모두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터였다. 하긴 이럴 때 그가 아니면 대체 누가 쉽게 진실을 캐려고 하겠는가. 그것도 브루스 웨인을 상대로. 알게 모르게 그들의 시선이 브루스를 향했고, 브루스는 그들의 시선이 자신이 아닌 그의 수첩을 향하고 있다는 것을 아주 쉽게 알 수 있었다. 브루스는 드물게 입 꼬리를 말아 올리며 웃었다. 오, 월리의 탄식에 클락은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등골이 오싹해지는 기분이었다.


“비밀이야.”


그러면 그렇지. 저 당당하고도 뻔뻔하지만, 그이기에 납득을 안 하려야 안 할 수가 없는 것이다. 존은 대놓고 혀를 찼다. 클락의 눈에는 명백하게 브루스가 지금 상황을 즐기고 있다는 것이 보였다. 아주 가끔이지만, 브루스는 참 짓궂은 소년의 태를 내기도 했다. 지금이 바로 그랬다.







“대체 요새 왜 그래?”


클락은 용기를 내었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말끔한 정장 차림을 하고 있는 그의 한 손에는 노트가 들려있었고, 다른 한 손에는 샤프가 들려있었다. 회의실에는 클락과 브루스뿐이었고, 그것은 곧 절호의 기회라는 뜻이었다. 브루스의 손은 유연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큰 선을 긋는 것처럼 보이다가도 짧게 글씨를 쓰는 것처럼 이리저리 춤을 추었다. 보지는 못해도 소리는 들린다. 클락은 샤프심이 종이에 그어져 선을 남기고 가루가 되어 흩날리는 소리마저 들을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뭐가?”


손을 멈춘 브루스가 뭐가 문제냐는 듯 바라보자 클락은 단숨에 말문이 막혔다. 자네가 요즘 나를 보는 시선이 이상해. 아니, 이건 좀 자의식 과잉 같고. 그 수첩에는 대체 뭐가 있는 거야? 정말로 크립토니안을 사살하기 위한 51가지 방법이라도 적혀있는 거야? 한참이나 말을 고르고 있던 클락의 사고를 정지시킨 것은 팟, 하고 터진 브루스의 웃음 소리였다. 그 다음 순간 클락은 자신의 품으로 쏙 들어온 수첩을 하마타면 놓칠 뻔 했다. 먼저 가보지. 브루스는 클락이 그 내용물을 채 확인하기도 전에 재빠르게 사라져버렸고, 회의실에는 멍청한 얼굴로 한 손에 수첩을 든 클락만 덩그러니 서 있을 뿐이었다. 브루스의 수첩은 마치 판도라의 상자 같았다. 한 번 시작했으면 끝을 봐야지. 클락은 조심스럽게 수첩을 열었다. 첫 페이지에는 지금으로부터 약 1달 정도 전의 날짜가 적혀있었다. 브루스가 처음 수첩을 들고 다녔던 때랑 비슷했다. 그 다음 페이지는-.


“…….”


클락의 예상대로, 브루스의 수첩은 판도라의 상자였다. 그러나 브루스의 수첩에는 희망만이 담겨있었다. 클락의 마음을 촉촉하게 적시는 희망만이.

형태가 막 뚜렷한 것은 아니었지만 한 페이지에 적으면 한 개, 많으면 세 개까지 빼곡하게 그려져 있는 것은 다름 아닌 클락 자신의 모습이었다. 근 한 달 동안 왜 브루스가 자신을 그리 집요하게 관찰했는지 드디어 알 수 있었다. 수첩 속에 그려진 클락의 모습은 참 다채로웠다. 웃고 있기도 했고, 시무룩해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화를 낸다거나 하며 얼굴을 구기는 그림은 별로 없었다. 클락은 자신의 귀가 이미 새빨갛게 물들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브루스의 시선에 비친 ‘클락 켄트’는, 이렇게 생긴 것이었다. 딱히 힘을 주지 않아 부드럽고 유연하게 휘는 선은, 언젠가 클락이 보았던 브루스의 미소와도 얼핏 닮아 있어서-.


- Who is he?


마지막 장을 펼치자 휘갈겨 쓴 문체로 적혀진 문장을 보고 나서도 한참이 더 지난 후에야, 클락은 발을 뗄 수 있었다. 쿵쾅거리는 심장 속도에 맞춰 발걸음 소리도 점점 커져만 갔다. 날아갈 수도 있었겠지만 뛰는 것을 택한 것은 마지막 인내심이었다. 지금 날아갔다가는 얼마나 많은 벽과 문을 깨부술지 장담할 수조차 없었다.

얼마나 뛰었을까. 그만큼 뛰어봤자 숨이 차기는커녕 평안하고 고르기만 한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며 얼른 집무실의 문을 연 클락은 가만히 의자에 앉아있는 브루스를 보자마자 그에게 달려들었다. 정말 말 그대로 커다란 강아지 한 마리처럼 그의 위로 달려든 탓에 하마타면 의자 째로 넘어갈 뻔한 일에 대한 소리 없는 꾸중을 당하고 나서야 브루스의 뺨과 입에 키스를 할 수 있었다.


“나는 너의, 너만의, 클락 켄트야.”


깊고 깊은 푸른 눈이 산뜻하게 휘어지며 바다의 파도가 물결쳤다. 브루스는 가만히 파도에 몸을 맡겼다.







클락은 데일리 플래닛으로 온 소포를 하나 받았다. 보내는 사람의 이름은 적혀 있지 않았다. 척 봐도 커다란 액자 같아 보이는 직사각형의 소포를 뜯어보자마자 클락의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하나같이 탄성을 터트렸다.


“누군지는 몰라도 진짜 잘 그렸는걸.”


액자 속 클락은 미소 짓고 있었다. 클락은 또 한 번 자신의 귓가가 새빨갛게 달아오르는 것을 느끼며 크나큰 액자를 품에 꼭 끌어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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