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망소재주의

 

 

 

 

 

스팍은 예의 그, 감정도 없는 벌칸이었다. 스팍에게 있어 감정이란 표출하는 것 자체가 불필요한 것 중의 하나였다. 굳이 그걸 꺼내보이지 않아도 충분히 살 수 있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슬픈 일이 닥쳐 질질 짠다고 상황이 더 나아지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그런 스팍이 태어나서 지금까지 흘린 눈물은 딱 3번, 3번 뿐이었다. 

  

사랑하는 모행성, 벌칸이 파괴되던 날 스팍은 어머니를 눈 앞에서 잃었다. 조금만 더 제 곁에 붙여놓을 것을 한참이나 후회했다. 뻗은 손이 맞닿았다면 지금 그의 어머니는 저를 보며 여전히 그 아름다운 미소로 웃어주실 것이라고도 생각해봤다. 그러나 그것은 다 부질없는 짓이었다. 스팍은 사랑했지만, 사랑한다고 제대로 말도 건네지 못한 제 어머니를 눈 앞에서 잃어버렸다.  

그 때도, 스팍은 울지 않았다. 최대한 감정을 억누르고 이성을 찾았다. 눈 앞이 일렁이고 있다는 것은 느꼈었지만, 절대로 눈물을 흘리는 일은 없었다. 그것은 불필요했으며, 만약 자신이 눈물을 흘려 어머니가 살아 돌아온다면 수십번, 수백번도 더 울어줄 수 있었다. 스팍에게 있어 눈물이란 그런 의미였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아마도 자신이 눈물을 흘리는 순간은 이제는 한 명밖에 남지않은 소중한 혈육인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라고 그리 생각했다. 단정은 지을 수 없었다. 스팍은 제 스스로 그 때가 되서 자신이 눈물을 보일지 확신이 들지 않았다. 

  

그런 스팍이 처음으로 눈물을 보인 상대는 아이러니하게도 짐 커크였다. 

 

엔터프라이즈호가 지구로 추락하는 도중 기적적으로 살아남았을 때, 다른 모두는 하늘에 기도를 했고 기적이라며 웃었지만 스팍은 그러지 못했다. 기적, 그런 것은 세상에 없었다. 아니, 있다 한들 논리적이지 못한 그 추상적인 것을 벌칸의 머리는 이해하지 않으려고 했다. 서둘러 달려간 곳에는 기적과 맞바꾼 것이 있었다. 

 

손을 뻗으면 바로 닿을 수 있는 거리였는데, 단단하게 두 사람의 사이를 갈라놓은 유리벽에 스팍은 한순간에 절망감에 휩싸이는 것 같았다. 이상한 일이었다. 아니, 이것은 언젠가 한번 겪어본적이 있는 아픔이었다. 가슴이 무뎌지고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아 머릿속이 새하얘지는 이 느낌은 언젠가 이미 한번 쓰라리게 겪어본 고통이었다.  

 

"어떻게하면 감정을 조절할 수 있는거야, 스팍?" 

"..모르겠습니다." 

 

그러는 당신의 앞에 있는 저 또한, 지금 이 것을 무엇이라고 불러야하는 지 모르겠습니다, 함장님. 차마 이 말은 마음 속 깊은 구석으로 밀어넣었다.    

 

"죽는 게 두려워."

 

유리벽 위로 조심스럽게 얹어진 그의 손에 자신의 손을 갖다댄 것은 무의식중에 그러했던 일이었다. 벽을 사이에 두고 두 손이 맞닿은 순간, 희미하게 짐이 웃는 것 처럼 느낀것은 비단 스스로의 착각이라고 생각할 정도였다. 자신의 눈앞에서 사라져가는 함장의 생명을,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스팍의 눈에서는 기어코 눈물이 떨어졌다.

 

"내가, 그 때 왜 널 구하러 돌아갔는지.. 이해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

"..왜냐하면 우린 친구이기 때문입니다."

 

친구, 매우 낯선 단어였다. 짐 또한 스팍의 입에서 그런 단어를 들을 날이 오다니 스스로도 놀란 눈치였다. 씩, 웃은 그의 생명은 기어코 그 안에서 사라져버렸다. 힘 없이 미끄러지는 짐의 손을 보며 스팍은 고통에 일그러진 비명을 질렀다. 절대로 용서할 수 없는 자의 이름을 부르며 새하얘진 머리로 뛰쳐나간 이후의 기억은 안타깝지만 잘 기억나지 않았다.

 

 

*

 

 

기적적으로 짐은 살아났다. 마지막에 스팍이 이성을 다시 되찾았기에 망정이지 안 그랬으면 짐을 살릴 수 있는 기회 조차도 날려먹을 뻔했다. 스팍은 그 때 깨달았다. 그 순간, 짐의 생명이 사그라든 그 순간부터 칸을 잡았을 때 까지의 제 행동은 엄밀하게 말하자면 전혀 벌칸답지 않은 행동이었으며, 그것은 퍽이나 인간의 모습과 가까웠다. 그리고 주체할 수 없었던 그 감정은 이제서야 비로소 확실해졌다. 아마도 그것은 '친구'라는 개념보다는 좀 더 깊숙한, 좀 더 조심스러운 것이라고 생각했다.

 

우후라와 헤어진 것은 그로부터 얼마 안되서였다. 그녀는 지쳐보였다. 말이 지쳐보인 거지, 사실은 그녀도 알고 있었다. 스팍이 그 정도로 짐의 일에 분노하며 심지어 눈물까지 보이리라고는 전혀 상상도 못했던 일이었다. 스팍은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방금 전, 짐을 어떻게 생각하냐는 제 질문에 스팍은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것은 거짓말보다 좀 더 고약한 것이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스팍에게 우후라가 싫으냐고 물으냐면 대답은 아니오, 였다. 그녀는 다른 사람들과 다르게 스팍과 좀 더 오래, 심도있는 대화를 이어갈 수 있는 몇 안되는 사람이었고 무슨 일이 생기던지 저에게 따뜻한 품을 빌려주는 사람이었다. 그녀와의 입맞춤은 세상 그 어떤 시간보다 평화로웠고, 쾌락을 즐기지 않는 벌칸에게 있어 딱 한 순간, 짧은 즐거움을 주는 것이기도 했다. 그랬던 그녀가 물은, 짐을 어떻게 생각하냐는 말에 스팍은 입은 다물어버렸다.

 

스팍은 아직도 그 질문에 대해 대답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명백한 해답을 찾지 못했기에.

 

 

*

 

 

해답을 찾았다.

그것은 '친구'가 아니라 좀 더 깊숙하고 더 다정하고 사랑스러운 것이었다. 그 이름은 '사랑'이었고, 그에 어울리는 단어는 '친구'가 아닌 '연인'이었다.

 

"짐, 벌칸은 거짓말을 못한다는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또, 또. 그 소리.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로 들어서 잘 알아."

"그렇다면 제가 당신한테서 느끼는 이 감정과 마음이 '애정'이라는 사실은, 거짓이 아니겠군요."

 

퍽이나, 로맨틱하다. 벙 찐 짐의 입에서 나온 첫번째 대답이었다.

그 뒤로 곧바로 스팍은 짐에게 손목을 붙들려 맥코이에게 불려갔다. 매우 놀란 얼굴로 어디 머리라도 다친 거 아니냐며 호들갑을 떠는 짐의 말에 옅게 웃으면서 대답했다.

 

"저는 머리를 다치지 않았으며, 당신이 들은 말은 모두 사실입니다."

"마미, 나 지금 헛것을 보고 있는 걸까?"

"꼬맹아, 너 나한테 약 먹인 거 아니지? 지금 내 눈 앞에서 그 빌어먹을 홉고블린이 웃고 있는데?"

 

오, 세상에.

스팍의 말을 듣고 난 후 이어진 짐의 두번째 대답이었다.

 

그 뒤로 정확히 사흘하고도 3시간 43분 2초 후, 짐의 세번째 대답이 있었다.

 

 "스팍, 넌 좀 더 사랑을 표현하는 방법을 배워야겠어." 

"..짐, 저는 벌칸-" 

"쉿." 

 

그러니까, 배워보자고. 

 

 

* 

 

 

시간이 흘러, 흘러 짐은 엔터프라이즈호의 함장 자리를 내려놓았다. 세월이 원인이었다. 80년, 길면 90년이라는 한정적인 인간의 수명은 이럴 때 매우 치명적이었다. 어느새 새월은 흘러 짐은 꽤나 나이가 든 중년의 나이가 되었다. 스타플릿의 추천을 받아들인 짐은 스타플릿의 교관이 되었다. 스팍은 원래 교관이었기에 다시 복직하는 것이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난 왜 인간인걸까."

"인간이 아닌.. 예를 들면 벌칸인 당신의 모습은 상상하기 힘들군요, 짐."

"스팍, 나 늙어가고 있어."

"...."

"젠장, 스팍. 나 죽어가고 있다고."

"압니다, 짐. 괜찮습니다."

 

요새들어 짐은 꽤나 우울해져있는 상태였다. 더 이상 옛날의 자기 모습이 아니라는 것에서 밀려오는 자괴감을 견디기가 힘든 모양이었다. 아니, 사실은 그것보다도 더 큰 이유가 있었다.

 

"내가 널 두고 어떻게 가지, 스팍?"

 

스팍은 조심스럽게 짐의 몸을 끌어안았다. 가슴팍에 내려앉은 그의 얼굴에서 눈물이 흐르고 있던 모양인지 금세 스팍의 옷이 눈물을 머금어 축축해졌다.

 

 

* 

 

 

안녕, 스팍. 친애하는 나의 스팍에게. 

네가 이 편지를 발견 했을 때, 아마도 나는 네 곁에 없겠지?

음..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네.

나, 내가 죽어가고 있다고 말한 그 날을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후회할 거라는 거 알아? 정말이야. 후회하고 있어. 너에게 그런 말을 하는 게 아니었어. 굳이 그 사실을 환기 시켜 줄 필요 없었는데 괜히 내가 말을 꺼내서는.. 하지만 조금 속상했어. 아니, 조금이 아니지. 많이. 나는 인간이고 너는 벌칸이잖아. 너를 두고 떠나는 나도 속상하고, 나를 떠내보내는 너도 속상할테니까.

 

내 몸은 이제 너무 늙어버렸고, 내 잘난 얼굴도 할아버지가 다 되어있더라고. 짐 커크 다 죽었다, 싶더라.

있잖아, 스팍. 나 죽는게 무서워, 아직도. 처음 그렇게 느낀 그 때는 너무 어린 나이에 내 모든 생을 마감한다는 사실이 너무 두려웠어. 그게 말이 되는 일이야? 요새 세상에 방사능 과다 노출로 죽는 사람이 어딨냐고! 우주는 한 없이 넓은데! 이 제임스 커크가 20대도 못 넘기고 죽다니. 하지만 지금은 그 반대네. 다 늙어서 죽는다는 게 무섭다. 너를 남기고 가는 게 무서워. 그렇다고 바로 따라오라는 거 아니야. 그럼 혼난다! 그럼 넌 그러겠지? 짐, 벌칸은 인간보다 최소 3배의 근력과 신체능력을 자랑하는 종족으로 제가 당신에게 혼이 날 가능성은... 어때, 좀 닮았어?

 

난 네가 처음으로 나한테 사랑해, 하고 속삭여준 날을 난 아직도 기억하고 있어. 으, 닭살. 오그라들지만 사실이야. 그 날은 평생 잊지 못하는 날이 될거야. 물론 그 날 밤도. 하하, 그치? 그러니까 다른 사람 만나라고는 죽어도 안 할거야. 나는 이기적이니까. 너의 마음은 모두 내 것이었으면 좋겠고, 그 사랑은 온전히 다 나의 것이었으면 좋겠어. 나는 그래. 나는 내 모든것은 널 사랑하고, 널 받아들이고 있으니까.

 

한가지 너와 약속하고 싶은 게 있어. 있지, 스팍. 내가 네 곁을 떠나고 난 후에.. 반드시 꼭 네 곁에 내가 있을게. 그럼 넌 또 그러겠지. 벌칸은 사후세계를 믿지 않습니다. 사후세계는 매우 비논리적입니다. 하지만 난 믿어. 오늘부터라도 믿지, 뭐. 그러니까 꼭 내가 네 곁에 있을거야. 항상 너를 지켜줄게. 그러니까 슬퍼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네가 하고 싶은 일 다 해보고 다 즐기고 오란 말이야. 난 참을성이 굉장한 사람이니까 기다릴 수 있어. 아니, 네 옆에 내가 있는다고 했으니까 그 일들 나도 다 할거야.

 

휴, 이제 편지 쓰는 것도 지친다. 팔이 아프네. 아직 하고 싶은 말이 많지만 그 무엇보다 이 사실을 기억해줬으면 좋겠어.

 

스팍, 사랑해. 이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도 더, 더 많이.

내가 사랑하는 나의 하나뿐인 First Officer.

 

 

짐의 장례식에서 조차 눈물을 흘리지 않던 스팍은 기어코 편지를 손에 쥐고 눈물을 흘렸다. 짐이 스팍을 사랑한 만큼, 스팍도 짐을 사랑했다. 그의 모든 것은 짐의 것이었다. 그러니 스팍의 두번째 눈물도 당연히 그의 것이었다. 스팍은 말 없이 눈물만 흘렸다.

 

 

*

 

 

매일 하루에 한번, 스팍은 그 편지를 읽어보았다.

 

그 이후로 더 많은 시간이 흘렀다. 이제 엔터프라이즈호와 운명을 같이 했던 선원들도 몇 안 남아있었다. 가장 최근에는 맥코이의 장례식에 갔었다. 다시는 자신을 망할 초록 홉고블린이라고 부를 사람이 없어졌다는 사실이 마음 한켠을 쓸쓸하게 했다. 그 때는 인종차별적 발언이라고 그 말을 들을 때마다 싸우곤 했었는데, 돌이켜 지나보면 그 세월들이 전부, 인간이 말하는 소중한 추억이라는 것이었다는 것을 깨달아가고 있는 중이었다.

 

그의 장례식에서 스팍은 우후라를 만났다. 그녀 또한 흘러가버린 세월에 많이 늙은 모습이었다. 오랜만에 스팍은 그녀와 함께 저녁을 같이 했다.

 

"나는 짐을 질투했어요, 스팍. 나는 볼 수 없었던 당신의 모습을 볼 수 있다는 사실이 그 때의 나에게는 굉장히 자존심에 거슬리는 일이었으니까요. 하지만, 지금은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당신을 받아들여준 사람이 다른 사람도 아닌 짐이니까요. 누가 뭐래도 그는 우리의 존경스러운 캡틴이었고, 친구니까요. 잘됐어요, 스팍."

 

스팍이 돌아간 바로 다음 날, 우후라 역시 짐의 곁으로 떠나갔다.

 

 

*

 

 

자신의 방 창가에 놓인 의자에 앉은 스팍은 조심스러운 손길로 짐이 남기고 간 마지막 편지를 펼쳤다. 그의 편지를 읽는 스팍의 눈은 예전같지 시야가 맑지 못했다. 스팍은 이제 자신에게도 그 날이 왔음을 느꼈다. 마지막 순간이 왔음을. 편지의 마지막 줄을 읽고 난 후, 스팍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 모든것이 까만 그의 세상에 단 하나, 밝은 빛이 들었다. 예나 지금이나 그 어떤 모습이라도 사랑스러운 제 연인의 모습이었다. 짐은 스팍에게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웃어보였다. 꼭 어린아이처럼.

 

이제 당신을 만나러 갈 수 있겠군요, 짐.

 

스팍의 세번째 눈물 역시, 그의 모든 것은 짐 커크의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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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07. 13


어떻게든 살아남았다는 사실에 감사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소중했던 모든 것을 잃어버려 오랫동안 잊고 살았던 '가슴 아픔' 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다시금 깨달았다. 베인은 무자비한 남자였지만, 그렇다고 감정이 없는 목석은 아니었다. 그녀의 말은 틀린게 하나도 없었다. 베인은 그녀를, 탈리아를 사랑했다. 허나, 탈리아는 베인에게 안녕을 고했고 이제 그녀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다. 그 사실이 베인을 너무나도 슬프게 만들었다. 마스크를 벗어버리고 그녀의 뒤를 따라갈까 생각도 했었고, 소중한 그녀를 앗아간 그에게 복수를 할까 생각했지만, 모든 tv가 '브루스 웨인'이 죽었다는 방송을 하고 있었다. 그러자, 세상이 정말로 허무해졌다. 사실, 베인은 믿지 않았다. 그가 죽었다고? 그는 죽음에서도 살아나온 남자다. 고작 이런일로 죽을리가 없지, 하면서도 그를 찾을 수 있는 방법이 없어진 것은 사실이었다. 


베인은 하수구를 떠돌며 어떻게든 목숨을 부지하고 있었다. 그는 원래 무척이나 강인한 전사였기 때문에 하루 이틀 먹지 못한다고 죽는 것은 아니었다. 빨리 이 지긋지긋한 도시에서 떠나고 싶었지만 고담시는 어찌보면 철벽의 요새와 같았다. 그렇게 베인은 산 것도, 그렇다고 죽은 것도 아닌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그런 베인에게 기회가 찾아온 것은 정말 우연이었다. 평소처럼 이런 저런 오지를 떠돌아다니면서 허무한 시간을 보내고 있던 참에, 베인은 우연히 길가에 서 있는 경찰차에서 내리는 청년을 보았다. 그 청년은 경찰복을 입고 있지 않았지만 아주 자연스럽게 경찰차에서 내리며 차의 주인으로 보이는 경찰에게 고맙다는 듯 말하고 있었다. 


"정말 돌아오지 않을 생각이야, 존?"

"아마."

"국장님도 아쉬워하시잖아. 네 덕분에 이 도시를 구할 수 있었다고."

"내 덕분이 아니지. 그건, 순전히 베트맨 덕분이었어."

"네가 그 때 지하에 파묻혀 있던 경찰들을 구해준 건 사실이잖아."

 

청년은 어깨를 으쓱해보이고는 차의 주인인 경찰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고는 자신이 가던길을 갔다. 베인은 그들의 대화를 통해, 그 청년이 한 때 경찰이었으며, 지하에 갇힌 멍청한 경찰 3천여명을 구한 장본인이라는 것을 아주 쉽게 알 수 있었다. 딱히 지금와서 그에게 분풀이를 하려는 것은 아니었으나, 아무런 목적도 없이 살고 있는 베인에게 그 날의 일은 사소한 것이라도 커질 수 있는 불꽃이었다. 베인은 서둘러 그의 뒤를 쫓았다. 그리고 그가 으슥한 산동네로 들어가는 것을 보았으며, 베인은 그가 '브루스 웨인'을 만나는 것을 목격했다. 그 사실을 알자마자 베인은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럼 그렇지, 그가 죽을리가 없다. 그가, 그 베트맨이. 

그 청년은 웨인을 만나 한껏 시시덕거렸다. 잘 들리지 않는 웨인의 말에 아주 환한 웃음을 지어보이는 그의 모습을 보며 웨인 또한 환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것을 보자, 베인은 속이 뒤틀리는 것만 같았다. 자신에게서 탈리아를 빼앗아간 남자는, 또 다른 소중한 것을 찾아 곁에 두고 행복해하는 꼴이라니. 거의 다 죽어갔던 복수심이 타오르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에게도 탈리아를 뺏긴 자신의 기분을 한껏 느끼게 해주고 싶었다. 

 

꽤나 오래간만에 베인의 삶에 목표가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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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07. 12


그 날 이후, 존의 삶은 달라졌다면 참 많이 달라졌을 것이고, 아니라면 또 아닐 것이다. 

 

고담시를 구한 영웅 베트맨, 브루스 웨인이 사라지고 난 뒤에 존 블레이크는 그에게서 어마어마한 것을 물려받았다. 정작 그것을 처음 발견했을 때는 무척 가슴이 뛰었고 뭐라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장난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것은 그 때, 그 한 때였다. 막상 존은 이 다음 혼자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섣불리 단정지을 수는 없었다. 그가 정말로 자신이 그의 뒤를 이어가기를 원하는지, 아니면 그냥 당신의 정체를 알고 있던 한 청년에게 남긴 유산같은 것인지는 단지 이렇다할 추측만 할 뿐, 사실은 아무도 모를 일이었다.

 

존은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를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불의를 보면 참을 수 없는 사람, 감정 조절을 해야만 하는 사람, 거짓 웃음으로 자신을 무장하고 있는 사람. 자신이 베트맨의 정체를 안 것은 단순히 운이 좋아서, 혹은 감이 좋아서였다. 그냥 찍었던 문제의 답이 맞았던 것이다. 그런 자신이 그의 뒤를 잇는다, 라고 말할 수 있을 만한 인간인가. 존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이 세상의 영웅, 유일한 베트맨은 브루스 웨인, 그 한 사람 뿐이다.

 

결과적으로 존은 브루스에게 받은 모든 것을 손에서 내려놓았다. 너무 버겁고, 무거운 것이었다. 고작 스무살 중반이 된 청년에게는. 

그곳은 때때로 베트맨이 생각나거나 아니면 브루스 웨인이 생각나거나, 그 날의 일이 생각이 나면 심심찮게 둘러보러 오는 곳이 되었다. 그곳으로 들어갈 때 심심하면 시원한 폭포세례도 한 번 맞아주는 것도 기분 전환의 일종이었다. 그리고 몇 분, 몇 시간을 그 곳에서 많은 생각을 해보고 나서 다시 밖으로 나갔다. 

 

 

*

 

 

"어서오세요."

 

경찰을 그만두고 나서 존은 돈을 벌어야만 했다. 아무리 짠 월급이라고 해도 고정된 수입이 있던 경찰을 그렇게 망설임 없이 그만둔 것은 후회하지 않았지만 그 후의 일이 막막한 것은 사실이었다. 그런 사정을 아는 고아원 원장님은 웨인가의 저택으로 들어와 같이 살자고 했지만 존은 혼자만의 공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하루에 한 번, 꼬박꼬박 아이들을 만나러 갔다. 저택에서 그리 멀지 않은 카페에 직원으로 일하고 있는것도 벌써 수개월이었다. 그동안 존의 생활은 무의미한 시간 보내기의 연속이었다. 그래도 혹시 몰라 자기관리에는 시간과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그래도 여전히, 근본적으로 제일 궁금했던 문제의 답은 나오지 않은 채 였다.

 

"어서오.."

"여기 있어서는 안 되는 사람이 있군."

 

습관적으로 포스기계를 보고 있던 존은 절대로 잊을 수 없는 그 목소리에 깜짝 놀라 기함을 쳤다. 


"...브루스 씨?"

 

고급스러운 옷차림에 딱 봐도 상류층이라는 분위기를 실컷 풍기고 있는 사람은 정말 환상이 아니었다. 검은 모자를 쓰고 선글라스를 끼고 있는 그는 아무리 숨기려 해도 브루스 웨인이었다. 그는 주위를 얼핏 둘러보고는 검지 손가를을 입술에 올려놓으며 조용히 하라는 제스쳐를 취했고, 존은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이 고담시에서 브루스 웨인이 베트맨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손에 꼽을 정도였고, 자신을 포함한 그 모든 사람들은 당연히 그가 죽은 줄 알고 있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브루스 웨인'이 죽은 건 고담시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다. 


"시간 되나?"

"....."

"얘기를 좀 하고 싶군."

 

존은 당당하다 못해 뻔뻔스러운 작자의 얼굴에 차오르는 헛웃음을 숨길 생각도 못하고 그대로 흘려버렸다. 


"곧 있으면 점심시간이니, 조금만 기다리시죠."



*



대충 유니폼을 정리한 존은 앞치마만 벗어두고 그가 앉아있는 자리로 향했다. 존은 그가 다른 사람의 시선이 모이기 힘든 구석자리를 참 잘도 찾았다고 생각했다.


"얼굴에 다 쓰여있군. 이 카페 회사소유였어. 그러니 자리나 메뉴같은 건 아주 잘 알고 있지."

"그렇게 티가 났습니까?"

"조금. 그나저나, 별로 놀라는 얼굴이 아니군."

"충분히 놀랐습니다. 영락없이 당신이 죽은 줄로만 알고 있었으니까요."


왠지 모르게 목이 막히는 기분이라 존은 눈 앞에 놓인 아이스티를 서둘러 들이켰다. 달콤쌉사름한 향이 입안을 맴돌았다.


"그래서, 내가 준 선물은?"

"그게 선물입니까?"

"선물이지. 그곳은 내, 베트맨의 모든 것이니까."

"..왜 저한테 주신 겁니까?"

"답을 알고 있으면서 묻는군."

"저는.."


존은 이제 한 가지 결론 밖에 내릴 수 없었다. 그가 원한 것은 명백하게 존이 그의 뒤를 물려받기를 원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 자체에 알 수 없는 긴장감과 무게감을 느낌 존은 고개를 저었다. 


"브루스. 당신이 내 어떤 면을 보고 그렇게 해줬으면 좋겠는지 모르겠지만.. 아니요, 나는 못해요."

"내가 처음 봤던 존 블레이크는 이런 청년이 아니었어. 난 벌써부터 옛저녁에 네가 이 고담시를 지킬것이라고 생각했지 이런 카페에서 일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고."

"당신이 원하는 것이 얼마나 어렵고 힘든일인지 당신이 제일 잘 알면서 그런 소리를 하다니 뻔뻔하군요."

"그러니 자네를 선택했지."

"왜죠? 나는 당신의 절반도 닮지 않았어요. 아니, 못한거죠. 당신이 더 잘 알잖아요. 저는 베트맨과 닮은 점이 하나도 없습니다."

"꼭 닮았다고 해야하나? 큰 착각을 하고 있는 모양인데, 이 일을 할 사람은 너 밖에 없어. 너만이, 이 고담시의 사람들이 모르는 모든 사건의 진실을 알고 있지."


그의 말에 존은 그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선글라스에 가려져있다 한들, 그의 눈은 올곧을 것이며 이 곳에 온 순간부터 자신만을 정직하게 바라보고 있을 것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존은 무거운 한숨을 내쉬며 꼭 칭얼대는 어린아이처럼 중얼거렸다.


"이봐요, 당신이 날 선택해준 건 고마워요. 내가 옛날에도 말했지만 당신은 원래 영웅이니까. 그리고, 그.. 제가 말했습니까? 생각해보니 안한 것 같은데.. '브루스 웨인'을 처음 본 곳은 고아원이지만, '베트맨'을 처음 본 곳은 길거리였습니다. 아버지가 노름빚으로 제 눈 앞에서 살해당했다고 말했던 거 기억하죠? 그 때 사실은 저도 죽을 운명이었습니다. 아니, 정확히는 팔려나갈 운명이었겠죠. 그들은 돈이 되는 걸 원했으니까. 그 때 절 구해준 게, 베트맨이거든요. 그러고 나서 말씀드린 것처럼 고아원에 가서 당신을 만났을 때, 저는 확신했죠."

"그건 처음 듣는 이야기가 맞군."

"그래요, 아무튼.. 저는 그럴 만한 사람이 아니라는 겁니다."

"어째서 그렇게 확신하는 거지?"

"저는 누굴 구한다거나 하는 큰 일을 할 사람이 아닙니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나는 자네가 그 때 수많은 사람의 목숨을 구한 것을 알고 있어."

존은 기어코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그 때, 그 대폭동 사건 때 확실히 잘난체를 해보자면 존은 수많은 사람들을 구했다. 존이 한 일은 누가 봐도 영웅적인 일이라고 할 수 있었다. 존은 그 때 무서울 것이 없었다. 자신이 믿고 있는, 절대로 부숴지지 않을 다이아몬드 같은 영웅이 강인하게 서 있었기 때문이다. 오로지 자신의 영웅이라고 생각했던 사람을 도와서 할 수 있는 일은, 할 수 없어도 할 수 있게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 땐 당신이 있었으니까."

"그래, 솔직하게 말해봐. 네 변명을 듣는 것도 꽤 재밌지만."

"..당신 사람이 참 못됐습니다."

"그런 말 자주 듣지."

 

이미 동난 아이스티잔을 멀뚱히 바라보던 존은 한참 동안 허공에 손가락을 놀리며 망설이다 차마 그의 눈을 마주보며 얘기하진 못하고 고개를 푹 숙이며 개미가 기어갈 듯한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그래요, 당신이 없으니까 못한다구요."


존은 필요했다. 예전부터 그가 자신이 그의 뒤를 이어줄 것을 바라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이렇게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은 존에게는 브루스 웨인이, 그의 영웅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스스로 생각해도 자신은 아직 많이 어렸다. 가치를 판단하는 일에도 사소한 감정에 휘말리기 쉬운 존재였다. 그렇기에, 존은 그가 필요했다. 자신의 길을 이끌어 줄 존재가.


"오늘 저녁에 시간 되나?"

"..네?"

"한동안 바쁠거야. 이왕이면 얼른 그만 둬."

"뭐라고요?"

 

부끄러운 고백 뒤 들려오는 것은 비웃음도 아닌 일방적인 통보였다. 물론 그가 존의 영웅은 맞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갑자기 이렇게 행동해도 되는 건가.


"아니, 잠깐만요. 한동안 바쁘다니요? 누가요? 당신?"

"아마도."

"뭘 하실 생각입니까?"

"저택은 고아원에게 줘버렸으니, 너랑 나랑 같이 새로 살 집을 구해야겠지. 이왕이면 그 동굴 근처에."

"....."


순간 존은 자신의 귀를 의심할 수 밖에 없었다. 누가 누구랑 같이 살 집? 아무런 대꾸도 못하고 있던 존에게 그는 아주 상냥하고 다정해보이는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왜, 싫은가?"

"아, 아니.. 그게 아니라."

"내가 필요하다며. 사실 원래 그러려고 온 거긴 한데, 네가 그렇게 열혈히 나를 원한다고 말까지 해줬으니 내가 왜 내 후계자를 마다하겠나. 돈이라면 걱정하지 말게나. 사실 너는 모르는 네 이름으로 된 계좌에 내 유산이 꽤 많이 있거든."

"제가 언제 열혈히..!"


화악 달아오르는 얼굴을 주체하지 못하고 아예 고개를 돌려버린 존의 미간은 있는 힘껏 구겨져 있었고, 브루스는 다 식어버린 커피를 홀짝이며 은은히 미소 짓고 있었다.


"어쨌든, 고담시로 돌아온다는 말씀이시네요."


그는 천천히 커피잔을 내려놓으며 존을 향해 여전히 웃는 얼굴로 조그맣게 속삭였다.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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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07. 07


만에 하나 너를 다시 볼 수 있다면 온 힘을 다해 때려 눕혀 주겠노라, 스스로 비장한 다짐을 했으나 차마 그러진 못했다. 어쩌면 너무 안일하게 생각했을지도 모른다고, 그렇게 생각했다. 물론 다시 만나자마자 있는 힘껏 주먹을 내질렀지만 그 이상은 하지 못했다. 마음 속 깊이 묻어둔 너를 향한 내 온갖 불평 불만과, 너를 원망하는 말을 꺼낼 수 있는 기회였음에도 하지 않았다. 아니, 하지 못했다.

 

에릭은 피할 수 있음에도 자신의 주먹을 피하지 않았다. 그건 분명히 알 수 있었다. 그정도 쯤, 가볍게 맞아주지 하는 오만이 보인 것 같아서 속이 한 번 더 끓었으나 그건 더 이상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마음 속 깊이 아끼고 아껴두었던 감정이 저도 모르게 미친듯이 새어나올까봐 온 몸이 떨렸다.

 

그리고 그것을 또 후회하게 됐다.

기회가 있을 때 해뒀어야 한다. 욕이든, 뭐든. 조금이라도 더 많은 시간을 에릭과의 대화로 보냈어야 했다. 미래에서 온 오래된 친구도 사라져버린 지금, 곁을 지켜주는 건 예나 지금이나 행크밖에 없었다. 하나뿐인 동생인 레이븐도, 소중한 친구도 없었다. 

 

찰스는 다시 약에 손을 대지 않았다. 여전히 그의 다리는 움직이지 않았지만, 다른 사람의 생각을 읽는 것은 눈 하나 깜빡이는 것 만큼 쉬웠다. 그는 소중한 생명들을 구하는 일을 다시 시작했다.

학교는 다시 세워졌고 즐거운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흘러 넘쳤다. 오랜 친구의 부탁도 잊지 않았다. 그가 소중하게 생각했을, 후에는 자신에게도 소중하게 될 제자들을 찾았다. 

 

그러나 여전히, 찰스의 마음 속은 텅 빈것 같이 공허하기만 했다. 

 

 

 

*

 

 

 

"교수님."

"왜?"

"그리우세요?"

 

허여멀건 하게 생긴 게 사람 귀찮게 하는 건 귀신같이. 찰스는 차마 내뱉지 못할 말을 속으로 곱씹었다. 슬쩍 올려다보며 눈치를 주는 것이, 그러는 너는? 이라는 질문을 담고 있었다. 행크는 옅게 웃으면서 대답했다.

 

"저는 그리운데요."

"솔직해서 좋네."

"교수님도 그렇게 해보시지 그래요."

 

행크는 가볍게 찰스의 휠체어를 밀었다. 산책을 하던 도중 행크를 먼저 돌려보내고는 석양으로 인해 붉게 물든 초저녁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가슴 한 구석이 누가 일부러 찌르는 것처럼 따가웠다. 아마 처음으로, 그가 자신에게 마음의 문을 연 곳이 이 자리일 것이다. 찰스는 묵묵히 속으로 온갖 험한 말과 욕을 되뇌었다. 정작 본인이 눈 앞에 있으면 하지도 못할 말들을, 가득.

 

"망할 놈, 나쁜 자식. 천하에 못된 놈. 적어도, 이 꼴을 냈으면.."

 

찰스는 끝내 말을 잇지 못했다. 그것은 순수한 찰스의 속마음이었으며, 간절하게 바라는 염원이었다. 그 본인 외에는 결코 그 어느 누구도 이루어 줄 수 없는, 그런 꿈. 

 

"그럼 어쩌라는 건가."

"......" 

"오랜만에 보러 왔더니 듣는 말이라곤 욕 밖에 없군, 찰스."

"...넌 좀 들어도 싸."

 

헛웃음이 나왔다. 곁에 다가오는 그의 발걸음 소리가 다 헛된 꿈인 것 같아서 꿈이라면 빨리 깨고싶다고 생각했다. 무릎 위로 묵직하게 올라오는 무게감에 찰스는 숨을 들이켰다. 깜짝 놀란 찰스는 얼른 그것을 집어 던졌고, 무겁게만 보였던 헬멧은 저 멀리 담을 넘어 날아가버렸다.

 

"에릭?"

"그걸 그렇게 던져버릴 줄은 몰랐는걸."

"놀랐잖아!"

"뭐, 자네 주려고 가져온 것은 맞네만."

 

찰스는 놀란 눈으로 에릭을 바라보았다. 정말로 오랜만에 본 에릭의 모습은, 그 옛날 정말로 하나밖에 없다고 생각했던 친구의 모습을 닮아있었다. 에릭은 천천히 찰스의 휠체어를 밀기 시작했다. 찰스는 언제 깨져버릴지 모르는 평화에 혼자서 숨죽여야만 했다. 물론, 그와 다시 이렇게 걸을 수 있다는 것은 오랫동안 염원하던 일이었지만 그것은 결코 이루어질 수 없기에, 염원이라고 한 것이다. 

 

"꿈이야?"

"꿈이었으면 좋겠나?"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드는데."

"꿈일지도 모르지."

 

정원을 빙 돌아 다시 둘이 만난 곳으로 돌아왔을 때, 에린은 천천히 담장에 기대섰다. 찰스는 아직도 이 상황을 어떻게 생각해야할지 갈피를 잡지 못한 상태였다. 갑작스럽게 다시 나타난 에릭과, 그의 마지막 방어구인 헬맷을 자신한테 준 에릭. 어디까지가 현실이고 어디까지가 꿈인지 분간해 낼 자신이 없었다. 그저 모든것이 현실이었으면 좋겠다고 바라고, 또 바랬다.

 

"이제 자네랑은 싸울 이유가 없을 것 같다고 생각했어."

"....."

"그럼 저 헬맷도 필요없을 테고, 내가 자네에게 부탁하고 싶은 것을 들어줄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

"부탁?"

"그래, 부탁이 있어. 두 가지. 하나는, 저 헬맷이 없어도 내 머릿속에 들어오지 말 것."

"에릭."

"물론 네가 그러지 않을 것이라는 걸 알아. 또 하나는."

 

에릭은 찰스의 손을 붙잡고 그와 눈을 맞추었다. 그리고 꽤나 오랜만에 보는 것 같은 옅은 미소를 지어보였다.

 

"네 곁에 있고 싶은데."

"...그게 내 허락이 있어야만 하는 일인가?"

"옛날엔 몰라도 지금은 그렇지. 그리고 무엇보다 그 어린 짐승은 네가 없으면 나 혼자 다루기가 벅차다고."

 

찰스는 순간 곤란해하는 행크의 얼굴이 눈에 선해서 웃음이 터져나왔다.

 

"내가 싫다고 하면 어쩌려고 그래?" 

"그럼 허락해 줄 때 까지 계속 부탁해보려고 그랬지."

"거짓말."

"너무 뻔했나?"

"그래. 넌 내가 그걸 거절하지 못할 것이라는 걸 아주 잘 알고 있겠지. 그러니까 네가 나쁜놈이라는 거야."

"네가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것이라고 확신했기 때문이지."

 

에릭은 가볍게 자신의 머리를 검지 손가락으로 두드렸고, 찰스는 그것이 지금은 그의 머릿속을 들여다봐도 괜찮다는 뜻임을 알았다. 진지한 에릭의 눈빛에 찰스는 결국 손쉽게 백기를 들며 항복선언을 했다. 그의 생각을 읽지 않아도 충분히, 그가 무슨말을 하고 싶은지 모를만큼 찰스는 어리숙하지 않았다. 

 

"그래, 맞아. 나도 너와 같은 생각이지."

"그럼 yes, 라고 알지."

"좋아, 그럼 나도 조건이 있어."

"뭐지?"

 

찰스는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에릭의 뺨에 올려놓았다. 차가운 그의 피부에 지금까지 간직하고 있던 찰스의 온기가 한꺼번에 빨려들어가는 느낌이 생생했다.

 

"다신 혼자서 멋대로 떠나지 말게. 벌써 쓸쓸한 건 참기 힘든 나이가 됐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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