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07. 12


그 날 이후, 존의 삶은 달라졌다면 참 많이 달라졌을 것이고, 아니라면 또 아닐 것이다. 

 

고담시를 구한 영웅 베트맨, 브루스 웨인이 사라지고 난 뒤에 존 블레이크는 그에게서 어마어마한 것을 물려받았다. 정작 그것을 처음 발견했을 때는 무척 가슴이 뛰었고 뭐라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장난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것은 그 때, 그 한 때였다. 막상 존은 이 다음 혼자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섣불리 단정지을 수는 없었다. 그가 정말로 자신이 그의 뒤를 이어가기를 원하는지, 아니면 그냥 당신의 정체를 알고 있던 한 청년에게 남긴 유산같은 것인지는 단지 이렇다할 추측만 할 뿐, 사실은 아무도 모를 일이었다.

 

존은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를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불의를 보면 참을 수 없는 사람, 감정 조절을 해야만 하는 사람, 거짓 웃음으로 자신을 무장하고 있는 사람. 자신이 베트맨의 정체를 안 것은 단순히 운이 좋아서, 혹은 감이 좋아서였다. 그냥 찍었던 문제의 답이 맞았던 것이다. 그런 자신이 그의 뒤를 잇는다, 라고 말할 수 있을 만한 인간인가. 존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이 세상의 영웅, 유일한 베트맨은 브루스 웨인, 그 한 사람 뿐이다.

 

결과적으로 존은 브루스에게 받은 모든 것을 손에서 내려놓았다. 너무 버겁고, 무거운 것이었다. 고작 스무살 중반이 된 청년에게는. 

그곳은 때때로 베트맨이 생각나거나 아니면 브루스 웨인이 생각나거나, 그 날의 일이 생각이 나면 심심찮게 둘러보러 오는 곳이 되었다. 그곳으로 들어갈 때 심심하면 시원한 폭포세례도 한 번 맞아주는 것도 기분 전환의 일종이었다. 그리고 몇 분, 몇 시간을 그 곳에서 많은 생각을 해보고 나서 다시 밖으로 나갔다. 

 

 

*

 

 

"어서오세요."

 

경찰을 그만두고 나서 존은 돈을 벌어야만 했다. 아무리 짠 월급이라고 해도 고정된 수입이 있던 경찰을 그렇게 망설임 없이 그만둔 것은 후회하지 않았지만 그 후의 일이 막막한 것은 사실이었다. 그런 사정을 아는 고아원 원장님은 웨인가의 저택으로 들어와 같이 살자고 했지만 존은 혼자만의 공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하루에 한 번, 꼬박꼬박 아이들을 만나러 갔다. 저택에서 그리 멀지 않은 카페에 직원으로 일하고 있는것도 벌써 수개월이었다. 그동안 존의 생활은 무의미한 시간 보내기의 연속이었다. 그래도 혹시 몰라 자기관리에는 시간과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그래도 여전히, 근본적으로 제일 궁금했던 문제의 답은 나오지 않은 채 였다.

 

"어서오.."

"여기 있어서는 안 되는 사람이 있군."

 

습관적으로 포스기계를 보고 있던 존은 절대로 잊을 수 없는 그 목소리에 깜짝 놀라 기함을 쳤다. 


"...브루스 씨?"

 

고급스러운 옷차림에 딱 봐도 상류층이라는 분위기를 실컷 풍기고 있는 사람은 정말 환상이 아니었다. 검은 모자를 쓰고 선글라스를 끼고 있는 그는 아무리 숨기려 해도 브루스 웨인이었다. 그는 주위를 얼핏 둘러보고는 검지 손가를을 입술에 올려놓으며 조용히 하라는 제스쳐를 취했고, 존은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이 고담시에서 브루스 웨인이 베트맨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손에 꼽을 정도였고, 자신을 포함한 그 모든 사람들은 당연히 그가 죽은 줄 알고 있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브루스 웨인'이 죽은 건 고담시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다. 


"시간 되나?"

"....."

"얘기를 좀 하고 싶군."

 

존은 당당하다 못해 뻔뻔스러운 작자의 얼굴에 차오르는 헛웃음을 숨길 생각도 못하고 그대로 흘려버렸다. 


"곧 있으면 점심시간이니, 조금만 기다리시죠."



*



대충 유니폼을 정리한 존은 앞치마만 벗어두고 그가 앉아있는 자리로 향했다. 존은 그가 다른 사람의 시선이 모이기 힘든 구석자리를 참 잘도 찾았다고 생각했다.


"얼굴에 다 쓰여있군. 이 카페 회사소유였어. 그러니 자리나 메뉴같은 건 아주 잘 알고 있지."

"그렇게 티가 났습니까?"

"조금. 그나저나, 별로 놀라는 얼굴이 아니군."

"충분히 놀랐습니다. 영락없이 당신이 죽은 줄로만 알고 있었으니까요."


왠지 모르게 목이 막히는 기분이라 존은 눈 앞에 놓인 아이스티를 서둘러 들이켰다. 달콤쌉사름한 향이 입안을 맴돌았다.


"그래서, 내가 준 선물은?"

"그게 선물입니까?"

"선물이지. 그곳은 내, 베트맨의 모든 것이니까."

"..왜 저한테 주신 겁니까?"

"답을 알고 있으면서 묻는군."

"저는.."


존은 이제 한 가지 결론 밖에 내릴 수 없었다. 그가 원한 것은 명백하게 존이 그의 뒤를 물려받기를 원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 자체에 알 수 없는 긴장감과 무게감을 느낌 존은 고개를 저었다. 


"브루스. 당신이 내 어떤 면을 보고 그렇게 해줬으면 좋겠는지 모르겠지만.. 아니요, 나는 못해요."

"내가 처음 봤던 존 블레이크는 이런 청년이 아니었어. 난 벌써부터 옛저녁에 네가 이 고담시를 지킬것이라고 생각했지 이런 카페에서 일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고."

"당신이 원하는 것이 얼마나 어렵고 힘든일인지 당신이 제일 잘 알면서 그런 소리를 하다니 뻔뻔하군요."

"그러니 자네를 선택했지."

"왜죠? 나는 당신의 절반도 닮지 않았어요. 아니, 못한거죠. 당신이 더 잘 알잖아요. 저는 베트맨과 닮은 점이 하나도 없습니다."

"꼭 닮았다고 해야하나? 큰 착각을 하고 있는 모양인데, 이 일을 할 사람은 너 밖에 없어. 너만이, 이 고담시의 사람들이 모르는 모든 사건의 진실을 알고 있지."


그의 말에 존은 그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선글라스에 가려져있다 한들, 그의 눈은 올곧을 것이며 이 곳에 온 순간부터 자신만을 정직하게 바라보고 있을 것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존은 무거운 한숨을 내쉬며 꼭 칭얼대는 어린아이처럼 중얼거렸다.


"이봐요, 당신이 날 선택해준 건 고마워요. 내가 옛날에도 말했지만 당신은 원래 영웅이니까. 그리고, 그.. 제가 말했습니까? 생각해보니 안한 것 같은데.. '브루스 웨인'을 처음 본 곳은 고아원이지만, '베트맨'을 처음 본 곳은 길거리였습니다. 아버지가 노름빚으로 제 눈 앞에서 살해당했다고 말했던 거 기억하죠? 그 때 사실은 저도 죽을 운명이었습니다. 아니, 정확히는 팔려나갈 운명이었겠죠. 그들은 돈이 되는 걸 원했으니까. 그 때 절 구해준 게, 베트맨이거든요. 그러고 나서 말씀드린 것처럼 고아원에 가서 당신을 만났을 때, 저는 확신했죠."

"그건 처음 듣는 이야기가 맞군."

"그래요, 아무튼.. 저는 그럴 만한 사람이 아니라는 겁니다."

"어째서 그렇게 확신하는 거지?"

"저는 누굴 구한다거나 하는 큰 일을 할 사람이 아닙니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나는 자네가 그 때 수많은 사람의 목숨을 구한 것을 알고 있어."

존은 기어코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그 때, 그 대폭동 사건 때 확실히 잘난체를 해보자면 존은 수많은 사람들을 구했다. 존이 한 일은 누가 봐도 영웅적인 일이라고 할 수 있었다. 존은 그 때 무서울 것이 없었다. 자신이 믿고 있는, 절대로 부숴지지 않을 다이아몬드 같은 영웅이 강인하게 서 있었기 때문이다. 오로지 자신의 영웅이라고 생각했던 사람을 도와서 할 수 있는 일은, 할 수 없어도 할 수 있게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 땐 당신이 있었으니까."

"그래, 솔직하게 말해봐. 네 변명을 듣는 것도 꽤 재밌지만."

"..당신 사람이 참 못됐습니다."

"그런 말 자주 듣지."

 

이미 동난 아이스티잔을 멀뚱히 바라보던 존은 한참 동안 허공에 손가락을 놀리며 망설이다 차마 그의 눈을 마주보며 얘기하진 못하고 고개를 푹 숙이며 개미가 기어갈 듯한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그래요, 당신이 없으니까 못한다구요."


존은 필요했다. 예전부터 그가 자신이 그의 뒤를 이어줄 것을 바라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이렇게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은 존에게는 브루스 웨인이, 그의 영웅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스스로 생각해도 자신은 아직 많이 어렸다. 가치를 판단하는 일에도 사소한 감정에 휘말리기 쉬운 존재였다. 그렇기에, 존은 그가 필요했다. 자신의 길을 이끌어 줄 존재가.


"오늘 저녁에 시간 되나?"

"..네?"

"한동안 바쁠거야. 이왕이면 얼른 그만 둬."

"뭐라고요?"

 

부끄러운 고백 뒤 들려오는 것은 비웃음도 아닌 일방적인 통보였다. 물론 그가 존의 영웅은 맞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갑자기 이렇게 행동해도 되는 건가.


"아니, 잠깐만요. 한동안 바쁘다니요? 누가요? 당신?"

"아마도."

"뭘 하실 생각입니까?"

"저택은 고아원에게 줘버렸으니, 너랑 나랑 같이 새로 살 집을 구해야겠지. 이왕이면 그 동굴 근처에."

"....."


순간 존은 자신의 귀를 의심할 수 밖에 없었다. 누가 누구랑 같이 살 집? 아무런 대꾸도 못하고 있던 존에게 그는 아주 상냥하고 다정해보이는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왜, 싫은가?"

"아, 아니.. 그게 아니라."

"내가 필요하다며. 사실 원래 그러려고 온 거긴 한데, 네가 그렇게 열혈히 나를 원한다고 말까지 해줬으니 내가 왜 내 후계자를 마다하겠나. 돈이라면 걱정하지 말게나. 사실 너는 모르는 네 이름으로 된 계좌에 내 유산이 꽤 많이 있거든."

"제가 언제 열혈히..!"


화악 달아오르는 얼굴을 주체하지 못하고 아예 고개를 돌려버린 존의 미간은 있는 힘껏 구겨져 있었고, 브루스는 다 식어버린 커피를 홀짝이며 은은히 미소 짓고 있었다.


"어쨌든, 고담시로 돌아온다는 말씀이시네요."


그는 천천히 커피잔을 내려놓으며 존을 향해 여전히 웃는 얼굴로 조그맣게 속삭였다.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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