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번째 사랑은 아니었다. 그랬으면 좋았겠지만 사실 그럴 수는 없었다. 이미 그와 처음으로 만났을 때 자신의 나이는 삼십을 넘겼고, 그도 그와 비슷했다. 기껏해야 한두 살 정도의 차이였을 뿐이었다. 자신의 첫 번째 사랑은 누가 봐도 로이스였지만, 그의 첫 번째 사랑은 누구인지 아무도 몰랐다. 있기는 했을까, 하는 물음이 없던 것도 아니었지만 언젠가 그가 속삭여준 말은 틀림없는 사랑의 속삭임이었다.

어쩌면 그의 첫 번째 사랑이 자신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그러면 얼마나 좋을까. 자신의 첫 번째 사랑은 타인이었으면서 그에게 그의 첫 번째 사랑이 자신이길 바라는 건 이기적이라고 생각하였으나, 그는 자신을 그렇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이 세상에 유일한 존재였다. 이성을 잃어버린 자신을 잠재울 수 있는 이는 그 말고도 몇 있었지만, 이성을 잃어버리게 하는 존재는 그 하나뿐이었다.

그는, 브루스 웨인은 클락 켄트에게 그런 존재였다. ‘조절’, ‘인내심’, ‘자제심그것들은 클락이 이 세상의 그 누구보다 자신있어했던 것의 이름이었다. 그렇지 않았으면 금방이라도 클락은 그들의 세계에서 쫓겨났을 것이고, 그 어떠한 곳에도 발을 붙이지 못했을 것이리라.

우스운 이야기였지만 그랬기에, 클락에게 있어 순위를 매기고자 하면 브루스가 첫 번째였다. 물론 브루스에게는 비밀이었다. 그의 애인이 되기 위한 제 1 조건이 그것이었다. 절대로 이 세계보다 브루스 웨인을 먼저 생각하지 말 것. 클락은 그러겠노라 했지만 그리 하지 않았다는 것을 아마 브루스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아니, 그는 알고 있었다. 아무렴. 이제껏 제일 많이 싸우게 된 원인이 그것이었으니 말이다. 그래도 클락은 할 수 있는 만큼 그러려고 무던히도 노력했다. 그것을 알아주기 바란다는 자신의 말에 브루스가 고개를 끄덕였으니 말이다.


브루스가 원래부터 무턱대고 막무가내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그는 뛰어난 탐정이었고, 훌륭한 지략가였지만 동시에 무모했다. 좋게 말하면 용기가 가상하다고 할 수 있었지만 클락의 눈에는 늘 불구덩이로 뛰어드는 나방 꼴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랬기에 그가 더욱 매력적이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이제 와서 하는 이야기지만 클락에게 브루스가 매력적이지 않아 보일 때가 손에 꼽을 수 있을 만큼 적었을 것이다.


그에게는 적이 너무 많았다. 많아도 너무 많았다. 배트맨일 때야 고담의 모든 빌런이 그의 적이었고 나아가 외계의 잠재적인 위협도 적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브루스 웨인일 때도 적이 많았다. 어떻게 해서든 그의 명성에 흠집을 하나라도 더 내보려고 아등바등 애를 쓰는 구더기들이 득실거리는 것은 물론이요, ‘웨인의 힘을 점점 더 견제하기 시작한 세상의 시선도 그랬다. 클락은 그 모든 것이 너무나도 부조리하다고 생각했다. 그가 배트맨이어서, 라는 이유도 물론 있었으나 어찌하여 웨인에게 이리도 세상이 쓴 시선을 보이는가에 대해서.


그래서 브루스 웨인의 가슴을 꿰뚫은 총알이, 고작 그 작은 쇳덩이 하나가.


브루스는 그렇게 죽어서는 안 됐다. 웨인 엔터프라이즈의 사업이 번창하는 것을 축복하기 위한 파티장에서 그렇게 허무하게 죽어서는 안 되었다.

언젠가 브루스는 자신에게 자신의 꿈, 정확히는 악몽에 대해 말해준 적이 있었다.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웨인에게 일어난 비극을 알고 있었다. 불행하게도 브루스 또한 그 운명의 굴레를 벗어날 수 없었던 모양이었다. 토마스 웨인이 사망했던 때와 똑같이 허술하기 짝이 없는 권총 한 자루 때문에, 그 탓에.


제발, 브루스. 제발…….”


이 세상의 그 누구보다 그의 비명소리가 가장 크고 가장 처절했으리라. 브루스의 생명이 사라지는 1, 1초가 절망의 연속이었다. 그 이전에도 이러했던 순간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으나 그럴 때마다 반드시 브루스는, 배트맨은 다시 돌아올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기에. 그랬기에 괜찮았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그럴 수 없을 것이다. 클락은 인정할 수 없었다. 인정하기 싫었다.


브루스는 천천히 손을 들어 올려 클락의, 슈퍼맨의 눈을 손바닥으로 가려주었다. 슈퍼맨은 함부로 다른 사람에게 눈물을 보여서는 안 되었고, 브루스가 배트맨이라는 사실은 그가 죽는 그 순간까지도 함구해야만 하는 사실이었다. 그를 위해서도, 그의 아이들을 위해서도.

슈퍼맨이 다시 눈을 떴을 때, 그의 하늘은 이미 저물어있었다.

 

브루스를 죽인 남자는 그 자리에서 고든에게 검거되어 경찰서로 연행되었다. 그 모든 일련의 과정을 슈퍼맨은, 클락은 그저 바라만 보고 있었다. 바라만 볼 수밖에 없었다. 그 속은 이미 문드러져 썩어가고 있음이 분명했지만 그럴 수밖에 없었다.

 

미워하지 마. 나도, 그 누구도.

 

브루스의 마지막 부탁을 차마 어길 수 없었기에.

 

 

*

 

 

붉은 망토의 영웅이 자취를 감추었다.

 

브루스 웨인의 장례식은 그리 성대하게 치러지지는 못했다. 브루스 웨인은 죽었지만, 배트맨은 죽지 않았다. 그의 첫 번째 아들이 그 이름을 물려받았다. 슈퍼맨은 브루스 웨인의 장례식에 클락 켄트로 나타났다. 언젠가 브루스가 선물이라고 가져다주었던 고급 브랜드의 검은 정장을 입고, 남들이 보기에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두꺼운 렌즈의 안경을 끼고. 붉은 망토는 찾아볼 수 없었다. 그 이후로 영원히.

알프레드는 클락이 브루스의 관에 자신의 망토를 같이 묻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의 주인이 그것을 원할 리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말리지 못했다.

 

어느 누군가는 그렇게 예상했었다. 배트맨을 잃어버린 슈퍼맨이 미쳐 날뛸 것이라고. 그러나 슈퍼맨은 미쳐 날뛰지 않았다. 단지 그 이름을 버렸을 뿐. 애석하게도 클락은 자신이 발을 딛고 서 있는 그들의 세계가 너무나도 미웠지만, 너무나도 사랑스러웠다. 지금 와서 돌이켜보니, 이 세계를 자신보다 더욱 더 많이 사랑한 것은 브루스였다. 그랬기에 클락은 브루스가 사랑한 그 세계를 함부로 부술 수 없었다.

미워하지만 사랑했고, 부술 수 없지만 지킬 수도 없었다. 그랬기에 클락은 슈퍼맨의 이름을 버렸다. 딱히 정체를 숨기려는 노력도 하지 않았다. 클락은 수트를 입지도 않은 채로 허공을 날아다니며 태양빛에 몸을 맡겼지만 채워지지 않는 허무함이 금방이라도 자신의 모든 것을 집어삼킬 것 같았다.

 

클락은 브루스와 함께했던 시간을 되새겼다. 금방이라도 잔뜩 찌푸린 표정으로 목소리만큼은 다정하게 그 멍청한 안경 좀 벗고 이리 좀 와보라고 속삭여줄 것만 같았다. 브루스가 죽은 뒤, 그 뒤를 따라가려는 생각을 아예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할 수 없었다. 영특한 그의 아들들이 브루스가 가지고 있던 크립토나이트를 전부 숨겨버렸으니 할 수 없었다.

먹지 않아도, 숨을 쉬지 않아도 살 수 있는 몸이 원망스러웠다. 영원한 불로불사의 몸은 아니었지만 훨씬 더 길고 오랜 세월을 살 수는 있었다.

 

할 말이 있어.”

 

기실 이 시점에서 클락이 제일 보기 어려웠던 이들 중 하나가 바로 데미안이었다. 그러나 그러면 그럴수록 데미안은 끈질기게 클락을 불러 세웠고 망토가 없다는 것을 깨달을 때마다 클락의 체크무늬 셔츠를 잡아 당겼다. 클락은 데미안과 대화를 나누는 것이 불편한 것은 아니었다. 두려웠고, 무서웠다. ‘슈퍼맨이었던남자를 두렵게 만들 수 있는 존재, . 지금으로서는 데미안이 유일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데미, 아니, 로빈, 나는…….”

따라와, 이 겁쟁이.”

 

어쩐지, 브루스가 말하는 것 같은 걸. 클락은 반쯤 울상을 지으며 얌전히 데미안에게 끌려갔다. 사실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도망칠 수 있었고, 영원히 데미안과 마주칠 수 없을 수도 있었겠지만 그러지 못한 것은 순전히 데미안이 브루스의 아들이기 때문이었다.

데미안을 따라 간 곳은 배트맨의 케이브였다. 클락이 제일 발걸음하기 꺼려했던 장소. 브루스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추억의 장소. 입구에서 멍청하게 서 있는 클락을 내버려두고 데미안은 익숙하게 컴퓨터를 조종했다. 몇 번의 잠금 화면을 차례대로 푼 데미안은 무수히 많은 자료를 모니터에 띄우며 말했다.

 

내가 죽었을 때, 아버지가 했던 방법이래.”

 

이거 녹화되고 있는 거야?

글쎄.

하하, 그럼 기념으로 말해볼까. 브루스, …….

끌 거야.

 

브루스!

도대체 몇 번을 말해야 해? 이 모습일 때는 그 이름으로 부르지 말라니까.

 

사람이 왜 이렇게 무모해! 그러다가, 그러다가 잘못되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럴 일은 없었을 거야.

어떻게 그렇게 확신하는데?

네가 그렇게 내버려두지 않을 거잖아.

…….

그렇지?

너 정말 못됐다…….

 

, 아아.

뭐하고 계세요?

……아무것도.

 

클락.

 

사랑해.

, 말했다!

…….

이번 내기는 내가 이겼어! 돈 내놔, .

 

극복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거 알아. 그렇다고 외면하는 것만이 답은 아니잖아. 그렇지, 보이스카웃?”

 

화면 가득 넘쳐흐르는 사랑하는 이의 얼굴을 보며 클락은 그저 말없이 그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클락은 웃고 울었다. 우스꽝스러운 얼굴을 하고는.

 

*

 

붉은 망토의 영웅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는 더 이상 붉은 망토를 두르지 않았다.

그는, 슈퍼맨은 메트로폴리스의 수호신이며 고담의 기사였다.

 

검은 망토가 물결치듯 춤을 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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