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 뭐라고?”

“못 들은 척 하는 거야, 아니면 정말로 못 들은 거야?”

“그야 당연히…….”


월리는 지금 자신이 꿈을 꾸고 있는 것은 아닌가에 대하여 조금 고민해볼 필요성을 느꼈다. 분명 그들이 있는 곳은 와치타워 한복판이었고, 다른 사람들도 있었다. 초기 멤버 일곱 명만 들어갈 수 있는 회의실이긴 했어도 분명한 것은.


“오늘 저녁에 시간 되냐고 물었는데.”


배트맨에게 데이트 신청을 받았다는 것이다.


*


사실 공식적으로 발표된 것은 아니었고 - 애초에 그럴 일이 있을 리가 만무했지만 - 알고 있는 사람도 극히 적은 편이었지만 배트맨과 플래시는 연인 사이이다. 어쨌든 이것은 명백한 사실이었다.

처음 고백을 한 것은 월리였다. 원래 ‘플래시’는 ‘배트맨’에게 동경 이상의 마음을 품고 있었을지도 모르는 노릇이었다. 그러던 것이 배트맨은 브루스 웨인이었다, 라는 사실을 접하게 되자 그것이 기폭제가 된 듯 자각하지도 못한 감정들을 하나 둘 헤아리며 꽤 허덕였었다.

브루스 웨인. 그 누가 그를 모르겠는가. 브루스가 배트맨인지 모르던 시절의 일이다. 월리는 그가 정말이지 다른 세상에 살고 있는 사람이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온갖 화려한 것에 파묻혀있음에도 제 빛을 잃어버리지 않는 당당한 사람. 사람들은 그를 아주 이름 높은 장인이 세공해놓은 다이아몬드라 칭찬했지만, 월리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누가 뭐래도 그는 원석 그 자체였다. 그의 세공은 다른 누군가가 해주는 것이 아닌 브루스, 그가 직접 자신을 깎아가며 보여주는 것이며 그랬기에 그 주위로 수많은 다른 보석들이 즐비해도 그 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것이라고. 월리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래서 그렇게 생각만 해왔을 뿐이었던 게 그가 자신이 생각했던 것처럼 원석 그 자체라는 것을 확인받았을 때는 마음이 벅차기까지 했다. 매끄럽게 깎아내린 면은 더없이 화려하고 반짝이는 브루스 웨인을, 거칠고 투박하게 깎여진 면은 어둠의 기사를. 월리는 딱히 그 어느 쪽이 브루스 웨인의 진정한 모습이다, 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양 쪽 모두가 브루스였고, 놀랍게도 월리는 모든 쪽을 다 좋아했다. 그저 배트맨이자 브루스 웨인이고, 브루스 웨인이자 배트맨인 한 남자를 좋아했다.


이제 와서 말하는 거지만 월리가 브루스에게 고백하기까지 무려 3주라는 시간이 걸렸는데, 사실 이 고백도 정말 홧김에 해버린 거라 그 때 일만 생각하면 월리는 본의 아니게 조금 창피해졌다. 우연히 다이애나와 존과 다른 몇몇 리그원들과 함께 한가롭게 와치타워에서 TV를 보고 있을 때의 일이었다. TV에서는 브루스 웨인이 나왔고, 이야기의 주제는 자연스럽게 브루스 웨인으로 흘러갔다.

배트맨이 브루스 웨인이라는 걸 알고 있는 다이애나나 존, 월리는 입을 여는 것보다는 다무는 것이 현명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나 다른 리그원들은 그가 배트맨이라는 걸 몰랐으니 자기들이 알고 있는 사실을 하나 둘 꺼내기 시작했다. 브루스 웨인을 직접 본 적이 있다는 얘기서부터 들은 얘기들까지 하나 둘 풀어놓던 와중 사건은 누군가가 ‘배트맨이랑 브루스 웨인이 혹시 연인은 아니더라도 그에 가까운 사이가 아닌가!’ 라는 의혹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월리는 차마 웃을 수 없었다. 마치 연예계의 찌라시와 같은 뜬구름 없는 소문들이 하나 둘 퍼져나가며 점차 이야기의 수위가 높아지기 시작하더니 곧 브루스 웨인은 고담의 황태자지만 부모가 물려준 자산에 기대어 사는 유흥가의 탕아일 뿐이라는 결론이 지어지고 있을 때였다. 이미 다이애나의 표정은 험악해졌다고 해도 무방했지만 쉽게 나설 수는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왜 브루스 웨인이 그런 소문에 휩싸이는가 하면, 브루스 그 스스로가 그렇게 자신을 포장하기 때문이었다. 철저하게 배트맨과 브루스 웨인을 분리시키기 위해 스스로 방탕한 재벌집 도련님 이미지로 위장하는 브루스의 노력을 헛되게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가만히 있으라는 법은 없지 않은가.


“그렇다고 해서 모르는 사람을 함부로 욕해도 되는 건 아니야.”

“…네?”

“난 그런 사람들이 나와 같은 편에 속해있다는 사실이 별로 기분 좋지 않은 걸.”


평소 월리의 성격과 태도를 생각하면 이번 사건은 굉장히 유별날 정도로 그 답지 않았다는 것을 월리 스스로도 인정하지만, 분명한 것은 다이애나가 그랬다면 문제가 커졌을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렇다면 틀림없이 그의 귀에도 직접 이야기가 들어갔을 것이고.


“지금 뭐하는 거지?”


…라는 사태가 일어날 것임이 분명했다.


“플래시, 잠깐 따라오도록.”


월리는 자신이 왜 초등학교에서 혼나는 어린 아이의 심정이 되어야만 하는지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꾸중을 듣는다고 할까, 아무튼, 어쨌든. 그러나 회의실로 들어선 순간, 월리는 공기가 바뀌었음을 본능적으로 알았다. 브루스, 배트맨의 분위기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유했으니 말이다.


“배츠, 나는…….”

“알아.”

“응?”

“너는 내가 일부러 멍청한 재벌집 도련님 연기를 해야만 한다는 걸 알면서도 다른 사람이 그걸 욕하는 게 싫은 거지.”

“…그렇지.”

“너같이 나를 있는 그대로 봐주는 사람이 있으니까 그 짓 하는 것도 생각보다 나쁘지는 않아. 그래도 거기서 더 있었다가는 이상한 소문이 돌았을 거야. 네가 개인적으로 브루스 웨인과 친분이 있다던가……. 듣고 있나, 플래시?”

“있잖아, 브루스.”

“…….”

“나 역시 네가 좋아.”


정말이지 뜬금없는 고백이었지만 너무나도 월리다움을, 브루스는 알고 있었다.


“나는 별로 연애하기 좋은 타입은 아닌데.”

“음, 역시 이런 점까지 좋네.”


그리고 그렇게, 연인이 되었다.


*


“솔직히 너무 무리하는 거 아니야? 라고 물어야 할 타이밍이긴 한데 별로 무리하는 것 같지도 않고 당연해보여서 놀랍다.”

“흠.”


통째로 빌린 고급 레스토랑의 가장 전망이 좋아 보이는 자리에 앉아 고담의 야경을 한 눈에 내려다보며, 월리는 열다섯 번째 접시의 스테이크를 말끔히 해치웠다.


“그래도 역시 알프레드가 만들어준 쿠키가 제일 맛있는걸.”

“알프레드에게 쿠키를 서른 판이나 구워달라고 할 수는 없잖아.”

“하긴 그건 그래.”


특수한 능력을 가진 탓에 정말 어마어마한 칼로리를 섭취해야만 버틸 수 있는 월리에게 알프레드 수제 쿠키란, 서른 판을 먹어도 사실 모자라긴 했다.

둘만의 시간을 보내게 된 건 상당히 오래간만이었고, 나름 힘을 주고 왔다는 티가 팍팍 나는 월리를 보며 브루스는 웃었다. 솔직히 말해서 비웃음 - 연인 사이에도 비웃음, 이라는 게 존재하는 지는 의문이다. - 당한 것 같았지만 그마저도 기분이 썩 나쁘지 않은 걸 보니 데이트의 효과란 실로 대단했다.

텅 비어있는 레스토랑의 분위기는 좋으면서도 영 적응이 되지 않았다. 굳이 평범하게 식당을 예약하는 것이 아닌, 통째로 건물을 빌리는 곳에 약속을 잡는 것은 월리를 위한 배려였다. 브루스의 이미지야 이미 입소문을 탈대로 타서 썩 더 나빠질 것도 없었지만 월리는 달랐다.


“상관없지 않을까?”

“갑자기 무슨 말이야?”

“브루스 웨인의 애인이 월리 웨스트라는 걸 온 세상이 알아도 상관없지 않을까, 해서.”

“글쎄.”

“별로 상관없는 이야기는 아닌 것 같네. 있지, 브루스. 난 배츠인 너도 좋고, 브루스 웨인인 너도 좋아. 그러니까 난 정말로 상관없어. 사실 차라리 알아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때도 많다고. 누구씨 말처럼 별로 연애하기에 좋은 타입은 아니니까.”

“그래?”

“농담이야. 그런 거 거짓말일게 당연하잖아.”


브루스는 아무렇지 않은 표정을 지어보였지만, 아무렇지 않지 않다는 걸 월리는 알고 있었다. 딱히 정말로 불만이 있어서 그런 말을 한 건 아닌데. 월리는 와인 잔을 내려놓았다.


“그게 그런 뜻이 아니라…….”

“나는 별로 좋은 생각이 아니라고 생각해.”

“응, 알았어.”

“만약 그랬다가 천하의 브루스 웨인을 꼬신 남자가 대체 얼마나 대단한 남자기에, 하면서 달려들 사람들이 싫어서.”

“…어?”

“월리 웨스트. 너만 나를 좋아하는 게 아니야.”


우와, 처음 들었다. 옛날에도 한 번 이런 적 있었는데. 온 세상이 빠르게, 빠르게 지나가서 여기가 어딘지 도통 모르겠던 그런 적이. 월리는 혹시 자기가 무의식중에 온 몸을 떨고 있지는 않을까 새삼 염려했다. 브루스는 배트맨이지만, 이런 고층 레스토랑의 창문이 다 깨져버리면 분명 다칠 테니까.


“내 어디가 좋아?”

“다 말해주기에는 오늘 밤이 부족할 텐데.”

“그런 건 누구한테 배웠어?”

“세상이 가르쳐줬지.”

“치사해.”

“왜?”

“나도 배울래.”

“안 돼. 너는 너 자체로, 월리 웨스트라서 좋은 거니까.”

“아, 진짜 치사해.”


월리는 점점 비워져가는 브루스의 와인 잔을 바라보며 열여섯 번째 스테이크 접시를 빤히 바라보았다.

큰일 났어. 정말, 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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