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새들어 이상한 기분이었다. 이단은 자신의 상태를 그렇게 정의하고 있었다. 무심코 브랜트의 책상 위에 있던 보고서를 발견해서 그런 걸지도 모른다. 보고서의 내용은 살벌하기 그지 없었다. 벤지가 봤더라면 아무리 이런 광경이 익숙한 요원일지라도 질색을 하며 보고서를 던져버렸을지도 모른다. 실제로 이단도 그다지 그 보고서를 오랫동안 들여다보고 싶지는 않았다. I사로 위장해있던 테러리스트 집단 살인. 서른 명이 넘는 건장한 남자들이 죽어나갔지만, 그 누구도 이 사건을 뉴스를 통해 접할 수 없었다. IMF라고 완벽하게 언론을 통제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FBI나 CIA보다는 더 비밀스러운 편이었다. 이단은 아무렇지 않은 표정을 하고는,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로 물었다.


"너무 많이 죽인 거 아냐?"


브랜트는 천천히 이단을 올려다보았다. 브랜트의 책상 위에는 그와 비슷한 보고서가 여럿이었다. 죽은 사람만 합쳐 백명은 족히 될 것이라는 것을, 이단은 알고 있었다. 브랜트가 이 모든 일을 벌였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었다. 그냥 막연한 직감이었다. 이단은 브랜트가 그 모든 사람을 죽였으리라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뿐이었다. 딱히 브랜트에게 그들을 왜 죽였느냐 물을 필요도, 이유도 없었다. 만약 문제가 되는 일이었다면 진작 헌리가 적절한 조치를 취했을 것이다.


"글쎄."


브랜트의 대답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었다. 첫째로는 이 모든 살인을 그가 인정했다는 것이고, 둘째로는 어쩌면 이 일은 이단의 생각보다 훨씬 더 심각한 경우에 해당할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단은 브랜트의 프라이버시를 침해할 생각은 없었다. 그가 어떠한 종류의 트라우마에 시달린다면 그에 관한 상담을 받아보는 것이 어떻겠냐는 추천을 해줄 수는 있을지라도 말이다. 이단은 곧 그런 생각도 접었다. 브랜트에게는 아마 그런 것조차 필요가 없을 것이니라. 


"적당히 해."

"그러는 너나 적당히 좀 해. 내 위장을 좀 지켜달라고."

"약 사다 줄까?"

"퍽이나."


그러자 이단이 빙긋 미소 지었다. 브랜트는 그런 이단의 표정이 못마땅하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이단은 그 길로 약국으로 향했다. 브랜트를 위해서 위장약 한 포쯤 사다주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살인. 사람을 죽이는 행위. 

이단은 자신이 사람을 죽이는 것은 살인이면서 동시에 살인이라고 표현할 수 없는 어딘가의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아마 자신은 사형을 면치 못하는 이 세계 최고의 사형수일 것이라 자신했다. 으으, 어딘가에서 앓는 소리가 들렸다. 익숙한 목소리였다. 


"대체 누가, 왜 이러는 거야?"

"음?"

"누가 사람들을 이렇게 죽이냐고."

"왜? 무슨 문제라도?"


이단의 물음에 벤지는 기가 차다는 표정으로 이단을 돌아보았다. 이단의 시선은 브랜트를 향해있었다. 원래 이단과 벤지는 눈 앞에 널부러져 있는 수많은 시체들과는 관련이 없는 일을 하고 있었다. 정말로 우연히 자신들에게 할당된 임무를 모두 마치고 복귀하는 도중 벤지가 이 광경을 발견한 것이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쓰레기 처리팀과 함께 브랜트가 그곳에 도착했다. 이단은 브랜트가 헐리우드의 대스타에 버금가는 연기력을 가지고 있다 확신했다. 그 수많은 시체를 보고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는 브랜트를 보며 이단은 조심스레 브랜트에게 다가가 말했다.


"왼쪽 셔츠 소매 안 쪽."

"...아."


브랜트는 이단이 말한대로 셔츠의 소매를 한 번 보고는 이단과 시선을 교환했다. 브랜트의 시선에는 그런 물음이 담겨 있었다. 뭐 하는 짓이야? 이단은 브랜트를 보며 어깨를 으쓱여보았다. 브랜트의 셔츠 소매에는 핏방울이 딱 다섯개가 찍혀있었다. 


한번쯤은, 브랜트가 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을 죽이는 지에 대해 생각해본적도 있다. 그러나 곧 그 생각을 접을 수 밖에 없었다. 이단은 브랜트를 잘 알면서, 동시에 잘 몰랐다. 브랜트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무엇을 싫어하는지, 그가 어디에 사는지, 그의 가족은 몇 인지. 이단은 어느 날 브랜트의 책상에서 보았던 보고서를 뒤적거렸다. 충동적인 것도 있었고, 그렇지 않은 것도 있었다. 이단은 브랜트가 무척이나 지능적이고 계획적인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혹여라도 꼬리가 밟힐 일은 없도록 설계해놓은 현장은 매우 그럴 듯 했다. 놀라운 것은 이 모든 사람을 다 처리하고도 브랜트는 한 번도 들키지 않았으며, 단 한 번도 부상을 입은 적이 없었다. 이단은 후자의 사실을 더욱 놀라워했다. 하긴, 아드레날린은 종종 사람이 할 수 없을 법한 일을 가능하게 만들기도 했다.


이단은 보고서를 전부 파쇄기에 넣었다. 복사본이긴 하지만 가지고 있기에는 찜찜했다. 찜찜하다? 그래, 이건 명백히 기분이 별로 좋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단은 자신이 왜 그런 기분을 느끼는가에 대해 아주 잠깐의 시간을 들였다. 결론은 생각보다 빠르게 지어졌다. 요 며칠 이단은 아주 눈에 띄게 브랜트의 뒤를 쫓고 있었으며 그에게 다가가려 했다. 이 쯤되면 브랜트가 모를 리 없을 거라 확신했다. 음, 이단은 또 다시 고민한다. 더 다가가야 하나, 그만해야 하나. 경쾌한 소리를 내며 조각조각나는 보고서들을 보며 이단은 미소 지었다. 왜? 내가 다가가면 안 되는 이유 같은 건 없잖아. 이단은 분명 브랜트가 싫어하는 목록 즈음에 자신의 이름이 있을 것이라 예상하고 있었다.





어지간해서는 브랜트가 하는 일에 절대로 터치하는 법이 없는 이단이었지만, 그건 오롯이 브랜트가 제 일을 완벽하게 처리하기 때문이었다. 자신의 손길따위는 필요도 없을 정도로 완벽했기에. 그러나 이단은 눈 앞에 서 있는 브랜트를 보며 자신의 생각을 고쳐나갔다. 이제는 위험한 수준이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브랜트가 그 많은 사람들을 죽이는 것에 관해 이단은 여전히 이유를 찾을 수 없었지만 이제는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이러다 브랜트가 죽을 수도 있다는 사실이 이단을 덮쳤다. 사실 그건 첫번째 보고서를 읽었을 때부터 은연중에 이단의 그림자에 섞여 있는 것이었지만 별로 깊게 생각한 적이 없는 문제였다. 그랬던 것이 단숨에 이단을 집어 삼켰다. 피투성이로 또 다시 널부러진 시체들 사이에 덤덤한 표정으로 앉아있는 브랜트를 보며 이단은 고개를 저었다. 실수를 너무 많이 했어. 이단은 브랜트의 옷이며 피부에 묻어있는 붉은 액체가 브랜트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렇다고 브랜트를 저 꼴로 이 곳에서 내보내기에는 지켜보는 눈이 너무 많았다.


"너 답지 않은 걸, 브랜트."


그 말에 브랜트가 웃음을 터트렸다. 고개를 끄덕이는 걸로 봐선 이단의 말에 동의를 하는 것으로도 보였다. 


"생각해 본 적 있어? 내가 이 많은 사람들을 죽이는 이유."

"생각을 해 본적은 있지."

"말해봐."

"생각을 해 본적은 있지만, 결론을 내린 적은 없어."


너무 어렵거든. 이단의 말에 브랜트는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곧 그럴 수 있다는 듯 다시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내 첫 번째 살인은 어머니였어."

"......"

"두 번째 살인은 여동생이었고, 세번째 살인은 아버지였지."

"브랜트."

"내가 이 사람들을 죽이는 이유? 사실, 네가 맞아. 결론을 내릴 수 없다고 했지? 그거야 당연하지. 이유가 없으니까. 그냥 죽이는 거야. 내가 심각한 위장병에 시달리면서도 IMF에 붙어있는 이유가 뭔지 알아? 사람을 죽여도 괜찮은 곳이니까. 그 어떠한 것에도 발목 잡힐 이유 없이, 사람을 죽일 수 있는 곳이니까. 이 나이에 교도소에 가는 건 사양이야. 난 아직 해야할 일이 많아."


브랜트는 정장 자켓을 벗었다. 그러고는 널부러져 있는 시체들 중 가장 체격이 비슷해보이는 남자의 옷을 집어 들었다. 비교적 브랜트의 것보다는 깔끔한 정장 자켓을 보며 브랜트는 그것을 입었다.


"나 먼저 갈게."

"그래."


멀어져가는 브랜트의 뒷모습을 보며 이단은 브랜트가 했던 말을 다시금 되뇌었다. 살인과 사람을 죽이는 것. 같으면서도 미묘하게 다른 말. 이단의 눈이 조용히 가라앉았다.





"네 어머니는 너를 낳다가 돌아가셨고, 여동생은 어렸을 적 교통사고. 그리고 아버지는 자살하셨지."

"이젠 내 뒷조사까지 해?"

"브랜트, 우린 그걸 살인이라고 부르지 않아."


브랜트는 어제 일어난 집단 살인 사건의 보고서를 파쇄기에 넣으려 하고 있었다. 이단은 브랜트에게서 보고서를 채가듯 빼앗고는 손으로 직접 찢었다. 


"내가 어떻게 네가 이 사람들을 죽였다는 것을 알았다고 생각해?"

"지금 나 놀려?"

"대답해봐."


이단의 말에 브랜트는 입을 열었다 닫는 행위를 반복하였다. 몇 번이나 그 행동을 반복하고 나서야 브랜트는 귀찮다는 듯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너도 나랑 똑같으니까."

"그래, 맞아."

"그럼 네가 죽인 사람은 누군데."

"줄리아."

"하, 이단. 그녀는-"

"내가 죽였어."


단호한 이단의 말에 브랜트는 입을 다물었다. 이렇게 나오면 이제 어떠한 변명도 소용이 없었다. 이단은 알고 있었다. 브랜트가 말하는 살인의 정의는 단순히 사람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저로 인해 그 사람의 존재를 이 세상에서 지워버리는 것이라는 걸. 이단은 한 순간에 무너지는 브랜트의 감정의 둑을 나몰라라 하지 않았다. 애초에 그 둑을 무너트린 것은 본인이었으니. 


"맞아. 내 인생에서 내가 저지른 살인은 세 번 뿐이야. 난 그 테러리스트들을 죽인 걸 살인이라 부르지 않지."

"그럼 뭐라고 부르는데?"

"정당방위 혹은 과실치사."


브랜트의 말에 이단은 무심코 웃음을 터트렸다. 정당방위, 정당방위라. 브랜트다운 걸. 이단의 웃음에 브랜트도 헛웃음을 지었다. 분명 브랜트의 행동은 정당방위라 할 수도 있다. 총을 든 것이 브랜트만은 아니니 말이다. 그러나 정당방위라 명하기에는 브랜트가 사람을 죽인 행위는 정교하기 짝이 없었다는 게 흠이라면 흠이다.


"그거 좋은데. 그럴듯해."

"그러니까 내가 네 번째 살인을 저지르지 않게 해달라는 말이야."


이단은 브랜트와 시선을 맞추었다. 깊게 가라앉은 옅은 갈색의 눈이 똑바로 이단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단은 순식간에 브랜트의 넥타이를 잡아 당겨 입을 맞췄다.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브랜트가 제 멱살을 잡아채는 것을 본 이단이었지만 그것따윈 상관없이 브랜트에게 키스하는데 집중했다.


"이단."

"미안하지만, 너한테 죽어줄 생각이 없어서."


이단의 말에 브랜트의 표정이 보기 좋게 구겨졌다. 이단은 장난스레 웃으며 브랜트의 미간을 손가락으로 꾹꾹 눌르며 펴주었다. 브랜트의 표정은 그 뒤로도 한참이나 다양하게 변했다. 이단은 브랜트에게 아주 약간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한참이나 제 입술을 매만지던 브랜트는 이단을 보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하긴, 네가 내 손에 죽으면 이단 헌트가 아니지."


브랜트는 사무실의 문을 닫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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