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이슨은 너무나도 익숙하게 저장고에서 숙성된 와인 병을 꺼내 들고는 무식하게 마개를 따 나발을 불며 걸음을 옮겼다. 지나치게 넓은 복도에 유일하게 제이슨의 발걸음 소리만 울렸다. 아무거나 집어온 탓에 이게 몇 년이나 숙성된 와인인지 조차 모른다. 그러나 설마하니, 브루스 웨인의 대 저택의 와인 저장고에 ‘싸구려’라는 것은 있을 수 없는 노릇이다. 향을 음미하고 천천히 입 안에서 혀를 굴리며 와인을 마시는 품위 있는 행동과는 다르게 제이슨은 억지로 목구멍 안으로 고급 와인을 밀어 넣었다. 사실 이렇게 마셔봤자 전혀, 조금도 취하지 않는다는 것은 웃긴 일이다. 억지로 사람을 살려놓더니, 괴물이 됐잖아. 제이슨의 입가에 한 단어가 맴돈다. ‘괴물’, ‘괴물’.

익숙한 방 문 앞에 자연스럽게 발걸음이 멈추었다. 이미 다 마시고 텅 비어버린 병을 차마 버리지도 못하고 어정쩡하게 들고 있는 폼으로. 저택과 제이슨의 모습은 어딘지 모르게 낮과 밤의 모습과 비슷하게 보였다. 감히 어디가 어떻게 비슷하냐하면, 서로의 영역에 침범하는 것이 지독하게도 어리석다는 것이 비슷했다.

방의 문은 또 다른 잠금장치로 잠겨있었지만 제이슨은 그 잠금장치를 푸는 법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확신은 없었다. 조심스럽게 문 앞에 와인 병을 내려놓은 제이슨이 잠금장치의 앞에 바짝 입술을 붙이고는 그 누구에게도 들리지 않을 만큼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작게 덜컹거리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자 제이슨의 얼굴이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구겨졌다. 마음 한 지편에서 불이 붙은 분노가 순식간에 제이슨을 집어 삼켰다. 그러니까, 대체, 왜! 제이슨은 부러 쿵쾅거리며 방 안으로 들어갔지만 익숙한 뒷모습이 보이자 자기도 모르게 발걸음을 우뚝 멈춰 세우고 말았다.

그의 전신을 충분히 감싸 안을 수 있을 정도로 넓은 침대에는 보기에도 고급스럽고 편안한 이불 속에 파묻혀 있는 브루스 웨인이 있었다. 이미 새벽이 한참 세상에 머물고 있는 시간인지라 ‘타인’을 눈앞에 두고도 미동조차 하지 않는 모습이 기분을 이상하게 만들었다. 지금이라도 당장 일어나 침입자가 누구인지 확인을 해야 하는 눈은 굳게 닫혀있었고, 그 답지 않게 새근거리는 숨소리가 제이슨의 기분을 더욱 이상하게 만들었다. 심지어 제이슨이 그의 곁에 자리를 잡고 앉을 때 까지만 해도 브루스는 그저 잠만 잘 뿐이었다. 충동적으로 브루스를 양 팔 안에 가둔 제이슨이 마음속으로 물었다. 이래도 깨어나지 않을 생각인거야? 브루스가 대답하지 않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제이슨은 천천히 고개를 숙여 브루스에게 입을 맞췄다. 그와 동시에 굳게 잠겨 있던 눈이 부드럽게 열리며 이 세상의 그 어떤 바다보다 차가우면서 따뜻한 세상이 제이슨을 반겼다.


“……피곤해.”


잠에 잔뜩 취한 브루스의 목소리는 카울을 쓰고 있는 배트맨의 것을 닮아있었다. 그에게 묻고 싶은 것이 많다. 대체 어째서 아직도 웨인 저택의 보안 프로그램에 ‘제이슨 토드’가 인식되어 있는 것인지. 그러나 제이슨은 그에게 그런 것을 묻는다는 것 자체가 아무런 의미가 없는 행동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브루스는 제이슨의 멱살을 바짝 잡아당겨 느리지만 확실하게 입술을 훑어 내고서는 아예 제이슨을 자신의 옆에 매다 꽂아버렸다. 눈 깜짝할 새에 브루스의 옆에 처박힌 제이슨은 코웃음을 쳤다.


“……빌어먹을.”


제이슨은 자신의 가슴에 얼굴을 묻은 채 잠이 든 브루스를 보며 밀려 내려간 이불을 다시 끌어올렸다. 새삼 얇은 천위에 닿은 맨 피부가 따뜻하다 못해 뜨겁다는 사실을 깨닫기 전까지, 제이슨은 단 한숨도 자지 못했다.

잘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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