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루스는 아주 가끔 자신이 배트맨이 아니었다면, 하는 생각을 하고는 했다. 가령-.


“움직이지 마! 다 닥치고 무릎 꿇어!!”


오밤중도 아닌 한낮에 감히 웨인사를 습격한 한 무리의 괴한들을 만났을 때 말이다. 브루스 웨인은 배트맨이었기 때문에 억지로 브루스 웨인임을 연기할 때가 필요하고는 했다. 지금이 바로 그런 때다. 브루스는 괴한들이 시키는 대로 행동하며 직원들은 다치게 하지 말아달라는 자상한 회장의 얼굴을 해 보인다. 물론, 일반 시민에 지나지 않는 직원들을 보호하는 일은 당연한 것이었다. 적의 동정심과 자비를 바라는 표정과 몸짓을 보이느냐 혹은 그 전에 먼저 상대의 코뼈를 박살 내버리느냐와 같은 방식의 차이일 뿐이었다.

사실 건물에 괴한들이 어떻게 침입했는지부터가 의문이었다. 웨인사의 보안은 브루스가 직접 고안한 것으로, 그 말은 곧 케이브를 보안하고 있는 시스템을 기초로 만들어진 것이다. 배후에 누가 있는 건가. 그렇지만 누가, ‘브루스 웨인’을? 하긴, 생각해보니 일일이 그 숫자를 세지 않을 뿐이지 꽤 많을지도 모르는 법이었다.

단순한 강도짓을 하기 위함이었다면 차라리 은행을 터는 것이 더 안전한 게 현실이다. 특히나 웨인사의 직원들은 그 직원들조차 찬란하게 빛나는 ‘웨인’의 품격에 걸맞게 쉽게 당황하는 법이 없이 침착하게 구는 요령도 잘 알고 있었다. 딱히 교육을 시킨 적이 없음에도 말이다. 이미 뉴스에서는 웨인사를 점거한 괴한들의 이야기가 특보를 탔음이 분명했다. 섣불리 진압을 하지 못하는 이유는 순전히 브루스 자신 탓이리라. 브루스는 이 소식이 저스티스 리거들에게 언제 전해질 수 있는가를 가늠해본다. 꼼짝없이 다른 누군가의 도움을 바라기만 해야 한다는 것도 참 피곤했다. 그랬기에 브루스는 한 번 더 자신이 배트맨이라는 특별한 존재가 아니었다면, 하는 생각을 했다. 그랬다면 다른 누군가의 도움을 바라는 일이 이렇게 피곤하고 무력하다는 것을 조금이라도 덜 느낄 수 있었을까.


“……!”


아차, 하는 순간 총성이 울리고 단단한 유리벽이 산산조각이 나며 부서지기 시작했다. 그 때만큼은 누구의 것인지 모를 비명소리가 났다. 브루스는 침착하려 노력했지만, 곧 우악스러운 손길로 자신의 목을 잡아채는 손길에 몸을 뒤틀며 반항해보았지만 헛수고로 돌아갔다. 마음만 먹으면, 할 수만 있다면 지금이라도 이 상황을 벗어나는 방법은 많았다. 단지 브루스는 카울을 쓰고 있지 않았을 뿐이었다.


“이봐요, 돈이 필요한 거라면……!”

“돈은 곧 받을 거야.”

“뭐?”

“당신이 죽고 나면 말이지!”

“…!!”


젠장, 브루스는 자신의 몸이 고층 빌딩에서 내던져지는 것을 똑똑히 보았고, 똑똑히 느꼈다. 와이어가 있는 것도 아니었기에, 브루스가 할 수 있는 일은 이대로 추락하거나,


“브루스!”


하늘의 품에 안기는 것을 기다리거나. 공중에 붕 뜬 몸은 너무나도 편안한 상태로 그의 품에 안겨 있었다. 브루스는 자신의 팔 다리가 잘게 떨리는 것을 애써 무시했다. 그렇다고 해서 그의 품에 더 안겨든다거나 하는 짓은 하지 않았지만.


“이름 한 번 부르기가 그렇게 어려워서야.”

“…….”

“내가 몇 초라도 더 늦었으면 어쩌려고 그랬어.”


브루스는 드물게 긴장이 역력한 그의 표정을 보며 가만히 눈을 감고는 결국 그의 가슴에 머리를 기대었다.


“그럼 지금 내 눈 앞에 있는 사람은 누구지?”


클락은 당장이라도 브루스에게 입을 맞추고 싶어 안달이 난 얼굴이었지만 지금은 영 때가 좋지 않았다. 클락이 무사히 브루스를 구할 동안 이미 괴한들은 그린랜턴과 플래시의 손에 깔끔하게 정리가 되어 있었다. 브루스는 답지 않게 당황한 얼굴로 클락을 바라보았다.


“대체, 이게…….”


누구를 불렀느냐는 물음보다는 누구를 부르지 않았냐는 물음이 더 어울릴 정도의 소집 인원을 보며 브루스는 경악했다. 이렇게 화려해서야 아주 대놓고 ‘브루스 웨인’이 배트맨이라고 광고하는 꼴은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이래야 그 누구도 함부로 ‘브루스 웨인’을 건들지 못하겠지. 공식적으로 와치타워는 물론이요, 우리들의 활동 자금은 대부분이 웨인의 이름으로 들어오는 후원금 아닌가. 다들 ‘돈줄’을 위해서라면 이 정도는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을까?”

“이럴 때는 퍽 인간답군.”

“그럼. 누구한테 배운 건데.”

“그래서 언제까지 이러고 있을 거야? 내려줘. 가서 정리를…….”

“브루스.”

“…왜?”

“데이트 하러 갈까?”


브루스는 순간 터져 나오는 어처구니없는 한숨을 차마 다 삼키지 못했다. 하, 하고 터지는 브루스의 목소리에 클락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어깨를 들썩이며 웃다 곧장 브루스의 몸을 더욱 힘주어 끌어안고는 하늘 높이 솟아올랐다. 브루스는 본능적으로 클락의 목을 두 팔로 끌어안았다.


“클락!”

“한 번 쯤은, 낮에도 이렇게 해보고 싶었는걸!”


어쨌거나 브루스의 몸은 인간의 것이었으니 이대로 대기권을 뚫고 와치타워를 향해 날아가는 것은 무리였다. 적당한 높이에 – 말이 적당한 높이지, 까무러칠 정도로 높았다. - 머무른 클락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숨 쉬기는 괜찮아?”

“그럭저럭.”


빈말은 아닌 모양인지 평소와 다름없는 표정은 물론이거니와 규칙적으로 뛰고 있는 브루스의 심장소리를 들으며 클락은 또 한 번 경외심과 안타까움을 동시에 느꼈다. 고작해야 보통 사람의 몸이 이 정도를 아무렇지도 않아 할 정도면, 그의 몸은 이제껏 얼마나 많은 고통을 겪어야 했는가.


“딱히 날 수 있다는 게 부럽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었는데.”


브루스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한 눈에 쏙 들어오는 고담은 물론이요, 광활하게 펼쳐진 도시들을 바라보며 깊고 깊은 눈을 반짝였다. 배트윙의 창 너머로 보이는 것은 확실히 직접 눈에 담는 것하고는 차원이 달랐다.


“누구 씨가 너무 바빠서 이런 것도 잘 보여주지 못해서 서운하단 말이지.”

“애 같이 굴지 마, 클락.”

“지금은 네가 더 애 같은 거 아나?”


클락은 가볍게 브루스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딱히 동의하는 것은 아니지만 마땅히 반박할 말을 찾지 못한 채 브루스는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밤은 어떤 풍경일지 궁금한 걸.”


브루스는 그 목소리를 클락이 듣지 못했을 거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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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는, 데미안은 자신이 지금 꿈속에 있다는 것을 자각하고 있었다. 바보 같긴. 누구를 향한 비웃음인지 모를 조소를 흘려보내고 나서야 와락, 얼굴을 구겼다.

꿈이란, 현실이 아닌 것. 그러나 온몸을 휘감은 불쾌함은 상상 이상으로 현실적이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꿈'이라는 것을 자각하자 무의식의 세계가 조금은 자신의 뜻대로 움직였다.

데미안은 곧장 칼을 구현해냈고, 단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자신의 가슴을 찔렀다. 신기한 것은, 전혀 고통스럽지 않다는 것이었다. 순간 세상이 무너진다. 힘없이 늘어진 몸뚱이도 같이 무너졌다.


"깼어?"


익숙한 목소리에 겨우 고개만 돌려 옆을 바라본 데미안은 희미한 미소를 걸치고 있는 딕을 바라보았다. 데미안은 딕의 그런 미소가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던 적이 있다는 것을 떠올렸다.


"브루스가 아니어서 실망했어?"


딕은 조심스러운 손길로 데미안의 이마를 소매로 닦아 주었다. 데미안은 그제야 자신의 온 몸에 땀이 뻘뻘 흘러 옷이고 시트고 축축해졌음을 깨달았다. 꿈속에서는 별로 고통스럽지도 않았던 일이 현실에서는 조금 다르게 다가온 모양이었다.


“……아니.”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가 신경을 긁었지만 차마 목을 가다듬을 힘도 없었다. 딕은 퍽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지만 그 이상 한 마디를 더 거든다거나 하는 짓은 하지 않았다.


차라리 다행이라고 생각해.


아버지가 아닌, 네가 있었다는게. 데미안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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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마도) 저스티스리그 애니 배경 기반



종종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을 잊고는 한다. 누가 들으면 당신이 그런 일도 있냐며 놀라워할 테지만 아주 가끔은 그러기도 한다. 클락 켄트는 슈퍼맨이지만, 크립토니안일 뿐이지 신은 아니기에.

 

“배츠!”

“배트맨!!”

 

그래서 아주 보잘 것 없는 총알 하나가, 그의 목숨을 앗아갈 수 있다는 사실을 종종, 잊고는 했다.

 

*

 

수술은 꽤 오랫동안 이어졌다. 워치타워는 적막이 흘렀고, 그들의 얼굴에 미소는 사라져있었다. 고된 전투였던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라 여기저기 찢기고 피가 난 상처들을 돌봐야한다는 것도 잊은 채로. 그들 모두가 지금 제일 아픈 것은 몸에 난 상처가 아닌 그들 가슴에 난 상처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의 생명력은 경이로울 때가 있죠.”

 

병실의 문이 열리고 그 안에서 걸어 나온 존의 얼굴에 미소가 걸쳐져 있다는 것을 안 비로소 그 때서야, 웃을 수 있었다. 그러나 클락은 웃을 수 없었다.

클락은 몹시도 슬펐고 두려웠다. 그는 누구보다 총명했고, 뻔뻔했으며, 강했고, 아름다웠고, 그렇지만 그렇기에 인간이라는 것을.

 

“…….”

 

겨우겨우 뛰고 있는 심장의 고동소리마저, 너무나도 인간다움을 깨닫자 클락은 그대로 두 눈을 감아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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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포일러 주의



남자의 이름은 클락 켄트였고, 또한 슈퍼맨이었다, 브루스 웨인은 남자가 잠들어 있는 자리를 빤히 내려 보았다. 언젠가 자신의 손으로 그를 그 자리에 눕혀 주리라 각오를 다진 적도 있었지만 실제로 그가 관에 누워있는 모습은 이상하게 괴리감이 느껴졌다. 
남자의 이름은 슈퍼맨이었지만, 클락 켄트와 슈퍼맨이 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아는 자는 손에 꼽았다. 남자의 어머니는, 그의 마사는 브루스의 손을 그 주름이 가득한 손으로 꼭 쥐고는 눈물을 흘렸다. 브루스는 차마 그녀를 위로하지 못했다. 할 수가 없었다. 뻔뻔해도 정도가 있지. 

“실망시켜서 미안했네.” 

과거형. 브루스는 자신의 생각을 그리 표현했다. 이 앞으로의 미래에 자네를 실망시키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신념, 혹은 무언의 약속. 브루스는 묘비에 새겨져있는 이름을 속으로 곱씹었다. 

“클락 켄트, 라.” 

브루스는 언젠가 루터의 파티장에서 만났던 당돌한 기자를 떠올렸다. 천천히 발걸음을 돌리자 순식간에 바람이 온 몸을 꿰뚫어버릴 듯 거세게 스쳐지나간다. 브루스는 작은 목소리로 욕을 내뱉었다. 망할. 
남자의 얼굴은 그 때와 마찬가지로 참으로, 

“불렀나?” 

뻔뻔하기 그지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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