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랑 군! 학교 늦겠어요!”

  “아이, 알았다고!”

 

  흔히들 말하는 참 좋은 시기, 이 사회의 미래를 책임지고 있는 창창한 고등학교 2학년 17세, 이하랑의 하루는 소란스럽게 시작한다. 이번 기회에 말하는 거지만 아직 열일곱밖에 되지 않은 아이에게 12시 이전에 자라는 것은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며, 하물며 새벽 2시전에는 자라, 라는 말도 말이 안 되는 이야기이다. 그렇게 새벽 3시 넘어서까지 잠도 안자며 놀다가 매일 아침 아슬아슬하게 등교를 시작하는 고등학생이야 말로 참된 모습이라 할 수 있겠다.

  어제 학교에 잔나비라도 깔고 올 걸, 에이씨. 쓸데없는 머리를 굴려가며 쏜살같이 교실로 뛰어간 하랑은 겨우 지각을 면했다. 참으로 아쉬워하는 몇몇 사람들이 보여 괜히 괘씸해진 그가 킬킬 거리며 자리에 앉자 흔히 그 나이 또래 아이들이 그렇듯 시시콜콜한 이야기 주머니를 풀어놓기 시작했다.

 

  “야, 오늘 짱깨 한 명 새로 오는 거 아냐?”

  “짱깨?”

  “그래! 왜 저번에 이번 달 안으로 이사회에서 중국어 수업 가르치겠다고 완전 졸리는 연설해댔잖아.”

  “아, 그거 진짜였어? 헛소리 아니고?”

  “그 곰 같은 이사장이 잘도 헛소리를 하겠다.”

  “와, 누가 외국인 아니랄까봐.”

  “곰 같은 교육의 힘이여~!”

 

  한 놈이 이사장의 흉내를 내니 하랑이 배를 움켜쥐며 자지러졌다. 흔히 그 아이들의 입버릇이 그러하듯, 별 뜻 없는 욕설과 함께 하지 말라며 웃는 목소리가 수업 종소리에 묻혔다. 아, 그러고 보니 오늘 첫 교시 수업이 영어수업인데. 마틴은 지각이나 안 했나, 몰라. 하랑은 오늘도 자신의 짜증스러움을 한껏 받아주면서도 자상하게 자신을 깨워주는 다섯 살 연상인 형의 얼굴을 그렸다. 이 학교가 남학교가 아니라 공학이었으면 정말 마틴에게 줄줄이 꿰일 여자애들이 한 트럭으로 실어도 모자랄 텐데. 아니, 사실은 하랑도 소문으로만 들은 거지만 이미 마틴에게 꿰인 녀석들이 많다고 했다.

 

  종소리가 들리고 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교실로 들어오는 마틴을 보며 하랑은 자연스레 턱을 괴고는 싱긋 웃었다. 다행이네, 지각은 면한 모양이야.

 

  “마틴쌤! 오늘 오는 짱… 아니 중국어 쌤 누군지 알아요?”

  “아, 네. 오늘 교직원 회의에서 뵀어요. 보자, 우리 반은…. 4교시 수업이네요. 중국어.”

  “여자에요?”

  “아뇨, 아주 잘생긴 남자 선생님이에요.”

 

  마틴의 말이 끝나자마자 다들 야유에 가득 찬 목소리로 아우성을 쳤다. 마틴은 그럴 줄 알았다며 학생들을 놀리기라도 하듯 상냥한 미소를 보였다.

 

  “남자가 잘생기면 뭐해, 우린 여자쌤 언제 보나.”

  “꿈 깨, 곰 같은 이사장님이 잘도.”

  “아, 쌤. 그거 알아요? 우리 학교 금녀의 구역이라고 소문 파다하다고요!”

  “왜요? 나이오비 선생님도 계시고, 레나 선생님도 계신데….”

  “품절녀는 당연히 제외죠!”

 

  그제야 아이들이 말한 의미를 파악한 모양인지 마틴은 크게 웃어보았다. 정말 못 말리는 학생들이군요. 마틴의 인기 덕분인지 ‘영어’ 라는 최대 난관의 수업임에도 불구하고 학구열이 꽤나 높은 반 덕에 50분이라는 수업시간이 훌쩍 가버리고, 1교시 영어수업이 끝이 났다. 마틴은 교실을 나가기 전 하랑에게로 와 귓속말로 조용히 속삭였다.

 

  “오늘 저녁은 다른 길로 세면 안 돼요.”

  “왜?”

  “중요한 손님이 오시는 날이니까.”

  “릭 아저씨라도 와?”

  “물론 릭 씨도 오고. 곧 알게 될 거에요.”

 

  그럼 이따 집에서 봐요, 하며 교실을 나가는 마틴 덕에 아이들의 시선이 쫙 제게로 쏠린 것을 깨달은 하랑은 그들의 시선을 가볍게 무시하고 책상에 엎드렸다. 딱히 하랑은 수업시간에 조는 불량한 학생과는 거리가 멀어서 잘 수 있는 시간은 이 쉬는 시간뿐이었다.

 

  다음 시간은 과학시간이었는데, 어김없이 유성에 대해 열변을 토해내는 드렉슬러를 보며 하랑은 또 자연스레 턱을 괴었다. 의외로 그런 이야기가 재밌는 모양인지 아이들은 몇 날, 몇 시 어느 나라에서 쏟아진 유성우에 대한 논문을 풀어놓는 드렉슬러의 이야기를 경청하면서도, 사실 속셈은 따로 있는 모양인지 그 집 조카뻘 되는 샬럿이나 학교에 데려오라고 조르다 날아온 창 모양 분필에 맞아 기절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순식간에 날아오는 분필 창을 피할 수 있는 것은 교내에서 세계사를 가르치는 로라스 선생님뿐이려나.

 

  그리고 이어서 수학시간. 이 학교의 곰 같은 방침에 따르면 수학은 세 명의 선생님이 돌아가면서 수업을 하는데 그 이름도 유명한 홀든 선생님즈였다. 그 주의 수학시간이 어떤 홀든 선생님이냐에 따라 면학 분위기가 바뀌는데 이번 주 수학 시간을 맡은 선생님은 벨져로, 아이들은 소리 없는 아우성을 지르며 하나 둘 쓰러져갔다. 한 마디로 말하자면 귀신이었다, 귀신. 조는 학생이 한명이라도 있으면 큰일 나는 선생님이었다. 오죽하면 이글이 보고 싶다는 헛소리를 지껄이다 들켜 천영섬을 맞은 경우도 허다했다.

 

  3교시가 끝난 뒤 다른 학교와는 다르게 이른 점심시간을 보내고, 학교 옥상에서 낮잠을 자던 하랑은 제 소매를 잡아끄는 령의 기운에 무거운 몸을 이끌고 교실로 내려갔다. 남의 눈에 보이지 않는 세 마리의 개… 라고 해야 할까 지금은 강아지인 아이들을 데리고 교실로 들어가니 아주 난장판이었다. 열일곱 남학생들의 교실이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어떤 난장판인지 아주 잘 알 것이다. 얼마나 험한 말뚝 박기를 한 것인지 이러다 자손도 못 보겠다며 우는 놈들 여럿, 보나마나 브뤼노 교감한테 빌려왔을 것이 뻔한 -삐- 같은 잡지. 저 놈들 저러다 타라 선생님한테 걸려 유성낙하 한 번 맞아봐야 정신을 차리지.

 

  점심시간이 끝나는 종이 울리며, 아이들은 소란스러움을 잠재우지 못하고 수군거렸다. 게 중에, 가장 호들갑을 떠는 녀석의 말이 하랑의 귀에 똑똑히 박혔다.

 

  “그 짱깨 내가 봤거든? 근데 완전 포스 쩔어. 갑빠가, 어우.”

  “진짜? 다이무스 선생님보다?”

  “장난 아니라니까! 거기다 중국에서 무술 전공했대. 덤비면 척살 당할지도 몰라. 거기다 우리말 완전 잘함. 마틴쌤이랑 얘기하는 거 봤는데 둘이 친한가봐. 그 쌤 웃는 것도 봄! 아, 솔직히 같은 남자가 봐도 좀 멋있더라.”

  “헐.”

 

  다이무스 선생님과 견줄 정도의 덩치, 중국에서 무술 전공. 우리말을 참 잘하며 마틴과 친한 듯 얘기할 수 있는 중국 남자. 하랑은 무의식적으로 욕을 뱉었다. 거기에 쐐기를 박는 마틴의 말. ‘중요한 손님.’

  이윽고 교실 문이 열리며 오늘의 기대주, 중국어 수업 선생님이 교실로 들어오자 하랑은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 소리가 어찌나 컸던지, 모든 아이들이 하랑을 쳐다봤지만 하랑은 교실 안으로 들어온 남자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수업 시작했다, 앉아라. 이하랑.”

  “네, 네가 왜 여기 있어!”

  “마틴한테 못 들었나? 오늘부터 이 학교 중국어 수업을 가르치게 된 티엔 정, 이라고 한다. 다들 잘 부탁하지.”

 

  하랑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마틴이 그렇게 싫어하는 별명 - 그래도 릭 아저씨는 심심찮게 부르더라. - 인 마틴 챌피그를 학교에 확 퍼트려버릴까, 라는 계획을 짰다. 물론 그랬다가는 한동안은 평안한 생활은 꿈도 꿀 수 없겠지만. 반쯤 정신이 나간채로 자리에 계속 서 있던 하랑은 망연자실한 얼굴로 어쩔 수 없이 자리에 앉았다. 그러면서도 뭔가 분한 것인지 이상한 헛소리를 중얼거리는 하랑을 보며 근처에 앉은 아이들이 어디 아프냐며 심심한 위로를 건넸다.

  어떻게 수업이 끝나는 지도 모르게 폭풍 같은 50분이 지나고 티엔이 수업을 마무리하고 교실을 나가자 아까와 같이 하랑에게로 수많은 시선이 쏠렸다.

 

  “야, 너 저 짱깨 알아?”

  “…알아.”

  “너 이사장 아들이냐? 뭐 이렇게 쌤들이랑 잘 알아? 아, 참. 마틴 선생님과는 아예 같이 살고 있다며.”

  “몰라, 대답해 줄 기운 없어.”

 

  하랑은 오늘만은 조퇴를 하고 집으로 가서 푹 쉬고 싶은 기분이었다. 어렴풋이 하랑의 머릿속에 티엔과 마지막으로 봤던 날 밤이 그려졌다. 개 같은 짱깨새끼. 하랑은 결국 답답한 교실에서 빠져나왔다.

  그래봤자 갈 곳이 딱히 없어서 머리가 아프다는 핑계로 양호실로 왔다. 양호 선생님은 어딜 가고 없는 모양인지, 다들 본체 아니냐며 놀리는 선글라스만이 책상이 놓여있었다. 하랑은 흰 침대로 기어들어가 잔뜩 몸을 웅크리고는 잠을 청했다.

 

  티엔을 마지막으로 본 것이 고작 3년 전의 일이었다. 아니, 벌써 3년인가. 그 말은 곧 하랑이 티엔에게 홧김에 고백 아닌 고백을 한 것이 벌써 3년이나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거기에서 끝났다면 어쩌면 그냥 머리도 다 크지 않은 어린아이의 치기로 끝을 낼 수 있었겠으나, 티엔은 하랑의 고백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정확하게 한 달 쯤, 사귀기도 했었다. 티엔이 하랑에게 얼마나 껄끄러운 사람인지는 이 말로 종결시킬 수 있었다. 그러니까, 좋아했던 사람. 지금도 좋아하냐, 라고 물으면 사실 잘 모르겠는데 아마… 좋아하지 않을까 싶기도 하는 사람.

  그렇게 첫 사랑이 성공적으로 결실을 맺었다고 생각하기도 전에, 티엔은 하랑의 곁을 떠났다. 무슨 이유였더라. 잘 기억도 안 난다. 하랑에게 있어 더욱 충격적이었던 것은 티엔이 말도 없이 떠났다는 것이다. 하루아침에 연상의 연인에게 버려졌다는 것이 고작 열 넷 밖에 안 됐던 어린 아이에게 얼마나 큰 충격이었을지 알기나 할까. 하랑은 티엔이 떠났다는 말을 전해줬던 마틴의 얼굴을 아직까지도 기억했다. 설마 몰랐어요? 라고 말하는 것 같던 그 얼굴.

 

  그 뒤로 3년간, 하랑의 집에서 ‘티엔’은 금기어가 됐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억지로 그의 얼굴을 잊으려 노력했던 하랑이지만 3년이 지난 오늘 그의 얼굴을 다시 봤을 때, 하랑은 그를 잊으려 했던 그 3년이 얼마나 멍청하게 보낸 시간이었는지 다시금 깨달았다. 분위기가, 꽤 달라진 것 같았다. 다행히 잘 먹고 다닌 모양인지 얼굴을 말끔하니 잘난 그대로였고 확실히 3년 전 보다 좀 더 멋있어지고 남자다워졌을까. 그 짧은 시간에 그를 살필 만큼 얼마나 그를 쫓고 있던 건지 깨달은 하랑은 자신이 너무 비참해졌다.

  가면 간다고, 돌아온다면 돌아온다고 한 마디도 없던 그 남자를 아직도 여전히 좋아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그 자신이.

 

  “땡땡이치는 건가, 못 본 사이에 잔머리만 늘었군.”

  “…….”

  “이하랑.”

  “…꺼져.”

  “하랑아.”

 

  하랑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는 그대로 이불을 뒤집어쓰고 문을 향해 달렸다. 그래, 네가 안 꺼지면 내가 꺼진다. 슬리퍼가 바닥에 쓸려 나는 거친 소리가 몇 번 나지 않아 하랑은 그대로 다시 제 몸이 침대 위로 쓰러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랑아.”

  “꺼져! 꺼지라고! 시발, 이제 와서 미안하다, 보고 싶었다. 이딴 소리 지껄일 거면 꺼지라고!!”

  “얼굴 좀 보자.”

 

  그 말에 억지로 이불로 자신의 얼굴을 가린 하랑이 악에 받쳐 저항했지만 기어코 이불을 벗겨낸 티엔의 얼굴을 정면에서 보자 하랑은 여러 가지 감정이 한꺼번에 복받쳐오는 것 같았다. …존나 잘나긴 잘났네, 짜증나게. 꽤나 붉어진 하랑의 얼굴에 티엔이 묘한 얼굴을 하며 재빨리 침대 옆 커튼을 치고는 하랑에게 키스했다. 헤어지기 전에도 딱히 이런 진한 스킨십은 해본 적이 없어서 말 그대로 돌 같이 굳은 하랑은 조심스럽게 자신의 뺨을 감싸는 티엔의 두 손에 가만히 자신의 손을 얹었다.

 

  “이제 와서 미안하다는 소리 하고 싶지 않았지만, 미안하구나.”

  “…….”

  “내가 생각한 것보다 많이 컸구나, 정말 많이.”

  “…당연하지, 이제 열일곱인데.”

  “그동안 잘 지냈나?”

  “지랄, 말 같은 소리를.”

 

  못 본새 입도 꽤 거칠어졌구나, 하는 티엔의 입을 가만히 손으로 누른 하랑은 이게 다 누구 때문인데, 하며 중얼거렸다. 티엔은 자신의 입을 누른 하랑의 손가락을 살며시 핥았다. 그 생경한 느낌에 하랑은 온 몸에 소름이 돋는 것 같았다.

 

  “이, 이거 범죄거든? 나, 아직 열일곱이거든?! 이 나라에서는 적어도 열아홉은 돼야…”

  “…열 넷보다는 낫겠지.”

  “어, 어…?”

  “내가 왜 3년이나 네 곁에서 떠났다고 생각하느냐.”

 

  풀썩, 소리가 날 정도로 등에 닿은 침대의 감촉에 하랑은 멀뚱멀뚱 티엔을 바라보았다. 꽤 진중한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티엔을 보며 곧, 티엔이 하려고 하는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알아챈 하랑은 얼굴이 폭발하듯 새빨개져서는 말까지 더듬으며 허공에 손을 휘저었다.

 

  “미친, 짱깨가 뭐라는 거야. 아냐, 몰라! 난 몰라!”

  “이하랑.”

  “아, 몰라, 몰라. 여기 학교야! 학교라고!”

  “그래서?”

 

  특유의 낮고 무거운 울림이 있는 목소리에 하랑은 티엔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난 이런 짱깨는 모르는데. 자신이 없다는 듯 중얼거리는 하랑을 보며, 티엔은 드물게 하랑에게만 보여주는 미소를 보이며 대답했다.

 

  “…지금부터 천천히 가르쳐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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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처(짹짹이)에서 풀던 다톰이빅 썰 중 일부.

 

 

* 토마스와 빅터는 친형제 같은 사이. 현재 같이 살고 있음.

 

 

* 현대+사이퍼 설정 짬뽕.

 

 

 

 

 

 

 

 

 

 

 

 

 

  “큰일이야완전 지각이라고.”

 

  빅터는 잘 떠지지 않는 눈을 억지로 비비면서도 비몽사몽한 정신에 깜빡 다시 잠에 들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그런 빅터의 기분을 아는지 모르는지 토마스는 허둥지둥 일사분란하게 집 안을 휘젓고 다녔다어찌나 그 솜씨가 일류 어머니의 것인지 하룻밤 사이 어질러져 있던 거실이 깨끗하게 치워졌다졸린 내색 하나 안 하려고 했던 빅터지만 그래봤자 고작 열 넷 밖에 안 되는 아이에게 잠은 치명적인 것들 중 하나였다.

 

  “그러니까 어제 일찍 자라고 했잖아…밤새도록 게임 붙잡고 있던 게 누군데…….”

  “알람 소리도 못 들을 줄은 몰랐어.”

 

  바쁘게 움직이면서도 빅터의 말에 일일이 다 대답해주는 토마스의 손에는 그들이 아침에 늦잠을 잔 원인이자 원흉인 게임기가 들려 있었다사실 따지고 보면 저 게임기를 준 것은 홀든가의 막내아들이니 빅터는 언제라도 토마스에게 이글이 잘못했네라고 말해줄 의향도 있었다.

 

  “형 다녀올 테니까 12시 되기 전에 꼭 연합으로 가서….”

  “.”

  “?”

  “다녀오세요.”

 

  빅터는 매일 아침 반복되는 레파토리에 이제는 지겨운 모양인지 얼른 토마스의 목을 끌어안았다항상 연합에서 엘리와 피터 또래 아이들만 돌봐서 그런지는 몰라도 자신을 대할 때도 영 그런 식이니빅터는 내색하지는 않았지만 가끔 속으로 한숨을 쉬곤 했다그러다가도 이렇게 한 번씩 빅터가 내색을 해줄 때면 토마스는 멋쩍은 듯 웃으면서도 세상에 둘 도 없는 소중한 동생의 머리를 다정하게 쓰다듬었다빅터도 딱히 그것이 나쁘지는 않았다.

 

  다시금 서둘러 집을 나선 토마스는 오늘도 활기찬 기분으로 하루를 시작하자는 마음을 다짐했다골목 하나 없이 쭉 뻗은 길을 결정 슬라이드를 타고 내려가는 기분과 같이.

 

  *

 

  토마스는 집과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작은 카페의 아르바이트생이었다벌써 아르바이트를 한지 2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이는 곧빅터와 만난 것이 벌써 2년이 다 되어가고 있다는 소리였고 그와 동시에 토마스가 그와 만난 지도 벌써 2년이 다 되어간다는 소리였다.

 

  “얏호지각은 면했네요.”

  “어서와스티븐슨.”

  “안녕하세요점장님.”

 

  토마스의 하루 일과는 이렇게 시작한다밤새 이글이 가져다 준 게임기를 빅터와 함께 붙잡고 기어코 보스까지 깨고 난 뒤 후련한 마음으로 잠에 들었다가 알람소리를 못 듣고 허겁지겁 일어난 뒤에 말이다단 한 번도 지각이라는 것을 해본 적 없는 성실한 20대 청년 토마스는 가벼운 마음으로 옷을 갈아입고는 해맑은 미소와 함께 카페의 문을 열었다.

 

  “어서오세요.”

  “카페 모카 한 잔 주시겠어요?”

 

  첫 손님은 항상 정해져있었다단정하니 우아하게 생긴 여성분이었는데하루도 빠짐없이 카페 문을 열자마자 오시는 단골손님 중 한 분이었다그 분의 주문대로 카페 모카를 만들기 시작하면 금세 카페 안을 가득 채우는 커피 향에 절로 기분이 좋아졌다.

 

  아르바이트생 토마스 스티븐슨의 하루는 이렇게 시작했다.

 

  *

 

  “오늘 비가 온다고?”

  “그래일기예보 못 봤어?”

  “토마스 형 우산 없을 텐데.”

  

  퍽 근심 걱정이 가득 담긴 열 넷 꼬마의 얼굴에 이글은 속으로 고개를 저으며 빅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자신이 생각하기에 아무래도 이쪽 형제는 둘의 역할이 바뀌어도 너무 바뀐 것 아닌가 싶었다이글은 벌써부터 미간에 주름을 잡으려는 열 넷 꼬마를 얼른 제 품에 끌어안고서는 미간을 검지로 꾹꾹 누르며 여전히 그 웃는 낯으로 말했다.

 

  “걱정 마꼬맹아우리 형은 우산 들고 갔어,”

  “그래그럼 뭐.”

  “그러니까 토마스 올 때까지 우리는 뭐하고 놀지 생각해볼까?”

  “어제 빌려준 게임 그거 말고는 없어?”

  “없기는그게 1탄이라고그래서 가져왔지뉴 슈퍼마리오.”

 

  이글의 손에 들린 노란색 표지에 게임팩을 보자마자 딱 그 나이 또래에 맞게 얼굴이 변한 빅터를 보며 이글은 넘쳐나는 행복감과 사랑스러움을 주체하지 못했다미간에 있는 힘껏 힘을 주고 주름을 만드는 꼬맹이는 영락없는 애늙은이의 표본이었으나 이렇게 한 없이 풀어진 모습을 보면 또 거짓 없는 꼬마 아이의 모습이었다이글은 얼른 게임기의 전원을 켰다이런 귀한 시간을 헛되이 만들 수는 없다고 생각했기에.

 

  *

 

  어느 새 하루가 훌쩍 지나버리고 태양이 쏙 들어가버렸을 때 쯤별안간 하늘이 잿빛으로 물들더니 이내 눈물을 쏟아내기 시작했다어찌나 그 양이 많은지 누가 보면 사랑하던 사람에게 차인 것은 아닐까 싶을 정도의 양이었다오늘 아침 허겁지겁 달려오느라 작은 우산 하나 챙기지 못한 토마스는 곤란하다는 얼굴로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나저나오늘은 안 오셨네.”

 

  사실 비가 오는 하늘 보다 토마스를 더욱 심란하게 만들었던 것은 매일 점심 찾아오던 토마스만의 손님이 오늘은 찾아오지 않았다는 것이다사랑하던 사람에게 차인 하늘이 눈물로 비를 내린다니이 어찌 자신이 처지랑 쏙 닮은꼴인가물론정확하게 말하자면 차인 건 아니다아닐 거다.

  서둘러 카페를 정리하고 옷도 갈아입은 토마스는 핸드폰을 꺼내들었다오후 열 시너무 늦은 시간이라 빅터에게 전화 한 통 걸기가 미안해졌다카페 안에 남는 우산 하나라도 있을까 찾아봤지만 우산의 도 보이지 않아 진작 포기했다하루쯤은 비를 맞고 다니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란 생각에 대충 젖으면 안 되는 것들만 비닐로 싸서 가방에 넣은 토마스는 카페 밖으로 나와 문을 잠갔다.

 

  “…끝났나?”

  “다이무스씨!”

 

  불쑥 토마스 앞에 나타난 인영에 토마스는 그 자리에서 깜짝 놀라 뒤로 자빠질 뻔했다안 그래도 키가 큰 사람이 검은 정장에 검은 우산으로 중무장을 하고 있으니 놀라지 않을 수가 있을까토마스에게는 그저 한 없이 다정한 얼굴이기는 했지만 그래도솔직히 조금 무섭긴 했다.

 

  “놀랐나미안하군.”

  “아니에요괜찮아요그보다 여긴 어쩐일로….”

 

  다이무스는 굳이 대답을 하지 않고 쥐고 있던 우산을 가만히 토마스의 쪽으로 기울였다작은 물방울이 유리창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러는 너는 우산도 없이 그냥 가려고 했나?”

  “그러게요.”

 

  멋쩍게 웃는 토마스의 옆에 아무 말 없이 나란히 선 다이무스는 우산을 들고 있던 팔을 살짝 들어올렸다토마스는 굉장히 기쁜 얼굴로 얼른 다이무스의 팔에 자신의 팔을 끼워 넣었다.

 

  “오늘 점심에 안 보이셔서 안 오시는 줄 알았어요.”

  “갑자기 회의가 잡혔었다.”

  “점심은 드셨어요?”

  “대충.”

  “잘 챙겨 드셔야 하는데.”

  “확실히 네가 챙겨주는 것보다는 맛이 없더군.”

 

  토마스는 순간 헛발질을 하는 것은 아닌가 싶었다. 이 남자, 다이무스 홀든은 참 솔직했다. 누가 그의 형 아니랄까봐 이글이랑 똑같았다. 거침없이 툭툭 뱉는 말들이 하나같이 다 맞는 말이고, 누구보다 솔직해서 가끔은 이렇게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떨리기도 했다. 이런 저런 생각에 말이 없는 토마스의 모습에 다이무스가 어디 아픈 건 아닌가, 하고 물었을 때도 토마스는 그저 고개를 젓는 것 밖에 하지 못했다. 그러자 괜히 심술이라도 날 것 같았다. 토마스는 다이무스 앞에서는 절대로 하지 못했던 20대의 장난 끼를 한 번 내보이기로 다짐했다. 팔짱을 끼고 있던 팔을 풀고 거침없이 우산 밖으로 나간 토마스는 정말 몇 십 초도 지나지 않아 몸이 쫄딱 젖는 것을 느꼈다. 당황한 모양인지 다이무스가 얼른 다시 우산을 씌워주려고 해도 묵묵히 고개를 젓고는 그에게서 뒷걸음질 치며 도망쳤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웃는 낯이었기에 다이무스는 그제야 사랑스러운 연인의 의중을 파악하고는 살며시 미소 지었다.

 

  “그러다 감기 걸릴지도 모른다.”

  “금방 나을 거예요.”

 

  결국 다이무스는 검은 장우산을 접었다. 정말 많이 오는 날이긴 한 모양인지 우산을 접자마자 금방 머리부터 발끝까지 홀랑 젖어 들었다. 그제야 토마스는 뒷걸음질 치던 걸음을 멈추고 다시 다이무스의 옆에 섰다. 비에 젖어 열기를 발산하는 다이무스의 피부와는 달리 원래부터 한참 비에 젖은 사람처럼 서늘한 체온을 가진 토마스의 피부에 다이무스는 가벼운 눈짓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나중에 이글이 알면 웃다가 뒤집어지겠군.”

  “지금 쯤 빅터랑 노느라 바쁘지 않을까요?”

  “네 동생 말인가? 하긴, 이글 녀석이 마음에 들어 하는 소년이라니.”

 

  이런 저런 시시콜콜한 이야기들을 하다 토마스는 문득 걸음을 멈췄다. 항상 지나치던 작은 공원이었다. 이미 쫄딱 젖은 생쥐 꼴이지만 잠시라도 비를 피할 겸 공원에 들어섰다. 얕은 처마 밑에 선 두 사람은 물끄러미 하늘을 바라보았다. 토마스는 조심스러운 눈초리로 다이무스를 살며시 바라보았다. 상황적으로는 훔쳐본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누가 봐도 남자다운 잘생긴 얼굴에 큰 키, 조금 무뚝뚝하다는 게 흠이지만 그마저도 이제는 매력적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하나뿐인 연인의 모습에 토마스는 가슴이 간질거리는 것 같았다. 누구 애인인지는 몰라도 정말 애인 하나는 잘 뒀구나, 싶었다.

  비가 와서 그런지는 몰라도 조금 쌀쌀해진 날씨에 토마스가 뿜어낸 입김이 하얗게 서렸다가 금세 사라졌다. 원래부터 추위와는 허물없이 자란 터라 이 정도는 추위 축에도 끼워 넣기 애매했지만, 어깨 위로 걸쳐지는 무게에 토마스는 깜짝 놀라 다이무스를 바라보았다.

 

  “저는 괜찮아요! 그러다가 다이무스씨가 감기 걸리겠어요.”

  “나는 괜찮다.”

  “그래도…….”

  “걱정하지 마라.”

 

  다시 코트를 가져갈 생각은 추호도 없어 보이는 단호한 모습에 토마스는 괜히 코트 자락을 두 손으로 꽉 쥐었다. 조심스럽게 다이무스의 곁으로 발걸음을 옮기던 토마스는 바짝 다가서 다이무스와 어깨를 맞대었다. 이러면 조금이라도, 덜 춥지 않을까 싶은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대로 두 사람은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확실히 아까보다는 조금 덜 추운 것 같은 기분이었다.

 

  “…음, 확실히 조금 추울지도.”

  “네? 정말이에요?”

 

  다이무스의 말에 얼른 코트를 벗으려고 한 순간, 그보다 더 재빠르게 다이무스는 토마스의 뺨을 부드럽게 감싸고 그대로 입을 맞췄다. 갑작스러운 다이무스의 행동에 차마 코트를 다 벗지 못한 채 애매하게 놓인 팔을 어찌할 줄 몰라 헤매던 찰나, 다이무스가 천천히 토마스의 안경을 빼서 손에 쥐어주었다.

 

  “…아, 그….”

  “이러면 좀 덜 춥겠지.”

 

  그리고 또 한 번 부드럽게 이어지는 키스에 토마스는 이러다 제 안에서 뭔가 펑, 소리를 내며 터져버리는 것은 아닐까 조마조마했다. 달콤한 입맞춤이 끝나고 다이무스 딴에서는 가장 활짝 웃는 옅은 미소를 보며 토마스는 그대로 다이무스의 코트에 얼굴을 묻어버렸다.
  내가 못살아, 정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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