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07. 07


만에 하나 너를 다시 볼 수 있다면 온 힘을 다해 때려 눕혀 주겠노라, 스스로 비장한 다짐을 했으나 차마 그러진 못했다. 어쩌면 너무 안일하게 생각했을지도 모른다고, 그렇게 생각했다. 물론 다시 만나자마자 있는 힘껏 주먹을 내질렀지만 그 이상은 하지 못했다. 마음 속 깊이 묻어둔 너를 향한 내 온갖 불평 불만과, 너를 원망하는 말을 꺼낼 수 있는 기회였음에도 하지 않았다. 아니, 하지 못했다.

 

에릭은 피할 수 있음에도 자신의 주먹을 피하지 않았다. 그건 분명히 알 수 있었다. 그정도 쯤, 가볍게 맞아주지 하는 오만이 보인 것 같아서 속이 한 번 더 끓었으나 그건 더 이상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마음 속 깊이 아끼고 아껴두었던 감정이 저도 모르게 미친듯이 새어나올까봐 온 몸이 떨렸다.

 

그리고 그것을 또 후회하게 됐다.

기회가 있을 때 해뒀어야 한다. 욕이든, 뭐든. 조금이라도 더 많은 시간을 에릭과의 대화로 보냈어야 했다. 미래에서 온 오래된 친구도 사라져버린 지금, 곁을 지켜주는 건 예나 지금이나 행크밖에 없었다. 하나뿐인 동생인 레이븐도, 소중한 친구도 없었다. 

 

찰스는 다시 약에 손을 대지 않았다. 여전히 그의 다리는 움직이지 않았지만, 다른 사람의 생각을 읽는 것은 눈 하나 깜빡이는 것 만큼 쉬웠다. 그는 소중한 생명들을 구하는 일을 다시 시작했다.

학교는 다시 세워졌고 즐거운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흘러 넘쳤다. 오랜 친구의 부탁도 잊지 않았다. 그가 소중하게 생각했을, 후에는 자신에게도 소중하게 될 제자들을 찾았다. 

 

그러나 여전히, 찰스의 마음 속은 텅 빈것 같이 공허하기만 했다. 

 

 

 

*

 

 

 

"교수님."

"왜?"

"그리우세요?"

 

허여멀건 하게 생긴 게 사람 귀찮게 하는 건 귀신같이. 찰스는 차마 내뱉지 못할 말을 속으로 곱씹었다. 슬쩍 올려다보며 눈치를 주는 것이, 그러는 너는? 이라는 질문을 담고 있었다. 행크는 옅게 웃으면서 대답했다.

 

"저는 그리운데요."

"솔직해서 좋네."

"교수님도 그렇게 해보시지 그래요."

 

행크는 가볍게 찰스의 휠체어를 밀었다. 산책을 하던 도중 행크를 먼저 돌려보내고는 석양으로 인해 붉게 물든 초저녁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가슴 한 구석이 누가 일부러 찌르는 것처럼 따가웠다. 아마 처음으로, 그가 자신에게 마음의 문을 연 곳이 이 자리일 것이다. 찰스는 묵묵히 속으로 온갖 험한 말과 욕을 되뇌었다. 정작 본인이 눈 앞에 있으면 하지도 못할 말들을, 가득.

 

"망할 놈, 나쁜 자식. 천하에 못된 놈. 적어도, 이 꼴을 냈으면.."

 

찰스는 끝내 말을 잇지 못했다. 그것은 순수한 찰스의 속마음이었으며, 간절하게 바라는 염원이었다. 그 본인 외에는 결코 그 어느 누구도 이루어 줄 수 없는, 그런 꿈. 

 

"그럼 어쩌라는 건가."

"......" 

"오랜만에 보러 왔더니 듣는 말이라곤 욕 밖에 없군, 찰스."

"...넌 좀 들어도 싸."

 

헛웃음이 나왔다. 곁에 다가오는 그의 발걸음 소리가 다 헛된 꿈인 것 같아서 꿈이라면 빨리 깨고싶다고 생각했다. 무릎 위로 묵직하게 올라오는 무게감에 찰스는 숨을 들이켰다. 깜짝 놀란 찰스는 얼른 그것을 집어 던졌고, 무겁게만 보였던 헬멧은 저 멀리 담을 넘어 날아가버렸다.

 

"에릭?"

"그걸 그렇게 던져버릴 줄은 몰랐는걸."

"놀랐잖아!"

"뭐, 자네 주려고 가져온 것은 맞네만."

 

찰스는 놀란 눈으로 에릭을 바라보았다. 정말로 오랜만에 본 에릭의 모습은, 그 옛날 정말로 하나밖에 없다고 생각했던 친구의 모습을 닮아있었다. 에릭은 천천히 찰스의 휠체어를 밀기 시작했다. 찰스는 언제 깨져버릴지 모르는 평화에 혼자서 숨죽여야만 했다. 물론, 그와 다시 이렇게 걸을 수 있다는 것은 오랫동안 염원하던 일이었지만 그것은 결코 이루어질 수 없기에, 염원이라고 한 것이다. 

 

"꿈이야?"

"꿈이었으면 좋겠나?"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드는데."

"꿈일지도 모르지."

 

정원을 빙 돌아 다시 둘이 만난 곳으로 돌아왔을 때, 에린은 천천히 담장에 기대섰다. 찰스는 아직도 이 상황을 어떻게 생각해야할지 갈피를 잡지 못한 상태였다. 갑작스럽게 다시 나타난 에릭과, 그의 마지막 방어구인 헬맷을 자신한테 준 에릭. 어디까지가 현실이고 어디까지가 꿈인지 분간해 낼 자신이 없었다. 그저 모든것이 현실이었으면 좋겠다고 바라고, 또 바랬다.

 

"이제 자네랑은 싸울 이유가 없을 것 같다고 생각했어."

"....."

"그럼 저 헬맷도 필요없을 테고, 내가 자네에게 부탁하고 싶은 것을 들어줄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

"부탁?"

"그래, 부탁이 있어. 두 가지. 하나는, 저 헬맷이 없어도 내 머릿속에 들어오지 말 것."

"에릭."

"물론 네가 그러지 않을 것이라는 걸 알아. 또 하나는."

 

에릭은 찰스의 손을 붙잡고 그와 눈을 맞추었다. 그리고 꽤나 오랜만에 보는 것 같은 옅은 미소를 지어보였다.

 

"네 곁에 있고 싶은데."

"...그게 내 허락이 있어야만 하는 일인가?"

"옛날엔 몰라도 지금은 그렇지. 그리고 무엇보다 그 어린 짐승은 네가 없으면 나 혼자 다루기가 벅차다고."

 

찰스는 순간 곤란해하는 행크의 얼굴이 눈에 선해서 웃음이 터져나왔다.

 

"내가 싫다고 하면 어쩌려고 그래?" 

"그럼 허락해 줄 때 까지 계속 부탁해보려고 그랬지."

"거짓말."

"너무 뻔했나?"

"그래. 넌 내가 그걸 거절하지 못할 것이라는 걸 아주 잘 알고 있겠지. 그러니까 네가 나쁜놈이라는 거야."

"네가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것이라고 확신했기 때문이지."

 

에릭은 가볍게 자신의 머리를 검지 손가락으로 두드렸고, 찰스는 그것이 지금은 그의 머릿속을 들여다봐도 괜찮다는 뜻임을 알았다. 진지한 에릭의 눈빛에 찰스는 결국 손쉽게 백기를 들며 항복선언을 했다. 그의 생각을 읽지 않아도 충분히, 그가 무슨말을 하고 싶은지 모를만큼 찰스는 어리숙하지 않았다. 

 

"그래, 맞아. 나도 너와 같은 생각이지."

"그럼 yes, 라고 알지."

"좋아, 그럼 나도 조건이 있어."

"뭐지?"

 

찰스는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에릭의 뺨에 올려놓았다. 차가운 그의 피부에 지금까지 간직하고 있던 찰스의 온기가 한꺼번에 빨려들어가는 느낌이 생생했다.

 

"다신 혼자서 멋대로 떠나지 말게. 벌써 쓸쓸한 건 참기 힘든 나이가 됐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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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06. 11



눈 앞에 놓인 먹잇감을 먹지도 못하고 하염없이 바라만 봐야 하는 정글의 맹수들의 기분이 이렇게 더러운 것이었다니. 오, 라이언. 나는 이제 그대를 이해할 수 있어. 그 생각을 불러 일으키는 장본인이 들었다면 되도 않는 소리를 지껄인다고 타박을 줄 만큼 한심한 생각을 하며, 임스는 말 그대로 임스에게 있어 '먹잇감'을 눈 앞에 두고도 손가락만 빨고 있었다. 


"well, 달링? 넌 날 너무 애타게 하는 것 같아."


임스의 말에 아서가 코웃음을 치며 임스를 바라보았다. 아서가 알고 있는건지 잘 몰랐다. 그의 그런 표정 하나, 하나가 임스를 더욱 애타게 만드는 데 치명적인 일조를 한다는 것을. 아마 그것을 모르고 하는 것이라면 그는 여우탈을 뒤집어 쓴 인간이었고, 그것을 알고 그러는 것이라면 그는 그냥 여우인 것이다.

아서는 천천히 재킷을 벗어 의자 위에 걸쳐놓았다. 깔끔한 블랙 정장안에 비친 회색 안감조차 그에게는 완벽하게 어울렸다. 조끼까지 벗어 재킷 위에 올려놨을 때는 이미 그 얼굴에 한 가득 미소가 흘러넘쳤다.


"정말 구제불능인 건 알고 있었지만, 넌 진짜 빌어먹게 구제불능이야."

"그게 내 매력이지."


몸에 딱 맞는 흰색 와이셔츠에 검은 정장바지, 분에 넘치게 화려한 것은 아니지만 적당히 눈길을 끄는 붉은 넥타이. 한달음에 달려나가 그의 구석구석을 제 입으로 맞추고 싶은 것을 먹잇감이라 하지 뭐라고 부르겠는가. 완벽하다. 지금의 아서는 임스에게 있어 더할 나위 없이 완벽했다.


"그래서, 언제 침대로 기어올거야? 굶주림이 지나치면 맹수가 아니더라도 사나워진다고."

"아니면 네가 내려오던가."

"오, 기꺼이."


얼른 침대에서 뛰쳐나간 임스는 말 그대로 아서를 안아 올렸다. 무겁지도 않은 모양인지 한번에 허리를 잡아 올리고는 방금전까지 그의 뒤에 있던 식탁에 그를 올려놓았다. 아서의 넥타이에 손가락을 끼워넣어 쑥 잡아당기는 손길은 급하면서도 급하지 않아 보였다. 충분히 즐길만큼의 여유는 가지고 있다는 뜻이었다. 아서는 임스의 그런 점이 마음에 들었다. 정말이지, 빌어먹게도 매력적이었다.


"달링, 혹시 검은색 셔츠도 있어?"

"음, 아마도?"

"그럼 다음엔 그걸 입어줘."

"또 무슨 상상을 하는 거야?"

"그건 그 때 보여주지."


한 없이 웃음 짓고 있는 임스의 얼굴에 아서는 굳이 그 생각이 무엇인지 듣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아서는 천천히 고개를 숙였고, 그에 답하듯 임스가 그의 입술을 얼른 훔쳐냈다. 천천히 셔츠의 단추를 푸르는 손길이 이상하게 간지러워 키스를 하고 있는 동안에도 끊임없이 웃음히 새어나왔다.

 

"네가 이렇게 웃는다는 걸 나만 안다는 게 제일 마음에 들어."

"내가 성격이 좋진 않지."

"난 네가 그걸 잘 알고 있다는 것도 마음에 들지. 우리 달링은 너무 겸손해서 탈이라니까. 그리고 지나치게 똑똑해."

"그건 너도 마찬가지야, 임스."

"그래서 내가 싫어?"

"그럼 너는 내가 싫다고 한 건가?"

 

그럴리가, 정색을 하며 자신을 쳐다보는 임스의 얼굴을 부드럽게 두 손으로 감싼 아서는 나른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럴 줄 알았어. 

 

"어머니께서 그러셨지. 막 살아도, 잡혀살진 말라고. 그런데 다 글러먹었군, 그래."

 

단추를 다 푸른 셔츠를 펼치자 드러난 아서의 맨 살에 입술을 묻으며, 임스는 웃음을 흘렸다. 까칠한 수염에, 적당히 뜨거워진 숨결에 아서의 허리가 잘게 떨렸다.


"그러니 날 붙잡은 만큼, 날 만족시켜줘, 달링."

"얼마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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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라는 것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단지 흥미가 없을 뿐, 이라고…… 우겼지만 그래, 안다. 그게 바로 사랑을 모르는 것이라는 걸. 그럼에도 리드는 자신이 인생을 살아가는데 있어 별 문제가 될 거라고는 전혀 의심조차 하지 않았다. 어렸을 때부터 사랑을 주는 거나 받는 것은 필요에 의해 이루어지는 일일 뿐, 딱히 무리하여 하지 않아도 되는 것쯤으로 치부하고 있었으니. 그런 것까지 일일이 신경 쓰기에 세상일은 너무나도 험하고 지치는 일투성이였다. 머리 아픈 일을 굳이 하나 더 늘릴 필요는 없지 않은가.

그런 리드에게 있어 그녀는 최초이자 아마도 마지막일 ‘사랑’이었다.

 

“다른 사람과 사랑하는 법을 알고 있기는 해요?”

 

그래서 상냥하게 웃어 보이는 그녀에게 차마 더 말을 붙일 수 없었다. 구구절절하게 당신만이 나에게는 사랑이었어요, 라고 나름의 로맨틱한 고백을 한 번 더 해볼 법도 하건만 이상하게 말이 나오지 않았다. 리드는 자신이 하고 있는 것이 분명 사랑이라 생각했고, 그렇게 여겨왔다. 그러나 그것을 대놓고 앞에서 부정하는 물음에 차마 대답을 할 수 없었던 탓이리라.

 

“당신은 나를 사랑하고 있는 게 아니라 나를 편하게 생각하고 있을 뿐이에요. 친구처럼, 직장동료처럼. 물론 그것도 사랑이에요. 사랑의 한 종류죠. 그렇지만 리드, 내가 당신에게 원하는 사랑은 달라요.”

“다르군요.

“네, 다르죠.”

 

그래, 그것은 그녀의 말이 백번 옳았다. 리드는 다른 사람을 그렇게 사랑하는 방법을 몰랐다. 더불어 사랑을 받는 방법도 몰랐다. 구태여 그것을 구걸하지도, 요청한 적도 없이 더욱 그랬다. 항상 감정보다 빠른 이성은 이럴 때도 빠르게 다시금 자리를 잡는다. 리드는 그 순간에서조차도 그녀에게 해야 할 마지막 말을 고민했다.

 

“나는 당신을 사랑했으니까 정말로 당신이 행복하길 바라요.”

“…저도 그래요, 라고 하면 안 되는 거겠죠?”

“안 될 이유는 없죠. 리드, 당신은 잘못하고 있는 게 아니니까요.”

 

리드는 그제야 비로소 자신이 그녀를 사랑할 수 있었던, 사랑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다시금 깨달았다.

 

“당신이 할 수 있는, 당신이 원하는 사랑을 할 수 있는 사람을 만나길 바랄게요.”

 

그녀와의 이별은 아쉽고도 슬프지만 그녀를 더 이상 붙잡아놓을 이유도, 재간도 없었다. 리드는 그렇게 첫 번째 사랑을 겪었다. 더욱 아쉬웠던 것은 그녀와의 이별이 진심으로 아쉽고 슬프게 느껴지는 것과는 별개로 그것이 빠르게 자신의 안에서 잊혀지고 사라질 것이라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리드는 자신에게 두 번째 사랑이 그렇게 빨리 찾아올 거라는 것은 전혀 상상도 못했다. 아마 그것은 그녀도 모르지 않았을까.

 

리드가 지향하고 있는 ‘사랑’의 방향은 남들에게는 ‘사랑’이라고 인식되기가 조금 어려운 정도였다. 다른 사람들과의 그 어떠한 관계보다도 더 편안함을 추구하는 게 리드의 사랑이었다. 남들에게 하기 어려운 이야기를 조금 더 관심 있게 들어줄 사람. 옆에 같이 서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의지가 되는 사람. 그런 사람을 더 찾으려 의식해서 그랬는지는 몰라도, 그가 자신에게 먼저 말해주기 전까지만 해도 리드는 그가 자신에게 있어 그런 사람인 줄 전혀 몰랐다.

 

“그런 관계는 사랑이 아닌 걸까요?”

“글쎄. 그건 그 사람이 어떻게 받아 들이냐에 따라 다르지 않겠어?”

 

홧김이었다. 그러나 그 행동은 그라면 자신이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 지 한 번에 알아줄 것이라는 강한 믿음이 밑바탕이 된 행동이었다.

 

“하치는 어떨 거 같아요?”

“사랑이라고 생각해.”

 

이 사건의 범인은 바로 그 혹은 그녀야, 라고 말하듯 평소의 그와 별반 다를 게 없는 태도와 목소리에 리드는 순간 찬물에 뒤집어 쓰인 듯 정신이 번쩍 들었다.

 

“어떡해요?”

“뭐가?”

 

당신을 사랑하게 될 것 같아요. 리드는 차마 거기까지는 말할 수 없어 그저 입을 일자로 꾹 다물 뿐이었다. 단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감정의 파도가 너무 거세게만 느껴졌다. 리드는 서둘러 하치의 사무실을 빠져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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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한다.', 그것은 '좋아한다.' 와는 비슷하면서도 엄연히 다른 감정이다.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과 사랑한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그리고 명백하게 후자가 훨씬 어렵고 복잡하다.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머리가 아프다.

 

예전에는 상상도 못했던 호화스러운 생활에 익숙해지자 헛웃음이 나왔다. 가끔은 이 모든 게 사실 전부 다 꿈은 아닐까, 싶을 정도로. 물론 전부가 좋은 것만은 아니었다.

 

좀 떨어져라, 제발.”

싫은데.”

 

꺼지라는 말이 턱 바로 밑까지 차올랐지만 애써 그것을 삼키며 바이루인은 가슴을 짓누르고 있는 구하이의 팔을 손바닥으로 철썩, 소리가 날 정도로 때렸다. 그렇지만 역시나, 그 팔은 요지부동이었다. 몸을 일으키려했지만 억지로 짓누르는 그 팔에 바이루인은 인상을 찌푸리며 구하이에게 놔달라고 요구했다. 매일 아침 이러는 것도 지겹지 않냐? 바이루인은 불만을 터트렸지만 구하이는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만족스럽다는 듯 화사한 미소를 머금고 있는 얼굴을 주먹으로 딱 한 대만이라도 치고 싶었지만 참았다.

 

, 구하이!”

 

그 다짐은 기껏해야 1분도 가지 않았는데,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뺨에 입술을 부비는 구하이에 바이루인은 결국 화를 내고 만다. 그러나 바이루인은 절대로 먼저 언성을 높이며 화를 내지 않는다. 그저 무언의 폭력으로 일갈할 뿐. 손바닥이 아닌 주먹으로 내려치는 탓에 꽤 둔탁한 소리가 난다. 결국 구하이가 먼저 백기를 들며 나가떨어질 때까지 걸린 시간은 기껏해야 3분이 채 되지 않았다.

 

, . 아프다고!”

그러니까 내가 하지 말라고 했잖아.”

, 너는 좋아하는 사람이 옆에서 자고 있는데 그냥 목석같이 가만히 있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냐?”

그건…….”

 

바이루인은 첫째로 말로 지지 않고, 둘째로 무력으로도 지지 않지만 딱 어느 상황에서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된 듯 말문이 막히고 만다. 바이루인은 몇 번 입을 열었다 닫기를 반복하지만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런 바이루인을 보며 구하이는 못내 섭섭하다는 표정을 지어보이지만 금방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웃으며 바이루인의 몸을 끌어안았다.

 

아니야, 됐어. 괜찮아.”

 

바이루인도 안다. 그의 아버지가 누누이 말씀하셨던 것처럼, 구하이는 참 좋은 사람이다. 바이루인은 허공에 어색하게 펼쳐져 있던 팔을 살며시 굽히며 구하이의 등을 끌어안았다.

 

인즈.”

.”

난 언제까지고 기다릴 수 있어.”

 

물론 내 성격이 그렇게까지 끈질기고 인내심이 강한 편은 아니라는 건 나도 알아. 그렇지만 다른 누구도 아닌 너야. 너라면, 죽기 직전까지라도 기다릴 수 있어. 간절한 듯하면서도 순수한 진심이 담긴 고백에 바이루인은 아주 조금이지만 가슴 한 구석이 콱 막히는 것처럼 아려오는 걸 느꼈다. 사랑한다, 라는 감정은 굳이 사랑한다, 라는 표현으로만 보여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무수히 많은 언어로, 아름다운 말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이 사랑이다.

그저 조금 안타까운 것은, 아직까지는 구하이의 마음에 온전하게 답을 해줄 수 없는 자신이었다. 아직은 좋아한다, 라는 말도 시작하지 못한 그에게 사랑한다, 는 감정은 너무나도 멀고 크게만 느껴졌다.

바이루인은 가만히 구하이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지금은 이것이 그에게 보여줄 수 있는 가장 큰 표현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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