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는, 데미안은 자신이 지금 꿈속에 있다는 것을 자각하고 있었다. 바보 같긴. 누구를 향한 비웃음인지 모를 조소를 흘려보내고 나서야 와락, 얼굴을 구겼다.

꿈이란, 현실이 아닌 것. 그러나 온몸을 휘감은 불쾌함은 상상 이상으로 현실적이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꿈'이라는 것을 자각하자 무의식의 세계가 조금은 자신의 뜻대로 움직였다.

데미안은 곧장 칼을 구현해냈고, 단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자신의 가슴을 찔렀다. 신기한 것은, 전혀 고통스럽지 않다는 것이었다. 순간 세상이 무너진다. 힘없이 늘어진 몸뚱이도 같이 무너졌다.


"깼어?"


익숙한 목소리에 겨우 고개만 돌려 옆을 바라본 데미안은 희미한 미소를 걸치고 있는 딕을 바라보았다. 데미안은 딕의 그런 미소가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던 적이 있다는 것을 떠올렸다.


"브루스가 아니어서 실망했어?"


딕은 조심스러운 손길로 데미안의 이마를 소매로 닦아 주었다. 데미안은 그제야 자신의 온 몸에 땀이 뻘뻘 흘러 옷이고 시트고 축축해졌음을 깨달았다. 꿈속에서는 별로 고통스럽지도 않았던 일이 현실에서는 조금 다르게 다가온 모양이었다.


“……아니.”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가 신경을 긁었지만 차마 목을 가다듬을 힘도 없었다. 딕은 퍽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지만 그 이상 한 마디를 더 거든다거나 하는 짓은 하지 않았다.


차라리 다행이라고 생각해.


아버지가 아닌, 네가 있었다는게. 데미안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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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티넬버스 AU



이 세상에 존재하는 센티넬과 가이드의 존재는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다. 어차피 이 세상에는 센티넬과 가이드라는 특이한 존재가 아니더라도 기이하고 신비한 능력을 부릴 수 있는 존재는 차고 넘쳤기에 그다지 조명을 받지 못했던 것도 사실일 것이다. 그래서 슈퍼맨이 센티넬이라는 것은 누구나 한번쯤은 ‘슈퍼맨이 심지어 센티넬이란 말이야?’ 라는 말을 하고 넘어갈 수밖에 없는 특이사항이었다. 우주 최강의 사내이자 유일한 크립토니안인 그가 센티넬이라니, 와 비슷한 느낌으로. 그리고 그것과 항상 세트로 붙어 다니는 말이 있었는데 ‘배트맨이 가이드란 말이야?’ 가 있었다.

슈퍼맨이 센티넬이라는 사실은 그가 평소에 하고 다니는 것을 보면 너무나도 뻔히 보이는 사실이었으나, 배트맨이 가이드라는 사실은 그가 직접 입 밖으로 꺼내지 않는 이상은 아무도 모를 일이었다. 저스티스 리그에 속해있는 히어로 중 센티넬의 수는 극히 적었는데, 슈퍼맨을 제외하고는 플래시가 유일했다. 센티넬의 수가 적은만큼 가이드의 수가 적은 것은 당연했다. 배트맨이 의도치 않게 가이드인 사실이 밝혀진 것은 - 어쩌면 너무나도 당연하게도 - 슈퍼맨 때문이었다.

수상한 레이저가 정확하게 슈퍼맨에게 쏘아졌고, 막상 레이저를 맞은 뒤에는 더욱 강해진 힘에 펄펄 날아다니던 슈퍼맨이었지만 5분도 지나지 않아 주체할 수 없이 폭발적으로 넘쳐흐르는 힘에 대지가 흔들렸다.


“하하하, 그래! 그거야! 정의의 편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 ‘그’ 슈퍼맨의 손에 직접 이 세계가 박살이 나는 거지!”


가까이 다가갈 수조차 없을 정도로 강력한 힘에 하나 둘 무릎을 꺾여갈 쯤, 어떻게 해서든 슈퍼맨의 힘을 억제한 것은 다름 아닌 원더우먼이었고,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그의 곁으로 뛰어든 배트맨의 모습에 누군가는 숨을 삼켰다. 올가미에 묶여 다가오지 말라고 소리치는 슈퍼맨의 얼굴은 자신에게 다가오는 배트맨의 모습에 더욱 일그러졌고, 히트비전을 어떻게든 억누르느라 실핏줄이 터져 덕지덕지 붉어져버린 흰자위가 흉흉하게 배트맨을 바라보았다. 놀라운 것은 슈퍼맨에게 가까이 다가가는 그 순간까지도 배트맨의 무릎은 멀쩡하다는 것이었고, 조심스럽게 슈퍼맨의 어깨에 팔을 뻗어 손을 올린 순간 울렁거리던 대지가 멈추고 칼같이 불던 바람이 멎었다.


“괜찮나, 클락?”


슈퍼맨, 클락은 굉장히 당황스러운 얼굴로 주먹을 쥐었다 펴기를 반복하며 눈을 깜빡였다.


“안 돼, 이럴 수는 없어!”


그의 계획은 완벽했고, 아마 그가 의도한대로 슈퍼맨의 손에 의해 세계가 파괴되었을 테지만 그가 간과한 것은 슈퍼맨의 주위에 슈퍼맨과 딱 맞는 가이드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이었다.



*



원래부터 배트맨은 이상하게 타인의 시선을 끄는 재주가 있었다. 존재감이라고 해야 할까, 무언가의 아우라 같은 그런 것이 있었다. 원래부터도 그랬는데 그것이 슈퍼맨을 진정시킨 가이드, 라는 수식이 더 붙어 엄청난 수준이 되자 오히려 당황한 것은 슈퍼맨이었다.

그 일이 있은 후 슈퍼맨은 이상할 정도로 배트맨의 눈치를 봤다. 혹 자신 때문에 배트맨이 더욱 곤란해진 상황이 된 것은 아닌가, 더 나아가 만약 이런 상황이 또 벌어진다면, 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이 머릿속에 가득했다. 그나마 슈퍼맨을 조금 기분 좋게 해주던 것은 배트맨의 가이드를 받았던 그 순간의 감각이 너무나도 선명하게 남아있다는 것이었다.


힘이 주체할 수 없이 폭주했던 그 순간은 마치 끝이 없는 낭떠러지에 떨어지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클락은 본능적으로 자신의 힘을 억누르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지 않으면 책상을 짚고 일어나는 것만으로도 책상이 박살나는 것은 물론이요, 누군가와 악수를 할 때 자신도 모르는 사이의 그 사람의 손뼈를 다 으스러트릴 수 있기 때문에. 그 때, 그 순간 배트맨이 자신에게 해주었던 것은 단순히 힘을 억누르고 제어할 수 있게 한 것뿐만이 아니라 가야할 길을 비춰준 것이었다. 본능적으로 힘을 억누를 필요 없이 순수하게 그냥 있는 그대로 존재할 수 있게 해주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느껴보는 감각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너무나 기분이 좋아서.


그 단 한 번의 접촉으로 바로 각인이 될 줄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결과였다.



*



사실 브루스는 자신이 클락과 각인이 되어버렸다는 사실을 일찍부터 알고 있었다. 단지 브루스 스스로가 그 결과에 대해 몹시 당황스러워하는 중이었고, 차마 클락을 더 챙겨줄 만한 여유가 없었기 때문에 어쩌다보니 클락이 자신의 눈치를 보는 상황에까지 와버린 것이다. 단 한 번의 접촉만으로도 각인이 되어버린 센티넬과 가이드, 라. 보통의 사람들이라면 그럴 수 있다지만 그것도 하필 슈퍼맨과 배트맨이라면 조금 신중해질 필요가 있었다.

눈을 감고 조금만 집중하면 클락의 심장소리가 들리는 경험은 신기하지만 불쾌함을 동반하기도 했다. 단순히 클락의 존재가 불쾌했기 때문이 아니라, 앞으로의 일에 대한 노파심과 조바심, 혹은 걱정 때문이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아직 클락은 자신과 확실하게 각인이 되었다는 사실을 모르는 듯 했다. 그렇다고 해서 앞으로 영원히 이 사실을 숨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아무리 클락이 자신의 힘을 제어하는 데 도가 텄다고 해도 센티넬에게는 필연적으로 가이드가 필요했다.

단 한 사람의 센티넬만을 위한 가이드. 브루스 웨인은 로맨티스트라고 할 수도 있었지만 쓸데없는 것에 감상에 젖을 만큼의 여유가 있는 남자는 아니었다. 특히나 그가 배트맨일 때는 더욱 그랬다. 브루스는 문득 모니터에 표시되어있는 날짜와 시간을 확인했다. 이렇게나 시간이 지났으면, 찾아올 법도 하건만. 클락이 브루스에게 첫 번째 가이드를 받은 이후로 열흘의 시간이 지났다. 클락의 심장소리는 들을 수 있었지만 아직까지 클락의 기분을 직접적으로 느낄 수 있다거나 하는 것은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자신이 클락과 한 것은 가벼운 접촉 한 번뿐이었고, 행여 그 단 한번만으로 각인이 되었다 한들 그 이상의 감각적, 감정적 공유는 없었기에. 그렇다고 이 이상 케이브에 가만히 앉아 있기만 하는 것은 클락에게 퍽 못할 짓이기도 했다.



*



“배츠! 오랜만이야.”

“그래, 오랜만이군.”


쏜살같이 달려온 플래시를 보며 배트맨이 넌지시 물었다.


“슈퍼맨은?”

“요새 슈퍼맨이 좀 이상하다니까.”

“이상하다고?”

“그래. 답지 않게 어깨가 축 쳐져있질 않나. 갑자기 벌떡 일어나다가 의자를 박살내지 않나.”

“…….”

“갑자기 아무런 일도 없는데 우주를 쌩쌩 돌아다니면서 날아다니지를 않나. 하여튼 요새 좀 이상… 아, 슈퍼맨!”


플래시 못지않은 속도로 쏜살같이 달려온 슈퍼맨 덕에 바람이 일자 배트맨의 망토가 펄럭였다. 무어라 더 말을 붙이기도 전에 재빨리 배트맨의 팔목을 낚아채 벽으로 밀어붙이는 슈퍼맨을 보며 플래시는 네가 그렇게 사람을 막 휘둘러대면 큰일 나! 라며 경악에 차 소리를 질렀고, 곧 불길한 소리가 나며 배트맨의 얼굴이 와락 구겨졌다. 슈퍼맨의 상태는 그 날과 별반 다를 것이 없어보였지만 그나마 다행인 것은 모든 것을 다 가루로 만들어버릴 만큼의 힘을 쏟아내고 있지는 않는다는 것이었다. 서둘러 플래시가 슈퍼맨의 팔에 매달려 그 팔을 떼어내려 노력했으나 소용없었다.

그러나 플래시도, 심지어 배트맨도 슈퍼맨이 지금 어마어마한 인내심을 발휘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기에 쉽게 다른 사람들도 부르지 못하고 지금 이 선에서 일을 마무리하기를 원했다.


“클락.”


배트맨은 천천히 그의 이름을 부르며 다른 팔로 그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이미 부러진 왼쪽 팔이 끊어질 듯 아팠지만 배트맨의 목소리에 떨림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강하고, 단호하게. 슈퍼맨의 이름을 부른 배트맨은 더욱 세게 끌어안으며 말했다.


“미안하군.”


그렇다고 이렇게 자네를 내버려둬서는 안 됐어. 길고 긴 숨이 이어지며 금방 고른 숨을 되찾은 슈퍼맨은 가만히 배트맨의 어깨에 이마를 묻었다.


“미안, 미안해. 브루스.”



*



배트맨은 왼쪽 팔이 부러지는 부상을 입었고, 슈퍼맨은 요새에 처박혔다. 그곳에 찾아가는 것은 브루스에게도 힘든 일이라 – 그것도 왼쪽 팔이 부러진 상태로는 더더욱 – 특단의 조치를 쓰기로 했다. 케이브에 가만히 선 브루스는 그저 속삭였다.


“당장 이리로 날아오지 않으면.”

“그것만은 참아줘.”

“…….”

“…….”

“내가 뭘 말할 줄 알기는 하나?”

“내가 상상할 수 있는 그 어떤 최악의 말로도 설명을 못하겠는걸.”


여전히 슈퍼맨의 얼굴이라고 하기보다는 클락 켄트의 얼굴에 가까운 모습에는 먹구름이 가득했고, 브루스는 그 모습이 퍽 웃겼다. 대체 언제부터 슈퍼맨이 배트맨의 눈치를 보며 살았나. 클락의 시선은 여전히 깁스를 하고 있는 브루스의 팔에 콕 박혀 있었다.


“일단 내 팔이 이렇게 된 건 자네 탓이 아니라 내 탓이니 제발 눈치 좀 그만 봐.”

“자네 탓이라니? 브루스, 나는…….”

“내 말을 먼저 가로채지도 말고 사람이 하는 말은 끝까지 들어.”

“미, 미안. 그런데 이건 내가 먼저 말해야겠어.”


브루스는 클락의 심장이 조용히, 그러나 세차게 뛰고 있음을 느꼈다. 어쩐지 처음 접촉을 했을 때 보다 더욱 진하게 느껴지는 감각에 브루스는 설마하니 자신의 심장도 마주 뛰고 있지 않을까, 하는 쓸데없는 걱정을 했다. 분위기에 휩싸인다는 말이 있지 않은가. 딱 그 꼴이었다.


“그래, 말해봐.”

“내가, 자네를 책임질 수 있게 해줘.”

“…….”


정말, 전혀 예상치도 못한 말에 브루스는 혹시 그 때의 충격으로 인해 클락이 머리를 어디에 세게 부딪힌 것은 아닌가, 지금 눈앞에 있는 남자가 ‘세계 최강의 남자’ 라는 수식어를 달고 있는 사람이 맞는가에 대해 잠시 고민해 볼 필요가 있었다.


“그건 내가 해야 하는 말 아닌가?”

“내 가이드는 내가 책임져야지.”

“자네가 날 책임져?”


어느 샌가 배트맨의 모습은 어디에 버려두고 브루스 웨인의 얼굴을 한 남자를 눈앞에 두고 클락은 등 뒤로 식은땀이 흐르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기자 월급에, 머리부터 발끝까지 검소함을 두른 ‘클락 켄트’가 ‘브루스 웨인’을?”

“……음, 그건.”

“고작 며칠 얼굴 못 봤다고 자기 가이드 팔을 부러트리는 센티넬이?”

“…….”

“이제 다시 한 번 말해보겠나?”


그제야 클락은 다시금 깨달았다.


“나 좀 책임져 주게, 브루스.”

“좋아.”


죽었다 깨어나도 ‘클락 켄트’는, ‘브루스 웨인’을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센티넬과 가이드, 라는 관계 그 이전에도.

글쎄, 혹 슈퍼맨과 배트맨이라면 또 모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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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클락은 자신의 뒤 쪽에 따라붙는 끈질긴 시선에 진땀을 뺀 적이 한 두 번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 시선은 묘하게 집요하면서도 악의적이지는 않았지만, 아주 가끔은 눈에 띄게 살기를 띄고 있을 만큼 무시무시했고 어느 날은 너무나도 담백하다 못해 바짝바짝 피가 마르는 기분에 빠져들게도 만들었다. 클락은 그 시선의 주인공이 브루스라는 것을 거의 확신했다. 아니, 브루스가 맞을 것이다. 차마 정말로 그 시선의 주인공이 브루스라는 사실을 두 눈으로 확인하기가 두려워, 두려워…?


“…….”


그래, 그것은 명백한 두려움이었다. 아니, 아닌가. 아, 모르겠다. 툭, 하고 터져 나온 한숨에 다이애나가 무슨 걱정거리라도 있는 것은 아니냐는 물음을 던졌지만 클락은 차마 대답할 수 없었다. 연인의 시선이 신경 쓰여 밤잠을 설친다는 이야기를 한다면 분명 두고두고 놀림 받을 것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기에.







어느 샌가부터 브루스의 손에 작은 수첩이 들려 있다는 것을 클락은 물론이요, 워치타워의 모두가 알고 있었다. 그러나 대놓고 브루스에게 그것이 무어냐고 묻기에는 안타깝게도 그리 용감한 사람은 없었다. 아무렴, 상대는 그 브루스 웨인이었고, 배트맨이었다. 그가 허투루 하는 일은 아무것도 없을 것이라는 근거 없는 믿음은 그들 모두에게 존재했다.

수첩의 크기는 앙증맞은 것처럼 보이면서도 생각 외로 적당했다. 딱 그의 양복 주머니에 쏙 들어갈 것 같은 크기의 수첩이 유선이 아닌 무선 노트라는 것까지는 알아내는 데 성공했다. 이쯤 되면 그의 연인이라는 타이틀을 거머쥔 슈퍼맨이자 동시에 데일리 플래닛의 ‘기자’ 클락 켄트는 한 번 쯤은 브루스에게 물어볼 법도 했다. 그게 무엇이냐고. 클락이 그러지 못했던 것은 언젠가 수첩을 펼쳐보던 브루스의 얼굴에 희미하게 걸쳐진 미소 때문이었다. 솔직히 말해서 그 때 봤던 그의 표정은 클락에게 꽤나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런 표정을, 언제 봤더라. 브루스의 이름으로 예약된 고급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다가 자신이 실없는 농담을 던졌을 때? 아니, 아마 그 때도 웃는 것보다는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표정을 구긴 적이 더 많지 않을까. 그러다보니 그것이 무엇이냐고 물을 만한 타이밍을 놓쳤고, 이제껏 의문은 의문으로만 남아있었다.

브루스는 항상 수첩을 들고 다녔지만 모두의 앞에서 그 수첩을 펼쳐본 적은 없었다. 자, 그럼 여기서 또 문제. 투시 능력을 가지고 있는 클락 켄트는 왜 브루스의 수첩을 보지 못했을까? 아서라. 수첩의 겉면에는 아주 얇지만 납으로 된 철판이 붙어있었다. 클락은 그 수첩에 크립토니안을 사살할 수 있는 51가지 방법이라도 쓰여 있는 것은 아닌가 아주 잠시 고민했다. 이렇다보니 월리나 다이애나가 대체 브루스의 수첩의 정체가 무어냐고 아무리 클락에게 물어본다 한들 답을 구할 수가 없었다. 클락 본인도 오리무중이었기에.


“대체 그게 뭐야?”


나이스, 월리.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지만 아마 모두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터였다. 하긴 이럴 때 그가 아니면 대체 누가 쉽게 진실을 캐려고 하겠는가. 그것도 브루스 웨인을 상대로. 알게 모르게 그들의 시선이 브루스를 향했고, 브루스는 그들의 시선이 자신이 아닌 그의 수첩을 향하고 있다는 것을 아주 쉽게 알 수 있었다. 브루스는 드물게 입 꼬리를 말아 올리며 웃었다. 오, 월리의 탄식에 클락은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등골이 오싹해지는 기분이었다.


“비밀이야.”


그러면 그렇지. 저 당당하고도 뻔뻔하지만, 그이기에 납득을 안 하려야 안 할 수가 없는 것이다. 존은 대놓고 혀를 찼다. 클락의 눈에는 명백하게 브루스가 지금 상황을 즐기고 있다는 것이 보였다. 아주 가끔이지만, 브루스는 참 짓궂은 소년의 태를 내기도 했다. 지금이 바로 그랬다.







“대체 요새 왜 그래?”


클락은 용기를 내었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말끔한 정장 차림을 하고 있는 그의 한 손에는 노트가 들려있었고, 다른 한 손에는 샤프가 들려있었다. 회의실에는 클락과 브루스뿐이었고, 그것은 곧 절호의 기회라는 뜻이었다. 브루스의 손은 유연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큰 선을 긋는 것처럼 보이다가도 짧게 글씨를 쓰는 것처럼 이리저리 춤을 추었다. 보지는 못해도 소리는 들린다. 클락은 샤프심이 종이에 그어져 선을 남기고 가루가 되어 흩날리는 소리마저 들을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뭐가?”


손을 멈춘 브루스가 뭐가 문제냐는 듯 바라보자 클락은 단숨에 말문이 막혔다. 자네가 요즘 나를 보는 시선이 이상해. 아니, 이건 좀 자의식 과잉 같고. 그 수첩에는 대체 뭐가 있는 거야? 정말로 크립토니안을 사살하기 위한 51가지 방법이라도 적혀있는 거야? 한참이나 말을 고르고 있던 클락의 사고를 정지시킨 것은 팟, 하고 터진 브루스의 웃음 소리였다. 그 다음 순간 클락은 자신의 품으로 쏙 들어온 수첩을 하마타면 놓칠 뻔 했다. 먼저 가보지. 브루스는 클락이 그 내용물을 채 확인하기도 전에 재빠르게 사라져버렸고, 회의실에는 멍청한 얼굴로 한 손에 수첩을 든 클락만 덩그러니 서 있을 뿐이었다. 브루스의 수첩은 마치 판도라의 상자 같았다. 한 번 시작했으면 끝을 봐야지. 클락은 조심스럽게 수첩을 열었다. 첫 페이지에는 지금으로부터 약 1달 정도 전의 날짜가 적혀있었다. 브루스가 처음 수첩을 들고 다녔던 때랑 비슷했다. 그 다음 페이지는-.


“…….”


클락의 예상대로, 브루스의 수첩은 판도라의 상자였다. 그러나 브루스의 수첩에는 희망만이 담겨있었다. 클락의 마음을 촉촉하게 적시는 희망만이.

형태가 막 뚜렷한 것은 아니었지만 한 페이지에 적으면 한 개, 많으면 세 개까지 빼곡하게 그려져 있는 것은 다름 아닌 클락 자신의 모습이었다. 근 한 달 동안 왜 브루스가 자신을 그리 집요하게 관찰했는지 드디어 알 수 있었다. 수첩 속에 그려진 클락의 모습은 참 다채로웠다. 웃고 있기도 했고, 시무룩해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화를 낸다거나 하며 얼굴을 구기는 그림은 별로 없었다. 클락은 자신의 귀가 이미 새빨갛게 물들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브루스의 시선에 비친 ‘클락 켄트’는, 이렇게 생긴 것이었다. 딱히 힘을 주지 않아 부드럽고 유연하게 휘는 선은, 언젠가 클락이 보았던 브루스의 미소와도 얼핏 닮아 있어서-.


- Who is he?


마지막 장을 펼치자 휘갈겨 쓴 문체로 적혀진 문장을 보고 나서도 한참이 더 지난 후에야, 클락은 발을 뗄 수 있었다. 쿵쾅거리는 심장 속도에 맞춰 발걸음 소리도 점점 커져만 갔다. 날아갈 수도 있었겠지만 뛰는 것을 택한 것은 마지막 인내심이었다. 지금 날아갔다가는 얼마나 많은 벽과 문을 깨부술지 장담할 수조차 없었다.

얼마나 뛰었을까. 그만큼 뛰어봤자 숨이 차기는커녕 평안하고 고르기만 한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며 얼른 집무실의 문을 연 클락은 가만히 의자에 앉아있는 브루스를 보자마자 그에게 달려들었다. 정말 말 그대로 커다란 강아지 한 마리처럼 그의 위로 달려든 탓에 하마타면 의자 째로 넘어갈 뻔한 일에 대한 소리 없는 꾸중을 당하고 나서야 브루스의 뺨과 입에 키스를 할 수 있었다.


“나는 너의, 너만의, 클락 켄트야.”


깊고 깊은 푸른 눈이 산뜻하게 휘어지며 바다의 파도가 물결쳤다. 브루스는 가만히 파도에 몸을 맡겼다.







클락은 데일리 플래닛으로 온 소포를 하나 받았다. 보내는 사람의 이름은 적혀 있지 않았다. 척 봐도 커다란 액자 같아 보이는 직사각형의 소포를 뜯어보자마자 클락의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하나같이 탄성을 터트렸다.


“누군지는 몰라도 진짜 잘 그렸는걸.”


액자 속 클락은 미소 짓고 있었다. 클락은 또 한 번 자신의 귓가가 새빨갛게 달아오르는 것을 느끼며 크나큰 액자를 품에 꼭 끌어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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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마도) 저스티스리그 애니 배경 기반



종종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을 잊고는 한다. 누가 들으면 당신이 그런 일도 있냐며 놀라워할 테지만 아주 가끔은 그러기도 한다. 클락 켄트는 슈퍼맨이지만, 크립토니안일 뿐이지 신은 아니기에.

 

“배츠!”

“배트맨!!”

 

그래서 아주 보잘 것 없는 총알 하나가, 그의 목숨을 앗아갈 수 있다는 사실을 종종, 잊고는 했다.

 

*

 

수술은 꽤 오랫동안 이어졌다. 워치타워는 적막이 흘렀고, 그들의 얼굴에 미소는 사라져있었다. 고된 전투였던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라 여기저기 찢기고 피가 난 상처들을 돌봐야한다는 것도 잊은 채로. 그들 모두가 지금 제일 아픈 것은 몸에 난 상처가 아닌 그들 가슴에 난 상처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의 생명력은 경이로울 때가 있죠.”

 

병실의 문이 열리고 그 안에서 걸어 나온 존의 얼굴에 미소가 걸쳐져 있다는 것을 안 비로소 그 때서야, 웃을 수 있었다. 그러나 클락은 웃을 수 없었다.

클락은 몹시도 슬펐고 두려웠다. 그는 누구보다 총명했고, 뻔뻔했으며, 강했고, 아름다웠고, 그렇지만 그렇기에 인간이라는 것을.

 

“…….”

 

겨우겨우 뛰고 있는 심장의 고동소리마저, 너무나도 인간다움을 깨닫자 클락은 그대로 두 눈을 감아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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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포일러 주의



남자의 이름은 클락 켄트였고, 또한 슈퍼맨이었다, 브루스 웨인은 남자가 잠들어 있는 자리를 빤히 내려 보았다. 언젠가 자신의 손으로 그를 그 자리에 눕혀 주리라 각오를 다진 적도 있었지만 실제로 그가 관에 누워있는 모습은 이상하게 괴리감이 느껴졌다. 
남자의 이름은 슈퍼맨이었지만, 클락 켄트와 슈퍼맨이 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아는 자는 손에 꼽았다. 남자의 어머니는, 그의 마사는 브루스의 손을 그 주름이 가득한 손으로 꼭 쥐고는 눈물을 흘렸다. 브루스는 차마 그녀를 위로하지 못했다. 할 수가 없었다. 뻔뻔해도 정도가 있지. 

“실망시켜서 미안했네.” 

과거형. 브루스는 자신의 생각을 그리 표현했다. 이 앞으로의 미래에 자네를 실망시키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신념, 혹은 무언의 약속. 브루스는 묘비에 새겨져있는 이름을 속으로 곱씹었다. 

“클락 켄트, 라.” 

브루스는 언젠가 루터의 파티장에서 만났던 당돌한 기자를 떠올렸다. 천천히 발걸음을 돌리자 순식간에 바람이 온 몸을 꿰뚫어버릴 듯 거세게 스쳐지나간다. 브루스는 작은 목소리로 욕을 내뱉었다. 망할. 
남자의 얼굴은 그 때와 마찬가지로 참으로, 

“불렀나?” 

뻔뻔하기 그지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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