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레미즈 필모 형제썰. 브랜트/바튼 쌍둥이

- 답 없는 크로스오버






1.

모든 임무가 끝나고 공식적으로 자유가 된 바튼은 오랜만에 아주 편안한 기분으로 일출을 바라보고 있었다. 뉴욕 시에서 가장 높게 솟아오른 빌딩의 끝자락은 바튼의 마음에 쏙 들었다. 이런 자신의 취향을 아는 그가, 부러 이런식으로 건물을 설계했다는 것도 물론 알고 있다. 단지 자신이 조금 덜 피곤하기 위해 모르는 척 하고 있을 뿐이지. 이곳은 애지중지하는 활도 없이 완벽한 비무장 - 발목과 허리춤에 찬 칼들은 제외하기로 하자. - 상태로 있을 수 있는 유일한 곳이기도 하다. 바튼은 진심으로 자비스가 존경스러웠다. 덧붙여서 토니도 조금, 아주 약간.


"...윌?"


소란스러운 뉴욕의 출근길, 바튼은 이 곳에 있을리 없는 사람의 등장에 조금 당황한 눈치였다. 





2.

"여기는 어쩐일이야?"


아무런 연락도 없이 갑작스레 쳐들어온 브랜트의 모습에 당황한 것은 바튼뿐만이 아니었다. 아머를 손보고 있던 토니도 브랜트가 왔다는 말을 듣고는 부랴부랴 윗층으로 올라와서는 아주 반가운 기색으로 브랜트를 맞이했다. 브랜트는 그런 토니의 친절을 매우 고마워하며 타워로 들어섰다. 한 박스나 되어보이는 짐 가방을 들고서 말이다.


"제발, 부탁이야."

"윌, 그니까 대체-"

"망할 IMF, 반드시 이번 날 내로 사직서를 던지고 올거야."


평소의 브랜트라면 잘 쓰지 않는 상스러운 욕지거리를 들으며 바튼은 브랜트가 또 즉발성 IMF 스트레스 증후군을 달고 왔다는 사실을 인지했다. 사실 브랜트가 이러는 것은 한 두번이 아니었다. 항상 브랜트는 IMF에게 뒷통수를 당하거나 - 흔한 말로, 다 된 밥에 시말서 뿌리기 등이 있다. - 심각할 정도로 인지능력이 떨어졌을 때 등 제 성격상 도저히 혼자 끌어안을 수 없는 일이 발생하였을 경우 이렇게 무차별적으로 어벤져스 타워에 급습을 시도한다. 물론 바튼은 단 한번도 그런 브랜트를 거절하거나 거부한 적이 없었다. 그에게는 미안한 말일지 몰라도 바튼은 그가 이렇게 타워로 와주는 것이 차라리 속이 더 편했다. 이 모든 사건의 주범이 누구인지도 익히 들어 잘 알고 있었으니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았다. 바튼의 예상 외 였던 것은, 토니도 그런 브랜트를 반겨준다는 것이었다. 물론 바튼의 입장에서 자신의 연인이 제 가족을 잘 돌봐준다는 것은 매우 좋은 일이었으니 불만은 없었지만 말이다.


"항상 그렇게 말하고 못하잖아."

"......"


브랜트는 절망스러운 얼굴로 토니를 올려다봤고 그제야 토니 스타크는 자신이 해서는 안되는 말을 했다는 것을 자각하고는 바튼의 뒤로 숨었다.


"또?"

"아니, 그냥."

"날 속일 생각하지마, 윌. 벌써 전화왔거든."

"대체 네 번호는 어떻게 아는 건데?!"

"네 말마따나 '이단 헌트'라며, 그래서 그런가보지. 그래도 이 정도일 줄은 몰랐는데. 토니, 제 개인 전화 네트워크망은 자비스가 담당하고 있는 거 아니었어요?"

"그거야 그렇지. 안 그래도 저번에 한 번 뚫렸다고 그래서 한 층 더 업그레이드를 해놨는데- 모르긴 몰라도 정말 독한 사람인가봐. 자비스가 이 정도로 애를 먹을 줄은 몰랐어."

"그 인간이 또 러시아든 영국이든 위성 하나 골라잡아다가 쓰고 있겠죠."


어쨌든 난 안 갈거야, 정당하게 휴가도 받고 온 참이라고, 하며 브랜트가 던진 서류 조각을 들어올린 토니가 무슨 말을 또 하려던 찰나 바튼이 토니의 입을 손으로 눌렀다. 서류에는 떡하니 부적합 사인이 찍혀있었으나 브랜트는 현실을 무시한 채 인지능력이 바닥이 되어 있었고, 바튼은 그런 브랜트를 가여이 여겼다. 토니는 어깨를 으쓱여볼 뿐이었다.





3.

바튼은 꽤 오랜만에 입어보는 완벽한 수트 차림이 어색하기만 했다. 오랜만이라며 드레스룸에 쳐들어와 대체 언제 마련한 건지 모르는 제 몸에 딱 맞는 맞춤 정장들을 이리저리 돌려보며 코디를 해준 토니가 마지막으로 넥타이를 매줄 때 쯤 온전히 정신이 돌아온 바튼이 살짝 인상을 찌푸리며 물었다.


"솔직히 말해봐요. 즐거워요?"

"오, 우리 매가 말하는 '즐겁다'의 사전적 의미가 지금 공식적으로 휴가를 받아 그 기간 동안 온전히 내 것이 될 매 한 마리를 어디인지도 모르는 새장에 보내야 한다는 사실에 대한 내 기분을 말하는 건가?"


넥타이를 다 매주고도 한참이나 바튼이 입은 정장 위로 손을 떼지 못하는 토니를 보며 바튼은 가볍게 미소지었다.


"당신이 그렇게까지 생각할 줄은 몰랐는데요."

"언제쯤 우리 허니가 믿어줄까?"

"이 일 끝나고 나면요. 당신만 괜찮다면 윌한테 맛있는 저녁을 사주고 싶은데요. 그 때 까지만 날 다른 사람한테 빌려주겠어요?"

"싫다고 하고 싶어."

"토니, 제 휴가는 앞으로 사흘이나 더 남았어요."


살며시 토니의 손을 들어올려 손등에 짧게 입을 맞추자 하는 수 없다는 듯 알았다며 고개를 끄덕이는 토니를 보며 바튼도 고개를 끄덕였다.





4.

"-그래서."


벤지는 황당한 얼굴로 브랜트와 얼굴이 똑같은 남자를 바라보았다. 도플갱어라고 해도 믿을 수준으로 똑 닮은 것이, 정말이지 참으로 놀라웠다. 제인도 마찬가지였는지 쉽게 남자의 이름을 올리지 못했다. 


"윌이 쓰러졌어요. 누구 때문인지는 말 하지 않아도 잘 알 거라고 생각하니 생략합시다."

"...괜찮아?"

"지금쯤 약 먹고 누워있을 거예요. 마음 같아서는 내가 옆에 있어주고 싶었는데, 차라리 이 일을 끝마쳐주는게 더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왔습니다."

"지금 어디있는데?"

"안 가르쳐줘도 스스로 알아낼테지만 찾아갈 생각은 꿈에도 하지 마세요, 미스터 헌트."


미묘하게 서로 칼날이 오고 가는 듯한 등골이 싸한 기분에 벤지는 적응하는 데 한참이나 오랜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 브랜트와 똑같은 얼굴로 저렇게 날카롭게 얘기하는 걸 듣다가는 정말 쫄려서 심장마비가 올지도 몰라. 이단은 이단대로, 그의 입에서 나온 마지막 호칭이 조금 거슬리는 듯 했다. 이래저래 쌍둥이의 힘은 위대했다고 할 수 있었다.


"클린트 바튼입니다. 클린트 브랜트라고도 하지만 그냥 바튼이라고 불러주시면 됩니다제 이름에서 비롯된 그 이상의 질문은 저와 윌의 사적인 영역이니 넘어가주시길 바랍니다."

"좋아, 찾아가지 않는다고 약속할테니까 어디있는지라도 알려줘."


여전히 잔잔한 미소를 머금은 채로 다정한 어투로 말하는 이단을 보며 바튼은 별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타워에 있습니다. 스타크 타워요."

"스타크...? 토니 스타크?"

"다른 말로는 어벤져스 타워라고 하니, 얼씬도 하지 마십쇼."


어벤... 뭐? 벤지는 윌리엄 브랜트의 신상파일을 뒤지고 싶은 강한 충동에 휩싸였다.





5.

우리가 지금까지 정말, 매우, 아주 많이 잘못했으니까 이제 그만 돌아와줘, 브랜트. 

이러다 IMF 날아갈 거 같아!!!!





6.

브랜트는 자신의 이마에서부터 전신으로 쫙 퍼지는 서늘한 감촉에 반짝, 눈을 떴다. 갑자기 눈을 마주친게 꽤 어색한 모양인지 토니가 헛기침을 하며 브랜트의 이마에 올려져 있던 수건을 거둬냈다.


"...고맙네요, 미스터 스타크."

"그냥 토니라고 불러. 그 얼굴로 그렇게 부르면 괜히 거리감 생긴 거 같단 말야."


토니의 말에 브랜트는 웃음을 터트렸다. 


"진짜 고마워요."

"네가 오늘처럼 타워에 찾아오는 게 어디 하루 이틀도 아니고-"

"그거 말고."

"그럼?"

"좋아보여서요, 두 사람."


아, 이번엔 좀 부끄러워하는 거 같다. 브랜트는 즉각적인 토니의 반응에 몹시 즐거워하는 듯 했다. 내심 한편으로 바튼이 아주 약간 부러워졌다. 


"너도 좋아져야지."

"저요?"

"그 남자가 아무 이유도 없이 그러는 건 아닐 거 아냐."

"당신 눈에는 그렇게 보여요?"

"조금은."


차라리 그랬으면 속이라도 좀 더 좋게요. 브랜트는 살풋 얼굴을 찡그려보고는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핸드폰을 확인했다. 수십통의 문자와 부재중 전화가 쌓여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아차린 브랜트는 설마, 하는 얼굴로 토니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클린트는요?"


토니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태연한 얼굴로 어깨를 으쓱였다.





7.

IMF, 팀 이단 헌트의 임무는 아주 간단했다. 도시 외곽 폐공장에 자리를 잡고 앉아있는 테러리스트 집단을 무력으로 와해시키면 되는 것이다. 확실히 이번 작전은 잠입이라던가, 정보를 빼온다거나 하는 고난이도의 작업은 필요가 없었고 할 수만 있다면 최대한 조용히 처리를 하면 좋겠지만 애초에 이단이 이 팀에 있다는 것으로 조용히 처리하는 것을 무리라고 판단한 모양인지 미션의 내용은 최대한 '빨리' 적을 진압하는 것이었다. 본래라면 컨트롤 타워에서 계획서를 잔뜩 늘어놓고 이단과 벤지에게 진입로를 알려줘야 하는 브랜트 대신, 어디서 꺼내온건지 모르는 활을 꺼내들고 전선에 선 바튼을 보며 벤지와 제인은 황당한 기색을 숨길 수 없었으나 이단은 꽤 믿음직하다는 얼굴로 바튼을 바라보았다.


미션의 시작을 알리는 폭파음이 들리자마자 소탕 작전은 시작되었고 총소리가 가득한 무법지대에 허공을 가르는 화살의 소리는 퍽, 낯설기만 했다. 벤지는 이번 일만 끝나면 브랜트에게 작살이 나는 한이 있더라도 반드시 윌리엄 브랜트의 신상정보 보고서를 꼭 들여다 보겠다고 다짐했다.


이단은 틈만 나면 자신의 등 뒤에서 느껴지는 한기에 피식, 피식 웃음이 새어나왔다. 어쩌면 그것 덕분에 더욱 긴장을 해서인지는 몰라도 날아오는 총을 피하기는 더할 나위 없이 최상의 컨디션이었다. 평소대로라면 지금쯤 상황을 보면서, 여차하면 인이어에 대고 냅다 소리를 지를 만한 사람이 없다는 사실이 꽤 공허하게 느껴졌다. 이번 일이 끝나면 정말 진심으로 사과 해야겠는걸. 이단은 머릿속으로 잔뜩 성이 난 위장에는 어떤 음식이 좋은 지 생각해보고 있었다.

그것과는 별개로 이런 식의 일이 무척이나 자연스러운 듯 행동하는 바튼이 눈에 들어왔다. 그의 움직임에는 한 끗의 오차도 없었으며 그가 쏜 화살은 백발백중을 자랑했다. 이단은 부러 바튼의 곁에 붙어있었다. 그에게는 어떠한 도움도 필요하지 않았고, 그것은 이단에게도 마찬가지였지만 꿋꿋하게 바튼의 주위를 맴돌았다.


"할말이라도 있습니까?"

"-아니, 그냥."


바튼의 어깨 너머 달려오는 테러리스트의 다리를 맞춘 이단은 별 뜻 없다는 얼굴로 웃어보이며 말했다.


"너랑 브랜트가 다른 사람이라는 걸 알지만 조금 불안해서."


이단은 타겟은 보지도 않고 활을 쏘는 바튼을 보며 아주 약간의 경이로움을 느꼈다. 바튼은 이단의 말을 반은 이해하고 반은 이해하지 못했고, 설명을 요구하는 얼굴로 이단을 바라보았다. 바튼이 이해한 절반은 이단이 자신과 브랜트를 다른 사람으로 보고 있다는 1차원적으로 아주 당연한 문제였고, 이해하지 못한 절반은 무엇이 그를 불안하게 만드는 가에 대한 것이었다. 그러나 바로 수 초 뒤, 바튼은 이해하지 못했다는 얼굴과는 다른 속된 말로 '네가 지금 내 앞에서 무슨 말을 지껄이고 있는 지 아느냐'와 같은 얼굴을 해보였고 이단은 꼭 브랜트의 앞에 선 것 같은 기분이 되었다.


"그래서 윌의 위장에 구멍을 뚫었다, 이겁니까?"

"그건 미안하게 생각해."

"-하."


바튼은 아주 미묘하게 얼굴을 구기며 웃고 있었지만 더 이상의 말은 하지 않았다. 이단은 바튼이 무엇을 말하려고 했는지 아주 잘 알겠다는 뜻으로 바튼이 노리던 타겟을 쓰러트렸다.





8.

본부로 돌아온 이단의 팀을 맞이해준 것은 아이언맨과 함께 날아온 브랜트였다. 벤지는 그간 정말 미안했다며 브랜트에게 사과를 했고, 제인도 마찬가지였다. 브랜트는 아무 말 없이 웃어보일 뿐이었다. 어차피 또 그럴거잖아. 다 알아. 


"아이언맨이랑 같이 하늘을 나는 기분, 진짜 끝내주더라."


바튼은 드물게 크게 웃어보였다.





9.

"몸은 좀 괜찮아?"

"굉장히 오랜만에 푹 잔 것 같긴 해요."

"식사는?"

"아직."

"그럼 저녁이나 하러 가지. 따뜻한 걸로."


브랜트는 대체 무슨 꿍꿍이로 이러냐는 듯한 얼굴로 이단을 바라봤고, 이단은 조심스레 브랜트의 허리에 팔을 감으며 말했다.


"네 목소리가 그리웠어."


그 날 만큼은 이단이 - 혹은 바튼이 - 벌여놓은 사고에 대해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10.

얼마 지나지 않아, 브랜트가 또 다시 타워로 찾아왔다. 

바튼에게 있어 다행이라고 해야할지 불행이라고 해야할지, 타워로 찾아온 브랜트의 옆에는 이단이 있었다.













13.

집 안으로 들어온 브랜트와 리나의 표정이 똑같이 썩어있는 것을 보고도 뻔뻔하게 미소를 지은 이단은 두 사람을 거실로 안내했다. 현관을 들어서자마자 식욕을 돋구는 냄새에 브랜트는 설마 이단 헌트가 가정집에서 요리를 한 건 아니겠지, 라는 굉장히 이단과는 어울리지 않는 상상을 해보았으나 그것은 상상으로 그치지 않았다. 식탁 다리를 부러트릴 정도로 차려져 있는 진수성찬에 브랜트는 침을 꼴깍 삼켰다.


"자백제 탔어요?"

"대체 날 뭘로 보고 있는거야?"

"이단 헌트요."


그러면서도 브랜트는 뭐가 그리 웃긴 건지 슬쩍 미소를 지으며 리나를 의자에 앉혔다. 리나의 표정은 벌써부터 뚱, 해져 있는 것이 자칫하다가는 무슨 폭발을 일으킬지 몰라 조마조마했다. 식탁 맨 끝에 앉아있는 리나와 그 양 옆으로 마주보고 앉은 브랜트는 이 상황이 무척 웃기다고 생각했다. 설마하니, 진짜로 이 두 사람이 또 다시 한 공간에 있게 될 줄이야. 리나는 애꿎은 식탁 위의 요리만 뚫어져라 바라봤다.


"리나. 이단한테 인사해야지."

"우으... 안녕하세요..."

"안녕."


브랜트는 결국 참지 못하고 큰 웃음을 터트렸다.




14.

웃긴 거 취소. 브랜트는 예상 외로 바짝 날이 서 있는 듯한 식탁 위의 공기에 금방이라고 체할 것 같은 기분이었다. 작게 한숨을 쉰 브랜트는 결국 두 사람을 중재해야 하는 역할을 스스로 자처했다.


"이러다 오늘 저녁에 변기 붙잡고 속을 다 게워낼 거 같으니, 그만합시다."

"아빠, 어디 아파?"

"어제 뭐 잘못 먹었어?"


브랜트는 생각 외로 죽이 잘 맞는 두 사람을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리나, 솔직하게 얘기해봐. 이단이 왜 그렇게 싫은건데? 아니, 아니지. 먼저 이거부터 물어보자. 대체 아까 이단한테 했던 말이 무슨 뜻이야?"

"아빠는 너무 둔해."

"-리나, 그거 반칙이야."


뜬금없이 치고 들어오는 이단의 목소리에 브랜트는 정말이지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두 사람을 번갈아보았다. 이거, 그거 아니지? 그치? 


"우리 놀리는데 그렇게 힘쓸 필요 없어요, 이단. 뭐가 그렇게 당신을 재밌게 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윌리엄 브랜트."

"네?"

"공적으로는 전혀 안 그러면서, 사적으로는 그렇게 둔해?"


챙그랑, 리나가 손에 쥐고 있던 포크를 떨어트리는 소리가 꼭 어느 드라마의 BGM같아 브랜트는 온 몸에 소름이 끼쳤다.


"리나는 어린아이지. 어린아이의 눈은 굉장히 정확해, 브랜트. 그런 아이가 나한테 경계심을 보이는 이유가 뭔지 한 번이라도 생각해 본 적 있어? 그보다, 왜 그렇게 장난으로만 치부하는거야. 아무리 나라도 상처받는다고. 왜, 네가 애 아빠라서? 아니면 상대가 나라서?"

"......"

"자, 그럼 이제 우리 수석 분석 요원이 어떤 대답을 나한테 가져다줄지 궁금한데. 시간이 더 필요한가? 아니면 상황을 분석할 만한 근거가 더 필요해? 그럼 자료를 더 제공해주지. 그게 벌써 몇년 전이더라. 우리가 러시아의 핵탄두를 바다에 떨어트렸던 때. 내가 줄리아를 떠나보냈을 때, 때마침 내 눈 앞에 나타난 사람이 누구지? '윌리엄 브랜트'라고 하는 분석 요원이라고 알고 있는데. 내가 틀렸다면 정정해주길 바래. 반 년이 넘도록 내가 진실을 숨겨서 괴롭게 만들었다는 사실은 미안해. 아직도 그렇게 생각해. 그런데 그 때, 다른 누구보다 줄리아가 살아있다고 했을 때 가장 기쁜 표정을 지었던 사람도 바로 너야. 그 때 깨달았어. 이 녀석이라면 괜찮겠다. 이 사람이라면 좋겠다. 그럼 여기서 문제. 나, 이단 헌트는 지금 윌리엄 브랜트에게 뭘 하고 있는거지?"


이단은 그렇게 말하고는 굳이 대답을 들으려 한 것은 아니라는 듯 태연하게 자신이 만든 스파게티를 포크에 말아 한 입 먹었다. 브랜트는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무심코 리나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리나의 얼굴은 꼭 토마토라도 된 것처럼 새빨개져 있었다. 브랜트는 당황한 기색을 숨기지도 못한채 리나에게 물었다.


"너 얼굴이 왜 그렇게 빨개?"

"이런 엄청난 고백을 옆에서 들었는데 어떻게 안 그래? 와, 나는 이 세상에서 내가 우리 아빠를 제일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나봐. 

브랜트는 쥐구멍에 숨고 싶었다.




15.

폭풍같은 저녁 식사시간이 지난 후, 리나를 방으로 올려보낸 브랜트는 산더미같은 설거지를 치우기 위해 셔츠 소매를 걷었다. 그러자마자 등 뒤로 콕콕 박히는 어딘가 다정하면서도 따가운 시선에 브랜트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뭘 그렇게 봐요?"

"그냥."


소스가 잔뜩 묻어 있던 접시가 세정제에 의해 깔끔하게 씻겨나가는 것을 보는 기분이란 아주 묘했다. 평소에는 이런 걸 보면 기분이 썩 괜찮았는데. 어떻게 식사를 마쳤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이단의 폭탄 선언 이후 리나는 놀랍도록 이단에 대한 시선이 달라졌으며 이제는 둘이 아주 마음이 잘 맞는다. 그런 둘을 바라보고 있는 브랜트의 마음은 이상하게 뒤숭숭했다. 어쨌든 쏟아진 물은 다시 주워담을 수 없다. 윌리엄 브랜트는 이단 헌트의 '고백'에 무엇이든 좋으니 대답을 해야만 했다. 어쩌다 일이 이 지경이 되었지? 하긴, 이단이 말한 것을 토대로 생각해보면 리나의 발언이 그렇게 이상하지는 않다. - 아니, 사실 이상한건 맞다. - 어린아이의 눈은 정말 정확하고 깨끗하구나, 따위를 중얼거리던 찰나 이단이 던진 물음의 파괴력은 상상을 초월했다.


"리나 친모였다는 요원 말이야. 혹시 그녀를 좋아하기라도 했어?"

"-네?!"

"그러면 나한테는 가망이 없다는 거잖아."


브랜트는 아마도, 지금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멍청한 표정을 짓고 있을 거라 확신했다. 그녀를 좋아했냐고? 브랜트는 세삼 그 이단 헌트가 참으로 귀여운 질문을 한다고 생각했다. 이미 이렇게 생각한 순간, 끝이라는 것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브랜트는 스스로를 멍청하지 않다고 생각했지만, 이상하게 이단의 앞에서는 꽤 멍청한 모습을 자주 보인다고 생각했다. 


"내가 뭐라고 대답해줬으면 좋겠어요?"


손에 묻은 물기를 털어내며 뒤를 돌아본 브랜트를 보며 이단은 아무 말 없이 잔잔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외전-1

이단 헌트와 윌리엄 브랜트의 첫 데이트는 리나 브랜트의 백신 예방 접종을 위한 병원 나들이였다.




외전-2.

어느 날 리나가 울먹이며 브랜트의 다리에 매달리며 물었다. 아빠, 내 이름은 이제 리나 헌트야? 나는 브랜트가 좋은데.

브랜트는 기절할 뻔 했다. 














미임5 스포




1.

IMF는 공식적으로 해체되었다. 윌리엄 브랜트는 그 결정을 막고자 최선을 다했지만, 결국 IMF를 유지시키는 일은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모든 작전, 모든 지휘권이 CIA로 넘어갔으며, 공식적으로 윌리엄 브랜트는 CIA 소속의 요원이 되었다. 모든 요원이라면 다 알고 있을 것이다. 윌리엄 브랜트가 IMF를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해왔는지. 그러나 그 이유에 대해 물어본다면 대다수의 요원들은 답을 하지 못할 것이다. 그들은 브랜트가 IMF를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기울였는지에 대해서는 입이 열개라도 할 말이 모자랐지만, 그가 왜 굳이 그 노력을 들였는가에 대해 말해보라 하면 입이 열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IMF의 모든 것이 CIA로 일임된 직후 많은 요원들이 사직서를 내거나 권고 사직을 당했다. 브랜트는 그 사실이 못내 안타까웠다. 어떻게 해서든 한 명이라도 더 필요한 것이 사실이었다. 브랜트는 아직 희망을 버리지는 않았다. 언젠가는 그래, 언젠가는- 이라는 덧없는 희망을 품고서라도 꿋꿋이 버텨야 했다. 그것이 윌리엄 브랜트가 지닌 책임이었고, 브랜트는 그래야만 했다. 다른 누구도 아닌 그를 위해서. 지금도 생사의 갈림길에서 달리고 있을 그를 위해서.


"...어디 있어요?"


그러나, 윌리엄 브랜트도 사람이었다. 브랜트는 몹시 지쳐있었다.




2.

앨런 헌리는 그런 브랜트를 가엽게 생각했다. 그러나 굳이 그것을 티내려하지 않았다. 그래보여도 브랜트는 꽤나 자신만의 틀이 확고한 사람이었으며, 자존심이 강한 사람이었다. 헌리는 굳이 브랜트를 낮잡아보지도, 과대 평가하지도 않았다. 그것이 IMF의 윌리엄 브랜트에게 해줄 수 있는 마지막 배려였다.




3.

암암리에 윌리엄 브랜트에 대한 소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늘어졌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그가 IMF를 존속시키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는 것을 알지만, 그렇다고 바로 이렇게 CIA의 밑으로 들어가게 될 줄을 몰랐다고 하는 소리들이 대부분이었다. 천하의 윌리엄 브랜트가, 라는 말로 시작된 소문은 밑도 끝도 없이 퍼졌다. 이쯤되면 당사자의 귀에 안 들어갈리 없겠지만 브랜트는 그 뜬소문을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완벽하게 무시해버렸다. 사실은 무시하고 싶었다.




4.

브랜트에 대한 소문은 조금 잠잠해졌다 다시 퍼지기 시작했다. 이쯤되면 누가 악의적으로 브랜트의 험담을 퍼트린다해도 믿을 정도였다. 그러나 브랜트는 그런 소문에 대꾸조차 하지 않았다. 사실은 모든 소문을 익히 들어 알고 있으며, 요새들어 대부분의 요원들이 자신을 어떤 시선으로 보고 있는 지 정도는 척하면 척이다. 까라면 까라지. 브랜트는 그런 것에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그런 사소한 것까지 일일히 해명하고 다니기에는 너무나도 힘들었다. 브랜트는 딱 죽고싶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물론 이 죽고싶다의 의미는 사전적으로 목숨을 끊고 싶다, 가 아닌 그냥 아주 잠깐이라도 좋으니 다섯시간만이라도 편히 눈을 붙이고 자고 싶다는 뜻이었다. 브랜트는 그럴 정도로 심각하게 피곤했다.




5.

며칠만에 만난 벤지는 온갖 스트레스성 질병을 달고 있었고, 브랜트는 기어코 링거를 맞아야만 했다.




6.

윌리엄 브랜트의 인내심은 어디까지인가. 벤지는 브랜트의 인내심이 진작 끊겨 있을 것이라고 굳게 믿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저런 낯짝으로 국장에게 웃어보일 수는 없을 것이다. 벤지는 브랜트가 진심으로 존경스러웠다. 이단을 만나기 바로 1시간 전까지만 해도 말이다. 


벤지까지 CIA를 탈주한 마당에 브랜트의 골은 날로 더 깊어만 갔다. 물론 이것에 대해 두 사람을 딱히 탓하려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이번 사건이 무사히 마무리만 될 수 있다면 두 사람을 진심으로 환영해 줄 의사도 있었다.


"설마 그 두 사람을 뒤에서 도와주고 있는 거 아냐?"

"아무렴."


그런 정보는 어디서 얻는담?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하며 자신을 지나쳐가는 요원들을 보며 브랜트는 실컷 비웃고 싶었다. 내가 걸리지 않는 이유가 뭔 줄 알아? 너희 조직력이 형편없어서 그래. 국장이라는 사람은 괜찮더만. 물론 이 이야기를 직접적으로 했다가는 그 국장이 자신을 사무실로 부를지도 모르니 브랜트는 잠자코 입을 다물기로 했다.




7.

"미안하지만 나한테 볼일이 없다면 이만-"

"초고속 승진의 비결이 뭡니까, 에이전트 브랜트?"


다분히 비아냥거리는 말투에 브랜트는 자신보다 한참은 더 큰 남자를 올려다봤다. 진심으로, 담배가 고프다. 담배를 끊은 지 이제 겨우 3년이 되어가고 있는데 - 담배를 핀 적이 있다는 사실조차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지만 크로아티아 임무 이후로 끊었다.- 이런 꼴이면 정말 한 대 피우고 싶다. 아, 담배. 담배.


"뭘 말하고 싶은 겁니까?"

"그냥요. 당신이 뭐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가 싶어서요."

"용감하네."

"뭐?"

"내가 뭐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알고 싶어서 물었다며. IMF 국장 대리였던 사람입니다. 됐습니까? 할 말 없으면 지나가겠습니다. 나는 오늘도 바쁘거든요. 여기서 다른 요원에게 시비터는 어느 CIA의 요원과는 다르게."

"이게-!"


정말이지, 진부하고 유치한 드라마가 따로 없군. 얼굴 한 방이면 끝나려나. 브랜트는 얼마든지 지금 눈 앞에 있는 요원의 -다리든, 팔이든, 목이든. 그 어느곳이라도- 부러트려줄 능력도, 용의도 있었으나 하지 않았다. 또 다른 이상한 소문이 퍼지질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 공용 샌드백이 되는 건 더 이상 사양이었다.


"자네들, 지금 뭐하고 있는 건가?"

"......"


브랜트는 고민에 빠졌다. 이게 과연 좋은 타이밍일까, 아니면 나쁜 타이밍일까.




8.

무시, 또 무시. 브랜트는 다음생에 부처로 태어나지 않을까, 하는 헛소리를 지껄이며 자신에게 주어진 일 외에는 모든 것을 무시하며 살았다. 전 IMF의 수석 분석요원이 이젠 CIA 국장의 총애를 받고 있다느니, 하는 퍽이나 그럴듯한 소문에 브랜트는 헛웃음을 지어보일 뿐이었다. 이제 나도 슬슬 CIA를 탈주할 때가 온 것 같은데. 브랜트는 꿈과 같은 생각을 하며 오늘도 밀린 서류 더미에 도장을 찍었다. 이단은 여전히 CIA에게 쫓기는 신세였으며 브랜트는 할 수 있는 만큼 이단의 백업을 하기 위해 갖은 노력을 해야만 했다. 그러나 브랜트는 그 어떠한 불만도 없었다. 아니, 거짓말이다. 불만이라면 딱 하나, 왜 아직도 빌어먹을 이단 헌트가 일을 다 끝마치지 못해서 이 거지같은 곳에, 아직도, 자신을 남겨두고 있는가에 대한 불만이 하늘을 찔렀다.


부탁이니, 나 좀 구해달라고요.

이단이 그렇게만 해준다면 다음 미션에서 허가 없이 타국의 위성을 사용한다고 해도 웃으며 봐줄 수 있었다. 과연, 다음 미션이라는 게 존재할지조차 의문이었지만.




9.

사고쳤다.




10.

"대체 왜 그런건가, 브랜트."

"......"

"지금까지 잘 무시 했잖아. 자네는 좀 더 공과 사를 구분할 줄 아는 현명한 요원인 줄 알고 있었네만."


브랜트는 태연한 얼굴을 하며 엄지 손가락으로 손바닥을 긁었다. 일종의 지루함을 달래기 위한 처사였다. 헌리는 굉장히 안타까워하는 얼굴을 하면서도 짐짓 엄한 얼굴로 브랜트를 바라보았다. 브랜트는 언젠가 헌리에게 술이라도 한 잔 사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제가 뭐라고 이렇게 신경을 써줍니까? 그거 참 고맙네요. 브랜트는 다소 가벼운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감싸주실 필요 없습니다."

"에이전트 브랜트."

"위원회 열 거면 여십시오. 손해배상 청구 한다고 하면 하라고 그러십시오. 저라고 이제 더 이상 가만히 있지만은 않겠습니다."

"이단 헌트 때문인가?"


그래, 그 이름. 이젠 깨물어도 아프지 않은 손가락의 이름.


브랜트가 무시할 수 있는 소문의 수준은 어디까지나 브랜트, 자신에게만 한정된 것이었다. 브랜트는 심지어 그 철 없는 어른들이 막말로 지껄이는 모든 말을 참고 참으며 견뎠다. 브랜트나 이단, 그의 팀이 얻은 결과는 순전히 운이 아니다. 브랜트는 그것을 증명해보고 싶었다. 자신들이 피땀흘려 얻은 그 평화를 순전히 운이라고 치부하기에는 너무 박한 처사 아닌가.


"그래서 그 이단 헌트는 어디 계시는 건데?"

"애초에 서류나 보고 도장이나 찍으며, 자리나 지키고 있는 당신이 '그' 이단 헌트의 밑에는 어떻게 들어가게 된 거야?"

"다른 방법이 있어? 왜, 이단 헌트 취향이야? 전설적인 요원의 취미 생활이 그런 거야?"


첫째, 이단 헌트가 어디 있는지는 윌리엄 브랜트, 자신이 묻고 싶으며

둘째, 윌리엄 브랜트는 단순히 책상에만 앉아있는 사무요원인 것은 아니며

셋째, 이단 헌트의 취향은 저도 모르며

넷째, 이단 헌트의 취미생활은 접근 금지된 구역에 침입하기, 기분에 따라 위성 골라쓰기,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 대한 배상액을 다섯배로 불리기다, 이 개새끼야.


브랜트는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요원에게 각각 전치 6주, 7주, 12주의 진단서를 선물해주었다. 그 자리에 막 도착한 헌리는 굉장히 후련하고 깔끔해보이는 브랜트의 얼굴을 보며 기가 막혀 말도 하지 못했다.




11.

윌리엄 브랜트에 대한 소문은 삽시간에 사그라들었다. 아니, 아예 사라져버렸다. 그 누구도 다시는 브랜트를 서류나 들여다 보는 앉은뱅이 취급하지 않았으며, 그가 어떻게 이단 헌트의 팀에 들어가게 되었는지 알아서 지레짐작할 뿐이었다. 다른 의미의 소문이 점차 퍼지기 시작했으나, 브랜트는 이번에도 무시하기로 했다. 역시 소문이라는 것은 딱히 믿을 게 못된다. 아, 하나 믿을 건 있다. 


이단 헌트는 정말 전설적인 요원이다. 브랜트는 그 소문 하나 만은 착실하게 믿고 있었다.




12.

그럼에도 청문회는 열렸다. 브랜트는 그들의 진단서에 몇 줄 더 추가해줄 수 있다는 사실이 뛸듯이 기뻤다. 이단이 공공기물을 하나도 부수지 않았다고 해도 믿을 수 있을 정도로.




13.

청문회는 억소리가 나올 정도로 브랜트가 압도적으로 승리를 거두었다. 자신을 변론할 수 있는 모든 자료를 그 스스로 준비했으며, 이제껏 윌리엄 브랜트가 받아온 억압과 차별에 대한 문제점등을 역설하며 당당하게 승자가 된 브랜트는 그들의 진단서에 감봉 혹은 강제 부서 이동이라는 문구를 써 넣으며 펜을 던져버렸다. 

브랜트가 제시한 자료를 보며 헌리는 혀를 찼다. 설마 이 정도일 줄이야. 모든 청문회가 끝난 후 헌리는 브랜트의 자료를 토대로 관련된 모든 인물들에게 적절한 조치를 취했고, 브랜트는 그 사실 자체만으로도 만족스러웠다. 굉장히 오랜만에 두 발 뻗고 잘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헌리는 브랜트를 위해서라도 그 모든 자료를 비공개에 부쳤고 국장의 승인 없이는 열람조차 불가능하도록 설정해놓았다.




14.

두 발 뻗고 자긴 개뿔. 

이단 헌트를 찾았다.




15.

모든 사건이 마무리 된 후, 벤지는 그간 있었던 일을 우연치 않게 들을 수 있었는데 브랜트의 청문회를 보고는 기겁을 했다. - 애초에 국장의 승인 같은 것이 이들에게 소용이 있을리가 없다는 사실을 헌리는 그 때까지만 해도 몰랐다. - 

그 자리에는 이단 헌트도 함께 있었는데, 벤지는 이것이 아주 크나큰 실수라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16.

브랜트의 자료에 있던 요원, 그 중에서도 특히 그 죄목이 엄중해 보이는 요원이 한 명 실종처리 되었다. 

브랜트는 딱히 신경쓰지 않았다. 벤지는 무척이나 신경 쓰였다. 그러나 입을 다무는 쪽을 택했다. 그것이 모두의 평화를 위한 일이라 생각하며.




17.

모르긴 몰라도 이단 헌트의 취향은 윌리엄 브랜트라는 사실을 브랜트만 모른다. 벤지는 그렇게 기록했다.




18.

IMF는 무사히 재건되었고, 브랜트는 그제야 두 발 뻗고 잘 수 있었다. 그 날, 그 방 침대 위에 있던 사람은 브랜트 혼자만은 아니었다.




19.

누가 몰라?




20.

모르는 척 했을 뿐이야.








9.

브랜트는 그 날 새벽 눈을 떴다. 목과 팔에서 어마어마한 고통이 느껴졌지만 살아있기에 고통을 느끼는 것이라 한 편으로는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아까부터 제 옆을 꼭 지키고 있는 작은 아이와, 한 남자의 모습에 브랜트는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걱정을 받는 거나, 챙김을 받는 것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다. 하필, 제일 피하고 싶은 두 사람이 같이 이러고 있으니까 문제지. 브랜트는 아이가 깨지 않게 조심조심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 브랜트의 모습을 보며 살며시 다가온 그가 다치지 않은 어깨를 잡아주는 것을 마다하지는 않았다. 작전명, 리나 브랜트를 깨우지 말라. 브랜트는 숨조차 쉬지 않을 기세로 아주 조심스레 침대에서 내려왔다. 다행인 것은 리나는 요원이 아닌 평범한 소녀에 불과하다는 것이었다.


"일어나도 괜찮겠어?"

"더 누워있다가는 침대와 한 몸이 되어버릴 것 같으니 나가죠. 나한테 묻고 싶은 것도 많잖아요."

"티 나?"

"알면서도 묻긴."


아주 조심스럽게 리나의 이마에 입을 맞추는 브랜트를 보며 이단은 얇은 담요를 하나 챙겼다. 혹시라도 환자복만 덜렁 입은 브랜트를 위해서.


병원 옥상 벤치에 주저앉은 브랜트는 잔뜩 얼굴을 구기며 울상을 지었지만 이단은 딱히 먼저 돌아가자, 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확실히 병실에 있을때보다는 훨씬 좋아보이는 얼굴에 내심 안도한 것도 사실이었다. 챙겨온 담요를 건내주며 이단은 아무 말 없이 물끄러미 브랜트를 바라보았다. 브랜트는 담요와 이단의 얼굴을 번갈아 보더니 꼭 담배나 술이 고픈 얼굴로 희미한 웃음을 지어보였다.


"리나 린지."

"......"

"그 아이의 진짜 이름이에요. 리나 브랜트가 아니라."


브랜트는 유능한 요원답게 한 팔로도 충분히 능숙하게 담요로 등을 덮었다. 이단은 아주 잠깐의 만남을 가졌던 어린 소녀의 얼굴을 천천히 그려보았다. 닮은 점을 꼽으라면 손에 꼽을수도 있겠지만 확실히 아이는 브랜트의 딸이라기에는 무언가 부족한 점이 있어보이는 것이 사실이었다. 마치 숨겨놓은 보물상자를 꺼내보여주듯, 브랜트는 의연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10.

리나 린지. 

꽤 오래 전, 브랜트와 같이 현장임무를 하던 한 요원의 딸이었다.





11.

"내 실수였어요."


푸흐, 그러면서 브랜트가 웃음을 터트렸다. 그녀가 그랬죠. 아니, 이건 네 잘못이 아냐. 그건 브랜트도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브랜트는 그렇게 인정하지 않고는 살 수 없을 것 같았다. 


"그 때의 나는 지킬것도, 뭣도 아무것도 없는 나 혼자였지만 그녀는 아니었죠. 그녀에게는 리나가 있었어요. 그랬기에 그 앞에, 전선에 섰어야 했던 것은 나였습니다. 그래야만 했는데."


목숨을 담보로 걸어야만 하는 요원직에서는 일상다반사로 이루어지는 일이다. 어제의 동료가 오늘은 싸늘한 주검으로 변할 수 있다. 그것도 자신이 알고 있는 그나 그녀의 이름이 아닌 난생 처음 듣는 어떤 이의 이름으로. 매일 그 사실을 스스로에게 새기며 견디고 살아야하는 것이 비밀요원의 운명이나 다름 없는 것이다. 그 결과로 자신도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내야만 하지 않았는가. 이단은 브랜트에게 그 어떠한 말도 쉽게 건낼 수 없었다.


"리나도 다 알아요."

"안다고?"

"그 아이는 똑똑하거든요. 그녀를 닮아서. 다섯살의 아이는 너무 똑똑해서, 그래서 너무 무서웠는데-."


아이는, 울지 않았다. 그런 아이를 보며 울고 싶은 것은 브랜트였다. 할수만 있다면 아이의 몫까지 펑펑 울어주고 싶은 마음이었다. 안타깝게도 그녀에게 다른 가족은 없었다. 리나는 원래부터가 아버지가 없이 그녀 혼자가 키우던 아이었고, 유일한 보호자였던 그녀가 죽자 이 세상에 홀로 남은 고아신세가 된 것이다. 그런 리나를 거둔 것이 브랜트였다. 그러지 않고는 도저히 버틸수가 없을 것 같은 죄책감에 무턱대고 아이의 보호자를 자처했다. 그것이 어리석은 선택이라는 것을 아주 잘 알면서도 브랜트는 그럴 수 밖에 없었다. 주변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브랜트를 말렸다. 한 순간의 충동으로, 한 조각의 죄책감으로 떠안을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몇 번이고 브랜트에게 말해주었다. 그러나 브랜트는 고집을 부렸다. 물론 그들의 말도 얼추 맞았다. 브랜트가 리나를 거두겠다고 한 것은 순전히 그녀에 대한 죄책감으로부터 비롯된 것이었으나, 그 작은 아이가, 그 작은 손으로 브랜트의 두 손가락을 꽉 쥐었을 때, 브랜트는 확신했다. 이 아이는, 반드시 자신이 키워낼 것이라고.


"날 먼저 아빠라고 불러줬어요."


어느새 담요를 꽉 쥐고 있는 브랜트의 손을 내려다보고 있던 이단은 천천히 브랜트의 머리를 자신의 어깨에 기댈 수 있도록 해주었다. 브랜트는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이단도 마찬가지였다.





12.

대체 아까의 그 통화는 무어냐고 헐뜯고 욕해도 이단은 그 잘난 얼굴로 사람 좋은 미소를 지어보일뿐, 대답을 해주지 않았다. 브랜트는 서둘러 퇴근을 앞당겨야겠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저번에 동생에게 부탁해놓은 3중 보안장치를 가동하는 거야. 브랜트에게 있어서 단 하나의 재앙은 이단 헌트와 리나 브랜트가 만나는 것이었다. 그 재앙은 어떤 파멸의 씨앗을 뿌릴 지 그 누구도 예측할 수 없는 문자 그대로 재앙, 그 자체였다. 브랜트는 리나가 이단의 그 잘생긴 얼굴에 반하는 것도, 그렇다고 자신이 동경하는 그를 하나뿐인 딸 아이가 죽도록 미워하는 것도 싫었다. 아니, 그것보다. 브랜트는 리나가 한 말을 다시 돌이켜볼 필요가 있었다. 건드려? 누가 누굴? 요새 학교에서 뭘 가르치는 거야? 


되도 않는 변명을 헌리에게 10분 가량 늘어놓은 브랜트는 결국 딸내미 보러 가야 한다고요! 라는 한 마디에 조기 퇴근을 해도 좋다는 허락을 얻어내었고 누구보다 빠르게 리나의 학교로 쏜살같이 달려갔다. 꽤 오랜만의 딸 아이의 하교길을 마중나간 브랜트를 보며 뭇 여성들이 시선을 던졌다. 하긴, 완벽한 쓰리피스의 회사원이 이 시간에 학교에 오다니. 좀 유별나 보이긴 하겠지. 그러나 그런 생각도 저 멀리서 자신의 이름을 부르며 달려오는 리나의 모습에 모든 근심과 걱정이 사르르 녹아내리는 걸 보니 브랜트는 이미 자신이 지독한 딸바보라는 사실을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그 아저씨는?!"

"이단? 같이 안 왔어."

"집에서 보자며!"

"장난친 걸 거야. 그보다 아빠 보자마자 하는 소리가 그거야?"

"그럴리가. 안녕, 아빠!"

"안녕, 우리딸."


브랜트는 리나를 번쩍 안아들고는 집으로 가는 길을 걸었다. 학교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오늘은 무슨 수업이 재미있었는지 등 이단 헌트가 박살내버린 공공기물의 리스트를 보는 것 따위와는 비교도 안될 정도로 행복이 가득한 이야기를 들으며 길을 걷던 브랜트는 집 앞에 도착한 순간 뒷목이 서늘한 느낌이 들었다.


"아빠?"


조심스럽게 집의 문을 연 브랜트는 자신을 보며 미소짓는 이단의 얼굴을 보며 세삼 깨달았다. 이단 헌트에게 보안 장치따위가 소용이 있을리가 없다는 사실을. 

설령 그것이 아무리 쉴드의 것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1.

요새들어 IMF의 수석 분석요원 윌리엄 브랜트의 행동이 수상하다. 벤지는 차근차근 공을 들여 한 문장이 적혀있는 모니터를 빤히 바라보다 슬쩍 브랜트의 옆모습을 훑어보았다. 첫번재 가설, 사실은 이게 가장 유력하다. 윌리엄 브랜트에게 연인이 생겼다. 벤지는 친절하게 키보드의 느낌표를 두 번이나 눌러주었다. 그럼 다시 돌아와서 첫번째 가설의 첫번째 근거. 근래 들어 브랜트가 웃는 날이 많아졌다. 어쩔때는 시도때도 없이 웃어서 드디어 우리의 수석 분석요원이 머리가 이상해진 것은 아닐까 구급차를 부르려고 한 적도 있었다. 그런 브랜트를 보며 도대체 뭐가 그렇게 좋아서 웃는거야, 하고 물으면 열 중에 열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하는 무척이나 믿기지 않는 대답을 하곤 했다.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알겠지만 브랜트가 대놓고 웃는 날은 절대로 그냥 넘어가는 일이 없는 지옥과 같은 날이라는 것을 잘 알것이다. 그런 그가 시도때도 없이 웃는다? 분명히 뭔가가 있는 것이 분명하다.

첫번째 가설의 두번째 근거. 웃는 날이 많아진 것도 모자라 이젠 통화까지 한다. 평소에 설정해두는 기본 벨소리 제 1번은 어디다 버려두고 상큼하게 울리는 벨소리에 참지 못하고 박장대소를 하는 자신을 보며 브랜트는 화도 내지 않았다. 벤지는 브랜트가 혹시나 외계인에게 납치되어 뭔가를 당한 것은 아닐까, 하는 드라마를 써보기도 했다. 몰래 통화를 엿듣는 것은 예의가 아닌지라 하지 않았다. 물론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할 수 있다는 반증이 되기도 하지만 후환이 두렵다. 누가 뭐래도 브랜트는 IMF의 국장 대리직을 맡고 있는, 어찌보면 한낱 현장요원 신분인 자신과는 맡고 있는 공기가 달랐다. 물론 그게 무조건적으로 좋다는 것은 아니다. 자신이었다면 절대로 안 할거라고 난리를 쳤을 게 분명했다.

이야기가 새고 있다. 다시 돌아와서 첫번째 가설의 세번째 근거. 굳이 세번째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 브랜트가, 그 윌리엄 브랜트가, 아기자기하고 귀여운 악세사리를 달고 다닌다. 느낌표 3개. 아니, 5개. 속속히 제보가 들어오고 있다. 가장 결정적인 제보로 어느 날의 회의에서 브랜트가 꺼낸 수첩에 달려 있던 곰인형. 무려 곰인형! 곰인형!!! 갑자기 진행이 멈춘 회의 상황에 의아함을 느낀 브랜트가 무슨 일 생겼냐는 말에 아주 용감한 -벤지는 만약 그, 아니면 그녀를 본다면 아낌없는 찬사를 보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요원이 브랜트의 수첩을 가리켰고, 브랜트는 수첩에 달린 곰인형을 보고는 옅게 웃으며 말했다고 한다. 


"아, 미안합니다. 깜빡해서."


이만하면, 충분하지 않은가.





2.

그 뒤로도 브랜트는 여전히 수상한 행동을 반복적으로 하고 있었다. 말이 수상한 행동이지, 사실 첫번째 가설을 인정하면 지극히 당연한 행동들이었다. 그러니까 브랜트에게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사랑스러운 여자친구가 생긴 것이다. 암암리에 IMF의 수석 분석요원이 절찬리 연애 중이라는 사실이 퍼졌고, 그 사실을 모르는 것은 브랜트 뿐인 것 같았다. 


오늘도 어김없이 미션을 수행하고 있는 이단의 팀을 백업하기 위해 관리탑에서 열심히 열을 올리고 있던 브랜트는 고래고래 소리를 외치던 와중 울린 전화에 그 자리에서 딱, 굳어버렸다. 그 벨소리는 마이크를 통해 벤지나 이단의 귀에도 들렸다. 평소와는 다른 벨소리, 음. 그렇군. 벤지가 혼자 수긍하고 있을 때쯤, 이단이 투덜거리는 듯 말했다.


"누군 현장에서 고생하는데, 누군 연애하느라 즐겁나보군."

- 그거 지금 나한테 하는 소리에요? 연애?

"그럼 아니야?"

- 그게 무슨 헛소... 윽, 지금부터는 당신 마음대로 해도 상관없으니까 알아서 해요. 어차피 당신 사전에 실패라는 단어는 없으니까 성공시켰다고 알고 있을게요.

"뭐? 이봐, 브랜트-"

- 브랜트 아웃.


이단은 통신이 끊긴 인이어를 믿을 수 없다는 듯 손으로 눌러보았으나, 들리는 것이라고는 벤지의 웃음소리 뿐이었다.





3.

이단은 드물게 화가 나 있는 듯 했다. 아니, 화가 나있다기 보다는 꼭 마치 누군가에게 서운하다는 듯 굴고 있었다. 벤지는 당장 내일 아침 해가 서쪽에서 뜰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 누구도 아닌 이단 헌트가 뭐 어디 다른 사람에게 서운한게 있다고? 정말? 하긴, 요새 브랜트가 하는 걸 보면 그럴만도 하다. 애인이 생겼으면 말이라도 해주면 좀 좋은가. 그래도 다른 누구보다 돈독한 팀워크를 다지고 있다고 생각하면 나름 서운한 처사이긴 했다. 하지만 이단이 이런 걸로 브랜트에게 서운해할리가 없다. 벤지는 그냥 단순히 항상 이단이 먼저 끊던 통신을 브랜트가 먼저 끊어버리니 심통이 난 것으로 결론지어 버렸다.


"브랜트, 이번 작전-"

"어, 어. 알았어, 미안해. 잘못했어. 지금 갈까? 응? 어, 울지마! 뚝. 알았어, 갈게. 응?"

"...브랜트?"

"이단?"


브랜트는 사무실에 올리가 없는 요원 명단 1순위에 올라가 있는 이단을 발견하고는 굉장히 놀란 얼굴로 이단을 바라보았다. 이단은 이단대로 방금 브랜트의 통화 내용을 듣고는 상황을 파악하지 못해 혼란스러운 상태였다.


"여긴 어쩐 일이에요? 당신이, 사무실에?"

"그보다 간다니? 어딜?"

"아-. 맞아, 저 오늘은 먼저 가보겠습니다."

"뭐? 다음 작전 브리핑이 있다며."

"무슨 소리에요? 아니, 그보다 당신이 언제 브리핑에 대해 신경이나 썼다고. 제인이라 루터한테 물어봐요. 그거라면 아까 전달해놨으니까."


서둘러 본부를 나가버리는 브랜트의 뒷모습을 보며 이단은 정말 자신과 어울리지 않는 종이 뭉치를 찢어버렸다.





4.

모두의 궁금증이 폭발하기 바로 직전, 사건은 터졌다. 

딱히 임무 중에 터진 사건은 아니었다. 아주 우연히 길을 지나가다 폭발 사고에 휘말린 브랜트는 곧바로 응급실로 실려갔다. 하필 폭발의 중심 근처에 있었던 것이 화근이었다. 다행스럽다고 해야할지 목숨은 건졌지만 의식 불명에 오른팔에 금이 간 상태로 구급차에 실려 들어온 브랜트를 보며 벤지는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응급실의 문을 바라보았다. 제인과 이단의 표정도 별반 달라보이지 않았다. 이것이 정말 우연에 의해 일어난 사고인지, 아니면 브랜트를 노리고 일어난 사건인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 브랜트가 의식을 되찾을 때까지 이단의 팀은 잠정 대기 상태였다. 지금 당장이라도 밖으로 나가 브랜트를 저렇게 만든 자들에게 복수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한결같은 마음으로 참아내야만 했다. 


때 마침 울리는 벨소리에 벤지는 하마타면 들고 있던 브랜트의 자켓을 떨어트릴 뻔했다. 계속 울리는 전화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벤지는 핸드폰을 이단에게 내밀었다. 이단은 한숨을 한 번 내쉬고는 차분한 마음을 가지려 노력했다. 짧은 시간안에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수를 떠올린 이단은 천천히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 ......

"여보세요?"

- ...아빠?


이단은 궁지에 몰린 표정으로 모두를 바라보았다.





5.

세상에, 그 누가 알았을까. IMF의 수석 분석 요원 윌리엄 브랜트에게 딸이 있을 거라는 사실을 누가 알았을까.

느낌표 다섯개, 물음표 다섯개.


브랜트는 다행스럽게 몇 시간 지나지 않아 바로 정신을 차렸으나, 눈 앞에 펼쳐진 상황을 확인하고는 다시 눈을 감고 싶다는 강한 충동에 사로잡혔다.


"아빠, 많이 아파?"

"...괜찮아."

"아프지마."

"쉬, 아빠 괜찮다니까."


금이 간 오른팔을 들어올리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알아차리고는 힘겹게 왼팔을 들어올린 브랜트는 작은 아이의 머리를 연신 쓰다듬었다. 브랜트의 손을 꼭 잡고 있는 아이의 뒤로 지금 가장 보고 싶지 않은 얼굴이 셋-. 브랜트는 들리지 않게 한숨을 내쉬었다.


"리나, 아저씨들한테 인사 했어?"

"...아직."

"아빠가 뭐라그랬지?"

"어른들한테는 인사 잘 하라고 그랬어."

"옳지."


그치만 오늘은 나중에 하자. 아빠가 너무 졸려. 브랜트는 넌지시 이단을 바라보았고, 이단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브랜트는 아이의 손등에 입을 맞추고는 다시 잠들었다.





6.

아이의 이름은 리나 브랜트. 윌리엄 브랜트의 하나뿐인 딸이었다.














7.

"절대 안 돼."


너무나도 완고한 태도에 브랜트는 한 순간, 이 상황에 자신과 이단을 대입하고 있었다. 안 돼, 절대 무리야. 예산이 없다고, 이 거지같은 팀 리더, 하며 이단에게 욕을 퍼부으면서도 꼬박꼬박 이단의 뒷처리를 해주는 제 모습이 스쳐 지나가자 브랜트는 너무나도 자신의 인생이 처절하게 느껴졌다. 아니, 이럴때가 아니지. 브랜트는 최대한 불쌍한 표정을 지으며 두 손을 고이 모았다.


"딸, 응?"

"난 그 아저씨 싫어."

"그니까 왜 그렇게 이단이 싫은건데?"

"자기 혼자 세상 살고 있잖아."

"......"


정말이지, 이렇게 완벽한 대답을 할 줄은 몰랐던 브랜트는 그대로 딱 굳어버렸다. 오, 맙소사. 브랜트의 기억 속, 딱히 이단이 리나에게 잘못한 것은 없던 걸로 알고 있다. 그런데 어쩌다가 하나뿐인 딸 아이가 누구나 다 존경하고 좋아해하는 '이단 헌트'를 싫어하게 되었는가.


"아빠는 내가 지킬거야."


Holy shit.





8.

"푸하하하-!!"

"...진짜로?"

"큭, 크큭, 세상에. 이거 완전 특종이야. 동네 사람들!"

"닥쳐, 벤지."

"넌 꼭 나한테만 그러더라."


그러면서도 차마 웃음을 숨길수가 없는지 볼에 빵빵하게 바람을 불어넣고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벤지를 보고 있노라니, 브랜트는 없던 혈압도 오를 것 같은 기분이었다. 오늘도 IMF의 수석 분석 요원으로 출근도장을 찍자마자 리나에게 걸려온 전화의 내용은 무척이나 당황스러운 것이었다.


- 그 아저씨 바꿔줘.

"이단?"

"나?"

"아니, 아니. 안 돼, 안 그럴거야. 리나, 학교는 갔어?"

- 아저씨 바꿔주면 갈게.

"리나 브랜트! 학교 가야지."

- 딱 한마디만. 응?


절절하게 애원하는 아이의 목소리에 어떤 아버지가 마음이 흔들리지 않을 수 있을까. 브랜트는 이건 절대로 하면 안된다는 짓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골백번은 더 알면서도 기어코 핸드폰을 이단에게 넘겼다. 그 일이 얼마나 큰 후폭풍을 몰고 올지는 뻔히 알고 있었으면서도.


"그래. 나 바꿔달라며?"

- ......

"...리나?"

- 우리 아빠한테 손 끝 하나라도 대기만 해요!

"...내 인생은 망했군."


옆에서 중얼거리는 목소리에 이단은 무심코 방심하다 웃음이 터질뻔한 것을 고이 눌러두었다. 머리가 아프다는 듯 인상을 잔뜩 찡그리는 브랜트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이상하게 심술을 부리고 싶은 마음이 생겨났다. 이단은 무척이나 밝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이미 늦었어, 꼬마 아가씨."

- 네?!

"학교 잘 다녀와, 리나. 이따 집에서 보자."

"뭐?!"

- 뭐라구요?!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은 이단은 정말이지 태연한 얼굴로 브랜트에게 물었다.


"뭐?"


브랜트는 지금 당장 병가를 내고 싶은 마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