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이 그린 건 아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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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단브랜] 향




1.

이단과의 연애는 순항, 일까. 브랜트는 빼곡히 쌓여있는 서류의 마지막 서명란에 사인을 하며 종이를 넘겼다. 앞으로 사인을 해야하는 50장은 될 것이다. 브랜트는 손목을 코 끝으로 가져갔다. 코 끝에 남는 것은 옅은 스킨 향만 날 뿐이었다. 그래, 스킨 향 뿐. 브랜트는 볼펜을 신경질적으로 내려놓았다. 그 놈의 형질이 뭐라고. 


이단과의 연애는 평범하디 평범했다. 브랜트는 그것이 무엇보다 만족스러웠다. 여타 다른 커플처럼 일이 끝나면 둘만의 시간을 보낸다. 보고 싶었던 영화를 다시보기 서비스를 통해 보며 말린 오징어를 씹으며 맥주를 마시는 휴일은 달콤하기 짝이 없었다. 제 옆을 가득 채우는 타인의 온기는 더할 나위 없었다. 이단과 브랜트는 수줍은 이십대가 아니었다. 순수함과는 거리가 먼게 당연한 것이었다. 즐길 수 있을 때 더 많이 즐겨야 하지 않겠는가. 더군다나 언제 이 세상에서 사라져 버릴 지 모르는 사람을 연인으로 두고 있으면 더더욱. 어쨌든 결과적으로 이단과의 연애는 평범했다. 아마, 그가 베타 형질의 사람이었다면 더더욱 평범했을지도 모른다.


브랜트에게는 한 가지 습관이 생겼다. 수시로 자신의 손목에 코를 묻었다. 바짝 예민해진 후각이 자신의 몸에 남아있는 그의 흔적을 찾으려 애썼다. 이단이 알파라서 불만이 생긴 것이 아니다. 자신이 베타이기 때문에 불만이 생겼다. 물론, 이 사실을 이단에게는 한 번도 말한 적 없다. 같은 형질인 벤지에게 털어놓은 게 전부였다.


"그렇게 말해도 나는 모르지만 말이야."

"내 말이."

"그래도 요새 다른 녀석들이 너랑 이단에 대해 떠들고 다니는 걸 보면, 뭐."

"내가 요새 무슨 생각을 하는 줄 알아?"


브랜트는 마치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굴렀다 온 사람처럼 굴었다. 벤지는 그런 브랜트를 보며 어깨를 으쓱여볼 뿐이었다. 이 양반은 매사 너무 심각해서 탈이야.


"말하지 않아도 알 거 같은데."

"솔직히 말해봐. 미친 거 같지?"

"너는 너무 네 자신한테 엄격해. 그렇게 생각할 수 있는게 뭐 어디가 어때서. 우린 베타잖아. 잘난 알파 애인이 생기면 나도 널 붙잡고 그럴 걸."

"하루만 오메가가 되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하루만 오메가가 되고 싶다."

"......"

"그렇지?"


벤지와 눈이 마주친 순간, 브랜트는 숨기지 않고 웃어보였다. 벤지, 넌 정말 괜찮은 친구야. 그걸 말이라고. 


"오메가 향이 델리만쥬향이라던데 사실이야?"

"뭐?"

"아니, 아무것도."


SNS에서 그러길래. 브랜트는 뒷말을 삼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도 어김없이 브랜트는 손목 가까이 코를 대어보았지만, 여전히 스킨 향만 날 뿐이었다.





2.

브랜트는 괜찮을 것이라 생각했다. 이단은 함부로 다른 사람에게 눈을 돌리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정말이지 철저하게 헌신적인 애인이었다. 아주 가끔, 그 사실에 마음이 벅차기도 한 걸 보면 꼭 첫사랑을 하던 시절로 돌아간 거 같아 부끄러워졌다. 그래, 문제는 이단이 아니었다. 이단이, 그 존재도 우월한 우성 알파라는 사실이 문제였다. 브랜트는 자신이 형질로 두 번 고민할 일은 없다고 생각했었던 과거의 자신을 발로 차주고 싶었다. 지금도 아주 가끔, 브랜트에게 작업을 거는 남자들이 있긴 하지만 브랜트가 고개를 돌린 순간 모두 절로 꼬리를 내리며 멀어져갔다. 이단은 매번 브랜트의 구석구석에 제 흔적을 남기는 일에 열정을 다했다. 효과 한 번 끝내주네. 그러나 어느 순간, 브랜트는 자신에게 오메가까지 꼬인다는 사실을 알아채고는 신음했다. 이건 내 것이 아니라서요. 아니, 이단은 내 애인이니까 따지고 보면 이것도 전부 내 건 맞는데, 난 알파가 아니라고! 여기까지는 그래, 버틸 만했다. 브랜트는 대단한 인내심을 가지고 있는 스스로를 위로했다. 하지만 그것도 오래가지는 못했다.


- 브라보, 알파에게 문제가 생겼어.

"문제?"

- 어, 음, 그러니까.

"찰리, 뭔데."


음, 어, 그게, 말끝을 흐리는 벤지의 목소리에 복장이 터질 것 같았던 브랜트는 벤지를 다그쳤다.


"찰리."

- 오메가가 꼬였어.

"그게 뭐?"

- 내 생각이 맞다면...


설마, 브랜트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어째서 이런 곳에 그런 오메가가 있는거야? 브랜트는 다급한 손길로 가방을 뒤지기 시작했다. 어떤 미션이든 이런 변수는 생기기 마련이다. 결정적으로 IMF가 오메가 형질의 요원들을 뽑지 않는 이유는 순전히 히트싸이클 때문이었다. 물론 첨단 기술과 생명 과학의 발달이 가져다 준 슈퍼 억제제가 생기기도 했지만 미연에 방지해서 나쁠 것은 없다는 판단이었다. 브랜트는 푸른색을 띈 액체가 들어있는 병을 꺼내들었다. 만에 하나 히트싸이클 기간에 놓인 오메가를 만났을 때를 대비하기 위한 알파용 억제제였다. 부작용이라던가, 그런 것은 없었지만 브랜트는 그런 것들을 쓰기 꺼려했다. 


"알파, 들려? 버틸 수 있어?"

- 브라보, 우리가 베타라서 그렇지, 지금 알파는 죽어가고 있을테니까 빨리 가!

"그 정도야?"

- 네가 베타임에 감사해라.


벤지의 말에 브랜트는 앓는 소리를 냈다. 하긴, 알파와 오메가에 대한 지식은 순전히 식자를 통해서만 배운 브랜트였다. IMF에 입사했을 때 간단한 교육을 받기도 하지만 교육은 어디까지나 교육일 뿐이었다. 브랜트는 서둘러 건물 내부로 진입했다. 이렇게 된 이상 모든 플랜을 뒤집어 엎어야 했다. 하, 브랜트는 큰 소리를 내며 웃고 싶은 심정이었다. 제 손으로 제가 짠 계획을 뒤집어 엎다니. 헌리, 당신의 말이 사실이었던 것 같네요. 나쁜 것만 배웠어, 쯧. 

원래의 계획대로라면 이단이 건물 안으로 조용히 진입하여 메인 컴퓨터의 정보를 빼오는 것이었지만, 지금은 시간이 촉박했다. 브랜트는 검은 후드를 뒤집어 썼다. 최대한 얼굴을 가리며 최단 루트로 통하는 길목으로 향하며 앞을 가로막는 경비원들을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진압했다. 꽤 오랜만의 현장일이라는 사실만으로 온 몸에 아드레날린이 솟구치는 것 같았다. 아직 쓸만하지? 하며 말하는 브랜트의 귀에 벤지가 웃으며 말했다. 최고야! 눈에 보이는 골목만 돌아가면 바로 이단이 있을 것이다. 브랜트는 최대한 조심스럽게 진입했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잔뜩 젖은 흐느낌이 들리는 것을 애써 무시하며 커브를 돌았을 때, 브랜트는 인상을 찌푸릴 수 밖에 없었다. 다리에 총을 맞은 모양인지 피가 흐르는 허벅지를 제 손으로 감싸며 흐느끼며 울고 있는 작은 체구의 남자를 보며 브랜트는 혀를 찼다. 더러운 새끼들. 브랜트는 반드시 이 건물의 주인을 제 손으로 잡아들여야만 속이 후련할 것 같았다.


"찰리, 20분 뒤에 구조팀 좀 파견해줘."

- 무슨 일이야?

"아니, 네가 말했던 그 오메가. 찾았어. 찾았는데... 민간인 같아."


인이어를 통해 들리는 벤지의 욕설에 브랜트는 인상을 찌푸렸다. 브랜트는 서둘러 남자의 다리를 손수건으로 지혈해 준 뒤 벽에 기댈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조금만 기다려요."


오메가용 억제제는 없다는 사실이 못내 안타까웠다. 하지만 지금은 그보다 먼저 해야할 일이 있었다.


"찰리, 알파는?"

- 아마도 3블록 더 앞에. 거기서 신호는 나오고 있는데 반응이 없어.


브랜트는 서둘러 벤지가 알려준 대로 발을 옮겼고, 왼쪽 커브길을 돌려던 순간 불쑥 자신의 팔을 잡아당기는 강한 힘에 중심을 잡지 못하고 그대로 넘어졌다. 바닥에 굴러다니는 쓸데없는 소모품들이 등에 부딪히며 요란한 소리를 내었다. 숨을 들이키며 정면에 총을 겨눈 브랜트는 차마 다 삼키지 못한 숨을 그대로 토해냈다.


- 브라보, 괜찮아? 무슨 일이야?

"아, 괜찮아. 알파를 찾았어. 금방 미션 끝내고 나갈게. 넌 먼저 탈출 준비해."

- 괜찮지?

"괜찮아."


애써 쿵쾅거리는 심장을 다독이며, 브랜트는 자신의 어깨에 얼굴을 묻은 이단의 뒷머리를 천천히 쓰다듬었다. 평소와는 다르게 비정상적으로 높은 체온과 흐트러진 숨소리가 브랜트를 잔뜩 긴장시켰다. 브랜트는 서둘러 팔목 안 쪽에 넣어두었던 억제제를 꺼내어 장치를 해체하고는 이단의 목 뒤에 바늘을 꽂았다. 찰랑거리는 푸른 액체가 금방 다 녹아드는 것을 보고 브랜트는 조심스럽게 이단을 달랬다. 잔뜩 상기되어 있는 두 뺨을 감싸며 그의 이름을 부르며.


"괜찮아, 이제 다 괜찮아."


브랜트는 엉망이 되어버린 이단의 입술을 손가락으로 쓸었다. 브랜트의 손 위로 자신의 손을 올리며 시선을 맞추는 이단을 보며 브랜트는 쓰게 웃었다. 입술 만큼이나 엉망이 되어버린 손에는 잇자국이 잔뜩 나 있었다. 피가 흘러나올 정도로 자신의 손을 처참하게 짓씹은 이단을 보며 브랜트는 조심스럽게 이단에게 키스했다. 


"그래, 잘 참았어."


이단의 눈의 초점이 돌아올 때까지 한참을, 브랜트는 이단을 달래었다. 다행스럽게도 미션은 이미 성공한 후였다.





3.

오메가의 호르몬에 반응하는 것은 지극히 본능적인 것으로... 브랜트는 방금 읽은 문장을 붉은색 펜으로 밑줄을 그었다. 베타는 오메가와 알파의 그 어떤 호르몬에도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그건 그렇지. 어느새 브랜트가 들고 있던 책은 하이스쿨에 다니는 학생의 것과 같이 변해 있었다. 아주 드물게, 우성 알파와 지속적으로 관계를 맺은 베타의 형질이 오메가로 변한 사례도 보고되고 있다... 흠, 베타가 오메가로... 뭐?


"...뭐해?"

"아, 깼어?"


잠에 잔뜩 취한 눈을 애써 뜨며 몸을 일으키는 이단을 보며 브랜트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 다행이다, 깨어나서. 이단은 그 날 이후 이틀 내리 잠만 잤다. 혹시 약에 대한 부작용은 있던 것은 아닌건지, 브랜트는 의료팀과 지원팀을 달달 볶아대었고, 한동안 IMF는 뿔난 수석 분석요원 밑에 힘겹게 굴러갔다. 본능을 이기는 일은 무척이나 어렵고 힘든 일입니다, 라는 그다지 만족스럽지만은 않은 답변을 얻어내고 나서야 얌전해진 브랜트는 사후 처리에 힘썼다. 


"쉽게 배워보는 형질학...?"

"나는 베타니까."

"그게 뭐?"

"히트싸이클이니, 오메가니, 알파니. 그런 건 아무것도 몰라. 공감도, 이해도 못해. 그러니까... 이런 일이 또 생기면 그 땐 내 심장이 남아나질 않을 거 같아서 미리 공부해두려고."


그래야 네 바가지도 내가 안 긁을 거 아냐. 엄한 오메가한테 눈 돌린다고. 브랜트의 말에 이단이 미소 지었다. 임무 중에 자신에게 관심을 보이는 오메가는 수도 없이 만나봤지만, 이렇게 히트싸이클을 겪는 오메가를 본 것은 이단도 처음이었다. 모든 것을 집어 삼키는 무시무시한 본능에 정신이 아찔해졌다. 지금도 그 때만 생각하면 온 몸에 소름이 돋는 것 같았다.


"나, 실수했어?"

"아니."


브랜트의 말에 이단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여보았다. 그러나 자신을 보는 브랜트의 표정이 그리 좋아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은 이단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브랜트?"

"모르겠어."

"뭐가?"

"어쩔 수 없는거니까, 본능이라니까. 차라리 네가 이렇게 쓰러져있는 것보다는 그냥, 뭐. 그렇다고."

"안 그럴거야."

"이단."

"너 말고 다른 사람은 안기 싫어."


정 안되면 제 팔이나 다리를 총으로 쏠 준비까지 하고 있었다. 그나마 피가 날 때까지 손을 물어 뜯으며 버티던 중에 브랜트가 왔으니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분명 총을 쐈을 것이다. 


"그건 너도 싫잖아."

"......"

"그러니까 표정이 그 모양이지. 싫은 말을 애써 하려고 노력하지마."

"...그래."


이단의 말에 후련한 얼굴로 돌아온 브랜트를 보며 이단은 손을 내밀었다. 브랜트는 지금 애 같이 구는 거냐며 타박하면서도 팔을 뻗어 이단의 손을 마주 잡았다.


"네가 베타라서 나도 힘든 거 알아?"

"왜?"

"네 앞에서는 '알파' 라는 이름의 매력은 도통 쓸모가 없어지거든. 소용이 없잖아. 그래서 순전히 '이단 헌트'의 매력으로만 승부를 봐야해. 무슨 뜻인지 알겠어?"


푸하, 드물게 큰 웃음을 터트리는 브랜트는 곧 의자에서 일어나 이단이 누워 있는 침대 옆에 자리를 잡았다. 브랜트는 천천히 이단의 손목을 들어올리고는 코를 가까이 대었다. 이단은 브랜트에게 그러한 습관이 생겼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한참을 그렇게 이단의 살결에 코를 묻고 있던 브랜트는 이단의 손목에 입을 맞추며 말했다.


"너무 매력적이라서 어쩔 줄을 모르겠네."


이단은 그 어떤 오메가보다도, 눈 앞에 서 있는 베타의 향이 이 세상에서 가장 달콤하다 확신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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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안 가득 비릿한 맛이 돌아 영 심기가 불편했다. 언제, 어디서 생긴 건지 모르는 자잘한 상처들이 피부 여기저기를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바튼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뭔가를 잃어버린 아이처럼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건, 말도 안 돼. 숨을 몰아쉬는 자신을 이상한 사람을 보듯 스쳐지나가는 사람들의 시선이 따가웠다. 그 중에는 바튼이 들고 있는 것이 진짜 활이라는 것을 알아채고는 비명을 지르는 이도 있었다. 그렇게 놀라지 않아도, 이걸로 당신을 쏠 일은 없으니까 소리지르지 마세요, 부인. 바튼은 그렇게 외치고 싶었다. 바튼은 낯선 거리에 홀로 서 있었다. 어벤져스도, 쉴드도, 그 무엇도 없는 낯선 거리, 고층 빌딩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고 스타크가 사랑해 마지 않는 기계들은 눈씻고 찾아봐도 보이지 않는 거리. 바튼은 신음했다. 그래서, 지금 몇년도라고?


일단 상처를 지혈하는 게 급선무였다. 누구의 신고를 받고 온 건지 모르는 경찰들의 눈을 피해 골목, 골목을 누비던 바튼은 낡아보이는 나무 계단 밑에 몸을 숨겼다. 이럴 때 만큼은 아이언맨이 부러웠다. 그라면 수트를 입고 하늘을 날아 도망이라도 갔을텐데. 멀어지는 뜀박질 소리를 들으며 바튼은 우선 활을 정리하였다. 접은 활을 집어넣을 케이스는 없지만 펼치고 다니는 것 보다는 좋을 것이다. 낮에 움직이는 것보다는 밤이 편하다. 바닷물이든, 강물이든 바튼에게는 물이 필요했다. 상처를 씻을 수 있는 물이. 바튼은 차근차근 상황을 정리하려 노력했다. 





평소와 다름이 없다고 할까, 평소와는 색다르다고 할까. 대놓고 쉴드를 노리고 기습을 시작한 빌런들을 보며 바튼과 나타샤는 기가 차다는 듯 웃었다. 우리가 기습 당하면 무너질 줄 아는 멍청이도 있나봐, 나탸사의 말에 바튼은 소리내어 웃었다. 그도 그럴것이 하늘을 실컷 누비며 폭죽놀이를 즐기고 있는 양반들이 무려 넷이나 되었다. 나타샤는 평소와는 다르게 긴 라이플을 들었으며, 바튼은 평소와 다름없이 활을 들고 전장을 거닐었다. 헬리케리어 위, 고공 전투는 바튼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최상의 컨디션을 유지할 수 있게끔 해주었다. 가끔 헬리케리어 위로 안착한 기계 덩어리들을 처리하는 것은 스티브의 몫이었다. 어벤져스의 캡틴, 모두의 영웅인 캡틴 아메리카에게 고철 덩어리들은 상처 하나 입히지 못했다. 스티브는 등 뒤에도 눈이 달린 것 처럼 행동하였으나, 실제로 그의 등에 눈이 달린 것은 아니었다. 전적으로 모든 영웅들의 등 뒤를 봐주는 것은 하나같이 바튼의 몫이었다. 바튼은 자신의 역할을 마음에 들어했다. 등에 난 상처는 치욕과도 같은 것이다. 그랬기에, 바튼은 절대적으로 스티브의 등을 지켰다. 그의 등에는 사소한 상처 하나조차 있으면 안된다는 듯이. 

사고가 터진 건 순식간이었다. 미처 다 박살나지 않은 기계의 잔해가 스티브의 머리 위로 떨어지려던 찰나, 바튼은 스티브에게 달려들어 그를 온 몸으로 밀쳐내었고, 폭발의 반동으로 갑판에서 추락했다. 바튼은 비전이나 아이언맨처럼 하늘을 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은 아니었으나, 이렇게 추락한다고 바로 사망처리 될 위인도 아니었다. 그에게는 충분히 그 상황을 벗어날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재빨리 화살촉을 바꿔 낀 바튼은 그대로 화살을 날렸고, 화살은 무사히 갑판 파편에 박혔다.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바튼의 이름을 부르는 스티브의 목소리에 바튼은 괜찮다, 말하려던 순간 묘한 기시감이 들었다. 처음부터 그 폭격은 단순히 스티브를 노린 것이 아니었다. 그들도 알테지, 그 정도로 캡틴 아메리카는 쓰러지지 않는 다는 것을. 바튼은 이를 악물고 스스로 화살에 연결된 와이어를 끊어냈다. 이제 남은 것은 운에 맡기는 것 뿐이었다. 헤이, 스타크. 나 떨어지고 있어요. 추락하기 전에는 잡아줘요. 바튼은 저 멀리서 날아오는 까만 점을 보며 저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그러나 곧 바튼의 표정은 경악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일직선으로, 마치 총알처럼 날아온 것은 다름아닌 스티브였다. 무시무시한 표정을 지으며 쏜살같이 추락한 스티브는 손을 뻗었다. 왜 왔어요, 위험하게. 미쳤어요? 


"바튼!"


빨리 잡아, 바튼은 막연하게 그 팔을 잡아야 할지 아니면 잡지 말아야 할지 한 순간 망설였다. 그리고 그것이 마지막 기억이었다. 눈을 떴을 때, 바튼은 어디인지도 모르는 골목길에 쓰러져있었다. 여기저기 긁힌 찰과상과 타박상만 있을 뿐, 골절이라던가 내장 파열 등의 중상은 없어보였다. 이게 말이 되나? 바튼은 무심코 하늘을 향해 손을 뻗었다. 왜, 망설인 거지? 그 손을 잡았다면, 그도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나? 바튼은 나즈막이 한숨을 쉬었다. 2015년과 다르게, 이곳은 추웠다. 훤히 드러난 팔을 제 손으로 감싸며 바튼은 생각했다. 다음에는 망설이지 말고 그 손을 잡을 것을.


"괜찮습니까?"


바튼은 점차 몰려오는 한기에 눈이 감기기 일보직전이었다. 그러나 이런 곳에서 잠이 든다는 것은 곧 죽는다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아차, 하면 잠이 들 순간에 바튼을 구원한 것은 남자의 목소리였다. 바튼은 그 목소리가 어딘지 모르게 익숙했다. 꼭 어디서 들어본 것 같이.


"...캡?"

"네?"

"하, 그럴리가."


그는 바튼의 상태를 살폈다. 이 엄동설한에 훤히 드러난 짧은 민소매 옷을 입고 있는 남자가 자신의 집 아래 계단에서 몸을 잔뜩 웅크리고 있는 모습은 평범과는 거리가 멀어보였다. 남자는 아까부터 자신을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바라보았고, 이상한 말을 중얼거렸다. 남자의 목소리에서 익숙한 단어를 찾아낸 그는 바튼에게 물었다.


"우리 어디서 만난 적 있습니까?"

"글쎄요."


만난 적이 있다고 해야할지, 저 머나먼 시대의 당신은 내 상관이고 나는 당신의 직속 부대의 전투 요원입니다만. 바튼은 입 안에서 맴도는 말을 차마 하지 못했다. 혹시라도 자신이 미래의 일을 다 말해버린다면, 뭔가가 바뀌어버리는 것이 아닐까. 아니, 쓸데없이 영화를 너무 많이 본 건 아닐까.


"스티브 로저스, 맞습니까?"

"네."

"미안한데 하룻밤만 재워줄래요?"


바튼은 그리 말하며 희미하게 웃어 보일뿐이었다. 그는, 스티브는 얼떨결에 그러겠노라 말했다. 이런, 버키가 알면 혼날지도 모르겠는걸.





거동이 어려워보이는 그를 있는 힘을 다 짜내며 부축한 스티브는 침대에 털썩 주저 앉았다. 바튼은 그런 스티브를 참으로 신기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바튼이 알고 있는 스티브는 누구보다 크고, 강한 사람이었다. 크다는 것에는 여러가지 의미가 있다. 그의 등이 너무나도 믿음직스럽게 넓어보인다거나, 그의 존재감이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어마어마 하다거나 그런 것. 물론 그렇다고 해서 눈 앞의 스티브가 약하다는 것은 아니었다. 어찌됐든 그는 스티브 로저스이다. 영원한 캡틴 아메리카.


"왜 그럽니까?"

"사람이 얼마나 노력을 했을까, 라는 생각이 들어서요."


슈퍼 혈청을 맞는다는 것은 1등짜리 복권에 당첨된다는 그런 호사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그는 자신을 사지로 몰아넣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 실험이 성공하면 그는 복권의 당첨자가 되는 것이고, 그 실험이 실패했다면 그는 꽝보다 더한 결과를 맞이했겠지.


"그렇게 생각합니까? 노력하면, 바뀔 수 있다고."

"네."

"그런가요."

"그러니까 당신도 포기하지 마세요. 언젠가는 군입대에 성공할 겁니다."


그리고 영웅이 되겠죠. 바튼은 지금 자신이 꿈을 꾸고 있다고 한들 상관 없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사람과의 만남이 소중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떻게 해서 자신이 과거로 왔는지는 도통 알 수 없지만, 중요한 것은 자신이 그 누구도 모르는 과거의 스티브 로저스와 만나 대화를 나누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스티브는 그런 바튼을 보며 의심쩍다는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자신의 이름이며, 군 입대에 몇번이나 실패를 했다는 사실도 알고 있는 사람이다. 분명 처음 만났을 터인데. 그러나 스티브는 눈 앞의 남자가 자신에게 해를 가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옅게 웃고 있는 그의 얼굴은 어딘지 모르게 편안해 보였기에.


"이름이 뭔가요?"

"아, 미안합니다. 이제까지 자기 소개도 안 하고. 바튼, 클린트 바튼입니다."

"그럼 다시 한번 더 물어보겠는데, 우리 만난 적 있습니까?"


바튼은 스티브의 시선에 자신의 시선을 맞추었다. 그러고는 스티브가 앉아있는 침대의 옆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그냥 당신을 좀 잘 아는 친구라고 해두는 것은 안됩니까?"

"글쎄요, 영 미덥지 못해서."

"하룻밤만 눈 감아 줘요. 내일이면 스타크 씨나 배너 박사님이 어떻게든 구하러 오겠죠."

"스타크? 하워드씨를 말하는 겁니까?"


스티브의 대답에 바튼의 눈이 동그래졌다. 오, 하워드. 하워드 스타크. 이 시대에는 그 천방지축의 아버지가 살아있단 말이지? 바튼은 킬킬거리며 웃었다. 그런 바튼을 보며 스티브는 혹시 어디가 아프냐 물었고, 바튼은 아니라고 했다.


"좀 먼 미래에서 왔습니다, 하면 믿을 겁니까?"

"아니요."

"진짭니다. 난 21세기 사람이에요."


짐짓 진지한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바튼을 보며, 스티브는 고개를 저었지만 바튼을 정신병자 취급하지는 않았다. 바튼은 그런 면까지 지독하게 스티브다워 작게 웃어보일 뿐이었다. 바튼은 천천히 그가 기억하고 있는 사소하면서도 웅장한 이야기들을 스티브에게 들려주었다. 외계인, 큐브, 히어로들. 그러나 바튼은 굳이 먼저 캡틴 아메리카의 존재를 거론하지는 않았다. 한 편의 서사시를 들려주든 바튼은 아주 약간의 과장도 섞어가며 재미있는 영화의 줄거리를 소개하듯 말했다. 배너는, 아, 헐크 말입니다. 그는 상냥하지만 굉장히 날카로워요. 최근에 냇이랑 사이가 아주 좋아보이던데, 착각일지는 모르겠네요. 아까 내가 말한 스타크는 하워드씨가 아닙니다. 있어요, 그 사람 아들. 이런 저런 살을 붙여가며 들려주는 이야기를, 스티브는 몹시 즐거워했다. 그러나 토르의 얘기를 꺼냈을때는 진심으로 자신을 놀리지 말라며 정색했다.


"내기할래요? 10달러."

"좋아요, 그러죠."


흐음, 내가 이길텐데요. 이 세상에 신은 존재하죠. 외계인도 있는데 신이라고 없을 거 같아요? 스티브는 따뜻한 코코아를 홀짝이며 물었다.


"당신은요?"

"저요?"

"그래요. 화가 나면 다 때려 부순다는 녹색 인간, 고철로 된 수트를 입고 날아다니는 기계 인간, 번개 망치를 휘두르는 신에 아주 매력적인 스파이. 이번에는 당신이 누군지 들려줄 차례 아닙니까?"

"난 그렇게 대단한 능력이 있는 사람은 아니에요."

"그럴리가요."

"왜 그렇게 생각합니까?"

"당신도 어벤져스에 속한 멤버니까요. 그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당신은 특별한 사람이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 아닙니까?"


스티브의 말에 바튼은 할 말을 잃은 듯 몇번이나 입을 열었다 다물기를 반복했다. 그러다가 결국 마땅히 할 말을 찾지 못하여 입을 다물고는 천천히 두 손으로 얼굴을 덮어버렸다. 그 탓에 바튼의 어깨를 감싸고 있던 얇은 이불이 흘러내렸고, 스티브는 여기저기 피가 굳어 딱지가 져 있는 상처들을 안쓰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래서 당신을 구하고 싶었어."

"바튼?"


바튼은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더 이상 묻지 말라는 그의 행동에 스티브는 알았다며 고개를 끄덕여주고는 흘러내린 이불을 다시 그의 어깨 위로 덮어주었다. 그러고는 쑥스럽게 웃으며 물었다.


"그럼 흠, 저는 어떤 사람입니까?"

"쑥스러워 할 필요 없어요. 당신은 자랑스러운 어벤져스의 캡틴이니까. 지금의 모습과는 너무 달라서 상상도 못할거예요."

"그렇습니까?"

"물론 지금의 당신도 충분히 매력적이겠지만, 스타크씨한테 놀림 받을지도 모르니까 과거 사진 같은 거 있으면 몰래 숨겨둬요."


그 사람, 참 짖궂어요. 바튼의 말에 스티브는 언젠가 몇 번 본적이 있는 하워드의 모습을 떠올렸다. 바튼에게 하워드에 대해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말해주자 그는 숨이 넘어가게 웃으며 말했다. 부전자전도 그렇게 완벽하게 이루어질 유전자는 이 세상에 더 없을 것이라고.


"쑥스럽네요."

"뭐가 말입니까?"

"본인 앞에서 존경스럽다느니, 대단하다느니 보통 철판으로는 말 못 합니다."

"그렇습니까?"

"그렇죠."

"말해주면 좋아할겁니다, 제가."

"...네?"

"'스티브 로저스'는 좀 그래요. 아마, 당신이 해주면 더 좋아할 겁니다. 신뢰하는 동료잖아요."


자신의 이야기면서 꼭 자신의 이야기가 아닌 것 처럼 천연덕스럽게 말을 꺼내는 스티브를 보며 바튼은 의외라는 얼굴로 스티브를 바라보았다. 아직 실험을 받기 전이라 그런가. 그는 여물지 않은 과일같이 물렁물렁했다. 곧 그것이 결실을 이루어 탐스럽고 단단한 과실이 되겠지. 바튼은 스티브가 들고 있던 코코아 잔을 자신의 손으로 잡아 바닥으로 내려놓았다. 갑작스러운 바튼의 행동에 어딘지 모르게 당황한 스티브를 보며 장난스럽게 웃은 바튼은 그대로 스티브의 넥타이를 잡아당겼다. 자신이 알고 있던 그라면 절대로 끌려오지 않았을 몸이 너무나도 가볍게 휘청이는것을 보며 바튼은 스티브의 앞에서 웃음을 터트렸다.


"바튼...?"

"존경도 하고, 동경도 하고."

"......"

"그거 보다 더한 마음도 가지고 있어."


당신은 모르겠지, 평생. 몰라야만 해. 바튼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자신이 덮고 있던 이불을 스티브의 어깨 위로 둘러 주었다. 


"고맙습니다."

"자, 잠깐-"


그럼 나중에 만나요, 스티브. 바튼은 서둘러 스티브의 집을 빠져나왔고, 스티브가 바튼을 쫓아 집 밖으로 나왔을 때는 이미 바튼은 사라져 버린 후였다.





눈을 뜨자 보이는 익숙한 천장에 바튼은 푸흐, 하는 숨을 내쉬며 웃었다. 산소호흡기로 보이는 무언가를 제 손으로 떼어내고 나서야 자리에서 일어난 바튼은 창 밖으로 보이는 새벽녘을 바라보았다. 춥지는 않았다. 그렇지, 지금은 7월이니까. 아주 기나긴 꿈을 꾼 것 같았다. 그러나 몹시 즐거운 꿈이었다. 딱히 아픈 곳은 없었다. 숨을 쉬는 것도 문제는 없었고, 어디가 부러졌다거나 하는 곳은 없어 보였다. 병실을 나서기 위해 바닥에 발을 짚었을 때는 갑작스럽게 힘이 빠져 휘청였지만 별 무리없이 자리에서 일어날 수 있었다. 병실 문을 열기 위해 손을 뻗자마자 벌컥 열리는 문을 보고 바튼은 문이 뜯겨져 나가는 것은 아닐까, 라는 생각을 했다. 아니나 다를까 너덜너덜해진 경첩을 보며 바튼은 미묘한 표정을 지으며 그에게 인사를 건냈다.


"안녕하세요, 캡."

"......"

"스티브?"


그 순간, 바튼의 세상이 무너질 것 같이 흔들렸다. 숨이 막히도록 자신의 몸을 끌어안는 스티브를 보며 바튼은 도저히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그의 등을 마주 안았다. 그의 등은 역시나, 넓었다. 곧 소란스러운 움직임이 일더니 스티브가 뜯어놓은 문 앞으로 반가운 얼굴들이 옹기종기 모였다. 바튼은 스티브의 품 안에 파묻혀 있는 자신의 모습을 설명하기 곤란하다는 얼굴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캡, 저 이제 괜찮은데요. 이제 그만-"

"못 찾는 줄 알았어."

"...네?"

"그 때의 나는 그렇게 나가버리는 자네를 쫓아갈 힘이 없었어."


순간적으로 스티브의 등을 끌어안고 있던 바튼의 팔에 힘이 들어갔다. 꿈이, 아니었다고? 하얗게 질려가는 바튼의 얼굴을 보며 토니가 스티브의 어깨를 두드렸다.


"캡시클, 너도 깨어난지 얼마 안 됐잖아."


그러니까 적당히 해 두라고. 말은 그러면서도 다른 사람들을 데리고 나가는 토니를 보며 바튼은 애써 침착한 표정을 지었다. 


"캡. 그, 제가 했던 말들은, 그러니까..."


오, 이런. 바튼은 차마 뒷말을 잇지 못하고 스티브의 어깨에 제 머리를 파묻었다. 크고 너른 품에 안겨있는 기분이란 상상 이상으로 좋았다. 바튼의 머릿속은 엉망진창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 스티브에게는 아무말도 하지 않는 건데. 바튼은 한시라도 빨리 스티브의 품에서 벗어나고 싶었지만 그러기가 쉽지 않았다. 제 몸을 있는 힘껏 끌어안은 스티브를 보며 바튼은 한참을 아무 말도 없이 그의 품에 안겨 있었다. 그러나 곧, 무언가를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존경하고, 동경하는 스티브 로저스."

"......"

"나는, 당신을, 당신을..."

"좋아하고 있다네."

"......"

"그러면 안되는 줄 알았네. 혹시라도 그 사실이 자네를 불편하게 할까봐."


혹시라도 이 거리 마저 멀어질까봐. 그런 내가 자네에게서 그런 말을 들었을 때의 기분이 어땠을 지 상상이 가? 


"클린트."

"...네."

"나는 이제 기다리는 데에는 지쳤어."


스티브는 아주 조심스럽게 바튼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한없이 부드럽고 상냥한 그 행동에 바튼은 자신의 어깨를 감싸고 있는 스티브의 손 위로 자신의 손을 겹쳤다. 


"좋아하고 있습니다, 스티브."







"벌써 오늘로 고백한지 아흔 세번째인 거 알아?"
"그럼 내가 그 고백을 거절하는 게 아흔 세번째라는 거네."
"클린트!"
"건방져, 꼬맹이."

끄으으, 피에트로는 앓는 소리를 내며 제 머리를 쥐어 뜯기 시작했다. 대체 왜! 어째서! 노땅의 마음은 왜 이렇게 철벽인건데! 피에트로는 닿을 듯 말듯, 가까워지면 금방 멀어지는 바튼과의 거리가 애석하게만 느껴졌다. 벌써 아흔 세번째라고! 피에트로는 어디가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피에트로가 바튼에게 아흔 세번째로 고백했다는 것은 곧 울트론과의 싸움이 끝난지 93일이 지났다는 뜻이었다. 벌써 쉴드내에는 피에트로의 풋내나는 사랑을 응원하는 무리까지 생겼으니 말 다했다. 93일, 약 3개월간 지겹도록 쫓아다니며 고백을 하는 피에트로도 피에트로지만 그런 피에트로를 아흔 세번이나 차낸 바튼도 징하긴 징했다. 오죽했으면 시끄럽다고 이제 그만 받아주라는 잔소리까지 들었을까. 바튼은 토니에게 말했다. 스타크씨, 자기 일 아니라고 그렇게 쉽게 말하면 이번에야말로 당신의 그 잘난 엉덩이를 발로 차 줄거예요. 아니, 내가 뭘. 토니는 고개를 저었다.

피에트로가 가장 의아하게 생각하는 것은 당최 바튼의 마음을 갈피를 잡지 못하겠다는 것이었다. 이제껏 바튼은 단 한번도 제 고백에 진지하게 대응해 준 적이 없다. 이것은 곧, 바튼이 자신의 고백을 물흐르듯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이고 있다는 반증이 되지만 또 다른 말로는 이제껏 바튼은 피에트로를 한 번도 진지하게 거절한 적이 없었다. 사실, 거절한다고 해서 거절 당해줄 처지도 아니지만. 오히려 방금 고백한 사람을 뻥 차버리고는 그 전날 당한 부상이라거나 오늘 새벽 꿈자리에 대해 묻는다. 혹여 잠자리가 사납지는 않았는지, 그래서 악몽을 꾸지는 않았는지. 잠자리가 별로 좋지 못하다라고 말하면 금방 배너에게서 얻어낸 향초를 선물해주기도 한다. 
피에트로는 화를 내야할지 의문이었다. 여지를 만들지나 말던가! 으악! 이게 피에트로가 괴로워하는 까닭이었다. 그렇다고 대놓고 어장 관리 하는거냐, 물어볼 수도 없는게 바튼은 다른 누구에게나 그랬다. 사실 그것도 별로 마음에 안 들어. 혼자 중얼거리고 있는 피에트로를 보며 바튼은 그저 희미하게 웃어보일 뿐이었다.

"가자, 꼬맹아. 집합시간에 늦겠다."
"꼬맹이 아니라니까, 노땅."
"노땅 아니다."
"클린트!"

네네, 어련하시겠습니까. 바튼은 피에트로에게 제대로 된 대꾸도 해주지 않고 훌쩍 떠나버렸다.




바튼은 중상을 입은 날에는 꼭 코가 비뚤어지게 마셨다. 엄청나게 위험하고 안 좋은 짓이었지만 아무도 그걸 말리는 사람은 없었다. 가끔 배너만이 그러면 안된다고 언질을 할 뿐이었지만 그 뿐이었다. 그에게는 그것이 너무 당연한 일이었고, 익숙한 일이었다. 아픔을 술로 달래는 것은 누구나 한번쯤은 해본 것이었지만, 피에트로는 그다지 공감하지는 못했다. 마음이 아픈것과 몸이 아픈게 같나. 그러나 피에트로도 그를 말리지 않았다. 바튼은 진심으로 술이 고파보였고, 피에트로는 그냥 가만히 그를 지켜보았다. 혹시라도 바튼이 쓰러지거나 하면 바로 달려갈 수 있는 사람은 자신 뿐이니까. 그리고 오늘은 피에트로도 술이 좀 고팠다. 바튼에게 고백한지 아흔 아홉번째 날이었고, 아흔 아홉번째로 차였다. 이제 내일이면 세자리수인데.

왼쪽팔의 팔꿈치부터 손등까지 붕대를 칭칭감은 바튼을 보며 피에트로는 누가 가슴을 콕콕 찌르는 것처럼 아팠다. 바튼은 당분간 활은 커녕 총도 들지 못했다. 적어도 부상이 나을때까지 경과를 지켜봐야만 했고, 기껏해야 최소 일주일일 것이다. 그러나 바튼의 표정은 생각만큼 나빠보이지는 않았다. 평소같았으면 이제 노땅이 진짜 노땅인가보다! 하며 장난을 걸었을테지만 오늘은 딱히 그럴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앞에 있는 맥주병을 까서 들이킬 뿐이었다.

"야."
"왜?"
"내 거야, 작작 마셔."

에이 씨, 무슨 말을 하나 했더니. 내심 사소한 기대를 한 내가 잘못이지. 피에트로는 성을 내며 바튼의 손에 맥주병을 쥐어주었다. 그러자 바튼이 그런 피에트로의 얼굴을 보며 숨이 넘어갈 듯 웃기 시작했다. 

"피에트로."
"왜."
"넌 내가 어디가 그렇게 좋아서 그러냐?"
"뭘 그런 걸 묻고 그래요. 세삼스럽게. 사람이 좋으니까 좋은거지, 이유가 더 필요하오?"
"어울리지도 않는 이상한 말투 쓰지 말고."
"아이, 사람이 좀 진지하게 말을 하면 들어. '그냥'이라는 표현을 최대한 간드러지게 표현하려는 내 노력이 보이지도 않아? 준비한 대사가 다 떨어졌다고!"

지랄한다. 피에트로는 그런 바튼을 보며 스티브의 흉내를 내었다. 바른 말을 써야지! 캡틴한테 이를거야. 그러자 바튼이 또 웃음을 터트린다. 피에트로는 무심코 술 취했어? 라고 물었고, 바튼은 손에 들고 있던 맥주병의 뚜껑을 정확하게 건너편의 문 앞, 작은 쓰레기통 안으로 골인 시켰다. 오, 피에트로는 순수하게 감탄하며 박수를 쳤다.

"처음이거든."
"뭐가?"
"태어나서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무서웠던 적이 처음이었어."

바튼의 말에 피에트로는 방금 있었던 전투를 떠올렸다. 허공에 흩뿌려지는 피가, 그 붉은 액체가 바튼의 것이라는 걸 깨달은 순간 피에트로는 혹시라도 바튼이 잘못된 것은 아닐까, 숨이 막혔다. 그가 손에서 활을 떨어트리는 게 꼭, 마치 그가 쓰러지는 것 같아서 피에트로는 단숨에 바튼과 바튼의 활을 잡아채어 후방으로 물러났다. 바튼의 팔은 상처투성이였고, 피에트로의 옷은 그런 바튼의 상처에서 흘러나온 피로 더러워졌다. 다행이도 피에트로가 있었기에 바튼은 금방 치료를 받을 수 있었고, 부상도 그저 그런 중상으로 그쳤다.

"사자한테 어깨를 물린적이 있어."
"사자?"
"그래, 사자. 입이 무식하게 크더라. 거의 어깨 한 쪽이 너덜너덜해졌지. 그 때 내가 무슨 생각을 했는 줄 알아?"
"뭔데?"
"망할, 이래서 당장 내일 있을 쇼에 단검은 어떻게 던지라는 거야, 멍청한 고깃덩이가."

바튼은 말을 마침과 동시에 웃음을 터트렸고, 피에트로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었다. 바튼은 그런 피에트로의 표정을 잘 이해하고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그래. 당장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보다 내일 서커스에 서지 못해서 단장한테 죽도록 맞고 쫄쫄 굶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어. 그러니까 그만큼 죽는다는 것 따위는 아예 몰랐어. 무섭지도 않았고, 뭐 어떠냐는 생각 밖에 안 들었어. 그런데, 오늘 처음으로 그런 생각이 들었어. 진짜로 죽으면 어떡하지. 뭐, 이런 생각."
"왜 그랬는데?"

피에트로의 물음에 바튼은 입꼬리를 바짝 당겨 웃어보였다.

"너 때문에."
"나?"
"그래. 내가 진짜로 죽어서, 이제 지겹도록 좋아한다고 소리쳐 줄 애도 없어지고 뭐, 그건 좀 덜 귀찮아서 좋겠는데, 그런 생각들."

뭐야. 피에트로는 김이 팍 새버렸다는 얼굴로 미간을 찌푸렸다. 결국 또 이렇게 되는건가. 피에트로는 방금것까지 이제 백 번으로 쳐야하는 지 고민했다. 백 번째 고백은 안했는데, 고백 하기도 전에 차인걸로 하면 내가 뭐가 되냐. 묵묵히 맥주를 마시는 피에트로를 보며 바튼이 물었다.

"오늘은 안 해?"
"뭘."
"12시 넘었는데."
"안 해!"
"그래? 그럼 내가 하고."
"노땅, 지금 나랑 장ㄴ...뭐?"

미리 말해두는데, 원래 처음부터 백 번째는 내가 먼저 하려고 했어. 바튼은 그대로 맥주병에 들어있던 맥주를 원샷으로 깔끔하게 넘겼고, 피에트로는 그런 바튼을 두 번은 없을 이 세상에서 가장 멍청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큭큭거리며 빈 병을 바닥에 내려놓은 바튼이 그래서, 대답은? 하고 묻자 피에트로는 입만 벙긋거릴 뿐이었다. 그러나 곧 들고 있던 병을 내려놓고는 당장에 자신에게로 뛰어드는 거대한 몸뚱아리를 정면으로 맞이하며 바튼은 팔이 아프다며 흔들어보였고, 피에트로는 한참동안이나 바튼의 품에 제 얼굴을 묻었다. 진짜, 진짜 좋아해. 그래, 알았다. 꼬맹아. 바튼은 제 품에 안긴 피에트로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