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데릭 x 스타일즈..는 아닌 거 같고 데릭 +스타일즈

* 그냥 이런 스타일즈가 보고 싶었다.

* 시즌 2~ 시즌 3 초반 시점입니다.





  스타일즈는 그 나이 때 십대 청소년들에 비해 유독 다른 점이 하나가 있다면 이 세상 최고 베스트 프렌드가 늑대인간이라는 점을 꼽을 수 있었다. 물론 그 외에도 그 늑대인간이 한 때 사랑에 빠졌던 여자 친구는 그런 늑대인간을 사냥하는 유서 깊은 헌터 가문의 장녀라던가, 유독 그와 자신을 싫어하던 한 소년은 도마뱀 인간이었다 이제는 늑대인간이 되었다던가... 스타일즈는 이런 것들이 이제는 너무 당연한 청소년들 중 하나였다.

 

  스타일즈 스틸린스키를 알고 있는 사람들 중 열에 일곱은 그를 장난꾸러기 소년으로만 생각한다. 그와 진정으로 가까운 사람만이 그가 사실은 무척이나 상냥하고 지혜로우며, 진정으로 용기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 중에서도 사실은 그가 자신의 상처 입은 내면을 꽁꽁 숨기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했다. 스타일즈의 원래 성격 자체가 유쾌하고 활발한 장난꾸러기라는 것은 사실이었으나, 그는 어떤 상황에서도 그렇게 보였다. 그런 모습에 질렸다는 듯 너는 이런 상황에서도 참 낙관적이구나, 라고 쏘아대는 사람도 많았으나 단 한 명, 스캇만은 절대로 그러지 않았다. 스캇은 알고 있었다. 스타일즈 본인 스스로 그렇게 보이도록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라도 가지고 있는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그럼에도 그렇게 굴지 말라고 할 수도 없었다. 그것은 스타일즈의 최후의 방어막이었으며 절대로 함부로 건드려서는 안 되는 것 중 하나였다.

 

  최근 스타일즈는 도통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잭슨이 런던으로 간 이후 딱히 별다른 사건 사고가 없었기에 비컨 힐은 평화롭기만 했지만 오히려 스타일즈에게는 이런 상황이 폭풍전야같이 느껴졌다. 학교 끝나고 난 뒤 집으로 돌아오기 전 스캇이 스타일즈를 불러 세웠지만 스타일즈는 예의 그 화려한 말빨로 스캇을 돌려보냈다. 그러고서는 혼자 방안에서 쓰린 속을 달랬다. 스캇이 지금보다 더 강하고 본능적인 늑대인간이 아니라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들켜서 딱히 좋은 사실은 전혀 아니었으니까.

  스타일즈가 잠을 통 잘 수 없었던 이유는 그가 꾸는 꿈 때문이었다. 처음 스캇이 알파인 피터에게 물린 숲에 덩그러니 서 있는 꿈이었다. 주변을 둘러봤지만 아무도 없었고 그 숲 속 스타일즈는 언제나 혼자였다. 한참을 그렇게 서 있다 보면 구름 속에 가려져있던 달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 달은 항상 꽉 찬 보름달이었다. 그리고 동시에 울부짖는 늑대 울음소리에 스타일즈는 귀를 막았다. 곧 소리가 멈추고 고요함이 찾아온 숲 속, 스타일즈와 눈을 마주친 것은 붉은 눈의 늑대였다. 칠흑 같은 어둠 속 섬뜩하리만치 빛나는 붉은빛에 스타일즈는 온 몸에 소름이 돋는 것 같았다. 곧 그의 주위로 다른 늑대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한 눈에 봐도 붉은 눈의 늑대는 그 무리의 우두머리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들은 아무 말 없이 스타일즈를 바라만 보았다. 그러나 스타일즈는 그들이 하려는 말을 잘 알고 있었다. 넌 우리들과 어울린다는 것 자체가 부정한 것이라는 듯 말없이 바라보는 시선에 스타일즈는 소리라도 지르고 싶었다. 무엇보다 가슴이 너무 아픈 것은, 금빛의 눈을 가진 스캇마저도 자신을 그렇게 본다는 것이었다. 제일 처음 느낀 것은 명백하게 소외감이었다. 그 소외감은, 그 외로움은 한없이 스타일즈의 마음을 무너트렸다. 싫다는 비명을 지르고 나서야 꿈에서 깨고 나면 방 안에 홀로 남겨진 그 기분도 그다지 좋은 것은 아니었다. 스타일즈는 벌써 일주일째 제대로 잠을 자지 못하고 있었다.

 

  "스타일즈, 너…."

  "헤이, 스캇. 미안한데 지금 내가 리디아를…."

  "스타일즈!"

 

  스타일즈는 스캇의 고함소리에 숨을 쉬는 것도 잊어버렸다. 강한 힘으로 내려친 사물함의 문이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찌그러져있었다. 주체할 수 없는 감정에 스캇의 눈이 살짝 금빛을 띄었으나 그 이상의 변환은 없었다.

 

  "…놀라게 했다면 미안."

  "…아니, 아니야."

  "스타일즈, 좀 들어봐. 너 지금 당장에라도 쓰러질 거 같은 사람처럼 보여. 내가 널 지켜보지 않는 곳에서 네가 사라지거나 아니면…. 아니, 어쨌든. 그럴까봐 무섭다고."

 

  스캇이 무어라 열심히 말을 하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지만 스타일즈는 도저히 스캇의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스타일즈는 곧 자신이 숨을 제대로 쉬고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발작이 온 것이었다. 스타일즈는 그대로 정신을 잃어버렸다.

 

  눈을 떴을 때 보인 건 아무도 없는 텅 빈 양호실이었다. 병원으로 당장 실려 가지 않은 게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랬다면 아버지께도 소식이 전해졌을 것이다. 그것만은 피하고 싶었다. 아무도 없는 빈 공간에 또 덩그러니 남겨져있다는 생각에 겁이 났다.

 

  "일어났나?"

  "워, 데, 데릭…?!"

 

  분명 아무도 없을 것이라 생각했던 양호실에 상상도 하지 못했던 사람이 목소리가 들려오자 스타일즈는 없던 잠도 확 날아가 버린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어느새 데릭은 스타일즈가 누워있는 침대 옆에 앉아있었다.

 

  "음…. 당신이 있을 줄은 몰랐네요."

  "그 녀석이 부탁했거든."

 

  오, 짧은 탄성 후 깊게 내쉬는 한숨에 데릭이 의아하다는 듯 스타일즈를 빤히 내려다보았다. 분명 마지막으로 봤을 때만 해도 그 뻔뻔하게 잘나보이던 얼굴은 어딜 가고 다 죽어가는 송장이 걸어 다니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스캇이 호들갑을 떨었던 것도 당연했다. 스캇은 본능적으로 느낀 것이다. 스타일즈에게서 풍기는 진한 부정의 향기를.

 

  "대체 무슨 일이지?"

  "와우, 지금 데릭이 날 걱정해주는 거예요? 놀라워라!"

 

  아무렇지 않은 척 태연한 낯짝을 하고 있는 꼴을 보니 데릭은 눈썹을 찡그리며 스타일즈를 쳐다보았다. 스타일즈는 그런 데릭의 시선을 피했다. 계속 쳐다보고 있으면 꼭 그 붉은 눈을 볼 것 같았다. 시선을 피하는 스타일즈의 얼굴을 억지로 잡아 돌렸다. 데릭은 그의 눈에서 꽤 많은 걸 읽어낼 수 있었다. 그 중 무엇보다 가장 커다랗게 자리 잡은 것은 불안과 공포였다.

 

  “이거 놔요…!”

  “뭘 그렇게 겁내는 거지?”

  “…….”

  “이제까지 그 뻔뻔한 낯짝은 어디 가고 겁만 집어 먹은 얼간이만 남았군. 대답해봐. 뭐가 그렇게 무섭지? 뭘 원하는 거지?”

 

  쏟아지는 데릭의 질문에 스타일즈는 그대로 입을 꾹 다물어버렸다. 어쩌면, 지금의 스타일즈에게 있어서 가장 껄끄러운 상대는 데릭일지도 모른다.

 

  “하하, 내가 뭘 원해요. 난 아무것도 원하는 거 없어요. 그러니까 데릭 이제 그만 비켜줄래요? 남들이 보기에 꽤….”

  “스타일즈.”

  “…….”

  “나한테 거짓말은 소용없어.”

 

  순간 스타일즈의 동공이 흔들리는 것을, 데릭은 놓치지 않았다. 아무것도 아니라며 부정하며 고개를 흔드는 스타일즈는 어떻게든 데릭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 했지만 도저히 벗어날 수가 없었다. 발버둥치는 스타일즈를 가볍게 제압한 데릭은 스타일즈의 눈을 쫓는 시선을 놓치지 않았다.

 

  “…그만, 그만해요! 보지 말라고요!”

  “스타일즈.”

  “나는, 나는…!!”

  “스타일즈 스틸린스키.”

  “…….”

  “네가 원하는 것이 이건가?”

 

  데릭은 가볍게 쥔 스타일즈의 손목에 입을 맞췄다. 입술이 닿았다 떨어지는 그 생경한 느낌에 스타일즈는 숨을 삼켰다. 어느새 데릭의 눈이 붉게 빛나고 있었고, 무서우리만치 날카롭게 솟은 송곳니가 스타일즈의 눈에 들어왔다. 금방이라도 자신을 물어뜯을 것 같은 그 눈길에 스타일즈는 뒷목이 서늘해졌다. 창백한 피부에 송곳니가 박힌다고 생각한 순간 스타일즈는 믿기지 않는 힘으로 데릭의 손아귀에서 빠져나왔다.

 

  “……아니, 아니야.”

  “피터에게서 들은 적이 있어. 이번이 두 번째이자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르지. 그래도, 거부할 텐가?”

  “나 같은 녀석 늑대인간으로 만들어서 뭐할 건데요. 평생 시끄러울 걸요. 옆에서 하루도 쉬지 않고 떠들어 줄 테니까….”

  “쉿. 그건 그렇군. 정말 시끄럽겠어.”

 

  눈에 띄게 박동 수가 줄어든 스타일즈의 심장소리에 데릭은 헛웃음이 나올 것 같았다. 그럼에도 아직 다 사라지지 않은 스타일즈의 불안감에 데릭은 가만히 침대 옆에 앉아 스타일즈를 바라보았다. 그 끈질긴 시선에 스타일즈는 졌다는 듯 두 손을 들었다.

 

  “꿈을 꾸는데…. 당신이랑 스캇이 나와요. 아마도 더 많은 늑대인간들도 함께.”

  “더 많은 늑대인간?”

  “네. 뭐, 아마도 셋, 넷…? 아무튼, 스캇이 처음 물렸던 그 숲속에 나 혼자 덩그러니 놓여있어요. 그리고 그 숲속에 당신들이 나오죠. 그리고 나는 언제나 혼자에요. 언제나, 혼자죠.”

  “…….”

  “스캇에게 다가가려고 해도 그는 나를 밀어내버리고 말아요. 왜인 줄 알아요? 나는 인간이니까요. 당신도 마찬가지에요. 당신도 나를 밀어내버리죠. 내가 늑대인간이 아니니까. 그런데, 막상 당신이 날 늑대인간으로 만들어준다고 했을 때, 도저히 그럴 용기가 나지 않더라고요. 아니, 사실 잘 모르겠어요. 나는 내가 원하는 게 뭔지 모르겠어요. 내 곁에 있는 사람들은 하나둘 씩 인간이 아니게 되고, 나를 언제 떠나갈지 모르는데 나 혼자 이렇게 남아버리는 게 무섭다고요.”

  “스캇이 그럴 거라고 생각하나? 진심으로.”

  “뭐, 요새 그 녀석 하는 거 보면 얼마나 서운한데요.”

 

  불만스럽다는 듯 투정을 부리는 얼굴에 데릭은 순간 스타일즈의 머리를 헝클어트렸다. 마치, 투정을 부리는 어린 아이를 달래는 것처럼 상냥한 손길에 스타일즈는 조금 놀란 얼굴로 데릭을 쳐다보았다.

 

  “그래요, 나 빌어먹을 십대에요.”

  “이봐, 난 그런 말 한 적 없다고.”

  “당신 얼굴에 쓰여 있거든요. 아, 몰라요. 스캇한테 말하지 말아요. 그러면….”

  “그러면?”

  “쪽팔려서 죽어버릴지도 모르니까요.”

 

  결국 데릭이 스타일즈의 말에 웃음을 터트렸다. 꽤 호쾌한 얼굴로 웃는 데릭의 얼굴에 스타일즈는 데릭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뭘 보냐는 듯 눈썹을 찌푸리기에 얼른 얼굴을 돌린 스타일즈는 그대로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쓰고는 침대에 누웠다. 딱히 양호실 밖으로 나가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기 때문에 계속 데릭이 옆에 있다는 것이 조금 신경 쓰였지만 나가라고 나갈 것 같지도 않았기 때문에 스타일즈는 딱히 무어라 하지 않았다. 잠을 자면 어차피 또 그 꿈을 꾸어야 하는 것이 조금 무서워서 잠을 자고 싶지는 않았다.

 

  “잠이 안 오나?”

  “…….”

  “아니면 단순히 잠을 자기 싫은 건가.”

 

  스타일즈는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하고 싶지도 않았을 뿐더러 대답해봤자 딱히 뭐라고 답이 나오는 것도 아니었으니까 말이다. 그러자 스타일즈는 곧 자신의 몸이 붕 떠오르는 것을 느꼈다. 깜짝 놀라 이불을 내리자 이불 째로 자신을 들쳐 업은 데릭의 얼굴에 스타일즈는 얼굴이 확 달아오르는 것 같았다.

  

  “뭐, 뭐에요? 데릭! 이봐요!!”

  “시끄러운 놈.”

 

  뒤늦게 스타일즈의 비명소리에 놀라 달려온 스캇이 희미하게 남아있는 하나가 아닌 둘의 냄새를 맡고 말없이 웃었다. 곧 이어 휴대폰에 남겨진 문자에는 저녁에 찾으러 오라는 짧은 말 뿐이었다.

 


  *


 

  화재의 흔적이 남아있는 폐가에 덩그러니 놓인 스타일즈는 천천히 소파에서 일어났다. 얇은 천 이불을 온몸에 꽁꽁 감싸고 조심스럽게 발을 딛는 중간, 중간 바닥이 무너져 내릴 것 같은 비명소리에 스타일즈는 덜컥 겁이 났다. 꿈속에서는 항상 손가락이 몇 개나 더 많이 달려있었다. 스타일즈는 천천히 손가락을 세 보았다. 열 개. 이것은 꿈이 아닌 현실이라는 소리였다.

 

  “데릭? 이봐요, 어디 있어요!”

 

  갑자기 뒤에서 들려온 발소리에 스타일즈는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뒤를 돌아보았다. 어두운 곳에서 보이는 것이라고는 붉은 빛으로 빛나는 눈동자였다. 천천히 다가오는 그의 모습에 스타일즈는 무심코 뒷걸음질을 쳤다. 그러자 낮게 으르렁 거리는 소리에 스타일즈는 발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꼭 그러지 말라는 듯, 경고를 하는 목소리에 스타일즈는 가만히 그 붉은 눈을 바라보았다. 스타일즈는 가만히 손을 뻗었다. 꼭 손을 물어뜯길 것 같이 겁이 났지만 그는 그러지 않았다. 가만히 다가와 스타일즈의 손에 자신의 코를 비볐다. 스타일즈는 무릎을 꿇어 그와 눈을 마주쳤다. 맑은 붉은 눈에 선명하게 비친 자신의 모습이 한 없이 초라하기만 했다. 스타일즈는 가만히 그의 머리를 끌어안았다. 그리고 그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부드러운 털의 촉감이 기분 좋았다. 스타일즈는 그의 목을 감고 있는 제 손의 손가락이 열 개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꽤 오래간만에 기분 좋은 꿈을 꾸었다.

 


  *


 

  “데릭?”

  “쉿.”

 

  스캇은 가만히 데릭의 어깨에 기대어 곤히 자고 있는 스타일즈를 발견하고는 소리 없는 웃음을 터트렸다. 요새 통 잠을 못잔 것 같이 피곤함이 덕지덕지 붙은 얼굴이 못내 안쓰러웠는데 지금은 그 피곤이 조금은 풀린 것 같은 모습이라 안심했다.

 

  “생각보다 귀찮은 녀석이야.”

  “부정은 못하겠네요.”

  “그리고 생각보다, 나랑 비슷한 녀석일지도.”

  “…….”

  “가. 더 이상 애 보기는 질색이니까.”

 

  조심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난 데릭에게서 스타일즈를 받아든 스캇은 곤히 잠든 스타일즈의 얼굴과 다시 평소의 자신이 잘 알고 있는 얼굴로 돌아온 데릭의 얼굴을 번갈아보았다. 그가 무슨 수를 써서 스타일즈를 재웠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다음에 만나면 고맙다는 인사정도는 한 번 더 해야겠다. 희미하게 남아있는 데릭의 체향에 스캇은 무의식중에 얼굴을 찌푸렸다. 원래 이렇게 강한 향기가 났던가. 스캇은 다시 뒤를 돌아 데릭의 집을 쳐다보았다. 희미하게 창문 사이로 비친 붉은 빛에 스캇은 픽, 웃음이 나오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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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렌은 괴로운 탄성을 터트리며 눈을 떴다. 텐트 밖에서 벌써 사람들이 아침을 맞이하는 소리가 들렸다. 아직 잠기운이 다 가시지 않은 모양인지 어설프게 눈을 비비며 일어나던 글렌은 자신의 허리를 감고 있는 단단한 팔을 보며 숨을 삼켰다. 떨어진 시선 끝 오랜만에 곤히 자고 있는 데릴을 보니 절로 웃음이 나왔다. 그러다 곧 속옷만 덜렁 입고 있는 꼴에 얼굴이 확 달아오르고 말았다.

 

  “…….”

 

  곧 뒷목이 서늘해지며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 같았다. 아침 날씨는 이상하리만큼 쌀쌀했다. 조심스럽게 데릴의 팔을 치우려 하자 짧은 욕설과 함께 데릴이 눈을 떴다.

 

  “아, 깼어요? 미안해요, 깨우려고 한 게 아니라….”

  “시끄러워.”

  “…그, 미안….”

 

  갑자기 입술을 겹쳐오는 그 덕분에 글렌의 뒷말은 자연스레 먹히고 말았다. 버둥거리는 글렌의 위로 올라타 그를 밀어붙이는 데릴의 모습에 글렌은 마치 어젯밤이 되풀이 되는 것 같아 난처해졌다. 데릴이 훌륭한 사냥꾼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같은 남자인데 이렇게 체격 차이가 날 줄은 몰랐다. 혹시라도 그가 다칠까봐 진심으로 밀어내지도 못하는 글렌의 주먹은 데릴에게 있어 그저 솜방망이에 불과했다. 글렌의 턱을 거칠게 잡아 올린 데릴은 말 그대로 글렌의 입술을 집어 삼켰다. 도망가려는 혀를 붙잡아 옭아매고 그의 입안을 원하는 만큼 실컷 헤집으며 놀았다. 가끔 참을 수 없이 흘러나오는 비음 섞인 신음소리가 미치도록 색스러웠다. 어설프게라도 맞춰보려는 글렌의 노력이 가상해 데릴은 최대한 상냥하게 그의 입술을 탐했다. 물론 그것은 데릴의 기준에서였지, 글렌의 기준에서는 전혀 상냥하지 않았다는 것이 흠이었다.

 

  “아… 침, 이거든요…! 읏, 데릴…!”

 

  글렌은 속으로 지금까지 살면서 단 한 번도 믿어본 적 없는 신의 이름을 부르짖었다. 체격 차이만 많이 나면 될 것이지…. 글렌은 고개를 저었다.

 

  “꼬마야, 여기가 누구 텐트지?”

  “…데릴 씨 텐트죠….”

  “그래. 내가 나가기 전엔 아무도 이 근처로 안 와.”

 

  이대로라면 정말 생명의 위협을 느낄 것 같은 글렌은 죽을힘을 다해 데릴을 밀어 내었다. 다행히 데릴은 순순히 물러나주었고, 글렌은 텐트의 구석으로 물러났다.

 

  “나도 알고 있지만 아침은 너무하다고요. 오늘은 가서 식료품도 가져와야 하고….”

  “뭐?”

  “…네?”

  “방금 뭐라고 했어.”

  “식료품을 가져와야….”

 

  순식간에 무거워진 데릴의 분위기에 글렌은 숨을 죽였다. 가끔, 글렌에게 있어 데릴은 무척이나 낯선 존재였다.

  글렌은 데릴이 좋았다.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좋았다. 그에게 목숨을 빚진 정도도 꽤 많았고, 도움은 수도 없이 받았다. 그러나 그것 외에도 그에게 끌리는 이유는 여러 가지였다. 글렌은 데릴이 온전히 데릴로써 살아남기를 바랐다. 그러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들과 하하 호호 떠들며 어울릴 정도는 되지 못할지언정 시선이 닿는 곳에는 있어야 했다. 글렌은 데릴이 그가 자신을 표출하는 것만큼 날카로운 사람은 못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는 작은 여자아이를 위해 꽃을 따줄 정도로 상냥했고, 말은 모질게 해도 그들이 정신을 차리고 스스로를 다독일 수 있을 정도로 다정한 사람이었다. 데릴은 단지 표현하는 방법을 모를 뿐이다. 글렌만이, 그것을 알고 있었다.

 

  “내가 뭐라고 했지?”

  “데릴, 내 말 좀 들어봐요. 내가 가야해요.”

  “넌 그렇게 말하고 가서는 하마타면 저 세상 사람이 될 뻔했어, 알아? 거지같은 새끼들한테 붙들려갔을 때는 또 어떻고. 나 외에, 네 몸에 손대는 것들은 그 누구라도 용서하지 않아. 그런 일을 만들 가능성을 주는 사람들 모두.”

  “데릴.”

 

  데릴은 가끔, 이 조그마한 동양인 꼬마 녀석이 너무 두려웠다. 데릴에게 있어 글렌은 잃는 것이 두려울 만큼 소중한 사람이었다. 항상 소중히 여기는 것은 모두 잃어버린 데릴이었기에 지금 살아있는 순간에도 절대로 무엇을 잡지는 말자고 생각했다. 소중한 것, 지키고 싶은 것 사소한 것 하나라도 만든 순간, 그것을 앗아가는 이 빌어먹을 세상에 신물이 났다. 마지막으로, 이번만큼은 제 목숨과 맞바꿔서라도 지키고 싶은 것이 하나 생겼는데, 글렌은 이런 데릴의 속을 너무 훤히 꿰뚫고 있다. 그리고 데릴에 대해서는 모든 것을 알았다. 자신을 모질게 대해도 그것이 상냥함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것을 알았고, 이렇게 결국 자신이 화를 내어도 그는 갈 것이다. 가야만 했으니까. 그리고 자신은 그를 보내주겠지. 이 모든 일련의 과정을, 글렌은 다 알고 있었다.

   

  “아니, 내 이름 부르지 마.”

  “데….”

  “그 망할 다리를 움직이지도 못하게 만들기 전에.”

 

  글렌은 데릴의 말에 살짝 놀란 듯 했지만, 이내 침착하게 천천히 데릴에게로 다가왔다. 가볍게 데릴의 뺨을 감싼 손의 체온이 이상하리만큼 따뜻했다. 그대로 무릎을 꿇은 채로 그의 이마, 콧등에 조심스럽게 입을 맞춘 글렌은 아예 데릴의 얼굴을 두 손으로 살며시 감싸 쥐었다.

 

  “살고 싶어요, 데릴.”

  “…….”

  “당신과 같이 살고 싶어요. 이 세상이 다 글러먹었어도 상관없어요. 당신만, 당신만 같이 있어주면 돼요. 그러기 위해서라면 난 뭐든 할 수 있어요.”

 

  입술에 가볍게 맞닿고 떨어지는 글렌의 입술을 빤히 바라보던 데릴은 다시 한 번 그의 입술을 탐했다. 글렌은 천천히 데릴의 목을 감싸 안으며 그의 품에 자신을 맡겼다.

 

  “……그, 달릴 수는 있게 해줘요….”

 

  한창 글렌의 목에 입술을 묻은 데릴이 웃는 것이 피부로 생생하게 느껴졌다. 긴장한 탓인지 잘게 떨리는 허리를 그의 탄탄한 손이 붙잡아주었다.

 

  “좋아.”

 

  글렌은 조심스럽게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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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R15.. 라고 말이나 할 수 있나. 이거.





  비가 오지게도 오는 날이었다. 신기한 게 그렇게 비가 많이 오면서 기운이 우울하거나 착잡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교복 소매, 바짓단까지 너나 할 거 없이 잔뜩 말아 올리고 양말도 신지 않은 채로 신은 검은색 슬리퍼 차림을 한 토마스와 민호는 하늘만큼 칙칙한 검은색 장우산을 나눠쓰고는 발걸음을 옮겼다. 혹시라도 민호의 어깨가 젖지는 않을까 노심초사하며 우산을 기울이던 토마스를 보며 민호는 피식, 바람 소리를 내었다.

 

  “꼴사나워, 저리가.”

  “넌 내가 너 좋으라고 하는 짓도 막 욕하더라. 섭섭하게.”

  “난 네가 지켜줘야 하는 계집애가 아니거든?”

  “계집애는 아니지만 내가 지켜줘야 하는 사람은 맞지.”

 

  불만스럽다는 듯 토마스를 올려다본 민호는 알았다는 듯 손을 내저으며 토마스의 옆으로 한 걸음 더 바짝 붙었다.

 

  “민호.”

  “왜, 영화나 드라마 보면 다 이러던데. 싫어?”

  “아니.”

  “단호박 같은 새끼….”

 

  구멍이라도 뚫렸나, 중얼거리는 민호의 말에 토마스는 가만 가만 고개를 끄덕이는 것 외에는 딱히 할 말이 없었다. 이럴 때는 뉴트처럼 말주변이 좀 더 많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곧 도착지는 다가오는데 토마스의 머릿속은 뒤죽박죽이었다. 그 고민들은 오늘이 금요일이라는 것에부터 비롯되었다. 오늘이 하필 금요일만 아니었어도 토마스는 생각조차 못했을 법한 일이었다. 그런데 하필, 하필 금요일이라 그런다. 토마스는 내심 기대를 조금이라도 걸어볼 법 하지 않은가, 하며 스스로를 다독였다. 열여덟. 물론 성인은 아니지만 그래도 알 건 다 아는 나이인데. 혼자 푸는 건 그만하고 싶었다. 명색이 연인 사이라면 좀.

 

  “…다 왔네.”

 

  이런 저런 생각을 하는 사이 벌써 민호의 집 앞에 도착해버리고 말았다. 우산은 원래 토마스의 것이었음으로 민호는 얼른 현관문 앞으로 달려 나갔다. 그런 민호를 붙잡지도 못한 손이 처량하게 바닥으로 떨궈졌다.

 

  “……그럼, 갈게.”

  “…….”

 

  침묵이 조금 길었나. 영 부자연스러운 자신의 행동에 토마스는 스스로를 질책했다. 이상하게 보였을 거야. 이번 주도 처량하게 집에서 혼자 보내야겠구나, 아아, 트리사. 나 또 병신 짓 했나봐, 어쩌지. 축 처진 어깨를 들 생각도 못하고 토마스는 뒤를 돌았다.

 

  “야.”

  “…응?”

  “자고 가.”

  “…….”

 

  안 그래도 큰 토마스의 눈이 더 크게 동그래졌다. 토마스가 예상한 대사는 두 가지였다. 전에 잠깐 봤던 tv프로그램에서 그러던데 집에서 라면을 먹고 가지 않을래, 라고 묻거나 비가 오는 날, 비가 너무 많이 오네… 하며 자연스럽게 집 안으로 유도하는 것이 그린라이트라고 했었단 말이다.

 

  “두 번 말 안 해, 병신아.”

 

  토마스는 그대로 들고 있던 우산을 떨어트렸다.

  그는 종종 착각할 때가 많았다. 사실 화끈하긴 저보다 그가 더 화끈했다.

 

  *

 

  대충 먼저 씻으라며 화장실 안으로 밀어 넣어진 토마스는 거울 속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며 볼을 꼬집었다. 화끈하게 달아오르는 뺨이 이것이 꿈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야.”

  “으악!!!”

  “…미친, 목소리는 존나 더럽게 커. 이거.”

 

  품으로 던져진 것을 받아든 토마스는 놀란 토끼눈을 한 채로 뒤를 돌았다. 새하얀 면 티와 검은색 바지는 모던하고 심플한 것을 좋아하는 그의 성격과 한 치의 어긋남도 없었다. 얼른 씻고 나온 토마스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들여다보았다. 키는 토마스가 조금 더 클지는 몰라도 어깨라던가 몸집은 민호가 훨씬 …좋긴, 좋았다. 뭐, 이건 사실이니까. 토마스가 나오자 소파에 앉아있던 민호도 옷을 챙겨들고는 화장실로 향했다. 거실에는 이미 tv가 틀어져 있었기 때문에 토마스는 민호를 기다리는 동안 조금 심심함을 달랠 수 있다는 생각에 안심했다. 그렇게 생각한 것도 잠시 토마스는 조금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오늘은 금요일이니까. 내일은 토요일이고. 어차피 부모님은 일 때문에 바쁘셔서 집에 안 계시니까 전화할 필요 없고…. 온갖 이상한 생각을 하던 토마스는 그대로 양손으로 얼굴을 덮어버리고는 소파 위로 엎어졌다. tv에서 뭐라고 지껄이는 지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지금 중요한 것은 토마스가 민호의, 그러니까 애인의 집 소파에 앉아있다는 것이었다. 물론 민호의 집에 온 게 처음은 아니었지만 그때랑 지금이 어찌 같을 수 있을까.

  

  달칵, 화장실의 문이 열리고 토마스는 얼른 몸을 일으켜 세웠다. 머리에 수건을 얹고 나오는 민호도 토마스와 똑같이 하얀 티에 회색 바지를 입고 있었다. 가끔 민호의 집에 놀러왔을 때 종종 봤던 모습이었지만 오늘은 조금 달라 보이는 분위기에 토마스는 침을 삼켰다. 달라 보이는 건 민호가 아니라, 민호를 보는 자신의 시선임이 분명함을 토마스 스스로도 자각은 하고 있었다. 자각만. 민호가 소파에 앉자 토마스의 심장이 벌렁벌렁 뛰는 것 같았다. 이런 기세로는 마라톤도 거뜬히 뛰고 올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었다. 분명 민호가 쓴 것과 같은 샴푸나 비누를 썼을 텐데, 이상하게 민호에게서 나는 향이 더 진했다. 물론, 자신은 벌써 샤워를 한지 15분이나 지났다는 사실도 아주 잘 알고 있었지만 말이다. 토마스는 민호의 머리 위 수건을 걷어 내었다. 촉촉하게 젖은 머리카락에서 물방울이 떨어져 내렸다. 뭐냐는 듯 쳐다보는 민호의 얼굴에 토마스는 수건으로 민호의 머리카락을 말려주기 시작했다. 거의 물기를 다 털어내고 나서야 토마스는 민호와 눈을 맞췄다. 쌍꺼풀 없는 장난기 넘치는 눈가 밑 두툼한 애교 살에 토마스는 절로 웃음이 났다.


  토마스는 손에 쥐고 있던 수건을 바닥으로 떨어트렸다. 조심스럽게 민호의 뺨을 쥔 토마스는 그대로 민호의 입술에 제 입술을 맞대었다. 그런 토마스의 행동에 민호는 살며시 눈을 감고는 토마스의 손에 자신의 손을 겹쳤다. 부드럽게 입을 가르고 들어온 토마스가 장난스럽게 민호의 혀를 건들이자 그런 토마스의 행동에 입 꼬리를 말아 올린 민호가 장난치지 말라는 듯 토마스의 손등을 쳤다. 나름 복잡한 마음과 설렘이 겹쳤던 첫 번째 키스와는 다르게 이제는 본능적으로 더 깊은 것을 원하는 토마스의 마음을 이해한다고 말하기라도 하듯 민호는 부드럽고 익숙하게 토마스에게 맞춰주었다.


  그때 민호의 발에 툭 하고 뭔가가 닿았다. 귀찮다는 듯, 방해가 될 것 같아 차버린 그것이 바닥으로 추락하며 둔탁한 소리를 냈다. 그러자 그때까지만 해도 언젠가 했던 예능프로그램의 재방송이 뚝 꺼지더니 큰 화면 가득 살색 가득한 스크린으로 가득 차는 것이 아닌가. 교태 가득한 여자의 신음소리에 토마스의 행동이 뚝 멈추고 말았다.

 

  “…미안.”

 

  민호는 리모컨을 차버린 자신의 발을 원망했다. 자연스레 민호의 몸 위에 올라타고 있던 토마스가 저 멀찍이 멀어지더니 가장자리에 다리를 모으고는 양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삭 덮어버리는 게 아닌가. 민호는 작게 시발을 외쳤다. 기껏 분위기 타나 했더니 빌어먹을, 다 말아먹었다.

 

  “…미안합니다.”

  “아니, …그 내가 미안해.”

 

  조용해진 집 안에 신음소리는 여전히 흘러넘쳤다. 아니, 저걸 꺼야겠다는 생각은 들겠는데 지금 막상 움직이기가 영… 아, 모르겠다. 민호는 머릿속이 터져버릴 것 같았다. 자존심도 자존심이고 한 번 보기 좋게 말아먹은 분위기 때문에 다시 뭔가 하기에는 아닌 것 같았다. 하지만 또 섣불리 일어날 수가 없는 것이,

  …섰다.

 

  “…시발.”

 

  보기 좋게 살짝 부푼 제 앞섬을 보니 민호는 머릿속이 새하얗게 질리는 것 같았다. 애인 새끼 눈앞에 두고 화장실에서 처량하게 처리해야하는 이 처지는 또 무슨 개 같은 처지인가. 민호는 신경질 적으로 토마스에게 리모컨을 던졌다.

 

  “끄던가.”

 

  민호의 목소리에 놀란 토마스는 동그란 눈으로 민호를 쳐다보았다. 민호는 한숨을 내쉬었다.

 

  “아니면 계속 하던가.”

 

  검지를 까딱이며 저를 부르는 민호의 모습에 토마스는 딸꾹질이 날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렇지만 또 다른 의미로 토마스는 심장이 요란하게 뛰고 있는 것을 느꼈다. 혀로 입술을 축이는 그 모습에 토마스도 똑같이 마른 입술을 핥았다. 토마스는 긴 팔을 뻗었다. 순식간에 민호의 발목을 잡아 끌어내린 토마스는 그대로 민호의 위에 올라타 그의 입술을 집어 삼켰다. 이젠 tv에서 뭐가 나오든 상관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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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토마스는 하루에도 몇 번이나 건조한 숨을 처량하게 내뱉었다. 통산 34전 33패 1무. 단 한 번도 제가 아닌 민호의 입에서 먼저 서로의 애정을 확인하거나 하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는 것이다. 그나마 1무라도 있는 것이 딱 한 번 해주긴 해줬는데 그것도 확실한 것은 아니었다. 토마스는 듣고 싶었다. 낯간지럽게 사랑한다, 어쩐다, 이런 말이 아닐지라도 그냥 딱 한번이라도 좋으니 민호가 먼저 표현을 해줬으면 좋겠다.


  “땅이 다 꺼지겠다, 토미. 무슨 일이야?”

  “좋아하는 사람한테 좋아해, 라고 듣는 일이 이렇게 어려운 일인 줄 알았나.”

  “그거야 당연하지.”

  “…당연하거야?”

  “애초에 우리가 어느 계집애들이랑 연애하는 줄 알아?”


  거기다 네 상대는 그, 민호라고. 뉴트의 지적 아닌 지적에 토마스는 더욱 큰 한숨을 쉬었다. 어지럽게 꼬인 토마스의 속과는 달리 글레이드의 날씨는 화창하기만 했다. 그걸 보자 속이 더 꼬이는 것 같았다.


  “나는 몇 번이라도 해 줄 자신 있는데….”

  “나도.”


  토마스의 옆에 다리를 모으고 앉은 뉴트는 주위에 널려있던 꽃과 풀을 꺾어 엮기 시작했다. 의외로 손재주가 좋은 뉴트는 금세 그럴듯한 화환을 만들어냈다.


  “너나 나나 무슨 고생이냐.”


  어린아이처럼 웃는 뉴트의 모습에 토마스는 뉴트의 쪽으로 몸을 돌려 뉴트가 하는 것을 똑같이 따라했다. 뉴트는 제 것을 만드는 와중에도 토마스에게 이것저것 가르쳐주었다.


  “이런 거라도 선물할까.”

  “그러다가 미로로 쫓겨날지도 몰라.”

  “역시 그럴까.”


  토마스는 울상을 지으면서도 계속 손을 꼬물딱, 꼬물딱 움직였다. 뉴트는 그런 토마스를 보며 뭐가 그렇게 웃긴지 웃음을 멈출 줄 몰랐다. 척한테 줄까, 뉴트에게 잠깐 배운 솜씨로 금세 그럴듯한 화환을 만든 토마스는 그래도 고맙다고 한마디라도 해줄 척의 얼굴에 웃음이 나왔다.


  “뭐하냐?”

  “으악!!”


  뒤에서 들린 목소리에 깜짝 놀란 토마스는 그대로 손에 들고 있던 화환을 던져버리고 말았다. 아차, 싶어 하늘로 높이 날아간 화환을 바라보던 토마스는 제 손이 닿기도 전에 민호가 그 화환을 잡아채는 것을 똑똑히 보고는 경악했다.


  “너도 뉴트 따라하냐? 애한테 이상한 거 가르치지 마, 뉴트.”

  “내가 뭘.”

  “아니, 그….”


  민호는 토마스를 흘끗 쳐다보더니 손에 쉬고 있던 화한을 토마스의 머리 위에 올려놓았다. 다행히 모자란 감은 없이 들어가는 화환을 보던 민호는 슬쩍 웃으며 토마스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뭐, 나쁘진 않네.”


  그러고는 뒤를 돌아 가버리는 민호를 보며 뉴트 또한 조금 당황한 모양인지 토마스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나 쟤 저러는 거 처음 봐.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토미?”


  뉴트를 돌아본 토마스는 입에 풀칠이라도 한 건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 자리에 못이 박힌 듯 붙어있었다. 그런 토마스의 심정을 이해하기라도 한다는 듯 뉴트가 고개를 젓더니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좋겠다? 좋아하는 사람한테 애정표현도 받고?”

  “나 지금 꿈 속인거지? 그치?”

  “정신 차려, 토미. 그거 하나 가지고 기절까지 하면 남자 체면이 뭐가 되냐!”


  이미 저 멀리 날아가고 있는 정신 줄을 제대로 잡지도 못한 채 토마스는 미친 듯이 주변에 있는 꽃들을 꺾기 시작했다. 야, 이 미친놈아, 하는 뉴트의 목소리에도 굴하지 않았다. 토마스는 자신의 얼굴이 쉽게 붉어지지 않는다는 점이 오늘에서야 천만다행인 것처럼 느껴졌다.


  그 날 저녁, 좀 피곤했던 민호는 일찍이 해먹에 몸을 뉘였다. 쉴 때만큼은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도록 해주자는 글레이더들의 배려로 민호는 가장 안전하고, 가장 조용한 곳에서 쉴 수 있었다. 금방이라도 잠에 빠질 것 같아 가만히 눈을 감은 민호는 금세 잠에 빠져들었다. 한 번 잠에 들면 다음 날 아침까지는 쉽게 깨지 않으려고 하는 민호는 잠결에 바스락 거리는 소리를 들어도 굳이 눈을 뜨려하지 않았다. 아까운 수면시간을 방해받고 싶지 않았다.

  딱히 누군가가 깨워준 게 아니어도 매일 새벽 똑같은 시간에 일어난 민호는 몸을 일으키자마자 피부에 닿는 간지러운 감촉에 눈을 비볐다.


  “…미친.”


  해먹 가득 제 몸 위에 뿌려진 꽃과 꽃잎들에 민호는 바람 빠진 웃음을 흘렸다. 글레이드의 들판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작고 아기자기한 꽃들이 민호가 몸을 움직일 때마다 따라다녔다.


  “귀여운 짓 하기는.”


  결국 크게 웃음을 터트린 민호는 자리에서 일어나 최대한 조심스럽게 꽃을 털었다. 가장 크고 예쁜 꽃을 셔츠 앞주머니에 보기 좋게 꽂은 민호는 그대로 해먹 가득 뿌려진 꽃을 양손 가득 안아 들었다. 서둘러 민호는 목적지로 가는 발걸음을 더욱 빨리했다. 목적지에 도착한 민호는 비장한 듯, 그 앞에 섰다.


  “야.”

  “……. 민호?”


  잘 자다가 자신을 부르는 민호의 목소리에 눈을 뜬 토마스는 느릿느릿 눈을 비비며 몸을 일으켰다. 어느 정도 시야가 깨끗해지자 토마스는 민호를 올려다보고는 할 말을 잃어버렸다. 양손 가득 꽃을 가득 안고 있는 그의 모습은 토마스의 말을 빼앗아 가기에는 충분하고도 남는 것이었다.


  “잘 잤냐?”

  “어, 어….”

  “선물이다.”


  민호는 양손 가득 안고 있던 꽃을 토마스에게 떨어트렸다. 들판에 핀 꽃이란 꽃은 다 꺾어가지고 온 건지 한참을 떨어지는 꽃을 보며 민호는 토마스가 봤던 그 어떤 미소보다 환하게 웃어보였다.

 

  “깼으면 빨리 빨리 움직여, 곧 문이 열릴 거야.”


  뒤돌아가는 민호의 모습에 토마스는 지금 당장 온 동네방네 소리를 치며 뛰어다니고 싶은 심정이었다. 잘 됐네, 하며 웃어 보이는 뉴트를 한 번 끌어안아주고는 서둘러 민호의 뒤를 쫓아가는 토마스의 옷에서 작은 꽃잎들이 떨어져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