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파에서 몸을 일으킨 브랜트는 찌르르, 울리는 허리의 통증에 인상을 찌푸렸다. 어제 새벽 내내 밀린 서류 작업을 하느라 2시간 남짓 밖에 잠을 못 자 머리가 한 대 맞은 것처럼 어지러웠지만 브랜트는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야만 했다. 1시간도 안 돼서 출근을 해야하는 입장이니 서둘러 준비를 마쳐야했다. 커피라도 한 잔 마셔야지, 아니면 오늘은 절대로 버티지 못할 것 같아 브랜트는 서둘러 물을 끓였다. 평소 브랜트는 커피를 즐겨마시지는 않았다. 유독 카페인이 몸에 잘 받는 타입인지라 아주 조금만 마셔도 그 날 밤에는 잠을 못 자는 경향이 있었는데, 정말 오늘은 어떻게 해서든 눈을 뜨고 서 있어야했기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하기로 마음 먹었다.

딱 죽을 거 같아 잠깐 눈을 붙이자 하고 잔 것이 새벽 4시 20분쯤이었던 거 같은데. 형편없이 구겨진 셔츠가 참 볼만했다. 브랜트는 간단하게 인스턴트 커피 3개를 머그컵에 붓고는 적당히 설탕을 조절해 끓인 물에 섞었다. 썩 고급스러운 커피는 아니었지만 맛깔스러운 색의 인스턴트 커피의 향도 지금의 브랜트에게는 이름있는 원두향 저리가라 할 정도였다. 원래 싸구려 와인도 분위기에 따라 억소리가 나오는 고급스러운 와인이 될 수 있는 것처럼, 브랜트는 마인드 컨트롤을 하며 커피를 마셨다.


"푸흐-"


브랜트는 다시 소파로 발걸음을 돌리던 중 펼쳐진 눈 앞의 절경에 무심코 소리내어 웃었다. 잠자는 곳 만큼은 어느 부유층의 집만큼이나 남부럽지 않을 정도로 아침에 따스한 햇빛이 절로 드는 침대 자리, 새하얀 이불을 몸에 감고서 잠들어 있는 이단의 모습을 보며 브랜트는 커피를 호로록 마셨다. 브랜트는 어슴푸레한 새벽녘, 먼지를 가득 뒤집어 쓰고 온 그의 모습을 기억해냈다. 여유롭게 샤워까지 마친 이단이 침대에 앉아 책을 읽던 것 까지는 기억하는데. 아마도 소파에 누워 기절한 자신에게 이불을 가져다 준 것은 이단일 것이다. 마땅히 갈아입을 만한 옷이 없어 속옷 차림으로 잠을 자고 있는 이단을 보며 브랜트는 꽤 괜찮은 그림을 선사해 준 그의 모습을 조용히 감상했다. 모름지기 이 세상은 아름다운 것들은 보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다. 브랜트는 꽤 눈이 높은 편이다. 순전히 그 때문에.


출근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도 까맣게 잊어버리고, 절묘하게 햇빛이 잘 드는 자리에 누워 있는 이단의 모습을 감상하려던 찰나, 불쑥 솟아오르는 이불을 보며 브랜트는 더욱 짙은 미소를 지었다. 새하얀 이불 사이로 쏙 얼굴을 내밀고 야옹, 하며 우는 적당히 몸집이 있는 고양이의 모습에 브랜트는 가만히 커피잔을 내려놓고는 두 팔을 뻗었다. 금방 침대에서 뛰어내린 고양이는 얼른 브랜트의 품으로 달려들었다. 그새 더 컸네. 품 안을 가득 채운 든든한 무게감에 브랜트는 조만간 아이를 데리고 산책을 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잘 잤어, 로이?"


야옹, 작게 우는 고양이의 이마에 입을 맞춘 브랜트는 한 팔에 고양이를 안고, 한 손에는 커피잔을 들고 조심스럽게 침대로 다가갔다. 브랜트는 새삼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에 자신이 있음에도 너무 평화롭게 자는 이단의 모습에 감탄했다. 브랜트가 알고 있는 이단은 이렇게까지 틈이 많고, 허술한 사람이 아니었다. 지금 당장이라도 브랜트가 손을 뻗으려 하면 그 손을 잡아채 자신을 제압할 수 있을 정도의 능력이 있는 사람이었다. 다른 말로 하면 꽤 피곤한 능력이긴 하지만. 그러나 놀랍게도, 이단은 자신의 집에서 잘 때에는 그런 모습 따위는 다 헛소리라는 듯 숨만 쉬며 잠을 잤다. 그렇게 아옹다옹, 마주치면 싸우기 바쁜 로이가 그의 품에서 자는 와중에도. 

브랜트의 품에 얌전히 안겨 있던 로이가 얼른 이단의 얼굴로 뛰어내렸다. 이크, 아프겠다. 브랜트는 슬쩍 미간을 찌푸렸다. 이상하게 로이는 이단에게 불친절했다. '절대로 이단이 네 자리를 차지할 일은 없을거야, 로이.' 하며 달래도 소용이 없다. 브랜트는 그것이 약간의 동족 혐오가 아닐까, 라는 생각도 했다. 동물의 왕인 사자도 엄연히 따지고 보면 고양이과니까. 억, 소리를 내며 잠에서 깬 이단은 자신의 얼굴에 떡하니 앞발을 올리고 있는 고양이 한 마리를 보며 웃음을 터트렸다. 


"좋은 아침."


꽤 깊은 단잠을 방해한 고양이를 두 손으로 번쩍 들어올린 이단은 샛노란 아이의 눈을 유심히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로이가 이단을 못마땅해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단은 꽤 로이를 좋아했다. 그러니 아무리 로이가 이단을 싫어하는 티를 내어도 잠을 잘 때는 그의 곁에서 자고는 하니. 그걸 보고 이단은 로이의 성격이 브랜트를 닮았다했고, 브랜트는 코웃음 쳤다. 그래, 뭐. 애완동물은 주인을 닮는다잖아.


"좋은 아침."


방 안에는 브랜트가 커피를 마시는 소리와 함께 야옹, 하며 우는 고양이의 목소리만이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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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친하다 한들, 서로의 앞에서 웃옷을 깔 일이 얼마나 있을까. 그래도 어쩌다 한 번, 임무 중에 옷을 갈아입어야 할 때가 종종 생기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그들은 매우 거리낌없이 행동하였으나 단 한 사람, 브랜트만은 유독 그 분위기에 섞이는 것을 꺼려했다. 천하의 윌리엄 브랜트가 낯을 가리나, 라는 우스갯소리가 나올만큼. 


벤지는 처음 이단의 벗은 몸을 보고 온 날 '이 세상은 불공평해'라며 하루종일 불만에 가득차 있었지만 이제는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다. 벤지에게서 들은 묘사는 대략 이렇다. 신이 있다면 이단 헌트라는 조각상을 잘 빚어 놓았단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어떠한 말로는 다 설명할 수 없는 아름다운 피조물이라나 뭐라나. 하긴. 브랜트는 그 말에 동의했다.





그러던 어느 날, 벤지는 봤다.


"...브랜트?"

"...봤어?"


벤지는 순간 온 몸에 소름이 쫙 돋는 기분이 들었다. 으슬으슬할 정도로 브랜트의 목소리는 냉정하기 그지 없었다. 브랜트는 옅게 웃으며 말했다.


"비밀이다."

"어, 어."


브랜트는 꽤 개구진 미소를 지으며 탈의실을 나섰고, 벤지는 자신이 본 게 헛것은 아니었나 싶을 정도로 정신이 없었다. 하지만 곧, 벤지의 머릿속에 뚜렷하게 하나의 그림이 그려지기 시작했다. 벤지는 지금 당장에라도 본부를 뛰어다니며 소리치고 싶을 정도였다. 왜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는 말이 생겼는가. 벤지는 브랜트가 왜 다른 사람들과 탈의실을 같이 쓰기 꺼려하는 지에 대해 아주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으나, 그게 숨길 정도의 일인가 다시금 생각해볼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그 날, 무심코 데이터베이스에 돌린 브랜트의 것은 어마어마한 이름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그 즉시 입을 다물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브랜트의 등, 정확히는 날개뼈에서부터 골반까지 화려한 날개를 가진 독수리 한 마리가 새겨져 있었다. 한 쪽 날개는 접은 채, 다른 쪽 날개를 펼친 독수리는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날카로운 기세를 뽐내고 있었다. 평소의 브랜트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것이었지만, 그가 현장에서 총을 갈길때와는 흡사한 형상이었다. 중요한 것은 독수리가 그려져 있다는 사실이 아니다. 그 독수리 문신이 뜻하는 것에 아주 큰 의미가 있었는데, 한 때 엄청난 조직력을 자랑하던 마피아 집단의 상징이었다. 


벤지는 브랜트가 그 집단에 속해있었단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누가 뭐래도 브랜트는 지금 IMF에서 국가를 위해 헌신적으로 일을 하고 있는 요원이 아닌가. 그런 그가, 한 때 뒷세계의 대표적인 선두 주자 집단의 일원이었다니. 사람에게는 누구나 과거가 있는 법이라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벤지는 브랜트가 그럴만한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 조직은 악명높기로 유명한 폭력적인 조직이었다. 마피아보다는 살인청부조직에 가까웠을지도 모른다는 말이 오고 갈 만큼. 그러나 섣불리 그것을 물어볼만한 재주는 없었다. 브랜트는 그 사실 자체를 숨기고 싶어하는 듯 했으니 말이다. 음, 아마도.





"벤지가 거기서 들어올 줄은 몰랐는데."

"걱정 마, 벤지라면 아무한테도 말 안할테니까."


이단의 손이 닿은 등이 화끈하게만 느껴졌다. 장난스럽게 셔츠 사이로 파고든 손은 퍽, 뜨거웠다. 브랜트는 꽤나 짖궂게 웃고 있는 이단의 입꼬리를 일부러 손으로 쭉 잡아 올렸다. 그 잘생긴 얼굴이 약간 우스워지는 덕에 기분이 한결 나아지는 것 같았다. 


"너무 신경쓰지마, 브랜트."

"그래도."


브랜트는 자신의 등에 자리를 잡고 있는 한 마리의 독수리를 꽤나 못마땅해했다. 브랜트가 이제 막 성인이 되었을 적, 억지로 새겨진 문신은 지울 수 없는 상처와 비슷한 것이었다. 몸집이 더 커지고, 근육이 붙어 우스꽝스러워질 줄 알았던 독수리는 되려 더 사나워지고 날카로워졌다. 그러나 브랜트는 애써 그 문신을 억지로 지우려 하지 않았다. 이단이 그것을 꽤 마음에 들어했기에. 지금도 꼭 기회만 되면 그 문신 위에 입을 맞추는 이단을 보며 악취미라 놀린 적도 있지만 브랜트는 진심으로 싫다며 이단을 밀어내지는 않았다. 


"나도 할까?"


뜬금없는 이단의 말에 브랜트는 터져나오는 웃음을 애써 막으려 하지 않았다. 이단 헌트와 문신이라. 진짜 안 어울리네. 브랜트는 한참을 웃다 겨우겨우 이단의 콧등에 입을 맞추며 말했다.


"아니, 맨 살이 좋아."


이상하게 네 피부는 부드럽거든. 그것도 신이 주신 선물인가봐? 완벽한 피조물씨. 약간의 비웃음도 섞여 있는 브랜트의 말에 이단은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브랜트는 아주 약간, 이단이 재수없게 느껴졌지만, 어쩌랴. 사실인걸. 


"아무튼, 난 마음에 들어."


이단은 늘, 브랜트에게 그렇게 말했다. 매일같이 브랜트의 등에 입을 맞추며 말했다. 그럴때마다 브랜트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브랜트는 그것이 이단의 위로라는 것을 안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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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임 5 스포 있음





1.

솔로몬 레인이 자유를 되찾았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 IMF, 특히 이단 헌트는 폭발하기 일보 직전이었으나 그는 이성적으로 그 상황을 참아내었다. 그는 화를 내는 대신 아무리 해도 이해를 할 수 없다는 얼굴로 브랜트를 바라보았다. 브랜트의 얼굴은 굉장히 무미건조한 채라, 이단은 그의 생각을 도저히 읽어낼 수가 없었다.


"브랜트."

"그만."

"......"

"이 문제에 대해서는 더 이상 언급을 하지 않기로 결정한 거 아니었던가, 미스터 헌트?"


이단은 브랜트가 자신에게 확실하게 선을 긋고 있다는 사실이 못내 아쉬웠다. 둘도 없는 친구사이가 됐다가도 그는 단 한 번에 자신을 타인의 영역으로 내몰았다. 브랜트가 말한 것은 엄연한 사실이었기에 이단은 입을 다물었다. 그렇지만 여전히 그를 이해할 수 없었다. 브랜트는 왜 그런 선택을 해야만 했는가. 이단은 그 문제가 레드박스보다 더 풀기 어려운 것이라 생각했다.





2.

한 번 사라져버린 조직을 다시 세우는 것은 여간 쉬운일만은 아니었다. 그 일의 주축이 된 사람은 다름아닌 브랜트였다. 그는 적극적으로 헌리를 보좌해 다시금 IMF를 재건하는데 막대한 공을 세운 사람이었다. 조직을 떠난 유능한 요원들을 다시 불러모으고, 수만건이 넘는 온갖 자료와 서류 정리를 도맡아했으며 벤지와 루터를 주축으로 완벽한 보안 시스템을 이루기 위한 모든 작업을 지휘했다. 한 때 CIA의 국장이었던 헌리도 그 이름이 무색하지 않게 IMF 재건에 힘썼다. 그리하여 IMF는 사라져버린지 8개월만에 다시금 그 위치를 새길 수 있었다.

그 때쯤, 브랜트는 이미 모든 이들의 신임을 받는 부국장 자리에 올라있었다. 국장인 헌리는 두 말할 것도 없이, IMF의 중요 안건과 최고 보안 등급의 정보들이 모두 그의 손을 거쳤다. 벤지는 왠지 모르게 브랜트와의 거리감이 생긴 것 같다며 불만이라며 투덜거렸으나 브랜트는 그 바쁜 와중에도 그들의 팀에게 헌신적이었다. 신디케이트를 확실하게 없애버리기 위한 잔당 소탕의 현장 리더는 이단 헌트였으며, 사령탑은 윌리엄 브랜트였다. 그들은 늘 이러한 구조로 움직였다. 열 번 중 여덟번의 꼴로 브랜트가 이단에게 거친 폭언을 퍼붓기는 했지만 결과적으로 이단의 모든 행동에 승인을 내린 것은 브랜트였다. 헌리는 기가 막힐 정도였으나 브랜트를 보며 믿기로 했다.


IMF는 항상 태풍의 눈에 위치해있었다. 아주 좀만 바깥으로 발을 내딛으면 금방이라도 거센 폭풍에 휩쓸리고는 했다. 브랜트는 설마 신디케이트 이후에 뭐 더 얼마나 큰 태풍이 있겠냐고 생각한 자신을 매우 한심하게 여기고 싶었다.


"...솔로몬 레인."


브랜트는 절망했다. 지금의 브랜트에게는 그가 너무나도 절실하게 필요했다. 빌어먹을. 브랜트는 자신의 앞에 놓인 이 불합리하고 부정적인 상황에 머리가 아팠다.





3.

"미쳤어?"


테이블을 내리치며 성을 내는 이단을 보며 브랜트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아주 태연한 얼굴로 서류를 넘겼다. 그가 들고 있던 서류에는 솔로몬 레인에 관한 모든 프로필이 상세하게 적혀져 있었다. 이단은 그런 브랜트의 태도가 몹시 마음에 들지 않았다. 지금 당장이라도 브랜트의 손에 들린 서류를 빼내어 갈갈이 찢어버리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다.


"브랜트, 아무리 그래도 그건 너무 위험해."

"절박한 상황에는 극단의 조치도 필요한 법이잖아."


브랜트는 그렇게 말하며 부러 이단을 바라보며 비죽였다. 그 시선은 마치 항상 네가 그랬듯 말이야, 라고 말하는 것 같아 말문이 막혔다. 


"그렇게 절박한 상황은 아니잖아. 얼마든지 우리끼리 할 수 있는 일이야."

"그건 너만 그렇게 생각하는거야. 지금 몇 주 째 계속 허탕만 치고 있다는 거 알아? 그는 신디케이트의 수장이었어. 그러니까 누구보다 신디케이트에 대해 잘 아는 건 레인이야. 그리고 망할, 장부! 계좌만 잔뜩 있는 줄 알았더니 그들의 프로필이나, 아지트의 위치 등 모든 것이 담겨 있었잖아. 그걸 없애버린 건 우리고."


후, 벤지는 무거운 한숨을 내뱉으며 이단과 브랜트의 눈치를 봤다. 이단의 말도, 브랜트의 말도 다 맞는 말이었다. 이제와 옳고 그름을 따지려고 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제일 어리석은 짓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는 그들이었다.


"그리고 오해할까봐 덧붙이는데, 벤지 네 탓이 아니니까 혼자 땅 파려고 하지마."


벤지는 브랜트의 말에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솔로몬 레인에 대한 모든 책임, 권한, 감시는 전부 내가 맡기로 했어. 정해진 구역 이상으로는 발걸음도 하지 못할 거고, 내 목숨도 소중하니까 나를 보좌해줄 현장요원들도 항시 대기하고 있을거야. 그가 현장으로 나설 일은 절대로 없어. 누가 뭐래도, 현장은 오로지 네 거야."

"그가 협력을 할 거라고 생각해?"

"한다고 했어."

"...뭐?"


이번에야말로 이단은 솟구치는 화를 참지 않았다. 브랜트의 손에서 거칠게 서류를 빼낸 이단은 그대로 바닥으로 내던져버렸다. 클립이 빠지면서 바닥에 흩뿌려지는 하얀 용지들을 보며 브랜트는 초지일관 무표정으로 이단을 마주봤다.


"그 녀석이랑 만나고 왔다고."

"그래."

"그걸 나한테는 말하지도 않았고."

"네가 이럴 줄 알았으니까."

"윌리엄 브랜트!!"


이단의 노성에 브랜트는 숨기지 않고 가볍지 않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미스터 헌트. 부국장의 권한으로 말하는데 그만 물러나."

"...!"

"현장에서는 네가 보스일지 몰라도, 여기선 내가 네 보스야. 그러니 좋은 말로 할 때 물러나."


그러나 브랜트 또한 그 방법까지는 쓰기 싫었다는 듯 노골적으로 불쾌한 기색을 드러내며 바닥으로 떨어진 서류들을 주워담았다. 이단은 브랜트가 모든 서류를 다 주울 때 까지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이 이야기는 오늘 여기서 다 끝난거야. 더 이상의 언급은 자제하도록 해. 최고 보안등급의 범죄자가 제한적이지만 자유를 갖게 되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여기 있는 우리와 국장님이 전부여야만 할 거야. 내가 무슨 말 하는 지 알지?"


브랜트는 옅게 웃으며 회의실을 나갔다.





4.

아무것도 없이 적당한 크기의 테이블만 있는 방 안에서 솔로몬 레인을 기다리고 있던 브랜트는 숨통이 죄이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날카로운 물건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지만 그는 흡사 이단 헌트와 비슷한 사내였다. 손에 집히는 것이 있다면 뭐든 무기로 쓸 수 있다는 사실에 잔뜩 긴장감이 몰려온 터라 벌써부터 온몸이 피곤했다. 그러나 브랜트는 자신의 상태를 절대로 그에게 노출시켜서는 안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방심할 수 없는 남자다. 그러나 브랜트는 애석하게도 그가 반드시 필요했다.


"이런, 이게 누구신가."

"정식으로 인사하는 건 처음이겠군요, 반갑습니다."


레인은 그런 브랜트를 보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프로답게 구는 것은 좋지만 그냥 솔직하게 행동하는 게 더 편하지 않은가, 부국장?"

"어쩌겠어. 보는 눈이 많으니 익숙해져 버린 것을."


브랜트의 얼굴에 한 순간 스친 수심을 레인은 모른척 해주기로 했다. 그게 그에 대해 자신이 보일 수 있는 최소한의 예의였으니. 


"자네의 판단이 현명한 것이라고 생각하나?"


브랜트는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레인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솔로몬 레인의 표정은 그 누구도 읽을 수 없을 것 같다는 사실을 깨달았으나 그렇다고 주눅 들 브랜트가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브랜트에게 있어 이 선택은 가장 합리적이고 효율이 큰 선택이었다. 그만큼 위험 부담이 크다는 것도 물론 인지하고 있는 사실이었다.


"이번에는 유리 상자에 갇혀서 잠드는 걸로 끝나지 않을거야."


브랜트의 말에 레인이 미소 지었다. 브랜트는 그 미소를 애써 무시했다.





5.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것은 솔로몬 레인이 무척이나 협조적으로 군다는 것이었다. 브랜트가 레인을 꺼내왔을 때부터 IMF는 한시적 최고 위험등급 보안 상태에 머물러야만 했다. 브랜트가 레인에게 건 협상 조건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심지어 국장인 헌리도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설마하니 레인에게 완전한 자유를 약속했을까. IMF의 모두가 브랜트는 그렇게 멍청하지 않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었기에 그를 믿을 수 밖에 없었다.


이단은 굳게 닫힌 보안문 앞에 섰다. 바로 이 문 너머로 브랜트와 레인이 한 공간에 숨쉬고 있었다. 문 앞에는 만약을 대비한 요원이 서넛은 배치되어 있었고 이단이 알고 있기로는 안에도 그 정도의 인력이 배치되어 있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단은 순간적으로 곤란해하는 요원들의 표정을 잡아내었다. 설마, 아니겠지. 이단은 당장 그 문을 열라 소리쳤고, 그들은 이단에게 문을 열어주었다. 3중으로 걸려있는 보안장치를 이단 헌트의 이름으로 해지를 하고서야 안으로 들어선 순간, 이단은 뒷통수를 세게 얻어맞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 소란스럽게 방 안으로 들어온 이단을 보며 레인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브랜트는 꼼짝도 하지 않고 의자에 앉아있었다. 레인의 것으로 보이는 자켓을 덮고서. 이단은 눈 앞에 펼쳐진 상황을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레인과 브랜트를 번갈아봤다. 


"대체 사람을 얼마나 굴려먹으면 이러겠나."


이단은 마치 레인이 자신을 향해 비판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 순간, 참을 수 없이 화가 치밀었다. 성큼성큼 브랜트에게 다가간 이단은 다짜고짜 브랜트의 팔을 잡아당겼다. 그 순간, 화들짝 놀라 잠에서 깬 브랜트는 자신의 팔을 부숴지도록 쥐고 있는 이단의 모습에 얼굴이 잔뜩 일그러졌다.


"이단, 윽, 이거 놔! 진짜 부러지겠다고!"

"너는, 대체...!!"


바닥에 떨어지는 레인의 자켓을 보며 브랜트는 할 말이 없다는 듯 입을 다물었다. 이단은 서둘러 브랜트를 데리고는 방 안에서 빠져 나갔다. 두 사람이 빠져나갈 때까지 레인은 아무 말 없이 그 자리에 가만히 앉아있었을 뿐이었다. 순간적으로 방을 나가는 이단과 눈이 마주친 레인은 아주 태연한 얼굴로 바닥에 떨어진 자신의 자켓을 주워들었다. 자신을 잡았던 날, 그 날 보다 더한 살기에 레인은 옅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등골이 다 서늘할 지경이었다.


얼떨결에 방 밖으로 끌려나온 브랜트는 있는 힘껏 이단의 팔을 뿌리쳤다. 비록 옷에 가려 보이지는 않았지만, 브랜트는 분명 다음날 팔에 멍이 들 것이라 확신했다. 그러나 브랜트는 쉽게 이단에게 화를 내지 못했다. 명백히 자신의 잘못이라는 것을 인지하고 있다는 사실부터가 충분히 그의 화를 살 만한 행동이라 생각했다.


"윌리엄 브랜트, 너 진짜 미쳤어? 그 녀석이 누군 줄 알고!!"

"...미안해."


오늘따라 유난히 머리가 아프고 몸이 무겁다는 사실을 알았으나, 브랜트는 꿋꿋하게 IMF로 출근도장을 찍었다. 그를 기다리는 일은 많았고, 시간은 적었다. 거기에 솔로몬 레인이라는 아주 막중한 일까지 브랜트의 어깨에 올라와 있으니, 요 며칠 제대로 먹지도 자지도 못한 것이 사실이었다. 그랬어도, 이단의 말은 다 맞는 말이었다. 한 순간의 방심도 내보이면 안되는 상대 앞에서 잠을 잘 줄이야. 브랜트는 다른 의미로 제 목이 날아가지 않은 사실에 감사했다. 그러나 한 순간, 브랜트는 방 안에 남아있는 레인에 대해 생각했다. 그는 태연하게 잠든 자신에게 아무런 짓도 하지 않았다. 할수만 있다면 자신을 인질로 잡고 이 곳에서 빠져나갈 생각을 해볼 수도 있을 터였을텐데. 


"그만해."

"뭐?"

"이 짓, 뭐든 그만하라고. 다시 레인을 돌려보내!"

"이단!"

"오늘 네가 이러고 있는 꼴을 내가 봤는데 이 일을 계속하게 냅둘거라는 생각이 들어?"


순간 브랜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브랜트는 자신이 하고 있는 일에 대해 이런식으로 개입하려는 이단이 못미더웠다. 브랜트는 자신의 능력을 의심받는 것을 몹시도 싫어했다. 그것이 자신이 믿어 의심치 않는 아주 소중한 사람에게서라면 더더욱. 이제껏 받아왔던 그 어떠한 스트레스보다 이단이 제게 선사한 것이 너무도 커 브랜트는 말문이 막혔다. 그러나 곧, 브랜트는 참지 않고 진심으로 화를 내었다.


"네가 뭔데 나한테 이래라 저래라야."

"브랜트!"

"내가 그렇게 등신으로 보여? 네가 하라고 하면 하고, 말라면 말아야 하는 네 개냐? 적어도 이단, 난 너를 무슨 일이 있어도 믿었어. 이제껏 단 한번도 나를 배신하지 않는 결과를 보여줬으니까! 그런데 너는 나에 대한 눈곱만큼의 신뢰도 없어? 내가 너한테는 아무것도 보여줄 능력도, 뭣도 안되는 사람이야?"

"나는 네가-!"

"망할, 이단! 나는 네가 걱정해야할 일곱 살 짜리 어린아이가 아니야!!"


브랜트의 고함에 지나가던 요원들이 하나 둘 그들의 쪽으로 시선을 모았다. 평소 미션을 수행할 때도 브랜트가 이단에게 화를 내는 것은 비일비재한 일이었으나 이처럼 본부 안, 모든 사람이 보는 곳에서는 단 한번도 브랜트가 먼저 이단에게 큰 소리를 한 적이 없다는 사실을 아는 그들의 얼굴에 걱정이 서렸다. 


"이 일에 대해서는 다시는 꺼내지마."

"......"

"명령이야, 미스터 헌트."





6.

"한숨 자고 나면 괜찮을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보군,"


레인이 있는 방 안으로 들어온 브랜트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두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감쌌다.


"그래서, 왜 아무짓도 안 한건데?"

"글쎄. 자네가 조금 마음에 들어서일지도 모르지."

"뭐?"

"말 그대로라네. 이 중에서 나와 가장 비슷한 사람은 자네니까."


브랜트는 가만히 레인의 얼굴을 살폈다. 여전히 그의 표정은 읽기가 어려웠다. 따지고 보면 브랜트는 마지막 남은 실오라기라도 쥐어보고자 레인을 찾아갔었다. 브랜트에게는 그만큼 절실하게 레인의 도움이 필요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이단을 위해서. 허탕을 치는 횟수가 많아질수록 이단과 벤지가 위험에 노출되는 속도는 급격해졌다. 브랜트는 폭주하는 열차를 멈춰야만 했다. 이 상태가 계속되다가는 이번엔 정말로 이단을 잃을지도 모른다. 물론 이것은 다른 누구에는 절대로 한 적이 없는 이야기였고, 오로지 브랜트의 마음 속에만 묻어둔 사실이었다. 그런 브랜트를 보며 레인이 내뱉은 첫 마디는 '이단 헌트'를 위해 왔는가, 였다. 브랜트는 말문이 막혔다. 그러나 레인은 그 이상으로는 묻지 않았고 아무런 조건을 내걸지도 않은 상태에서 협력을 수락했다. 브랜트는 헛웃음을 지었다.


"그래서 옆에서 지켜보는게 즐거워서 협조하겠다고 했어?"

"이 자리가 특등석이긴 하더군."


레인의 말에 브랜트는 어깨를 으쓱여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브랜트는 그가 전 신디케이트의 수장이 아닌 평범한 영국 CIA의 요원이었다면 지금보다는 덜 살벌하게, 어쩌면 꽤 잘 지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나한테 잘 보여도 널 완전히 자유롭게 해줄 수는 없어, 레인."

"그건 바라지도 않았네."

"...그래."


브랜트는 레인이 표시해준 지도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7.

순조로운 협력 덕에 신디케이트의 잔당 소탕은 수월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드물게 이단과 브랜트가 서로 고함을 지르며 싸웠다는 소문이 암암리에 IMF에 퍼졌지만 두 사람은 매우 프로페셔널하게 작전에 임했다. 두 사람을 잘 아는 벤지와 루터만이 살얼음판에서 까치발을 들고 서 있는 것 같아 숨이 막혔다. 브랜트의 옆에는 레인이 있었다. 현장에 나가지 않은 벤지는 같은 공간에 레인이 있다는 그 사실이 못마땅했지만, 레인이 지시한 루트에는 그들의 적이 있었고 임무는 훨씬 안전하게 진행되었다. 


브랜트는 카메라로 전송되는 화면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시선의 끝에는 이단이 서 있었고, 브랜트는 마른 침을 삼켰다. 이 일만 마무리 되면, 모쪼록 48시간은 아무의 방해도 받지 않고 자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다. 브랜트의 진입 신호에 맞춰 적의 기지를 급습한 IMF의 임무는 매우 성공적으로 마무리 되었다. 온갖 폭력과 피가 난무하는 카메라 화면에 비위가 상할 법 했지만 브랜트는 화면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미션이 마무리됐음을 알리는 이단의 목소리에 브랜트는 순간적으로 자신을 덮쳐오는 고통에 숨을 헐떡이며 쓰러졌다. 


"브랜트!"


다급한 벤지의 목소리가 들렸으나, 브랜트는 그것이 마치 환청처럼 들렸다. 주체할 수 없이 몸이 떨려왔고, 숨이 가빴다. 산소가 부족해 생각처럼 몸이 움직여주지 않았다. 끅끅거리며 우는 목소리가 자신의 것인지조차 가늠이 되지 않았다. 쿵쾅거리며 요동치는 심장소리가 고막을 찢어버릴 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순간, 브랜트는 자신의 등을 두드리며 서류 봉투를 입가에 대주는 레인 덕에 점차 가파른 숨을 차분하게 들이쉬고 내쉬었다. 어느정도 진정이 되었으나 꼼짝도 할 수 없는 브랜트의 몸을 일으킨 것 또한 레인이었다. 


"...고마워."

"자네가 잘못되면 이번에야말로 에이전트 헌트에게 살해당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거든."


브랜트는 웃음을 터트렸다. 인이어에서 다급하게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가 꼭 꿈 같았다.





8.

반짝, 브랜트는 아무일도 없던 것처럼 눈을 떴다. 전신을 푹신하게 감싸는 시트나 이불의 촉감이 너무 마음에 들어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이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흉기는, 피곤할 때의 이불이지. 브랜트는 쓸데없는 생각을 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다 도깨비 같이 어마어마한 얼굴을 하고서는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이단과 눈이 마주친 순간 브랜트는 신음했다.


"안녕, 이단."

"......"

"......"

"...그래, 안녕."


브랜트는 지나치게 무거운 이단의 침묵에 가까스로 돌려놓은 호흡이 다시 흐트러지는 것은 아닌가 생각해야만 했다. 임무 도중 과호흡으로 인해 혼절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 실은 브랜트도 많이 당황한 것이 사실이었다. 쓰러지기 직전까지만 해도 레인이 있었던 것 같았는데. 그러나 브랜트는 굳이 이단의 앞에서 그의 이름을 꺼내지 않기로 했다. 이단은 레인의 존재를 단호하게 거절하고 있었다. 그 점은 조금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어찌됐든, 브랜트는 그들이 꺼려했던 인물을 이용했으니 말이다.


"임무 성공, 축하드립니다. 미스터 헌트."


분위기를 풀어보고자 좀 기쁠만한 이야기를 꺼냈지만 이단의 표정은 풀어지는 법이 없었다. 브랜트는 슬슬 자신도 한계가 왔다는 사실을 자각했다. 이럴때는 벤지가 있었으면, 하고 간절하게 바랬지만 안타깝게도 벤지는 없었다. 브랜트는 가까스로 몸을 일으켜 세웠다. 할수만 있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침대에서 벗어나 저 멀리 보이는 문으로 뛰쳐 나가고 싶었다.


"얘기 들었어."

"무슨-"


레인에게. 이단의 그 한 마디에 브랜트의 심장이 철렁했다. 무슨 얘기를, 아니면 어디까지. 무엇을. 머릿속이 엉망진창이 되어 버렸다. 브랜트는 섣불리 먼저 입을 열지 않았다. 그저 할 수 있는 만큼 태연한 척 하며 이단의 말을 기다렸다.


"나는 네가 나를 헌트라고 부를 때가 싫어."

"뭐?"

"네가 부국장이니, 국장대리니 하며 나와의 선을 긋는 것도 싫고."

"......"

"혼자서 감당하려고 하는 것도, 전부."

"그건-"

"무엇보다 너한테 명령을 들어야 하는 기분은 생각 이상으로 좋지 않아."


마지막 말을 마치며 한숨을 내쉬고는 장난스럽게 웃는 이단을 보며 브랜트는 뒷통수를 얻어맞은 듯 아무말도 하지 못했다. 브랜트는 어디까지 이단의 장단에 맞춰줘야 하는지 짐작조차 되지 않았다. 섣불리 말을 했다가는 이제껏 묻어두어야만 했던 모든것들이 와르르 무너지며 쏟아져버릴 것 같았고, 그렇다고 이단에게 뭐라고 말을 해야할지는 더더욱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그런 브랜트의 망설임을 지워버린 것은 이단이었다.


"윌리엄."

"......"

"날 헌트라고 부르지 마."





9.

"어때, 특등석에서 모든 걸 지켜본 느낌이."


레인은 묘하게 날이 서 있는 이단의 목소리를 눈치채고는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굳이 이단에게 그것에 대해 묻지는 않았다. 레인은, 신디케이트 완벽 소탕에 대한 공적을 인정받아 그 형량이 최소 무기에서 유기로 바뀌게 되긴 했지만 평생 살아서 이 곳을 나갈 수 있을지는 의문이었다. 그러나 레인은 애초에 그런 것 따위는 관심이 없었다는 듯 굴었다. 이단은 그런 레인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애초부터, 그는 그저 '보는 것을 원했을 뿐'이라는 사실이 이단의 성미를 잔뜩 긁었다.


"너와 엔지니어는 아주 잘 알지만, 그에 대해서는 몰랐으니 순수하게 지적 호기심을 채우기 위한 행동이라고 생각해두게나."

"너와 순수함은 좀 거리가 먼 것 같은데."

"자네가 할 소리는 아니라고 생각하네."


이단은 레인을 노려보는 시선을 거두지는 않았으나, 그 시선은 지난 번보다는 훨씬 순한 성질을 띄고 있어 레인은 꽤나 놀랍다는 듯 말했다.


"사자를 조련할 줄 아는 조련사라. 그를 다시 봐야겠군."


레인의 말에 이단은 코웃음을 쳤지만 알게 모르게 브랜트가 꽤 많이 레인을 찾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에 잔뜩 감정이 실린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 그만 봐도 될 것 같은데."

"지나친 소유욕은 좋은게 아니야, 헌트."

"......"

"모쪼록 안부 전해주게나."


이단은 가볍게 테이블을 손가락으로 두드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레인은 그게 명백한 거절의 의사표현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나, 애초에 이단의 의견은 상관없는 것처럼 굴었다. 


이단은 당장이라도 브랜트에게 찾아가 내일부터라도 레인을 만나러 가는 일을 그만둬 줄 수 없겠냐고 부탁할 셈이었다. 부디 브랜트가 그러겠다, 라고 해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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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lease, Don't Forget Me 




순간적으로 덮쳐온 기억의 파도는 무척이나 거세어서, 브랜트는 온 몸이 휘청거리는 것을 겨우 다잡았다. 두통은 기본으로 따라 붙었다. 브랜트는 욕을 곱씹었다. 물이 쏟아져 축축해진 바닥을 내려다보며 브랜트는 자신의 손에 쥐고 있는 꽃 한 송이를 바라보았다. 깨진 유리병 조각에 스쳐 상처가 난 손가락에서 피가 흘러나왔지만 그런 건 신경 쓸 처지가 아니었다. 이단 헌트. 브랜트는 그의 이름을 불렀다.


파트너. 하하, 파트너. 브랜트는 상처가 잔뜩 난 손에 붕대와 데일밴드를 붙이며 다짐했다. 그와의 관계는 이미 끝이 났다. 그저,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수긍하지 않았을 뿐이다. 어쩌면 이제 우리 그만 헤어지자, 라는 말에 아무런 이의도 없이 그래, 좋아, 하고 헤어져버릴 수 있는 사이다. 브랜트는 가슴이 먹먹했다. 그 날 이후로 쭉, 너무 소중해 버리지 못한 꽃 한 송이가 처량해보였다. 마치 자신의 처지처럼. 이단에 대한 분노는 금방 사그라들고, 주체할 수 없는 서글픔에 말문이 막혔다.


이미 떠났구나. 없던 사실이 되어버렸구나. 브랜트는 만약의 경우를 생각해봤다. 내가, 내가 만약 영원히 기억을 잃어버린 척하며 그에게 매달린다면 그가 받아줄까? 브랜트는 웃음을 터트렸다. 한심하긴. 그랬다. 브랜트는 지금 자신의 모습이 무척이나 꼴불견이라고 생각했다. 그가 깔끔하게 정리하길 원한다면 그렇게 해주는 게 도리이다. 브랜트는 충분히 그렇게 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브랜트는 아무렇지 않은 모습으로 출근했다. 이미 그 안에는 자신을 되찾은 윌리엄 브랜트가 성을 내고 있었지만 브랜트는 최대한 티를 내지 않으려 노력했다. 화려한 것을 좋아하는 그의 성미답게 아주 잊지 못할 날을 만들어주는 거야. 그럼 좀 후련하겠지. 브랜트는 회의실에서 자신을 발견한 벤지를 보며 싱긋 미소 지었다.


"브랜트?"

"내 치프가 되어본 기분이 어땠어?"

"...어?"

"벤자민 던, 선배."


이래뵈도 브랜트는 벤지에게 무척이나 고마워하고 있었다. 그래도 이제껏 벤지가 도와주지 않았더라면 기억을 잃었던 브랜트는 IMF, 그것도 이단의 팀에서 뱅글뱅글 겉돌았을지도 모른다. 두뇌 회전이 빠른 벤지는 금방 상황을 파악하고는 감격에 겨운 얼굴로 브랜트를 끌어안았다.


"워, 왜 이래?"

"브랜트-으-!!"


보고 싶었어, 네가 얼마나 그리웠는 줄 알아? 네 잔소리도 이제 사랑스러워 할 수 있어. 미안해, 다음 임무에 절대로 이단이 뭘 부탁하든 들어주지 않을게. 맹세할게. 브랜트, 사랑해. 다시 돌아와줘서 고마워- 랩을 하듯 속사포처럼 말을 내뱉는 벤지를 보며 브랜트는 당황스럽다는 얼굴로 벤지를 달랬다. 벤지는 절대로 떨어지지 않겠다는 듯 브랜트에게 매달렸고 브랜트는 곤란하다는 얼굴을 하면서도 웃고 있었다.


"진짜로?"

"응?"

"진짜로 다음 임무에는 내 말 잘 들을거야?"

"물론이지!!"


브랜트는 그게 비록 1시간, 아니 10분뒤면 없던일이 될 약속이라 할지라도 좋았다.


"당장 이단에게 연락해야겠어."


잽싸게 핸드폰을 드는 벤지를 막은 것은 브랜트였다. 브랜트는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벤지에게 고개를 저어 보였다. 벤지는 영문을 모르겠다며 브랜트에게 말했다.


"왜? 이 기쁜 사실을 빨리 알려야지! 이단이 지금까지 얼마나-"

"하나만 물어보자, 벤지."

"뭔데?"

"우리가 다시 만날 수 있을까?"


벤지는 브랜트의 표정을 살폈다. 그리고는 브랜트가 장난을 하거나, 빈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리고는 브랜트의 어깨를 쥐었다. 벤지는 두 사람이 그러지 않기를 바랬다. 이단 헌트가 기억하고 있던 윌리엄 브랜트가 없는 지난 한 달간, 옆에서 지켜보는 사람이 다 괴로울 정도였다. 브랜트가 무엇에 대해 불안을 느끼는 지는 벤지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기회만 되면 제인이 이래서는 안 된다고 이단에게 늘 말했다. 아무리 자신들이 알던 '그' 브랜트가 아니더라도 그는 모든 사실을 알아야할 자격이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단은 그 사실을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 벤지는 이단이 자신의 앞길도 가늠하기 힘든 상태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네가 물었잖아."

"......"

"그 날, 이단이 고백하던 날. 그렇게 대답한 건 너였잖아, 브랜트."

"-그랬었지."

"그럼 이번엔 네가 먼저 물어봐."


정 힘들면 내가 도와줄게. 벤지는 브랜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커플 사이에 낀 베스트 프렌드의 역할은 여러모로 피곤한 법이다. 하지만 벤지는 부디 이 일이 잘 마무리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이단의 속내를 브랜트에게 곧이 곧대로 알려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건 선을 넘는 행동이었다. 브랜트라면 충분히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다. 저래뵈도 수석 분석요원이니까. 벤지는 모든 게 잘 될거라 믿었다.





하얀 붕대가 여러 겹 감겨있는 브랜트의 손가락에 입을 맞추며 이단은 잔뜩 성이 난 얼굴로 브랜트를 바라보았다. 기억이 돌아온 것은 좋은데 손은 또 왜 이 모양인지. 브랜트는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다는 뻔뻔한 얼굴로 이단의 이마에 슬며시 자신의 이마를 맞대었다. 


"네가 잘못한거야."

"그래서 아무 말도 안 하고 있잖아."

"얼굴은 뭔가 터트리기 일보 직전인데."


이단은 곤란하다는 듯 미간을 찌푸리며 웃었고, 브랜트는 고소하다는 듯 입꼬리를 올렸다. 


"나 갖고 싶은 거 있어."


브랜트는 문득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다 무언가 떠올랐다는 얼굴을 하고는 이단을 바라보았다. 이단은 굉장히 의외라는듯 브랜트를 바라보았다. 이제껏 브랜트는 이단에게 그 어떠한 것도 요구하지 않았다. 특히 금전적인 면에서는 더욱 그랬다. 그랬기에, 다른 사람들과 별반 다르지 않는 연애의 순수한 첫 경험의 문턱에 선 이단의 심장이 간지럽게 뛰었다. 브랜트는 자신의 가방에서 생기를 잃고 시들어버린 새하얀 꽃을 꺼내 이단에게 주었다. 


"어제 꽃병을 깨트렸는데 바로 시들어버려서-"


진심으로 아쉽다는 듯 꽃을 내려다보는 브랜트를 보며 이단은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이 한꺼번에 몰아쳤다. 브랜트의 꽃은 3년 전 그대로였다. 비록 생기를 잃어 고개를 숙여버렸지만 이단에게는 그조차 사랑스러웠다. 조심스럽게 브랜트에게서 꽃을 건네받은 이단은 자신의 재킷 앞 주머니에 꽃을 꽂았다. 그걸 본 브랜트가 뭐하는 거냐며 꽃을 빼려고 했지만 멀찍이 물러선 이단 때문에 허공에 팔을 휘두르는 것으로 그쳤다.


"얼마든지."


이단은 벌써부터 자신이 선물한 새하얀 장미꽃을 한아름 받아들 브랜트를 생각하며 미소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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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고였다. 이단은 새빨개진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며 덜덜 떨었다. 바로 옆에서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루터의 목소리가 마치 저 먼 곳에서 부르는 것처럼 아득하게만 느껴졌다. 손가락 끝이 새하얗게 질렸다는 것이 느껴짐에도 자신의 손은 한 없이 붉었다. 이단은 그게 차라리 자신의 피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다급하게 브랜트의 이름을 부르는 벤지의 목소리에 퍼뜩, 자리에서 일어난 이단은 그대로 제인에게 뺨을 세게 얻어맞았다. 있는 힘껏 친 덕분에 확 돌아간 고개가, 얻어맞은 뺨이 얼얼하게 느껴졌지만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이단은 오히려 제인에게 고마워해야할 지경이었다. 빠르게 현실로 돌아온 이단은 말까지 더듬으며 그의 이름을 불렀다.


"브랜트는..."


그제야 어느정도 정신이 돌아왔음을 인지한 모양인지 제인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고, 루터는 복잡한 심경이 다 드러나는 얼굴로 이단의 어깨 위에 손을 얹었다.


"무사하길 빌자고."


이단은 루터의 말이 마치 자신에게 내려진 사형선고 같았다.





이단 헌트와 윌리엄 브랜트는 연인사이 이다. 아니, 어쩌면 연인사이 였다, 라고 표현해야 하는 것이 옳은 표현이다. 서로의 감정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은 무척이나 쉬운 일이었다. 이단과 브랜트는 서로에 대한 이끌림을 단순한 우상이나 동경, 혹은 동정심 같은 것으로 치부하기에는 지나치게 똑똑했다. 아주 조금은, 서로에게 그런 마음을 품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브랜트는 이단에 대한 동경심을, 이단은 브랜트에 대한 동정심을. 그러나 그 모든 것들은 전부 연애감정이라는 이름 아래, 빠르게 뭉쳤다. 마치 원래 그렇게 느꼈어야 했다는 게 당연하다는 듯이.


이단은 브랜트에게 고백한 날을 인생에서 제일 부끄러운 날, 다섯 손가락 안에 든다고 확신할 수 있었다. 연애감정을 인정하는 것은 너무나도 쉬웠지만 그 다음은 어려웠다. 브랜트가 무엇을 좋아하더라, 무엇을 싫어하더라. 이단은 자신이 꼭 이십 대 청년으로 돌아간 것처럼 느껴졌다. 그만큼 너무 서툴고, 모자라보였다. 새삼 브랜트에 대한 자신의 감정이 얼마나 큰 지 깨달았다. 결국 이단은 이 세상에서 제일 가는 멍청한 짓을 했다. 줄리아에게도 해주지 않았던, 커다란 꽃다발을 그에게 주었다. 그것도 아주 새하얀 장미 꽃다발을. 아주 조금이지만 이단은 자신이 멍청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했다. 하필 그 꽃다발을 넘기는 타이밍에 브랜트가 다른 팀원들이랑 같이 나올 줄 누가 알았겠는가. - 아니, 이건 순전히 이단의 계산 실수다. - 기겁을 하며 숨을 들이키던것은 벤지였고 세상에, 하며 탄성을 내뱉은 것은 제인이었다. 루터는 항상 그러했듯 오, 보이! 하면서 비죽였다. 이단은 숨을 죽이고는 브랜트를 바라보았다. 터지기 3초 전의 핵폭탄을 바라보는 것보다 더 떨렸다. 브랜트는 아무 말 없이 자신이 내민 꽃다발 속에서 가장 탐스러워 보이는 꽃 한 송이를 뽑아 들었다. 새하얀 장미 꽃 한 송이를 손에 들고는 잔잔한 미소를 지으며 자신을 바라보는 브랜트를 보며 이단은 당장이라도 브랜트에게 키스를 하고 싶은 것을 겨우 참았다. 제인은 브랜트가 그렇게 로맨티스트처럼 굴 줄 몰랐다며 순수하게 감탄했고, 벤지는 얼이 빠진 채로 이단과 브랜트를 번갈아 보았다. 


그렇게 이단 헌트와 윌리엄 브랜트는 연인사이가 되었다.


불 같이 열정적으로 사랑을 나눈 것은 아니었다. 그러기에는 이단이나 브랜트나 살아온 삶이 보통 사람들과는 너무 멀어 그런 것이리라. 둘 다 성격이 뒤 끝 없이 털털한 것이 그나마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떼어 놓고 보면 물과 기름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이단과 브랜트의 성격은 극과 극을 달리고 있었다. 그럼에도 두 사람이 3년이라는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기간 동안 그 흔한 사랑 싸움 한 번 하지 않은 것은 미션을 수행하던 도중 치고받느라 지쳐서 그런 것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였다. 지금에서야 깨달은 것이지만 어쩌면 둘에게 필요했던 것은 그 흔한 사랑 싸움이었을지도 모른다.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결코 브랜트에 대한 감정이 식은 것이 아니었다. 어느 순간 아무렇지 않게 느껴지다가도, 브랜트가 없으면 못 견딜 것 같은 순간이 생기기도 했다. 흔히 말하는 권태기인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이단 헌트는 그런 것에 대해서는 무지했다. 권태기라는 것을 맞이하기도 전에 스스로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내야 했던 그는 서툴기 그지 없었던 걸지도 모른다. 혹은 너무나도 익숙해져버려 안일해져 버린 것일지도 모른다. 무엇이 됐든, 그 과정은 중요치 않았다. 서로를 잘 안다고 자부했던 만큼, 한 번 삐끗한 톱니바퀴는 제대로 맞물리기 어렵다는 것도 잘 알았다. 단지 아주 조금, 안타까울 뿐이었다.

여전히 그들은 서로를 사랑한다 말할 수 있었으나, 서로가 서로를 사랑해줄지에 대한 확신은 없었다. 그 모든 평범한 사람들이 사랑을 나누며 겪는 일을, 이들이라고 완벽하게 피해가지는 못했다.





"브랜트는...?"


이단은 떨리는 목소리로 이제 막 수술실에서 나온 의사에게 물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무릎을 꿇을 수도 있었다. 그가 브랜트를 멀쩡하게 만들어줄 수 있다면 무엇이든 해줄 수 있었다. 이단은 씻지도 못한 새빨간 손을 허공에 휘저으며 물었다. 


"당신들의 사전에 기적이라는 단어가 있을 지 모르겠군요."


그 누구보다 힘든 수술을 마친 그였지만, 잔잔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의사를 보며 벤지는 탄성을 내뱉으며 그대로 의자에 털썩 주저 앉았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그렇게 중얼거리는 벤지의 어깨를 감싸는 제인을 보며 이단은 아주 긴 숨을 내뱉었다. 이단은 그제서야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다른 누구도 아닌 브랜트의 피로 물든 새빨간 손이 지독하게도 싫었다.


이단은 하루종일 브랜트의 병실에만 있었다. 그가 식사를 하는 지, 잠을 자는 지에 대한 의구심이 생길 정도로 하루 종일 브랜트의 침대 곁에 붙어있었다. 규칙적인 기계의 소리가 거슬렸지만 그것만이 유일하게 브랜트가 살아있다는 사실을 말해주는터라 불평도 하지 못했다. 이단은 하루라도 빨리 브랜트가 눈을 떴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브랜트가 눈을 뜬다면, 다시 자신의 이름을 불러준다면 얼마든지 그에게 자신이 어리석었노라 고백할 수도 있었다. 그리고 예전에는 하지 못했던 낯간지러운 말도 잔뜩 읊어줄 수 있었다. 이단은 확신했다. 자신은 그가 없이는 절대로 멀쩡히 걸어다닐 수가 없을 것이라는 사실을.


"...아."


이른 새벽, 브랜트는 기적같이 눈을 떴다. 이단은 당장이라도 환호성을 지르고 싶은 마음이었다. 조심스럽게 브랜트의 차가운 손을 쥐며 브랜트를 바라본 이단은 곧 전신을 뒤덮은 위화감에 식은땀을 흘렸다. 자신을 바라보는 브랜트의 눈이, 그의 시선이 무척이나 낯설었다. 브랜트의 시선은 마치 이단을 한 번도 본적이 없는 사람의 범주에 넣고 있었다. 하다못해 달리던 벤 안에서 처음 그와 만났을 때보다 더욱 낯선 그 시선은, 이단의 심장을 저 바닥 끝까지 떨구었다.


"누굽니까, 당신?"


이단은 결코 이런식으로 다시 브랜트에게 사랑한다, 속삭여주리라 다짐한 것이 아니었다.





브랜트는 거의 6년 가까이 되는 기억을 잃어버렸다. 몸 상태는 생각보다 훨씬 호전적이었고, 금방 퇴원 조치를 얻어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그는 더 이상 모두가 알고 있던 윌리엄 브랜트가 아니었다. 그는 크로아티아는 물론이고, 이단에 대해서 기억하고 있는 것이라고는 '아, 당신이 IMF의 그 유명한 현장요원이군요.', 가 전부였다. 벤지는 그런 브랜트를 붙잡고 차근차근 브랜트가 기억해야할 사실들을 알려주었다. 그것은 꼭, 선배가 후배를 가르치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그러니까 너랑 이단은..."

"파트너."

"...네?"

"파트너였어. 넌 훌륭한 요원이었어. 유능했지. 그래서 내 등 뒤는 전적으로 너에게 맡겼어."


이단은 벤지의 얼굴에 서린 안타까움을 애써 모른척했다. 브랜트는 굉장히 의외라는 얼굴을 하며 이단을 바라보았다. 그 표정은 흡사, 최고의 현장요원에게 칭찬을 받아 기쁜 표정이었다. 이단의 얼굴에 한 순간 서글픔이 서렸다. 이단은 내심 브랜트가 왜 자신과의 관계를 부정하냐며 화를 내주길 바랬다. 그러나 이단은 그것이 자신의 커다란 욕심이라는 사실을 빨리 인정해야만 했다.


이단의 말처럼, 브랜트는 실로 유능한 요원이었다. 그는 금방 병원에서 퇴원했고, 그 흔한 재활치료도 없이 다시 IMF로 출근했다. 그것을 뜯어말린 것은 벤지였지만 자신의 곁에 꼭 붙어있겠노라 약속을 받아내고서야 브랜트의 출근을 허락했다. 이단은 언제부터 벤지가 브랜트의 행동에 대한 허락을 내릴 수 있게 됐는가에 대해 고려해볼 필요가 있었다. 


"내가 어쩌다 병원에 누워있게 된 거예요?"


벤지는 그 주제에 대해서는 절대로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는 티를 팍팍 냈고, 그 주제는 실제로도 입 밖으로 내기 어려웠다. 이단은 그 날이 너무나도 생생해서 요 며칠 악몽에 시달려야만 했다. 원래대로라면 침대에 누워있었어야 하는 사람은 자신이었다. 이단 헌트가 기억하는 윌리엄 브랜트는 그 마지막까지 이단을 지켰다. 생각해보면 그를 지켜주겠노라 다짐을 한 것은 자신이었지만, 항상 보호를 받던 것은 자신이었다는 사실을 이제야 깨달았다. 


"날, 지켜줬어."

"제가요?"

"그래, 나 대신."


브랜트는 자신이 왜 그랬는가에 대해 고민하는 듯 했지만, 금방 생각이 잘 나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돌아섰다. 제인은 이단에게 정말로 이대로 계속 숨길 생각이냐며 물었지만 솔직히 스스로도 어떻게 해야 하는 지 확신할 수 없었다. 머리가 너무 아팠다. 눈 앞에 있는 브랜트는, 브랜트인데. 이상하게 그의 품 안으로 들어가기가 무서웠다. 만약, 또, 다시. 이단은 무척이나 한심해져버린 겁쟁이를 쫓아내려 애썼다.


할 수 있을까, 라는 의문이 무색할 정도로 이단은 정말 아무렇지 않게 행동할 수 있었다. 어쩌면 그가 그렇게 훈련을 받아온 아주 유능한 요원이라서 그런 것일지도 몰랐다. 브랜트는 빠르게 IMF에 녹아들었고 이제는 모두가 언제 브랜트에게 사고가 있었냐는 듯 굴었다. 비록 브랜트가 잃어버린 6년간의 일은 무의식적으로 자제하는 버릇이 생겼지만 말이다. 





헉헉, 턱 끝까지 찬 숨을 고르며 브랜트는 가만히 이단의 등에 자신의 등을 기댔다. 이단은 그 긴박한 상황에서도 무척이나 침착해서, 한치의 떨림도 없는 그 든든한 등이 저도 모르게 스스로를 안심시켜주는 것 같았다. 브랜트는 실없이 웃으며 말했다.


"진짜 든든하네."

"뭐가?"

"당신이 있으면 그래."


브랜트는 쥐고 있던 총에 실탄을 다시 채워넣으며 꽤나 활기찬 목소리로 말했다.


"생각해봤는데."

"또, 뭐?"

"내가 목숨을 내던질 정도면, 당신이 정말로 유능하거나 내가 정말로 당신을 존경한다거나, 뭐 그런거였겠지?"


이단은 순간 모든 세상이 스위치를 꺼 버린 듯, 그 넓고 어두운 세상에 덩그라니 홀로 놓여진 것 같은 기분을 지울 수 없었다. 미련하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조금만 방심하면 뚝뚝 흘러나올 것 같은 브랜트의 대한 감정은 이제 더 이상 혼자서 어떻게 해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건 줄리아를 떠나 보냈을 때보다 더한 고통이었다. 두 번째라서, 한 번 겪었으니까 덜 아플 줄 알았다. 그러나 그것은 순전히 저 혼자만의 착각이었다. 


"하얀 장미 한 송이의 꽃말을 알아?"

"뭐?"


지금 이 상황에서 무슨 뜬금없는 소리람. 브랜트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이단을 바라보았다. 이단은 잔잔하게 웃으며 말했다. 모르면 검색해봐.





브랜트는 소파에 앉아 TV를 보고 있었다. 사고가 난 이후로, 브랜트는 6년간의 기억을 읽어버린 흔한 말로 기억상실증에 걸린 환자였다. 그러나 크게 와닿지 않는 것이 사실이었다. 6년간, 무슨 중요한 일이라도 있었나? 얼핏 듣거나, 살펴본 자료들에 의하면 윌리엄 브랜트는 지난 6년간 아주 바쁘게 뛰어다녔다. 벤지에게서 핵전쟁을 막은 적도 있어, 라는 말을 들었을 때는 정말 무슨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이야기를 듣는 기분이었다. 


이상하게 가슴이 벅찼다. 초조함의 일종인 것 같은 위화감에 가만히 자리에 앉아있기가 힘들었다. 그 시점은 정확히 며칠 전 이단에게서 뜬금없는 소리를 들었을 때 부터다. 브랜트의 눈에 비친 이단은 정말 그 이름도 유명한 '이단 헌트'였다. 내가 그를 위해 내 목숨도 던졌다고? 브랜트는 그 사실이 믿기지 않았으나 꽤 오랜 시간을 그의 곁에 머물러본 결과 그럴 수도 있겠다, 라며 무심코 수긍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하얀 장미의 꽃말이라. 그것도 한 송이. 브랜트는 무심코 테이블에 올려져 있는 꽃병에 시선이 갔다. 대체 언제 받은 건지도 모르는 새하얀 장미꽃 한 송이가 꽂혀있는 꽃병이, 그저 우연은 아닐 것이라는 이상한 확신이 들었다.


꽃병을 집기위해 일어선 순간, 잘못 누른 모양인지 꺼져버리는 TV를 보며 브랜트는 있는 힘껏 꽃병을 손으로 쳐냈다. 살벌한 소리를 내며 부서진 꽃병에서 흘러나온 물이 발을 축축하게 적셨지만 브랜트는 멍하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깨진 유리조각이 손에 스치든, 박히든 상관 없이 바닥에서 하얀 장미를 집어낸 브랜트는 깜깜해진 TV를 바라보았다. 


왜 그랬지? 브랜트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평소와 같이 회의실로 들어선 이단은 평소와 다르게 잔뜩 날이 선 분위기가 피부를 콕콕 찌르는 것 같은 느낌에 주위를 둘러보았다. 눈이 마주친 벤지는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이단을 보며 억소리가 날 정도로 입을 벌렸다. 


"벤지."

"으, 응."

"잠깐만 자리 좀 비켜줄래?"

"어, 어! 그래!"


대체 무슨 일이냐고 묻기도 전에 후다닥 회의실을 나가버리는 벤지를 보며 이단은 평소와 다른 분위기를 풀풀 풍기고 있는 브랜트에게 다가갔다. 타이밍 좋게 자신을 돌아보는 브랜트를 보며 이단은 말 그대로 숨이 막혔다. 그런 이단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브랜트는 자리에서 일어나 이단에게 다가왔다. 드물게 느껴지는 살기에 이단의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그 날 이후로 쓸데없는 기대심은 스스로를 버린다는 생각을 했다. 기대를 품으면 실망감도 큰 법이다. 그랬기에, 이단은 스스로 물러나는 것을 택했다. 그랬는데, 그래야만 했는데-


"내가-"


브랜트는 감정에 복 받친 듯 분노가 잔뜩 녹아든 목소리로 소리쳤다.


"내가 싫었으면, 진작에 그렇게 말하지 그랬어."


터질듯한 감정을 겨우, 겨우 억누르며 비명을 지르듯 말하는 브랜트를 보며 이단은 눈 앞에 놓인 상황이 현실임을 자각했다. 뭐라 더 말을 하려는 그의 팔을 잡아 당기고는 품 안에 으스러지듯 안았다. 브랜트는 놓으라는 말도, 싫다는 말도 하지 않았다. 이단이 이렇게 나올 줄은 몰랐다는 듯,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모르는 두 팔이 허공에 맴돌았다. 차마 그의 등을 마주 안지 못한채로.


"다시 만날 수 있을까?"


브랜트는 이단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 지 깨달은 순간, 이단의 등을 마주 안았다.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새하얀 장미 한 송이의 꽃말. 브랜트가 이단의 고백에 대답했던 말. 혹시라도 시들어버릴까 온갖 방법을 써가며 시들지 않게 보관해둔 꽃 한 송이.


"다시는, 잊어버리지 마."


지난 몇 달간의 절절한 마음이 담긴 이단의 말에 브랜트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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