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로에서 뛸 때만큼은, 그 때만큼은 토마스는 이 세상 누구보다 자유롭다고 느꼈다. 참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미로에 갇힌 주제에, 그런 사실과는 상관없이 미로 안을 뛰어다닐 때는 그 어떤 사람보다 활기차고 생기가 넘치는 사람이 토마스였다. 토마스는 무척이나 호기심이 많은 소년이었다. 딱 그 나이 소년의 모습에 맞게 궁금한 것은 못 참는 성격이었고, 해보고자 하는 일이 있으면 꼭 해야만 하는 성미를 가진 소년이었다. 그가 우기고 우겨 러너가 된지 며칠 지나지 않아, 토마스에게는 또 다른 흥밋거리가 생겼는데 그게 바로 민호였다.
“…뒤통수 뚫리겠거든?”
“아, 미안.”
토마스는 말하고 행동하는 것에 거침이 없었다. 그런 토마스의 시선이 처음에는 그저 단순한 호기심에서 비롯된 것이겠거니, 하고 안일하게 생각하고 있던 민호는 끈질기게 붙어먹는 소년의 시선에 어찌할 줄을 몰랐다. 할 말이 있냐는 자신의 말에 딱히 없다며 고개를 젓는 토마스의 멱살을 쥐고 서너 대 후려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너 대체 나한테 원하는 게 뭐야?”
“원하는 거? 딱히 없는데.”
“그럼 사람 좀 그만 쳐다봐, 기분 이상하다고.”
“내가 그렇게 쳐다봤어?”
민호는 생각하는 것을 그만두었다. 호기심이 왕성한 십대 소년의 면모와는 다르게, 어느 구석인지는 모르겠지만 토마스는 은근히 막돼먹은 꼬마 녀석의 심보도 가지고 있었다. 딱히 그것이 잘못된 것은 아니었기에 민호도 넌지시 불만을 토로하는 것에 그쳤지, 뭘 더 어쩌랴 싶은 것은 아니었다. 여기까지가 일반적인 아이들이 알고 있는 두 사람의 관계로, 사실 토마스와 민호의 관계는 그다지 얕지만은 않았다. 민호는 토마스가 다른 아이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똑똑하고 영악한 녀석이라는 사실을 아주 잘 알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토마스는 민호에게 있어 여러가지 의미로 골머리를 썩히게 만드는 사람 중 하나였다. 한 가지 예를 들자면 둘 밖에 없는 미로 안에서의 일을 들 수 있었다.
“이봐, 민호.”
“왜.”
“여기 녀석들은… 그, 어떻게 처리해?”
“…….”
뛰던 발걸음을 멈춘 민호는 어이가 없다는 듯, 혹은 대체 무슨 헛소리를 지껄이는 거냐는 짐짓 굳은 표정을 지으며 토마스를 돌아보았다. 이제껏 신입들이 멍청하고 어이없는 짓을 굴 때가 종종 있기는 했지만, 이런 경우는 또 처음이었다.
“뭘 어떻게 처리해. 여기 여자가 있는 것도 아니고.”
“그럼, 역시….”
“역시는 뭘 역시야. 이상한 소리 하지 말고 뛰어.”
“나 궁금한 거 있는데.”
“뭐.”
“키스해도 돼?”
“뭐야?”
순식간에 미로의 벽으로 밀려난 민호의 등이 평탄치 못한 벽에 부딪히며 둔탁한 소리를 냈다. 미묘하게 위에 머문 시선이, 눈동자가 빤히 자신을 쳐다보는 것이 이상했고, 묘하게 긴장감이 몰려오는 것 같았다.
“[미친 새끼가 뭐라는 거야, 저리 꺼져.]”
“그렇게 말해도 난 못 알아듣는다고. 해도 괜찮은 거지? 그치?”
“뭘 괜찮아! 웃기지 말고 저리 꺼…!”
잠시의 틈도 주지 않겠다는 듯, 서툴게 부딪혀온 입술은 그렇게 민호의 입술을 집어 삼켰다. 억지로 벌어진 입 사이로 어색하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능청스러운 혀의 움직임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콱 혀를 깨물어버릴까 생각했다가 점점 자연스러워지는 혀놀림에 괜히 승부욕이 불타오른 민호 또한 물러서지 않았다. 먼저 고개를 돌리는 쪽이 지는 거다. 민호는 속으로 온갖 욕을 곱씹으며 토마스의 목에 팔을 둘렀다. 생각해보니, 뺀 지 꽤 된 것 같은데. 이렇게 막무가내로 부딪혀 오면 참 곤란한 일이었다.
“…….”
“…발정 났냐.”
“그렇다고 하면 어쩌려고 그런 걸 물어봐?”
“그러게, 물어본 내가 똘추지.”
“미로 닫힐 때까지 얼마나 남았지?”
“미쳤지, 신입. 진짜로 돌았지?”
“아, 왜. 낮에는 그리버도 잘 안 돌아다니잖아.”
“이 새끼가 몇 번 미로 왔다 갔다 했다고 여기가 제 집 같은 모양인데 정말로 네 집으로 만들어줄까?”
민호의 거친 말투에 토마스가 싱긋 웃더니 민호의 얼굴 옆 벽을 손바닥으로 짚으며 귓가에 속삭였다.
“나 좀 봐주라, 민호.”
이러니까 골치 아프다는 거다. 특히 이번 신입은.
뒤는 없음 ^*^
그냥 미로 안에서 투닥투닥 (근데 소재는 ㄴㄴ 전체이용가로) 거리는 게 보고 싶었다.
뭐지, 사실 얘네가 숲 속 아니면 어디서 해..? 라고 했는데 미로는 진짜 목숨을 담보로 하는거쟝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전나
그래서 그냥 끝까지는 안 가고 대애충... 이래저래 잇챠잇챠..이하생략.
말은 험하게 하면서 묘하게 토마스에게 약한 민호 보고 싶다. 이런 걸 뭐라고 하죠, 츤데레인가 시발데레인가..? 둘 다 아닌가.
글레이드에 살고 있는 소년은 고작 셋이 전부였다. 뉴트는 가만히 알비와 갤리의 얼굴을 돌아보았다. 그 둘을 포함해 자신까지 전부 셋. 이 세 명이 고작이었다. 소년들은 멍청하지 않았다. 물론 겁을 집어 먹어 하루나 이틀은 엉엉 울며 보내더라도 최소한 삼일 째 되던 날에는 자신의 이름과 함께 살아남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 지 정도는 이해했다.
맨 처음 이곳에 온 사람은 알비였다. 그리고 그 다음으로 온 사람은 뉴트였는데, 살아남은 사람을 기준으로 해서 그렇지 사실 뉴트의 앞에는 한 사람이 더 있었다. 한 달에 한번 박스를 통해 새로운 아이가 올라온다는 것을 직접 겪고, 보기도 한 뉴트는 곧 이 글레이드의 한 일부가 되어 살아가기 시작했다. 혼자보다는 둘이, 둘 보다는 셋이 살아남기에는 많은 도움이 되었다. 그리고 위로가 되었다. 세삼 이 곳에 혼자 한 달을, 아니 그 이상을 보냈어야 할 알비의 지난날이 안쓰러웠다. 그리고 오늘은 갤리가 올라오고 난 지 딱 한 달이 되는 날이었다.
적막한 글레이드에 소란스러운 사이렌 소리가 울려 퍼졌다. 아무리 들어도 익숙해지지 않는 소음에 귀를 틀어막은 뉴트는 얼른 박스가 올라오길 기다렸다. 박스가 다 올라오고 서둘러 박스로 다가간 아이들은 박스의 문을 열고는 그 자리에 못이라도 박힌 듯 서있었다.
“……뭐야, 쟤 왜 저래.”
갤리의 말에 뉴트는 뒷목이 서늘해짐을 느꼈다. 보통 박스의 문이 열리면 어리둥절하며 겁에 잔뜩 질린 아이의 얼굴이 튀어나오기 마련이었는데, 이번에 올라온 아이는 그렇지 않았다. 꼼짝도 하지 않고 박스 구석 자리에 웅크리고 누워있는 모습이 딱 봐도 어딘가 잘못되었다. 보다 못한 알비가 얼른 박스 안으로 뛰어들었다.
“이봐, 정신 차려.”
“…….”
“알비…?”
“가서 이불 펴고 불 붙여, 얼른!”
“으, 응!”
다급한 알비의 목소리에 서둘러 달려간 뉴트와 갤리는 알비가 시키는 대로 그나마 멀쩡해 보이는 천을 깔고 그 근처에 모닥불을 지폈다. 서둘러 아이를 안아 들고 온 알비는 조심스럽게 아이를 눕히고는 수건에 물을 적셔 아이의 이마에 올려주었다. 모닥불의 열기 때문이 아니더라도 아이의 몸은 충분히 뜨거웠고, 밭은 숨을 내쉬고 있었다.
“괜찮을까…?”
“…괜찮길 빌어야지.”
박스에서 올라오자마자 아픈 아이는 이 아이가 처음이었기 때문에 적잖이 당황한 모양인지 알비의 얼굴에도 그림자가 졌다.
참 왜소한 아이였다. 얼핏 본 생김새는 자신이나 갤리, 알비와도 전혀 다른 생김새였다. 아마도 동양의 먼 나라의 아이가 아닐까 싶었다. 키는 셋 중에 가장 작았던 자신보다도 작아보였고, 덩치는 알비의 반도 되지 않는 것 같았다. 이렇게 왜소하기 때문에 아픈 걸까. 뉴트는 아이가 꼭 무사히 깨어나길 바랐다.
그 이후로 3일이나 지났지만 아이는 깨어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첫 날보다는 꽤 상태가 좋아졌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가만히 지켜보기만 하던 갤리도 영 마음에 걸리는 듯 무슨 일을 하다가도 아이의 모습을 보러 왔지만 차도가 없는 아이의 모습에 혀를 차고 저 멀리 가버렸다. 조만간 무덤을 하나 만들어야 할지도 모르겠다는 갤리의 말에 뉴트는 왠지 모르게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다. 뉴트는 아이의 이름도 몰랐다. 아이의 눈은 무슨 색인지도 몰랐고, 아이의 목소리는 들어보지도 못했다. 이곳이 하루하루 살아남기가 힘든 곳이라는 것은 잘 알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이 아이가 어떤 아이인지도 모르는데 떠나보내기란 참 어려운 일이었다. 하고 싶지도 않았다.
일주일 가까이 지나자 알비도 포기한 듯 보였다. 뉴트는 겁이 났다. 정말 이대로 아이가 죽어버리는 것은 아닐까. 그간 아이를 제일 열심히 돌본 뉴트는 최선을 다해 아이를 간호했다. 오늘 밤이 고비일지도 모른다. 오늘 밤이 지나도 아이가 깨어나지 못하면, 소년들은 괴로운 선택을 해야 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렇게 되지 말라고 기도를 거듭한 뉴트의 바람을 알아주기라도 했는지, 그 날 저녁 아이는 가까스로 눈을 떴다.
“고마워.”
어눌한 발음으로 말을 꺼낸 아이는 알고 있었다. 자신을 위해 소년들이 어떤 노력을 했는지 모두 알고 있었다. 기껏해야 열 넷밖에 되지 않았던 소년들은 그 날 서로를 얼싸안고 울었다.
그렇게 일주일을 꼬박 앓은 아이는 무럭무럭 자랐다. 그들 중 가장 많이 먹었고, 가장 많이 움직였다. 대체 자기가 언제 아프기라도 했냐고 말할 만큼 그들 중 누구보다 더 빠르고 강하게 성장했다.
“얼마나 무서웠는지 알아? 정말로 죽는 줄 알았어.”
“갤리는 널 포기할 뻔 했다고.”
“왜 나한테만 그래? 솔직히 너도 그랬잖아.”
“그래, 그랬단 말이지.”
“아, 아니라니까!”
뉴트는 갤리를 놀리는 것에 부쩍 재미를 붙인 모양인지 쉼 없이 갤리를 놀렸고, 소년들은 그 나이 또래에 걸맞게 장난을 치며 웃으며 놀았다.
*
“민호…?”
“…뉴트….”
뉴트는 당장에 들고 있던 바구니를 던져내고는 민호에게 달려갔다. 새하얗게 질린 민호의 얼굴에 뉴트는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것 같았다. 처음 글레이드에 온 이후, 민호는 어디 아픈 곳 하나 없이 건강하게 지냈다. 왜소해보이던 몸과는 달리 꽤 완력을 쓸 줄 아는 아이였고, 왜소한 만큼 민첩한 모양인지 달리는 것만큼은 넷 중 가장 빠르게 달릴 수 있었다. 그렇게 민호가 아팠었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고 살았는데, 글레이드의 적막함을 물러낼 정도로 아이들이 올라왔을 때쯤 민호는 또 다시 앓기 시작했다.
처음 이곳에 올라왔을 때보다 심하게 앓는 민호를 보며 뉴트는 잠도 못자고 민호의 곁을 지켰다. 그래도 드문드문 정신을 차리고 뉴트와 심심찮게 장난을 치는 민호의 모습에 뉴트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조심스럽게 그의 입으로 수프를 흘려주고, 물을 먹이고 나서 그의 팔과 다리를 한참동안 주물렀다. 무슨 연유에서인지 빳빳하게 굳은 그의 손과 발을 보니 마음이 편히 놓이지 않아서였다.
“…간지러워.”
“내가 정말 너 때문에 못살겠다.”
“걱정할 거 없다니까.”
“걱정 안 되게 생겼냐? 너는 무슨 생긴 건 그리버도 때려잡게 생겼으면서 이렇게 비실비실해?”
“하하, 내가 그리버도 때려잡게 생겼어?”
작게 웃는 민호의 말에 뉴트는 입을 다물었다. 아니, 사실 그런 얼굴은 알비와 갤리가 좀 더 그렇게 생겼다. 처음 올라왔을 때보다 근육도 붙고 나름 키도 큰 민호지만 여전히 그때 그 시절 넷 중에서는 가장 왜소했다. 항상 그것이 불만이었는지 민호는 자기보다 한 뼘은 큰 갤리 앞에서 기를 죽이는 법을 몰랐다. 그런 민호가 가소롭다는 듯 웃는 갤리의 행동은 다툼에 일조하는 짓밖에 안됐지만 말이다.
“앞으로 더 클 거야.”
“퍽이나.”
“큰다면 크는 거야. 갤리만큼 커서 네가 걱정하는 일 따위는 없게 만들어 줄 거야.”
“흥, 웃기시네.”
뉴트는 코웃음을 쳤다. 민호가 갤리만큼 크려면 키부터 족히 한 뼘 반은 더 커야 했고, 근육도 한참이나 더 붙어야만 했다. 물론 십대 소년들이 어디까지 클 수 있는지는 모르지만, 뉴트는 민호를 놀리며 말했다.
“넌 한국인이라서 안 돼.”
“뭐냐, 너 지금 나 한국인이라고 무시 하냐.”
“그렇게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마, 네 표정 완전 못났거든, 큭큭.”
“[못돼 처먹은 놈.]”
“뭐?”
“아니, 아무것도.”
가끔 못 알아듣는 말을 하는 걸 보면 분명 민호가 한국말을 하는 것 같은데 이상하게 뉴트는 그것이 퍽 좋지만은 않았다.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닥 좋은 말이라고는 생각이 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너 나 욕했지.”
“아닌데.”
“했잖아.”
“아니거든!”
결국 시끄럽다며 아무것도 들지 않은 가방을 던진 갤 리가 씩씩거리기 전 까지, 뉴트와 민호는 계속 끝이 없는 말다툼을 이어갔다.
휴전 선언을 한 뉴트가 먼저 민호의 옆에 눕자, 민호가 조용히 웃었다.
“진짜야, 두고 봐.”
“…….”
“알비나 갤리보다 더 크고 건강하고, 강해져서…. 내가 널 여기서 꼭 데리고 나갈 거야.”
“민호.”
“많이 아프면, 아픈 만큼 클 수 있댔어.”
“…….”
“잘 자, 뉴트.”
*
미로에서 돌아온 민호와 토마스를 반갑게 맞은 뉴트는 얼른 두 사람에게 물을 건넸다. 먼저 가서 씻겠다며 뛰어가는 민호의 등을 보며 뉴트는 고작 몇 년 전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이곳에 있는 그 누구보다 강해지겠다는 말. 민호는 자신이 내뱉은 말은 죽어도 지키겠다는 듯, 또 꼬박 앓고 나서는 무지막지한 속도로 먹기 시작했다. 갤리도 그것을 보고 기겁을 할 정도로 기백이 엄청나서 뉴트는 크게 웃으며 뒤집어졌다. 작작 먹으라는 알비의 말은 귓등으로도 듣지 않고 어마어마한 양을 꿀꺽 삼킨 민호는 돌연 돌발선언을 했다. 러너가 되겠다고. 그런 민호의 말에 기함을 친 알비와 갤리가 민호를 뜯어 말렸지만 어찌나 그 고집이 황소고집인지 제 의견을 굽히지 않던 민호는 기어코 미로 속으로 발을 들였다. 그리고 그것이 지금까지 이어져오고 있는 것이었다.
지나가던 길에 갤리와 소소한 시비가 붙은 모양인지 민호와 갤리, 토마스 이렇게 셋이서 다툼 아닌 다툼을 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괜히 뉴트는 가슴이 벅차오름을 느꼈다.
민호는 이제 갤리와 비교해서도 밀리지 않을 만큼 자랐다. 물론 갤리보다는 조금 작은 편이었지만 덩치로는 밀리지 않을 만큼 그 작고 왜소했던 아이가 자란 것이다. 뉴트는 괜히 멋쩍어져서는 가만히 고개를 숙였다. 반드시 여기서 데리고 나가 주겠다는 민호의 말이 귓가를 맴돌았다. 어쩌면, 어쩌면 정말로 가능한 일일지도 모른다.
“이봐, 뉴트!”
“…어! 왜?”
“갤리 녀석 좀 말려봐, 난 가서 씻고 싶다고.”
“뭐야, 갤리. 왜 또 우리 민호한테 시비야?”
“우리 민호? 나 참, 기가차서.”
“들었지? 우리 부대장이 날 좀 아껴야 말이지. 그럼 여기 있는 토마스랑 재밌는 시간 보내, 친구.”
그러고 가버리는 민호의 이름을 억울하게 부르는 토마스의 모습을 보며 한참을 웃은 뉴트는 가만히 사라지는 민호의 등을 바라보았다. 많은 것을 짊어지고 있는 그의 등은 그의 말 그대로였다.
소년은 아팠던 만큼, 자라있었다.
뉴트 x 민호가 아니라 그냥 뉴트+민호인가...
아무튼 이미 많은 존잘님들의 손을 거쳐간 민호가 처음에 글레이드에 왔을 땐 제일 작고 왜소했으면 좋겠다, 썰 기반 조각글.
민호가 많이 클 수 있었던 것은 성장통이 올 때마다 뉴트가 막 주물러 주고 안마해주고 그래서..라고 한다(뻘
실제로 성장통이라는 걸 겪어본 적이 없는데 ㅅㄹ통만큼 아픈가...? 는 솔직히 잘 모르겠습니다. 그냥 많이 아픈 만큼 많이 자란다, 라는 걸 쓰고 싶어서
7시 정각. 갤리는 마법처럼 눈을 떴다. 분명 어젯밤에…. 허벅지를 무겁게 짓누르는 무게에 느릿하게 고개를 돌리니 자신의 허벅지를 베개인 냥 베고서는 세상모르게 자고 있는 토마스의 얼굴이 보였다. 그 얼굴이 어찌나 멍청해 보이는 지 갤리는 절로 한숨이 나왔다. 아직 잠이 덜 깨서 그런지는 몰라도 세상이 느리게, 느리게 움직이는 것 같았다. 그리고 곧, 갤리의 우렁찬 고함소리에 토마스의 눈이 떠졌다.
“당장 못 일어나, 이 똘추 새끼들아!!”
“뭐야, 불났어?!”
“아오, 머리야…….”
갤리의 고함소리에 동시에 머리를 든 세 남자가 좀처럼 눈을 뜨지 못한 채로 갤리를 쳐다보았다. 잠기운에 휘청 이던 토마스가 몸을 지탱하기 위해 바닥을 손으로 짚자 파삭, 하는 소리와 함께 무언가가 손바닥을 콕콕 찔렀다. 곧 자리에서 일어나기 위해 몸을 일으킨 뉴트의 발에 채여 맥주병이 넘어졌다. 한심하다는 듯 두 사람을 보고 웃던 민호는 뉴트가 쏟은 맥주에 미끄러져 그대로 TV장에 머리를 박았다.
“씹, 존나 아파…….”
민호의 말이 끝나자마자 미친 듯이 웃어 재끼는 뉴트와 토마스의 얼굴을 보며 갤리는 슬슬 혈압이 올라가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엉망진창으로 어질러진 거실, 고급 카펫 위 쏟아진 맥주, 토마스가 웃을 때마다 흩날리는 과자 부스러기.
“이 머저리들아!!!!!!”
오전 7시 10분. 폭풍처럼 몰아드는 갤리의 잔소리가 섞인 고함 소리와 함께 그들의 아침이 시작되었다.
2.
“그 넓은 집에서 혼자 살 생각이야?”
“잘 모르겠어.”
알비의 말에 갤리는 어깨를 한 번 으쓱이더니 흘러내린 가방을 고쳐 매었다. 부모님의 사정에 의해 이번 학기가 시작될 때부터 혼자 살게 된 갤리는 무식하게 넓기만 한 자신의 집을 떠올리며 한숨을 쉬었다.
“글레이드잖아? 좋게 생각하라고.”
“너무 넓어.”
“그러니까 같이 살 사람을 구해보는 게 어떻겠냐고.”
작게 한숨을 쉰 갤리는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글레이드라 하면, 위키드 대학교의 학생들이라면 누구나 살고 싶어 하는 top 1순위 주택가가 모여 있는 구역이었다. 수업 시작 10분 전에 일어나도 지각을 하지 않을 수 있는 마법의 집, 넓고 쾌적한 집으로 유명한 주택가였으나 그 명성이 그러하듯, 상상을 초월하는 집값에 실제로 글레이드 내부에 살고 있는 학생은 몇 되지 않았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갤리는 쉽게 룸메이트를 구할 수가 없었다. 괜히 다른 아이들의 입에 자신의 이름이 오르락내리락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긴, 부모님이랑 같이 사는 것도 아니고 혼자 그 글레이드의 주택에 산다니. 무슨 영화 속에서나 나올 법한 이야기지.”
“…….”
“내가 한 번 알아봐줄까?”
“뭐?”
“믿을만한 녀석으로 말이야.”
“고마워, 알비.”
“뭘.”
싱긋 웃는 알비의 얼굴에 갤리는 어딘지 모르게 안심이 되었다. 적어도 알비라면 이 위키드 대학교에서 가장 믿을 수 있는 녀석으로 꼽을 수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이런 생각을 했던 것도 이때뿐, 갤리는 앞으로 닥쳐올 자신의 운명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
수업이 끝나자마자 집으로 돌아온 갤리는 텅 비어있는 넓은 집에 기운이 쭉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나름 부유한 가정에 외동아들로 태어나 자란 터라 원래 형제라는 것이 없었기에 외로움은 그다지 느끼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이건 경우가 좀 다른 모양이었다. 정말 쓸데없이 넓은 집이었다.
대충 가방을 소파에 걸어놓고는 물을 마시기 위해 거실로 가던 도중, 뜬금없이 울리는 벨소리에 발걸음을 멈췄다. 택배, 시킨 것 없고. 찾아올 손님? 그런 게 있을 리가. 미심쩍은 눈으로 현관문을 열자 갤리를 반기는 것은 꽤 오랜만에 보는 녀석이었다.
“안녕.”
“뉴트?”
“알비가 그러던데. 같이 살 사람 구한다면서?”
“…….”
“그래서 왔어.”
양 손 가득 빵빵하게 부푼 가방을 들고 햇살같이 웃는 아직 어린티를 벗지 못한 소년의 얼굴에 갤리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대로 현관에 돌처럼 굳어버렸다.
“아니, 그, 이렇게 갑작스럽게….”
“오, 저기 있다. 뉴트!”
“늦었잖아, 민호.”
뉴트의 뒤를 이어 한 사람 더 갤리의 집을 찾아왔다. 딱히 친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어쨌든 얼굴과 이름 정도는 알고 있는 녀석이었다. 갤리는 현기증이 일어날 것 같았다. 알비, 알비인가. 이 모든 사건의 원흉은.
“와준 건 고마운데, 미안하지만….”
“뉴트, 민호!”
“꼴지야, 토마스.”
갤리는 그대로 현관문을 닫아버렸다. 빠른 손놀림으로 잠금 장치까지 완벽하게 설정한 갤리는 지금 벌어진 상황이 꿈이길 바라며 다시 거실로 발걸음을 돌렸다. 그러자 쿵쾅거리며 현관문을 두들기는 소리와 함께 왁자지껄한 녀석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꿈이, 아니었다.
“갤리! 이봐!”
“우리 사이에 이러기야?”
“우리 사이가 뭔데!”
이러다가는 민원이라도 들어올 것 같아서 얼른 다시 문을 연 갤리는 단호한 얼굴로 그들을 쫓아내리라 다짐했다. 죽어도 저 문제아 셋과는 함께 동침을 하고 싶지 않았다. 뉴트가 찾아왔을 때 혹시, 설마 했지만 정말 저 둘을 끼고 왔을 줄이야.
뉴트는 알비의 친한 친구 중 한 명이었다. 워낙 생긴 것이 얌전하니 사내아이 치고는 곱상하게 생겨서 대학교의 얼굴 마담으로 불리는 수준이었다. 소문에 의하면 뉴트는 이미 글레이드에서 살고 있다고 들었는데, 굳이 여기까지 찾아온 이유는 뭐란 말인가.
그 뒤로 찾아온 녀석은 민호였다. 그래, 여기까지는 이해할 만 했다. 뉴트에게는 알비보다도 더 돈독한 사이인 친구가 하나 더 있었는데, 그 친구가 민호였다. 듣기로는 한국에서 태어나 어렸을 때 미국으로 이민을 온 녀석이라는데 그 때부터 뉴트와 친구사이였다고 한다. 아시아인이라는 이유 하나 때문에 돋보일 만도 했는데, 그보다 그를 더 돋보이게 하는 것은 단순하게 생겨먹었어도 과 수석의 자리를 한 번도 놓친 적이 없는 미친놈이라고 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둘을 쫓아 여기까지 따라온 멍청하게 생긴 녀석의 이름은 토마스였다. 최근 위키드 콤비 - 뉴트와 민호를 함께 부를 때 사용하는 말이었다. - 가 위키드 트리오가 되었다는 소문이 사실이었나 보다. 이번에 편입으로 들어온 얼빵한 새내기 하나가 기어코 저 두 사람과 어울리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애초에 갤리가 룸메이트를 구하기 꺼려했던 이유도, 괜히 다른 아이들의 이야깃거리가 되고 싶지 않아서였는데 이래가지고는 빼도 박도 못하게 위키드 4인조의 이름으로 불리게 생겼다. 그것만은 죽어도 사양이다.
“우리 사이가 뭐긴. 이제부터 한 집에서 같이 살 사이지.”
“꺼져.”
“섭섭하게 이러기야?”
“뭐야?”
“자꾸 이러면 우리 위키드 4인조라고 퍼트리고 다닐 거야.”
갤리는 뉴트의 말에 말문이 막혔다. 갤리와 알비가 친구였던 시간이 긴 만큼, 사실 뉴트와 얼굴을 보고 지낸지도 꽤 오래되었는데, 갤리는 뉴트가 천생 선해 보이는 얼굴을 가지고 이 세상 둘도 없을 못된 새끼라는 것을 기억해냈다. 어찌나 영악한 녀석인지 모르는 녀석들이 불쌍했다.
“애초에 넌 이미 글레이드에서 살고 있잖아. 왜 여기까지 와서 헛짓이야?”
“너 나 없이 쟤네 둘 데리고 살 수 있겠어?”
아니. 즉답을 하는 갤리를 보며 뉴트가 싱긋 미소 지었다. 갤리는 뉴트가 찾아 온 순간부터 이미 자신은 완벽하게 말린 것이라는 생각밖에 할 수 없었다.
주여, 이 어린양을 돌보소서.
“와, 집 끝내준다. 그래서? 우리 방은 어디야?”
지금 당장이라도 갤리는 부모님의 품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그럼에도, 금세 소란스러워진 집을 보며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쉬며 살며시 웃는 갤리의 얼굴을 보고도 뉴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본 글은 메이즈러너 온리전 본참가 신청 성공하면 낼 책의 컨셉입니다:)
대략적인 프롤로그..같은!
일단 커플링 성향은 미정이거나 짙지 않은 쪽 이고 토마스+민호+뉴트+갤리 이 넷이 함께 사는 일상 이야기들을 담은 책이 될 것 같습니다. ㅎㅎ
민호의 하루 일과는 다른 글레이드의 아이들에 비하면 꽤 단순했다. 새벽같이 일어나서 문이 열리는 미로 안을 토마스와 함께 하루 종일 달리고 온다. 그리고 문이 닫힐 때쯤 돌아온다. 여기까지가 대부분의 아이들이 알고 있는 것이었다. 그래서 민호의 하루 일과는 한 마디로 압축할 수 있었다. 달린다. 어쨌든 그는 러너였으니까 말이다.
그런데 대부분의 아이들이 아는 것과는 다르게, 민호의 하루 일과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뉘는데 하나는 그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줄기차게 미로 안을 뛰어다니는 것과, 또 다른 하나는 저녁 식사 시간 이후 웬만한 아이들은 출입하지 못하는 지도 보관실에 드나든다는 것이다. 그리고 항상 그런 민호의 곁에는 한 사람이 더 있었는데, 바로 뉴트였다.
민호와 뉴트의 사이는 참으로 각별해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두 사람은 알비와 갤리를 포함한 ‘최초의 글레이더’ 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있었다. 물론 제일 먼저 글레이드 안에서 혼자 끔찍한 한 달을 보낸 것은 알비였지만, 다섯 명 까지는 그렇게 부르는 것 같았다. 안타깝게도 나머지 한 명은 이미 글레이드에는 없었다.
여느 날과 다름없이 미로에서 돌아온 민호는 그대로 초원을 가로질러 뉴트가 일하고 있는 밭으로 뛰어갔다. 근심과 걱정이 가득한 표정으로 뛰어가는 민호의 모습에 다른 아이들이 무슨 일이 생긴 거 아니냐며 기겁을 했다. 그런데 밭에 도착하자마자 뉴트의 모습을 확인한 민호가 크게 한숨을 쉬며 숫자를 툭, 뱉는 것이 아닌가.
“3.”
“…음, 6.”
“뭐?”
“6. s.i.x.”
누가 봐도 눈이 부시다고 표현할 수 있을 정도로 해맑게 웃는 뉴트의 얼굴에 민호는 할 말을 잃어버린 듯한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정말이야?”
“방금 생각이 바뀌었어. 8.”
민호는 뉴트의 말에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흔들며 숲 쪽으로 걸어갔다.
“어디가?”
“씻으러.”
“음, 민호. 나 또 생각이 바뀐 것 같아. 10!”
“작작해라! 14!”
민호의 외침에 뉴트가 삽을 떨어트리고는 꺄르르, 하고 웃는데 근처에 있던 아이들은 대체 저 둘이 무슨 짓을 하는 건지 당최 이해를 하지 못하겠다는 얼굴로 둘을 번갈아 보았다. 시선을 느낀 건지 아이들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뉴트는 별 일 아니라는 듯 어깨를 한 번 으쓱 하더니 바구니를 들고 민호의 뒤를 쫓아 본부 쪽으로 걸어갔다.
그 뒤로도 민호와 뉴트의 알 수 없는 숫자 놀음은 계속 되었다. 저녁을 먹을 때에나, 잠에 들 때까지 멈추지 않는 숫자는 점점 커져만 갔고, 곧 100을 넘어갈 것 같았다. 그런 두 사람을 보며 토마스는 입이 근질거리는 것 같았다. 묻고 싶은데, 뭔가 묻기 꺼려지는 기분이랄까. 오묘한 느낌을 받으며 그 날 하루가 저무는 것을 본 글레이드의 아이들은 하루를 마무리 지었다.
“120.”
“오, 꽤 높은데? 137.”
“…가자, 토마스.”
토마스는 아무 말도 못하고 민호의 뒤를 따라 미로로 들어갔다. 한참을 달리던 도중 점심을 먹기 위해 잠시 쉬기로 한 토마스는 그제야 민호에게 이제까지 궁금했던 것을 물을 수 있었다.
“대체 뉴트랑 뭐 하는거야?”
“…뭐?”
“얼굴 마주칠 때 마다 외치는 숫자 말이야. 점점 커지기만 하던데.”
샌드위치를 크게 한입 베어 문 민호는 토마스의 말 중, ‘커진다.’ 라는 말이 들려오자 목이 막혔는지 기침을 하며 컥컥댔다. 깜짝 놀란 토마스가 얼른 민호에게 물을 건넸고, 민호는 다행이도 샌드위치에 의한 질식사는 면할 수 있었다.
“알아서 뭐하게.”
“궁금하잖아.”
“뉴트한테 물어봐. 그 녀석, 진짜….”
말을 하면서 무언가를 떠올린 모양인지 얼굴이 확 달아오른 민호는 얼른 고개를 휙휙 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어나, 신참.”
“어? 아직 반도 못 먹었는데…!”
토마스의 큰 한숨이 미로 안에 울렸다. 참 바보같은 짓을 했다고 생각했다.
*
주린 배를 문지르며 글레이드로 돌아오자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환하게 웃으며 둘을 반긴 뉴트는 어김없이 민호를 보며 숫자를 말했다. 그 숫자는 벌써 200을 넘었다.
“205. 됐어?”
“아니, 부족한 거 같아. 민호. 214.”
“뉴트…. 내 몸은 하나라는 걸 알아둬.”
“그럼, 물론이지.”
민호가 먼저 씻기 위해 숲속을 향해 가자, 토마스는 결국 뉴트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그를 붙잡았다.
“대체 그 숫자들, 뭐야?”
“응?”
“민호랑 주고받는 거. 민호한테 물어보니까 너 보고 물어보라고 그러던데.”
“민호 표정은 어땠어?”
“썩 좋았던 것 같진 않은데.”
토마스의 말에 뉴트가 눈을 찌푸리며 웃었다. 기분이 나빠 보이기보다는 오히려 좋아 보이는 그 웃음에 토마스는 고개를 갸웃했다.
“뭐긴 뭐야, 내가 그와 밤을 보내고 싶은 횟수지.”
“……뭐?”
“이봐, 토마스. 어린애같이 굴 거야?”
“…….”
“다른 애들한테는 비밀이야.”
쉿, 하는 제스처를 보인 뉴트는 금세 민호의 뒤를 쫓아갔고 방금 들은 말의 의미를 해석하는데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지식을 동원하던 토마스는 미로가 닫히는 소리와 함께 그 자리에서 펄쩍 뛰며 척에게로 달려갔다. 분명 뉴트가 말하는 주체는 그가 아닌데 창피함은 그의 몫인지, 토마스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고 그런 토마스의 얼굴을 보며 척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어디 아파? 라고. 토마스는 차마 열 살 남짓 되어 보이는 척에게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어 그저 입을 다물었다.
그런 토마스의 입이 뻥 뚫린 순간은, 다름 아닌 다음 날 아침 민호에게 건넨 뉴트의 숫자가 300을 넘어갔을 때였다. 토마스는 꼭 봐선 안 될 것을 훔쳐본 어린 소녀처럼 귀를 붉히며 비명을 지르고는 미로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왜 저러냐는 민호의 말에 뉴트는 그저 웃으며 민호에게 입을 맞추며 속삭였다.
“글쎄, 소년이 남자가 되려나?”
이해하지 못했다는 얼굴로 뉴트를 바라본 민호의 귓가에 낮은 목소리로 뉴트가 무어라 속삭이자, 아까의 토마스와 비슷한 얼굴로 미로 속으로 뛰어 들어가는 민호의 등 뒤로 뉴트가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토마스는 민호와 같이 지낸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미로 안에서는 그 누구보다 그를 잘 이해하고 있다고 자부했다. 물론, 토마스는 미로 안에서 뿐 아니라 미로 밖에서도 그를 이해하고, 그와 더 가까워지기를 원하는 사람이었다.
그들에게는 법칙이 있었다. 기억을 잃어버린 그들은 제 나름대로의 날짜를 정했다. 최초의 공터인, 알비가 그것을 시작했고 그 뒤로 뉴트와 갤리, 그리고 민호가 그 체계를 완성했다고 한다. 토마스는 오늘이 정확하게 몇 월 며칠인지는 몰랐지만 그들이 말하기로 오늘은 5월 21일이라고 했다. 그리고 유독, 민호의 얼굴에 그림자가 든 날이기도 했다.
미로 속으로 들어가는 그들을 배웅하는 것은 항상 뉴트의 몫이었는데, 토마스의 기우를 증명이라도 하듯 그 날은 뉴트가 미로로 들어가려는 민호의 팔을 붙잡았다.
“오늘은 가지 않아도 괜찮아, 민호. 아무도 뭐라고 할 사람 없어.”
“러너가 미로 안을 안 뛰면 쓰나.”
“…….”
“난 괜찮아, 뉴트. 그런 얼굴 하고 있으면 있던 기운도 다 날아가 버릴 거 같으니 썩 치워. 가자, 토마스,”
“어, 어.”
거의 울상을 짓는 것 같은 뉴트의 표정에 오히려 토마스의 속이 개운하지 않았다. 저 멀리 뛰어가는 민호의 등과 뉴트의 얼굴을 번갈아 보자 그제야 뉴트는 아직 출발하지 않은 토마스를 꾸중이라도 하듯 얼른 민호의 뒤를 따라가라며 가볍게 토마스의 어깨를 쳤다.
“민호를 부탁해.”
토마스는 굳이 뉴트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그것은 뉴트가 다시금 되새겨주지 않아도 토마스가 해야 하는 절대적인 것이었으니까.
*
그 날도 딱히 특별한 것은 없었다. 그냥, 아주 미묘하게 벽의 위치가 어디서부터 어디로 밀려났다거나, 하는 그런 사소한 것이었다. 대강의 정보를 기억한 토마스는 서둘러 글레이드로 발걸음을 돌렸다. 한참을 또 달리자, 어느 시점에서 민호가 발을 딱 멈췄다. 토마스는 민호의 행동에 적잖이 놀라며 걸음을 멈췄다. 적어도, 토마스가 알고 있는 민호는 - 쉬는 시간과, 점심시간을 제외하고는 - 절대로 미로에서 뜀박질을 멈추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아무런 말도 없이 한 자리에 멈춰 다른 미로의 벽과 별반 다르지 않은 벽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민호…?”
“그는 나보다 키가 컸어.”
“…….”
“나보다 발걸음이 빨랐을지도 몰라.”
토마스는 민호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민호는 토마스를 바라보지 않았다. 그저 미로의 벽을 보며 중얼거렸다. 간혹 가다 토마스가 알아듣지 못하는 말을 하는 걸로 봐서는 아마도 한국어를 좀 섞어 말하는 것은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었다. 토마스가 기억하기로 민호가 한국어를 쓰는 이유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아무도 한국어를 알아듣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주로 욕을 하는 것이었고 또 다른 하나는, 아무도 자신이 말하는 것을 몰라주기 바랄 때 한국어를 썼다.
토마스는 딱히 멍청한 소년이 아니었기 때문에, 대략적으로 이 상황을 유추할 수 있었다. 미로로 들어올 때 지었던 뉴트의 표정이나, 지금 민호의 표정이나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5월 21일. 토마스는 왠지 모르게 오늘이 기억 속에 유난히 깊게 새겨질 것 같았다.
“민호.”
“…….”
“가야해, 곧 해가 저물 거야.”
“…돌아가지 말까?”
민호의 말에 토마스는 말문이 막혔다. 옅게 웃으며 토마스에게 던진 말은 한국어도 아닌 영어였으며, 명백하게 토마스는 민호의 말을 알아들었다. 그렇지만 토마스는 그것이 진심인지, 아니면 거짓인지 분간할 수가 없었다. 적어도 미로 안에서는 그를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고 자부하고 있던 것이 산산조각이 나는 순간이었다.
“뭘 그렇게 놀라고 그래, 당연히 거짓말이지.”
“민호.”
“왜.”
어디서 튀어나온 용기인지, 아니면 겁 모르는 무식함인지는 모르겠지만 어느새 토마스는 민호의 팔을 단단히 잡고 있었다. 혹시라도 진짜로 사라져 영원히 다시 잡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무서워.”
“무슨….”
“매일 아침 미로로 들어오는 것, 언제 죽임을 당할지도 모르는 곳에서 쉬지 않고 달린다는 것. 그렇지만, 그 무엇보다도 널 잃는 건 더 무서워.”
“…….”
“그러니까, 그러니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
“힘들면 힘들다고 말해. 아프면 아프다고 말해줘. 울고 싶으면 울어도 된다고. 여긴 나 밖에 없어, 민호. 아니, 그… 이젠 나라도 있어, 라고 말해야하나…?”
“…신입 주제에 건방지긴. 헛소리하고 있네. 나 그렇게 약한 놈 아니야, 이 멍청아.”
“알아, 민호는 강하니까.”
싱긋 웃는 토마스의 얼굴을 보며 민호는 조금 놀라면서도,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어찌됐든 글레이드에 들어온 것도, 러너가 된 것도 며칠 되지 않은 초짜한테 위로를 받은 것은 사실이었다. 민호는 토마스의 눈을 피해 다시 한 번 미로의 벽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다시금 다짐하기로 했다. 네가 살지 못한 시간만큼, 악착같이 살 거야. 내가.
“늦었어. 가자, 토마스.”
“응.”
골목을 돌자 글레이드로 돌아가는 문이 민호와 토마스를 반겼다. 그 입구 혹은 출구 앞에 삼삼오오 모여 있는 글레이드의 아이들을 보며 민호는 - 한국말로 - 욕을 하는 것 같았다.
“뉴트 녀석, 유난 떨고 있기는.”
자세히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는 몰라도 토마스는 정말로 오늘을 잊어버릴 수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에게 있어 그 일은 순전히 토마스 자신이 없었던 과거의 일이었다. 그들만 알고 있는 사실에 조금 속상해하면서도, 이제 다시는 그런 일을 만들지 말자고 다짐했다. 아직 문이 닫히기 전의 여유가 조금은 있어 뜀박질을 멈추고 조금씩 걸어가는 토마스의 앞을 가로막은 민호가 다른 아이들이 들리지 않도록 가만히 속삭였다.
“솔직히 오늘 좀 넘어갈 뻔 했어. 아차, 싶었거든.”
“…?”
“참, 그리고 나도 똑같아. 그건 좀 무서울지도.”
“……뭐?”
한 발 먼저 글레이드로 돌아간 민호의 등을 멍청하게 보던 토마스는 아차, 하고는 전속력으로 민호의 뒤를 따라잡았다. 그리고는 놀란 가슴에 한층 뛰어버린 목소리로 민호의 이름을 불렀다. 토마스는 얼굴이 홧홧 달아오르는 것 같았다. 토마스는 아까 했던 말을 정정해야할 것 같았다. 토마스는 멍청이다, 그것도 이 세상 제일가는 멍청이였다. 아까 홧김에 민호에게 뱉은 말이 코러스처럼 머릿속을 울리지 않나, 아주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토마스는 지금 민호가 마지막으로 한 말의 의미를 확인하지 않으면 정말로 세계 제일의 멍청이가 될 것 같았다. 잔뜩 붉어진 얼굴로 민호의 이름을 외치던 그 날은 정말 평생 토마스의 머릿속에 길이 남을 날이었다.
어느 년도인지는 모르는 글레이드의 5월 21일이.
뭘까 이 똥은
네, 그렇습니다. 민호는 이미 다 알고 있습니다. 하긴 치프러너의 위엄이 있는데.
내가 연성하는 토민호는 주로 토마스>>>>>♡<<민호 같은..? 그러니까 민호는 딱히 토마스를 거부하지 않고 싫어하지 않는다는 느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