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단, 헌, 트으-"
"네네, 이단 헌트 여기 있습니다."
"시끄러워."
"브랜트, 앞으로는 술 너무 많이 마시지 마."

이단은 자꾸만 제 등에서 흘러내리는 브랜트의 몸을 단단히 받치기 위해 허리를 들썩였다. 풍채에 비하면 그다지 무겁지 않은 몸이 가볍게 떠오르다 이단의 어깨와 등에 안착한다. 브랜트는 연신 알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며 허공에 팔을 휘저었다. 그럴 때 마다 풍겨오는 쓴 술냄새에 이단은 집으로 돌아가면 다시 샤워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평소 브랜트는 술을 많이 마시는 타입은 아니었다. 술을 마시더라도 확실하게 적정선을 지키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아주 가끔, 이렇게 제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로 마시기도 한다. 그럴 때면 어김없이 이단의 전화로 메시지가 왔다. 이 녀석 좀 데려가. 누구의 것인지 모르는 문자가 브랜트의 번호로 오면 아주 당연하다는 듯, 이단이 브랜트를 데리러 간다.

"브랜트."
"왜."
"오늘은 누구랑 마셨어?"
"몰라아. 알게 뭐야, 망할."

CIA네. 이단은 다시금 몸을 들썩이며 브랜트의 몸을 제 등 위로 얹었다. 술에 잔뜩 취한 브랜트는 심각할 정도로 무방비하다. 이단은 그런 브랜트의 모습을 알고 있는 사람이 자신 뿐이라는 사실에 안도한다. 아마도 벤지가 알았다면, 브랜트는 평생 위장병을 달고 살았을 것이다. 매일, 매일 그의 놀림을 받으며 약을 삼켰겠지. 평소 몸가짐이 철저하고, 똑부러지는 사람이 술만 마시면 달라진다는 사실을 꽤 재미있기도 했다.

"브랜트."
"아, 또 왜."
"노래 불러봐."
"알게 뭐야아."
"그럼 내 이름 불러봐."
"이단. 됐냐?"
"좀 더 다정하게."

아이 씨, 별걸 다 시키네. 브랜트는 짜증을 내며 중얼거렸다.

"사랑하는 내 마누라야, 집에 좀 가자아."
"푸하, 내가 왜 네 마누라야? 마누라는 너잖아. 그러고보니, 마누라가 이렇게 밖에서 외간 남자랑 술 마시고 싸돌아 다녀도 돼?"
"뭐라는 거야.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내가 여자냐?"
"말이 그렇다는 거지."
"내가 네 진짜 마누라도 아니잖아. 이것도 다 망할 IMF 때문이야. 왜 내가 엄마고 네가 아빠야? 나가 뒤지라지."

이단은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다 길거리에 아직 남아있는 노점상 앞에 걸음을 멈췄다. 브랜트는 갑작스러운 이단의 행동에 흐릿한 눈을 치켜뜨며 물었다.

"뭐야."
"우리 결혼할까?"

브랜트는 이단의 어깨 너머 펼쳐져 있는 노점상의 물건들을 확인하고는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뭐야, 오늘따라 왜 이렇게 귀여운 짓을 해? 알록달록한 플라스틱 반지가 빼곡히 꽂혀있는 간이 진열대를 바라보던 브랜트는 새하얀 링을 손으로 가리켰다.

"그래, 그래, 까짓 거 좋다 이거야."
"진짜?"
"알았다고오."

장난스럽게 웃는 이단의 모습에, 노점상의 주인도 그저 술을 마신 친구에게 장난을 거는 친한 사람들의 대화라 생각한 모양인지 별 신경을 쓰지 않는 듯 했다. 이단은 브랜트가 가리킨 새하얀 플라스틱 반지를 계산하고는 브랜트에게 건네주었다. 

"집에가면 껴줄게. 잃어버리면 안 돼."
"잃어버리면? 결혼 못 해?"
"왜? 못하면 아쉬워?"
"글쎄?"
"그럼 다시 사러 와야지."

이단의 대답이 만족스러운지 브랜트는 큰 웃음을 터트리고는 곧 이단의 어깨위로 얼굴을 묻었다.

"브랜트."
"......"
"브랜트."
"부르지 좀 말아봐, 쪽팔려 뒤질 거 같으니까."

이단은 자신의 어깨가 파르르 떨리는 것을 느끼며 그가 최대한 웃음을 참고 있다고 생각했다. 이단은 장난스레 브랜트의 허벅지를 꽉 눌러 잡았다.

"으, 아, 진짜."
"언제부터 깨 있었어?"
"...반지 살 때부터 깨있었다. 알면서 묻긴 왜 물어?"
"그럼 진짜지?"
"그러는 너야말로 진심이야?"
"주례는 누구보고 서 달라고 할까?"
"오, 세상에. 미쳤네, 미쳤어."

다시 걸음을 옮기는 이단의 발걸음에 맞추어 콧노래를 흥얼거린 브랜트는 역시 벤지한테 봐달라고 하는 게 낫겠지? 하며, 이단의 귓가에 중얼거렸다. 이단은 제인이 낫지 않겠냐며 맞장구쳤고, 브랜트는 이단의 목덜미에 입술을 묻었다.










"아, 좀 같이 가자니까!"

"그러니까 내가 왜 그래야 하는데."


저런, 저런. 또 시작이군. 여유로운 손길로 방패를 닦던 스티브는 수건을 내려놓고는 저 멀리 복도의 끝에서부터 걸어오고 있는 두 사람을 보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울트론의 침공을 어떻게든 막아낸 이후로 어벤져스 타워는 한동안 조용했었다. 죽은 줄로만 알았던 피에트로가 기적적으로 생환하고 나서 며칠은 시끌시끌하기도 했지만 그것도 잠깐 뿐이었다. 사망 판정을 받았던 그가 어떻게 다시 살아날 수 있었는가에 대해서는 아무도 아는 바가 없다. 심지어는 비전도 인간의 생명력이란 참으로 대단한 것이라며 순수하게 놀라워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였을 뿐이다. 피에트로가 다시 살아났다는 사실 자체로도 기적은 확실했으나, 그는 3개월 동안 침대에 누워만 있었다. 하긴 그 상태에서 멀쩡히 돌아다녔다면 그게 더 웃기지. 몇 번은 다시 죽을 고비를 넘기기도 했고, 우여곡절을 수십번이나 겪고서야 그는 무사히 자리에서 일어날 수 있었다. 그리고 그의 옆에는 아주 당연하다는  완다가 있었고, 바튼도 있었다. 

스티브는 피에트로가 막 사망했을 때, 바튼의 얼굴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잊을래야 잊을수도 없다. 허무함, 죄책감, 슬픔 등 만감이 교차하며 그와는 대조되게 살아 숨쉬는 작은 아이를 들고 있는 그의 얼굴을. 바튼은 매일 같이 피에트로의 병실에 갔다. 주로 그가 잠든 새벽시간에 병실에 들어가 한참을 서성이다 그냥 나오고는 했지만, 피에트로는 그가 자신의 병실을 찾는다는 소식을 완다에게 들었을 것이다. 그 사실을 본인이 직접 얘기를 꺼낸 모양인지 언벤가부터는 아예 피에트로의 병실에 죽치고 앉아 있었다. 

피에트로의 병실은 쉴드의 새로운 기지 내부에 있던 것이라, 스티브도 종종 찾아가고는 했었는데 그 때 마다 병실의 문을 열어준 것은 바튼이었다. 완다는 새로운 어벤져스 육성 훈련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터라 하루종일 같이 있어주지 못한다는 까닭에 와 있는 것이라 설명하는 바튼을 보며 피에트로는 순전히 나 때문이 아니었던 거예요? 하며 깐족대었고, 결국 바튼이 항복선언을 했다. 그래, 너 얼른 나으라고 왔다. 됐냐? 피에트로는 그 말이 무척이나 듣기 좋다는 듯 함박웃음을 지었고, 스티브는 고개를 갸웃할 수 밖에 없었다. 두 사람이 언제부터 이렇게 사이가 좋았더라. 그러나 스티브는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다. 현 어벤져스의 멤버와 임시 어벤져스의 멤버가 친하게 지낸다는 것은 더할나위 없이 좋은 소식이었다.


"오, 세상에. 스티브, 당신 좀 귀엽네요."


언젠가 피에트로와 바튼이 부쩍 친해졌다는 사실을 나타샤에게 말했을 때 그녀의 반응은 스티브를 당황시키기에 충분했다. 나타샤는 아끼는 총을 손질하며 웃었다.


"호크아이는 제 곁을 그리 쉽게 내주는 남자가 아니에요. 3년을 같이 지냈으면서 아직도 모르겠어요?"


그랬던가? 스티브가 기억하고 있는 바튼은 꽤 유연한 남자였다. 다소 성격이 거친면도 있지만, 악한 것은 아니었고 둥글어야 할 때와 모나야 할 때를 잘 알고 있는 남자였다. 스티브의 반응을 보며 나타샤는 여전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뭐, 원래 클린트가 당신을 좋아해서 당신은 그런 걸 잘 못 느꼈을지도 모르겠네요."


그는 원래 좀 취향이 독특해요. 토르보다 묠니르를 더 좋아할걸요? 이런, 스티브는 방심하고있다 나타샤의 말에 잇몸을 드러내며 웃었다. 그게 벌써 몇주전인가. 피에트로는 바튼의 정성어린 간호에 모든 부상을 이겨내고는 병실을 떠날 수 있었다. 이미 훌륭하게 한 차례의 전투를 치른 바가 있으니 스티브는 별 무리없이 그를 바로 훈련 프로그램 참여자 리스트에 이름을 올렸고, 당연한 수순으로 그의 전담 요원의 이름에 바튼의 이름을적었다. 


"싫어요."

"...음?"


프로그램의 참여자 명단을 본 바튼은 매우 단호하게 스티브에게 자신이 맡을 훈련요원을 바꿔주던가, 아니면 교관 요원을 부임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스티브는 조금 당황한 티를 숨기지 못한채로 말했다.


"아니, 나는 자네 둘이 마음이 잘 맞는다고 생각했는데?"

"마음이 잘 맞는것과 훈련을 시키는 것은 다른 이야기죠. 그러다 파토나는 꼴 못 보셨습니까? 아, 이건 커플얘기네요. 논외."

"바튼...?"

"차라리 제가 완다를 맡을테니 냇한테 전해주세요. 네가 피에트로를 맡으라고."


평소에 부탁이라고는 잘 하지 않는 그였기에, 스티브는 얼떨결에 알았다고 했으나 문제는 또 다른 곳에 있었다. 언제 소식을 들은 건지 이번에는 뿔이 난 피에트로가 달려와서는 성을 내었다.


"왜 제 교관이 노땅이 아니에요?"

"......"

"나탸사는 완다 교관이잖아요."


스티브는 피에트로에게 바튼이 너 맡기 싫대, 라고 솔직하게 말해줘야 하나 수초간 고민했다. 그 뒤로 한참을 서로 싸우던 둘을 중재시킨 것은 나타샤였다. 나타샤는 현명하게 교관 바튼 하에 훈련 요원 피에트로&완다 막시모프의 이름을 올려 제출하였고, 바튼은 욕을 했다. 바른 말을 써야지. 나타샤가 바튼을 보며 비웃는 것이 왠지 모르게 조금 창피해진 스티브는 당분간은 절대로 팀원들에게 입조심하라고는 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했을 뿐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나타샤가 다시 완다를 맡게 되었고, 피에트로는 고스란히 바튼의 몫이 되었다. 요즘 쉴드 내에서는 피에트로와 바튼이 하루의 반나절 이상을 함께 보낸다는 빅 이슈에 들떠 있었다. 피에트로는 훈련 요원 프로그램에도 참여해야 했지만, 주기적으로 재활 훈련도 해주어야만 했다. 그 모든것을 지켜보는 사람이 다름 아닌 바튼이었으니, 그들의 입장에서는 재밌는 이야기임이 틀림 없었다. 

바튼은 꽤나 철저하기로 유명했다. 그가 어벤져로서 하는 노력과 고집은 상상을 초월한 것이었다. 쉴드내에 그것을 모르는 사람의 수가 적을 정도였다. 그런 바튼에 비하면 피에트로는 상당히 유연하고, 융통성이 넘치는 사람이었다. 술자리에서 만큼은 죽마고우가 될 수 있는 둘이라도, 쉴드 내에서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그들의 예상과는 전혀 다르지 않게, 그 둘은 훈련 시간만 되면 용과 호랑이가 되어 으르렁거렸고, 훈련인지 실전인지 모르는 대련을 통하여 화를 풀었다. 

피에트로는 바튼이 자신의 상대가 될 수 있을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도 그럴것이, 그를 볼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었다. 그래서 대련이 있을때마다 코웃음을 쳤다. 나는 캡틴도 보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노땅. 그러나 피에트로가 한 가지 간과한 것이 있다면,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스티브보다 눈이 좋은 사람이 바튼이라는 것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바튼이 피에트로를 완전히 볼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인가 바튼의 손에 잡힌 피에트로는 당황스러움을 숨기지도 못한채로 엎어치기 한 판을 당하고 나서야 그 잘난 입을 꾹 다물었다.


"뭐, 어떻게..."

"왜, 예상 못했어?"


이 씨, 얄미워. 자신을 보며 비죽이는 바튼을 보며 피에트로는 얼른 움직여 발을 걸었다. 그것은 예상하지 못했는지 꽤나 우스꽝스러운 소리를 내며 자신의 위로 엎어진 바튼을 보며 피에트로는 비명을 질렀다. 


"아, 왜 내 위로 쓰러지는 건데!"

"누가 발 걸랬냐, 이 멍청아!"


그 둘을 바라보던 완다만이 한심하다는 듯 웃고 있을 뿐이었다.





"아, 아파. 살살해, 완다."

"안 그러면 내일 근육통 올지도 몰라."

"으, 진짜 너무하지. 살살하는 법이 없어, 노땅은."


피에트로의 등에 파스를 붙여주던 완다는 조심스러운 손길로 피에트로의 흉터를 어루만졌다. 원형에 가까운 형태로, 일그러진 화상자국들은 아마도 평생 피에트로에게 남아있을 것이었다. 피에트로는 가만히 완다를 내려다보며 별 거 아니라는 듯 말했다.


"다 나았잖아. 이제 하나도 안 아프다니까."

"그래."


완다는 장난스레 파스가 붙어있는 피에트로의 등을 손바닥으로 찰싹, 소리가 나도록 쳤고 피에트로는 앓는 소리를 내며 침대위로 고꾸라졌다.


"피에트로."

"왜."

"그가 그렇게 좋아?"


피에트로는 자신의 옆에 누워있는 완다의 얼굴을 천천히 살펴보았다. 완다의 표정은 평소와 다름없었다. 그 사실에 아주 조금, 안도하며 말했다.


"그러는 너는?"

"난 좋아."


그는 내가 일어설 수 있게 해준 사람이니까. 피에트로는 쌍둥이라는 존재가 왜 영혼을 나누어가진 존재라 불리는 지 통감했다. 자신의 손을 꽉 쥐는 완다의 손을 다른 손으로 살살 쓰다듬으며 미소 지었다.


"아주 많이."





바튼은 숨을 쉬는 것도 잊은 사람처럼, 정면의 과녘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팽팽하게 당겨진 시위는 한 치의 떨림도 없었고, 화살은 정확하게 과녘을 향해 있었다. 실수는 없어, 하면 안 돼. 바튼은 습관적으로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바튼의 숨이 멈춘 찰나의 순간, 시위를 당기고 있던 손을 놓았고 화살은 물결을 치며 과녘을 향해 날아갔다. 바튼은 화살이 과녘에 꽂히는 소리를 좋아했다. 과녘을 빚맞추는 법이 없는 그에게, 화살이 박히는 소리는 성공을 의미한다. 그러나 화살이 날아간지 한참이 지났지만 그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피에트로."


마치 마법을 부린 것 처럼, 바튼의 앞에 소리소문없이 나타난 피에트로의 모습에 바튼은 드물게 긴 한숨을 내쉬었다. 피에트로는 당연히 바튼이 화를 내거나, 또 쓸데없는 짓을 했다며 한 소리 할 줄 알았다. 그러나 바튼은 묵묵히 한숨을 내쉬고는 피에트로의 손에 들린 화살을 가져갈 뿐이었다. 그의 얼굴은 무척이나 침착했고, 차분했다.


"노땅...?"

"...실수한 줄 알았잖아."

"아니, 그-"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는 실수해서는 안 돼. 그게 내 일이야.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야."


바튼은 화살을 화살통에 다시 넣었다. 오늘은 훈련 없어. 그러고는 돌아서는 바튼의 앞을 가까스로 막은 피에트로는 울상을 짓고 있었다. 바튼은 무심코 자신이 사소한 실수를 저질렀다는 생각을 했다. 자신의 책임을 굳이 다른이의 어깨에까지 올릴 필요는 없다. 겁부터 잔뜩 주다니. 교관 실격이군.


"미안해, 그럴 생각은 아니었어. 나는 그냥."

"됐어. 다음에 또 이런 장난을 하면 그 땐 네 팔이 날아갈지도 몰라."


펑, 장난스레 말하는 바튼을 보며 피에트로는 웃지 않았다.


그 뒤로 피에트로는 절대로 바튼이 활을 쏠 때에는 근처에도 가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멀리서 그런 바튼의 모습을 가만히 지켜볼 뿐이었다. 바튼은 어느 순간부터 지긋지긋하게 따라붙는 시선이 이상할 정도라고 생각했다. 그러면서도 딱히 피에트로를 부를만한 이유를 만들지 못해 묵묵히 활만 쏘았다. 아, 이건 빗나갔군. 몇번째인지 모를 시위를 놓자마자 바튼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러나 바튼의 예상과는 다르게 화살은 정가운데에 꽂혔다. 바튼은 피에트로를 바라보았다. 처음에 있던 그 자리에 가만히 서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피에트로와 눈이 마주쳤다고 생각한 순간, 바튼은 피에트로를 불렀다.


"이리와."


피에트로는 순순히 바튼의 곁으로 왔다. 그가 근처에 오자마자 확 끼치는 단내를 맡으며 바튼은 장난스레 말했다.


"내가 알고 있는 사람중에 당뇨에 걸린 사람이 있는데, 잘 때 말고 6시간에 한 번씩 인슐린을 맞지 않으면 죽는 녀석이 있어."

"...어, 어."

"작작 먹어라."


바튼은 질색하는 피에트로의 머리를 거칠게 쓰다듬고는 말했다.


"사람이라면 실수를 할 수도 있어, 그렇지?"

"...그렇지."

"그런 내가 실수를 하지 않도록 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에 감사해."


고맙다. 살아있어줘서. 그 순간, 피에트로는 머리를 얻어맞은 것처럼, 머릿속이 새하얬다. 그에게 이런 말을 들을 줄이라고는 상상도 못하고 있었다. 그 때, 그 선택은 순전히 자신의 선택이었고 그 결과로 바튼과 소년은 목숨을 구했다. 피에트로는 바튼이 자신의 병실에 왜 눌러 살았는지도 얼추 짐작하고 있었다. 한 번은 그에게 더 이상 오지 않아도 된다, 라고 말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피에트로는 지금 바튼이 말하는 '실수'가 순전히 화살이 빗나간 것을 말하는 게 아니란 것을 깨달았다. 


"그러니까, 안 그래도 된대도 그러네. 언제까지 날 꼬맹이로 볼 생각인거야?"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며 자신을 올려다보는 바튼을 보며 피에트로는 그에게 입을 맞췄다. 미안, 완다. 나 죽을지도 몰라. 그러나 한 편으로, 피에트로는 절대로 두 번 다시는 죽지 않을 것이라 다짐했다. 자신의 삶이, 자신이 살아있다는것이 바튼에게, 그만한 의미가 있다면 얼마든지 다시 한 번 죽어도 악착같이 살아날 것이다.


"좋아. 나도 할 말 있어."

"......."

"나 노땅 많이, 좋아해."


피에트로는 활짝 웃어보였다.











작성자: 벤자민 던



1.

며칠전의 일이었다. 오랜만에 임무를 모두 마치고 시간적, 정신적 여유가 생긴 팀은 하나같이 술을 외쳤고 그들은 그렇게 모였다. 정부 기관 요원들의 삶이란 그러했다. 하나같이 목숨을 담보로 일을 시작하여 끝마치고는 그간의 고통과 비명을 잊기 위해 부러 더 몸부림친다. 자신도 예외는 아니었다. 지금 당장이라도 귓가에서 폭탄이 터지기 3초 전의 타이머가 울리고 있는 것 같았고, 가끔 꿈에서는 자신이 쏴 죽인 놈이 나타나 깜짝깜짝 놀래키기도 한다. 잠깐이라도 이를 잊어버리고자, 무사히 이 세상으로 다시 돌아왔다는 것을 축하하고자 그들은 술잔을 부딪힌다. 비록 내일 써야하는 시말서나 보고서가 산더미 같이 쌓여있어도, 당장 다음 임무에 투입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서도. 

"다트 게임에서 진 사람이 술 값 내기!"
"감당할 수 있겠어요? 벤지가 가장 많이 마셨는데?"
"나는 내일 비번이거든!"

그러자 헛웃음을 터트리며 브랜트가 비웃었다. 네가 비번이면, 나는 탈주 요원이게? 벤지는 브랜트의 앞에 가득 쌓여있는 술병을 모른채 했다. 그는 저래봬도 주량이 상당했다. 아마 당장 내일 그를 기다릴 시말서와 보고서를 위해서라도 모른척 해야만 했다. 벤지는 저 멀리 보이는 다트게임을 가리켰다. 그러자 모두가 그것을 보고는 웃음을 터트렸다. 지금 IMF의 요원들에게 다트 게임을 하자고 하는거야? 하하하. 벤지도 능청스럽게 따라 웃어보인다. 벤지는 그들 모두가 하나같이 자존심이 조금 높은 사람들이라는 것을 안다.

"그러니까 하자는 거지. 그렇게 웃는 걸 보니 다들 사격실력에는 자신이 있다는 거겠지?"
"좋아요, 하죠. 정중앙을 맞추지 못하는 사람은 요원 실격이라구요."

뭐야, 세게 나오네. 당당하게 자리에서 이러난 제인은 가게 주인에게 다트 게임의 대한 비용을 우선 계산하고는 핀을 들었다. 술을 아무리 마셨어도, 누가 뭐래도 그들은 공식 정부 기관의 요원이었다. 가벼운 손놀림으로 핀을 던진 제인은 휘파람을 불었다. 아주 쉽게 가운데에 꽂히는 다트핀을 보며 펍의 사람들이 박수를 칠 정도였다. 벤지의 예상은 기가막히게 들어맞았다. 그 다음으로 핀을 던진 주자는 이단이었는데 그는 아예 세개를 동시에 던졌다. 이런 미친. 벤지는 욕을 뱉었고, 브랜트는 네가 정녕 인간이 맞느냐, 라는 시선으로 이단을 바라봤지만 이단은 어깨를 으쓱여 볼 뿐이었다. 물론 모든 핀은 중앙에 꽂혔다. 

"예스!"

벤지도 가볍게 다트를 중앙에 다 꽂아두고는 여유롭게 브랜트에게 핀을 넘겼다. 브랜트는 조금 자신이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표정이 왜 그래요?"
"술을 너무 많이 마셨잖아."
"에이, 약한 척 하지 말지 그래! 네가 현장요원이었다는 사실이 알려진게 벌써 몇개월 전의 이야기인줄 알아?"

브랜트는 정말 자신이 없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났고 위치에 서 핀을 들고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선만 안 넘으면 어디서 던지든 자유지?"
"뭐? 그렇기야 하지만... 왜?"

할 말을 마친 브랜트는 다트핀을 들고는 멀찍이 떨어졌다. 어디까지 가는 거야? 라고 물으려던 찰나 브랜트가 다트핀을 던졌고, 그 핀은 어마어마한 바람소리와 함께 과녘에 꽂혔다. 

"......"
"......"

방금 뭐가 지나간거지? 총알? 화살? 어안이 벙벙해진 벤지가 과녘과 브랜트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이단은 조금 억울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브랜트를 바라보았다. 마치 그러는 너는 나한테 그럴 말 할 처지야? 라고 묻듯이. 결국 그 날 술값은 벤지가 계산하기로 했다.




2.

"미친 거 아니야? 총알이 떨어져?"
"그치만 정말 다 썼다고!"

당황스러움이 그대로 묻어나오는 벤지의 표정과는 다르게 브랜트의 표정은 의외로 침착했다. 그래보여도 사실은 브랜트도 곤란하기 짝이 없었다. 지금 당장 달리는 기차 안, 다리 위에서 한 판 크게 싸움을 벌이고 있는 이단을 돕기 위해서는 반드시 저격총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그러나 오늘도 IMF 이단 헌트의 팀은 <실패, 혹은 요원의 정체 발각시 대통령과 IMF의 국장은 이 사실을 전면 부인할 것이며...>로 시작되는 지령을 받았고, 턱없이 부족한 지원에 혀를 내둘렀다. 그래도 고스트 프로토콜보다는 낫잖아. 애써 위로하는 벤지를 보며 브랜트는 영혼없이 웃어보였다. 그 일만 아니었어도. 아쉬운대로 장비 가방을 뒤져보는 벤지에게 브랜트가 소리쳤다.

"활, 활 있어?"
"뭐? 활?"

이게 무슨 귀신 시나락까먹는 소리야. 벤지는 정말로 어이없다는 얼굴로 브랜트를 바라보았지만 브랜트의 표정은 한 없이 진지해보였다. 닥치는 대로 브랜트도 장비 가방에 들러붙어 이러 저러한 장비들을 내던지고있을 때 쯤, 벤지는 정말 믿을 수 없다는 목소리로 브랜트를 불렀다.

"이, 있어... 활."

진짜 이 조직은 미친 게 분명해. 벤지는 정말 황당하는 얼굴로 장비상자에 고스란히 담겨있던 활을 바라보았고, 브랜트의 얼굴에는 화색이 돌았다. 내가 총은 다뤄봤어도, 활은, 하며 말을 하는 벤지의 손에서 상자를 가져온 브랜트는 아주 능숙한 손길로 활을 고정하고 있던 장치를 전부 해체시키고는 단 한번에 활을 펼쳤다. 고전 영화나 드라마에서 볼 법한 나무 활이 아닌, 딱 봐도 위험해보이는 무기의 모습에 벤지는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너나 이단 헌트나 똑같아."
"그럴리가."

브랜트는 진심으로 질색한 얼굴로 고개를 저어보이며 열려있는 문을 통해 활을 겨눴다. 덜컹거리는 소리와 함께 반짝이는 빨간 불빛이 어느 한 지점에 멈춘 순간, 브랜트의 숨도 멈춘 것 같았다. 벤지는 저도 모르게 꿀꺽 침을 삼켰고, 브랜트는 팽팽하게 시위를 당기고 있던 손을 놓았다. 벤지는 태어나서 화살이 바람을 가르고 날아가는 소리를 처음 들었다. 그건 총알이 나가는 소리와 비슷하면서도 어딘가 더 날카로웠다. 

[화살?]
"터미널에서 만나."
[그래.]

정말 말도 안된다고 생각했지만, 미션은 성공했다. 




3.

브랜트는 정말 유능한 요원이었다. 벤지는 얼마든지 브랜트를 그렇게 평가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자신도 현장요원이긴 했지만, 벤지의 앞에는 브랜트와 그 앞에는 이단이 있었다. IMF에 선후배 개념은 희미했다. 직책이 모든것을 말해줄 뿐이었다. 그렇지만 파벌 싸움은 어디에도 있는 법이었다. 브랜트는 그 중심에 있었다. 그는 현장 요원에서 분석 요원으로 전향한 이후에도 현장 요원 부서와 원만한 교류 관계를 이어가고 있던 모양이었는지, 그의 전화 한 통이면 도움을 줄 사람이 여럿이었다. 그건 현재 그가 몸담고 있는 분석 요원 부서도 마찬가지였다. 벤지는 브랜트가 어떻게 단기간만에 국장을 보좌하는 요원이 될 수 있었는지 실감했다.

"그래도 뭔가 아까운데."
"뭐가?"
"왜 브랜트는 다시 현장일을 하지 않는거야?"
"낭비니까."
"낭비?"

벤지의 술병을 제 것을 부딪힌 브랜트는 병으로 이단을 가리키며 말했다.

"현장에는 이단이 있잖아. 굳이 나까지 있을 필요 없어. 그럼 이 팀에서 가장 부족한 부분을 내가 채우는게 가장 효율적이니까."
"가장 부족한 부분?"
"계획성, IMF에 대한 배려, 자제성 등등."
"뭘 또 그렇게까지 말하냐."

그러나 벤지는 브랜트의 말에 딱히 반박할 말을 찾지 못했다. 실제로 모든 미션을 시작하기 전에 브랜트가 컨트롤 타워에서 내려주는 계획을 우선순위로 시작을 하지만 현장은 전적으로 이단의 판단하에 굴러간다. 그런 상황을 모두 지켜보며 분석하고 판단하여 최선의 루트를 당장 내놓는게 브랜트였다. 그리고 벤지는 자신이나 이단이나 서류에는 잼병이라는 사실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특히, 이 놈의 IMF는 더하면 더했지 절대 덜하지 않았다. 그 모든 서류를 책임하에 작성하고 결제를 올리는 것이 브랜트였다. 벤지는 새삼 브랜트가 대단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이단에게 시시콜콜 시비를 거는거야?"
"내가?"
"그래. 이단이 이렇게 하자고 하면 모든 사람이 다 yes, 라고 외칠 때 너만 no, 라고 하잖아."

그러자 옆에서 가만히 그 말을 듣고 있던 이단이 드물게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브랜트는 그런 이단이 못마땅한 듯 그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찍으며 말했다.

"너희들이 그러니까 이 녀석이 더 날뛰는 거 몰라? 해도 적당히 해야지."
"하하, 브랜트는 다섯번 중 한 두번은 일부러 그러기도 해."
"일부러?"
"그래. 이 녀석한테는 no, 라고 말해줄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해. 그럼 약간은 덜 무모해지거든. 그러고보니 그것도 이 팀에는 가장 부족한 거지."

따지고 보면 그 말은 사실이었다. 모두가 이단에게 그러라고 할때, 브랜트만은 그러지 말라고 한다. 그러면 항상 이단은 브랜트에게 자신의 계획을 설명하고 설득한다. 그 과정에서 브랜트는 이단에게 더 좋은, 하다못해 차선책이라도 마련해주고는 했다. 벤지는 순수하게 감탄하며 턱을 괴고는 이단과 브랜트를 바라보았다. 언제 이렇게 사이가 좋아졌더라?




4.
결론: IMF의 이단 헌트 팀은 귀하가 염려하고 계시는 문제에 대하여 전혀 신경을 쓰실 필요가 없으며, 팀워크 또한 돈독합니다. 아주 가끔 수석 분석 요원 윌리엄 브랜트를 현장 요원으로 채용하는 것을 허락하여 주신다면 더 염려하실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브랜트까지 현장에서 뛰면 이 팀은 무적이거든요! 

하고 :D. 
벤지는 그렇게 마무리를 짓고는 노트북을 닫았다. 

그리고 얼마 후, 벤지의 보고서는 브랜트의 손에 의해 파쇄기 안으로 들어갔다. 벤지는 비명을 질렀다. 내가 3시간 동안 열심히 쓴 보고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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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고 해봤자 2개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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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단브랜





오늘은 좀 늦네. 브랜트는 들여다보던 서류를 내려놓고는 노트북을 덮었다. 뻑뻑해진 두 눈을 비비며 하품을 내뱉는 품이 하루이틀의 것이 아니란 사실이 조금 안타까웠다. 벌써 새벽 3시가 넘은 시간이었지만 돌아올 생각을 하지 않는 이단을 생각하며 브랜트는 소파에 몸을 뉘였다. 어느샌가 집에 하나뿐인 침대는 이단과 고양이 한 마리의 차지가 되었으니, 브랜트는 무심코 헛웃음을 뱉었다. 그러자 쥐도새도 모르게 바닥에서 솟구쳐 올라온 몸뚱아리가 배 위로 앉는 것을 보며 브랜트는 신음했다.


"이봐, 넌 이제 그렇게 가벼운 꼬맹이가 아니라고. 그렇게 폴짝폴짝 뛰어오르다 내가 내장 파열이라도 당하면 어쩌려고 그래?"


야옹. 그러거나 말거나. 꼭 그렇게 대답하는 것 같아 괘씸하다는 생각이 든 브랜트였지만, 어쩌랴. 로이는 강아지가 아니었다. 한 마리의 도도한 고양이다. 그래, 내가 네 집사지. 길쭉한 팔 다리를 쭉 뻗고 자신의 배 위에서 잠을 청하는 로이의 몸을 토닥, 토닥 두드려주었다. 꽤 실망한 기색이 역력해보이는 표정에 브랜트가 웃으며 말했다.


"안 와서 섭섭해?"


...야옹. 풉, 이상하리만치 긴 침묵에 이어진 의기소침한 목소리에 방심하고 있던 브랜트는 그대로 참지 못하고 로이의 면전에 대고 웃음을 터트렸다. 미운 정도 정이라고, 그새 그렇게 정이 들었구나. 그러자 그런 브랜트의 모습이 불만이라는 듯 앞발로 브랜트의 입을 꾹 막아버리는 로이를 보며 브랜트는 부드럽게 로이의 머리와 목을 쓰다듬었다. 로이에게 그렇게 물어놓고, 막상 대답을 하고 싶은 것은 브랜트 본인이었다. 응, 그래. 섭섭하네. 딱히 이단에게 항상 이 집으로 돌아올 것을 요구한 적도, 그러겠노라 약속을 받은 적도 없었다. 그는 자신이 원할때면 언제든지 브랜트의 집으로 찾아올 수 있었고, 브랜트 또한 얼마든지 그에게 문을 열어줄 수 있었다. 대부분 이단이 브랜트의 집 문을 열고 들어오는데, 브랜트는 단 한번도 이단에게 집 비밀번호를 제대로 알려준 적이 없다. 

이제 슬슬 한계다. 내일도 가면 헌리가 눈을 부릅뜨고 그의 팀이 저지른 일에 대해 줄줄이 늘어놓으면 브랜트는 맞장구를 치며, 그러게요. 그 인간이 또 왜 그럴까요, 하면서 위장약과 소화제를 한웅큼 그의 손에 쥐어주어야 했다. 그런 그의 앞에서 자신까지 동태눈을 하고 꾸벅꾸벅 졸고 있으면 그 사람좋은 IMF 국장도 폭발해버릴지 모른다. 그르릉, 기분 좋은 소리를 내며 숨을 고르는 로이를 보며 브랜트도 눈을 감았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철컥, 하며 문이 열리는 소리에 로이가 재빨리 바닥으로 뛰어 내렸다. 워낙 이런 일이 자주 있어, 이 시간이면 이단이 온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 로이였지만 오늘따라 이상하게 안절부절하며 애달픈 목소리로 울었다. 무언가 일이 잘못됐다는 불안감이 브랜트를 덮쳤다. 서둘러 현관으로 나간 브랜트는 자신을 보며 웃으며 인사하는 이단을 보며 말문이 턱 막혔다.


"늦어서 미안해."


얼른 이단의 곁으로 간 브랜트는 이단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겹치며 더욱 세게 그의 옆구리를 눌렀다. 고통에 잔뜩 일그러진 목소리가 이단의 입에서 흘러나오자, 브랜트는 상황의 심각성을 다시금 깨달았다.


"병원 가자."

"신분을 증명할 방법이 하나도 없어."

"ID 카드 만드는 데 얼마 안 걸려."

"출근하자마자 헌리한테 불려가게?"


그럼 어떻게 하자고, 소리를 지르고 싶은 것을 꾹꾹 눌러담은 브랜트는 조심스럽게 이단의 몸을 소파쪽으로 옮겼다. 그 와중에 침대는 절대 안 된다고 아우성치는 이단을 차라리 한 대 쥐어박아 기절시키고 나서 병원에 데려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은 브랜트였으나, 평화롭게 해결하기로 했다. 세 번 참으면 살인도 막을 수 있다는 어느 나라의 말도 있으니. 딴 소리지만, 이단 헌트는 정말 끔찍할 만큼 병원을 싫어했다. 그의 몸이 워낙 튼튼한 터라 다른 사람은 당장 중환자실로 달려가야하는 부상에도 그는 꿋꿋하게 모든 상처를 자연적으로 치유되도록 최소한의 조치만 취하는 것을 더욱 선호하는 사람이었다. 브랜트는 가끔 이러다 정말 그가 자기도 모르는 곳에서 쓰러져버리는 것은 아닐까, 라는 생각도 했다.

최대한 조심스럽게 그를 소파에 앉히고는 따뜻한 물과 수건을 가져와 그의 앞에 앉았다. 그나마 상처가 심각할 정도는 아니라 다행이라는 생각 따위를 하며 할 수 있는 응급처치를 모두 끝낸 브랜트는 덜덜 떨리는 손을 애써 감췄다. 다른 사람의 상처를 치료하는 것은 영 정신 건강에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이 하물며, 상대가 이단이라면 더더욱. 나즈막이 한숨을 내쉬는 브랜트는 이단의 것으로 빨갛게 물든 손을 벅벅 닦아냈다. 적당히 우린 보리차를 한 컵 가져다주려 다가가자, 이단은 지금 벌어진 상황을 믿을 수 없다는 듯 브랜트를 바라보았다.


"가끔 다쳐도 될 거 같은데?"


허, 기가막혀. 이단은 뻔뻔한 얼굴로 웃고 있었고, 그의 곁에는 드물게 로이가 발톱도 세우지 않은 채로 얌전히 이단의 옆구리에 몸을 파묻고 있었다. 브랜트는 탁, 소리가 나도록 테이블 위에 물컵을 내려놓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 녀석은 피냄새가 싫은거야."


이단의 옆에 자리를 잡고 앉은 브랜트가 조심스럽게 로이를 안아들고는 어린 아이를 달래듯 어루만졌다. 브랜트는 꼭 엄마가 아이들을 재울 때 들려주는 이야기를 말하듯이 사근사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이 녀석을 처음 만난 날, 음, 한 5개월 전 쯤. 그 날, 나도 너처럼 총에 맞아서 이를 악물고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지. 정부 기관 요원들은 하나같이 병원을 안 가는게 관례인가? 뭐, 나도 병원은 싫더라. 아무튼 그렇게 길을 가다가 골목길에 쓰러져 있는 이 녀석을 발견한거야. 차에 치인건지, 아니면 누구한테 죽도록 맞았는지 이 녀석도 피를 흘리며 그 자리에 죽은 듯이 누워있었어. 처음엔 죽은 줄 알았지. 그런데 살아있다는 걸 안 순간, 허벅지에 총을 맞았다는 사실도 잊고서는 이 녀석을 안고 아무 동물병원이나 쳐들어갔지, 그 새벽에."


브랜트는 그 때 자신이 한 짓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정말 바로 경찰에 신고받아 다음 날 감방에 들어간다고 해도 할 말이 없을 정도로, 허벅지에 총을 맞은 채 피투성이의 고양이를 안고서 지금 당장 문을 열어 달라고 소리치던 자신의 모습이 얼마나 무섭고 당황스러웠을까. 그러나 인심좋은 동물병원의 수의사는 진료시간이 끝난지 한참이 지났지만 브랜트에게 병원문을 열어주었고, 브랜트는 그에게 고양이를 안겨주었다. 수술은 무사히 끝났고, 처음에는 고양이의 피인 줄 알았던 게 알고보니 브랜트의 허벅지에서 나온 피였다는 것을 알아챈 수의사에게 죽도록 혼나고서는 인생 처음으로 동물병원에서 치료를 받았다. 


푸하, 그게 말이 돼? 사람이 동물병원에서 치료를 받았다는게. 마치 술 한잔 걸치고 얘기하듯 호탕한 웃음을 섞어가며 말하는 브랜트를 보며 이단은 소리내어 웃지 않았다.


"자기 피냄새도 맡기 싫은데, 남의 것을 맡는 기분은 어떻겠어."


그 어느때보다도 더할 나위 없이 진지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브랜트에게, 이단은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브랜트는 그가 자신의 의견에 동의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나랑 약속 하나만 하자."


이단은 브랜트를 재촉하지 않았다. 그저, 그가 먼저 말을 꺼내기를 기다릴 뿐이었다.


"이미 알거라고 생각하지만, 우리집 비밀번호는 7317이야."

"그래."

"무슨 뜻인 줄 알지?"


부드럽게 브랜트의 콧등에 입을 맞춘 이단이 브랜트의 귓가에 속삭였다.


"일 끝나면 꼭 집으로 올게." 


이단의 대답이 마음에 든 모양인지 잔잔한 미소를 지은 브랜트는 제 품에 안겨있는 로이의 눈을 손으로 덮어버렸다. 그거 알아? 네가 우리집으로 들어온지 3개월 만의 첫키스야. 이단은 작게 웃으며 브랜트에게 키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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