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윌리엄 브랜트는 베타 형질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다. 브랜트는 자신이 베타라는 사실이 만족스러웠다. 휘두를 필요도 없고, 휘둘릴 필요도 없는 딱 중간에 서 있는 사람. 브랜트는 자신의 역할이 어딘가에 치우쳐있지 않다는 사실이 좋았다. IMF는 대대적으로 모든 요원을 알파 혹은 베타 형질만 뽑았다. 딱히 오메가 형질을 차별하려는 의도는 아니지만, 브랜트는 자신이 오메가가 아님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안 그랬으면 이 빌어먹을 직장이라도 들어오지 못했을 것이다. 시시콜콜 요원들이 떠들고 다니는 이야기는 거의 대부분이 형질에 관한 것이었다. 오늘은 누가 누구의 페로몬을 잔뜩 집어쓰고 왔니, 건너편 누구랑 누가 같은 향기를 낸다더라, 등. 브랜트는 그 시시콜콜한 이야기는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그들이 그렇게 말한다 한들, 어차피 브랜트는 건너편 부서의 사무 요원의 체향이 어떤지 모른다. 


"오, 왔어?"


반갑다는 듯 인사하는 벤지의 목소리에 브랜트는 고개를 들어 이단을 바라보았다. 그러고보니, 이단에게서는 무슨 향이 날까. 문득 스쳐지나가는 생각에 브랜트는 화들짝 놀랐다. 누구 향이 뭐가 어째? 우웩. 이단은 자신을 보며 미간을 잔뜩 찌푸리는 브랜트를 보며 무심코 이번엔 아무 위성도 안 썼어! 라고 대답했다. 브랜트는 헛웃음을 지었다.




2.

언젠가부터 진득하게 따라붙는 시선이 하나 둘씩 생겼다는 사실을 모르진 않았다. 단지 브랜트는 그들이 왜 자신에게 관심을 두는지에 대해 관심이 없었을 뿐더러 이해할 수가 없었다. 브랜트는 아무런 특징도 없는 베타였다. 이 세상에 널리고 널린 -건 아니지만- 알파와 오메가가 서로 붙어먹기도 아까울 시간에 왜 자신에게 그렇게 관심을 두려는지를 이해할 수 없었다. 브랜트의 꿈은 소박했다. 알파도, 오메가도 아닌 평범한 베타 형질의 사람과 연애하고 결혼하는 것이다. 브랜트는 맥주를 한 잔 들이키면서 추파를 던지는 사내들을 자연스럽게 웃어 넘기며 말했다.


"미안, 난 베타라서요. 아무것도 느낄 수가 없네요. 당신의 매력을 알아주는 사람을 만나요."


아쉽게도 브랜트는 그 말이, 그 배려가 더욱 그들의 구미를 당기게 한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3.

대체 왜 내가 그 빌어먹을 알파들한테 인기가 많은거야? 어느새 IMF의 시시콜콜 소식통에는 온통 브랜트의 이름으로 가득찬 이야기들이 오갔다. 평소 그런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던 것은 그 주체가 자신이 아니기 때문이어서도 그랬지만, 자신과는 하등 관계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본부로 들어오면 사람들의 시선이 따라붙었다. 그래, 그 망할 펍에서처럼! 같은 형질의 베타인 벤지도 영문을 모르겠다면서 브랜트를 보며 사고를 쳤냐, 물었고 브랜트는 화를 꾹꾹 눌러 담았다. 몰라, 모른다고. 


여느때처럼 미션에서 돌아온 이단이 묘한 표정을 지으며 브랜트의 목덜미 근처에서 코를 킁킁대며 냄새를 맡지 않았더라면 브랜트는 영영 몰랐을 것이다. 그들이 은연 중에 브랜트에게 페로몬을 묻히고 다녔던 사실을. 브랜트는 그 날 2시간 동안 샤워를 했다.




4.

"자네의 사생활에 대해서 뭐라고 할 생각은 없지만, 그..."

"저한테서 매일, 매일 다른 놈의 냄새가 난다구요?"

"크흠, 뭐, 그렇지."

"-빌어먹을."

"브랜트?"

"제가 그런 거 아닙니다."


헌리는 아주 단호한 브랜트의 태도에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5.

브랜트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자신이 알파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서로에게 본능적으로 호감을 느끼며 상대의 향이 좋다고 느끼는 알파와 오메가의 사이와는 달리 알파들끼리는 서열을 가리기 위해 서로 견제를 목적으로 으르렁 거린다고 들었는데, 지금 브랜트에게는 그게 너무 절실했다. 오메가가 아니니 알파의 향에 넋을 놓고 취할 일이 없어 브랜트에게 작업을 걸려고 하는 그 모든 사람들은 맨정신의 브랜트를 쓰러트려야만 했다. 그러나 브랜트는 결코 호락호락한 남자가 아니다. 그러니 그 일이 성공할리가 있나. 그렇게 작업을 걸면서 은근히 뿌리고 가는 향내 덕분에 온갖 소문을 달고다니는 주인공의 스트레스는 순전히 브랜트의 몫이었다. 알파, 빌어먹을 알파...


"뭘 그렇게 고민해?"

"아-."


알파. 브랜트는 급하게 이단의 몸을 끌어안으며 절절한 목소리로 매달렸다.


"이단, 너 알파지? 알파 맞지?"

"그런데?"

"나 좀 도와줘. 이러다 온 세상의 모든 알파들을 다 쏴버릴 지도 몰라."


워워, 그럼 안 되지. 나도 알판데. 영문은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브랜트는 도움이 절실해 보였기에 이단은 브랜트의 등을 조심스럽게 토닥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6.

그 다음날부터 브랜트는 어디를 가든 이단을 데리고 갔다. 거의 모든 시간을 내내. 서점을 갈 때도, 카페에 갈 때도 항상 보디가드처럼 이단을 데리고 다녔다. 이단은 자신이 왜 브랜트의 일일 경호원이 된 것인지 머리로는 잘 알고 있었지만 영 와닿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브랜트의 산책 루트는 간단했다. 카페에서 커피를 산 뒤, 호숫가를 걸으며 가볍게 운동을 하고 그 다음에는 펍으로 간다. 이단은 모쪼록 하루라도 브랜트를 위해 제 시간을 할애하기로 했다. 만약 정말로 브랜트가 온 세상의 알파를 다 쏴버리고 싶은 마음이 들면 안 될 일이었으니.


그러나 펍으로 딱 들어선 순간, 이단은 피부로 와닿는 시선에 벌써부터 피곤해지는 느낌이 역력했다. 이런 시선을 받고 있었단 말이지. 이단은 브랜트 모르게 뒤에서 헛웃음을 지었다. 어쩌면 브랜트가 베타라서 다행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안 그랬으면 무슨 엄한 일을 당하거나, 벌써부터 어느 한 놈의 얼굴을 새로 맞춰주고 있을지 알 수 없었다. 한 쪽에 자리를 잡고 앉은 브랜트는 순전히 이단에게만 시선을 쏟았다. 다른 사람은 거들떠 보기도 싫다는 듯이.


"평소에도 이래?"

"알파는 뭔가 다른게 느껴져?"


아주 많이. 이단은 말 없이 어깨를 으쓱여보이며 브랜트가 내민 잔을 받았다. 실로 피곤했다. 그 사이 몇몇 사람들이 브랜트에게 다가왔지만 그럴 때마다 이단은 은근히 브랜트의 어깨를 감싸거나 장난스럽게 허리를 감싸며 웃어 보였다. 그런 이단의 행동을 본 남자들은 아쉽다는 듯 혀를 차며 브랜트에게서 멀어졌지만 이단은 한참이나 주위를 살펴야만 했다. 


"진작 너한테 도와달라고 할 걸. 오늘은 귀찮게 하는 사람이 한 명도 없잖아."

"IMF의 수석 분석요원이 이렇게 인기가 많을 줄 몰랐는데."


이단은 진심으로 피곤해졌다. 원래 알파들의 기싸움이라는 게 호락호락한 것만은 아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이단이 그 누구에게도 꿀린 적이 없는 우성이었으니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이었다. 그 날 브랜트는 굉장히 오랜만에 느끼는 평화롭고 편안한 시간에 행복해했지만, 이단은 오랜만에 느낀 시기어린 시선에 뒷통수가 따가웠다.




7. 

"이젠 이단 헌트?"

"예?"

"...아니, 아무것도 아닐세."


브랜트는 싱겁게 말을 끝매치는 헌리를 보며 의아함에 고개를 갸웃거렸으나 곧 할 일을 마무리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오늘도 IMF의 시시콜콜 소식통은 활짝 그 문을 열어 신나게 퍼지고 있었는데, 특히 오늘은 더더욱 활기를 띄고 있다는 소문이었다. 그 전설의 현장요원님과 수석 분석요원님이 연해한대! 나중에서야 소문을 들은 벤지와 제인이 질색하며 고개를 저었다.




8.

그렇게 하루, 이틀 브랜트의 곁에는 아주 자연스럽게 이단이 붙어있었다. 혹시라도 이단이 곁에 있어줄 수 없는 날에는 자신의 옷을 걸치고 가라며 브랜트에게 재킷을 건내주었고 브랜트는 그러기로 했다. 모르긴 몰라도 효과는 아주 끝내줬다. 이단에게 도움을 요청한 이래로 약 열흘간, 브랜트는 아주 조금이지만 스트레스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언젠가 한 번 이단에게 거하게 저녁이라도 사야겠다, 마음먹은 브랜트는 무심코 이단의 재킷에 코를 묻었다.


"...비누 냄새."


웃음이 터져나왔다.




9.

이단은 회의실 한 켠에 등을 기대어 팔짱을 끼고는 커다란 책상위에 흩뿌려진 서류를 차곡차곡 정리하는 브랜트의 뒷모습을 유심히 관찰했다. 회의실에는 이단과 브랜트뿐이었다. 이단은 평소와 다름 없이 아주 평이한 목소리로 말했다.


"브랜트."

"왜?"

"너 나랑 진심으로 만나 볼 생각 있어?"


브랜트는 다 정리한 서류를 한 손에 들고는 이단을 바라보았다. 그의 셔츠 앞 주머니에는 오늘 아침 선물한 손수건이 들어있었다. 브랜트는 진심으로 질색을 하며 말했다.


"그걸 왜 이제야 말해?"

"늦었어?"

"그래, 늦었다."


이상하게 현실과 동 떨어진 기분이었지만 기분은 썩 좋기만 했다.




10.

"자네, 제발 이단한테 가서 적당히 하라고 전해주게나."


헌리는 얼굴을 잔뜩 찌푸리며 말했다. 그에 비해 브랜트는 굉장히 평온한 얼굴이었다. 공식적으로 연인 사이가 된 두 사람은 한동안 IMF의 시시콜콜 소식통을 아주 화끈하게 달구는데 일조했는데, 신나게 떠들어대던 그들도 지금은 나 죽겠다며 골골 거리고 있는 신세였다. 베타인 브랜트는 몰랐지만 다른 알파들에게 있어 브랜트에게 잔뜩 묻어나는 이단의 페로몬이란 실로 그 파급력이 어마어마했다. 다시금 IMF의 전설적인 요원은 그 존재마저도 우월한 우성 알파라는 사실이 공공연하게 알려지고 있는 것이다. 그보다 이단이 이렇게 나올 줄 몰랐다는 의견이 대다수였다. 지금의 브랜트는 그 누구도 털 끝하나 건드릴 수 없는 존재였다. 브랜트는 자신의 팔뚝에 코를 묻고는 킁킁 거리며 향을 맡아보려 애썼지만, 오늘 아침 샤워할 때 썼던 비누향 말고는 다른 향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저는 잘 모르겠는데요."


헌리는 포기했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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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문득, 어느 날 아침 브랜트는 눈을 떴다. 알람이 울리기 2시간도 전에 눈을 뜬 자신을 이해할 수 없었다. 잠은 모름지기 중간에 깨지 않고 푹 자는 것이 제일이다. 남은 2시간이라도 더 자기위해 자리에 눕는 브랜트의 팔에 뭔가가 걸려 미끄러지는 소리가 났다. 브랜트는 눈을 비비며 자신의 옆에 있는 것을 확인했다. 그것은 물건이 아니라 사람이었다. 브랜트는 가만히 눈을 꿈뻑꿈뻑 거리며 생각한다. 이 인간이 여기 왜 있더라. 브랜트는 뒤통수마저 잘생겨보이는 이단의 뒷태를 천천히 감상한 후, 그 자리에 누웠다. 아, 참. 내 애인이지, 이단 헌트. 브랜트는 그대로 이단의 허리에 팔을 올리며 그를 꼭 껴안았다. 마치 어린아이가 잠결에 큰 인형을 끌어안듯이. 그러자 그가 부드럽게 브랜트의 팔을 쓰다듬었다. 브랜트는 곧 다시 잠들었다.




2.

"현미는 싫은데."


드물게 이단이 투정을 부린다. 브랜트는 여유롭게 커피를 끓이며 이단의 앞에 시리얼 그릇과 우유를 놓아주었다.


"현미가 건강에 좋아."


적당히 시리얼을 붓고 우유를 따르는 이단을 보며 브랜트는 무심코 그가 귀엽다는 생각을 했다.




3.

"오늘도 놓고 왔어?"


브랜트의 말에 이단이 고개를 끄덕였다. 애초에 가지고 다닌 적도 없는 게 사실이지만 브랜트도 그걸 알고 있으면서 묻는 것이라는 것쯤은 잘 알고 있다. 그러니까 제발 좀 가지고 다녀라. 이단은 브랜트의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린다. 경비를 서고 있는 직원에게 사원증을 내미는 브랜트가 이단을 가르키며, 이 사람은, 아시죠? 하고 물으면 직원은 가볍게 웃어보인다. 하긴 누가 모르겠어. 비아냥이 다분한 브랜트의 말에 이단은 어깨를 으쓱이며 웃는다. 어차피 네가 있잖아. 브랜트는 그러려니, 고개를 끄덕였다. 




4.

오랜만에 단정하게 차려입은 셔츠 위로 넥타이를 매주는 손길이 간지럽다. 이단은 충분히 스스로 넥타이를 맬 줄 아는 사람이었지만 언젠가부터 브랜트의 손에 맡기기로 했다. 사무직에 몸을 담고 있는 사람이라 그런지 넥타이나 핀을 고르는 눈은 탁월하다. 그저께도 이단의 넥타이는 브랜트가 매주었다. 살짝 아래에서 꼼지락 거리는 그 손가락이 너무 귀여워 무심코 정수리에 입을 맞추다가 목이 졸릴 뻔 했다.


"장소는 가리지, 미스터 헌트?"


싫은데. 그러나 이단은 알았다고 했다.




5.

"가끔 애 같아."


브랜트는 이단의 입술에 묻은 크림을 엄지손가락으로 닦아 주었다. 생긴 거로는 생전 들어보지도 못한 고급스러운 이름의 원두를 씹어먹게 생겼으면서, 정작 마시는 거라고는 휘핑 크림이 잔뜩 올라간 초코프라페라니. 그것도 갭이라면 갭이지. 브랜트는 이단의 손에 들려 있던 컵을 빼앗아 입에 대보았다. 입을 대자마자 혀가 다 얼얼할 정도로 단맛이 느껴져 금새 이단의 손에 다시 쥐어준다. 

이단은 조심스럽게 컵을 책상위에 올려놓고는 브랜트의 손을 확, 잡아당겼다. 엄지 손가락을 한꺼번에 입 안으로 가져가는 이단을 보며 브랜트는 가지고 있던 서류 더미로 이단의 머리를 치려다 말았다. 아무도 없으니, 뭐. 


"단 건 기분 좋거든."


그래, 네 표정 정말 좋아보인다. 맞닿은 입술에서 초콜렛 맛이 잔뜩 묻어났다.




6.

늦은 저녁, 브랜트의 기분은 최악이다. 이단은 브랜트의 눈치를 본다. 애초에 브랜트가 국장에게 깨지는 것은 순전히 자신이나 벤지 때문이라는 것을 잘 알기에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는 것처럼 행동한다. 이제껏 브랜트는 진심으로 이단에게 화를 내지 않았다. 딱 한번, 이단은 브랜트가 정말, 매우 진심으로 화를 낸 것을 본 적이 있는데 차라리 두바이의 고층 빌딩을 오르는 것을 택할 정도로 무서웠다. 진심이다. 브랜트는 솔직하다. 이단에게는 더더욱 솔직하다. 그리고 너그럽다. 그래서 무척이나 이상적인 연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것이라 생각했다.

한 대 맞을 것을 각오하고 브랜트의 등 뒤로 가 가볍게 그를 껴안으면 하지 말라는 듯 손을 흔들지만 밀어내지는 않았다. 그럼 브랜트의 화가 반은 풀린 것이라는 것을 안다. 그럼 나름의 필살기를 쓴다. 브랜트는 간지럼을 유독 잘 타는 타입이라는 것을 아는 것은 이 세상에 자신 하나뿐이라는 사실이 더할나위 없이 만족스럽다.


"하지, 마, 푸흐, 으아, 하, 야! 악!"

"네, 네."


브랜트의 몸을 한 번에 안아든 이단은 침대로 뛰어들었다. 크게 한 번 출렁일뿐 끄떡없는 매트리스를 보며 남자 둘의 체중을 견딜 수 있을 만큼의 침대를 사길 잘했다는 생각을 한다. - 브랜트의 의견이었다. 그는 현명하다. - 브랜트의 머리에 베개를 잘 대어주고는 이단은 천천히 브랜트의 발을 주물러주었다.


"이제 좀 괜찮아?"

"네가 날 집어 던졌을 때부터 괜찮았어."


그래서, 거기 계속 있을거야? 장난스럽게 웃는 브랜트의 얼굴을 보며 이단은 잠시 멍청한 얼굴로 눈을 깜빡였다. 

다시 한 번 말하는데, 브랜트는 무척이나 솔직하다. 이단은 그게 썩 마음에 들었다.




7.

브랜트는 아마추어가 아니다. 공과 사는 적절히 구분할 줄 알며, 공적인 일에는 절대로 사적인 일을 개입하게 하지 않는다. 그러나 브랜트는 이단에게 있어서 최고의 특효약은 순전히 그와 자신의 프라이버시에 관계가 있다는 사실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네가 계획대로만 해주면 뭐든 해줄게."

- 뭐든?

"올라타줄까?"


이단 헌트는 절대로 멍청한 남자가 아니다. 브랜트는 피식, 새어나오는 웃음을 감추려 애썼다.




8.

이단은 서류를 싫어한다. 검은 글씨가 빽빽하게 써 있는 종이뭉치를 싫어했다. 이상하게 서류와 관련된 일이 생기면 사고가 난다. 이단은 쓰라린 손가락을 내려다보며 혀를 찼다. 이러니까 서류가 싫다.


"어디 아파? 종이에 손을 베이다니."


총알도 피하는 사람이. 브랜트의 말에 이단이 쓰게 웃었다. 그러게나 말이야. 어련히 알아서 아물겠지, 하는 이단의 생각과는 다르게 브랜트는 이단의 손가락을 바로 입에 물었다.


"천하의 이단 헌트가 파상풍에 걸릴일은 없을테니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 뭐."


찔끔, 나온 피를 싹 핥아주고는 반창고를 붙여주는 브랜트를 보며 이단은 가만히 서있기만 했다. 반창고에는 미키마우스가 알록달록 그려져있었다. 이단은 뒤늦게 환한 미소를 지었다.




9.

첩보 요원이, 주말에 맥주를 마시며 보는 첩보 영화란. 브랜트는 영화가 나름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이단의 눈에는 너무 현실감이 떨어지는 영화라 영 공감이 되지 않았다. 그러나 어느 장면에서는 브랜트도 영 미심쩍은 눈초리로 말했다.


"어떻게 사람이 비행기 날개에 매달려?"

"-흠."


이단은 그게 자신이 하게 될 일이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10.

문득, 늦은 밤 이단은 눈을 떴다. 이상한 긴장감이 온 몸을 덮쳤다. 안 좋은 버릇이다. 평화가 찾아오면 이상하게 깨질 것 같은 불안감은 늘 습관처럼 자신을 덮친다. 그녀가 죽기 전 날도 그랬지. 이단은 화사하게 미소짓던 자신의 제자를 떠올렸다. 한참이나 잠에 들지 못해 뒤척이자 브랜트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단은 차마 브랜트를 신경써주지 못했다는 마음에 미안함이 앞섰다. 그러나 브랜트는 이단이 무어라 말을 뱉기도 전에 무릎을 꿇고 앉아 이단의 머리를 끌어안았다. 느리게, 느리게 뛰고 있는 심장소리를 듣고 있노라면 좀 전까지 자신을 지배하던 불안함이 가시는 것을 느낀다. 


"괜찮아?"


이단은 브랜트의 심장 위에 입을 맞췄다. 아주 잠깐이지만 입술에 맞닿은 피부가 따뜻하다.


"다시 자자."


그 날 아침까지, 이단은 브랜트의 품에 안겨 잠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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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혼자서 차를 몰고 달리는 고속도로의 풍경은 꽤 브랜트의 마음에 들었다. 새벽같이 차를 몰고 나온탓에 이제 막 얼굴을 드러내는 태양을 보며 브랜트는 선글라스를 꼈다. 오픈카를 타고 달리는 젊음의 패기는 없어도 좋다. 그냥 활짝 문을 열어놓고 적당히 교통법규에 걸릴듯 말듯 아슬아슬한 속도로 달리면 어느새 마음이 뻥 뚫렸다는 사실을 자각하게 된다. 그러나 그것이 꼭 오랜만에 나선 드라이브 때문이라는 법은 없었다. 열심히 달리던 자동차를 도로의 한 귀퉁이에 세웠다. 다리가 무거워졌다. 브랜트는 이상하리 만치 어두운 하늘을 창 밖으로 올려다봤다. 해가 뜨다가 만 것이다. 곧 흐린 구름이 잔뜩 몰려들었다. 툭, 정확히 브랜트의 뺨으로 떨어진 빗방울에 브랜트가 희미한 미소를 짓는다. 우는구나, 그래. 브랜트는 서둘러 차의 창문을 모조리 닫았다. 거세진 빗줄기가 창문을 따라 흘러내린다. 그것은 누구의 눈물일까. 브랜트는 씁쓸하게 읖조렸다. 그녀의 눈물인가. 그는 눈물과는 어울리지 않는데. 아니, 그래도 그녀와 관련된 일이라면 그라도 눈물을 흘리겠지. AM 6:19. 브랜트는 자신의 핸드폰으로 걸려온 전화를 무시했다.

 




"브랜트가 전화를 안 받아."


벤지의 착잡한 목소리에 이단은 평소와 같은 표정을 지으러 노력했지만 여전히 이어지지 않는 전화에 하마타면 핸드폰을 집어 던질 뻔 했다. 그러나 그는 가까스로 이성을 부여 잡았다. 브랜트는 다섯 살 짜리 꼬마가 아니다. 그는 충분히 똑똑하며, 이성적이다. 이상하게 오늘따라 그 사실을 무시하는 머리에 이단은 가만히 눈을 감았다. 아침부터 재수없게 내리는 비가 울적함을 더 불러 일으키는 것 같은 기분이다. 


"여보세요, 브랜트?"


환희에 찬 벤지의 목소리에 이단은 저도 모르게 벤지의 핸드폰을 뺏어 들었다. 뭐하는 거냐며 자신을 바라보는 벤지를 보며 이단은 가만히 쉿, 하고 읊조릴 뿐이었다.


"브랜트."

- 이상하네, 벤지한테 걸려온 전화였는데.

"어디야?"

- 오늘부터 휴가인 거 몰랐어요? 꼭두새벽부터 쉬러왔어요. 왜 아무도 내가 휴가라는 사실을 몰라? 


핸드폰 너머로 실없이 웃는 브랜트의 목소리에 이단은 갈팡질팡했다. 아무 일 없다면 다행이지만. 그 말이 계속 입 안에 맴돌았다.


- 혹시 '견우와 직녀' 알아요?

"알아."

- 그럼 오늘이 그 둘이 만나는 날이란 것도 알아요?


이단은 얼른 달력을 확인했다. 기구하게도 그 자리는 브랜트의 자리였으며, 엄연히 '윌리엄 브랜트'의 달력이 놓여 있었다. 음력 7월 7일. 오늘의 날짜에 동그랗게 표시되어 있는 파란색 원을 보며 이단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래서?"

- 내가 아는 사람 중에 견우가 있어요.

"......"

- 견우가 있으니까 당연히 직녀도 있죠.

"브랜트."

- 그런데 왜 두 사람은 만나지 못할까요? 까마귀도 있는데.


푸흐, 작게 웃는 브랜트의 웃음소리에 이단은 당장이라도 소리를 지르고 싶은 마음이었다. 이단은 멍청이가 아니었다. 브랜트가 하고 싶은 말이 어떤 건지 정도는 아주 쉽게 알 수 있었다.


- 까마귀 날개가 부러져서 그런가.

"너 어디야, 당장 말해."


애석하게도 브랜트의 위치는 추적이 불가능했다. 대체 어떻게 조치를 취해놓은 건지는 몰라도 그 사실 하나만으로 이단의 속은 뒤집어지기 일보직전이었다.


- 이단.

"...듣고 있어."

- 일 년에 하루 뿐이에요. 두 사람이 만날 수 있는 건.


그리고 그 날, 나 같은 까마귀는 필요 없어요. 그 후 바로 끊어진 전화에 이단은 아무말도 하지 못했다. 이상하게 머릿속이 새하얬다. 이상하게도.





미련하긴. 브랜트는 홀로 남겨진 차 안에서 박장대소를 터트렸다. 그렇지 않으면 지금 당장이라도 시속 180을 달리다가 어디에 박아버릴 것 같은 기분이었다. 브랜트는 창 밖으로 보이는 호텔을 올려다봤다. 휴가를 이런 식으로 보내는 것도 나쁘진 않지. 브랜트는 대충 싼 짐 가방을 들고는 호텔로 들어갔다. 반갑게 인사를 하는 프론트의 직원을 보며 브랜트는 능청스럽게 인사했다.


"혹시 818호 있을까요?"


브랜트의 물음에 직원은 잠시 기다리라 말했다. 브랜트는 천천히 로비를 둘러보았다. 그 때도 이렇게 생겼었지. 저기 소파는 이번에 새로 들인건가. 


"올해도 오셨네요."


직원의 말에 브랜트는 조금 놀란 눈치였지만 희미하게 웃어보일 뿐이었다. 간단한 체크인 서류를 작성하고 있는 틈에 얼른 브랜트에게 키를 넘겨준 직원을 보며 브랜트는 모든 비용을 현금으로 지불하며 말했다.


"기억하신다는 게 놀랍네요."

"매 년 오시잖아요. 그럼 기억할 수 밖에 없죠."

"비밀입니다?"

"그럼요."


브랜트는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브랜트는 천천히 한 걸음, 한 걸음 818호로 향하는 발걸음을 내딛었다. 아까보다 훨씬 무거워진 다리에 엘리베이터 앞에서 문 앞까지 도착하는데 얼마나 걸릴지 가늠조차 되지 않았다. 지금 자신이 움직이고 있는 건지에 대한 확신도 없었다. 이제까지 브랜트가 겪었던 수많은 일 중, 유일하게 브랜트의 다리를 잡아끄는 것은 하나뿐이었다. 이상하지, 미련하고. 브랜트는 가볍게 심호흡을 한 뒤 방 문을 열었다. 깔끔한 방 안을 둘러보며 브랜트는 한숨을 쉬었다. 그 날도 이랬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브랜트는 바로 앞의 모퉁이 뒤, 새하얀 침대에도 아무것도 없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다행스럽게도, 침대 위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비는 여전히 내리고 있었다. 





"그냥 휴가 갔다면서? 국장님한테도 확인 했어. 1박 2일. 길어질 거 같으면 2박 3일까지."


확실히 그 브랜트가 아무런 말도 없이 훌쩍 휴가를 떠났다는 사실이 조금 이상하긴 했지만, 이단이 이렇게까지 반응을 할 줄은 몰랐다. 평소의 이단과는 무척이나 다른 모습에 당황한 것은 제인과 벤지였다. 이상하게 루터는 평소와 똑같이 행동했다. 


"칠석, 오늘이 칠석이지."

"칠석이요? 견우와 직녀가 만나는 날?"

'알타이르성과 베가성이 만나는 날이지."

"낭만도 없어?"


가볍게 쏘아 붙이는 제인을 보며 벤지는 어깨를 으쓱여볼 뿐이었다.


"그게 뭐, 중요한 날인거야?"

"브랜트가 임무를 실패한 날."

"......"

"그럼..."


줄리아가, 벤지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이단은 태연한 척을 하려 애썼다. 줄리아가 살아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은 자신과 브랜트 뿐이었다. 미안하다며 위로의 말을 전하는 벤지를 보며 이단은 혼란에 빠졌다. 그녀를 지키겠다는 결심을 한 순간부터, 이단의 마음 속에 그녀의 존재는 마치 귀중한 보물상자와도 같은 그런 느낌이었다. 열어보고 싶지만 함부로 열어서는 안되는 그런, 그런 존재. 처음에는 보물상자를 단지 묻어둬야 한다는 사실이 너무 힘들었다. 얼마든지 열어볼 수 있고, 가질 수 있었는데 이제는 그러지 못한다는 박탈감과 허무함이 이단을 집어삼켰다. 그러나 이단은 그런 감정에 익숙한 사람이었다. 박탈감, 허무감, 슬픔. 그 모든 것을 단 며칠만에 묻어버려야만 하는 사람이었다. 

그렇게 숨겨둬야만 하는 상자를 왜 굳이 브랜트가 들춰내려고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에게도 줄리아가 죽었다고 거짓말을 한 것에 대한 복수일까. 한 번 잊어버리는 것은 쉬워도 두 번 잊어버리는 것은 어렵다. 그러나 이단이 혼란스러운 이유는 따로 있었다. 깊숙하게 묻혀있던 상자가 꺼내어졌어도, 그 상자를 열어볼 생각보다 그 상자를 꺼내어 자신에게 열어보라 하는 그에게 먼저 마음이 움직였다. 

이단은 가만히 신음했다. 그가 의도적으로 자신에게 복수를 했으리라 생각할 수는 없었지만, 실로 이보다 더 괴로운 일은 없었다. 자칫 잘못하면 상자가 두 개가 되어버릴지도 모른다. 이단은 그 사실이 무서워졌다.


"이단?"

"...가봐야겠어."


서둘러 재킷을 챙겨 회의실을 나가버리는 이단을 보며 그 누구도 뭐라하는 사람은 없었다.





브랜트는 한참을 가만히 침대에 누워 있었다. 딱히 잠이 오는 것도 아니었고, 잠이 올 것 같지도 않았다. 비는 어느정도 그쳤는지 선선함과 물기가 가득한 바람이 불어오는 것을 지켜봤다. 


매년, 한 해도 빠짐없이 브랜트는 매년 이 호텔을 찾았다. 이단과 줄리아가 묵었던 방을. 눈을 감으면 그 날의 기억들이 머릿속에 둥둥 떠다닌다. 행복하게 웃으며 케이크에 불을 붙이며 축하를 하던 두 사람의 모습이나, 그런 그들을 보며 한 편의 부러움을 내비쳤던 그들이나. 브랜트에게 있어서 그 모든것은 아픈 손가락이다. 실제로 줄리아가 죽지 않고 멀쩡히 살아있다는 사실과는 관계가 없었다. 브랜트는 팀원을 잃었고, 자신의 능력을 의심해야만 했고 그것은 충분히 괴로웠다. 일주일은 총도 들지 못했다. 브랜트는 스스로가 그렇게 나약할 줄은 몰랐다. 사람은 누구나 실수를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그 범주에 자신은 포함되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그 때까지만 해도 충분히 행복해보였던 그들의 평화를 깨버린 것은 자신이라는 생각에 잠을 자지 못했다.

이단에게 모든 사건의 진실을 들었을 때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왜 자신에게까지 거짓말을 했는지에 대한 화도 나지 않았다. 그러나 그 뒤로 며칠간은 무기력하게 살아있는 송장 같았다. 그 사실을 들키지 않으려 부단히 노력도 했다. 


이게 다 오늘 비가 와서 그래. 브랜트는 애써 스스로를 위로해본다. 가뜩이나 심란한 마음에 쏟아지는 빗줄기는 푸석해진 마음을 촉촉하게 적셔주지 못하고 아프게 때리곤 한다. 다 흡수하지 못한 물줄기가 넘쳐 흐른다. 브랜트는 그 사실이 괴로웠다. 스스로를, 스스로가 통제할 수 없는 그 상황이 미치도록 싫었다. 이단에게 견우와 직녀의 이야기를 해준 것도 홧김이다. 그리고 지금와서야 후회하고 스스로를 욕한다. 왜 그랬냐, 멍청아. 브랜트는 고민했다.


그 순간,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브랜트는 깜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나며 베개의 뒤를 살폈으나 총이 있을리가 만무하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바짝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그러나 금방 방문자의 모습을 확인하고는 당장에라도 비명을 지르고 싶었다. 


- 여기 있는 거 다 아니까, 문 열어.


브랜트는 8층에서 뛰어내릴까 진심으로 고민했다.


"여긴 어떻게 알았어요? 왜 왔어?"

- 문 열어주면 대답해줄게.

"그러니까 더 열기 싫은데요."

- 브랜트, 진심으로 말하는 건데 내가 문을 열고 싶지 않아. 네가 열어주길 바래.


농담도 못해. 브랜트는 떨리는 손을 애써 감추며 천천히 문을 열었다. 지금 이 상황에 절대로 보고 싶지 않은 인물 0순위에 올라가 있는 사람이 눈 앞에 있다는 사실이 절망적이었다. 문을 열었지만 이단은 문 안으로 들어오지 않았다. 그저 가만히 그 자리에 서서 브랜트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여긴 어떻게 알았어요?"

"네가 갈만한 곳은 다 뒤져봤어. 네 집, 은신처, 별장 등 전부."

"...그럼 왜 왔어요?"

"네가 직녀 찾아가라며. 그래서 찾으러 왔잖아."


브랜트는 진심으로 질색이라는 얼굴을 내비치며 뒤로 물러섰다. 지금 그게 말이 되는 소리입니까? 사무적인 태도로 돌아가버린 브랜트를 보며 이단은 슬쩍 어깨를 으쓱였다. 


"그 날, 줄리아를 떠내보낸 건 내가 스스로 선택한거야."

"......"

"네가 내 선택까지 모조리 떠안을 필요는 없어. 이 일에 더 이상 네 감정을 소비하지 마."


이단은 꽤나 신중하게 말을 고르고 있었다. 브랜트가 그 일에 얼마만큼이나 매달려 있는지, 그간 얼마나 괴로움에 파묻혀 살았는지는 그의 얼굴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브랜트에게 처음으로 줄리아가 살아있었다는 말을 했을 때 그가 내비친 것은 일종의 사막의 오아시스 같은 것이었다. 그 정도로 브랜트는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깊은 곳에 파묻혀 있었다. 한 편으로는 그런 브랜트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대체 무어라고 이 일에 그렇게까지 매달리나. 그러나 이단은 말을 삼켰다. 명백하게 이단도 어느정도 두려워하고 있었다. 천하의 그 이단 헌트가.


"나도 몰라요."

"-브랜트."

"나도 내가 왜 이 일에 이렇게까지 매달리는 지 모르겠어요. 그런데 어쩌라는 거예요. 눈만 감으면 그 날이 떠오르는데. 줄리아가 살아있어서 다행이다, 그런데 그 때까지 내가 굴러야만 했던 그 거지같았던 시간은, 누가. 누가-"


보상해줍니까. 이런식으로 생각하는 내가 싫다고요, 알아요? 머리가 아픈 듯 얼굴을 감싸는 브랜트를 보며 이단은 천천히 방 안으로 한 걸음을 내딛었다.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이단은 조심스럽게 브랜트를 품에 안았다. 어쩌면, 이 일은 이단이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어려운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아주 단순하게 브랜트는 위로를 받고 싶었던 건지도 모른다. 다른 모두가, 평범한 사람들이 나누는 대화나 위로, 그 모든 단순한 행동들을. 이단은 그제야 자신이나 그가 서툰 대화를 하고 있는 지 깨달았다. 

평범하지 않은 일을 한다고 해서 그들이 특별한 것은 아니다. 지치면 힘들고, 아프면 쉬어야 하는 보통의 평범한 존재다. 아주 가끔, 그들의 주변 세상은 그들에게 다른 사람들과는 차별되는 남다름을 원한다. 그에 맞추어 제 감정을 숨기는 일이 익숙하다고 해서 아프지 않은 것이 아니다. 이단은 브랜트가 왜 굳이 그 상자를 꺼내려 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어쩌면 그것은 브랜트의 마지막 몸부림이었을지도 모른다. 


"미안해."

"왜 당신이 사과해요."

"미안할 짓을 했으니까."


그래도 이번엔 늦지 않게 찾아왔잖아. 그걸로 올해는 봐주면 안 될까. 이단의 말에 브랜트는 이단의 어깨에 이마를 기댔다. 헛소리하고 있네. 이단은 그저 가만히 브랜트의 등을 토닥였다. 


"많이 기다렸어, 베가?"

"...시끄러워요."


이단은 저 멀리 바람이 부는 창 밖을 바라보았다. 다행스럽게도 비는 더 이상 내리지 않을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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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의 새벽은 매우 조용하다. 

앞으로 몇시간 뒤면 금새 소란스러워지겠지만, 지금만큼은 아니다. 이단 헌트는 높은 곳을 꽤 좋아하는 편이었다. 발 밑이 아득한 곳에 서 있으면 저 밑의 세상은 눈곱만큼 작아 보인다. 그렇게 되면 한 눈에 모든 세상이 다 들어차게 된다. 그는 그 넓은 세상이 한 눈에 들어온다는 풍만한 만족감이 좋았다.

칠흑같은 어두운 밤보다는 약간 흐릿한 새벽이 훨씬 좋다. 그래야만 움직이는 것들이 보이기 때문이다. 그가 보통의 사람과는 남다른 재주가 있다고 한들 어디까지나 인간의 영역에 발을 들이고 있는 생명이었다. 눈을 감으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귀를 막으면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슬쩍 밝아져오는 저 어딘가의 하늘은 영롱한 보랏빛이다. 그 때가 되면 살아있음을 느낀다. 꽤 낭만적이지 않은가. 비웃음을 당한다고 할지라도 그는 그렇게 생각해야만 했다. 그렇지 않으면 제 감정은 이미 다 말라 퍼석해진 나뭇잎과 같을 것이다.

부지런한 사람들이 벌써부터 출근길을 서두른다. 이단의 두 눈에 담긴 세상이 활발하게 생기를 띄어간다. 그는 그 순간을 꽤 마음에 들어했다. 모름지기 세상은 죽어있는 것보다는 살아있는 게 훨씬 아름다운 법이다. 비록 한 편으로는 추악함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아주 가끔, 이단은 평범한 사람이 살아가는 삶에 대해 생각해본다. 재수없게 들릴지는 몰라도 이단 헌트는 무엇이든 다 잘해낼 자신도 있었고, 능력도 있었다. 이것이 훈련에 의해 만들어진 자신의 모습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지금이라도 일선에서 물러난다면 무엇을 하고 살까, 하는 걱정은 잠시 미루어 놔도 괜찮을 만큼 부족한 것이 없다. 그러다 소리 없이 웃는다. 어차피 그러지도 않을 거잖아. 맞는 말이다. 평범하게, 무엇이든 할 수 있는 그였지만 그는 그런 삶을 고르는 것을 잠시 미뤄둔다. 미룰 뿐이다. 아예 선택하지 않는다고 한 적은 없다.


사람은 얼마든지 감정적인 인간이 될 수 있고 감성적인 인간이 될 수 있다. 그게 자신이라면 좀 의아하게 생각하겠지만 어쨌든 자신도 사람이니까. 그럴 수 있다. 사실은 되도록이면 그렇게 행동하지 않으려고 할 뿐이다.

이단은 가만히 눈을 감았다. 지금쯤이면 옆에서 너 답지 않다고 잔소리를 해줄 사람이 그리웠다. 많이 보고 싶었다. 명백하게 이단 헌트는 외로움을 타고 있었다. 오늘따라 감정 조절이 잘 되지 않는 이유는 아주 간단했다. Happy Birthday! 집으로 돌아오기 전 폭죽을 터트리며 환하게 웃던 벤지의 얼굴이 생각나 웃음이 나왔다. 어떻게 알았어? 라는 질문은 굳이 하지 않았다. 그 자리에는 루터도, 제인도, 심지어 헌리도 있었다. 그들이라면 무엇이든 못할까. 그러나 그 자리에 있어야할 아니, 있었으면 하고 바랬던 사람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후부터 이상하게 마음이 텅 비어버린 것처럼 공허했다. 

그와의 관계를 이렇다 정의내릴 수 있을만한 근거라고 해야할까, 사실같은 게 부족했다. 사랑을 속삭이는 것도 아니고, 정식으로 '연인'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런 점에서 이단은 '윌리엄 브랜트'라는 남자가 낯설기만 하다. 이단은 확실한 것을 좋아하는 편은 아니었다. 스스로도 그렇게 평가하기도 하고, 주위에서 다들 자신을 평가하라 하면 이단 헌트에게 있어 철저한 계획성 또는 100% 라는 것은 찾아보기 힘들것이라 대답할 것이다. 놀라울것도 없다. 실제로도 그렇기에. 자신은 100%보다 99%의 나머지 1%를 더 선호한다. 그러나 그 대상이 브랜트라면 달라진다. 이단은 브랜트에게 100%의 확신을 갖길 원하고 있었다. 줄리아 이후로 처음이다. 이단은 그 사실이 혼란스러우면서도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사람이니까 외로움을 타고, 사람이기에 타인의 손길이 그립다. 애정을 갈구한다. 그 대상이 남자라거나, 뭐 그런 사실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적어도 이단 헌트에게는 그렇다.


오늘만큼은 남들과 평범한 하루를 보내고 싶다. 그러나 그의 주변의 세계가 그를 그렇게 내버려둘지는 의문이다. 아직까지 핸드폰은 반응이 없다. 이단은 기다리고 있었다. 이 세상에서 이단에게는 단 한사람 뿐인 '브랜트'를.


"나 보고 싶었어?"


어쩌지, 요원 자격 박탈인데. 표정 관리가 안 돼. 이단은 빠르게 주위를 살폈다. 그나마 어스름한 새벽은 환한 대낮보다는 어둡다. 워낙 눈썰미가 좋은 그였지만 오늘은 태연하게 넘어가 줄것이다. 그를 보면 무슨 말을 하지. 무슨 말을 해줘야 하지. 이단의 세계가 뒤집혀지고 구른다. 멍청하게 서 있던 몸이 기운다. 이단에게 있어 브랜트라는 사람은 그런 존재였다. 멀리서 보아도 절대로 한 눈에 다 들어오지 않는 사람.


"어디 갔었어?"

"일이 있어서."


그에게 한 발자국 다가가자 갑작스러운 불안감이 이단을 덮쳤다. 옅은 화약 냄새와, 먼지냄새는 그와 어울리는 향내는 아니다. 이단은 급하게 브랜트에게 달려가서 그의 상태를 살폈다. 평소의 깔끔하던 모습은 온데간데 없이 짧은 머리에는 먼지와 거미줄이 한 가득 엉켜있고, 아끼던 재색빛 정장은 이리저리 헤져있었다. 이단은 아프지 않게 그의 양 팔을 쥐었다. 손바닥을 축축하게 적시는 것이 그의 피일리는 없다는 생각을 하며.


"브랜트."

"미스터 헌트, 너에게 도착한 선물이 있어."


희미하지만 브랜트는 웃고 있었다. 가까이서 봐야만 알 수 있을만큼 아주 옅게. 그의 목소리에서 잔뜩 피곤이 묻어나왔지만 그는 별로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아보였다. 이단은 신중하게 대답했다.


"그래, 말해봐."

"일단 나 좀 집에 데려다줘."

"그리고?"

"그리고 한 숨 자자. 원한다면 오늘 하루 종일 자도 좋아. 난 그럴 수 있어."

"...그래서?"

"그래서는 무슨 그래서야. 이렇게까지 말했는데 모르겠어?"


브랜트는 가볍게 이단의 양 뺨을 손으로 감쌌다. 조심스럽게 내려앉는 숨소리가 머릿속을 가득 채운다. 닿을 듯 말듯, 아슬아슬한 거리에 있는 그의 입이나 코가 닿은 피부가 간지럽다. 


"선물이라고. 오늘 나랑 밤새도록 뒹굴자니까. 영화 보고 싶으면 말해. 벤지한테 받아달라고 하던가... 아니면 영화관에 갈까?"


이단은 드물게 멍청해진 얼굴을 브랜트에게 내비쳤지만 정말로 멍청하게 그 자리에서 일은, 이라는 질문은 하지 않았다. 브랜트는 그 점이 만족스럽다는 듯 웃었다.


"그게 내 선물이야?"

"생일 축하해. 그리고 미리 말해두는데 내가 왜 이 꼴인지는 묻지마. 알려고도 하지마."

"그건 좀 힘든데."

"네 선물 만드느라 힘들었으니까 그렇게만 알아둬."

"아하-. 그러니까 지금 오늘 너를 내가 독점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기 위해 이 꼴이 됐다, 이거지? 내 선물, 윌리엄 브랜트의 시간?"


활짝 웃고있는 입술 위로 브랜트의 손가락이 내려 앉았다. 이단은 굳이 그 손가락을 치우려 하지 않았다.


"오늘따라 왜 이렇게 말이 많아? 술 마셨어?"

"좋아서 그래. 생일이잖아."


이단은 브랜트의 손을 치우는 대신 그대로 입술을 내밀어 그의 손가락 입을 맞췄다. 끝내주는 생일 선물도 받았으니까. 브랜트는 딱히 대답하지 않았다. 이단에게 붙잡힌 손을 빼내려고도 하지 않았고, 불편하거나 싫다는 기색을 내비치지도 않았다. 어슴푸레하게 밝아오는 저 어딘가의 하늘을 보며 이단은 브랜트의 손을 절대로 놓치지 않겠다는 듯 힘주어 쥐었다. 브랜트는 딱히 아프단 말도 하지 않았다. 이단은 그게 그가 자신에게 말하는 방식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애초에 100%의 확신은 필요가 없는 것이다. 1%의 가능성만 있어도 충분하다. 이단은 그 1%에 대해 아주 강한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오늘은 운이 좋은 날이다. 하려는 모든 일이 다 잘될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기대심이 싹텄다. 그렇다면 그에게 말해봐도 좋지 않을까. 1% 뿐이었지만, 이단은 마치 100%인냥 확신에 가득 차 있었다. 브랜트라면 아무 말도 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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