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윌리엄 브랜트는 베타 형질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다. 브랜트는 자신이 베타라는 사실이 만족스러웠다. 휘두를 필요도 없고, 휘둘릴 필요도 없는 딱 중간에 서 있는 사람. 브랜트는 자신의 역할이 어딘가에 치우쳐있지 않다는 사실이 좋았다. IMF는 대대적으로 모든 요원을 알파 혹은 베타 형질만 뽑았다. 딱히 오메가 형질을 차별하려는 의도는 아니지만, 브랜트는 자신이 오메가가 아님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안 그랬으면 이 빌어먹을 직장이라도 들어오지 못했을 것이다. 시시콜콜 요원들이 떠들고 다니는 이야기는 거의 대부분이 형질에 관한 것이었다. 오늘은 누가 누구의 페로몬을 잔뜩 집어쓰고 왔니, 건너편 누구랑 누가 같은 향기를 낸다더라, 등. 브랜트는 그 시시콜콜한 이야기는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그들이 그렇게 말한다 한들, 어차피 브랜트는 건너편 부서의 사무 요원의 체향이 어떤지 모른다.
"오, 왔어?"
반갑다는 듯 인사하는 벤지의 목소리에 브랜트는 고개를 들어 이단을 바라보았다. 그러고보니, 이단에게서는 무슨 향이 날까. 문득 스쳐지나가는 생각에 브랜트는 화들짝 놀랐다. 누구 향이 뭐가 어째? 우웩. 이단은 자신을 보며 미간을 잔뜩 찌푸리는 브랜트를 보며 무심코 이번엔 아무 위성도 안 썼어! 라고 대답했다. 브랜트는 헛웃음을 지었다.
2.
언젠가부터 진득하게 따라붙는 시선이 하나 둘씩 생겼다는 사실을 모르진 않았다. 단지 브랜트는 그들이 왜 자신에게 관심을 두는지에 대해 관심이 없었을 뿐더러 이해할 수가 없었다. 브랜트는 아무런 특징도 없는 베타였다. 이 세상에 널리고 널린 -건 아니지만- 알파와 오메가가 서로 붙어먹기도 아까울 시간에 왜 자신에게 그렇게 관심을 두려는지를 이해할 수 없었다. 브랜트의 꿈은 소박했다. 알파도, 오메가도 아닌 평범한 베타 형질의 사람과 연애하고 결혼하는 것이다. 브랜트는 맥주를 한 잔 들이키면서 추파를 던지는 사내들을 자연스럽게 웃어 넘기며 말했다.
"미안, 난 베타라서요. 아무것도 느낄 수가 없네요. 당신의 매력을 알아주는 사람을 만나요."
아쉽게도 브랜트는 그 말이, 그 배려가 더욱 그들의 구미를 당기게 한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3.
대체 왜 내가 그 빌어먹을 알파들한테 인기가 많은거야? 어느새 IMF의 시시콜콜 소식통에는 온통 브랜트의 이름으로 가득찬 이야기들이 오갔다. 평소 그런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던 것은 그 주체가 자신이 아니기 때문이어서도 그랬지만, 자신과는 하등 관계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본부로 들어오면 사람들의 시선이 따라붙었다. 그래, 그 망할 펍에서처럼! 같은 형질의 베타인 벤지도 영문을 모르겠다면서 브랜트를 보며 사고를 쳤냐, 물었고 브랜트는 화를 꾹꾹 눌러 담았다. 몰라, 모른다고.
여느때처럼 미션에서 돌아온 이단이 묘한 표정을 지으며 브랜트의 목덜미 근처에서 코를 킁킁대며 냄새를 맡지 않았더라면 브랜트는 영영 몰랐을 것이다. 그들이 은연 중에 브랜트에게 페로몬을 묻히고 다녔던 사실을. 브랜트는 그 날 2시간 동안 샤워를 했다.
4.
"자네의 사생활에 대해서 뭐라고 할 생각은 없지만, 그..."
"저한테서 매일, 매일 다른 놈의 냄새가 난다구요?"
"크흠, 뭐, 그렇지."
"-빌어먹을."
"브랜트?"
"제가 그런 거 아닙니다."
헌리는 아주 단호한 브랜트의 태도에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5.
브랜트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자신이 알파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서로에게 본능적으로 호감을 느끼며 상대의 향이 좋다고 느끼는 알파와 오메가의 사이와는 달리 알파들끼리는 서열을 가리기 위해 서로 견제를 목적으로 으르렁 거린다고 들었는데, 지금 브랜트에게는 그게 너무 절실했다. 오메가가 아니니 알파의 향에 넋을 놓고 취할 일이 없어 브랜트에게 작업을 걸려고 하는 그 모든 사람들은 맨정신의 브랜트를 쓰러트려야만 했다. 그러나 브랜트는 결코 호락호락한 남자가 아니다. 그러니 그 일이 성공할리가 있나. 그렇게 작업을 걸면서 은근히 뿌리고 가는 향내 덕분에 온갖 소문을 달고다니는 주인공의 스트레스는 순전히 브랜트의 몫이었다. 알파, 빌어먹을 알파...
"뭘 그렇게 고민해?"
"아-."
알파. 브랜트는 급하게 이단의 몸을 끌어안으며 절절한 목소리로 매달렸다.
"이단, 너 알파지? 알파 맞지?"
"그런데?"
"나 좀 도와줘. 이러다 온 세상의 모든 알파들을 다 쏴버릴 지도 몰라."
워워, 그럼 안 되지. 나도 알판데. 영문은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브랜트는 도움이 절실해 보였기에 이단은 브랜트의 등을 조심스럽게 토닥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6.
그 다음날부터 브랜트는 어디를 가든 이단을 데리고 갔다. 거의 모든 시간을 내내. 서점을 갈 때도, 카페에 갈 때도 항상 보디가드처럼 이단을 데리고 다녔다. 이단은 자신이 왜 브랜트의 일일 경호원이 된 것인지 머리로는 잘 알고 있었지만 영 와닿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브랜트의 산책 루트는 간단했다. 카페에서 커피를 산 뒤, 호숫가를 걸으며 가볍게 운동을 하고 그 다음에는 펍으로 간다. 이단은 모쪼록 하루라도 브랜트를 위해 제 시간을 할애하기로 했다. 만약 정말로 브랜트가 온 세상의 알파를 다 쏴버리고 싶은 마음이 들면 안 될 일이었으니.
그러나 펍으로 딱 들어선 순간, 이단은 피부로 와닿는 시선에 벌써부터 피곤해지는 느낌이 역력했다. 이런 시선을 받고 있었단 말이지. 이단은 브랜트 모르게 뒤에서 헛웃음을 지었다. 어쩌면 브랜트가 베타라서 다행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안 그랬으면 무슨 엄한 일을 당하거나, 벌써부터 어느 한 놈의 얼굴을 새로 맞춰주고 있을지 알 수 없었다. 한 쪽에 자리를 잡고 앉은 브랜트는 순전히 이단에게만 시선을 쏟았다. 다른 사람은 거들떠 보기도 싫다는 듯이.
"평소에도 이래?"
"알파는 뭔가 다른게 느껴져?"
아주 많이. 이단은 말 없이 어깨를 으쓱여보이며 브랜트가 내민 잔을 받았다. 실로 피곤했다. 그 사이 몇몇 사람들이 브랜트에게 다가왔지만 그럴 때마다 이단은 은근히 브랜트의 어깨를 감싸거나 장난스럽게 허리를 감싸며 웃어 보였다. 그런 이단의 행동을 본 남자들은 아쉽다는 듯 혀를 차며 브랜트에게서 멀어졌지만 이단은 한참이나 주위를 살펴야만 했다.
"진작 너한테 도와달라고 할 걸. 오늘은 귀찮게 하는 사람이 한 명도 없잖아."
"IMF의 수석 분석요원이 이렇게 인기가 많을 줄 몰랐는데."
이단은 진심으로 피곤해졌다. 원래 알파들의 기싸움이라는 게 호락호락한 것만은 아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이단이 그 누구에게도 꿀린 적이 없는 우성이었으니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이었다. 그 날 브랜트는 굉장히 오랜만에 느끼는 평화롭고 편안한 시간에 행복해했지만, 이단은 오랜만에 느낀 시기어린 시선에 뒷통수가 따가웠다.
7.
"이젠 이단 헌트?"
"예?"
"...아니, 아무것도 아닐세."
브랜트는 싱겁게 말을 끝매치는 헌리를 보며 의아함에 고개를 갸웃거렸으나 곧 할 일을 마무리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오늘도 IMF의 시시콜콜 소식통은 활짝 그 문을 열어 신나게 퍼지고 있었는데, 특히 오늘은 더더욱 활기를 띄고 있다는 소문이었다. 그 전설의 현장요원님과 수석 분석요원님이 연해한대! 나중에서야 소문을 들은 벤지와 제인이 질색하며 고개를 저었다.
8.
그렇게 하루, 이틀 브랜트의 곁에는 아주 자연스럽게 이단이 붙어있었다. 혹시라도 이단이 곁에 있어줄 수 없는 날에는 자신의 옷을 걸치고 가라며 브랜트에게 재킷을 건내주었고 브랜트는 그러기로 했다. 모르긴 몰라도 효과는 아주 끝내줬다. 이단에게 도움을 요청한 이래로 약 열흘간, 브랜트는 아주 조금이지만 스트레스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언젠가 한 번 이단에게 거하게 저녁이라도 사야겠다, 마음먹은 브랜트는 무심코 이단의 재킷에 코를 묻었다.
"...비누 냄새."
웃음이 터져나왔다.
9.
이단은 회의실 한 켠에 등을 기대어 팔짱을 끼고는 커다란 책상위에 흩뿌려진 서류를 차곡차곡 정리하는 브랜트의 뒷모습을 유심히 관찰했다. 회의실에는 이단과 브랜트뿐이었다. 이단은 평소와 다름 없이 아주 평이한 목소리로 말했다.
"브랜트."
"왜?"
"너 나랑 진심으로 만나 볼 생각 있어?"
브랜트는 다 정리한 서류를 한 손에 들고는 이단을 바라보았다. 그의 셔츠 앞 주머니에는 오늘 아침 선물한 손수건이 들어있었다. 브랜트는 진심으로 질색을 하며 말했다.
"그걸 왜 이제야 말해?"
"늦었어?"
"그래, 늦었다."
이상하게 현실과 동 떨어진 기분이었지만 기분은 썩 좋기만 했다.
10.
"자네, 제발 이단한테 가서 적당히 하라고 전해주게나."
헌리는 얼굴을 잔뜩 찌푸리며 말했다. 그에 비해 브랜트는 굉장히 평온한 얼굴이었다. 공식적으로 연인 사이가 된 두 사람은 한동안 IMF의 시시콜콜 소식통을 아주 화끈하게 달구는데 일조했는데, 신나게 떠들어대던 그들도 지금은 나 죽겠다며 골골 거리고 있는 신세였다. 베타인 브랜트는 몰랐지만 다른 알파들에게 있어 브랜트에게 잔뜩 묻어나는 이단의 페로몬이란 실로 그 파급력이 어마어마했다. 다시금 IMF의 전설적인 요원은 그 존재마저도 우월한 우성 알파라는 사실이 공공연하게 알려지고 있는 것이다. 그보다 이단이 이렇게 나올 줄 몰랐다는 의견이 대다수였다. 지금의 브랜트는 그 누구도 털 끝하나 건드릴 수 없는 존재였다. 브랜트는 자신의 팔뚝에 코를 묻고는 킁킁 거리며 향을 맡아보려 애썼지만, 오늘 아침 샤워할 때 썼던 비누향 말고는 다른 향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저는 잘 모르겠는데요."
헌리는 포기했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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