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브랜트는 그 날 새벽 눈을 떴다. 목과 팔에서 어마어마한 고통이 느껴졌지만 살아있기에 고통을 느끼는 것이라 한 편으로는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아까부터 제 옆을 꼭 지키고 있는 작은 아이와, 한 남자의 모습에 브랜트는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걱정을 받는 거나, 챙김을 받는 것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다. 하필, 제일 피하고 싶은 두 사람이 같이 이러고 있으니까 문제지. 브랜트는 아이가 깨지 않게 조심조심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 브랜트의 모습을 보며 살며시 다가온 그가 다치지 않은 어깨를 잡아주는 것을 마다하지는 않았다. 작전명, 리나 브랜트를 깨우지 말라. 브랜트는 숨조차 쉬지 않을 기세로 아주 조심스레 침대에서 내려왔다. 다행인 것은 리나는 요원이 아닌 평범한 소녀에 불과하다는 것이었다.
"일어나도 괜찮겠어?"
"더 누워있다가는 침대와 한 몸이 되어버릴 것 같으니 나가죠. 나한테 묻고 싶은 것도 많잖아요."
"티 나?"
"알면서도 묻긴."
아주 조심스럽게 리나의 이마에 입을 맞추는 브랜트를 보며 이단은 얇은 담요를 하나 챙겼다. 혹시라도 환자복만 덜렁 입은 브랜트를 위해서.
병원 옥상 벤치에 주저앉은 브랜트는 잔뜩 얼굴을 구기며 울상을 지었지만 이단은 딱히 먼저 돌아가자, 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확실히 병실에 있을때보다는 훨씬 좋아보이는 얼굴에 내심 안도한 것도 사실이었다. 챙겨온 담요를 건내주며 이단은 아무 말 없이 물끄러미 브랜트를 바라보았다. 브랜트는 담요와 이단의 얼굴을 번갈아 보더니 꼭 담배나 술이 고픈 얼굴로 희미한 웃음을 지어보였다.
"리나 린지."
"......"
"그 아이의 진짜 이름이에요. 리나 브랜트가 아니라."
브랜트는 유능한 요원답게 한 팔로도 충분히 능숙하게 담요로 등을 덮었다. 이단은 아주 잠깐의 만남을 가졌던 어린 소녀의 얼굴을 천천히 그려보았다. 닮은 점을 꼽으라면 손에 꼽을수도 있겠지만 확실히 아이는 브랜트의 딸이라기에는 무언가 부족한 점이 있어보이는 것이 사실이었다. 마치 숨겨놓은 보물상자를 꺼내보여주듯, 브랜트는 의연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10.
리나 린지.
꽤 오래 전, 브랜트와 같이 현장임무를 하던 한 요원의 딸이었다.
11.
"내 실수였어요."
푸흐, 그러면서 브랜트가 웃음을 터트렸다. 그녀가 그랬죠. 아니, 이건 네 잘못이 아냐. 그건 브랜트도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브랜트는 그렇게 인정하지 않고는 살 수 없을 것 같았다.
"그 때의 나는 지킬것도, 뭣도 아무것도 없는 나 혼자였지만 그녀는 아니었죠. 그녀에게는 리나가 있었어요. 그랬기에 그 앞에, 전선에 섰어야 했던 것은 나였습니다. 그래야만 했는데."
목숨을 담보로 걸어야만 하는 요원직에서는 일상다반사로 이루어지는 일이다. 어제의 동료가 오늘은 싸늘한 주검으로 변할 수 있다. 그것도 자신이 알고 있는 그나 그녀의 이름이 아닌 난생 처음 듣는 어떤 이의 이름으로. 매일 그 사실을 스스로에게 새기며 견디고 살아야하는 것이 비밀요원의 운명이나 다름 없는 것이다. 그 결과로 자신도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내야만 하지 않았는가. 이단은 브랜트에게 그 어떠한 말도 쉽게 건낼 수 없었다.
"리나도 다 알아요."
"안다고?"
"그 아이는 똑똑하거든요. 그녀를 닮아서. 다섯살의 아이는 너무 똑똑해서, 그래서 너무 무서웠는데-."
아이는, 울지 않았다. 그런 아이를 보며 울고 싶은 것은 브랜트였다. 할수만 있다면 아이의 몫까지 펑펑 울어주고 싶은 마음이었다. 안타깝게도 그녀에게 다른 가족은 없었다. 리나는 원래부터가 아버지가 없이 그녀 혼자가 키우던 아이었고, 유일한 보호자였던 그녀가 죽자 이 세상에 홀로 남은 고아신세가 된 것이다. 그런 리나를 거둔 것이 브랜트였다. 그러지 않고는 도저히 버틸수가 없을 것 같은 죄책감에 무턱대고 아이의 보호자를 자처했다. 그것이 어리석은 선택이라는 것을 아주 잘 알면서도 브랜트는 그럴 수 밖에 없었다. 주변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브랜트를 말렸다. 한 순간의 충동으로, 한 조각의 죄책감으로 떠안을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몇 번이고 브랜트에게 말해주었다. 그러나 브랜트는 고집을 부렸다. 물론 그들의 말도 얼추 맞았다. 브랜트가 리나를 거두겠다고 한 것은 순전히 그녀에 대한 죄책감으로부터 비롯된 것이었으나, 그 작은 아이가, 그 작은 손으로 브랜트의 두 손가락을 꽉 쥐었을 때, 브랜트는 확신했다. 이 아이는, 반드시 자신이 키워낼 것이라고.
"날 먼저 아빠라고 불러줬어요."
어느새 담요를 꽉 쥐고 있는 브랜트의 손을 내려다보고 있던 이단은 천천히 브랜트의 머리를 자신의 어깨에 기댈 수 있도록 해주었다. 브랜트는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이단도 마찬가지였다.
12.
대체 아까의 그 통화는 무어냐고 헐뜯고 욕해도 이단은 그 잘난 얼굴로 사람 좋은 미소를 지어보일뿐, 대답을 해주지 않았다. 브랜트는 서둘러 퇴근을 앞당겨야겠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저번에 동생에게 부탁해놓은 3중 보안장치를 가동하는 거야. 브랜트에게 있어서 단 하나의 재앙은 이단 헌트와 리나 브랜트가 만나는 것이었다. 그 재앙은 어떤 파멸의 씨앗을 뿌릴 지 그 누구도 예측할 수 없는 문자 그대로 재앙, 그 자체였다. 브랜트는 리나가 이단의 그 잘생긴 얼굴에 반하는 것도, 그렇다고 자신이 동경하는 그를 하나뿐인 딸 아이가 죽도록 미워하는 것도 싫었다. 아니, 그것보다. 브랜트는 리나가 한 말을 다시 돌이켜볼 필요가 있었다. 건드려? 누가 누굴? 요새 학교에서 뭘 가르치는 거야?
되도 않는 변명을 헌리에게 10분 가량 늘어놓은 브랜트는 결국 딸내미 보러 가야 한다고요! 라는 한 마디에 조기 퇴근을 해도 좋다는 허락을 얻어내었고 누구보다 빠르게 리나의 학교로 쏜살같이 달려갔다. 꽤 오랜만의 딸 아이의 하교길을 마중나간 브랜트를 보며 뭇 여성들이 시선을 던졌다. 하긴, 완벽한 쓰리피스의 회사원이 이 시간에 학교에 오다니. 좀 유별나 보이긴 하겠지. 그러나 그런 생각도 저 멀리서 자신의 이름을 부르며 달려오는 리나의 모습에 모든 근심과 걱정이 사르르 녹아내리는 걸 보니 브랜트는 이미 자신이 지독한 딸바보라는 사실을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그 아저씨는?!"
"이단? 같이 안 왔어."
"집에서 보자며!"
"장난친 걸 거야. 그보다 아빠 보자마자 하는 소리가 그거야?"
"그럴리가. 안녕, 아빠!"
"안녕, 우리딸."
브랜트는 리나를 번쩍 안아들고는 집으로 가는 길을 걸었다. 학교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오늘은 무슨 수업이 재미있었는지 등 이단 헌트가 박살내버린 공공기물의 리스트를 보는 것 따위와는 비교도 안될 정도로 행복이 가득한 이야기를 들으며 길을 걷던 브랜트는 집 앞에 도착한 순간 뒷목이 서늘한 느낌이 들었다.
"아빠?"
조심스럽게 집의 문을 연 브랜트는 자신을 보며 미소짓는 이단의 얼굴을 보며 세삼 깨달았다. 이단 헌트에게 보안 장치따위가 소용이 있을리가 없다는 사실을.
설령 그것이 아무리 쉴드의 것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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