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브랜트는 그 날 새벽 눈을 떴다. 목과 팔에서 어마어마한 고통이 느껴졌지만 살아있기에 고통을 느끼는 것이라 한 편으로는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아까부터 제 옆을 꼭 지키고 있는 작은 아이와, 한 남자의 모습에 브랜트는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걱정을 받는 거나, 챙김을 받는 것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다. 하필, 제일 피하고 싶은 두 사람이 같이 이러고 있으니까 문제지. 브랜트는 아이가 깨지 않게 조심조심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 브랜트의 모습을 보며 살며시 다가온 그가 다치지 않은 어깨를 잡아주는 것을 마다하지는 않았다. 작전명, 리나 브랜트를 깨우지 말라. 브랜트는 숨조차 쉬지 않을 기세로 아주 조심스레 침대에서 내려왔다. 다행인 것은 리나는 요원이 아닌 평범한 소녀에 불과하다는 것이었다.


"일어나도 괜찮겠어?"

"더 누워있다가는 침대와 한 몸이 되어버릴 것 같으니 나가죠. 나한테 묻고 싶은 것도 많잖아요."

"티 나?"

"알면서도 묻긴."


아주 조심스럽게 리나의 이마에 입을 맞추는 브랜트를 보며 이단은 얇은 담요를 하나 챙겼다. 혹시라도 환자복만 덜렁 입은 브랜트를 위해서.


병원 옥상 벤치에 주저앉은 브랜트는 잔뜩 얼굴을 구기며 울상을 지었지만 이단은 딱히 먼저 돌아가자, 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확실히 병실에 있을때보다는 훨씬 좋아보이는 얼굴에 내심 안도한 것도 사실이었다. 챙겨온 담요를 건내주며 이단은 아무 말 없이 물끄러미 브랜트를 바라보았다. 브랜트는 담요와 이단의 얼굴을 번갈아 보더니 꼭 담배나 술이 고픈 얼굴로 희미한 웃음을 지어보였다.


"리나 린지."

"......"

"그 아이의 진짜 이름이에요. 리나 브랜트가 아니라."


브랜트는 유능한 요원답게 한 팔로도 충분히 능숙하게 담요로 등을 덮었다. 이단은 아주 잠깐의 만남을 가졌던 어린 소녀의 얼굴을 천천히 그려보았다. 닮은 점을 꼽으라면 손에 꼽을수도 있겠지만 확실히 아이는 브랜트의 딸이라기에는 무언가 부족한 점이 있어보이는 것이 사실이었다. 마치 숨겨놓은 보물상자를 꺼내보여주듯, 브랜트는 의연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10.

리나 린지. 

꽤 오래 전, 브랜트와 같이 현장임무를 하던 한 요원의 딸이었다.





11.

"내 실수였어요."


푸흐, 그러면서 브랜트가 웃음을 터트렸다. 그녀가 그랬죠. 아니, 이건 네 잘못이 아냐. 그건 브랜트도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브랜트는 그렇게 인정하지 않고는 살 수 없을 것 같았다. 


"그 때의 나는 지킬것도, 뭣도 아무것도 없는 나 혼자였지만 그녀는 아니었죠. 그녀에게는 리나가 있었어요. 그랬기에 그 앞에, 전선에 섰어야 했던 것은 나였습니다. 그래야만 했는데."


목숨을 담보로 걸어야만 하는 요원직에서는 일상다반사로 이루어지는 일이다. 어제의 동료가 오늘은 싸늘한 주검으로 변할 수 있다. 그것도 자신이 알고 있는 그나 그녀의 이름이 아닌 난생 처음 듣는 어떤 이의 이름으로. 매일 그 사실을 스스로에게 새기며 견디고 살아야하는 것이 비밀요원의 운명이나 다름 없는 것이다. 그 결과로 자신도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내야만 하지 않았는가. 이단은 브랜트에게 그 어떠한 말도 쉽게 건낼 수 없었다.


"리나도 다 알아요."

"안다고?"

"그 아이는 똑똑하거든요. 그녀를 닮아서. 다섯살의 아이는 너무 똑똑해서, 그래서 너무 무서웠는데-."


아이는, 울지 않았다. 그런 아이를 보며 울고 싶은 것은 브랜트였다. 할수만 있다면 아이의 몫까지 펑펑 울어주고 싶은 마음이었다. 안타깝게도 그녀에게 다른 가족은 없었다. 리나는 원래부터가 아버지가 없이 그녀 혼자가 키우던 아이었고, 유일한 보호자였던 그녀가 죽자 이 세상에 홀로 남은 고아신세가 된 것이다. 그런 리나를 거둔 것이 브랜트였다. 그러지 않고는 도저히 버틸수가 없을 것 같은 죄책감에 무턱대고 아이의 보호자를 자처했다. 그것이 어리석은 선택이라는 것을 아주 잘 알면서도 브랜트는 그럴 수 밖에 없었다. 주변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브랜트를 말렸다. 한 순간의 충동으로, 한 조각의 죄책감으로 떠안을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몇 번이고 브랜트에게 말해주었다. 그러나 브랜트는 고집을 부렸다. 물론 그들의 말도 얼추 맞았다. 브랜트가 리나를 거두겠다고 한 것은 순전히 그녀에 대한 죄책감으로부터 비롯된 것이었으나, 그 작은 아이가, 그 작은 손으로 브랜트의 두 손가락을 꽉 쥐었을 때, 브랜트는 확신했다. 이 아이는, 반드시 자신이 키워낼 것이라고.


"날 먼저 아빠라고 불러줬어요."


어느새 담요를 꽉 쥐고 있는 브랜트의 손을 내려다보고 있던 이단은 천천히 브랜트의 머리를 자신의 어깨에 기댈 수 있도록 해주었다. 브랜트는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이단도 마찬가지였다.





12.

대체 아까의 그 통화는 무어냐고 헐뜯고 욕해도 이단은 그 잘난 얼굴로 사람 좋은 미소를 지어보일뿐, 대답을 해주지 않았다. 브랜트는 서둘러 퇴근을 앞당겨야겠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저번에 동생에게 부탁해놓은 3중 보안장치를 가동하는 거야. 브랜트에게 있어서 단 하나의 재앙은 이단 헌트와 리나 브랜트가 만나는 것이었다. 그 재앙은 어떤 파멸의 씨앗을 뿌릴 지 그 누구도 예측할 수 없는 문자 그대로 재앙, 그 자체였다. 브랜트는 리나가 이단의 그 잘생긴 얼굴에 반하는 것도, 그렇다고 자신이 동경하는 그를 하나뿐인 딸 아이가 죽도록 미워하는 것도 싫었다. 아니, 그것보다. 브랜트는 리나가 한 말을 다시 돌이켜볼 필요가 있었다. 건드려? 누가 누굴? 요새 학교에서 뭘 가르치는 거야? 


되도 않는 변명을 헌리에게 10분 가량 늘어놓은 브랜트는 결국 딸내미 보러 가야 한다고요! 라는 한 마디에 조기 퇴근을 해도 좋다는 허락을 얻어내었고 누구보다 빠르게 리나의 학교로 쏜살같이 달려갔다. 꽤 오랜만의 딸 아이의 하교길을 마중나간 브랜트를 보며 뭇 여성들이 시선을 던졌다. 하긴, 완벽한 쓰리피스의 회사원이 이 시간에 학교에 오다니. 좀 유별나 보이긴 하겠지. 그러나 그런 생각도 저 멀리서 자신의 이름을 부르며 달려오는 리나의 모습에 모든 근심과 걱정이 사르르 녹아내리는 걸 보니 브랜트는 이미 자신이 지독한 딸바보라는 사실을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그 아저씨는?!"

"이단? 같이 안 왔어."

"집에서 보자며!"

"장난친 걸 거야. 그보다 아빠 보자마자 하는 소리가 그거야?"

"그럴리가. 안녕, 아빠!"

"안녕, 우리딸."


브랜트는 리나를 번쩍 안아들고는 집으로 가는 길을 걸었다. 학교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오늘은 무슨 수업이 재미있었는지 등 이단 헌트가 박살내버린 공공기물의 리스트를 보는 것 따위와는 비교도 안될 정도로 행복이 가득한 이야기를 들으며 길을 걷던 브랜트는 집 앞에 도착한 순간 뒷목이 서늘한 느낌이 들었다.


"아빠?"


조심스럽게 집의 문을 연 브랜트는 자신을 보며 미소짓는 이단의 얼굴을 보며 세삼 깨달았다. 이단 헌트에게 보안 장치따위가 소용이 있을리가 없다는 사실을. 

설령 그것이 아무리 쉴드의 것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1.

요새들어 IMF의 수석 분석요원 윌리엄 브랜트의 행동이 수상하다. 벤지는 차근차근 공을 들여 한 문장이 적혀있는 모니터를 빤히 바라보다 슬쩍 브랜트의 옆모습을 훑어보았다. 첫번재 가설, 사실은 이게 가장 유력하다. 윌리엄 브랜트에게 연인이 생겼다. 벤지는 친절하게 키보드의 느낌표를 두 번이나 눌러주었다. 그럼 다시 돌아와서 첫번째 가설의 첫번째 근거. 근래 들어 브랜트가 웃는 날이 많아졌다. 어쩔때는 시도때도 없이 웃어서 드디어 우리의 수석 분석요원이 머리가 이상해진 것은 아닐까 구급차를 부르려고 한 적도 있었다. 그런 브랜트를 보며 도대체 뭐가 그렇게 좋아서 웃는거야, 하고 물으면 열 중에 열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하는 무척이나 믿기지 않는 대답을 하곤 했다.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알겠지만 브랜트가 대놓고 웃는 날은 절대로 그냥 넘어가는 일이 없는 지옥과 같은 날이라는 것을 잘 알것이다. 그런 그가 시도때도 없이 웃는다? 분명히 뭔가가 있는 것이 분명하다.

첫번째 가설의 두번째 근거. 웃는 날이 많아진 것도 모자라 이젠 통화까지 한다. 평소에 설정해두는 기본 벨소리 제 1번은 어디다 버려두고 상큼하게 울리는 벨소리에 참지 못하고 박장대소를 하는 자신을 보며 브랜트는 화도 내지 않았다. 벤지는 브랜트가 혹시나 외계인에게 납치되어 뭔가를 당한 것은 아닐까, 하는 드라마를 써보기도 했다. 몰래 통화를 엿듣는 것은 예의가 아닌지라 하지 않았다. 물론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할 수 있다는 반증이 되기도 하지만 후환이 두렵다. 누가 뭐래도 브랜트는 IMF의 국장 대리직을 맡고 있는, 어찌보면 한낱 현장요원 신분인 자신과는 맡고 있는 공기가 달랐다. 물론 그게 무조건적으로 좋다는 것은 아니다. 자신이었다면 절대로 안 할거라고 난리를 쳤을 게 분명했다.

이야기가 새고 있다. 다시 돌아와서 첫번째 가설의 세번째 근거. 굳이 세번째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 브랜트가, 그 윌리엄 브랜트가, 아기자기하고 귀여운 악세사리를 달고 다닌다. 느낌표 3개. 아니, 5개. 속속히 제보가 들어오고 있다. 가장 결정적인 제보로 어느 날의 회의에서 브랜트가 꺼낸 수첩에 달려 있던 곰인형. 무려 곰인형! 곰인형!!! 갑자기 진행이 멈춘 회의 상황에 의아함을 느낀 브랜트가 무슨 일 생겼냐는 말에 아주 용감한 -벤지는 만약 그, 아니면 그녀를 본다면 아낌없는 찬사를 보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요원이 브랜트의 수첩을 가리켰고, 브랜트는 수첩에 달린 곰인형을 보고는 옅게 웃으며 말했다고 한다. 


"아, 미안합니다. 깜빡해서."


이만하면, 충분하지 않은가.





2.

그 뒤로도 브랜트는 여전히 수상한 행동을 반복적으로 하고 있었다. 말이 수상한 행동이지, 사실 첫번째 가설을 인정하면 지극히 당연한 행동들이었다. 그러니까 브랜트에게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사랑스러운 여자친구가 생긴 것이다. 암암리에 IMF의 수석 분석요원이 절찬리 연애 중이라는 사실이 퍼졌고, 그 사실을 모르는 것은 브랜트 뿐인 것 같았다. 


오늘도 어김없이 미션을 수행하고 있는 이단의 팀을 백업하기 위해 관리탑에서 열심히 열을 올리고 있던 브랜트는 고래고래 소리를 외치던 와중 울린 전화에 그 자리에서 딱, 굳어버렸다. 그 벨소리는 마이크를 통해 벤지나 이단의 귀에도 들렸다. 평소와는 다른 벨소리, 음. 그렇군. 벤지가 혼자 수긍하고 있을 때쯤, 이단이 투덜거리는 듯 말했다.


"누군 현장에서 고생하는데, 누군 연애하느라 즐겁나보군."

- 그거 지금 나한테 하는 소리에요? 연애?

"그럼 아니야?"

- 그게 무슨 헛소... 윽, 지금부터는 당신 마음대로 해도 상관없으니까 알아서 해요. 어차피 당신 사전에 실패라는 단어는 없으니까 성공시켰다고 알고 있을게요.

"뭐? 이봐, 브랜트-"

- 브랜트 아웃.


이단은 통신이 끊긴 인이어를 믿을 수 없다는 듯 손으로 눌러보았으나, 들리는 것이라고는 벤지의 웃음소리 뿐이었다.





3.

이단은 드물게 화가 나 있는 듯 했다. 아니, 화가 나있다기 보다는 꼭 마치 누군가에게 서운하다는 듯 굴고 있었다. 벤지는 당장 내일 아침 해가 서쪽에서 뜰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 누구도 아닌 이단 헌트가 뭐 어디 다른 사람에게 서운한게 있다고? 정말? 하긴, 요새 브랜트가 하는 걸 보면 그럴만도 하다. 애인이 생겼으면 말이라도 해주면 좀 좋은가. 그래도 다른 누구보다 돈독한 팀워크를 다지고 있다고 생각하면 나름 서운한 처사이긴 했다. 하지만 이단이 이런 걸로 브랜트에게 서운해할리가 없다. 벤지는 그냥 단순히 항상 이단이 먼저 끊던 통신을 브랜트가 먼저 끊어버리니 심통이 난 것으로 결론지어 버렸다.


"브랜트, 이번 작전-"

"어, 어. 알았어, 미안해. 잘못했어. 지금 갈까? 응? 어, 울지마! 뚝. 알았어, 갈게. 응?"

"...브랜트?"

"이단?"


브랜트는 사무실에 올리가 없는 요원 명단 1순위에 올라가 있는 이단을 발견하고는 굉장히 놀란 얼굴로 이단을 바라보았다. 이단은 이단대로 방금 브랜트의 통화 내용을 듣고는 상황을 파악하지 못해 혼란스러운 상태였다.


"여긴 어쩐 일이에요? 당신이, 사무실에?"

"그보다 간다니? 어딜?"

"아-. 맞아, 저 오늘은 먼저 가보겠습니다."

"뭐? 다음 작전 브리핑이 있다며."

"무슨 소리에요? 아니, 그보다 당신이 언제 브리핑에 대해 신경이나 썼다고. 제인이라 루터한테 물어봐요. 그거라면 아까 전달해놨으니까."


서둘러 본부를 나가버리는 브랜트의 뒷모습을 보며 이단은 정말 자신과 어울리지 않는 종이 뭉치를 찢어버렸다.





4.

모두의 궁금증이 폭발하기 바로 직전, 사건은 터졌다. 

딱히 임무 중에 터진 사건은 아니었다. 아주 우연히 길을 지나가다 폭발 사고에 휘말린 브랜트는 곧바로 응급실로 실려갔다. 하필 폭발의 중심 근처에 있었던 것이 화근이었다. 다행스럽다고 해야할지 목숨은 건졌지만 의식 불명에 오른팔에 금이 간 상태로 구급차에 실려 들어온 브랜트를 보며 벤지는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응급실의 문을 바라보았다. 제인과 이단의 표정도 별반 달라보이지 않았다. 이것이 정말 우연에 의해 일어난 사고인지, 아니면 브랜트를 노리고 일어난 사건인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 브랜트가 의식을 되찾을 때까지 이단의 팀은 잠정 대기 상태였다. 지금 당장이라도 밖으로 나가 브랜트를 저렇게 만든 자들에게 복수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한결같은 마음으로 참아내야만 했다. 


때 마침 울리는 벨소리에 벤지는 하마타면 들고 있던 브랜트의 자켓을 떨어트릴 뻔했다. 계속 울리는 전화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벤지는 핸드폰을 이단에게 내밀었다. 이단은 한숨을 한 번 내쉬고는 차분한 마음을 가지려 노력했다. 짧은 시간안에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수를 떠올린 이단은 천천히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 ......

"여보세요?"

- ...아빠?


이단은 궁지에 몰린 표정으로 모두를 바라보았다.





5.

세상에, 그 누가 알았을까. IMF의 수석 분석 요원 윌리엄 브랜트에게 딸이 있을 거라는 사실을 누가 알았을까.

느낌표 다섯개, 물음표 다섯개.


브랜트는 다행스럽게 몇 시간 지나지 않아 바로 정신을 차렸으나, 눈 앞에 펼쳐진 상황을 확인하고는 다시 눈을 감고 싶다는 강한 충동에 사로잡혔다.


"아빠, 많이 아파?"

"...괜찮아."

"아프지마."

"쉬, 아빠 괜찮다니까."


금이 간 오른팔을 들어올리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알아차리고는 힘겹게 왼팔을 들어올린 브랜트는 작은 아이의 머리를 연신 쓰다듬었다. 브랜트의 손을 꼭 잡고 있는 아이의 뒤로 지금 가장 보고 싶지 않은 얼굴이 셋-. 브랜트는 들리지 않게 한숨을 내쉬었다.


"리나, 아저씨들한테 인사 했어?"

"...아직."

"아빠가 뭐라그랬지?"

"어른들한테는 인사 잘 하라고 그랬어."

"옳지."


그치만 오늘은 나중에 하자. 아빠가 너무 졸려. 브랜트는 넌지시 이단을 바라보았고, 이단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브랜트는 아이의 손등에 입을 맞추고는 다시 잠들었다.





6.

아이의 이름은 리나 브랜트. 윌리엄 브랜트의 하나뿐인 딸이었다.














7.

"절대 안 돼."


너무나도 완고한 태도에 브랜트는 한 순간, 이 상황에 자신과 이단을 대입하고 있었다. 안 돼, 절대 무리야. 예산이 없다고, 이 거지같은 팀 리더, 하며 이단에게 욕을 퍼부으면서도 꼬박꼬박 이단의 뒷처리를 해주는 제 모습이 스쳐 지나가자 브랜트는 너무나도 자신의 인생이 처절하게 느껴졌다. 아니, 이럴때가 아니지. 브랜트는 최대한 불쌍한 표정을 지으며 두 손을 고이 모았다.


"딸, 응?"

"난 그 아저씨 싫어."

"그니까 왜 그렇게 이단이 싫은건데?"

"자기 혼자 세상 살고 있잖아."

"......"


정말이지, 이렇게 완벽한 대답을 할 줄은 몰랐던 브랜트는 그대로 딱 굳어버렸다. 오, 맙소사. 브랜트의 기억 속, 딱히 이단이 리나에게 잘못한 것은 없던 걸로 알고 있다. 그런데 어쩌다가 하나뿐인 딸 아이가 누구나 다 존경하고 좋아해하는 '이단 헌트'를 싫어하게 되었는가.


"아빠는 내가 지킬거야."


Holy shit.





8.

"푸하하하-!!"

"...진짜로?"

"큭, 크큭, 세상에. 이거 완전 특종이야. 동네 사람들!"

"닥쳐, 벤지."

"넌 꼭 나한테만 그러더라."


그러면서도 차마 웃음을 숨길수가 없는지 볼에 빵빵하게 바람을 불어넣고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벤지를 보고 있노라니, 브랜트는 없던 혈압도 오를 것 같은 기분이었다. 오늘도 IMF의 수석 분석 요원으로 출근도장을 찍자마자 리나에게 걸려온 전화의 내용은 무척이나 당황스러운 것이었다.


- 그 아저씨 바꿔줘.

"이단?"

"나?"

"아니, 아니. 안 돼, 안 그럴거야. 리나, 학교는 갔어?"

- 아저씨 바꿔주면 갈게.

"리나 브랜트! 학교 가야지."

- 딱 한마디만. 응?


절절하게 애원하는 아이의 목소리에 어떤 아버지가 마음이 흔들리지 않을 수 있을까. 브랜트는 이건 절대로 하면 안된다는 짓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골백번은 더 알면서도 기어코 핸드폰을 이단에게 넘겼다. 그 일이 얼마나 큰 후폭풍을 몰고 올지는 뻔히 알고 있었으면서도.


"그래. 나 바꿔달라며?"

- ......

"...리나?"

- 우리 아빠한테 손 끝 하나라도 대기만 해요!

"...내 인생은 망했군."


옆에서 중얼거리는 목소리에 이단은 무심코 방심하다 웃음이 터질뻔한 것을 고이 눌러두었다. 머리가 아프다는 듯 인상을 잔뜩 찡그리는 브랜트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이상하게 심술을 부리고 싶은 마음이 생겨났다. 이단은 무척이나 밝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이미 늦었어, 꼬마 아가씨."

- 네?!

"학교 잘 다녀와, 리나. 이따 집에서 보자."

"뭐?!"

- 뭐라구요?!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은 이단은 정말이지 태연한 얼굴로 브랜트에게 물었다.


"뭐?"


브랜트는 지금 당장 병가를 내고 싶은 마음이었다.









그냥 브랜트를... 해쳐보고 싶었는데....(이하생략)





※ 모브x브랜트 요소 있음.






급하게 입을 부딪혀오는 남자 때문에 중심을 잡지 못한채 허우적거리던 등 뒤로 벽이 닿았다. 제법 세게 부딪힌 덕에 아프다며 등이 비명을 질렀지만 지금 그건 전혀 문제가 될 상황이 아니었다. 마음 같아서는 지금 당장에라도 제 앞에 있는 남자의 턱을 주먹으로 갈기고 나서 바닥에 내려꽂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차마 그럴 수 없는 것이, 하필이면 이 남자가 오늘 자신에게 부여된 미션의 타겟이었기 때문에 브랜트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래, 언젠가 부자 한 번 내가 꼬셔보겠다고 했지. 근데 그건 그냥 장난이었다고! 그 기회가 이렇게 빨리 올 줄은 상상도 못했고, 진짜로 그런 임무를 하달해줄지는 더욱 꿈에도 몰랐다. 이쯤되니 브랜트는 스스로가 원망스러웠다. 물론, 여기서 중요한 것은 브랜트가 완벽한 스트레잇이 아니라는 것도 한 몫했지만 이것은 브랜트의 개인 프라이버시니 넘어가도록 하자. 

미션은 미션이다. 자신의 취향을 들이밀 수 있는 그런 게 아니니 어쩔 수 없다 수긍하면서도 브랜트는 이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아니면 미친 척, 그냥 즐기던가. 브랜트는 고민에 빠졌다. 어차피 호텔 방으로 올라오는 순간 통신은 끊긴 걸로 알고 있다. 왜냐하면 지금 귀에서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으니까! 브랜트는 그것이 다행이라고 해야할지 불행이라고 해야할지 알 수 없었다. 다행이라면, 자신이 오늘 해야만 하는 일이 생방송으로 퍼져나가지 않는다는 것이 다행이고 불행이라면 사지에 혼자만 덜렁 내몰린 꼴이니 마음 속이 엉망진창에 복잡하기만 했다. 표면적으로 꼬시는 일은 성공했으니 이제 그냥 자빠트리고 협박을 할까. 지금 당장 장부를 내놓지 않는다면 목을 꺽어버리겠어. 브랜트는 차라리 그러고 싶었다.


"왜 이렇게 얌전해? 아직도 내숭 떠는 거야?"


내숭은 누가 내숭을 떤다는 겁니까, 이 망할 고릴라야. 브랜트를 괴롭게 하는 것 중 하나가 바로 타겟의 얼굴이었는데, 근래 꽤 많이 눈이 높아져 버린 스스로를 탓해야했다. 아니, 아니지. 이건 자신을 탓할 것이 아니라 그를 탓해야했다. 그러니까 누가 그렇게 완벽하게 생기래? 나 참. 지금 당장이라도 그 신사적인 미소를 지으며 할 수 있지? 라고 묻던 얼굴이 떠오를 것 같아 브랜트는 딱 한번, 딱 한번만 이 악물고 임무에 동참해주기로 했다. 이번일이 끝나면 정신적 피해보상을 IMF에 정식으로 청구하는거야. 그거 좋네.


"그건 내가 할 말입니다. 이거 밖에 안 돼요?"


브랜트는 살며시 눈을 접어 웃으며 남자의 목에 팔을 걸었다. 입술이 닿을락 말락 아슬아슬하게 다가간 브랜트가 혀를 내밀어 남자의 입술을 훑자 좋다며 자지러진 남자가 거칠게 브랜트의 몸을 끌고는 침대 위로 넘어트렸다.


"좋아요, 알았다고요. 급한 건 알겠는데, 천천히."

"이제야 좀 재밌게 구네."


차라리 그가 저런 대사를 내뱉기라도 하면 한 번만 더 해보라고 애원할지도 모르는데. 브랜트는 턱 끝까지 차오른 욕을 삼켜내려 애썼다. 넥타이를 벗어내기 위해 손을 얹자 남자가 쉬, 하며 브랜트의 손을 저지했다. 뭐라도 해볼거냐는 듯 쳐다보자, 그런 브랜트의 시선이 퍽 마음에 든 모양인지 남자가 천천히 브랜트의 넥타이를 풀어냈다. 


"왜요, 처음부터 끝까지 다 해주게요?"

"싫어?"

"아뇨, 뭐."


브랜트는 혀를 차고 싶은 심정이었다. 리드하는 것과 정복하려 구는 것은 엄연히 다르다. 대체적으로 이렇게 하나, 하나 제 손으로 벗겨내는 사람들 중 그다지 신사적인 놈들은 여럿 보지 못한 브랜트는 벌써부터 몸에 오한이 드는 것 같았다. 걸어나갈수나 있으려나 모르겠군. 다리는 바닥으로 떨어트린채 아슬아슬 침대 위에 걸쳐있는 브랜트를 한참이나 흘겨보던 남자가 브랜트의 손목을 꽉 쥐고서는 입을 맞추기 시작했다. 마치 도망가지 말라는 듯 으르렁거리며 급하게 혀를 섞는 폼이 더 이상 인내심이라고는 쥐꼬리 밖에 남아있지 않은 듯 했다. 거칠게 퍼붓는 틈에 피할새도 없이 남자에게 맞추어 키스를 이어갈때쯤, 브랜트는 순간적으로 제 손을 압박하는 것을 느끼고서 고개를 비틀었다.


"이봐요, 조니. 억지로 하려 들지마요."

"색다르게 즐겨봐."

"하지 말-"


버클을 풀고 지퍼를 내리는 소리가 이렇게 소름끼치는 거였나. 브랜트는 완전히 망했다는 생각을 머릿속에서 지울수가 없었다. 설마 이대로 아무것도 없이 할 건 아니지? 이봐, 그건 여자랑 할 때도 완전 최악의 짓거리라고! 브랜트는 반항하듯 거칠게 팔을 휘둘러봤지만 넥타이로 단단하게 묶여버린 양손은 가볍게 그의 한 손에 밀려 침대위에 꼼짝없이 눌려있었다. 단숨에 바지를 한 번에 밑으로 내려버린 탓에 순식간에 서늘한 공기에 노출된 하반신 때문에 브랜트는 온 몸에 소름이 돋을 지경이었다.


"진짜- 놔, 놓으라고!"

"여기까지 와서 왜 그래? 시작도 안 했는데."


그러니까 너 같은 놈의 섹스 판타지에 어울려 줄 생각은 없다고! 오, 제발. 


"...빌어먹을."


안 쪽 허벅지에 닿은 남자의 손이 꼭 얼음장처럼 차가워 브랜트는 저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그런 자신의 반응이 즐거운 모양인지 남자가 피식, 피식 새어나오는 웃음을 굳이 참으려 들지 않았다. 브랜트는 선택의 기로에 서 있는 기분이었다. 지금 당장 팔을 내려쳐 남자의 머리통에 직격을 퍼부을 것인가, 아니면 이대로 가만히 자신은 하나도 즐겁지 않은 판타지에 놀아나줘야 하는가. 망할 장부, 망할 리스트. 망할 테러리스트.

남자의 손이 브리프의 가장 끝에 닿은 순간 브랜트는 눈을 질끈 감았고, 그와 동시에 호텔의 방문이 박살나는 소리와 함께 활짝 열렸다. 그 짧은 틈을 놓치지 않은 브랜트는 다시 눈을 뜨고는 순식간에 묶여있는 두 팔로 남자의 머리통을 내리쳤다. 남자는 꽥 소리 한 번 내보지 못하고 바닥으로 주저 앉았으며 브랜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제발 임무가 끝났다고 말해줄래요."

"끝났어. 네가 시간을 끌어준 덕분에."


단숨에 몸을 일으킨 브랜트는 너덜너덜해진 문과 어느새 자신의 옆에 서 있는 그를 번갈아보며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정말 끔찍한 하루야. 브랜트는 그에게서 시선을 돌린채로 묶여 있는 두 손을 가만히 내밀었다. 그래도 반항아닌 반항을 하긴 했으니 얼마나 꽉 잡혀 있었는지 조금 발갛게 부어오른 손목을 보며 브랜트는 혀를 찼다. 마음 같아서는 몇 대 더 갈겨주고 싶었지만 이미 임무는 끝났으니 이 곳에 더 이상 남아있을 이유는 없었다. 빨리 집에가서 씻고 자는거야. 보고서는 개나 주라지. 한참이 지나도록 아무런 소식이 없는 탓에 브랜트는 무슨 일 있냐는 듯 그를 올려다봤다.


"이단? 이것 좀 풀어달라고요."


그래야 바지를 올리든 뭘 하든 할 거 아니냐고. 이 인간은 오늘 또 왜 이래. 한참이나 미동이 없는 그를 보며 또 한번의 한숨을 내쉰 브랜트는 어영부영 자리에서 일어나서는 굉장히 웃긴 폼으로 바지를 집어 올렸다. 뒤로 묶이지 않은 게 그나마 다행이지. 그랬으면 진짜 그건, 어우. 그러나 브랜트의 행동은 버클을 다 채우기도 전에 자신의 팔을 있는 힘껏 끌어당기는 힘에 멈추었다.


"이단?"


브랜트는 그제야 자신과 눈을 맞추는 이단을 보고 나서야 뒷말을 말끔하게 삼켜버렸다. 왜 화난거야? 지금 화를 내야 하는 사람은 나 아냐? 


"이봐요, 이단. 진정해요. 화내지 말고 침착하게."

"...후."

"어때요, 효과가 좀 있죠? 그러니까 우리 이제 그만 이 방에서 나가-"

"브랜트."

"......"

"시끄러워."


우악스럽게 제 턱을 잡아 올린 이단 덕에 절로 입을 다물게 된 브랜트는 곧 이어진 그의 키스에 속수무책으로 입을 열어주었다. 방금 전의 남자와 한 것은 비교도 안 될정도로 강하게 밀어붙이는 그의 행동에 브랜트는 숨이 다 막힐 지경이었다. 힘을 주어 그의 가슴팍을 때려봤지만 미동도 하지 않는 탓에 브랜트는 억지로 아주 긴 입맞춤을 선물로 받아야만 했다.


"...여기서 이러고 싶어요?"

"화 나잖아."

"거기서 그런 말 하면 반칙인 거 알고 그러는 거죠, 지금."


평소의 그답지 않게 조금이지만 침착하게, 이성적으로 굴지 못하는 모습에 브랜트는 무심코 크게 웃고 싶은 것을 애써 눌러 담았다. 대신 브랜트는 아주 짧지만 부러 쪽, 소리가 나도록 그의 입술에 입을 맞춘 뒤 말했다.


"집으로 돌아가죠."


드물게 환한 미소를 지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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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biyu04.tistory.com/115 에서 이어지는 또 다른 조각글들.

근데 애들이 키네시스를 뭐라고 부르지...?




6.

"날씨도 좋은데 나가서 놀아볼까요?"


점심시간이 지난 5교시의 수업은 정말 말 그대로 졸음과의 싸움이었다. 그런 끊임없는 싸움에서 많은 학생들을 구원해준 것은 다름 아닌 그 수업의 교사였다. 키네시스는 그의 돌발적인 행동이 못마땅했지만 그도 특별한 능력만 뺀다면 여느 다른 고등학생과 똑같은 사람이었으니 크게 신경을 쓰고 싶지는 않았다. 어쩌면, 저번의 그 일로 아주 조금이지만 벽이 허물어졌는지도 모른다는 스스로 생각해도 말도 안된다는 생각을 하면서 말이다.

혹시라도 장난이었어요, 라는 말을 하기 전에 우르르 밖으로 나가는 학생들을 보며 키네시스도 곧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지막으로 교실을 나가면서 그와 눈이 마주쳤지만 딱히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하얀 마법사는 믿으면 안되는 존재지만, 정말 믿으면 안될까. 유나가 듣는다면 더위를 먹었냐고 소리를 지를지도 모를 일이라고 생각했다.

 

애들은 애들이다. 그리고 그 애들의 범주에는 키네시스도 끼어있다. 거의 다 죽어가던 아이들은 운동장으로 나온것만으로도 생기가 팍 도는 것 같이 행동했다. 남학생과 여학생이 다 같이 할 수 있는 놀이 중 가장 보편적인 피구를 하기로 한 아이들은 알아서 코트를 그리고 공을 가져오는 등 시키지도 않은 일을 아주 열심히 했다. 


"짝피구 하자!"

"그래. 솔직히 남자애들이 공 던지는 거 맞으면 아프잖아."

"그럼 그냥 공평하게 출석번호대로 짝 짓자. 설마 우리중에 썸 타는 애들 있는 거 아니지?"


한 아이의 말에 다들 미쳤냐며 꺄르르 거리는 것을 들으며 키네시스는 머릿속으로 출석부를 정리해보았다. 분명, 우리반은 수가 안 맞을 텐데.


"회장 혼자 남네."


아이들의 말에 자신에게로 시선이 쏠렸다는 것을 눈치 챈 키네시스는 사람 좋은 미소를 살며시 지어보이며 경기에서 빠지겠다는 말을 하려던 순간, 자신의 어깨로 턱 하니 걸쳐지는 손을 애써 무시하고 싶은 강한 충동에 휩싸였다.


"그럼 회장은 저랑 같은 팀으로 하는게 어떨까요?"

"영쌤 최고!"

"봐주는 거 없는거예요!"


알아서 편을 가르고 코트로 들어가는 아이들을 보며 키네시스는 그의 멱살을 잡고 싶은 것을 애써 가라앉히며 그를 쏘아보았다.


"대체 뭐하자는 거야?"

"학생이면 학생답게 놀아보라는 배려입니다만?"


그니까 네가 굳이 왜 그런 배려를 하냐 이 말이지. 한숨을 내쉬면서도 한 번 어울리기로 마음을 먹은 키네시스는 서둘러 코트로 들어갔다.


짝피구의 룰은 간단하다. 앞에 있는 사람은 공을 맞아도 아웃이 되지 않지만, 뒤에 있는 사람이 공을 맞거나, 앞에 있는 사람을 잡은 손을 놓치거나 하면 둘 다 아웃이 되는 게임이다. 키네시스는 처음에 자신이 앞에 있으려다 자신보다 키가 조금 더 큰 그 때문에 하는 수 없이 그의 뒤에 매달리기로 했다. 이왕 하기로 한 거, 마지막까지 살아남아 이 게임의 승자가 되는 것이 키네시스의 목표였다. 그런 키네시스의 말을 들은 그가 웃으며 말하길, 참 당신답다고 했다. 키네시스는 그가 그러거나 말거나 신경쓰지 않기로 했다.


이 세상의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그런 것들과 함께 하늘을 날아다니며 마법을 쓰는 그에게 이 놀이판은 얼마나 우스울까. 그런 키네시스의 생각과는 다르게 그는 꽤 열심히 게임에 참여하고 있는 듯 했다. 이쯤되니 그가 정말 진심으로 우리 모두의 영어선생님을 연기하고 있는건지 약간 헷갈릴 지경이었다. 피구 게임에 승부욕을 불태우는 자신에게 당신답다는 말을 한 것 치고는 본인도 꽤 열심히 하지 않는가. 키네시스가 웃으며 말했다.


"뭐야, 꽤 열심히 하잖아."

"당신이 이기고 싶다면서요."

"...뭐?"

"이기게 해주려고 하는 겁니다."


키네시스는 하마타면 그의 옷자락을 잡고 있던 손을 놓을 뻔 했다. 





7.

키네시스는 딱히 성실한 학생회장은 아니었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출석도 그다지 성실하지 못한 학생이기도 했다. 그가 학생회장을 할 수 있었던 이유는 부회장인 유나의 적극적인 추천과 뒤지지 않는 성적, 그리고 한 몫 단단히 하는 인기 때문이었으리라. 그나마 최근에서야 그 때문에 억지로 학교에 붙어 있어야 했으니 옛날에는 거들떠보지도 않던 학생회의 일이 꽤 귀찮게 느껴졌다. 그렇다고 하지 않을래야 않을수가 없는 것이 10년 터울의 소꿉친구의 잔소리는 꽤나 귀가 아팠다.


조용한 곳을 찾아 도서관에 들어온 키네시스는 처음으로 아주 느긋하게 도서관을 둘러보았다. 보름이 넘는 기간동안 그의 뒤를 쫓아다녔지만, 그의 이름값이 꽤 무거운 모양인지 그는 자신의 말대로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다른 선생님들과 다르지 않아 머리가 아플 지경이었다. 이쯤되니 미리 걱정하는 것은 자신들만 피곤하다는 결론을 내리고 여차할 때 빠르게 대비할 수 있도록 준비를 잘 하고 있자, 라는 방향으로 계획을 잡은 그들이었기에 키네시스는 지금 그의 뒤를 미행하는 것이 아닌 도서관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을 택했다.


'물리 법칙'

'초자연적 현상'

'이 세상에 초능력자는 존재하는가'


꼭 자신을 놓고 얘기하고 있는 것 같은 책들이 꽂혀있는 책장을 보며 키네시스는 슬쩍 미소를 지어보였다. 자신도 고민을 해보지 않은 것은 아니다. 이 능력은 대체 어쩌다가 생겼으며, 이 능력 때문에 귀찮은 존재들과 엮이게 되었고, 둘도 없는 친구들을 만들기도 했다. 과연 이 세상에는 자신말고 또 다른 초능력자들이 생겨날까. 스스로 자문해봤지만 답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물리 법칙을 완전히 무시하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초능력자라. 제 앞에 있는 당신을 설명하는 말 같군요."

"......"


키네시스는 굳이 놀랐다는 것을 표출하지 않으려 애썼다. 어느새 자신의 옆으로 온건지 키네시스가 바라보고 있던 책장의 책을 흥미롭다는 얼굴로 보던 그였다. 


"한 사람 더 있지."


가볍게 손을 움직이자 저절로 책장에서 빠진 책이 키네시스의 손 위로 내려왔다. 정사각형 모양의 큐브를 돌려 맞추듯 이리저리 책을 돌려가며 살펴보던 키네시스는 곧 그 책을 그에게 건냈다.


"당신도 마찬가지잖아."


그는 책을 받아들고는 아무 말 없이 웃어보이며 다시 책장에 책을 꽂았다. 키네시스가 무어라 말을 덧붙이려던 순간, 인기척이 들리며 그들이 있던 책장 사이로 도서관의 사서 선생님이 고개를 내밀었다.


"도서관 닫을 시간이랍니다. 어머, 학생회장? 다른 아이들은 다 하교했는데 아직까지 안 가고 뭐하고 있니?" 


키네시스는 그와 사서 선생님을 번갈아보고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영어 선생님께 물어볼 것이 있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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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브랜트, 요새 무슨 일 있어?"


자신을 보며 걱정스러운 얼굴로 묻는 벤지를 보며 브랜트는 뭐가 문제인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고개를 저어보였다. 그러자 벤지가 자신의 얼굴과 거울을 번갈아 손가락질 하며 말했다.


"네 얼굴을 좀 봐, 반쪽이 되다 못해 창백해서 귀신을 보는 것 같은 기분이야."

"...그래?"


브랜트는 가만히 벤지가 가르킨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천천히 살펴보았다. 딱히, 달라보이는 게 없는데, 하며 중얼거리는 브랜트를 보며 벤지는 요 며칠 전 임무를 끝내고 기념이라며 찍은 사진들을 브랜트의 눈 앞에 펼쳐보였다.


"이것보라고. 적어도 이 때의 네 얼굴은 괜찮았다고?"

"그래서 지금 내 얼굴 보고 뭐라 그러는거야?"

"아니, 아니! 그게 아니잖아."

"걱정하지 마. 나 멀쩡해."


그렇게 말하는 것 치고는 얼굴이 그다지 밝지 못해 뭐라고 한 마디 더 덧붙이려던 벤지는 결국 고개를 저으면서 말을 삼켰다. 본인이 괜찮다는데 무슨일이 더 있으랴. 그보다 이 인간은 어디있어? 벤지의 물음에 브랜트는 한숨을 뻑뻑 내쉬며 모니터로 시선을 돌렸다. 그래도 그 대상이 살아있음을 나타내는 빨간색의 깜빡이는 점을 보며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브랜트를 보며 벤지는 고개를 저었다. 하긴, 이러니까 얼굴이 저 모양일지도 몰라. 스스로 납득하며.





2.

집으로 돌아온 브랜트는 오늘 하루의 스트레스와 긴장감으로 인해 굳어버린 목과 어깨를 돌리며 스트레칭을 했다. 세월은 세월인가보네. 발써 예전같지 않은 몸 상태에 브렌트는 절로 인상을 썼다. 그 와중에 뒤로 살금살금 느껴지는 인기척에 브랜트는 아주 조금 짜증이 섞인 목소리로 내뱉었다. 저거 일부러 저러는 거라니까.


"오늘은 또 뭘 했어요?"

"뭐긴. 너랑 헌리가 말한 테러리스트 집단을 와해시켰지."

"나랑 벤지는 장식이에요? 통신 끊지 말라고 했죠."


그러거나 말거나, 브랜트의 짜증을 아주 자연스럽게 흘려보낸 이단이 슬쩍 브랜트의 손목을 쥐자 브랜트는 그제야 이단과 시선을 맞췄다. 이단은 사람 좋은 얼굴로 미소를 짓고 있었으나 브랜트는 마주 보며 웃을수가 없었다.


"내 얼굴이 좀 창백해졌대요."

"누가?"

"벤지가."


브랜트의 대답에 이단은 아주 조금, 생각하는 척을 하더니만 금새 무슨 말이냐는 듯 모르겠다는 뻔뻔한 얼굴로 브랜트의 손목에 입술을 묻었다.


"그러니까 작작 좀 마셔요. 아니, 애초에 몸을 좀 사리란 말입니다."

"쉿. 식사할 때는 개도 안 건들인다잖아."

"이단, 나는 당신의 식사가-"

"로맨틱이라는 거 몰라?"

"...얼어죽을 로맨틱."


미약한 숨결이 피부에 닿자 브랜트는 온 몸에 소름이 돋는 기분이었다. 쌍방의 협의하에 이루어지는 행동이라고는 하지만 정말 몇 번을 해도 적응이 안 되는 군. 무언가 날카로운 것이 피부를 파고 들어오는 느낌은 정말이지 기가 찰 정도로 소름끼쳤다. 익숙한 냄새에 브랜트가 살짝 인상을 찡그리자, 그런 브랜트를 달래듯 손목을 핥았다.


"아, 좀. 그게 더 소름끼치는 거 몰라요?"

"넌 생각이 너무 많아."

"당신은 행동을 하고 난 뒤에 생각을 하니까 문제죠."


손목에 닿은 입술이 그가 짓는 웃음에 따라 슬며시 떨리자, 브랜트는 저도 모르게 손목을 뒤로 빼려 했다. 물론 그가 자신의 손목을 세게 쥐고 있는 터라 브랜트의 행동은 미수에 그쳤지만 말이다. 


"브랜트."

"왜요."

"미안, 나 오늘 총 맞았어."

"네?!"


콱, 브랜트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했다.





3.

이단 헌트가 '이단 헌트'일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는 남들이 할 수 없는, 절대로 성공할 수 없는 일들을 우습다는 듯 그럴싸하게 성공해내는 그런 사람이었다. 같은 인간이 맞는 건가,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가 해내는 미션들은 그만큼 어려운 것들이 많았다. 처음 이단이 했던 일들의 리스트를 받아본 브랜트는 그저 소문일 뿐인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지만 그가 두바이의 고층 빌딩 건물을 올랐을 때 그에게 사과를 하고 싶어졌다. 흠, 미안하군요. 나는 그게 다 소문인줄로만 알았죠. 

그때까지만 해도 이단과의 관계는 딱 그 쯤이었다. 비록 그에게 숨기고 싶은 과거가 하나 있긴 했지만, 굳이 그걸 밝히지 않는다면 이단에게 자신은 그저 우연히 국장의 옆에 있었던 분석 요원이며, 우연히 한 팀이 되었을 뿐인 그런 사람이었다. 그러다 어쩌다보니 현장 요원이었던 사실을 들키고 사실은 자신이 크로아티아에서 당신의 경호 임무를 맡다 실패했다는 과거를 -사실은 실패한 사실 모두가 조작이었지만- 털어놓고 나서도, 이단 헌트와 윌리엄 브랜트와의 관계는 그냥 딱 그 쯤이었을 것이다. 한번 생사를 같이 했던 동료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그 때, 브랜트가 우연히 그 곳에 들어가지만 않았더라면.


작전에 쓰였던 장비들을 정리하기 위해 다시금 기차에 오른 브랜트는 무언가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분명 그 곳에는 자신 외에 또 다른 누군가가 있었으며, 이 곳에 올만한 사람은 기껏해야 벤지 뿐일것이다. 언제든 긴급 상황에 대비할 수 있도록 자세를 낮춘 브랜트는 미약한 숨소리에 '그'라고 추정되는 사람의 이름을 불렀다.


"이단?"

"......"

"여기서 뭐하는 거예요? 불도 안 켜고."

"켜지 마."


그것은 마치, 꼭 위협을 하고 있는 짐승의 목소리와 같아 브랜트는 천천히 양손을 들어보였다. 지극히 본능적인 것이었다. 까딱 잘못하면 이 분위기에서는 자신을 향해 총을 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할 정도로 이단의 목소리는 매우 위협적이었다.


"나예요. 윌리엄 브랜트라고요."

"나도 알아."

"그럼 당신이 나한테 왜 그렇게 구는 지 말해줄래요? 지금 꼭 두바이 빌딩에서 떨어질 것 같은 그런 느낌이거든요."

"여긴 왜 온거야?"

"우리가 썼던 물건들 제자리에 돌려놓으려고 왔죠."

"...아무말도 못 들은거야?"

"무슨 말이요?"


어둠 저 편에서 그가 한숨을 쉬는 소리가 들렸다. 나름 아까보다는 많이 풀어진 분위기에 브랜트는 목소리가 들려오는 쪽을 넌지시 바라보았다. 


"이제 불 좀 켜도 될까요? 하나도 안 보이거든요."

"......"

"...이단?"


그 순간, 천장에 불이 밝혀지는 것을 확인한 브랜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려다 눈 앞에 있는 이단의 모습에 비명을 내질렀다.


"오, 세상에. 어디 다쳤어요? 이 피는 대체..."

"......"

"총이라도 맞은-"


브랜트는 서둘러 그에게 다가가려 했지만 그를 향해 한 발자국을 내딛는 순간, 다시금 천천히 그의 모습을 살펴보았다. 아니, 저럴리가 없어. 만약 이단이 총에 맞은 거라면 피가 저렇게 나올리가 없어. 브랜트는 내딛은 발걸음을 다시 돌려 뒷걸음질을 쳤다. 


"당신 거 아니죠?"

"-브랜트."

"......"

"오늘 여기서 본 것은, 단 한 마디도 입 밖에 내놓으면 안 돼."


그 때, 무슨 생각을 했더라. 망했다? 아니면 내 인생은 끝났다? 

그게 그건가.





4.

이단 헌트가 '이단 헌트'일 수 있는 이유는 그가 생물학적으로 보통의 다른 사람들과 같은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5.

그 뒤로 브랜트는 그 사실을 정말 그 누구한테도 말하지 않았고, 평소와 똑같이 이단을 대하려고 노력했다. 이단은 그런일이 있기라도 했느냐는 듯 아주 자연스럽게 브랜트를 대했지만 브랜트는 완벽하게 자연스러운 모습을 연기하지는 못했다. 그 뒤로 딱히 이단이 그 일에 대해서 브랜트에게 언급한 적은 없었다. 그랬기에 브랜트는 이단이 그 때 대체 뭘 했는 지 상상의 나래를 펼칠 수 밖에 없었다. 그에 대해 한 마디라도 물으려고 하면 그 때의 경고가 떠올랐다. 그렇게 아무일도 없이 보름 남짓이라는 시간이 지났을까. 상황은 전혀 예상치 못하게 흘러갔다.

여느때와 다름 없이 총알이 난무하는 전쟁터와 같은 곳을 거닐다 이단이 총에 맞은 것이다. 그 상황을 모니터링하고 있던 브랜트는 다급하게 이단의 이름을 불렀지만 통신에 이상이라도 생긴 것인지 그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긴급히 현장으로 나간 브랜트는 잔당이 보이는 족족 처리를 해나갔지만 이단의 모습은 도통 보이지가 않았다. 엄습해오는 불안감에 더욱 커진 긴장감 때문에 심장이 뛰는 소리가 꼭 다른 사람에게라도 들릴 것 처럼 커다랗게 귓가에 쿵쿵대며 울렸다. 


"이단, 들려요? 들리면 대답해요. 이단!"

"다 들리니까 그 심장 소리 좀 어떻게 해봐. 너무 커."

"shit, 놀랐잖아요!"


브랜트의 고함에 이단은 정말로 시끄럽다는 듯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저었다. 어딘지 모르게 거동이 불편해보이는 것이 총에 맞은 것은 사실인 모양이었다.


"괜찮아요?"

"심각한 정도는 아니야. 그보다 다른 녀석들은?"

"끝났어요. 처리팀한테 연락해뒀으니까 이제 돌아가기만 하면 됩니다."

"브랜트."

"네."

"미안한데 한 번만 봐줘."


뭐를요, 라고 대답하기도 전에 자신의 귀에서 인이어를 잡아 빼낸 이단은 그대로 브랜트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마치 총에 맞은 것 같은 고통에 브랜트는 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6.

브랜트는 그 뒤로 한참이나 목에 붕대를 감고 다녀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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