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브랜트가 처음 했던 예상과는 달리 이단과는 여느 다른 커플들과 마찬가지로 굉장히 평범하고, 평범한 연애를 하고 있었다. 브랜트는 스스로와의 내기를 했었다. 이단이 알면 꽤 실망할 것 같아 말하지는 않았지만 아마도 그와의 관계는 길어봐야 3개월이라는 선을 그어놓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었다.
홧김에 이단에 대한 마음을 고백한게 벌써 4개월 전이니까-. 이제 곧 있으면 반년을 바라보는구나. 다른 사람들과 연애를 할 때도 이렇게 언제부터 연애를 시작했는 지 세고 다니는 버릇따위는 없었다. 이건 오로지 지금 자신의 상대가 이단이기에 브랜트가 실행하고 있는 행동 중 하나였다. 처음 골대로 공을 찬 것은 브랜트였지만 그 공을 골대로 차 골을 이루어낸 것은 이단이었다. 브랜트는 고백과 동시에 -아이러니한 말이지만- 이단에 대한 마음을 접겠노라 선언했었다. 그렇게 의도적으로 골대를 빗겨 공을 찼지만 그는 정말 불가능한 것이 없는 남자였는지 골대 밖으로 굴러갈 공을 기어코 골대로 집어넣었다. 브랜트는 환호를 해야 하나 절망해야 하나 고민했었다.
어쨌든 결과적으로 이단과 브랜트는 연인 사이가 되었고, 다른 커플들과 마찬가지로 평범하게 연애를 해온 게 벌써 5개월에 접어들고 있었다.
2.
아주 가끔, 아주 가끔이지만 브랜트는 이단이 '이단 헌트'라는 게 너무 싫었다. 그는 타고난 것이 원래 완벽하게 태어났기에 늘 불안했다. 원래 좀 잘난 사람을 애인으로 두고 있는 자는 늘 불안하기 마련이다. 그것도 아주 좀 잘난게 아니라 무척이나 많이 잘난 사람이면 더욱 그렇다. 그러나 브랜트에게 이것은 표면적인 것에 불과했다. 브랜트에게 있어서 제일 두렵고 무서운 것은 그가 다른 사람과 새로운 관계를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이 세상에서 사라져버리는 것이었다. 사라진다는 것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 죽는 것과 종적을 감추는 것. 브랜트는 이단이 아무도 모르게 몸을 숨기면 절대로 찾아낼 수 없으리라 확신하고 있었다.
그에 대한 마음을 접겠다고 선언한 것은 어디의 멍청이인가. 우습기도 하지. 브랜트는 스스로 생각하길 감정을 토해내는데 일가견이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만큼 거침이 없다는 뜻이다.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이단에게 쌍욕을 날리며 화를 낼 수 있는 사람은 브랜트뿐일 것이다. -물론 그것은 브랜트가 이단의 애인이기 때문에 그럴 수 있는 것도 분명히 있을 것이다.- 어디 그것 뿐이랴, 말도 없이 이단의 전화를 먼저 끊을 수 있는 사람도 브랜트 뿐이고, 또-.
브랜트는 이단이 '이단 헌트'라는 사실이 무서워졌다. 이단은 브랜트가 숨을 쉴 수 있게 해주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가 없는 삶은 상상하기도 싫었다.
죽을만큼, 싫었다.
3.
오, 이런 젠장.
완전 글러먹은 애새끼같잖아.
4.
브랜트가 도착했을 때, 이단은 이미 깨어 있었다. 브랜트는 당장에라도 소리를 지르며 화를 내고 싶었지만 막상 이렇게 그를 보니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았다. 무사해서 다행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짓 좀 그만하라고 했잖아요, 망할 이단, 그래도 정말 다행이야. 수십가지의 문장이 브랜트의 머릿속을 둥둥 떠다니는 동안 이단은 그저 가만히 브랜트를 바라볼 뿐이었다.
"안녕, 브랜트."
브랜트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다행이다.
브랜트는 그 자리에 있던 팀원이 벤지나 루터 뿐이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안 그랬다면 브랜트가 이 다음에 한 행동이 IMF 대서 특보로 그 다음날 바로 헤드라인에 실릴지도 모르는 일이었으니.
이단은 굳이 브랜트를 막지 않았다. 오히려 본인이 더 안심했다는 듯 브랜트의 키스에 응했다.
5.
다행은 개뿔, 꺼져버려. 이단 헌트.
한번만 더 인이어 던져버리면 당신과 내 사이도 끝이야.
6.
그래도 브랜트는 이단이 '이단 헌트'임에 감사한다. 그는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만들었으며, 무슨 일이 있어도 반드시 자신의 곁으로 돌아오는 남자였다. 브랜트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 괜찮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브랜트의 아주 커다란 착각일 뿐이었다. 이단은 신이 아니다. 신과 같은 존재라 불리지만 신이 아니었다. 그도 평범한 인간이었고, 다치면 피가 나고, 치명상을 입으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 바로 지금처럼.
미안하다고 한게 기껏해야 몇 주 밖에 더 됐다고 그럽니까. 지금이라도 일어나서 미안하다고 사과하면 용서해줄게요. 화도 안 낼게.
그 날, 브랜트는 처음으로 신에게 기도란 것을 해봤다.
7.
이단 헌트는 무사히 깨어났고, 비록 치명상을 입어 당분간 움직일 수 없다는 진단을 받았지만 기어코 사흘 째에 못참겠다며 탈출을 감행했으며, 브랜트에게 '지금 당장 병원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1개월 동안 당신 얼굴도 쳐다보지 않을 겁니다.' 하는 협박 아닌 협박을 듣고 나서야 얌전히 이빨을 숨기고 병원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그러나 결국, 또 참지 못하여 다시 병원을 탈출하는 사태가 벌어졌고, 결과적으로 이단이 온 곳은 브랜트의 집이었다. 올 줄 알았다는 듯, 태연한 얼굴을 하고 이단을 맞이하는 브랜트를 보며 이단은 쉽게 집 안으로 들어가지 못했다.
"뭐해요?"
"미안해."
"......"
"진심이야. 정말 미안해, 브랜트."
평소라면, 이정도까지는 아니었을 것이다. 이단은 내심 초조함을 느꼈다. 단순히 자신이 하는 사과에 브랜트가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아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이단은 반드시 브랜트의 곁으로 돌아와야만 했다. 그것은 둘의 암묵적인 약속이었으며, 브랜트와 자신과의 관계를 유지할 수 있게 하는 유일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내심 몸을 사려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나 그게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도 그에게는 미안한 일 중 하나였다. 아니, 어쩌면 그것도 자신은 언제나 늘 브랜트의 곁으로 되돌아갈 수 있다는 확신 때문에 그러는 것일지도 몰랐다.
"더 이상 감당해낼 자신이 없어요."
이단은 가만히 눈을 감았다. 그러나 그의 속은 이미 새까맣게 타버린 것 같았다. 길이 보이지 않았다.
"당신이 없는 세상을 대비한다는 거, 진짜 무섭다고요."
"......브랜트."
"그러니까, 내가 부르면 최대한 빨리와요. 이번처럼 늦장부리지 말고. 다음에도 늦으면 그 때는 진짜..."
무심코 붙잡은 브랜트의 손이 마치 불에 데인 것 처럼 뜨거웠기에, 자신이 살아있음을 똑똑히 느꼈다. 이단은 더 이상 사과하지 않았다. 그저 그러겠다는 대답만 계속 들려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