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바다에는 전설이 하나 있어. 바로 인어가 살고 있다는 전설이지. 어라, 웃네? 하긴. 나도 웃긴 이야기라고 생각했어. 내 눈으로 그 인어를 직접 보기 전까지는 말이야.   그 날도 여느때와 다름없이 바닷속으로 들어갔어. 날씨는 끝내주게 좋았고, 산소통의 남은 산소는 충분했지. 수도 없이 바닷속을 헤엄쳐봤지만 그 날 처럼 아름다운 바다는 태어나서 난생 처음 보는 것이었어. 정말 이 세상의 그 어떤 바다보다 아름다웠지. 보기 귀하다는 바다거북도 보고, 평소에는 숨어서 잘 볼 수 없는 물고기들도 보고 정말 운수대통의 날이라고 생각했지. 하지만, 그것들은 별 거 아니었어. 나는 그 날 인어를 봤어. 민호, 인어 말이야. 진짜 인어!


  "구라 즐."

  "아씨, 진짜라고."

  "이 세상에 인어가 어디있어?"

  "아, 글쎄 있다니까?"

  "뭐, 금빛 웨이브 머리칼을 찰랑 거리며 백옥같이 새하얀 피부에 오똑한 코, 빨간 입술? 장담하건데, 넌 그 날 암초에 머리를 부딪힌거야. 분명해."


  민호는 더 이상 말을 들어주는 게 귀찮다는 듯 손을 내젓고는 호스를 물었다. 몇번 테스트 할 겸 숨을 내쉬고 들이쉬어봤다. 민호는 자신의 가방을 손가락질했고, 방금 전까지 장황하게 이야기를 늘어놓던 남자는 민호에게 가방을 건냈다. 가방을 건네받은 민호는 그 안에서 카메라를 꺼내 목에 걸었다.


  "항상 말하는 거지만, 조심해. 그럼 즐기고 오셔, 바다의 왕자님."


  오글거리는 별명에 온 몸에 소름이 돋은 민호는 패기 있게 가운데 손가락을 들어보이고는 곧바로 바닷속으로 뛰어들었다. 조금 차가운 바닷물에 익숙해질 즈음, 수트의 부력을 조금씩 빼어냈고, 천천히 민호의 몸이 바닷속으로 잠겼다. 

  오늘 날씨는 최상. 바닷물도 잔잔하고 태양도 쨍하다 못해 눈이 다 부실정도다. 태양빛이 강할수록 바다는 더욱 아름다워진다. 그 푸른 속내가 더욱 반짝이며 감추고 있던 보물들을 꺼내보이기 때문이었다. 민호는 익숙하게 다리를 흔들며 항상 지나던 길을 지났다. 형형색색의 물고기들이 모인 산호들의 사진을 찍고 주머니에 있던 밑밥들을 뿌리며 물고기들이 지나갈 길을 만들던 민호는 저 멀리서 유유히 헤엄쳐오는 바다거북을 발견했다. 이 부근에서 바다거북은 꽤 보기가 힘든데.


  - 보기 귀하다는 바다거북도 보고!


  에이, 무슨. 민호는 서둘러 바다거북의 곁으로 다가갔다. 최대한 숨을 죽이고 조심스럽게 거북의 곁으로 다가간 민호는 바다거북의 등딱지를 잡았다. 그에 놀란건지 거북이 발버둥치며 이내 쏜살같이 바다를 헤엄쳤다. 스스로의 다리로 헤엄치는 것하고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빠른 속도로 바다를 가르는 거북의 등에 매달려 한참을 방황하다 이내 거북이 지친 모양인지 포기하고는 민호를 등에 태우고 여기저기 유유히 헤엄쳐갔다. 꼭 용궁으로 가던 토끼 꼴이 된 것 같아 괜히 웃음이 나왔다. 진짜 용궁으로 데려다 주면 좋으련만. 아, 그건 자라인가. 제 갈길을 가기 위해 민호는 가볍게 거북의 등딱지를 두드렸고, 이번엔 조금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가보기로 했다.


  친구들에게도 알려주지 않은 명소. 제 키보다 더 큰 산호와 말미잘이 서식하고 있는 암초가 있는 곳에 도착하자, 민호의 얼굴에 생기가 돌았다. 아까 너무 빨리 헤엄치느라 물안경에 물이 좀 차고 귀가 멍멍하자, 서둘러 이퀄라이징을 한 민호는 능숙한 손길로 물안경의 물을 빼내었다. 태양이 조금 기울기를 기다린 민호는 딱 산호에 태양빛이 쏟아져내릴 때 셔터를 눌렀다. 오늘도 포토왕은 내 차지지. 눈에서 카메라를 떨어트린 민호는 눈 앞을 휙 지나가는 검은 물체에 하마타면 물고 있던 호스를 뱉을 뻔했다. 


  '뭐, 뭐야, 방금?'


  주위를 둘러봤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 착각인가, 하고 돌아서려는 순간 민호는 똑똑히 보았다. 자신의 앞으로 바짝 다가와 얼굴을 들이미는 사람의 형태에 민호는 소리없는 비명을 지르며 팔을 휘저었다. 놀랍도록 침착하게 남자로 보이는 사람은 민호의 어깨위에 손을 올리며 민호를 진정시켰다. 


  "진정해요."

  

  귀가 아닌 머릿속으로 바로 전달된 것 같은 사람의 목소리에 민호는 놀란 눈으로 눈 앞에 있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옷으로 보이는 길게 휘날리는 천을 두른 남자의 웃음은 참으로 묘했다. 그보다, 여긴 수심 30m는 되는데, 장비도 없이... 산소통은? 혼란스러운 민호를 눈치챈 듯 남자는 천천히 민호의 입속에서 호스를 빼내었다. 순식간에 산소호흡기가 사라진 민호의 눈이 동그랗게 떠지며 호스를 향해 손을 뻗자 남자가 조심스럽게 민호의 양 뺨을 부드럽게 감싸면서 입을 맞췄다. 


  '...!'


  자신의 입 안으로 숨을 불어넣어지는 느낌이 너무 생소해 민호는 정말로 온 몸에 소름이 쫙 돋았다. 


  "미쳤냐?!"


  서둘러 남자를 떼어낸 후 인상을 바득바득 쓰며 남자를 노려보며 소리를 지른 민호는 소리를 지르고 난 후 한참이 지나저야 온 몸을 덮쳐오는 위화감에 손으로 입술을 꾹 눌러보았다.


  "목소리, 가..."

  "안경도 안 써도 되는데."


  조심스러운 손길로 민호의 물안경을 벗겨내는 남자의 행동에 민호는 본능적으로 두 눈을 꼭 감았다. 눈 떠봐요, 부드럽게 속삭이는 목소리에 민호는 천천히 눈을 떴다. 


  "말도 안 돼..."


  아무런 위화감도 없이 흘러나오는 목소리, 선명한 시야. 민호는 자신이 꿈을 꾸고 있는 건가 진심으로 고민해야만 했다.


  "어때요? 좋죠."

  "...."

  "그러니까 이제 나랑 놀아요, 네?"

  "너 대체 뭐냐?"

  "토마스, 토마스라고 불러줘요."


  자신을 토마스라고 밝힌 남자는 개구진 소년의 얼굴로 활짝 웃으며 민호의 손을 잡았다.


  


  


 

  * 스타트렉 AU. 전편격인 '별이 빛나는 밤에(http://biyu04.tistory.com/46)' 와 세계관을 공유하고 있습니다.

  * ...는 진도가 확 나가버림.

  * 아주 아주 눈꼽만큼의 뉴트갤리.

  




  “그니까 왜 안 된다는 건데요!”

  “싫다니까 그러네?”

 

  아서라, 그래봤자 오늘도 너는 질 것이다. 뉴트는 갓 식당에서 구워온 팝콘을 씹으며 함장과 일등항해사의 싸움을 지켜보고 있었다. 언제 온 건지 트리사도 뉴트의 옆에 앉으며 뉴트의 손에 들린 팝콘을 먹었다.

 

  “나는 당신을 정말 너무 너무….”

  “함장님.”

  “……윽.”

  “자리로 돌아가시지요.”

  “맨날 이럴 때만 함장이래.”

  “그게 일등 항해사의 특권이니까요.”

  “그거 알아요? 난 당신이 날 함장님, 하고 불러줄 때가 그렇게 섹시…….”

 

  것 봐. 내가 뭐랬어. 오늘도 너브 핀치 - 목과 어깨 사이 존재하는 일종의 점혈을 강하게 눌러 상대를 제압하는 벌칸식 전투 기술 중 하나. - 맞고 쓰러질 거라고 했잖아. 뉴트가 고개를 젓자 트리사는 못말린다는 한숨을 쉬며 마지막으로 남은 팝콘을 입으로 쏙 집어넣었다.

 

  “그래서? 저 둘은 맨날 뭐 때문에 싸우는 건데?”

  “몰랐니?”

  “응.”

 

  손에 묻은 팝콘 가루를 탁탁 털어내며 뉴트를 보며 싱긋 웃으며 말했다.

 

  “Please, Kiss me. My Lover.”

  "오…."

  “그렇다는 거지.”

 

  일찍이 토마스가 민호를 좋아한다는 소문은 이미 스타플릿에 속한 사람이라면 모르는 이가 없었고, 끈질긴 구애 끝에 결국 민호가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는 소문이 퍼진 것이 어언 3개월. 우주함선 ‘The Glade’는 오늘도 평화롭게 우주여행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3개월이면, 어디 보자. 나랑 갤리는 첫 날에 손잡고, 둘째 날에 키스했고, 셋째 날에…. 그리고 지금까지 문전박대 당하고 있고…. 세삼 생각해보니 토마스가 퍽 불쌍할 법도 했다. 사실 그건 또 어쩔 수 없는 것이 민호는 아무리 혼혈이라고는 해도 그 몸속의 흐르는 피의 일부는 벌칸의 것이었다. 자고로 벌칸인은 타인에게 쉽게 감정을 내비치는 경우가 거의 없는 종족이나 마찬가지다. 그런 거에 비하면 민호는 유난히 다른 사람에게 감정일 잘 내비치는 편이었지만, 그것이 ‘연애 감정’이라면 또 이야기는 아주 달라지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벌칸인이 먼저 스킨십을 하려고 하는 것은 정말 상대가 사랑스러워서 견디기 힘들 때나, 폰 파 때가 아니면 구경조차 못할지도 모르는 판이니, 토마스의 속이 오죽하겠냐만은. 그리고 장담하건데, 벌칸도 벌칸이지만 그 중에 민호는 민호이기 때문에 더하면 더했지, 모자라지는 않을 것이다. 뉴트는 가볍게 혀를 찼다.

 

  “근데, 잠깐만. 나 쟤네 키스하는 거 봤는데.”

  “그건 주로 인간들의 스킨십이잖아.”

  “아아, 그걸 원하는 거구나?”

 

  뉴트가 웃으며 검지와 중지, 약지와 새끼손가락을 붙이며 벌칸식 특유의 인사법을 흉내 내자 트리사도 똑같이 그 손 모양을 만들어보였다.

 

  “Live Long and Prosper.”

  "장수와 번영을."

 

  그리고 서로 가볍게 손가락을 마주 대었다. 그러고는 조심스럽게 손을 떼어낸 후 서로 두 손가락만을 맞대며 옅게 미소지었다. 그걸 또 그새 본 토마스가 뉴트와 트리사를 가리키며 나도! 저거요! 하며 징징거리는 것이 아닌가. 그러더니 흉흉한 기세로 다가온 민호가 뉴트와 트리사의 손을 떨어트려 놓았고 뉴트는 그저 그런 민호의 행동에 싱긋 웃어보였다.

 

  “우리 일등 항해사님 쑥스럽구나?”

  “그런 건 가서 기관장님이랑 마음껏 하세요, 군의관.”

  “차갑게 시리.”

 

  이유를 알고 보니 뉴트는 토마스가 저렇게 난리를 부릴 법한 것도 나름 이해가 갔다. 방금 자신이 트리사와 한 행동은 벌칸들에게는 서로 키스를 하는 것과 똑같은 의미인 것이다. 예로부터 벌칸인은 반려자로 맞을 법한 사람이 아니면 절대로 손도 잡지 못하게 했다는 말도 있을 만큼 그들에게 있어 이것은 꽤 중요하고 의미가 큰 애정 표현이라는 말이었다. 딱 한번, 실제로 뉴트는 민호와 손가락을 맞대어 본적이 있다. 이건 죽어도 토마스한테도, 갤리에게도 비밀이었다.

  임무 중 실수로 베가 행성에 떨어져서 얼어 죽을 뻔한 적이 있었는데, 민호가 비슷한 방법으로 뉴트를 저승길에서 이승으로 다시 끌어올려줬다. 그만큼 신경세포를 건드리는 자극이 엄청났다. 솔직히 그거 아니었으면 아마 뉴트는 지금 쯤 이 세상 사람도 아니었을 테니까. 뭐, 이런 건 예외로 치자.

 

  “민호오….”

  “그런 눈으로 쳐다보지 마시죠, 함장님.”

  “진짜 단호박이시네!”

  “제가 원래 그런 사람인 거 하루 이틀 아셨습니까? 저런.”

  “한번만요, 응?”

  “이번 주말 돌아오는 월말 함장 평가에서 최우수 평가를 받으시면 한 번 고려해보겠습니다.”

  “와, 진짜 치사해. 나 이미 최우수 평가 못 받는 거 알면서 그래요?”

  “그러니까요.”

 

  조금 더 했다가는 토마스가 뒷목을 잡고 쓰러질 기세라 민호가 먼저 말을 그만두었다. 오늘 싸움의 승자도 역시 민호구나. 뉴트는 이미 텅 비어있던 팝콘 봉지를 구겨 쓰레기통으로 던져버렸다. 그렇게 두 사람의 싸움은 마무리 되어가는 듯 보였다.

 

 

  *

 

 

  “나 진짜 좋아하는 거 맞아요?”

  “내가 그런 거 물어보면 어떻게 한다고 했더라.”

  “……생명유지장치 1분짜리 우주복 입혀서 글레이드호 바깥으로 던져버린다고 했어요.”

  “참 잘했어요, 토마스 생도.”

  “…함장입니다.”

  “예, 함장님.”

 

  와, 정말 이 사람한테는 못 이기겠다. 토마스는 괜히 입으로 바람을 불어 자기 앞머리를 건드려보았다. 토마스가 그러거나 말거나 그의 침대에서 일지를 쓰고 있던 민호는 옆에서 계속 바람만 후후, 불어대는 토마스를 보며 결국 펜을 내려놓았다.

 

  “넌 내가 그렇게 좋냐?”

  “당연하죠! 뭘 그런 걸 묻고 그래요.”

  “내가 이렇게 맨날 험하게 구는데도?”

  “그게 당신 매력이니까.”

  “닭살 돋았어요, 함장님.”

  “…거 너무하시네.”

 

  진심으로 상처받았다, 라는 표정을 짓는 토마스를 보며 결국 참지 못하고 웃어 보인 민호는 쓰고 있던 안경을 벗어 스탠드 옆에 올려놓고는 자신의 옆 자리를 툭툭 두드리자 얼른 토마스가 민호의 옆 자리로 파고들었다. 말은 꼭 그렇게 해도, 토마스도 다 알고 있었다. 민호가 얼마나 자신을 생각해주는지, 또 얼마나 아껴주는지. 그걸 알기에 항상 어린애처럼 조르다가도 과하지 않게 멈추는 것이다. 어쩌다 이 사람을 좋아하게 됐느냐, 라고 묻는다면 토마스는 그런 건 하루에 다 말 못한다며 손사레를 칠 것이다. 나란히 마주보며 앉자 민호가 허공을 가리키며 말했다.

 

  “손.”

  “……. 진짜요?”

  “그래, 손.”

 

  어쩐지 꼭 강아지 취급을 받은 것 같지만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토마스는 지금 당장에라도 쩌렁쩌렁 방송을 하고 싶은 심정이었으니까 말이다. 오, 세상에. 드디어. 벅찬 가슴이 주체를 못하고 요란하게 쿵쾅거렸다. 조심스럽게 손을 든 토마스의 손을 보며 민호는 가볍게 토마스의 이마에 키스하고는 천천히 토마스의 손가락 위로 자신의 손가락을 맞춰갔다. 마침내 모든 손가락이 다 맞닿았을 때 민호가 살며시 웃으며 말했다.

 

  “…T'hy'la.”

 

  토마스는 지금 당장 죽으라면 죽을 수도 있을 것 같은 행복에 취해 있었다. 도저히 공부해도 익숙해지지 않는 벌칸들의 말 중에 유일하게 토마스가 알아들을 수 있는 말. 항상 자신이 먼저 민호에게 해주고 싶은 말을, 오늘은 먼저 들었으니까 말이다. 어떤 말을 들어도 좋은 그의 목소리와 함께 맞닿아진 손가락으로 전해지는 그 달콤한 감정에 토마스는 절로 미소 지었다. 토마스는 단순히 그들만의 키스를 하고 싶었던 것은 아니다. 토마스는 민호가 느끼는 자신에 대한 감정을 직접 느끼고 듣고 싶었던 것이다. 벌칸이란 본디 자신의 감정을 말해주는 종족이 아니라 느끼게 해주는 종족이기에.

 

  “진짜, 진짜 좋아해요. 민호.”

 

  살며시 손가락을 틀어 아예 그의 손을 깍지를 낀 토마스가 조심스럽게 민호의 이마에 자신의 이마를 맞대었다. 그에 대한 감정이 충분하다 못해 넘쳐흐를 지경으로 토마스는 가슴이 무척 빠르게 뛰는 것을 느꼈다. 그런 토마스를 가만히 바라보던 민호가 속삭여주었다.

 

  “나도 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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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스타트렉 AU




  1.

  “자네는 내일부터 우주함선 'The Glade'의 함장이라네, 토마스군. 아니, 캡틴 토마스. 앞으로도 스타플릿의 미래를 밝혀주는 별이 되어주게나.”

 

  토마스는 자신의 귀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올해로 토마스는 고작 스물 넷 밖에 안 된 새파랗게 어린 청년이었다. 그런 애송이가 함선에 올라탈 수 있는 크루의 자격을 얻을 수 있는 것으로도 과분할 지경인데 함선의 함장이라니. 토마스는 제독의 방을 나와서 제 볼을 아주 세게 꼬집어보았다. 새된 비명이 흘러나올 정도로 아팠다. 이건 꿈이 아니었다. 토마스는 지금 만세 삼창이라도 할 수 있을 정도로 부푼 가슴을 주체할 수 없었다.

 

  “토마스!”

  “트리사!”

 

  저 멀리서 뛰어오는 소꿉친구를 단번에 안아든 토마스는 어쩔 줄 몰라 하며 웃었다. 트리사의 긴 갈색 머리카락이 토마스의 뺨을 간지럽혔다. 그녀는 아주 환한 미소로 가볍게 토마스의 콧등에 입을 맞췄다. 아주 경사스러운 일이 있을 때만 해주는 것으로, 토마스는 그것이 그녀가 해줄 수 있는 최고의 찬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축하해, 캡틴 토마스.”

  “벌써부터 그렇게 부르지 마. 이상하게 긴장 돼.”

  “그럼, 당연히 긴장해야지.”

 

  트리사의 말에 토마스는 그저 웃을 뿐이었다. 지금은 마냥 기쁜 마음이 넘쳐흐를 뿐이었다.

 

  “그건 그렇고 해주고 싶은 말이 있어. 큼큼, 잘 부탁합니다, 캡틴 토마스. 내일부터 우주함선 ‘The Glade’의 통신 장교를 맡게 되었습니다.”

  “…진짜?”

  “그럼!”

  “세상에! 정말 축하해!!”

 

  이번엔 토마스가 먼저 트리사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어렸을 때부터 20년이 넘게 소꿉친구로 자란 그들에게는 거리낌 없는 애정 표현이었다. 이젠 거의 서로가 남매라고 생각될 정도로 생각하고 있을 정도니 말 다했다. 토마스는 아무래도 오늘 자신의 운세는 최고조일 것이라고 장담했다. 최연소 함장. 생각만 해도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렇다, 토마스는 스타플릿의 최연소 함장이 된 것이다. 자신만의 함선을 가졌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둘도 없는 소꿉친구와 같이 그 배에 오른다. 이것이 기쁘지 아니하면, 대체 어떤 일이 기쁘단 말인가.

 

  “정말 괜찮을까…?”


  하지만 기뻐하던 것도 잠시, 트리사는 금세 짐짓 심각한 얼굴을 하며 토마스를 멈춰 세웠다. 토마스는 그런 트리사의 행동에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다는 뜻으로 어깨를 으쓱였다.

 

  “글레이드호 말이야. …유명하잖아.”

  “…하긴.”

 

  우주함선 ‘The Glade.’ 통칭 글레이드호. 스타플릿의 가장 작은 함선으로 손꼽히는 탐사용 함선 중 하나였다. 사실 처음 들었을 때는 토마스는 다른 의미로 제 귀를 의심해야만 했다. 글레이드호라고 하면 3년 전 우주에서 있었던 대형사고 이후로 멈춰버린 역사의 한 조각이라고 불렸다. 그리고 모든 크루들이 제일 배정받기 싫어하는 0순위 함선이었다.

  그럼에도, 토마스는 그 모든 사실보다 그냥 함장이 되었다는 사실이 무척이나 기뻤다. 그리고 덧붙이자면 토마스에겐 글레이드호에 들어가고 싶어 하는 이유도 있었다. 물론 그것은 크루로서 탑승하고 싶었던 것이 사실이지만, 함장이라고 나쁠 것은 하나도 없었다. 3년 전 사고 이후, 글레이드호에는 함장이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운항을 하지 못한 것이다. 그러나 이제 글레이드호에는 토마스라는 함장이 생겼다. 이는 곧 글레이드호가 다시 우주를 항해할 시간이 왔다는 것이다.

 

  “잘해보자, 트리사.”

  “그래.”

 

  토마스는 자신이 있었다. 이래봬도 스타플릿의 수석이란 수석은 모두 꿰차고 있는 자신이 아닌가. 물론 성적이 좋다고 다 모범적인 함장이 되는 건 아니었지만, 어쨌든. 그리고 무엇보다 든든한 지원군인 트리사가 있었다. 글레이드호의 크루들도 하루 빨리 항해를 하고 싶어 할 것이다. 오랫동안 비워져있던 그들의 함장 자리를 얼른 채워주고 싶었다.

  오늘은 일찍 자자. 그리고 내일을 준비하는 거야. 토마스는 서둘러 기숙사로 돌아갔다.




  2.

  “항해는 무슨 얼어 죽을 항해.”

 

  우주함선 ‘The Glade’의 함장으로 임명받은 지 어언 스물다섯 시간. 토마스는 지금 기관실에 한 발자국도 디뎌보지 못했다.

 

  일어나자마자 한 짓이라고는 제복을 갖춰 입고 당당한 발걸음으로 함선으로 향했다. 그리고 입성했다. 자신이 책임지고 운항을 맡을 함선의 내부에. 나름 토마스는 첫 날 함선의 내부를 상상해보았다. 첫 날이니까 다들 그래도 예복을 갖추어 입고 새로운 함장을 맞이해줄 줄 알았다. 그런데 이게 웬걸. 함선에 발을 딛자마자 쏟아지는 시선들이란 가히 웬 이방인이 들어왔네, 정도였다. 그들 중 몇몇 성격 좋아 보이는 크루들이 다가와 먼저 인사해주지 않았더라면 토마스는 첫날부터 바보 함장이라는 수식어를 달았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글레이드호의 일등 조종사이자, 가장 온화해 보이는 청년의 이름은 벤이었다. 벤은 토마스와 트리사에게 차근차근 글레이드호의 내부를 안내해주었다. 다른 크루들과 다르게 벤은 토마스에게 할 수 있을 만큼 최대한 함장에게 걸맞은 대우를 해주었다. 상관에 대한 예우를 다하는 벤을 보며 토마스는 벤에게 먼저 말을 놓으라고 했고, 벤은 괜찮겠냐며 한 번 묻고는 토마스가 사석에서는 그래도 괜찮다며 다시 허락하자 언제 그랬냐는 듯 토마스를 몇 년 지기 친구처럼 대해주었다. 토마스는 그런 벤을 보며 속으로 눈물을 삼켰다.

 

  그리고 지금, 가장 중요하다고도 할 수 있는 기관실에 도착하자마자 토마스가 받은 것이라고는 문전박대였다.

 

  “갤리, 이래봬도 우리 함선의 함장이야.”

  “지랄. 우리 함장은 3년 전에 죽었거든.”

 

  작게 한숨을 쉬며 곤란한 얼굴을 하며 웃어 보이는 벤을 보며 토마스는 짐짓 심각한 얼굴을 해보였다.

 

  3년 전, 글레이드호에 있었던 대형 사고는 스타플릿의 역사에 한 획을 긋는 사건으로도 유명했다. 그 전까지만 해도 글레이드호는 가장 규모가 작은 함선일지는 몰라도 스타플릿의 최고 함선이라 불리는 다섯 함선 중 하나였다. 그 정도로 명성이 자자했다. 함선이 작은 만큼 워낙 적은 크루들만이 승선할 수 있었기에, 오히려 그들은 그 어떤 함선의 크루들보다 돈독했다고 알려져 있었다.

  토마스는 글레이드호의, 그들의 함장이 어떤 사람인지 잘 알고 있었다. 이름은 알비. 토마스가 가장 존경하는 교관 중 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알비는 3년 전 최악의 우주사고 후 목숨을 잃었다. 자신이 아끼고 아끼는 크루들을 살리고 말이다.

  글레이드호에 함장으로 임명 받았을 때, 토마스는 정말 뛸 듯이 기뻤다. 세상에서 가장 존경하던 교관이 운항한 함선. 자신의 크루들을 모두 살리고 순직한 글레이드호의 영웅. 토마스는 그를 닮고 싶음과 동시에 그를 이기고 싶었다.

  분명 각오하고 있던 일 중 하나였다. 글레이드호의 많은 이들이 아마도 알비를 잊지 못하고 있을 것이라는 것쯤은 예상하고 있었던 사실이다. 하지만 막상 이렇 게 그 사실을 직면하니 토마스는 자신감이 조금 떨어진 것 같았다. 그런 토마스의 심정을 눈치 챈 듯 트리사가 토마스를 조심스레 달래주었다. 토마스는 조금 용기를 내어 기관실의 문을 두드렸다.

 

  “아직 글레이드호의 많은 크루들이 전 함장을 잊지 못한 사실은 잘 알고 있습니다. 내 존재로 인해 불편을 끼쳤다면 죄송합니다. 하지만, 이것만은 분명히 말해야겠습니다. 이 시간 이후로 이 글레이드호의 함장은 바로 저, 토마스입니다. 갤리라고 하셨죠. 기관장님, 함장 명령입니다. 문 여세요, 라고 말하고 싶지만.”

  “…토마스.”

  “인정받고 싶습니다. 제독이나 다른 함장들의 인정도 중요하지만, 나는 그 무엇보다 이 글레이드호의 크루들인 당신들에게 인정받고 싶습니다. 당신이 전 함장을 잊지 못하는 것, 당연합니다. 나도 잊지 못하니까요. 이 세상에서 제일 존경했던 교관님을 말입니다.”

 

  여전히 묵묵부답으로 굳게 닫힌 문 앞에서 토마스는 말없이 웃었다. 그들이 느꼈던 아픔, 절망감, 슬픔. 그 모든 것들을 토마스도 조금은 느낄 수 있었다. 첫 번째 관문이다. 알비의 가르침 중 하나였다. 진정한 함장이 되기 위해 필요한 관문은 총 세 가지. 그 중 제일 중요하고, 제일 먼저해야하는 것은 크루들의 믿음을 사는 것이다.

 

  “함장이 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총 세 가지죠. 믿음, 용기, 그리고 지식. 알비 교관님은 제게 그 셋 중 제일 중요한 것은 믿음이라 가르쳐주셨습니다. 그러니 제가 당신의 믿음을 얻을 수 있는 기회라도 주십시오.”

 

  토마스는 가만히 문에 얹고 있던 손을 거두었다. 안에서 무엇을 하는 지 알 겨를이 없으니 정체 모를 기계 엔진 소리만 들리는 것 같았고, 토마스는 조금 실망한 얼굴을 하곤 트리사를 바라보았다. 트리사는 그런 토마스에게 넌 최선을 다했다며 위로해주었다.

 

  “우리 못생긴 기관장님은 그렇게 다루는 게 아니야.”

 

  뒤에서 들린 목소리에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본 토마스의 품으로 열쇠 꾸러미가 던져졌다.

 

  “뉴트.”

  “가끔 보면 벤 너도 좀 심술궂은 면이 있어. 우리 새내기 함장님한테 그런 장난치면 못 써요. 너도 열쇠 가지고 있잖아?”

 

  뉴트라 불린 청년의 말에 토마스는 완전 얼이 빠진 얼굴로 벤을 올려다보았다. 그런 토마스의 시선에 벤은 좀 무안한 모양이었는지 시선을 피하다 트리사와 정면으로 마주치자 어색하게 웃으며 사과를 전했다.

 

  “미안. 그냥 네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 싶어서. 네 말대로 우리들은 아직 알비를 잊지 못했으니까.”

 

  뉴트는 벤의 말이 끝나자마자 토마스의 어깨에 팔을 올리며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장난기가 가득한 앳된 얼굴에 토마스는 함장의 체통 따위는 이미 저 멀린 던져버린 지 오래였다. 뉴트는 그런 토마스를 보며 싱긋, 웃어보였다. 이 세상에서 웃는 얼굴이라고는 트리사가 제일 예쁜 줄 알았던 토마스는 새롭게 배운 사실을 머릿속에 새겼다.

 

  “난 우리 함장님 마음에 드는데. 이름이 뭐라고?”

  “토마스. 토마스에요.”

  “뭘 그렇게 딱딱하게 구시나. 내 이름은 뉴트야. 토마스라, 그럼 토미라 불러도 되겠네?”

 

  토마스는 살며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연한 금빛 머리카락에 새하얀 피부는 어느 여자아이의 것보다 좋아보였다. 똑 부러진 인상에 새하얀 가운이 굉장히 잘 어울렸다. 가운 앞주머니 위 달린 명찰에 적힌 이름은 Newt. 뉴트였다. 토마스는 그 이름을 알고 있었다. 3년 전 글레이드호의 1등 조종사였던 크루의 이름이었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지금은 의료 쪽으로 방향을 돌려 아예 장교 자리를 꿰차고 있을 정도의 실력가라고 들었는데. 그런 것 치고는 상당히 어려보이는 외모에 토마스는 무심코 뉴트를 빤히 쳐다보고 말았다. 토마스의 시선에 뉴트가 자기 얼굴에 뭐가 묻었냐고 물어보지 않았다면 토마스는 한참이나 더 뉴트의 얼굴을 바라봤을 것이다.

 

  “못난이 기관장, 빨리 문 열어. 안 그러면 내가 열고 들어간다!”

  “…누가 못난이 기관장이야!”

  “오우, 안녕. 오랜만이야, 갤리.”

  “난 안녕하지 못하다. 썩 꺼져.”

 

  뉴트의 말 한마디에 굳게 닫혔던 문이 벌컥 열리는 것을 보고 토마스는 입이 떡 벌어진 채로 뉴트를 바라봤다. 뉴트는 토마스에게 저 녀석은 이렇게 다루는 것이라며 윙크를 하고는 토마스의 품에 있던 열쇠를 가리켰다.

 

  “기관장. 이래봬도 함장이라고.”

  “…….”

  “스타플릿 최고 수석 기관장님.”

  “알아!”

 

  갤리는 싱글벙글 웃고 있는 뉴트를 한 번 쏘아본 후, 토마스를 힘껏 노려보았다. 그 시선이 어찌나 따가운지 토마스는 무심코 목이 뻣뻣하게 굳는 것 같았다.

 

  “잘 들어, 애송이 함장. 만에 하나 글레이드호에 흠집이라도 났다가는 넌 그 날로 제삿날인줄 알아.”

  “에이, 항해하다보면 그럴 수도 있지!”

  “넌 좀 닥쳐봐!”

 

  토마스는 지금 왜 자신이 이 둘의 싸움에 끼어들어 있는 처지가 된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나자 본격적으로 갤리가 뉴트를 물어뜯을 기세로 덤벼들었고, 뉴트는 그걸 아주 우아하게 피해 다녔다.

 

  “저 둘이 원래 저래. 꼭 초등학교에 온 것 같지?”

  “아…. 그, 그래.”

 

  그런 둘을 보며 인자하게 웃는 벤을 보며 토마스는 얼핏 벤에게서 그리운 엄마의 모습을 겹쳐볼 수 있었다.

 

  “자, 그럼 제일 중요한 녀석을 만나러 가볼까? 토미.”

 

  뉴트의 말에 토마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3.

  “민호는?”

 

  아까와는 다르게 뉴트와 같이 함교로 돌아오자 짐짓 분위기가 달라져 있는 것을 토마스는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꼭 그 시선이 ‘어떻게 저런 놈이 그 갤리를 설득할 수 있었던 거지?’ 라는 시선이었다. 토마스는 조금 어색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아마도 방에 있을 거야.”

 

  뉴트의 질문에 이어진 벤의 대답에 뉴트의 얼굴이 한 순간 서글퍼졌다. 아까까지만 해도 그렇게 화사하게 웃던 아이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가히 무서우리만큼 울상이 되어버린 얼굴에 토마스는 자신의 마음이 다 아픈 것 같은 그런 느낌이었다. 토마스는 짧게 탄식했다. 뉴트의 얼굴이 그렇게 슬퍼질 법한 일인 것이 당연했다. 토마스는 비워져 있는 일등 항해사의 자리로 시선을 옮겼다. 그 자리의 주인이자 앞으로 자신의 옆에서 자신을 보좌해줄 민호는 일찍이 이 글레이드호의 일등 항해사로 한 때는 토마스의 직속상관이었던 사람이기도 했다.

 

  스타플릿에는 다양한 종족이 교관과 생도로 생활하고 있었다. 토마스는 순수한 인간이었으며, 알비도 그러했다. 하지만 민호는 그렇지 않았다. 민호는 스타플릿에서 가장 희귀한 종족 중 하나인 벌칸인이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하프의 하프인 벌칸. 4분의 1만이 벌칸의 피가 흐르는 벌칸계 지구인이었다. 원래 대체적으로 벌칸들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이성적이고 원리원칙에 어긋나는 일은 하려고 하지도 않으며, 다른 종족과의 교류도 워낙 적은 탓에 혼혈이 태어나는 것이 희귀한 종족 중 하나인데 그런 종족의 피가 4분의 1밖에 섞이지 않은, 한 마디로 말하자면 벌칸의 손자인 그가 얼마나 생도들의 구설수에 오르락내리락 했는지는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본디 사회적 동물이라는 것이 자신과 같은 것은 품으려 하고, 자신과 다른 것은 배척하려 하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다른 종족의 피가 섞인 민호가 다른 생도들과 어울려 다니지 못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거기다 아무리 지구인에 가깝다 해도 벌칸인은 벌칸인인지라, 민호는 그 어떤 사람보다 월등히 강하고 똑똑했다. 그렇기까지 하니, 다들 민호와 어울려 다니려 하질 않았던 것이다.

  뻔하디 뻔한 이야기였지만, 그들 중 유일하게 민호와의 친분을 자랑하는 사람이 바로 알비였다. 우스갯소리로 알비가 항상 하고 다니던 말이 있었는데, 모든 벌칸인이 민호 같았으면 이미 벌칸은 멸망하고 없었을 것이라는 농담을 하고 다니기도 했다.

  알비가 글레이드호에 함장이 되었을 때, 무척 당연하다는 듯 민호는 일등 항해사가 되었다. 다시는 볼 수 없는 최고의 조합이라고 불리는 만큼 그들에 대한 스타플릿의 기대치는 월등히 높았고, 그들은 보란 듯이 글레이드호를 스타플릿의 최고 탐사선을 만들어내기 까지 했다.


  그게 3년 전, 그 사고가 일어나기 전까지의 일이었다. 그 당시 사건 보고서에는 이렇게 적혀져 있었다.

 

  - 우주력 2384년. 4월.

  글레이드호는 탐사 도중 무장을 준비하고 있던 로뮬루스인들의 함선에 의해 파괴당했으며 사상자는 총 7명. 당시 일등 항해사였던 민호의 기록에 따르면 함장의 모습을 본 마지막 사람은 본인이며, 함장은 크루들을 살리기 위해 자신을 희생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에 스타플릿에서는 자신을 희생하고 총 43명의 크루를 살린 글레이드호 함장 알비에게 명예 순직 훈장을 수여한다.

  

  민호는 알비의 가장 믿음직한 일등 항해사인 동시에 가장 친한 친우였으며, 그의 마지막을 지켜본 유일한 사람이었다.

 

  글레이드호가 그 이후로 탐사를 멈추고 정거장에서 잠들어 있던 큰 이유 중 하나는 물론 그들을 이끌 함장이 없다는 이유도 있었으나, 일등 항해사였던 민호가 항해를 포기했다는 이야기가 떠돌았기 때문이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민호는 알비의 죽음을 자신의 책임이라 생각하고 자신의 방에 틀어박힌 지가 벌써 3년이라는 것이다.

 

  “그의 방은 어디에 있어?”

  “미리 말해두겠는데. 그 녀석 고집은 정말 황소고집이야. 갤리보다 더 하다고.”

  “뭐. 그 정도는 나도 알아. 그리고 정 그러면 그 땐 네가 도와주면 되잖아. 아까처럼.”

 

  뉴트는 토마스의 대답이 조금 마음에 든 듯 울상인 얼굴은 집어치우고 다시 싱긋 웃으며 토마스를 민호의 방으로 안내했다. 벌써부터 크루를 부려먹을 생각을 하다니, 글러먹었네, 라는 뉴트의 말을 토마스는 내 크루들이니까, 라는 말로 일축했다. 그 말에 뉴트는 돌연 그 자리에 멈춰 섰다.

 

  “민호를, 데리고 나와 줘. 부탁이야.”

  “…물론이지.”

 

  차마 뉴트에게는 다 말하지 못했지만 토마스에게는 반드시 민호가 제 옆에 있어야만 하는 이유가 있었다.

  민호의 방 앞에 도착했을 때, 뉴트는 거의 비명을 지를 기세로 민호의 방문을 쳐다보았다. 뉴트의 시선을 따라 토마스의 시선이 도착한 그곳에는 민호가 있었다. 단정하게 예복을 갖춰 입고 가볍게 뒷짐을 지고 자신을 바라보는 민호의 모습에 토마스는 조금 어깨가 움츠러드는 기분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뉴트가 바람 소리가 날 정도로 달려가서는 민호에게 달려들었다.

 

  “민호!!”

  “뛰다 넘어지면 네가 그렇게 자랑하는 코 깨진다, 멍청아.”

 

  뒤늦게 다가온 토마스를 보며 민호는 가벼운 목례로 인사를 대신했다. 예전 그 위풍당당했던 민호의 모습과 전혀 달라진 게 없어 보이는 모습에 토마스는 그가 진정으로 꿈꿔오던 완벽한 함선의 모습이 하나씩 갖춰지고 있다는 사실에 벅찬 감동을 느꼈다. 어디 도망이라도 갈까 민호의 옆에 꼭 붙어 있던 뉴트를 조심스럽게 떼어낸 민호는 진지한 얼굴로 토마스를 바라보며 말했다.

 

  “함장이 된 것을 축하드립니다. 토마스.”

  “고맙습니다. 앞으로 잘 부탁합니다, 민호.”

  “…아니요.”

 

  민호의 말에 뉴트도 놀란 듯 그게 무슨 소리냐며 민호의 팔을 붙잡았다. 민호는 굳이 뉴트의 팔을 떼어내려 하지 않았다. 그저 시선은 가만히 토마스를 마주한 채로 여전히 그 단정해 보이는 강단 있는 얼굴로 말을 이었다.

 

  “오늘부로 글레이드호에서 떠나겠습니다.”


 

 

  4.

  “짐은 미리 제 기숙사로 보내두었으니, 바로 글레이드호에서 하선하겠습니다.”

  “민호!”

 

  청천벽력 같은 민호의 말에 토마스는 영혼이 날아가는 것 같은 경험을 하고 있었다. 이건 말도 안 돼. 장난일거야. 장난이라고 말해줘. 영혼 없이 웃어 재끼는 토마스를 보며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트리사가 얼른 토마스의 어깨를 흔들어 토마스를 현실 세계로 끌어 올렸다.

 

  “허락 못합니다.”

  “…….”

  “함장 명령이에요. 난 글레이드호의 일등 항해사는 당신 아니면 인정 안 할 겁니다.”

  “…미쳤습니까?”

  “안 미쳤습니다. 스타플릿에는 제가 연락해서 당신의 짐 모두 다시 귀환조치 시킬 테니 이 함선에서 한 발자국도 나갈 생각하지 마세요, 민호.”

  “잘한다, 토미!”

 

  금세 민호의 옆에서 토마스의 옆으로 옮겨 붙은 뉴트는 꽤 섭섭한 얼굴이 섞인 조금 차가워 보이는 표정으로 민호를 쏘아보았다. 그런 뉴트의 행동에 당황한 듯 하면서도 여전히 꿋꿋하게 토마스를 노려보던 민호가 작은 한숨을 쉬었다.

 

  “내가 그렇게 가르쳤습니까?”

  “뭐가요.”

  “이게 보자보자 하니까…. 토마스 생도. 내가 함장이란 존재는 본디 크루들에게 명령을 내리면 다 되는 줄 아는 허접한 존재로 가르쳤냐고 묻는 겁니다.”

  “아니요. 당신은 절대 그렇게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민호 교관. 그렇지만 크루는 함장의 명령에는 따라야 한다는 스타플릿의 법이 있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아는 건 민호 교관일 텐데요. 그리고 저 이제 생도 아닙니다. 함장이라고요. 그리고 점점 예전 버릇 나오시네요. 그냥 말 편히 하시죠? 전 당신이 예전에 저한테 했던 말 똑똑히 기억하는데. 방송으로 해드릴까요?”

  “…까불면 죽는다 했다.”

  “이래야 당신이지.”

 

  민호의 굳은 얼굴에 점점 금이 가는 것이 눈에 훤했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상황으로 분위기가 흘러가자 뉴트는 가만히 트리사의 옆에 서서 으르렁 거리는 토마스와 민호를 바라보았다. 꼭 저와 갤리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아 기분이 새로웠다. 항상 저와 갤리를 바라보던 벤의 기분이 이러한가, 새롭게 배울 수 있었다.

 

  “빌어먹을 애새끼….”

  “거, 말버릇 험한 거 아직 못 고치셨나 봅니다.”

 

  결국 먼저 시선을 돌린 것은 민호였다. 묘하게 승리감에 도취된 토마스는 팔짱을 끼고는 민호를 바라보았다. 좀만 더 있었으면 팝콘이라도 구워왔을 법 했던 뉴트는 말도 안 된다는 말만 중얼거렸다. 보다 못한 트리사가 먼저 토마스에게 물었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인지 설명해 줄 사람? 둘이 아는 사이야?”

 

  트리사의 말에 동시에 트리사를 쳐다본 토마스와 민호의 표정은 분명하게 극과 극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내 생도였으니까.”

  “내 교관이었으니까.”

  “그럼 네가 예전부터 말한 그 교관이….”

  “맞아. 민호야.”

 

  와, 트리사는 감탄을 금치 못했다. 곧 자신은 낄 자리가 아닌 것 같다며 뉴트와 같이 함교로 돌아가 버리고 말았다. 뉴트는 왜 자기까지 끌고 가냐며 아우성이었지만 이 일은 토마스에게 맡기면 될 것이라는 한 마디에 얌전히 트리사를 따라 나섰다.

 

  “내가 당신의 가르침 중 이거 하나만은 똑똑히 배웠다고 말하죠. 절대로 포기하지 않을 겁니다.”

  “……왜?”

  “약속했잖아요! 5년 안에 함장이 되면 내 항해사가 되어주기로.”

  “내가 항해사를 못하겠다면.”

  “내가 아는 당신은 이렇게 약한 인간이 아니니까 그런 말 함부로 하는 사람 아니란 거 알아요.”

  “못해.”

  “…….”

  “못한다고.”

  “싫어요!”

  “억지 부리지 마!”

  “싫다니까!!”

 

  도저히 안 되겠다 싶은 모양인지 한 대만 갈겨줘야겠다고 생각한 민호가 팔을 움직이자 재빨리 그 팔을 잡아챈 토마스가 민호를 벽으로 밀어 붙였다. 팔을 들어 올리려는 자와 그 팔을 올리지 못하게 내려 누르려는 자의 쓸모없는 소모전이 한참 지속될 동안 토마스와 민호는 서로를 묵묵히 노려다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 먼저 입을 연 것은 토마스였다.

 

  “내 항해사는 당신이 아니면 안 된단 말이에요. 이렇게까지 말해도 모르겠어요?”

  “…….”

  “왜 그 사람은 되고 나는 안 되는 건데요?”

  “토마스.”

  “왜 알비는 되고 나는 안 되는 건데요!”

  “톰!”

  “…….”

 

  흥분했던 모양인지 거친 숨을 몰아쉬던 토마스는 단단히 붙잡고 있던 민호의 팔을 놔주고는 민호에게서 한 발자국 물러섰다. 미안해요, 실수했어요. 고개를 숙이고 손으로 이마를 짚은 토마스의 목소리는 한 없이 서글프게 들렸다.

 

  “…그런 말을 하려던 건 아니었는데.”

  “…내 말 잘 들어.”

  “…….”

  “난 두 번 다시 내 함장이 죽는 꼴을 보고 싶지 않아. 처음에는 그게 알비였고. 너는 더더욱 싫어. 알아들어?”

  “민호….”

  “너 나 좋아한다고 했지.”

 

  토마스는 민호의 말에 심장이 멎은 것 같았다.  그래, 그랬다. 그랬기에, 토마스는 무슨 일이 있어도 민호를 자신의 일등 항해사로써, 자신의 옆에 두고 싶었던 것이다. 처음 만난 순간부터 토마스는 민호에 대한 자신의 마음을 확신했다. 그리고 정말 끈질기게 민호에게 자신의 온 마음을 쏟아 부었다. 그러던 중 민호가 알비와 함께 우주로 떠난다고 했을 때는 삼일 내내 밥도 못 먹고 하루 종일 기숙사에 틀어박혀 살았다. 그 때 민호가 토마스에게 해준 약속이 아니었더라면 토마스는 스타플릿을 관뒀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 정도로 그 때, 스무 살 토마스에게는 중요하고 심각한 문제였다. 그 날 이후, 이 약속 하나만 계속 새기면서 5년을 버텼다. 그리고 지금에서야 그 꿈에 거의 다다랐는데, 그런데….

 

  “…그걸 아는 사람이 그래요?”

  “그러니까 그러지.”

 

  토마스는 민호에게 도리어 묻고 싶었다. 자신이 그걸 이해해 줄 만큼 정신적으로 성숙한 사람일 것이냐고, 진정으로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냐고. 토마스 스스로의 대답은 NO. 절대 아니었다.

 

  “그러니까 옆에 있어주면 안 돼요?”

  “…너.”

  “그렇게 되지 않도록 당신이 옆에 있어주면 안 되는 거냐고요. 그럼 이렇게 생각해봐요. 당신이 내 곁에 없는 데 내가 어디 가서 우주의 먼지라도 되어버리면! 그걸로 당신은 괜찮은 거냐고요.”

  “대체 그런 비논리적인 말이 어디 있어!”

  “여기 있어요. 여기! 몰라요, 당신은 나한테 이해를 구하려고 하는 건지 몰라도 난 전혀 이해 못하니까 그런 줄 알아요. 나는 욕심도 많고, 당신 같은 어른도 아니고, 또…. 무엇보다 내가 그냥 당신을 엄청 좋아하니까!!”

  “…….”

  “안 죽을 거예요. 죽어도 안 죽을 거고 당신이 죽으라고 해도… 는 조금 생각해보겠지만 아무튼 아니, 안 죽어. 안 죽는다고. 그러니까 한 번만 나한테 져주면 안 돼요…?”

 

  처음과 달리 조금은 삐딱한 자세로 팔짱을 끼고 토마스의 말을 듣고 있던 민호는 토마스의 밑도 끝도 없는 장황한 말에 질렸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너 내가 도대체 몇 번이나 져주고 있다고 생각하냐?”

  “…네?”

  “…단 한 번도, 져본 적 없는 주제에.”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다는 멍청한 얼굴을 하고 있는 토마스의 팔을 툭, 쳐낸 민호는 그대로 함교로 발걸음을 돌렸다.

 

  “…민호?”

  “뭐하십니까? 다들 함교에서 기다립니다.”

  “…….”

  “토마스 함장님.”

 

  언제 그랬냐는 듯, 토마스의 얼굴이 어린 아이처럼 환해졌다.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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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데스큐어 스포 有

* 끝까지 읽지 않으신 분들은 읽지 않으시는 걸 추천해드립니다.







  비가 오면 항상 불안했다. 항상 너에게 이 세상에서 가장 무겁고 커다란 짐을 지게 만드는 것을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정말 말 그대로 생각만 하고 있었을 뿐, 너는 그렇게 내 곁에서 계속 살아남아 줄 것이라고, 절대로 나를 버리고 어디론가 가버리진 않을 거라고 그렇게 믿어왔다. 하지만 그건 내가 그렇게 되길 바라고 있었을 뿐, 하등 너에게 도움조차 되지 않는 나만의 생각이었다.

  그 날도 비가 왔기 때문에 비 오는 날엔 네가 미로로 가는 것이 영 탐탁지 않았다. 미로로 들어가는 너를 가로막고 가지 말라고 빌고 싶었지만, 그래선 안 된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항상 내 하루의 시작은 너를 보내야 한다, 아니 보내면 안 된다, 는 두 가지 논제를 두고 끊임없는 논쟁을 하는 걸로 시작한다. 당연히 보내고 싶지 않지만, 네가 없으면 이곳에서 탈출할 수 없을 것 같은 끝없는 불안함이 발목을 잡는다. 그래, 너를 따라 뛸 수도 없는 병신 같은 발목을 잡아 무얼 하겠냐고 스스로 비웃어도 봤지만 소용없었다. 이런 내가 너의 발목을 잡을까봐 무서웠다. 그래서 하루 빨리 너와의 거리를 두어야 된다고 생각했지만 나는 스스로를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내겐 너 뿐이었다. 나는 너 없이는 하루도 살 수 없는 가죽만 남은 허약한 짐승이었다.

  너는 그런 나를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내가 그러지 말라고, 나를 이해하려 들지 말라고 소리쳐도 너는 아무 말 없이 내 손을 잡았다. 하루는 그 손을 있는 힘껏 뿌리치고 욕을 한 적도 있다. 새빨갛게 부은 손등을 보니 내 심장은 그대로 부서져 버린 것은 아닌가 싶을 정도로 가슴이 아팠다. 그러나 너는 그러한 나의 행동에도 너의 뜻을 굽히려 들지 않았다. 내 하루의 시작이 끝없는 논쟁 속에서 몰래 네 이름을 부르며 울부짖는 것으로 시작한다면, 네 하루는 그런 나를 그 질척하고 더러운 웅덩이 속에서 꺼내주는 것으로 시작했다. 내가 괜히 가죽만 남은 짐승이 아니다. 나는 그런 너를 보며 스스로를 위로했다.

  너는 무슨 수를 써서든지 그곳에서 나를 꺼내준다고 했다. 너의 그 말은 곧 현실이 되었다 너는, 나를 그 웅덩이에서 꺼내주었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 나는 구원 받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나는 큰 오산 하나를 발견했다. 나는 언제나 내가 너를 놓아주어야, 내가 너에게 매달리기에 너를 바깥으로 날려 보내주어야 네가 저 광활한 하늘을 자유로이 날아다닐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왔다. 그렇기 때문에 항상 너에게 향하는 발걸음을 한 발 물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제야 비로소 깨달았다. 네가, 나를 잡아주고 있었다는 것을. 네가 나를 놔주어야 내가 죽을 수 있다는 사실을.


  너에게 보내는 내 마지막 인사는 어땠지? 꼴사납지는 않았을까? 나는 내 얼굴을 자세히 볼 수가 없었다. 내가 웃고 있는지 울고 있는지조차 나는 알 수가 없었다. 마지막으로 하나만 약속해줬으면 좋겠다. 절대로, 나 따라오지 마라. 꼭 너 닮은 딸 하나랑 아들 하나 낳고……, 는 무슨. 보고 싶어 죽겠다. 하나 뿐인 내 사랑. 내겐 너 뿐이었다.

  마지막으로 보는 얼굴이 네 얼굴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그건 그 애에게 실례가 되는 말일 것이다. 너도 고마웠다, 토미. 마지막으로 내 부탁 들어줘서 고마워. 네가 있으니까 난 안심하고 간다.


  잘 있어,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아. 아끼고 아껴도 모자랄 내 사람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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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즌 3 후반 시점입니다.

* 데릭 x 스타일즈. 이미 두 사람은 연인 관계라는 설정 기반.

* 노기츠네에 대한 막장 설정. 왜냐하면 내가 너무 보고 싶으니까.



 



  스타일즈는 가끔, 자신도 늑대인간이었으면 하는 바람이 없지 않아 있었다. 솔직히, 그 때 피터가 했던 말은 사실이었다. 스타일즈는 내심 자신도 늑대인간이 되었으면 하고 바라고 있었으나, 결과적으로는 그런 선택을 하지 않았다. 지금이라도 당장 스캇에게 달려가 “스캇, 날 늑대인간으로 만들어줘!” 하고 부탁이라도 하면 스타일즈는 언제라도 늑대인간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스타일즈는 하지 않았다. 분명 늑대인간이 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으나 동시에 늑대인간이 되고 싶지 않은 마음도 그와 마찬가지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스타일즈는 지금 자신이 늑대인간이었으면 하고 절실히 바랐다.

 

  “…하하, 망했다.”

 

  자포자기라도 한 듯 긴 한숨이 이어지고 스타일즈는 결국 힘없이 고개를 떨어뜨렸다. 아무도 찾지 못할 것 같은 지하실에 덩그러니 놓여있는 스타일즈는 한참동안이나 자신의 처지를 딱하게 여겼다. 스타일즈는 지금 연약한 인질이 되어 있는 처지였다. 상대는 무리 없이 혼자 움직이는 늑대인간으로, 뭘 어떻게 착각을 한 건지는 몰라도 스타일즈를 늑대인간은 아니어도 그와 비슷한 다른 어떠한 존재 정도로 단단히 착각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아니, 물론 얼마 전까지는 그랬다. 지긋지긋한 노기츠네를 쫓아내기 전까지만 해도 스타일즈는 인간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것은 잠시였을 뿐, 그를 완벽하게 봉인한 지금 스타일즈는 한낱 인간에 불과한 것이다.

 

  언제라도 이런 상황은 예상하고 있었다. 사실, 스캇에게 적이 생기고 그들에게 제일 노리기 쉬운 먹잇감이라고 한다면 그에게 있어 가장 가까운 존재인 스캇의 부모님과 자신을 포함한 그의 학교 친구들 정도였다. 그들은 한 없이 힘없고 나약한 인간이지, 빌어먹을 만큼 강한 늑대인간이 아니라는 것이다. 발톱으로 한번만 긁혀도 피부고 나발이고 다 찢겨나가 죽을 수 있는 그런 나약한 존재. 스타일즈는 이곳에서 무사히 빠져나간다면 스캇에게 자신도 늑대인간으로 만들어 달라고 빌어야겠다, 라는 바보 같은 생각을 했다.

 

  스타일즈를 이곳으로 끌고 온 자의 목적은 확실하지 않아보였다. 얼마 전 비컨 힐 마을에서 있었던 알파들의 피 튀기는 싸움의 소식만을 듣고 찾아온 모양인지 그는 계속 알파, 알파 하며 중얼거렸다. 인간도 충분히 사회적 존재이긴 했지만 딱히 목숨을 걸 정도의 무리 생활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라 스타일즈는 그들의 습성을 완벽하게 이해하지는 못했어도 최근 스캇과 함께 행동한 것 자체가 그의 무리에 자신이 포함되어있는 것이라고 생각하자 그리 어렵게 느껴지는 것도 아니었다.

 

  벌써 이틀째 친구들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 아버지가 그리웠다. 그렇게 감자튀김 먹지 말라고 아우성임에도 불구하고 감자튀김을 꼭 드셔야겠다고 고집을 부리시는 그 모습이 너무 그리웠다. 빠져나가려는 시도를 안 해본 것은 아니었지만 결과적으로 스타일즈는 이곳에 갇혀있었다. 한 번은 거의 탈출에 성공했다가 다시 끌려가면서 정말로 목숨을 위협 당했기에 꼼짝없이 갇혀 있어야 했다. 스캇, 리디아, 아이작…. 익숙하고 그리운 얼굴이 지나고서야 마지막으로 그의 얼굴이 떠올랐다.

  데릭 헤일.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지만, 스타일즈는 지금 그가 너무 보고 싶었다. 이곳에서 나갈 수만 있다면 먼저 그의 손을 붙잡고 얼마든지 좋아한다는 고백이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설명하자면 길고 먼 이야기지만 어쨌든 스타일즈가 거의 제정신이 아니었을 때 한 번 실수를 커다랗게 한 것을 계기로 암암리의 스타일즈는 데릭의 소유라는 낙인을 찍게 되었다는 것이 이야기의 전말이다. 스타일즈는 그 때 이후로 인생의 참된 교훈을 한 가지 얻었는데, 그것은 절대로 술 마시고 깝치면 안 된다는 것이었다.

  지금 쯤 그가 자신을 얼마나 찾고 있을까, 하는 참으로 한심하고 바보 같은 생각도 몇 번 해봤다. 하지만 그런 생각은 아주 잠시 뿐, 스타일즈는 금세 생각을 접었다. 절대로 자신 때문에 다른 이가 다쳐서는 안 된다. 만약 이번일로 자신 때문에 소중한 친구들 중 누구 하나라도 다치거나 죽기라도 하면 스타일즈는 평생 죄책감에 파묻혀 살 것이 분명했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쯤, 불길한 소리를 내며 지하실의 문이 열렸다. 혹시나, 하는 희망을 가졌지만 역시나 자신을 이리로 잡아온 늑대인간의 얼굴을 보자 스타일즈는 속상하면서도 불안했다. 그는 한 손으로 스타일즈의 몸을 일으켰고 엉망진창으로 끌고 갔다. 정말 빌어먹게 짜증나는 일이었지만 스타일즈의 반항은 어린애 장난에 불과해보였다.

  어딘가의 폐공장인 모양인지 이리저리 널린 목재와 철근사이로 스타일즈의 몸이 던져졌다. 그 충격에 스타일즈는 헛기침을 했고 정신을 가누기가 힘들어졌다.

 

  “…읏, 이봐요! 이렇게 험하게 다루지 말라고요! 난 인간이니까!!”

 

  성큼성큼 다가오는 그의 모습에 스타일즈는 바짝 굳으며 미안하다, 잘못했다 소리를 질렀지만 그는 얼른 스타일즈의 멱살을 잡아 올리며 벽으로 밀어붙였다. 2차로 온 충격에 스타일즈는 등짝이 남아나지 않을 것 같았다.

 

  “여우의 간을 먹은 늑대는 불로불사의 힘을 손에 얻을 수 있다는 전설이 있지.”

  “여우…?”

  “그래. 그 중에서도 천 년 묵은 구미호의 간.”

  “이봐요, 내가 입이 닳도록 말했잖아요. 늑대인간이라면서 귀가 막혔어요? 난 여우가 아니라고 했잖아요. 난 그 빌어먹을 키츠네가 아니라고!”

 

  더 세게 목을 죄어오는 손길에 스타일즈는 당장에라도 숨이 막혀오는 것 같았다. 그의 손을 주먹으로 치고 밀어 봐도 꼼짝을 하지 않았기에 스타일지는 이대로 죽는 것은 아닌가 싶어 두려워졌다. 다시 한 번 바닥으로 내팽개쳐진 스타일즈는 자신의 위로 올라타는 그의 모습에 온 몸에 소름이 돋았다. 잔뜩 더러워진 티의 끝부분을 찢어버린 그는 가만히 스타일즈의 가슴 아래에 손을 얹었다. 금방이라도 날카로운 손톱이 솟아나와 그의 피부를 뚫고 간을 취할 거라 생각을 하니 머리가 새하얗게 질려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었다.

 

  “그, 그만… 부탁이니까 그만해요! 난 아니야! 아니라고!!”

 

  피부에 닿는 뾰족한 손톱이 느껴지자 스타일즈는 숨을 멈췄다. 눈앞에 스파크가 튀는 것 같이 정신이 멀어지고 의식이 완전히 수면 아래로 잠긴다고 생각한 순간, 어딘가에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 문이, 문이 아닐 때는 뭐지, 스타일즈?

 

  조금씩 피가 새어나오는 피부에 그가 크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그 때, 아까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의 악력으로 자신의 손목을 붙잡는 스타일즈의 모습에 당황한 듯 그의 동공이 눈이 금빛으로 물들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바르작거리며 떨기만 했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눈을 휘며 웃음 짓는 스타일즈의 모습에 그는 소름이 돋았다.

  그와 더불어 뼈가 부러지는 소리와 함께 고통으로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손목을 쥐고 나뒹구는 그의 모습에 스타일즈가 나긋나긋하게 일어서며 미소 지었다.

 

  “저런, 많이 아프겠다. 그래도 괜찮지? 늑대인간이잖아.”

 

  한 번에 위치가 뒤 바뀐 그와 자신을 보며 스타일즈는 아무 말 없이 그를 바라보았다. 거친 숨을 몰아쉬며 떨리는 동공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그의 모습에 절로 웃음이 지어졌다. 혀를 차며 손가락을 두어 번 저은 스타일즈는 그대로 그의 목을 손톱으로 찢어버렸다. 울컥, 하며 쏟아진 피가 그의 티셔츠를 적시고 바닥으로 흘러나오자 스타일즈는 그제야 만족한 얼굴을 지어보였다.

 

  “…스타일즈!”

  “사랑하는 나의 스캇. 너무 늦은 거 아냐?”

 

  때 마침 도착한 스캇과 그의 친구들을 바라보며 스타일즈는 몇 번이고 표정을 바꿨다. 그런 스타일즈의 모습에 그들은 아무 말 없이 스타일즈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들의 눈에 들어온 것은 도저히 스타일즈가 했을 것이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찢겨진 시체 한 구 뿐이었다. 스타일즈는 피가 묻은 손이 거추장스럽다는 듯 몇 번 털고는 천천히 스캇에게로 다가왔다. 그러자 아이작이 그런 스캇의 앞을 막아서며 경고의 표시로 으르렁 거리며 이빨을 내보였다.

 

  “어떻게 스타일즈의 몸에 들어간 거지? 넌 분명히….”

  “봉인됐지. 그 빌어먹을 나무통에. 안심해. 스타일즈의 안에 남아있는 건 이 녀석 안에 있을 때 죽인 녀석들의 사념과 내 사념이 뒤엉켜 남아있을 뿐. 오히려 내가 감사를 받아야 하는 입장 아닌가? 나 아니었으면 이 녀석은 진작 죽었어.”

 

  너덜너덜해진 티셔츠의 끝자락을 말아 올리며 보여준 스타일즈의 몸에는 선명한 손톱자국이 남아 있었다. 다행히 깊이 들어간 모양은 아닌지 벌써 피는 말라 붙어있었다.

 

  “무슨 속셈이야?”

  “헤이, 뭘 그렇게 딱딱하게 굴어?”

  “닥치고 빨리 그 녀석 안에서 꺼져.”

 

  사납게 노려보는 데릭의 모습에 스타일즈, 정확히는 노기츠네의 사념이 뭐가 그렇게 재밌는 지 어린아이처럼 웃었다. 금세 데릭의 곁으로 다가온 그가 손가락으로 데릭의 목선을 따라 그으며 그의 가슴에서 톡톡 두들겼다.

 

  “사실은 지금 너희들을 다 찢어발겨도 내 원한이 다 풀릴 것 같지 않지만, 뭐 상관없어. 언젠가 난 부활할 테니까.”

  “무슨….”

  “스타일즈는 이미 나와 의식의 깊은 면까지 공유하고 있는 사이지. 내가 왜 이 녀석을 골랐는지 알아? 스타일즈는 여기 있는 그 어떤 녀석보다 이게 좋거든.”

 

  그는 손가락으로 가볍게 관자놀이를 두드렸다.

 

  “내 말 믿어. 스타일즈의 정신세계는 너희들이 생각하고 있는 것만큼 간단하지 않아. 그러니 난 그게 무너지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거지.”

 

  순식간에 데릭이 그의 멱살을 잡아 올렸지만 그는 여전히 가소롭다는 듯 눈웃음을 지어보였다.

 

  “문이, 문이 아닐 때가 언제인 줄 알아?”

  “…살짝 열렸을 때.”

  “그래. 언젠가 스타일즈는 나를 다시 태어나게 해줄 거야. 완전히 새로운 노기츠네로. 그럼 그 때, 제일 먼저 네 녀석을 찢어버릴 거야, 스캇.”

  “그럴 일은 없을 테니 괜히 사서 고생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그래, 어디 스타일즈랑 잘 해봐. 늑대인간 형씨.”

 

  싱긋, 웃는 미소와 함께 스타일즈는 그대로 눈을 감았다. 다시 눈을 뜨자마자 기겁을 하며 비명을 지르는 스타일즈를 보며 데릭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고 있었다.

 

  “Oh, my god. 정신 나간 변태 늑대인간한테 벗어나자마자 또 멱살잡이 신세냐고요. 데릭, 내려줘요.”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 못하냐는 친구들의 말에 스타일즈는 가볍게 고개를 흔들었다. 그저, 너무 늦지 않게 도착한 그들이 자신을 구해줬을 거라 믿는 스타일즈에게 그들 중 아무도 노기츠네에 대한 언급은 하지 않았다. 찢어진 옷을 발견한 스타일즈가 울상을 지으며 그간 이틀간의 불만을 토로하자 그제야 다들 스타일즈가 원래의 그 스타일즈로 돌아온 것에 대해 안심했다. 집으로 돌아가기 전 확인해볼 것이 있다며 억지로 스타일즈를 끌고 간 데릭의 모습에도 아무도 토를 달지 않았다. 그저 스타일즈를 무사히 구해냈다는 것에 대한 안도와, 노기츠네가 마지막으로 남기고 간 말에 대한 의구심뿐이었다.

 

  “…음, 그러니까… 구해줘서 고마워요, 데릭. 근데 다른 애들한테는 고맙단 말도 못했잖아요. 대체 뭘 확인하고 싶….”

 

  스타일즈는 급하게 자신의 허리를 끌어안으며 어깨에 얼굴을 묻는 데릭의 행동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조심스럽게 두 팔로 그의 몸을 감싸 안은 스타일즈는 그제야 자신이 그 거지 같은 지하실에서 빠져나왔다는 것을 실감했다.

 

  “다행이야.”

  “…그러게요.”

  “그래서 그 녀석은 널 왜 잡아간 거야?”

  “몰라요, 그런 변태 늑대인간은.”

  “…그게 무슨 소리야?”

  “노기츠네 녀석한테서 벗어난 지 얼마나 됐는데 아직도 날 천년 먹은 여우라고 부르질 않나. 그런 여우의 간을 먹으면 불로불사의 힘을 얻는다나 뭐라나. 진짜 무서웠다고요. 진짜 아무래도 조만간 스캇한테 날 늑대인간으로 만들어 달라고 해야 할까봐….”

 

  급하게 입을 맞춰오는 데릭 때문에 말을 다 끝맺지 못한 스타일즈는 어쩔 수 없다는 듯 가만히 눈을 감았다. 스타일즈에게도 요 이틀간 무척이나 그리워했던 체온이다. 작은 생채기로 남아버린 손톱자국에 맞게 그가 손을 올리자 움찔한 스타일즈가 허리를 뒤로 빼버렸고, 그대로 뒤로 넘어가고 말았다. 딱딱한 바닥이 아닌 푹신한 시트위에 누웠는데도 멍이라도 든 모양인지 등이 쓰라리고 아팠다. 작은 신음소리에 데릭이 조금 걱정스러운 듯 스타일즈를 쳐다보았고, 스타일즈는 아무것도 아니라며 고개를 저었다.

 

  “그래서 뭘 확인하려는 건데요…?”

  “네가 자꾸 변태니 어쩌니 하니까 불안해서.”

  “…세상에, 데릭. 그게 그런 뜻이 아니라!”

  “나도 알아, 이 멍청아. 닥치고 옷이나 벗어.”

 

  결국 스타일즈가 못 말린다는 듯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그런 스타일즈의 웃는 얼굴을 보며 데릭은 가만히 스타일즈의 입에 입을 맞췄다. 그는 분명히 알고 있는 눈치였다. 그랬기에 마지막에 그런 도발을 하고 사라진 것이다. 데릭은 뻔뻔스럽게 웃던 낯짝을 떠올렸다. 데릭은 가만히 스타일즈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절대로, 그 누구에게도 두 번 다시는 안 뺏길테니까.”


  무슨 말이냐는 듯 고개를 갸웃하는 스타일즈의 모습에 데릭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다시 스타일즈에게 입을 맞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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