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을 계속 하실 생각이신가요?"


브랜트는 의사의 말에 담담하게 고개를 저어보였다. 의사는 그런 브랜트의 대답이 마음에 드는 듯 했다. 잘 생각하셨습니다. 그 몸으로 더 이상 요원일은 무리입니다. 


"원인이 있습니까?"

"흔히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라고 하지요. 브랜트 씨의 경우에는 그게 너무 많이 축적되어 온 것이고요. 총을 쏘기는 커녕 들지도 못하시죠?"

"예."

"정신과 치료는 받으신 적 있으십니까?"

"아니요."

"이번 기회에, 휴식을 취하시는 건 어떻습니까."


그럼 나을 수 있는 겁니까? 브랜트는 굳이 그렇게 묻지 않았다. 의사인 그는 자신의 소임에 따라 환자에게 가장 좋은 길을 추천해주고 있는 것이다. 브랜트는 그의 말에 따르기로 했다. 이상하게, 아무렇지 않았다. 오히려 싸늘한 시체로 이 곳에 도착하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브랜트는 목례를 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불현듯 무언가 생각이 난듯 브랜트는 그의 책상을 두드렸다.


"의사와 환자간의 프라이버시는 잘 지켜지는 거겠죠?"

"물론입니다."


이상하게 믿음이 가지는 않았다. 그건 순전히 그에 대한 불신이라기 보다는, 워낙 뛰어난 요원들을 친구로 두고 있는 스스로에 대한 불신이었다. 병원을 나와 다시 원래 있어야할 곳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이 이상하리만치 느리고 더뎠다. 꼭 마치 누군가가 자신의 다리에 매달려 제 갈길을 막아세우는 것처럼. 정신과 치료? 브랜트는 코웃음을 쳤다. 이제와서? 걸음을 멈춘 브랜트의 시선 끝, 평범한 대기업의 모습으로 위장을 하고 있는 IMF의 본부 건물이 우뚝 서 있었다. 이제와서. 브랜트는 발걸음을 돌렸다.





"선생님! 안녕하세요!"

"브랜트 선생님, 좋은 아침!"

"그래, 좋은 아침!"


따스한 햇빛, 커다란 나무 그늘 아래 매달려있는 그네에 앉아 책을 읽고 있던 브랜트의 시야로 옹기종기 모인 작은 아이들이 등교를 서둘렀다. 슬쩍 내려와있는 안경을 손가락으로 밀어 올리며 학교 건물 안으로 들어가는 형형색색의 귀여운 가방들을 보며 브랜트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 내가 결혼을 좀 일찍 했으면, 저만한 아이들이 있었을까? 어림도 없는 소리하고 있네. 브랜트는 학교로 향했다. 그의 발걸음은 가볍기 그지 없어보였다.






IMF를 그만 둔지 벌써 반 년이 지났다. 그렇게 돌연 IMF로 향하는 발걸음을 끊은 브랜트는 자신이 알고 있고,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총동원하여 자신의 자취를 싹 지워버렸다. 이래봬도 브랜트는 훌륭한 현장요원이었으며, 분석요원이었다. 벤지만큼은 아니더라도 충분히 컴퓨터를 다루는 데에는 부족함이 없었다. 비상시로 늘 챙기고 다니는 위조 신분증과 여권들은 이 세상에 '윌리엄 브랜트'라는 사람을 없애주기에는 충분했다.


"안녕하세요, 국장님."

- 브랜트, 자네 지금 뭐 하는 건가?

"국장님이 제 사직서 수리를 안 해주시잖아요. 제가 공들여서 메일로 보내 드렸는데."

- 그게 정말 말이 된다고 생각하는건가? 


트렁크에 한 가득 짐을 실으며 어깨와 뺨 사이에 핸드폰을 끼워 통화를 이어가고 있던 브랜트는 헌리의 엄한 목소리에 터진 웃음을 애써 참으려고 하지는 않았다. 


"저 이제 요원일 못한답니다."

- 브랜트. 자네의 일이 뭐지?

"분석하고 해독된 정보를 국장님께 제공해드리는 거요."

- 그래, 그럼 다시 한 번 말해보겠나?

"최근 임무 이후로, 몸이 예전 같지 않습니다. 신경을 다친건지, 단순히 스트레스 장애인지는 모르겠지만 오른쪽 눈의 시력이 현저히 떨어지고 한 손으로는 총도 들지 못해요. 주체를 할 수 없을 만큼 떨리거든요. 요원일, 그만 두랍니다. 의사가요. 정신과 치료를 추천받았으니 그렇게 하려고 합니다."

- 정신과?

"예. 이 모든 게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로 인해 생긴 것 같다는 게 그 분의 소견입니다. 그리고 덧붙여서 그러시더라고요. 이번 기회에 쉬라고요."

- 브랜트.

"헌리."


이제는 아예 국장이라는 호칭을 떼어버린 브랜트에 헌리는 그저 아무 말 없이 브랜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 말이, 저에게는 그렇게 들렸어요. 이제 모든 게 다 끝났다고."


브랜트는 웃었고, 헌리는 그런 브랜트에게 알았다는 말을 했을 뿐이었다. 통화가 끊긴 핸드폰을 내려다보며 브랜트는 [이 메세지는 5초 뒤 자동으로 폭파됩니다.] 라는 문구가 떠올랐다. 브랜트는 속으로 5초를 센 후 핸드폰을 벽으로 던져버렸다. 산산조각이 나며 박살이 나는 핸드폰을 보며 브랜트는 이게 이런 기분이구나, 하며 마저 짐을 챙겼다.





일사 파우스트를 만난 것은 순전히 우연이었다. 그녀는 누군가에게 쫓기거나, 생사를 다투는 긴박한 시간과는 거리가 먼 생활을 즐기고 있었다. 그녀와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낸 것은 이단과 벤지였기에 브랜트는 아주 찰나의 시간 뿐이었지만 일사 파우스트를 보고 느낀 소감을 한 문장으로 정리했다. <성별이 바뀐 이단 헌트>. 일사는 그 말에 불쾌하다는 기색도 없이 오히려 고맙다는 인사까지 해보였다. 그런 점까지 이상하게 닮았네요. 브랜트는 중얼거렸다. 브랜트는 자신의 다리에 매달리는 아이들을 놀이터로 돌려보낸 후 곤란하다는 얼굴로 일사를 바라보았다.


"체면이 안 서네."

"보기 좋아보이네요."


일사는 브랜트에게 가까이 다가와 브랜트의 얼굴을 살폈다. 흐릿해진 오른쪽 동공을 보며 안타깝다는 시선을 감추지 못한 채, 일사는 가볍게 브랜트의 어깨를 두드렸다. 브랜트는 어깨를 으쓱여볼 뿐이었다. 이제는 거의 시력을 다 잃어버렸기에, 일사의 안타까움도 절반밖에 보지 못했기에.


"왜 그런 건가요?"


브랜트는 일사의 질문에 글쎄요, 라며 말하고는 말 끝을 흐렸다. 브랜트와 일사에게 있어서 공통적으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주제는 그렇게 많지 않았다. 이제는 다 무너져버린 신디케이트, 솔로몬 레인, 특수 요원, 이단 헌트. 브랜트는 그녀의 질문 속의 주체가 이단이라는 것을 그리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그냥요."


가볍게 대답하는 브랜트를 보며 일사는 미소 지었다. 걱정마요, 그에게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을게요. 당신이 원하지 않는 일이니까. 브랜트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뒤로 브랜트는 일사와 자주 만나게 되었다. 그녀는 그 근처에 정착하며 살고 있다고 했고 브랜트는 그런 그녀를 반가워했다. 미국의 요원과 영국의 요원이 아닌, 초등학교 교사와 평범한 아가씨로 만나는 관계가 무척 편안하게만 느껴졌다. 곧 그녀가 브랜트가 가르치는 또래의 아이들과 비슷한 나이의 여자아이를 데리고 왔을 때 브랜트는 감탄까지 했다. 그녀는 일사를 무척이나 닮은 예쁜 아이였다.





"브랜트!!"


브랜트는 이 고통을 잘 알고 있었다. 총에 맞은 것이다. 어디에 맞은 것인지는 가늠할 수 없었다. 몸 구석구석 여기저기 아프지 않은 곳이 없었다. 무슨 일이 있었더라? 브랜트의 기억이 조각조각 나뉘어진 파이처럼 듬성듬성했다. 누군가에 의해 몸이 일으켜지고 어설프게 어깨에 매달려 부축해지는 꼴이 우스웠다. 두고 가라는 말도 나오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기억나는 것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브랜트의 손을 꼭 쥐고 있는 벤지와 어떤 말을 해야할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이단이었다. 브랜트는 희미하게 웃었다. 멀어지는 의식 속, 이상하게 퓨즈가 먼저 나가버리는 오른쪽 시야에 브랜트는 깨달았다. 이제, 못 쓰겠구나. 이단의 목숨을 구한 값으로 오른쪽 눈 하나면 꽤 많이 남는 장사였다.


그리고 그것은 여러차례 반복되었다. 멍청할 정도로. 그리고 마지막이 되어서야 브랜트는 깨달았다. 그제야 깨달았다. 비정상적인 감정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지만 브랜트는 알고 있었다. 사격 시험에서는 점점 점수가 내려가고 있었고, 그렇기에 더 무리를 한 결과 어깨는 망가져가기 시작했다. 이제 다리까지 절게되면 완벽했다. 브랜트는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이단의 시선을 애써 무시했다. 어차피 그에게는 숨길 수도 없다는 사실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브랜트는 스스로 체념했다. 형편없어진 사격실력을 보며 그가 비웃고 놀리기라도 하면 기분이 더 괜찮았을까. 브랜트의 눈에 비친 이단의 표정은 너무 어려워서, 브랜트는 순간 목놓아 소리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당신이 그런 표정 지어봤자 나한테는 아무런 도움도 안 되니까 그러지 마. 브랜트는 이단에게 자신의 총을 건냈다. 이단은 한동안 그 총을 바라보다 기어코 총을 받아들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정확하게 사격판의 정중앙을 맞추는 이단을 보며 브랜트는 소리 내어 웃었다. 그거면 됐어. 그리고 그 다음 날, 의사에게 휴식을 권고받았다. 브랜트는 그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게 이단과의 마지막이었다. 





수업을 하는 동안, 무음으로 해놓은 핸드폰에 누구인지 모르는 전화번호가 수십통이나 쌓여있는 것을 확인한 브랜트는 혀를 찼다. 벌써 들켰어? 하긴, 반 년이면 꽤 오랫동안 들키지 않은 것일지도 모르는 법이었다. 타이밍 좋게도 다시금 걸려오는 전화를 보며 브랜트는 한숨을 내쉬고는 전화를 받았다.


"안녕, 벤지."

- 안녕? 지금 안녕이라고 한 거야?!


마치 핸드폰을 뚫을 기세로 소리를 지르는 벤지의 목소리를 들으며 브랜트는 소리 내어 웃었다. 지금 웃음이 나와? 벤지의 물음에 브랜트는 나오는 걸 어떡하냐며 말했다. 위치 추적이 안 되잖아, 불평을 늘어놓는 벤지에게 브랜트는 기가차다는 듯 말했다.


"이봐, 벤자민 던. 난 이제 민간인이거든? 민간인 사찰하면 잡혀가는 거 몰라?"

- 언제 IMF가 그런 거 따졌어?


아, 하긴. 그러는 브랜트는 자신이야 말로 민간인이라고 하는 주제에 도청과 추적이 불가능한 프로그램이 깔려있는 핸드폰을 가지고 있으니, 퍽 웃길 노릇일거다. 


- 그래서 어딘데?

"왜?"


브랜트의 물음에 벤지는 진심으로 화가 난 듯 말했다.


- 너는 그게 나한테 할 소리야!

"벤지."

- 얼마나 걱정했는 줄 알아? 갑자기 헌리가 와서 브랜트 네가 더 이상 IMF요원이 아니라고, 죽은 사람으로 알고 있으라잖아. 네 집에 찾아갔는데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고, 네 목소리 듣는 게 반 년만이라는 걸 알면서 그러냐! 진짜 어디가서 죽은 건 아닌 지 내가 얼마나 걱정했는 줄 알아, 이 멍청아!!

"이제 나한테 욕도 해?"

- 그래, 할거다!


숨을 고르는 벤지의 목소리에 브랜트는 지금 벤지와의 이야기가 순전히 통화로 이루어져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아니었으면 이미 다 무너져버린 자신의 모습을 들켰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브랜트는 침착하게 숨을 삼켰다.


"이제 네가 전화해도 무시하지 않을테니까."

- 그건 당연하지!!

"나를 위해서, 나 안 찾으면 안될까?"


브랜트는 드물게 깊은 한숨을 내쉬며 얼굴을 쓸어내렸다.


- 브랜트.

"나 아무렇지 않아. 잘 살고 있어, 그러니까, 그러니까."

- 거짓말.

"......"

- 오른쪽 눈은 어때.


하, 브랜트는 고개를 떨구었다. 체면이라던가, 자존심이라던가, 그런 것 때문에 모두에게 비밀로 하고 나온 것이 아니다. 그냥 그들이 그런식으로 자신을 걱정하는 것이 싫었고, 무엇보다 자신의 탓을 하지 않기를 바랬다. 특히 그가, 이단 헌트가. 


"...고마워."


브랜트는 그대로 종료 버튼을 눌렀다. 전화는 다시 오지 않았다. 브랜트는 제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한참을 넘쳐흐른 감정의 파도속에 휩쓸려 허우적대고 있을 때, 브랜트는 자신의 앞으로 달려오는 수많은 발걸음 소리를 들었다.


"선생님."

"브랜트 선생님?"

"선생님 울어요?"


아니, 안 울어. 브랜트는 울지 않았다. 그는 아이들을 보며 웃었다. 

오른쪽 눈이 아팠다.





모든 아이들이 하교를 다 마친 시간, 브랜트는 저물어가는 태양을 보며 그네를 탔다. 흔들거리는 시야 속, 일렁이는 주홍빛이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그래도 아직은 색과 형태는 분간할 수 있을 정도였다. 의사의 말대로 브랜트에게는 휴식이 필요했다. 모든 것을 내려놓고 조용히 쉴 수 있는 시간이. 브랜트는 그 날, 짐을 다 챙겨 고향으로 내려왔다. 고향이라고 해봤자 마지막으로 발걸음을 한 지가 십 여년이 넘은 동네였다. 적당히 크고 살기 편한 집을 구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만큼 외진 동네였다. 


초등학교 교사일을 시작하게 된 것은, 어쩌면 하늘에서 준 기회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외진 동네라 학생도 몇 없는 학교였지만 그래도 아이들을 가르칠 선생님이 필요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마침 집주인에게 그런 이야기를 들은 브랜트는 학교를 찾아갔고, 아주 쉽게 초등학교 교사를 부임하게 되었다. 교사 자격이라던가, 학력등이 필요한 것이 아닐까 고민한 브랜트와는 다르게 교장 선생님은 별 다른 조건 없이 브랜트를 받아주었다. 나중에야 알게된 사실이었지만, 교장 선생님은 브랜트를 처음 본 순간 이 학교에 다니는 다른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자신이 거두어 돌봐주고 싶다는 생각을 했기에 브랜트를 채용했다는것을 알았다. 


아이들은 티없이 순수했고, 맑았다. 썩어 문드러진 어른들의 계락과 음모 속에 허덕이던 브랜트에게는 천국과 다름 없는 곳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곧 브랜트에게는 마치 특효약과 같았다. 색도 구분하지 못했던 시력이 어느 정도 돌아오고, 이제는 총을 쥐어도 팔이 떨리지는 않았다. 그 뒤로 총을 쏴본 적은 없어서 사격에는 자신이 없어졌지만 말이다. 

총 대신 분필을 들고, 온갖 암호와 정보가 담겨있는 서류 대신 재미있고, 교훈이 담겨있는 동화책을 들고 다니는 기분은 상상을 초월했다. 교묘한 화술을 이용해 상대를 설득하고 속이며, 조롱하는 대신 과장된 몸짓과 억양으로 아이들에게 토끼와 거북이의 달리기 시합을 들려주었다. 잡히면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이를 악물고 뛰어야했던 날들과 달리 아이들과 발걸음을 맞춰가며 공을 찬다. 적의 몽타주를 그리는 대신 꽃과 나비를 그리며 못생겼다는 아이들의 말을 들으며 히히덕거린다. 그 모든 삶이, 브랜트에게는 또 다른 삶이자 행복이었다.


그럼에도 브랜트의 핸드폰에는 이단과 벤지의 전화번호가 담겨 있었고, 지갑에는 언제인지 모를 임무가 끝나고 찍은 사진이 담겨 있었다. 몇 번이나 연락을 시도해보려고 노력한 적은 있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그러지 않았다. 염치가 없었고, 괜히 긁어부스럼을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긁어부스럼은 순전히 제 마음속에 가득 차 쌓이고 있음에도. 브랜트는 이단이 그 사실을 모르길 바랬고, 자신도 더 이상 그것을 신경쓰지 않기를 바랬다. 할 수만 있다면 영원히.


이제 슬슬 학교 문을 닫고 퇴근을 해야 하는 시간이 다가온 것을 느끼며 브랜트는 가방을 가지러가기 위해 교실로 들어갔다. 자신의 자리인 책상에 누군가가 서 있다는 사실을, 교실로 발을 들이기 전에 알았다면 브랜트는 절대로 교실로 발걸음을 들이지 않았을 것이다. 여유롭게 책상에 앉아 브랜트가 수업에 사용하는 책을 읽고 있던 이단과 눈이 마주친 건 한 순간 이었다. 브랜트는 입 안이 바싹 말랐다. 무슨 말을 해야할지 머릿속이 새하얗게 비어버렸다. 여긴 또 어떻게 알았어? 그러나 그런 물음은 하지 않았다. 그는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사람이었으니까. 그럼 왜 왔어? 브랜트는 입을 다물었다.


"오랜만이야, 브랜트."


브랜트는 이단의 말에 고개를 살짝 끄덕여보였다. 이단은 여전히 책을 읽고 있었다.


"아이들이 배우기에는 조금 어려운 거 아니야?"

"글쎄, 요즘 애들은 똑똑하더라."


이단은 책을 덮어보이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순간, 순간이 너무 느리게 흘러갔다. 전속력으로 도망쳐봤자, 금방 잡힐 것이라는 걸 안다. 브랜트의 몸은 더 이상 예전과 같지 않았다. 달리기는 보통의 사람들과 다름 없으며, 순발력은 현저하게 떨어졌다. 이단은 브랜트를 바라보며 물었다.


"이 책의 다섯번째 시를 기억해?"


브랜트는 이단의 시선을 따라 책을 바라보았다. 오늘은 아이들에게 짧은 시를 가르쳐 주었다. 브랜트는 기억을 더듬었다. 다섯번째, 시. 이단은 내려놓은 책을 다시 들어올리고는 시를 낭독했다.


"내려놓으면 된다. 구태여 네 마음을 괴롭히지 말거라."


심장이 먹먹해졌다. 마치 콱 막힌 것처럼. 이단은 다시금 넌지시 물었다.


"그럼 이 다음 시는?"


브랜트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손끝이 떨려왔다. 이단은 브랜트를 재촉하지 않았다. 


"그대여, 이제 그만 마음 아파하라."


시선이 마주쳤다는 것을 느꼈다. 이단은 책을 내려놓고는 천천히 브랜트의 앞으로 걸어왔다. 조심스러운 손길로 브랜트의 오른쪽 눈가를 매만지는 그의 손가락이 따뜻했다.


"많이 늦어서 미안해."


감긴 오른쪽 눈꺼풀 위로 내려앉은 숨결에 브랜트는 손의 떨림이 멈추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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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아주 가끔이지만 그 날의 꿈을 꾼다.
그 날의 꿈은, 그 날은 나의 숨을 막아버린다. 숨을 쉬는 행동 자체가 괴롭다는 것을 느끼며 무력해진 몸뚱이가 가라앉음을 느끼며 눈을 감는다. 괴롭다는 말도 나오지 않는다. 괴롭다는 건 사치나 다름이 없다. 그걸 내가 누릴 자격이나 있나. 

브랜트는 자조적인 미소를 지었다. 내가 이렇게까지 나약한 인간이었나. 자존감이 떨어진 것은 아니었다. 정확히는 자존심이 무너진 거겠지. 브랜트는 가만히 제 옆에 누워 잠을 청하고 있는 이단을 내려다보았다. 아까와는 다른 의미의 미소가 얼굴에 떠오른다. 그럼에도, 브랜트가 살아갈 수 있는 이유. 무너져 내린 성을 다시금 쌓을 수 있게 해주는 존재. 브랜트는 가만히 이단의 옆에 눕고는 숨을 들이켰다. 고요하게 울리는 숨소리가 브랜트의 귓가에 울렸다. 그의 숨소리를 듣기 위해서는 귀를 기울여야만 했다. 새근, 새근. 브랜트는 소리 내어 웃고 싶은 것을 겨우 참았다. 귓가를 간지럽히는, 심장을 간지럽히는 그 소리에 브랜트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저 멀리 다 무너져버린 성 앞에 서 있는 사람이 보였다. 브랜트는 그가 왜 여기에 있는지 알 수 없다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무너져내린 성과 브랜트의 얼굴을 번갈아 보았다. 그가 희미하게 미소짓는다. 브랜트는 그 미소의 의미를 잘 모르겠다는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왜?"

그는 대답이 없다. 브랜트는 이것이 자신의 꿈 속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이단은 말 없이 브랜트의 손에 권총 한 자루를 쥐어준다. 브랜트는 여전히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그와 권총을 번갈아보았다. 브랜트는 망설임 없이 권총을 제 관자놀이에 겨눴다. 그러자 이단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이단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아니지, 브랜트. 브랜트는 또 다시 왜, 라는 물음을 하지 않았다. 브랜트는 이단을 향해 총을 겨눴다. 이렇게 하라고? 그러자 이단이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브랜트는 그런 이단을 보며 따라 웃었다.

"잔인하다는 생각은 안 들어?"

이단은 고개를 저었다. 브랜트는 기가 찼다. 아무리 내 무의식이지만, 너무하는 걸. 이단은 천천히 브랜트의 앞으로 걸어왔다. 총구가 정확히 그의 심장을 향해 있었을 때, 아주 잠깐이지만 손이 떨렸다. 내가 정말 이대로 방아쇠를 당기면 어쩌려고 그래. 브랜트의 얼굴이 울상이 되었다. 그러나 이단의 얼굴에 망설임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쏴."
"싫어."
"쏴야만 해, 브랜트."

너도 알잖아, 그래야만 한다는 걸. 이단의 말에 브랜트는 심장이 철렁이는 것 같았다. 어디까지가 꿈이고, 어디까지가 현실이지. 브랜트는 꿈과 현실의 경계를 구분할 수 없을 지경에 이르렀다. 여전히 이단은 웃고 있었고, 브랜트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브랜트가 고개를 저었지만 이단은 더 이상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쏘라는 말도, 쏘면 안된다는 말도 하지 않았다. 브랜트는 그런 이단이 미웠다. 그는 자신이 해답을 알고 있음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네가 이 성을 무너트렸기 때문에?"
"그래."
"나는 너에게 복수를 해야하는 거고."
"그렇지."
"그리고 다시 성을 쌓아야만 하지."

브랜트는 천천히 심호흡을 하고는 권총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이단은 여전히 브랜트를 바라보고 있었다. 브랜트는 방아쇠를 당겼다.

"엿이나 먹으라지."

허공에 쏘아진 총알이 어디로 날아갔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파열음이 귓가에 울려퍼졌다. 한 없이, 더욱 한 없이. 브랜트는 이단에게 쥐고 있던 권총을 던져버렸다. 다시 안전장치를 했던가, 그런 것 따위는 신경쓰지 않았다. 얼떨결에 총을 받아든 이단은 살풋 미간을 찌푸리며 브랜트의 이름을 불렀으나 브랜트가 한 발 빨랐다. 순식간에 이단의 멱살을 잡아 끌어당겨 입을 맞춘다. 

"네가 이 성을 무너트렸지."
"그렇다니까."
"그럼 네가 다시 세워. 나보고 세우라고 하지 말고."

브랜트는 이단의 가슴팍을 손가락으로 쿡, 찌르며 웃었다. 

"힘들고 귀찮은 일은 왜 다 내 몫이야? 네가 직접해."
"네 성이잖아?"
"알게 뭐야. 내 거, 네 거해."

마치 브랜트의 그 말을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이, 이단은 이 세상에서 가장 화사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그래도 돼?"




삑, 삑. 빌어먹을 알람시계. 브랜트는 신경질을 부리며 눈을 떴다. 누구야, 토요일 아침에도 알람 켜둔 사람이. 쏟아지는 햇빛 때문에 눈이 부신 브랜트는 서둘러 한 팔로는 눈을 가리고, 반대쪽 팔을 길게 뻗어 알람시계를 찾았다. 허공에서 헤매는 브랜트의 팔을 붙잡은 것은 이단이었다. 이단은 피식, 웃으며 브랜트 대신 알람시계를 꺼주었다.

"일찍 일어났네."

브랜트의 물음에 이단은 그냥, 이라 말하며 브랜트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그러자 브랜트가 실없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징그러워."
"왜 일어나자마자 날 갈구는 거야?"

잠자리가 사나웠어? 브랜트는 제 옆으로 자리를 잡고 앉는 이단의 허리를 다리로 감아 꽉 붙잡았다. 딸려온 이불이 이상하게 감기고 나서야 이단은 브랜트가 여전히 잠에 취해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이단."
"왜?"
"난 절대로 널 쏘지 않을 거야."

이단은 브랜트의 말뜻을 잘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곧 무슨 말인지 알겠다는 듯 브랜트의 눈을 손으로 덮어주었다.

"네가 쏜다고 해도 내가 피할거니까 걱정 하지 마."

풋, 브랜트는 어처구니 없다는 듯 웃고는 팔을 휘둘렀다. 이거 떼, 앞이 안 보여. 늘어지는 브랜트의 목소리에 이단은 미소 지었다. 이제 기분이 좀 풀렸나보네. 이단은 브랜트의 허벅지를 가볍게 쳤다. 얼른 일어나. 헌리가 불렀어. 아, 왜 또. 이단의 허리를 기둥삼아 감은 다리에 바짝 힘을 주며 허리를 일으킨 브랜트는 잔뜩 표정을 구기며 한탄했다.

"오늘은 토요일이라고."
"그럼 쉴래?"
"허, 또 너희들이 무슨 짓을 저지를 줄 알고."

브랜트는 다리를 침대 밑으로 떨구며 고개를 흔들었다.

"커피."
"네, 네."

거실 한 켠으로 사라지는 이단의 등을 바라보며 브랜트는 침대 옆 서랍장 위에 놓여있던 총을 집어들었다. 하나의 총알이 비어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나서야 브랜트는 미소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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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나간...

이걸 스코치 스포라고 해야하나...? 그렇다고 하기에는 정말 완전히 내용을 싹 다 바꾸지만 거의 의식의 흐름이나 마찬가지라 스포 주의





뭘 쓴거냐

내가 아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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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단브랜벤지] If Yo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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굉장히 취향타는 분위기 + 클리셰

주로 벤지와 브랜트 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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