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그것은 단순히 사고였다. 사고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었다고, 바튼은 그렇게 말했다. 모두는 그것을 납득할 수 없었다. 특히 스티브 로저스는 그 말을 도저히 납득할 수 없었다.


"온 세상이 조용하네요."


바튼의 첫 감상이었다. 굳게 담긴 두 눈 사이로, 온통 암흑에 잠긴 그의 세상은 조용하기 그지 없었다. 아무런 장애물이 없는 텅 빈 복도를 혼자 걷다 발을 헛딛어 넘어졌을 때도, 잃어버린 방향 감각을 되찾으려다 어벤져스 타워 96층에서 떨어졌을 때도 그는 웃었다. 제정신이냐며 토니에게 한 소리 들었을 때도 바튼은 웃었다. 그리고 곧, 당연스러운 일이었지만 바튼은 쉴드를 그만 두게 되었다. 어벤져스 또한. 바튼은 나타샤의 도움을 받아 천천히 자신의 것을 정리해가기 시작했다. 바튼을 제외한 모두가 그가 타워에 남아있기를 바랬지만, 그는 그것을 거절했다. 이제 더 이상 어벤져스의 일원이 아니기 때문에 타워에 남아있을 수 없다는 이유였다. 


타워를 떠나기로 한 마지막 날, 스티브는 차마 바튼을 붙잡을 수 없었다. 붙잡고 싶었으나, 그래서는 안됐다. 바튼이 두 눈을 잃게 된 것은 순전히 자신 때문이었기에. 


"클린트."

"안녕, 윌."

"-안녕."


타워로 마중을 온 것은 바튼과 똑같이 생긴 남자였다. 매가 두 명이나 있네, 라며 순수하게 감탄하는 토니를 보며 활짝 웃은 바튼은 처음으로 그들에게 자신과 똑같이 생긴 남자를 소개해주었다.


"이제껏 여러분들에게 말 못해서 미안해요. 형도 그럴만한 사정이 있는 사람이거든요."

"브랜트라고 불러주시면 됩니다."


바튼은 보지 못했지만, 처음으로 그들과 만난 브랜트의 표정은 한 없이 슬퍼보였다.




2.

"싫어."

"그러기로 했어."

"윌."

"클린트."


넌 내 하나뿐인 동생이야. 내가 널 위해 그거 하나 조차 할 수 없을 거 같아? 바튼은 차마 그러지 말라고 애원하며 말했다. 그러나 브랜트는 완강했다. 브랜트는 정 안되면 널 기절시켜서라도 데려가겠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윌, 나는..."

"클린트. 내 눈은 두 개나 있잖아."


바튼은 제 눈에서 눈물이 흐르는지 조차 알 수 없었다. 진심으로 브랜트가 그러지 않기를 원했다. 애초에 바튼이 모든 것을 정리하고 타워를 스스로 나온 것도 그런 이유에서 였다. 처음에는 브랜트에게도 알리지 않은 채로 혼자 살 생각이었다. 유능한 요원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유능한 법이었다.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하여 점자 문자를 익혀둔 것도 그런 것 중 하나였고, 어둠 속에서 살아남는 방법들도 익히 알고 있었다. 그러나 나타샤는 그런 꼴을 볼 수 없다 하여 바튼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브랜트에게 바튼의 소식을 알린 것이다. 바튼은 이런 일로 브랜트를 만나고 싶지는 않았다. 그와 마지막으로 만난 것은, 브랜트에게 새로운 연인이 생겼을 때였고 그 일은 충분히 축하받을만한 행복한 일이었다. 바튼은 제 두 눈이 멀어버린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브랜트를 볼 자신이 없었다.


"수고했어, 내 자랑스러운 동생."


그의 목소리에 가득 녹아있는 슬픔과 자랑스러움을 느끼고, 바튼은 제 생각을 고쳐먹었다. 몹시도 그의 얼굴이 보고 싶었다. 그 때도, 지금도.


"그렇게 미안하면, 앞으로 내가 하는 말 다 들어주겠다고 약속해."

"뭔데?"

"앞으로 계속 우리들과 함께 살것."

"우리들?"


바튼의 물음에 픽, 웃는 브랜트의 목소리를 들으며 바튼은 한껏 비아냥거리는 어투로 대답했다.


"형, 제정신이야? 신혼집에 동생을 들여?"

"지랄하고 있네, 신혼은 무슨."

"그 사람 얼굴을 어떻게 보라는거야."


진심으로 질렸다는 얼굴을 하며 말하는 바튼을 보며 브랜트는 바튼 못지 않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제 좀 너 같다."


바튼은 소리내어 웃었다.




3.

수술은 성공적이었다. 그들이 일란성 쌍둥이었기에 보장되어 있던 성공이었다. 바튼은 몰랐지만 브랜트는 바튼이 두 눈을 잃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부터 그 모든것을 준비했다. 배너와 토니에게 부탁해 자신의 한 쪽 눈을 바튼에게 무사히 이식해 줄 수 있을 법한 모든 방법을 강구했다. 수술은 비밀리에 진행되었고, 바튼은 무사히 브랜트의 왼쪽 눈을 이식 받았다. 

한 쪽 눈만 남은 브랜트 또한 자연스럽게 IMF를 그만두게 되었다. 바튼은 더 이상 브랜트에게 미안하다 말하지 않았다. 그렇게 된 이후로 브랜트와 바튼은 변두리에 큰 2층집을 구했다. 마당이 농장만큼 넓은 집이었다. 바튼은 그 집을 굉장히 마음에 들어했다. 브랜트와 같이 사는 한, 2층은 오로지 제 것이었기에.


"헤이, 윌. 대체 왼쪽 눈을 어떻게 써먹었길래 시력이 이 모양이야?"

"너도 내 나이 되면 알 거 아냐."

"웃기지마, 너랑 나랑 나이 똑같거든."

"내가 17분은 먼저 태어났다."


닥쳐, 킬킬 거리는 바튼을 보며 브랜트도 똑같이 키득거렸다. 그러나 바튼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었기에 브랜트는 어깨를 으쓱였다.


"어쩌겠어, 난 오른쪽 시력이 더 좋은데." 

"그래서 나한테 왼쪽 눈 준 거지?"

"이런, 들켰잖아?"


눈을 이식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았기에, 거리를 가늠하기가 여전히 어려웠다. 일주일 사이 접시를 네 개나 깨먹어서 브랜트에게 혼이 났음에도 바튼은 꿋꿋하게 설거지를 했다. 가끔은 마당에서 활을 쏘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뿐이었다. 더 이상 과녁의 정중앙을 맞출 수 없다는 상실감에 바튼은 일찌감치 활을 놓았다.


"나 왔어."

"어서와."

"안녕, 이단."

"안녕, 클린트. 윌, 이거 맞지? 1/2칼로리 마요네즈."

"그래, 바로 그거야."


집으로 돌아온 이단을 보며 커피를 홀짝이던 바튼은 컵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금슬좋은 부부 사이를 위해, 건배. 자기가 말해놓고도 웃긴 모양인지 키득거리는 바튼의 뒤로 덩치가 제법 큰 골든 리트리버 한 마리가 쪼르르 따라붙었다.


"가자, 럭키."




4.

붙임성 좋고, 잘생겼고, 돈 많고... 아무튼, 하나뿐인 형의 애인 자리를 꿰차고 있는 남자의 이름은 이단 헌트였다. 그도 브랜트와 같은 IMF요원 중 한 명이었는데 쉴드에서는 암암리에 블랙리스트에 올라와 있던 이름인지라 바튼도 익히 들어 알고 있는 이름이었다. 그는 브랜트의 선택을 존중했다. 바튼은 그 점에서 그가 참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이제는 하나밖에 남지 않은 브랜트의 눈 위로 입을 맞추며 여전히 사랑스럽다는 표정을 한껏 띄고 있는 그를 보면 아주 조금은 브랜트가 부러워지기도 했다.


브랜트는 자신과 다르다. 자신이 모든 것을 떨쳐내고 도망나오다 싶이 그곳을 빠져나왔을 때, 브랜트는 그가 내민 손을 붙잡았다. 


"...붙잡을 걸, 그랬나."


바보같은 생각이라는 것을 잘 안다. 바튼이 이 세상에서 제일 중요시하고 있던 것은, 그 어떤 누구에게라도 짐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이미 브랜트에게 어마어마한 빚을 지게 되었으니 이제는 다 소용없는 말이겠지만.


"클린트, 저녁 먹어."

"알았어."


대답은 그리 하면서도 꼼짝없이 침대에 누워있는 바튼을 보며 브랜트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바튼의 곁으로 와 앉았다. 바튼은 팔을 뻗어 브랜트의 왼쪽 눈가를 매만졌다. 부피감이 없이 텅 비어버린 그 공간이 꼭 바튼의 속마음 같았다. 


"윌."

"왜."

"그 사람이 보고 싶어."

"......"

"보고 싶은데, 보면 안되잖아."


브랜트는 아무 말 없이 바튼을 안아주었다.




5.

브랜트는 높게 솟은 타워를 보며 탄식했다. 정말, 더럽게, 높네. 타워 안으로 들어선 순간부터 자신을 맞이해주는 자비스의 목소리를 들으며 브랜트는 타워의 최정상으로 올라갔다.


"어서와, 브랜트."

"안녕하세요, 스타크씨."

"토니라고 부르라니까."

"아, 네. 영 어색해서요. 입에 안 붙네요."

"그런 것까지 바튼을 닮았네."


한 순간, 슬픔이 지나치고 간 토니의 얼굴을 보며 브랜트는 안타깝다는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로저스씨는, 어디에 계십니까?"

"캡시클이라면 곧 올거야. 방금 미션이 끝났다는 보고를 들었거든."

"도청하셨습니까?"

"그냥, 좀."


요새 그 양반이, 좀, 이라며 말을 흐리는 토니를 보며 브랜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브랜트는 눈 앞의 남자가 얼마나 다정한 사람인지 다시금 깨달았다. 좋은 동료를 뒀구나, 클린트. 브랜트가 타워로 찾아온 것은 다름아닌 스티브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클린트를 위해서도, 그를 위해서도 이 일은 꼭 해야만 하는 일이었다.


"다녀왔네, 토니... 이런, 손님이 계셨군."

"안녕하세요, 로저스."

"반갑습니다, 브랜트."


브랜트는 어렵지 않게 스티브의 표정을 읽을 수 있었다. 바튼과 자신이 다른 사람이라고 한들, 아주 오랫동안 그들을 봐온 사람이 아닌 이상은 구분을 할 수 없을 정도로 똑같이 닮은 그 얼굴이 그를 괴롭게 하는 것이리라. 브랜트는 주저 없이 말했다.


"눈."

"......"

"클린트의 눈 말입니다."

"예, 말씀하십시오."

"당신 때문이라는게 사실입니까."


딱히 의문형이 아닌 브랜트의 어투에 스티브는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브랜트가 그런 말을 할 줄 몰랐다는 듯, 토니가 당황스럽다는 얼굴을 숨기지 않은채 두 사람을 번갈아보았다.


"그럼 당신에게 한 가지만 묻죠."

"뭐든지."

"그럼 내 눈은, 바튼 탓일까요?"

"아니, 그것은-"


그것 또한 제 탓입니다. 고개를 떨구는 스티브를 보며 브랜트는 한숨을 내쉬었다. 골치 아플 정도로, 고집불통인 사람들이야. 그 때만큼은, 이단의 막무가내 기질이 조금은 고맙게 느껴진 브랜트였다. 


"내가 선택한 건데, 왜 당신 탓입니까?"

"...브랜트."

"클린트도 똑같습니다. 그 녀석은, 다시 시간을 돌릴 수 있다고 한들 똑같은 선택을 하겠죠. 당신의 목숨을 구하고 자신의 눈을 기꺼이 내놓을 거라는 말입니다. 이봐요, 로저스. 나는 캡틴 아메리카랑 대화하고 싶은게 아니에요."


브랜트는 천천히 스티브에게 다가갔다. 스티브는 여전히 고개를 들지 못한 채로 가만히 있었다. 브랜트는 천천히 스티브의 팔에 매달려 있는 그의 상징이나 다름 없는 방패를 집어들었다.


"당신이 원하는 대로 하세요. 당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대로."


내 말, 무슨 뜻인지 알겠나요? 브랜트의 물음에 스티브는 고개를 끄덕였다. 주제 넘은 참견을 해서 미안하군요, 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브랜트는 돌아갔다. 스티브는 여전히 그 자리에 말뚝이 박힌 것처럼 서 있었다.




6.

당신 탓이 아니니까요. 두 눈을 잃어버린 날, 바튼이 스티브에게 해주었던 말이었다.




7.

스티브는 땀이 찬 두 손을 바지춤에 문질렀다. 막상 이곳까지 어떻게 오기는 했는데, 한 걸음 더 내딛는 것이 힘에 겨웠다. 그래도 되는걸까, 그럴 자격이나 있는 걸까. 

스티브는 바튼이 브랜트의 눈을 이식받던 날, 수술실 밖에서 자리를 지켰다. 그저 무사히 수술이 끝나길 바라며 여섯시간을 그 자리에 먹지도, 마시지도 않은 채로 우두커니 기다리고 있던 그는 수술이 무사히 끝났다는 말을 듣고는 회복실에 들어간 바튼의 얼굴을 보고는 돌아왔다. 


바튼이 두 눈을 잃었다는 말을 들었을 때, 스티브의 세상은 까맣게 물들었다. 스티브에게 바튼은 그런 사람이었다. 아무런 색안경을 끼지 않고, 제 신념대로 자신을 봐주는 사람. 스티브의 울타리 안에 몇 없는 아주 소중한 사람이었다. 스티브는 바튼의 눈을, 그의 시선을 참으로 좋아했다. 그의 눈은 맑고 깨끗했다. 멀리 있는 것을 기가 막히게 잘 보는 그는, 스티브에게 있어서는 경외의 대상이었다. 그 눈으로 자신을 봐주길 바란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스티브는 망설임 없이 그에게 고백도 했었다. 당황스러운 기색을 숨길 새도 없이,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는 그 두 눈이, 사랑스러웠다. 그래서 그가 온 세상을 잃어버렸을 때, 스티브의 세상 또한 무너져내렸다.


사실, 기회만 된다면 그를 다시 보고 싶었다. 죄책감은 여전히 스티브의 어깨를 짓눌렀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마냥 바튼이 그리웠고, 보고싶었다. 그 눈으로 자신을 한 번만 더 바라봐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스티브는 몸서리쳤다. 지나치게 이기적인 자신을, 바튼에게 보이고 싶지 않았다. 그런 스티브에게 브랜트와의 대화는 오아시스 같았다. 바튼과 똑같은 얼굴로, 그와 비슷한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며 해주었던 그 모든 말들이 전부. 그래서 용기를 내어 여기까지 온 것은 좋은데, 막상 그 다음은 브랜트가 해주었던 말로도 용기가 부족하다는 것을 느꼈다. 어쩌다 이런 겁쟁이가 되었지? 스티브는 스스로 자문하며 떨리는 손으로 문을 두드렸다.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누구신가요?"

"아, 저..."


스티브는 바튼도, 브랜트도 아닌 또 다른 남자가 자신을 맞이할 줄은 선택지에 두지도 않았던 터라 당황스러움을 숨기지 못했다. 그런 스티브를 보며 남자는 사람 좋은 얼굴로 웃어보이고는 스티브를 집 안으로 들였다.


"윌과 클린트는 장 보러 갔어요."

"이단 헌트씨?"

"네, 맞습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로저스."


가볍게 악수를 나눈 스티브는 이단을 따라 그들의 집으로 들어갔다. 낯선 사람임에도 반갑다는 듯 꼬리를 흔들며 다가오는 커다란 리트리버 한 마리를 보며 스티브는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다정하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포근해보이는 인테리어나 분위기가 스티브의 얼굴에 미소를 띄게 만들었다. 물 한컵을 건네는 이단에게 고맙다 말하며 탁자 위 놓여있는 바튼과 브랜트의 사진을 들어올린 스티브는 목을 축였다.


"초면에 실례되는 질문이지만 혹시 헌트씨는 브랜트의..."

"연인입니다."


이단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인 스티브는 나지막이 부럽군요, 라 말하며 컵을 내려놓았다. 집 안을 빙 둘러본 스티브는 다음에 다시 오겠다며 발걸음을 돌렸다. 


"윌이 그러더군요."

"무슨-"

"제가 윌에게 했던 말을, 당신에게도 들려주는 게 좋을 것 같다고."


현관에 우뚝 선 스티브를 보며 이단은 다시금 웃으며 말했다.


"이게 클린트에게도 먹힐지는 모르겠지만, 수술이 끝나고 윌이 의식을 되찾았을 때. 윌에게 그렇게 말했습니다. 남은 평생을 네 왼쪽 눈이 되어주겠다고."


그 땐 무슨 정신으로 그렇게 말했는지 모르겠는데 지금 다른 사람한테 말해주려니 쑥스럽군요. 멋쩍게 웃어보이는 이단을 보며 스티브 또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고맙습니다."


이단은 돌아서는 스티브를 보며 희미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8.

저 멀리 날아가는 원반을 가볍게 잡아오는 럭키를 보며 바튼은 연신 소리내어 웃었다. 이 녀석, 똑똑한데. 칭찬해달라며 꼬리를 흔드는 것을 모른척 할 수 없어 열심히 그의 머리를 쓰다듬다보면 아주 신이 난 모양인지 럭키는 그 큰 덩치로 달려들었다. 갑작스러운 공격에 뒤로 넘어진 바튼의 얼굴을 사정없이 핥아대는 커다란 강아지 한 마리와 옥신각신 레슬링을 하고 있다보면 어느새 셔츠에 온갖 풀과 잡초들이 엉켜붙어 있었다. 브랜트가 또 잔소리하겠는데. 어느새 가정의 엄마 역할을 하고 있는 브랜트를 떠올리며 바튼은 킥킥대며 웃었다. 


"빨래 하기 곤란하지 않은가?"


누워있는 자신을 내려다보며 웃고 있는 스티브를 보며 바튼은 여전히 웃는 얼굴로 말했다.


"이단이 빨래를 아주 잘해서 괜찮아요. 힘이 좋거든요."


바튼이 먼저 팔을 뻗자 스티브가 그 손을 잡아 당기며 바튼을 일으켜세웠다. 셔츠에 묻은 풀과 흙먼지를 털어내고는 스티브를 바라본 바튼은 갑자기 목이 막혀오는 것을 느꼈다.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지만, 이제 그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오랜만이군요, 만나서 반가워요. 왜 이렇게 살이 많이 빠졌어요? 입이 탔다.


스티브는 그런 바튼을 보며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기다리려는 것도, 재촉하려고 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는 그냥 그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다 천천히 팔을 들어올리고는 텅 비어있는 오른쪽 눈가를 매만졌다. 


"미안, 했네."

"......"

"나 때문에 자네가 이렇게 된 게."


바튼은 왜 브랜트가 자신에게 사과하는 것을 그렇게 못마땅해 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바튼은 스티브에게 사과를 받을 생각은 꿈에도 없었다. 타워에서 나온 것도 다 그 때문이었다. 바튼이 그 곳에 있으면 스티브는 영원히 바튼에게 죄책감을 가지고 살아갈 것만 같았다. 그랬기에, 그래서 나온 거였다. 스티브는 조심스럽게 바튼의 왼쪽 눈가에 입을 맞췄다. 감각이 없는 오른쪽과는 달리, 생경하게 느껴지는 촉감에 바튼은 아주 잠깐, 몸을 떨었다.


"그런데 그 무엇보다도, 그냥 자네가 너무 보고 싶었어."

"...스티브."

"자네가, 다시 그 눈으로 나를 봐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


나는 원래 욕심도 많고, 아주 이기적인 사람이지. 모두가 선량하고 정의롭다 말하는 캡틴 아메리카와는 다르게. 스티브의 말에 바튼은 자신의 뺨을 감싸고 있는 스티브의 손에 제 손을 겹쳤다.


"알고 있었습니다."


바튼의 말에 스티브가 고개를 끄덕였다.


"늦었지만 말이네, 클린트. 내가 자네의 눈이 되고 싶네. 나는 멀리 있는 것을 그리 잘 보지는 못하고, 시력도 자네만큼 좋지는 않고 턱없이 모자라지만..."


말 끝을 흐리는 스티브의 입술을 손가락으로 살짝 짓누른 바튼이 고개를 저어보이며 말했다.


"이 세상에서 제일 예쁜 눈이 생겼네요."


스티브는 말 없이 웃어보였다.




9.

"1/2 칼로리로 사오라고 했잖아요."

"미안하네, 그 제품이 다 떨어져서..."

"그럼 큰 거라도 사왔어야지!"

"윌, 그렇게 우리 살찌워서 뭐에 쓰려고?"


이제 그만하라는 듯 브랜트의 이마에 입을 맞추는 이단을 보며 브랜트가 미소 지었다.


"내가 다 잡아먹으려고."

"스티브, 빨리 일어나요. 이러다가 마녀의 손에 바짝 익혀진 쿠키가 될지도 몰라요."

"그럴까?"

"거기 두 사람은 내가 예쁘게 장식해줄거야."


브랜트의 말에 스티브가 웃음을 터트렸다. 




10.

탁자 위 놓여있던 액자에는 네 사람의 사진이 들어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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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단브랜]




16.

브랜트는 자신의 앞으로 온 소포를 뜯어보았다. 아주 작은 상자 안에는 은으로 만들어진 얇은 실반지가 하나 담겨있었다. [승진을 축하드립니다. 윌리엄 브랜트 요원.] 간단하게 적혀있는 문구를 보고서야 뭔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브랜트는 가벼운 손짓으로 펜을 허공에 띄웠다. 짧은 심호흡과 동시에 반지를 손가락에 끼우자 신기하게도 허공에 떠 있던 펜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브랜트는 눈을 감고 집중했다. 평소대로라면 방의 모든 것들이 일제히 떠올라야 하지만 미동도 하지 않는 것을 보며 브랜트는 감탄을 자아냈다.


"괜찮은데?"


생각보다 훌륭한 IMF의 기술력을 눈 앞에서 경험한 이후 브랜트는 아주 약간이지만 조금 더 CIA보다 IMF가 마음에 들었다. 



17.

프로텍터. 누구를 어디에서 지키기 위해 만들어진 물건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프로텍터라는 이름을 가진 모든 장비들은 뮤턴트의 능력을 억압하는 기능을 가졌다. 놀랍게도 인체에는 아무런 해가 없다. 

S+ 등급으로 승진한 이후 안 사실인데, IMF의 모든 현장요원들은 IMF에서 전용 프로텍터를 하나씩 제공해주었다. 생각 외로 프로텍터를 쓸 일은 빈번히 생기기 마련이었다. 임무 중에 뮤턴트가 아닌 휴먼임을 연기해야 하는 경우가 그것이었는데, 프로텍터를 착용하는 것만으로도 유전적으로 뮤턴트라는 사실을 아예 숨겨주기 때문에 유용한 물건 중 하나였다.

일반적으로 프로텍터는 사람들이 즐겨하는 악세사리나, 휴대하기 편한 작은 장신구 모양인 경우가 대부분이었는데 프로텍터를 구매하면 무조건적으로 소유자를 등록하게 되어있어 혹시라도 일어날 또 다른 범죄를 방지하기 위한 정부의 정책도 시행되고 있는 중이었다. 


브랜트는 손에 들고 있는 프로텍터를 내려다보며 고개를 저었다. 디자인이 참 살벌하군. 흡사 사냥개에게 채우는 모양의 목걸이 형태로 되어있는 프로텍터를 브랜트의 손에서 받아든 벤지가 눈 앞에 기절해있는 남자의 목에 채웠다. 


"이거 디자인 누가 한거야?"

"정부 측에서 쓰는 프로텍터는 대부분 이런 디자인인데, 왜?"


무슨 문제라도 있냐는 듯 말하는 벤지를 보며 브랜트는 손에 쥔 리모콘을 이단에게 던졌다. 놀라운 반사신경으로 잽싸게 리모콘을 캐치한 이단은 어깨를 으쓱여보았다.


"좀 그래. 이상한 취미에 눈 뜰 거 같잖아?"


잔뜩 비아냥거리는 브랜트의 말에 벤지와 이단이 큰 웃음을 터트렸다.



18.

그걸 내가 찰 줄 알았냐고. 그래도 현직 IMF의 다섯손가락안에 꼽히는 S+급 요원이라는 사실을 배려해준 덕분에 목이 아닌 손목에 족쇄같은 프로텍터가 채워져있었다.푸른빛으로 반짝이는 프로텍터는 분명 정상적으로 가동이 되고 있다는 뜻이지만 브랜트는 아주 손쉽게 능력을 발동할 수 있었다. 점차 허공으로 떠오르는 몸을 느끼며 반대편 유리창을 통해 자신을 바라보고있는 사람들에게 손을 흔들어보았다. 그들의 표정이 흐릿하게만 보였지만, 아무래도 조금 당황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브랜트가 그런 무식한 디자인의 프로텍터를 차게 된 전말은 이러했다. 

평소와 다름없이 이단과 벤지와 함께하는 현장 임무는 스릴이 가득했다. 언제 뭘 박살낼지 모르는 무식한 몸뚱이 하나와, 제 멋대로 네트워크망을 헤엄치며 장난질을 쳐놓는 물고기 한 마리 덕분에 브랜트는 작전을 시작하자마자 테이블 하나를 박살냈다. 그러나 두 사람은 브랜트가 박살낸 테이블 하나 값은 톡톡히 하고 남는 요원들이었다. 사건의 주동자로 보이는 빙결 능력의 뮤턴트를 무사히 체포한 이후, 평소와 마찬가지로 그에게 프로텍터를 채우려는 순간 동범이 레이더에 잡힌 것이다. 분명 방금까지는 아무것도 잡히지 않았던 레이더에 초록빛 점이 하나 찍힌 것을 보며 브랜트가 재빨리 주위의 모든것을 찍어눌렀지만, 그녀의 능력은 물리적인 것이 아니었다. 염력은 염동력과 비슷하면서 다르다. 조금 더 초자연적이며 만류인력과 원동력을 싸그리 무시하는 능력이었다. 그녀와 일대 일로 대치하게 된 것은 브랜트였고, 이단은 서둘러 체포한 뮤턴트를 완벽하게 수감 후, 다시 자리로 돌아왔다. 일촉즉발의 상황, 아슬아슬하게 대치 상황을 유지하고 있던 브랜트는 그녀가 웃는 것을 보았다.


"당신 같이 강한 사람은, 조심해야 해요. 그러니 내가 더 강하게 만들어줄게요."


그게 무슨 말인지 묻기도 전에 순식간에 주위로 파동을 퍼트린 여자는 감쪽같이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재빨리 이단이 그녀의 뒤를 쫓았으나, 그녀는 이미 도망가고 난 후였다. 이단이 넌지시 던지는 시선에 브랜트는 그녀의 말을 이해하려 노력했지만 도저히 무슨 소리인지 알 수 없다는 제스쳐를 취했다. 


"아-"


그와 동시에 브랜트의 프로텍터가 산산조각이 났다. 이단은 브랜트의 손에서 산산조각이 난 프로텍터와 브랜트를 번갈아보았다. 그러고는 가만히 브랜트의 손을 접어주며 말했다.


"들키지 않는게 좋을 거 같아. 연구개발부 녀석들한테는 절대로 들키면 안 돼."


그 때, 브랜트는 분명 알았다고 했지만 그가 알았겠는가. 그렇게 될 줄. 마지막으로 그녀가 남기고 간 말. 당신을 더 강하게 만들어주겠다는 말은 문장 그대로의 의미를 지녔다. 브랜트는 그 날 이후 자신의 능력을 통제할 수가 없게 되었다. 평소처럼 짚은 테이블이 갑자기 찌그러지는 것은 기본으로, 어쩌다 한 번 잘못 뱉은 재채기 한 번에 사무실의 유리창 반이 산산조각이 났다. 저 멀리서 다가오는 벤지를 보며 반갑게 인사를 건네다 벤지를 18층 분석 사무실에서 1층 로비로 처박을 뻔 했다. 브랜트는 시중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프로텍터를 임시 방편으로 착용해 보았으나 택도 없었다. 그 다음은 벤지의 것을 빌렸는데 조금 제어가 되는 듯 싶더니 다시금 통제가 불가능한 상태에 이르렀다. 결국 브랜트는 자신의 상태를 상부에 보고해야만 했고, 범죄자용 프로텍터를 착용하는 시점까지 왔다.


"잠시만 상태를 봐야할 것 같습니다, 브랜트 요원."


아, 예. 브랜트는 언젠가 들었던 이단의 충고가 떠올랐지만 브랜트에게 선택권은 존재하지 않았다.



19.

지하에 이런 공간이 있었을 줄이야. 딱 봐도 모종의 실험용으로 만들어진 지하 벙커에 덩그라니 놓인 브랜트는 심호흡을 했다. 천천히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하면 평소와 똑같이 능력의 제어가 가능했다. 범죄자용으로 만들어진 프로텍터는 시중에서 구할 수 있는 것보다는 훨씬 강력한 것이 당연했다. 그것을 찬 상태에서도 평소와 똑같은 강도로 능력을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은 지금 자신의 능력이 2배에서 많게는 3배까지 증가해있다는 소리였다. 브랜트는 신중에 신중을 가했다. 저번처럼 무식하게 건물을 들어올렸다가 바짝 말라 죽는 것은 사양이었다.


- 들립니까, 브랜트 요원.

"네, 잘 들립니다."

- 지금부터 간단한 실험을 할 겁니다.

"...실험이요?"

- 지금 당신의 능력은 너무 위험할 정도로 높아져 있어요. 인지하고 계시죠?

"예."

- 지금부터 천천히 프로텍터의 강도를 높일 겁니다. 당신의 생체지수와 뮤턴트 능력 지수는 모두 기록되고 있어요. 당신의 능력이 0으로 돌아가는 시점에 맞춰, 그 강도에 맞춘 임시 프로텍터를 만들기 위함이니 협조 부탁드립니다.


브랜트는 순간 머릿속에 떠오른 의구심을 지울 수 없었다. 그들이 자신의 능력 지수를 기록하고 있다면 분명히 알고 있을 것이다. 팔목에 차고 있는 것만으로도 자신이 충분히 능력을 제어할 수 있다는 사실을. 굳이 자신의 능력을 0으로 만들 수 있는 프로텍터를 만들 필요성이 있나? 잠시만 기다려달라는 말을 내뱉기도 전에 푸른빛에서 붉은빛을 띄는 프로텍터를 내려다보며 브랜트는 무언가 일이 잘못돌아가고 있음을 직감했다.


"안 돼, 하지 마!!"


뮤턴트의 능력은 어디서 어떻게 생성되는 지, 무엇을 기반으로 사용이 가능한지는 아무도 모른다. 단지 유전적으로 그들이 보통의 다른 사람들보다 특이점이 있기 때문에 그것이 가능하게 됐다는 설이 가장 유력하나 그것도 확실한 것은 아니었다. 프로텍터의 신호가 적신호로 변경된 순간부터 브랜트는 본능적으로 느꼈다. 자신의 능력을 점점 더 조여오는 가상의 벽을 느끼며 브랜트는 신음했다. 머리가 깨질 것 같이 아파왔다. 눈에 보일듯 말듯 일렁이던 아지랑이가 더욱 거세지고 곧 그것이 제 주위의 모든것이 진동하여 생긴 것이라는 것을 깨닫고는 브랜트는 팔을 휘저으며 소리를 질렀다.


"멈춰, 멈추라고!!"


이단이 경고한 것은 이것이었다. 그들은 절대로 브랜트를 위해서 이 일을 행하는 것이 아니다. 순전히 그들의 안녕을 위해서지. 손목이 부러질 정도로 아려오는 프로텍터를 벗으려 안간힘을 써봤지만 소용이 없었다. 능력을 더욱 억압하는 강도가 거세질 수록 기세가 사그러지기는 커녕 더욱 폭발하듯이 솟구쳤다. 그 여자가 말한게, 이런 거였어. 쩍, 쩍. 어딘가에서 금이 가는 소리가 마치 머릿속을 다 찢어놓는 소리와 같았다. 브랜트의 비명소리와 함께 폭발한 파동이 울려퍼졌고, 그와 동시에 모든것이 부숴지기 시작했다. 자신의 것과 마찬가지로 박살이 나 바닥으로 떨어지는 프로텍터를 바라보며 브랜트는 숨을 몰아쉬었다. 퓨즈가 끊어졌다. 본능적으로 알았다. 마치 그 때와 마찬가지였다. 모든 근육이 비명을 지르며 피를 토해냈던, 그 때와.


"...이, 단."


의식이 멀어져가는 것을 느끼며 브랜트는 헛웃음을 지었다.



20.

본부에 발을 들인 이단은 무언가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모든 요원들이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고, 누구의 것인지 모르는 비명소리와 고함소리가 건물 내에 가득차있었다. 사이렌 소리는 별로 좋은 징조는 아니다. 붉은 빛을 띄며 시끄럽게 울어대는 사이렌 소리를 들으며 이단은 단숨에 18층으로 올라갔다.


"브랜트!"


그러나 이단을 맞이한 건 주인이 없는 텅 빈 사무실이었다. 그 길로 분석부를 다 돌아다닌 이단이 얻은 수확은 그리 많지는 않았다. 분명 경보가 울리기는 했는데, 그 누구도 이 경보가 왜 울린 것인지 모르고 있었다. 적의 공격을 받았다면 대체 누가 이런 황당한 짓을 벌였는지조차 모른다니. 이단은 인상을 구기며 벤지를 찾아갔다.


"벤지."

"이단!"

"대체 이게 어떻게 된 거야?"

"몰라. 아무도 모른다고. 브랜트는..."

"그러고보니, 브랜트 어디 있는 줄 알아?"

"없어?"


이단은 벤지에게 그의 사무실이 비어있다 말해주었다. 이단의 말에 무언가 곰곰히 생각을 하던 벤지가 돌연 건너편에 있던 요원을 향해 물었다.


"조지, 너 브랜트 어디있는 줄 알아?"

"브랜트 요원님이요? 어디가셨는지는 모르겠는데, 아까 연구개발팀이 요원님을 찾아간 건 봤어요."


조지의 말이 끝나자마자 이단은 테이블을 내려쳤고, 모두들 이단에게 시선을 던졌다.


"벤지."

"오, 이단. 그것만은."

"당장, 접속해."


내 저럴 줄 알았어. 벤지는 이단의 말에 괴롭다는 듯 머리를 짚었다. 그러나 이단의 반응으로 봐서는 브랜트에게 틀림없이 어떤 일이 일어난 게 틀림없었다. 그 날 이후, 이단은 유독 브랜트의 일이라면 눈이 뒤집어져서 달려들곤 했다. 결국 자신이 알았다며 고개를 끄덕일 것이라는 것을, 이단은 알고 있을 것이다. 벤지는 자리에 앉아 모니터로 손을 뻗었다. 모니터 액정에 천천히 다섯 손가락이 모두 닿자, 화면이 출렁거렸다. 마치 물에 담가놓은 것처럼, 벤지의 손이 모니터 겉면으로 스며들었다. 천천히 감았던 눈을 다시 떴을 때, 벤지는 눈 앞에 펼쳐진 광활한 전경에 혀를 찼다. 여기는 쓸데없이 정보가 너무 많아. 벤지는 서둘러 연구개발부의 네트워크망에 접속을 시도했다. 곧 반짝이는 문이 벤지의 눈 앞에 나타났고, 벤지는 망설임없이 그 문을 열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벤지는 경악에 찬 비명을 흘렸다.


"안 돼, 안 돼."


벤지의 모니터에 떠오른 영상 속 브랜트는 죽어가고 있었다.



21.

"이걸 대체 어떻게 책임질 겁니까?"

"브랜트 요원의 능력이 이 정도일 줄은..."

"지금 그게 문제입니까!!"


두 쪽으로 갈라진 강화유리 창을 보며 남자는 저도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연신 고개를 저어보였다. 브랜트에게 채워둔 프로텍터는 이미 산산조각이 나 부숴졌고, 그의 뮤턴트 지수를 측정 중인 기계의 숫자는 점점 더 높아졌다. 아무리 강한 뮤턴트라고 해도, 능력 지수가 다섯 자리수를 넘어가는 사람은 없었다. 이단 헌트라고 할지라도 말이다. 그러나 그의 수치는 이미 다섯 자리를 넘긴 상태였다. 남자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이 상태가 더 지속되다가는 브랜트는 물론이고, 지상에 있는 모든 것이 붕괴될 수 있었다. 


"당신이 하라고 지시한 거였잖습니까! 언제 더 강한 뮤턴트가 나타날 지 모른다고요!"

"완벽하게 컨트롤 할 수 있다고 자신하던 건 당신이었잖습니까, 박사!"


남자는 유리창 밖으로 브랜트를 바라보았다. 그가 토해낸 피가 이미 흥건할 정도로 넘쳤고, 더 이상 지하 벙커도 제 역할을 못하고 흔들리고 있었다. 남자는 무언가 기묘한 수가 생각이라도 난듯 말했다.


"죽이십시오."

"뭐라고요?"

"지금 당장 저 요원을 사살하란 말씀입니다. 그가 죽으면 이 소란도 멈출 겁니다."


우리까지 다 죽을 수는 없지 않습니까.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말하는 남자를 보며, 애틀리는 당황스러운 기색을 채 숨기지 못했다. 


"누구 맘대로."


3중으로 잠금장치가 설정되어 있는 통제실의 문을 문자 그대로 찢어낸 이단이 흉흉한 기세로 남자의 멱살을 쥐었다. 기도가 막힌 남자가 컥컥거리며 살려달라 소리쳤지만 이단은 그 손을 놔 줄 생각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무시무시한 기세로 그대로 남자를 목졸라 죽이려는 이단을 벤지가 겨우 말리고서는 그를 다그치며 물었다.


"이봐요, 지금 사태가 시급하다는 건 알죠? 어떻게 해야해요!"

"컥, 크, 헉..."

"야, 이 망할 양반아! 말을 하라고! 댁도 죽는 건 싫을 거 아냐!"


여전히 사경을 헤매고 있는 남자를 보며 벤지는 거나하게 한숨을 내쉬었고, 애틀리는 자신을 노려보는 이단을 보고는 입을 다물었다. 천천히 기억을 더듬어가며 남자가 했던 말을 되짚어 보던 중 무언가 생각이 났다는 듯, 조금 만만해 보이는 벤지의 옷자락을 쥐며 말했다.


"그, 그가 차고 있는 강화 프로텍터는 이미 부숴졌다네. 방법이라고는 자네들이 가지고 있는 프로텍터를 저 요원에게 채우는 것 밖에 없다고 그렇게 말하는 것을 들었네. 사실이야, 믿어주게."


이단은 다시 남자를 들어 올렸다. 그러고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깨진 유리창 바깥으로 그 몸뚱이를 내던졌다. 벤지의 새된 비명소리와 함께 가루가 되어 분해되는 광경을 바라보며 애틀리는 숨을 삼켰다. 벤지는 토하는 시늉을 해보이며 내 언젠가 네가 사고칠 줄 알았지, 하며 탄식할 뿐이었다. 


"들어가지 말라고 해도 들어갈 거지?"

"나 말고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어."


구구절절 다 맞는 말이라 벤지는 어깨를 으쓱여 볼 뿐이었다. 이단은 주머니를 뒤져 자신의 프로텍터를 꺼내들었다. 얇은 은색 장식에 이단 헌트의 이니셜이 적혀 있는 팔찌였다. 


"프로텍터가 박살나기까지 3초. 할 수 있겠어?"

"해야지."

"루터 불러 올 걸 그랬네."


진작 그 생각을 못했다며 안타까운 표정을 지어보이는 벤지를 보며 이단은 너무 걱정하지 말라는 말고 함께 그대로 유리창 안으로 뛰어들었다.



22.

이단의 말은 틀린 말이 아니었다. 온 몸이 가루가 되어 부서지기 전에, 그보다 더 빠르게 손상된 신체를 재생할 수 있는 이단만이 가능한 일이었다. 1초, 1초 몸이 찢기고 재생되는 그 모든 시간이 이단에게는 하루, 한나절 같이 길게만 느껴졌다. 브랜트를 향해 뻗은 팔이 실제로 존재하는 것인지 조차 확신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단은 한 가지만은 확신할 수 있었다. 의식이 끊기기 전 마지막 순간, 브랜트가 제 이름을 부른 것을.



23.

브랜트는 꼬박 일주일 동안 사경을 헤맸다. 그의 능력은 정상적인 수치 범위내로 돌아왔으며, 꾸준한 이단의 피를 수혈받은 덕에 보통 사람들에 비하면 빠른 속도로 회복되어갔다. 그러나 브랜트가 의식을 차리지 못하는 그 일주일이 이단에게는 지옥같았다. 이 모든게 연구개발부와 애틀리의 합동 작품이라는 것을 보고 받은 IMF는 CIA에 항의를 넣었고, 합당한 댓가를 받아낼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이단의 우발적인 과잉 징계를 모른 척 하기로 했다.

그들에게 있어 이단은 귀중한 요원임이 틀림없었고, 브랜트 또한 마찬가지였다. IMF 창설 이래, 네 번째 S+등급 요원의 목숨은 오로지 윌리엄 브랜트 본인의 것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꼬박 열흘을 채우고서야 의식을 차린 브랜트는 그 모든 게 꿈은 아니었을까, 라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자신의 팔에 채워진 그의 이름을 보고서는 미소 지었다. 그것은 모두 현실이었다.


 

24.

"그 팔찌 가져도 돼?"


그것은 의식을 되찾은 지 열흘만에 브랜트가 이단에게 물은 말이었고, 이단은 얼마든지 그러라며 손수 다시 브랜트의 팔에 팔찌를 채워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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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Impossible Mission Force, 통칭 IMF. 브랜트는 단 한 번도 조금 부끄러운 이 조직의 풀네임을 입 밖으로 꺼낸 적이 없었다. 서류의 맨 첫장 떡하니 찍혀있는 IMF의 로고를 바라보고 있던 브랜트는 곧 다시 펜을 들었다. 아직 처리해야하는 서류가 산더미 같았다.



2.

통계적으로 이 세상 인구의 절반은 뮤턴트라고 부르는 초능력자들이다. 뮤턴트들의 능력의 기원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초능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과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 단순히 A와 B로 나뉘어질 뿐이다. 본래 이 세상은 힘을 가진 자가 힘을 가지지 못한자를 지배하려는 본능적인 욕구를 지니지만, 그것도 다 옛날 이야기다. 요즘은 누구나가 다 먹고 살기 힘들다. 오죽하면 청년 실업률이 하늘을 찌르겠는가. 아, 이건 다른 이야기.


뮤턴트들의 능력은 사람마다 발현되는 경우가 조금씩 달랐다. 크게는 선천적 뮤턴트와 후천적 뮤턴트로 나눌 수 있는데, 선천적 뮤턴트에는 유전으로 능력을 물려받은 모든 경우가 해당된다. 후천적인 경우는 또 다시 두 가지로 나누어지는데, '누군가에 의한 강제적인 능력 발현'과 '계승'이 있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전자는 실험, 약물복용 등으로 억지로 능력을 개방한 경우고 후자는 자신의 능력을 타인에게 물려준 경우에 해당된다.


브랜트는 선천적으로 능력을 물려받은 뮤턴트였다. 어머니는 평범한 인간이었지만, 아버지는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어마어마한 능력을 가졌다고 하는데, 브랜트는 그것이 어머니의 과장이 섞인 러브스토리의 결과는 아닌지 진지하게 고려해봐야 했다. 남들처럼 평범하게 교육과정을 다 마치고 평범한 기업의 회사원을 꿈꾸던 브랜트는 대학교 졸업 이후 바로 CIA로 편입되었다. 이게 무슨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소린가, 싶다가도 그 다음날부터 얼떨결에 CIA에 출근 도장을 찍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브랜트는 실소를 터트렸다.


능력을 가지고 있는 뮤턴트의 대부분은 국가 소속 연합, 기관 등으로 편입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물론 평범한 기업에 취직해서 잘 먹고 잘 사는 경우도 많다. 억만, 아니 조만장자 토니 스타크도 뮤턴트지만 평범하게 - 아니, 평범하지는 않나? - 스타크 인더스트리에서 떼돈을 벌고 있으니 말이다. 국가 기관의 인구 비율은 뮤턴트가 월등히 많았다. 그들이 악착같이 뮤턴트들을 국가 기관으로 편입시키는데에는 이유가 있다. 이 세상에 이름 한 번 날려본 범죄자들의 거의 대부분이 뮤턴트였기 때문이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던가. 뮤턴트가 저지른 범죄는 뮤턴트가 처리해야만 했다. 하긴, 그래야지. 뮤턴트의 능력은 천차만별이다. 그 중에는 분명 별 볼일 없는 능력도 있었지만 단 한번에 사람의 목숨을 앗아갈 수 있는 능력도 많았다.


브랜트는 CIA의 현장요원직으로 발령 받았다. 화려하고 튀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그의 성격과는 다르게 브랜트의 능력은 화려한 편이었다. 염동력. 브랜트가 가지고 있는 초능력의 종류였다. 직접 손을 대지 않고도 자신의 의지대로 사물을 옮길 수 있는 능력. 브랜트는 자신의 능력이 꽤 마음에 들었다. 누군가는 이 능력을 이용해 어떤 범죄를 어떻게 저지를 지 고민할 판에, 브랜트는 가만히 입을 벌리고 칫솔을 움직여 이빨을 닦는데 쓰곤 했다.


브랜트가 IMF의 존재를 알게 된 것은 CIA에 입사한 지 7년이 되었을 적이었다. 나름 현장직에서 활약하고 있는 브랜트에게 IMF가 스카웃 제의를 한 것이었다. IMF는 CIA와 비슷하면서 달랐다. 그들은 훨씬 더 위험하고 중대한 일을 다뤘고, 거의 모든 요원이 뮤턴트라고 알려져있다. 따지고 보면 CIA나 FBI에서 양성된 뮤턴트 요원들을 쏙쏙 채간다고 타 기관들에게 미운털이 콕콕 박힌 조직이라는 소문이 허다했다. 그럼에도 IMF가 그렇게 뻔질나게 CIA에 모습을 비출 수 있는 이유는 애초에 CIA에서 훌륭한 성과를 이룬 뮤턴트를 스카웃하는 게 IMF의 일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결정하는 것은 그 사람의 몫이다. 원하지 않는다면 쭉 CIA에 남아있어도 상관은 없었다. 그러나 브랜트는 IMF로 이직했다. 단순히 연봉이 더 높다는 이유였다. 브랜트가 이직을 하던 날, CIA의 현장 총괄 팀장은 심심찮게 브랜트를 갈구었다. 그깟 돈 때문에 의리를 저버려! 브랜트는 코웃음쳤다. 그럼 월급 더 주시던가요. 팀장은 말이 없었다. 모르긴 몰라도 브랜트는 자신의 역량을 이 세상의 그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이었다.



3.

그리고 브랜트는 딱 3년 뒤, 자신의 선택을 미치도록 후회했다.



4.

IMF에 입사하고 가장 먼저 한 것은 테스트였다. IMF는 철저하게 능력 계급사회라는 소문이 자자했다. 첫 입사 때 받는 뮤턴트 테스트에서 얻은 점수로 요원의 등급이 나뉜다는 것이다. 등급이라는 것은 원래 높을 수록 좋은 대우를 받는 것이 당연했다. 그러나 브랜트는 나이에 비해 사회 생활에 대해 빠삭하다는 게 흠이라면 흠이었다. 브랜트는 아주 적당한 수준으로 테스트를 통과했다. 한 마디로,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브랜트의 등급은 A-였다. 그래도 A네. 그 때만 해도 몰랐다. IMF의 80% 이상이 A등급 요원이라는 것을. 그러나 브랜트는 딱히 별다른 감흥은 없었다. 등급에 대한 욕심은 없었다.

브랜트는 전에 다니던 CIA와는 다르게 IMF의 정보, 분석부로 발령받았다. 브랜트의 능력은 철저하게 현장에서 훨씬 더 유용한 능력이었으나 A등급이기에 분석부로 발령했다는 것이 상부의 판단이었다. 브랜트는 순순히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이 세상에 같은 능력을 가진 사람은 꽤 많이 존재하는 법이었다. 같은 IMF내에 염동력을 가진 사람만 벌써 다섯 손가락을 채웠다. 그것도 같은 입사 동기들 중에서 말이다. 브랜트는 그들 중 4번째였다. 가장 뛰어난 염동력을 지닌 요원의 이름은 린지였는데, 그녀는 돌연 무척 기쁘다는 얼굴로 그 '이단 헌트'에게 교육을 받게되었다며 동기들을 한 바탕 뒤집어놓았다.


"이단 헌트?"

"모르니?"


모른다며 고개를 끄덕인 브랜트는 동기들의 모임이 흡사 이단 헌트의 팬미팅이 된 것은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모든 이들이 하나같이 입을 모아 그를 찬양하는 것을 새겨들었다. 그를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IMF의 기둥이자, 존재 의의. 그 어떤 불가능한 미션도 성공해내는 전설적인 현장요원이라는 말이 대부분이었다. 브랜트는 마치 어머니가 아버지의 능력에 대해 이야기를 해주었을 때와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뮤턴트 한 사람을 위해 조직이 존재한다고? 그게 가능한가? 

아무튼, 그 날은 린지를 축하하기 위해 모인 자리였다. 당사자가 그렇게 좋다는 데 찬물을 끼얹어봤자 좋을 것은 하나도 없었다. 브랜트는 자신과 같은 능력을 가지고 있는 린지의 성공을 기원했다.



5.

린지가 죽었다.



6.

"브랜트."

"네, 국장님."

"나랑 같이 가줘야 할 일이 있을 것 같네."


브랜트는 국장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브랜트는 서둘지 않고 천천히, 느리지만 확실하게 한 발자국 씩 승진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그리하여 브랜트는 최연소 치프 분석요원이라는 타이틀을 거머쥐었고, 국장의 수행원이 되었다. 브랜트의 등급은 여전히 A등급이었다.

요즘들어 IMF가 시끌시끌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소문으로는 대통령이 고스트 프로토콜을 발동시켰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설마. 브랜트는 고개를 저었다. 이제와 IMF가 해체된다면, 무슨 일이 벌어날 지는 아무도 몰랐다.


"대통령께서 고스트 프로토콜을 발동하셨네."


성질 같아서는 욕이라도 한 마디 하고 싶었으나 브랜트는 참아야만 했다. 옆에는 IMF의 현 국장이 자리를 잡고 있었고, 브랜트의 맞은편에는 '그' 이단 헌트가 앉아있었다.


"윌리엄 브랜트입니다."


그럴 줄 알았다면, 브랜트는 국장을 따라 그 벤에 오르지 않았을 것이다.



7.

한 조직의 수장이 사살당한 일은 역대 최악이었다.



8.

"다시 한 번 정식으로 소개하죠. 윌리엄 브랜트, A-등급 분석 요원입니다."


이단은 굳이 제 등급을 강조하는 브랜트를 바라보았다. IMF에서 등급은 곧 직함이고, 미미해졌지만 아직까지는 남아있는 계급 사회의 신분이었다. 누가 뭐래도 이 팀의 리더는 S+등급인 자신임이 틀림 없는데. 다른 요원들에게 과시하고 싶은가, 하면 또 그것은 아닌게 엄연히 이단의 팀에서 브랜트의 등급은 가장 낮은 등급이었다. 

A등급은 총 4가지 등급으로 또 나뉜다. A-, A, A+, A++. 쓸데없이 A++까지 만들어 놓은 데에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다. IMF의 80%가 넘는 요원이 A등급의 요원이었으니 그들을 또 나눌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참고로 벤지는 A++등급, 제인은 S- 등급의 요원이었다. 그런 사람들 틈에 A- 등급의 요원이 제 등급을 과시한다? 고려해 볼 가치도 없는 이야기였다.


등급을 강조하며 인사를 건넸던 것 외에도, 이단은 브랜트에게 점점 더 의문을 가지게 되었다. 브랜트는 종종 눈에 띌 정도로 이단을 바라보았고, 이단은 그것이 분석 요원의 습관과도 같은 것이라 생각하며 넘겼지만, 벤지가 그의 시선이 부담스럽지 않냐며 물었을 때는 다시금 돌이켜 봐야 했다. 그러나 이단은 곧 브랜트가 왜 그렇게 자신을 관찰하려 들었는지 알 수 있었다.


"린지는, 훌륭한 요원이었습니다."


그렇죠? 이단은 눈 앞으로 떠오르는 머그컵을 보며 조심스레 고개를 끄덕여보았다. 그 이름은, 이단의 가슴 속에 드물게 남아있는 상처의 이름이었다.



9.

이단은 무너지기 직전의 건물을 바라보며 숨을 삼켰다. 보통 이단이 맡는 임무는 극단적인 경우가 많았다. 주로 범인들을 사살하여도 좋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는 그런 임무들. 그러나 오늘은 상황이 전혀 달랐다. 폭발이 일어난 건물은 IMF의 모든 염동력 뮤턴트들이 동원되어 붕괴를 막고 있었고, 그 건물 안에는 아직 수십명의 민간인이 남아있었다. 구출, 임무라. 이단은 자신이 얼마만에 구출 임무를 맡게 되었는지 가늠해보려다 포기했다. 그럴 시간도 부족한 상황이었다.

브랜트 또한 염동력 뮤턴트였기 때문에 현장으로 불려나갔고, 무너지는 건물을 지탱하는 하나의 기둥 역할을 맡게 되었다. 그 사이 이단과 제인 등의 현장요원들이 민간인을 구출하는 임무를 맡았다. 대략 주어진 시간은 약 25분. IMF의 염동력 뮤턴트라고 해봤자 브랜트를 포함해 단 7명 뿐이었다. 급하게 다른 정부 기관들에 염동력 요원들의 파견을 요청했지만 그들이 시간에 맞춰올 수 있을지는 확언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런 건 어벤져스에게 시켜야 하는 거 아니에요?"

"글쎄, 바쁜가보지."


이단의 말에 제인은 코웃음을 쳤고, 진입 사인과 동시에 전속력으로 건물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이단 헌트의 능력은 복합적 신체 강화 능력이었다. 기타 다른 신체 강화형 뮤턴트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월등하게 높은 재생력을 가지고 있는 세포능력은 그를 전설적인 현장요원의 자리에 앉혀주기에 충분했다. 이단은 심장에 총을 맞았던 날을 떠올렸다. 그건 다시 생각해도 정말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아무튼 요점은, 이단은 심장에 총을 맞고도 죽지 않는 유일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IMF의 존재 의의가 이단 헌트라는 말은 100% 과장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이단이 불사신인 것은 아니었다. 단지 세포의 재생능력이, 세포가 죽는 속도보다 빠르기에 그가 지금까지 걸어다닐 수 있는 것이다. 

가령, 100M를 2초에 뛸 수도 있다. 물론 그 다음에는 터질 것 같은 심장을 달래주어야만 한다. 이렇듯 모든 뮤턴트들의 능력은 무한정인 것이 아니며, 전지전능하지도 않았다. 대체적으로 뮤턴트들은 일찍 단명했다. 


"후."


이단은 제 멋대로 요동치는 심장을 진정시키기 위해 천천히 심호흡을 했다. 벌써 온 몸에 땀이 가득찼다. 붕괴하기 직전의 건물을 어떻게든 유지시키고 있는 요원들도 곧 그 힘이 다할 것이다. 


"얼마나 남았어?"

- 3분도 안 남았어. 이단 곧 탈출해야해.

"정 아니면 뛰어내릴게. 남아있는 민간인은?"

- 생체신호는 더 이상 잡히지 않는데 확신할 수는 없어. 그게...

"벤지, 말해."

- 엄마를 찾아달라며 아이가 울고 있기는 하지만... 내 말 잘 들어, 이 아이 엄마가 이미 예전에 탈출했을지 아닐지는 아무도 모르는 법이야. 너도 이제 나와야만 해. 브랜트도 더 이상 못 버틴다고 그랬다고.


그러니까 이제 그만 나와, 이단. 이단은 벤지의 말에 소리내어 웃어보였다. 괜찮아, 나 안 죽어. 태연한 이단의 목소리에 아무 말 없이 건물을 지탱하는 데에만 집중하던 브랜트의 의식이 한 순간 흐트러졌다.


- 이단, 나와요. 이제 정말 한계야.

"엄살 떠는 거야, 브랜트?"

- 로니가 쓰러졌어요. 이제 정말 무리라고요! 이 건물을 받치고 있는 요원은 날 포함해봤자 이제 다섯도 안 돼요. 이대로는 30초도 못 버틴다고요!


가쁜 숨을 몰아쉬는 브랜트의 목소리를 들으며 이단은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30초만 더 버텨봐. 브랜트는 욕을 내뱉었고, 이단은 또 다시 소리내어 웃었다. 이단은 서둘러 건물의 모든 곳을 돌아다녔다. 혹시라도 찾아보지 않은 곳이 있는 것은 아닌지. 사람의 목소리를 놓친 것은 아닌지. 그리고 그런 이단의 노력은 한 사람의 생명을 더 구할 수 있었다. 이단은 정신을 잃은 중년 여성의 몸을 안아들고는 재빨리 박살난 창문의 근처로 왔다.


"있어, 던진다!"

- 뭐? 있어? 아니, 자, 잠깐만! 비행팀!!


이단은 망설임 없이 그녀의 몸을 밖으로 떨어트렸다. 민간인 구조의 가장 근본적인 원칙이다. 구출은 현장팀이, 인수는 비행팀이 맡는다그리고 그와 동시에 이단도 같이 건물에서 탈출하려던 순간, 짚고 있던 건물의 바닥이 와르르 무너지며 시야가 가라앉았다.


- 이단, 이단!!


절규와도 같은 브랜트의 목소리에 이단은 신음했다. 커다란 콩크리트 덩어리에 짓뭉개진 다리에 감각이 없었다. 쯧, 이단은 혀를 찼다. 산산조각이 난 다리는 30분도 지나지 않아 재생이 될 게 뻔했지만 이렇게 짓눌린채로는 재생이고 뭐고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이단은 머리가 둘로 쪼개질 것 같은 고통에 시야가 반짝였다. 상처가 재생된다고, 아픔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이단은 그 모든 것을 아무렇지 않은 척 '견디는' 훈련을 받았을 뿐, 그것이 실제로 고통을 줄여주는 것은 아니었다.


- 이단, 들려요?

"...들려."

- 이제 건물을 지탱하고 있는 요원이 셋 뿐이에요.

"그래, 알았어. 가."

- 뭐...?

"가라고."


이단은 조금씩 몸을 비틀어 적당히 숨을 쉴 수 있을 만한 공간은 만들어내었다. 다행인 건 누워있는 이단의 등을 다 품을 수 있을 정도의 틈이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곧 있으면 CIA와 FBI의 염동력 뮤턴트들이 도착할 것이다. 실신해버린 IMF의 요원들 대신, 그들이 이 건물을 들어올리면 이단은 충분히 희망적으로 구조될 수 있었다. 뭐, 죽지는 않으니까. 


- ...하.

"브랜트."

- 짜증나.


뭐? 이단이 그게 무슨 뜻이냐며 되묻기도 전에 엄청난 진동과 함께 지반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무슨 일이야! 벤지의 비명소리와 더불어 시끄럽게 귀를 찌르는 고함소리에 이단은 표정을 구겼다. 인정사정없이 흔들리는 건물더미에서 콘크리트 조각과 모래들이 쏟아져내렸다. 그러나 곧, 거짓말처럼 모든 소음이 사라졌다. 모든 구조물들이 허공에 떠오르는 느낌과 동시에 이단의 몸도 저절로 허공으로 뜨기 시작했다. 자연스럽게 콘크리트 덩어리들 사이에 낀 다리가 빠져나왔고, 어마어마한 고통과 함께 부러지고 조각난 모든 상처들이 재생되기 시작했다. 서둘러 현장으로 진압한 비행요원팀에 의해 건물 더미의 바깥으로 빠져나온 이단은 믿을 수 없는 광경에 혀를 내둘렀다. 장장 7명이 달라붙어 받치고 있던 건물을 홀로 지탱하고 서 있는 브랜트를 보며 이단은 무사히 그들이 발을 디디고 서 있는 지면과 같은 곳에 발을 붙였다.


"브랜트."


이단은 자신과 시선을 맞추는 브랜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천천히 브랜트가 허공에 뻗은 손을 아래로 내리자 박살난 건물의 모든 파편이 지면으로 떨어지기 시작했고, 이내 모든것이 무너져 내리며 굉음과 함께 먼지가 날렸다. 이단은 그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괜찮냐는 벤지의 목소리도, 대체 이게 어떻게 된거냐는 또 다른 요원의 말도.


그저, 브랜트가 단단히 화가 났다는 사실만 인지할 수 있었다.



10.

윌리엄 브랜트는 A-등급의 요원에서 S+ 등급의 요원으로 등급이 변경되었다.

그는 순순히 입사 테스트 때 성심성의를 다 하지 않은 것에 대해 자백했다.



11.

그 뒤로 이단은 사흘동안 브랜트를 볼 수 없었다. 마지막으로 이단이 본 브랜트는 자신에게 어마어마할 정도로 화가 나 있었다. 건물 붕괴사건 이후로 브랜트의 이름은 쉼 없이 IMF의 내부에서 오르락 내리락 했다. S+등급의 요원은 IMF 내부에서도 손에 꼽았다. 그런데 정작 당사자가 그 사건 이후로 자취를 쏙 감춰버려 의아해하던 찰나 벤지에게서 연락이 왔다.


"여보세요."

- 지금 당장 의무실로 와, 빨리.


다급해보이는 벤지의 목소리에 이단은 서둘러 의무실로 달려갔다. 그리고 그곳에는 그렇게 오매불망 찾아다니던 브랜트가 침대 위에 누워있었다. 사해얗게 질린 피부와 보랏빛이 다 된 입술을 보며 이단은 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며 벤지를 다그쳤고, 벤지는 다짜고짜 이단에게 물었다.


"너 O형이지?"

"맞아."

"빨리 와서 수혈이나 해 줘, 혹시 알아. 네 피는 적혈구나 백혈구도 뛰어나서 더 좋을지."


이단은 더 이상 묻는 것을 그만두기로 했다. 그저 브랜트의 곁에 앉아 벤지에게 팔을 내줄 뿐이었다. 움푹 꺼져버린 볼과 눈이 안 그래도 늘 인상을 쓰고 있는 그의 얼굴을 이상하리만치 초라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이제 무슨 일인 지 설명해주겠어?"


피도 제공해주는데. 이단의 말에 벤지가 고개를 저었다. 능숙하게 이단의 팔에 바늘을 꽂은 벤지는 자리에 앉아 팔짱을 끼며 말했다.


"말도 마. 지금까지 브랜트가 토해낸 피가 콜라병으로 다섯병은 족히 될 거야."


그 날, 화려한 신고식을 거친 뒤 브랜트가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피를 토해내는 것을 벤지가 발견하지 않았으면 브랜트는 그대로 사망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하긴, 무리했잖아. 혼자서 그 건물을 들었다고. 그리고 절대로 너는 부르지 말라고 한 걸 내가 불렀으니 이제 난 또 욕을 듣겠지. 오래 살겠어, 아주 오래. 은근히 말투가 평소와는 다르게 날이 서있다는 것을 깨달은 이단은 넌지시 벤지에게 시선을 던졌고, 벤지는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정말 모르겠어? 이단, 넌 우리한테 사과해야해."

"사과?"

"그래."

"다시 생각해봐, 너 브랜트나 내가 그 상황에 놓여있다고 하면 어떡할건데?"

"그거야 당연히 구하러-"

"그래, 바로 그거다."


이단은 벤지의 말에 동의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어보였고, 벤지는 내 그럴 줄 알았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넌 너무 네 목숨을 쉽게 보는 경향이 있다니까. 나머지는 브랜트한테 물어봐, 곧 깨어날 거 같으니까. 확실히 네 피가 더 좋은 거 같긴 하다."


자리에서 일어나는 벤지를 보며 이단은 벤지를 붙잡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으나, 그러지 않았다.



12.

이단은 의식을 되찾은 브랜트에게 실컷 얻어 맞았다. 

주먹이나 손바닥이 아닌 온갖 날붙이들로. 이래서야 원, 서커스가 다 무서워질 지경이었다.



13.

사과의 의미로 이단이 타온 커피를 마시며 브랜트는 아무 말 없이 자신의 팔에 꽂힌 바늘을 노려보았다. 이단은 사람 좋은 얼굴로 웃어보이며 브랜트의 곁에 앉았다.


"꺼져."

"영영 얼굴 안 볼거야?"

"CIA로 돌아갈까봐."

"이미 늦었어, 브랜트. S+급 요원을 IMF가 놓아줄리 없잖아."


꼬박꼬박 붙이던 높임말도 한 번에 떼어낸 브랜트를 보며 이단은 어깨를 으쓱여보았다. 이단은 브랜트에게 새로 작성된 브랜트의 신상 보고서를 건네주었다. 브랜트는 이단에게서 받아든 보고서를 받아들고는 한숨을 쉬었다.


"그냥 A- 등급으로 돌아가고 싶은걸."

"브랜트."

"왜."

"날 왜 구한거야?"


이단의 물음에 브랜트는 아무런 표정도 지어보이지 않았다. 이전처럼 화가 난 표정도, 뭣도 아닌 무표정으로 커피잔을 내려다보던 브랜트는 이단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처음 IMF에 들어왔을 때, 나는 이단 헌트가 누군지 모르는 A- 요원이었지. 그래, 이거 내가 일부러 그런거야. 귀찮은 일 하기 싫어서 대충 봤어, 테스트. 아무튼 린지는 S급 요원이었고. 곧 너에게 교육을 받게 되어서 너무 기쁘다며 모든 동기들에게 술을 샀지. 알고 있겠지만 나는 린지랑 같은 입사 동기거든. 그 날 나는 처음으로 너에 대해 알았어. 차마 내 입으로는 할 수 없는 부끄러운 수식어들을 주렁주렁 잘도 달고 다니더라."

"내가 원해서 붙여달란 거 아니야."


브랜트가 돌연 웃음을 터트렸다. 이단은 진심으로 브랜트에게 억울하다며 항의하고 있었고, 브랜트는 어처구니 없다는 얼굴로 웃었다.


"네 프로필을 봤어."

"어떻게?"

"너랑 한 팀이 되기 전까지 전 국장님 수행원이었던 거 몰라서 물어? 넌 현장에서 발품팔고 난 뒤에서 캐내는게 일이었잖아."


이단은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여보았다. 이단의 모든 신상 정보 및 보고서 등은 같은 S+ 등급의 요원이 아닌 이상은 열람조차 할 수 없도록 설정되어 있을것이다. 그러나 국장의 권한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지는 법이다. 


"아프다며. 그, 재생될 때 말이야."


브랜트의 말에 이단은 고개를 끄덕여보았다. 요원들이 신상 보고서를 숨기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그 곳에는 그들의 약점이 고스란히 적혀 있었다. 이단이 브랜트에게 건네준 그의 신상 보고서에도 마찬가지였다. 몇 천, 몇만 톤이 넘는 물체를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고 옮길 수 있다는 능력에 부여된 리스크는 장기 손상이었다. 중력을 거스르는 일이 고스란히 몸의 부담으로 이어진 것이다. 이렇듯, 뮤턴트의 신상 보고서에는 그들의 모든것이 담겨 있었다. 이단의 것도 마찬가지였다. 생긴 상처가, 생기지도 않았던 전처럼 완벽하게 복원은 되나 고통은 변함이 없다. 그리고 세포가 재생되는 과정에서 체온이 극도로 높아져 장기들이 까맣게 타버린다. 물론 그것도 다시 재생된다. 


"맞아, 아프지. 그걸 견디기 위해 훈련을 받았고."

"그래서 그랬어."


아픈 건 싫잖아. 죽는 것과는 별개로 말이야. 이단은 물끄러미 브랜트를 바라보았다. 브랜트는 적당히 미지근해진 커피가 마음에 드는 모양인지 호로록 소리를 내며 마셨다.



14.

브랜트는 무사히 퇴원했다.



15.

브랜트는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어, 그 동안 아버지의 능력을 의심해서 미안하다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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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브랜트는, 그런 남자였다. 자신을 위해 혹은 자신을 믿고 있는 그들의 팀원들을 위해 자신을 억누르는 경향이 있는 사람이었다. 이단은 그것이 좋은 방향의 것인지 확신하지 못했다. 처음 그를 만났을 때 그를 감싸고 있던 것은 위화감이라는 이름 아래 싹을 틔운 불신이었다. 철저하게 온 몸에 가식을 두르고 표정을 만들어내는 사람. 보통의 평범한 사람이라면 그런 브랜트의 연기에 깜빡 넘어갈 것이다. 그러나 이단은 그게 순수하게 자신을 감추기 위해 그가 꾸미는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챘다. 그는, 그래야만 했다.


이단 헌트가 목격한 윌리엄 브랜트의 첫번째 살인현장. 이단은 순수하게 감탄했다. 그 감탄 속에는 많은 의미가 들어있었다. 경외심, 혹은 동경. 혹은 그 이상의 것들. 이단은 그 날이 되어서 비로소 브랜트가 왜 자신을 연기하는 지 이해할 수 있었다.


깔끔하게 상대의 목을 그어버리는 행동에는 일말의 흔들림도, 자비도 없었다. 아니, 자비는 있을지도 모르는 법이었다. 날이 그리 길지 않은 나이프에 의해 동강나는 남자의 목을 보며 이단은 살풋 미간을 찌푸렸다. 고통을 전혀 느낄 틈도 없었을 것이다. 브랜트는 총보다 날붙이가 달린 것들을 선호했다. 총을 쓰는 일이 있다면 무조건 상대를 한 번에 즉사 시킬 수 있는 위치에 총을 갈겼다. 까딱 잘못하면 브랜트가 살생을 즐기는 이미지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만큼 그는 정교했으며, 정확했다. 똥도 뭣도 구분하지 못하고 무작정 돌진하는 초짜와는 비교도 할 수 없었다. 비교하는 것부터가 그에게 실례가 되는 행동이었다. 

두 동강이 나버린 목과 몸통을, 그리고 브랜트를 번갈아 보다 이단은 그의 옷 어디에도 피 한방울 튀어 있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고서는 박수라도 쳐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렇게 이단이 순수하게 놀라워할 때 쯤, 그가 대뜸 소리를 질렀다. 그 목소리는 마치 비명소리와도 같았다.


"Fuck, 튀었잖아."


황당하기 그지 없었다. 그렇게 깔끔하게 현장을 처리해놓은 주제에 발을 헛딛어 바지자락에 튀어버린 피를 보며 성질을 내는 브랜트를 바라보며 이단은 코웃음 쳤다. 이런 생각을 하는 자신도 이미 정상인의 범주에서 많이 벗어났겠지만, 아무튼 그 때 만큼 브랜트가 인간다워 보인 적은 없었을 거라 확신했다. 이단은 순수하게, 가식도 뭣도 두르지 않은 브랜트를 발견한 사실에 감격스러워 했다. 투정을 부리는 아이를 달래듯, 이단은 브랜트의 손에 손수건을 쥐어주었다. 브랜트는 어처구니 없다는 듯 이단을 바라보았다.


"장난해? 바지에 튀었다니까."


그러나 이단은 아무 말 없이 브랜트의 손에 손수건을 쥐어주었다.





벤지가 총에 맞았다. 벤지는 어엿한 현장 요원이었으며 위험을 감수할 줄 아는 요원이었다. 그러나 이단과 브랜트는 벤지의 부상을 용납할 수 없었다. 다른 사람은 어떻게 되든 상관없지만, 제 팀원은 한 명도 그래서는 안되는 일이었다. 다행이라고 해야할지, 불행이라고 해야할지 벤지를 쏜 남자를 브랜트가 잡았다. 이단은 마치 보면 안되는 것을 본 사람처럼 서둘러 제인과 벤지를 옆 방으로 쫓아내었다. 제인은 항의했지만 이단은 절대로 제인을 그 방으로 들여서는 안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건 순전히 제인을 위해서가 아니라, 브랜트를 위해서였다. 이제껏 숨겨놓은 것을 들키기에는 브랜트가 지금까지 해온것이 너무 많았다. 걱정말라는 말과 함께 방으로 들어간 이단은 남자의 머리끄댕이를 쥐고 방을 걸어다니는 브랜트를 보며 숨을 삼켰다. 브랜트, 나도 비위가 그렇게 막 좋은 건 아닌데. 이단의 불만에 브랜트는 가운데 손가락을 들어보였다. 브랜트는 이미 이단에게 제 모든것을 들켰다는 사실을 알고나서 부터 이단을 막 대하기 시작했다. 이단은 그 날, 처음으로 브랜트가 제 편임에 안심했다. 무척이나.


평소의 단정함과는 거리가 먼 브랜트를 보며 이단은 물병을 건넸다. 처참해져버린 남자의 몸뚱이를 구두굽으로 툭툭 치던 브랜트는 지루하다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이 새끼가, 벤지를 쐈는데. 이단은 브랜트에게 넌지시 물었다. 의학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어? 브랜트는 의외의 대답을 했다. 나 레지던트까지 했었는데. 이단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않고서야 저렇게까지 사람의 신체를 잘 다룰 수는 없었을 것이다. 브랜트는 자켓 주머니에 있던 막대사탕을 입에 물었다. 아주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이단은 브랜트가 흡연을 했었다는 사실을 쉽게 알 수 있었다. 


"얼마나 됐어?"

"금연한 지 4년?"


빌어먹을, 현장요원은 자기 흔적을 남기면 안된다잖아. 그래서 끊었어. 피투성이가 된 와이셔츠를 물끄러미 내려다 보던 브랜트는 팔을 뻗어 배트의 손잡이를 쥐었다. 


"이제와서 말해봤자 네가 믿을 지 모르겠는데."

"뭐가?"

"나 싸이코패스라던가 뭐 그런 거 아니야."


내가 언제 너보고 미쳤다고 그랬던가? 별 감흥없는 이단의 대답에 브랜트는 만족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브랜트가 베트를 높게 쳐든 순간, 방으로 들어오는 벤지를 보며 이단은 드물에 욕을 내뱉었다. 순식간에 벤지에게로 달려간 이단은 벤지의 두 눈을 손으로 가려주었지만 차마 귀는 막아줄 수 없었다. 브랜트는 베트를 던져버렸고, 이단과 벤지를 지나쳐 밖으로 걸어나갔다. 방 밖에서 대기 중이던 제인의 새된 비명소리를 들으며 이단은 고개를 저었다. 벤지는 굳이 이단의 손을 치우려 하지 않았다.





브랜트는 미치지 않았다. 

그는 원래 그런 사람이었다. 단지, 아무도 몰랐을 뿐.


그가 아무도 모르게 그렇게 해왔을 뿐.




브랜트는-

어디까지 했더라. 이단은 눈 앞에 놓여있는 싸늘한 시신을 보며 중얼거렸다. 모르긴 몰라도 정말 훌륭한 솜씨였다. 뻔뻔하기 그지 없는 얼굴로 문을 열고 들어오는 브랜트를 보며 이단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너 이게 무슨 짓이야."

"왜. 어차피 얻어낼 정보도 없었고, 있다고 해봤자 불지도 않았을 텐데?"

"브랜트."

"이봐, 이단. 너랑 나랑 이러는 거 시간 낭비라는 생각 안 들어? 나 바빠. 오늘도 네가 박살낸 어느 나라의 어느 문화 유산을 어떻게 잘 넘어갈 수 있게 늙은이들을 구워 삶아야 한단 말이야."


이단은 다시금 눈 앞의 남자에게 시선을 던졌다. 정확히는 목 정중앙, 깊숙하게 기도에 찔러진 만년필을 향해. 브랜트는 이단의 시선이 어디에 가 있는지 알아차리고는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흔들었다.


"아 씨, 진짜 아끼는 건데."


브랜트는 혀를 차며 자켓 안 주머니에 들어있던 다른 만년필을 꺼내 들었다. 주위에 널부러진 아무 종이에 휘갈긴 글을 보며 이단은 기가 차다는 듯 코웃음 쳤다. [미안한데 만년필 좀 다시 가져다줘 -W. B]

이단은 망설임 없이 이제는 누군지도 모르는 남자의 목에 꽂혀있던 만년필을 뽑아내었다. 그와 동시에 막혀있던 기도가 뚫리며 피가 솟구쳤다. 브랜트는 진심으로 기겁하며 뒤로 물러났다.


"Shit, 이단. 다 튀잖아."

"바쁘다며, 가져가."

"쓸데없는 곳에서 친절하긴."

"그게 내 장점이거든."


뻔뻔한 얼굴로 말하는 이단을 보며 브랜트는 다시금 미감을 찌푸렸다. 곧 이단에게서 만년필을 받아든 브랜트는 바지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만년필을 깨끗하게 닦아내었다. 


"그런 너를 위한 선물이야."


깔끔해진 만년필을 이단의 주머니에 꽂아준 브랜트는 그대로 방을 나가버렸다. 이단은 자신의 가슴팍에 꽂힌 만년필을 바라보았다. 아끼는 거라며? 이단은 어깨를 으쓱였다. 이단은 싸늘하게 죽어있는 남자를 보며 웃었다.


"미안, 나도 가끔 브랜트를 막지 못할 때가 종종 있어."


마치 이렇게 돼서 참으로 유감이라는 듯 말하는 이단의 귓가로 저 문 너머로 브랜트의 목소리가 흘러들어왔다. 안 올거야? 나 먼저 간다! 이단은 만년필을 만지작 거렸다. 그래도, 브랜트잖아. 아프진 않았을 거야, 그렇지? 이미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남자에 대한 애도 아닌 애도를 표하며.


"그보다, 그 손수건 마음에 들어?"

"색이 내 취향이야."


브랜트는 오직 그 손수건으로만 몸에 묻은 피를 닦았다. 이단은 그럴 때마나 넌지시 브랜트와 손수건을 번갈아 보았다. 그 날 바로 버릴 줄 알았는데. 브랜트는 그럴 때 마다 이단에게 손수건의 색이 자신의 취향이라 대답했다. 이단이 브랜트에게 선물한 손수건의 색은 짙은 남색이었다. 아마도 색이 마음에 든다는 브랜트의 말은 거짓이 아닐것이다. 


"하얀색은 싫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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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을 계속 하실 생각이신가요?"


브랜트는 의사의 말에 담담하게 고개를 저어보였다. 의사는 그런 브랜트의 대답이 마음에 드는 듯 했다. 잘 생각하셨습니다. 그 몸으로 더 이상 요원일은 무리입니다. 


"원인이 있습니까?"

"흔히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라고 하지요. 브랜트 씨의 경우에는 그게 너무 많이 축적되어 온 것이고요. 총을 쏘기는 커녕 들지도 못하시죠?"

"예."

"정신과 치료는 받으신 적 있으십니까?"

"아니요."

"이번 기회에, 휴식을 취하시는 건 어떻습니까."


그럼 나을 수 있는 겁니까? 브랜트는 굳이 그렇게 묻지 않았다. 의사인 그는 자신의 소임에 따라 환자에게 가장 좋은 길을 추천해주고 있는 것이다. 브랜트는 그의 말에 따르기로 했다. 이상하게, 아무렇지 않았다. 오히려 싸늘한 시체로 이 곳에 도착하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브랜트는 목례를 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불현듯 무언가 생각이 난듯 브랜트는 그의 책상을 두드렸다.


"의사와 환자간의 프라이버시는 잘 지켜지는 거겠죠?"

"물론입니다."


이상하게 믿음이 가지는 않았다. 그건 순전히 그에 대한 불신이라기 보다는, 워낙 뛰어난 요원들을 친구로 두고 있는 스스로에 대한 불신이었다. 병원을 나와 다시 원래 있어야할 곳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이 이상하리만치 느리고 더뎠다. 꼭 마치 누군가가 자신의 다리에 매달려 제 갈길을 막아세우는 것처럼. 정신과 치료? 브랜트는 코웃음을 쳤다. 이제와서? 걸음을 멈춘 브랜트의 시선 끝, 평범한 대기업의 모습으로 위장을 하고 있는 IMF의 본부 건물이 우뚝 서 있었다. 이제와서. 브랜트는 발걸음을 돌렸다.





"선생님! 안녕하세요!"

"브랜트 선생님, 좋은 아침!"

"그래, 좋은 아침!"


따스한 햇빛, 커다란 나무 그늘 아래 매달려있는 그네에 앉아 책을 읽고 있던 브랜트의 시야로 옹기종기 모인 작은 아이들이 등교를 서둘렀다. 슬쩍 내려와있는 안경을 손가락으로 밀어 올리며 학교 건물 안으로 들어가는 형형색색의 귀여운 가방들을 보며 브랜트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 내가 결혼을 좀 일찍 했으면, 저만한 아이들이 있었을까? 어림도 없는 소리하고 있네. 브랜트는 학교로 향했다. 그의 발걸음은 가볍기 그지 없어보였다.






IMF를 그만 둔지 벌써 반 년이 지났다. 그렇게 돌연 IMF로 향하는 발걸음을 끊은 브랜트는 자신이 알고 있고,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총동원하여 자신의 자취를 싹 지워버렸다. 이래봬도 브랜트는 훌륭한 현장요원이었으며, 분석요원이었다. 벤지만큼은 아니더라도 충분히 컴퓨터를 다루는 데에는 부족함이 없었다. 비상시로 늘 챙기고 다니는 위조 신분증과 여권들은 이 세상에 '윌리엄 브랜트'라는 사람을 없애주기에는 충분했다.


"안녕하세요, 국장님."

- 브랜트, 자네 지금 뭐 하는 건가?

"국장님이 제 사직서 수리를 안 해주시잖아요. 제가 공들여서 메일로 보내 드렸는데."

- 그게 정말 말이 된다고 생각하는건가? 


트렁크에 한 가득 짐을 실으며 어깨와 뺨 사이에 핸드폰을 끼워 통화를 이어가고 있던 브랜트는 헌리의 엄한 목소리에 터진 웃음을 애써 참으려고 하지는 않았다. 


"저 이제 요원일 못한답니다."

- 브랜트. 자네의 일이 뭐지?

"분석하고 해독된 정보를 국장님께 제공해드리는 거요."

- 그래, 그럼 다시 한 번 말해보겠나?

"최근 임무 이후로, 몸이 예전 같지 않습니다. 신경을 다친건지, 단순히 스트레스 장애인지는 모르겠지만 오른쪽 눈의 시력이 현저히 떨어지고 한 손으로는 총도 들지 못해요. 주체를 할 수 없을 만큼 떨리거든요. 요원일, 그만 두랍니다. 의사가요. 정신과 치료를 추천받았으니 그렇게 하려고 합니다."

- 정신과?

"예. 이 모든 게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로 인해 생긴 것 같다는 게 그 분의 소견입니다. 그리고 덧붙여서 그러시더라고요. 이번 기회에 쉬라고요."

- 브랜트.

"헌리."


이제는 아예 국장이라는 호칭을 떼어버린 브랜트에 헌리는 그저 아무 말 없이 브랜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 말이, 저에게는 그렇게 들렸어요. 이제 모든 게 다 끝났다고."


브랜트는 웃었고, 헌리는 그런 브랜트에게 알았다는 말을 했을 뿐이었다. 통화가 끊긴 핸드폰을 내려다보며 브랜트는 [이 메세지는 5초 뒤 자동으로 폭파됩니다.] 라는 문구가 떠올랐다. 브랜트는 속으로 5초를 센 후 핸드폰을 벽으로 던져버렸다. 산산조각이 나며 박살이 나는 핸드폰을 보며 브랜트는 이게 이런 기분이구나, 하며 마저 짐을 챙겼다.





일사 파우스트를 만난 것은 순전히 우연이었다. 그녀는 누군가에게 쫓기거나, 생사를 다투는 긴박한 시간과는 거리가 먼 생활을 즐기고 있었다. 그녀와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낸 것은 이단과 벤지였기에 브랜트는 아주 찰나의 시간 뿐이었지만 일사 파우스트를 보고 느낀 소감을 한 문장으로 정리했다. <성별이 바뀐 이단 헌트>. 일사는 그 말에 불쾌하다는 기색도 없이 오히려 고맙다는 인사까지 해보였다. 그런 점까지 이상하게 닮았네요. 브랜트는 중얼거렸다. 브랜트는 자신의 다리에 매달리는 아이들을 놀이터로 돌려보낸 후 곤란하다는 얼굴로 일사를 바라보았다.


"체면이 안 서네."

"보기 좋아보이네요."


일사는 브랜트에게 가까이 다가와 브랜트의 얼굴을 살폈다. 흐릿해진 오른쪽 동공을 보며 안타깝다는 시선을 감추지 못한 채, 일사는 가볍게 브랜트의 어깨를 두드렸다. 브랜트는 어깨를 으쓱여볼 뿐이었다. 이제는 거의 시력을 다 잃어버렸기에, 일사의 안타까움도 절반밖에 보지 못했기에.


"왜 그런 건가요?"


브랜트는 일사의 질문에 글쎄요, 라며 말하고는 말 끝을 흐렸다. 브랜트와 일사에게 있어서 공통적으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주제는 그렇게 많지 않았다. 이제는 다 무너져버린 신디케이트, 솔로몬 레인, 특수 요원, 이단 헌트. 브랜트는 그녀의 질문 속의 주체가 이단이라는 것을 그리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그냥요."


가볍게 대답하는 브랜트를 보며 일사는 미소 지었다. 걱정마요, 그에게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을게요. 당신이 원하지 않는 일이니까. 브랜트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뒤로 브랜트는 일사와 자주 만나게 되었다. 그녀는 그 근처에 정착하며 살고 있다고 했고 브랜트는 그런 그녀를 반가워했다. 미국의 요원과 영국의 요원이 아닌, 초등학교 교사와 평범한 아가씨로 만나는 관계가 무척 편안하게만 느껴졌다. 곧 그녀가 브랜트가 가르치는 또래의 아이들과 비슷한 나이의 여자아이를 데리고 왔을 때 브랜트는 감탄까지 했다. 그녀는 일사를 무척이나 닮은 예쁜 아이였다.





"브랜트!!"


브랜트는 이 고통을 잘 알고 있었다. 총에 맞은 것이다. 어디에 맞은 것인지는 가늠할 수 없었다. 몸 구석구석 여기저기 아프지 않은 곳이 없었다. 무슨 일이 있었더라? 브랜트의 기억이 조각조각 나뉘어진 파이처럼 듬성듬성했다. 누군가에 의해 몸이 일으켜지고 어설프게 어깨에 매달려 부축해지는 꼴이 우스웠다. 두고 가라는 말도 나오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기억나는 것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브랜트의 손을 꼭 쥐고 있는 벤지와 어떤 말을 해야할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이단이었다. 브랜트는 희미하게 웃었다. 멀어지는 의식 속, 이상하게 퓨즈가 먼저 나가버리는 오른쪽 시야에 브랜트는 깨달았다. 이제, 못 쓰겠구나. 이단의 목숨을 구한 값으로 오른쪽 눈 하나면 꽤 많이 남는 장사였다.


그리고 그것은 여러차례 반복되었다. 멍청할 정도로. 그리고 마지막이 되어서야 브랜트는 깨달았다. 그제야 깨달았다. 비정상적인 감정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지만 브랜트는 알고 있었다. 사격 시험에서는 점점 점수가 내려가고 있었고, 그렇기에 더 무리를 한 결과 어깨는 망가져가기 시작했다. 이제 다리까지 절게되면 완벽했다. 브랜트는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이단의 시선을 애써 무시했다. 어차피 그에게는 숨길 수도 없다는 사실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브랜트는 스스로 체념했다. 형편없어진 사격실력을 보며 그가 비웃고 놀리기라도 하면 기분이 더 괜찮았을까. 브랜트의 눈에 비친 이단의 표정은 너무 어려워서, 브랜트는 순간 목놓아 소리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당신이 그런 표정 지어봤자 나한테는 아무런 도움도 안 되니까 그러지 마. 브랜트는 이단에게 자신의 총을 건냈다. 이단은 한동안 그 총을 바라보다 기어코 총을 받아들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정확하게 사격판의 정중앙을 맞추는 이단을 보며 브랜트는 소리 내어 웃었다. 그거면 됐어. 그리고 그 다음 날, 의사에게 휴식을 권고받았다. 브랜트는 그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게 이단과의 마지막이었다. 





수업을 하는 동안, 무음으로 해놓은 핸드폰에 누구인지 모르는 전화번호가 수십통이나 쌓여있는 것을 확인한 브랜트는 혀를 찼다. 벌써 들켰어? 하긴, 반 년이면 꽤 오랫동안 들키지 않은 것일지도 모르는 법이었다. 타이밍 좋게도 다시금 걸려오는 전화를 보며 브랜트는 한숨을 내쉬고는 전화를 받았다.


"안녕, 벤지."

- 안녕? 지금 안녕이라고 한 거야?!


마치 핸드폰을 뚫을 기세로 소리를 지르는 벤지의 목소리를 들으며 브랜트는 소리 내어 웃었다. 지금 웃음이 나와? 벤지의 물음에 브랜트는 나오는 걸 어떡하냐며 말했다. 위치 추적이 안 되잖아, 불평을 늘어놓는 벤지에게 브랜트는 기가차다는 듯 말했다.


"이봐, 벤자민 던. 난 이제 민간인이거든? 민간인 사찰하면 잡혀가는 거 몰라?"

- 언제 IMF가 그런 거 따졌어?


아, 하긴. 그러는 브랜트는 자신이야 말로 민간인이라고 하는 주제에 도청과 추적이 불가능한 프로그램이 깔려있는 핸드폰을 가지고 있으니, 퍽 웃길 노릇일거다. 


- 그래서 어딘데?

"왜?"


브랜트의 물음에 벤지는 진심으로 화가 난 듯 말했다.


- 너는 그게 나한테 할 소리야!

"벤지."

- 얼마나 걱정했는 줄 알아? 갑자기 헌리가 와서 브랜트 네가 더 이상 IMF요원이 아니라고, 죽은 사람으로 알고 있으라잖아. 네 집에 찾아갔는데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고, 네 목소리 듣는 게 반 년만이라는 걸 알면서 그러냐! 진짜 어디가서 죽은 건 아닌 지 내가 얼마나 걱정했는 줄 알아, 이 멍청아!!

"이제 나한테 욕도 해?"

- 그래, 할거다!


숨을 고르는 벤지의 목소리에 브랜트는 지금 벤지와의 이야기가 순전히 통화로 이루어져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아니었으면 이미 다 무너져버린 자신의 모습을 들켰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브랜트는 침착하게 숨을 삼켰다.


"이제 네가 전화해도 무시하지 않을테니까."

- 그건 당연하지!!

"나를 위해서, 나 안 찾으면 안될까?"


브랜트는 드물게 깊은 한숨을 내쉬며 얼굴을 쓸어내렸다.


- 브랜트.

"나 아무렇지 않아. 잘 살고 있어, 그러니까, 그러니까."

- 거짓말.

"......"

- 오른쪽 눈은 어때.


하, 브랜트는 고개를 떨구었다. 체면이라던가, 자존심이라던가, 그런 것 때문에 모두에게 비밀로 하고 나온 것이 아니다. 그냥 그들이 그런식으로 자신을 걱정하는 것이 싫었고, 무엇보다 자신의 탓을 하지 않기를 바랬다. 특히 그가, 이단 헌트가. 


"...고마워."


브랜트는 그대로 종료 버튼을 눌렀다. 전화는 다시 오지 않았다. 브랜트는 제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한참을 넘쳐흐른 감정의 파도속에 휩쓸려 허우적대고 있을 때, 브랜트는 자신의 앞으로 달려오는 수많은 발걸음 소리를 들었다.


"선생님."

"브랜트 선생님?"

"선생님 울어요?"


아니, 안 울어. 브랜트는 울지 않았다. 그는 아이들을 보며 웃었다. 

오른쪽 눈이 아팠다.





모든 아이들이 하교를 다 마친 시간, 브랜트는 저물어가는 태양을 보며 그네를 탔다. 흔들거리는 시야 속, 일렁이는 주홍빛이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그래도 아직은 색과 형태는 분간할 수 있을 정도였다. 의사의 말대로 브랜트에게는 휴식이 필요했다. 모든 것을 내려놓고 조용히 쉴 수 있는 시간이. 브랜트는 그 날, 짐을 다 챙겨 고향으로 내려왔다. 고향이라고 해봤자 마지막으로 발걸음을 한 지가 십 여년이 넘은 동네였다. 적당히 크고 살기 편한 집을 구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만큼 외진 동네였다. 


초등학교 교사일을 시작하게 된 것은, 어쩌면 하늘에서 준 기회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외진 동네라 학생도 몇 없는 학교였지만 그래도 아이들을 가르칠 선생님이 필요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마침 집주인에게 그런 이야기를 들은 브랜트는 학교를 찾아갔고, 아주 쉽게 초등학교 교사를 부임하게 되었다. 교사 자격이라던가, 학력등이 필요한 것이 아닐까 고민한 브랜트와는 다르게 교장 선생님은 별 다른 조건 없이 브랜트를 받아주었다. 나중에야 알게된 사실이었지만, 교장 선생님은 브랜트를 처음 본 순간 이 학교에 다니는 다른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자신이 거두어 돌봐주고 싶다는 생각을 했기에 브랜트를 채용했다는것을 알았다. 


아이들은 티없이 순수했고, 맑았다. 썩어 문드러진 어른들의 계락과 음모 속에 허덕이던 브랜트에게는 천국과 다름 없는 곳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곧 브랜트에게는 마치 특효약과 같았다. 색도 구분하지 못했던 시력이 어느 정도 돌아오고, 이제는 총을 쥐어도 팔이 떨리지는 않았다. 그 뒤로 총을 쏴본 적은 없어서 사격에는 자신이 없어졌지만 말이다. 

총 대신 분필을 들고, 온갖 암호와 정보가 담겨있는 서류 대신 재미있고, 교훈이 담겨있는 동화책을 들고 다니는 기분은 상상을 초월했다. 교묘한 화술을 이용해 상대를 설득하고 속이며, 조롱하는 대신 과장된 몸짓과 억양으로 아이들에게 토끼와 거북이의 달리기 시합을 들려주었다. 잡히면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이를 악물고 뛰어야했던 날들과 달리 아이들과 발걸음을 맞춰가며 공을 찬다. 적의 몽타주를 그리는 대신 꽃과 나비를 그리며 못생겼다는 아이들의 말을 들으며 히히덕거린다. 그 모든 삶이, 브랜트에게는 또 다른 삶이자 행복이었다.


그럼에도 브랜트의 핸드폰에는 이단과 벤지의 전화번호가 담겨 있었고, 지갑에는 언제인지 모를 임무가 끝나고 찍은 사진이 담겨 있었다. 몇 번이나 연락을 시도해보려고 노력한 적은 있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그러지 않았다. 염치가 없었고, 괜히 긁어부스럼을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긁어부스럼은 순전히 제 마음속에 가득 차 쌓이고 있음에도. 브랜트는 이단이 그 사실을 모르길 바랬고, 자신도 더 이상 그것을 신경쓰지 않기를 바랬다. 할 수만 있다면 영원히.


이제 슬슬 학교 문을 닫고 퇴근을 해야 하는 시간이 다가온 것을 느끼며 브랜트는 가방을 가지러가기 위해 교실로 들어갔다. 자신의 자리인 책상에 누군가가 서 있다는 사실을, 교실로 발을 들이기 전에 알았다면 브랜트는 절대로 교실로 발걸음을 들이지 않았을 것이다. 여유롭게 책상에 앉아 브랜트가 수업에 사용하는 책을 읽고 있던 이단과 눈이 마주친 건 한 순간 이었다. 브랜트는 입 안이 바싹 말랐다. 무슨 말을 해야할지 머릿속이 새하얗게 비어버렸다. 여긴 또 어떻게 알았어? 그러나 그런 물음은 하지 않았다. 그는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사람이었으니까. 그럼 왜 왔어? 브랜트는 입을 다물었다.


"오랜만이야, 브랜트."


브랜트는 이단의 말에 고개를 살짝 끄덕여보였다. 이단은 여전히 책을 읽고 있었다.


"아이들이 배우기에는 조금 어려운 거 아니야?"

"글쎄, 요즘 애들은 똑똑하더라."


이단은 책을 덮어보이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순간, 순간이 너무 느리게 흘러갔다. 전속력으로 도망쳐봤자, 금방 잡힐 것이라는 걸 안다. 브랜트의 몸은 더 이상 예전과 같지 않았다. 달리기는 보통의 사람들과 다름 없으며, 순발력은 현저하게 떨어졌다. 이단은 브랜트를 바라보며 물었다.


"이 책의 다섯번째 시를 기억해?"


브랜트는 이단의 시선을 따라 책을 바라보았다. 오늘은 아이들에게 짧은 시를 가르쳐 주었다. 브랜트는 기억을 더듬었다. 다섯번째, 시. 이단은 내려놓은 책을 다시 들어올리고는 시를 낭독했다.


"내려놓으면 된다. 구태여 네 마음을 괴롭히지 말거라."


심장이 먹먹해졌다. 마치 콱 막힌 것처럼. 이단은 다시금 넌지시 물었다.


"그럼 이 다음 시는?"


브랜트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손끝이 떨려왔다. 이단은 브랜트를 재촉하지 않았다. 


"그대여, 이제 그만 마음 아파하라."


시선이 마주쳤다는 것을 느꼈다. 이단은 책을 내려놓고는 천천히 브랜트의 앞으로 걸어왔다. 조심스러운 손길로 브랜트의 오른쪽 눈가를 매만지는 그의 손가락이 따뜻했다.


"많이 늦어서 미안해."


감긴 오른쪽 눈꺼풀 위로 내려앉은 숨결에 브랜트는 손의 떨림이 멈추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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