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그것은 단순히 사고였다. 사고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었다고, 바튼은 그렇게 말했다. 모두는 그것을 납득할 수 없었다. 특히 스티브 로저스는 그 말을 도저히 납득할 수 없었다.
"온 세상이 조용하네요."
바튼의 첫 감상이었다. 굳게 담긴 두 눈 사이로, 온통 암흑에 잠긴 그의 세상은 조용하기 그지 없었다. 아무런 장애물이 없는 텅 빈 복도를 혼자 걷다 발을 헛딛어 넘어졌을 때도, 잃어버린 방향 감각을 되찾으려다 어벤져스 타워 96층에서 떨어졌을 때도 그는 웃었다. 제정신이냐며 토니에게 한 소리 들었을 때도 바튼은 웃었다. 그리고 곧, 당연스러운 일이었지만 바튼은 쉴드를 그만 두게 되었다. 어벤져스 또한. 바튼은 나타샤의 도움을 받아 천천히 자신의 것을 정리해가기 시작했다. 바튼을 제외한 모두가 그가 타워에 남아있기를 바랬지만, 그는 그것을 거절했다. 이제 더 이상 어벤져스의 일원이 아니기 때문에 타워에 남아있을 수 없다는 이유였다.
타워를 떠나기로 한 마지막 날, 스티브는 차마 바튼을 붙잡을 수 없었다. 붙잡고 싶었으나, 그래서는 안됐다. 바튼이 두 눈을 잃게 된 것은 순전히 자신 때문이었기에.
"클린트."
"안녕, 윌."
"-안녕."
타워로 마중을 온 것은 바튼과 똑같이 생긴 남자였다. 매가 두 명이나 있네, 라며 순수하게 감탄하는 토니를 보며 활짝 웃은 바튼은 처음으로 그들에게 자신과 똑같이 생긴 남자를 소개해주었다.
"이제껏 여러분들에게 말 못해서 미안해요. 형도 그럴만한 사정이 있는 사람이거든요."
"브랜트라고 불러주시면 됩니다."
바튼은 보지 못했지만, 처음으로 그들과 만난 브랜트의 표정은 한 없이 슬퍼보였다.
2.
"싫어."
"그러기로 했어."
"윌."
"클린트."
넌 내 하나뿐인 동생이야. 내가 널 위해 그거 하나 조차 할 수 없을 거 같아? 바튼은 차마 그러지 말라고 애원하며 말했다. 그러나 브랜트는 완강했다. 브랜트는 정 안되면 널 기절시켜서라도 데려가겠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윌, 나는..."
"클린트. 내 눈은 두 개나 있잖아."
바튼은 제 눈에서 눈물이 흐르는지 조차 알 수 없었다. 진심으로 브랜트가 그러지 않기를 원했다. 애초에 바튼이 모든 것을 정리하고 타워를 스스로 나온 것도 그런 이유에서 였다. 처음에는 브랜트에게도 알리지 않은 채로 혼자 살 생각이었다. 유능한 요원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유능한 법이었다.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하여 점자 문자를 익혀둔 것도 그런 것 중 하나였고, 어둠 속에서 살아남는 방법들도 익히 알고 있었다. 그러나 나타샤는 그런 꼴을 볼 수 없다 하여 바튼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브랜트에게 바튼의 소식을 알린 것이다. 바튼은 이런 일로 브랜트를 만나고 싶지는 않았다. 그와 마지막으로 만난 것은, 브랜트에게 새로운 연인이 생겼을 때였고 그 일은 충분히 축하받을만한 행복한 일이었다. 바튼은 제 두 눈이 멀어버린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브랜트를 볼 자신이 없었다.
"수고했어, 내 자랑스러운 동생."
그의 목소리에 가득 녹아있는 슬픔과 자랑스러움을 느끼고, 바튼은 제 생각을 고쳐먹었다. 몹시도 그의 얼굴이 보고 싶었다. 그 때도, 지금도.
"그렇게 미안하면, 앞으로 내가 하는 말 다 들어주겠다고 약속해."
"뭔데?"
"앞으로 계속 우리들과 함께 살것."
"우리들?"
바튼의 물음에 픽, 웃는 브랜트의 목소리를 들으며 바튼은 한껏 비아냥거리는 어투로 대답했다.
"형, 제정신이야? 신혼집에 동생을 들여?"
"지랄하고 있네, 신혼은 무슨."
"그 사람 얼굴을 어떻게 보라는거야."
진심으로 질렸다는 얼굴을 하며 말하는 바튼을 보며 브랜트는 바튼 못지 않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제 좀 너 같다."
바튼은 소리내어 웃었다.
3.
수술은 성공적이었다. 그들이 일란성 쌍둥이었기에 보장되어 있던 성공이었다. 바튼은 몰랐지만 브랜트는 바튼이 두 눈을 잃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부터 그 모든것을 준비했다. 배너와 토니에게 부탁해 자신의 한 쪽 눈을 바튼에게 무사히 이식해 줄 수 있을 법한 모든 방법을 강구했다. 수술은 비밀리에 진행되었고, 바튼은 무사히 브랜트의 왼쪽 눈을 이식 받았다.
한 쪽 눈만 남은 브랜트 또한 자연스럽게 IMF를 그만두게 되었다. 바튼은 더 이상 브랜트에게 미안하다 말하지 않았다. 그렇게 된 이후로 브랜트와 바튼은 변두리에 큰 2층집을 구했다. 마당이 농장만큼 넓은 집이었다. 바튼은 그 집을 굉장히 마음에 들어했다. 브랜트와 같이 사는 한, 2층은 오로지 제 것이었기에.
"헤이, 윌. 대체 왼쪽 눈을 어떻게 써먹었길래 시력이 이 모양이야?"
"너도 내 나이 되면 알 거 아냐."
"웃기지마, 너랑 나랑 나이 똑같거든."
"내가 17분은 먼저 태어났다."
닥쳐, 킬킬 거리는 바튼을 보며 브랜트도 똑같이 키득거렸다. 그러나 바튼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었기에 브랜트는 어깨를 으쓱였다.
"어쩌겠어, 난 오른쪽 시력이 더 좋은데."
"그래서 나한테 왼쪽 눈 준 거지?"
"이런, 들켰잖아?"
눈을 이식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았기에, 거리를 가늠하기가 여전히 어려웠다. 일주일 사이 접시를 네 개나 깨먹어서 브랜트에게 혼이 났음에도 바튼은 꿋꿋하게 설거지를 했다. 가끔은 마당에서 활을 쏘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뿐이었다. 더 이상 과녁의 정중앙을 맞출 수 없다는 상실감에 바튼은 일찌감치 활을 놓았다.
"나 왔어."
"어서와."
"안녕, 이단."
"안녕, 클린트. 윌, 이거 맞지? 1/2칼로리 마요네즈."
"그래, 바로 그거야."
집으로 돌아온 이단을 보며 커피를 홀짝이던 바튼은 컵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금슬좋은 부부 사이를 위해, 건배. 자기가 말해놓고도 웃긴 모양인지 키득거리는 바튼의 뒤로 덩치가 제법 큰 골든 리트리버 한 마리가 쪼르르 따라붙었다.
"가자, 럭키."
4.
붙임성 좋고, 잘생겼고, 돈 많고... 아무튼, 하나뿐인 형의 애인 자리를 꿰차고 있는 남자의 이름은 이단 헌트였다. 그도 브랜트와 같은 IMF요원 중 한 명이었는데 쉴드에서는 암암리에 블랙리스트에 올라와 있던 이름인지라 바튼도 익히 들어 알고 있는 이름이었다. 그는 브랜트의 선택을 존중했다. 바튼은 그 점에서 그가 참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이제는 하나밖에 남지 않은 브랜트의 눈 위로 입을 맞추며 여전히 사랑스럽다는 표정을 한껏 띄고 있는 그를 보면 아주 조금은 브랜트가 부러워지기도 했다.
브랜트는 자신과 다르다. 자신이 모든 것을 떨쳐내고 도망나오다 싶이 그곳을 빠져나왔을 때, 브랜트는 그가 내민 손을 붙잡았다.
"...붙잡을 걸, 그랬나."
바보같은 생각이라는 것을 잘 안다. 바튼이 이 세상에서 제일 중요시하고 있던 것은, 그 어떤 누구에게라도 짐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이미 브랜트에게 어마어마한 빚을 지게 되었으니 이제는 다 소용없는 말이겠지만.
"클린트, 저녁 먹어."
"알았어."
대답은 그리 하면서도 꼼짝없이 침대에 누워있는 바튼을 보며 브랜트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바튼의 곁으로 와 앉았다. 바튼은 팔을 뻗어 브랜트의 왼쪽 눈가를 매만졌다. 부피감이 없이 텅 비어버린 그 공간이 꼭 바튼의 속마음 같았다.
"윌."
"왜."
"그 사람이 보고 싶어."
"......"
"보고 싶은데, 보면 안되잖아."
브랜트는 아무 말 없이 바튼을 안아주었다.
5.
브랜트는 높게 솟은 타워를 보며 탄식했다. 정말, 더럽게, 높네. 타워 안으로 들어선 순간부터 자신을 맞이해주는 자비스의 목소리를 들으며 브랜트는 타워의 최정상으로 올라갔다.
"어서와, 브랜트."
"안녕하세요, 스타크씨."
"토니라고 부르라니까."
"아, 네. 영 어색해서요. 입에 안 붙네요."
"그런 것까지 바튼을 닮았네."
한 순간, 슬픔이 지나치고 간 토니의 얼굴을 보며 브랜트는 안타깝다는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로저스씨는, 어디에 계십니까?"
"캡시클이라면 곧 올거야. 방금 미션이 끝났다는 보고를 들었거든."
"도청하셨습니까?"
"그냥, 좀."
요새 그 양반이, 좀, 이라며 말을 흐리는 토니를 보며 브랜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브랜트는 눈 앞의 남자가 얼마나 다정한 사람인지 다시금 깨달았다. 좋은 동료를 뒀구나, 클린트. 브랜트가 타워로 찾아온 것은 다름아닌 스티브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클린트를 위해서도, 그를 위해서도 이 일은 꼭 해야만 하는 일이었다.
"다녀왔네, 토니... 이런, 손님이 계셨군."
"안녕하세요, 로저스."
"반갑습니다, 브랜트."
브랜트는 어렵지 않게 스티브의 표정을 읽을 수 있었다. 바튼과 자신이 다른 사람이라고 한들, 아주 오랫동안 그들을 봐온 사람이 아닌 이상은 구분을 할 수 없을 정도로 똑같이 닮은 그 얼굴이 그를 괴롭게 하는 것이리라. 브랜트는 주저 없이 말했다.
"눈."
"......"
"클린트의 눈 말입니다."
"예, 말씀하십시오."
"당신 때문이라는게 사실입니까."
딱히 의문형이 아닌 브랜트의 어투에 스티브는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브랜트가 그런 말을 할 줄 몰랐다는 듯, 토니가 당황스럽다는 얼굴을 숨기지 않은채 두 사람을 번갈아보았다.
"그럼 당신에게 한 가지만 묻죠."
"뭐든지."
"그럼 내 눈은, 바튼 탓일까요?"
"아니, 그것은-"
그것 또한 제 탓입니다. 고개를 떨구는 스티브를 보며 브랜트는 한숨을 내쉬었다. 골치 아플 정도로, 고집불통인 사람들이야. 그 때만큼은, 이단의 막무가내 기질이 조금은 고맙게 느껴진 브랜트였다.
"내가 선택한 건데, 왜 당신 탓입니까?"
"...브랜트."
"클린트도 똑같습니다. 그 녀석은, 다시 시간을 돌릴 수 있다고 한들 똑같은 선택을 하겠죠. 당신의 목숨을 구하고 자신의 눈을 기꺼이 내놓을 거라는 말입니다. 이봐요, 로저스. 나는 캡틴 아메리카랑 대화하고 싶은게 아니에요."
브랜트는 천천히 스티브에게 다가갔다. 스티브는 여전히 고개를 들지 못한 채로 가만히 있었다. 브랜트는 천천히 스티브의 팔에 매달려 있는 그의 상징이나 다름 없는 방패를 집어들었다.
"당신이 원하는 대로 하세요. 당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대로."
내 말, 무슨 뜻인지 알겠나요? 브랜트의 물음에 스티브는 고개를 끄덕였다. 주제 넘은 참견을 해서 미안하군요, 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브랜트는 돌아갔다. 스티브는 여전히 그 자리에 말뚝이 박힌 것처럼 서 있었다.
6.
당신 탓이 아니니까요. 두 눈을 잃어버린 날, 바튼이 스티브에게 해주었던 말이었다.
7.
스티브는 땀이 찬 두 손을 바지춤에 문질렀다. 막상 이곳까지 어떻게 오기는 했는데, 한 걸음 더 내딛는 것이 힘에 겨웠다. 그래도 되는걸까, 그럴 자격이나 있는 걸까.
스티브는 바튼이 브랜트의 눈을 이식받던 날, 수술실 밖에서 자리를 지켰다. 그저 무사히 수술이 끝나길 바라며 여섯시간을 그 자리에 먹지도, 마시지도 않은 채로 우두커니 기다리고 있던 그는 수술이 무사히 끝났다는 말을 듣고는 회복실에 들어간 바튼의 얼굴을 보고는 돌아왔다.
바튼이 두 눈을 잃었다는 말을 들었을 때, 스티브의 세상은 까맣게 물들었다. 스티브에게 바튼은 그런 사람이었다. 아무런 색안경을 끼지 않고, 제 신념대로 자신을 봐주는 사람. 스티브의 울타리 안에 몇 없는 아주 소중한 사람이었다. 스티브는 바튼의 눈을, 그의 시선을 참으로 좋아했다. 그의 눈은 맑고 깨끗했다. 멀리 있는 것을 기가 막히게 잘 보는 그는, 스티브에게 있어서는 경외의 대상이었다. 그 눈으로 자신을 봐주길 바란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스티브는 망설임 없이 그에게 고백도 했었다. 당황스러운 기색을 숨길 새도 없이,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는 그 두 눈이, 사랑스러웠다. 그래서 그가 온 세상을 잃어버렸을 때, 스티브의 세상 또한 무너져내렸다.
사실, 기회만 된다면 그를 다시 보고 싶었다. 죄책감은 여전히 스티브의 어깨를 짓눌렀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마냥 바튼이 그리웠고, 보고싶었다. 그 눈으로 자신을 한 번만 더 바라봐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스티브는 몸서리쳤다. 지나치게 이기적인 자신을, 바튼에게 보이고 싶지 않았다. 그런 스티브에게 브랜트와의 대화는 오아시스 같았다. 바튼과 똑같은 얼굴로, 그와 비슷한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며 해주었던 그 모든 말들이 전부. 그래서 용기를 내어 여기까지 온 것은 좋은데, 막상 그 다음은 브랜트가 해주었던 말로도 용기가 부족하다는 것을 느꼈다. 어쩌다 이런 겁쟁이가 되었지? 스티브는 스스로 자문하며 떨리는 손으로 문을 두드렸다.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누구신가요?"
"아, 저..."
스티브는 바튼도, 브랜트도 아닌 또 다른 남자가 자신을 맞이할 줄은 선택지에 두지도 않았던 터라 당황스러움을 숨기지 못했다. 그런 스티브를 보며 남자는 사람 좋은 얼굴로 웃어보이고는 스티브를 집 안으로 들였다.
"윌과 클린트는 장 보러 갔어요."
"이단 헌트씨?"
"네, 맞습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로저스."
가볍게 악수를 나눈 스티브는 이단을 따라 그들의 집으로 들어갔다. 낯선 사람임에도 반갑다는 듯 꼬리를 흔들며 다가오는 커다란 리트리버 한 마리를 보며 스티브는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다정하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포근해보이는 인테리어나 분위기가 스티브의 얼굴에 미소를 띄게 만들었다. 물 한컵을 건네는 이단에게 고맙다 말하며 탁자 위 놓여있는 바튼과 브랜트의 사진을 들어올린 스티브는 목을 축였다.
"초면에 실례되는 질문이지만 혹시 헌트씨는 브랜트의..."
"연인입니다."
이단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인 스티브는 나지막이 부럽군요, 라 말하며 컵을 내려놓았다. 집 안을 빙 둘러본 스티브는 다음에 다시 오겠다며 발걸음을 돌렸다.
"윌이 그러더군요."
"무슨-"
"제가 윌에게 했던 말을, 당신에게도 들려주는 게 좋을 것 같다고."
현관에 우뚝 선 스티브를 보며 이단은 다시금 웃으며 말했다.
"이게 클린트에게도 먹힐지는 모르겠지만, 수술이 끝나고 윌이 의식을 되찾았을 때. 윌에게 그렇게 말했습니다. 남은 평생을 네 왼쪽 눈이 되어주겠다고."
그 땐 무슨 정신으로 그렇게 말했는지 모르겠는데 지금 다른 사람한테 말해주려니 쑥스럽군요. 멋쩍게 웃어보이는 이단을 보며 스티브 또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고맙습니다."
이단은 돌아서는 스티브를 보며 희미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8.
저 멀리 날아가는 원반을 가볍게 잡아오는 럭키를 보며 바튼은 연신 소리내어 웃었다. 이 녀석, 똑똑한데. 칭찬해달라며 꼬리를 흔드는 것을 모른척 할 수 없어 열심히 그의 머리를 쓰다듬다보면 아주 신이 난 모양인지 럭키는 그 큰 덩치로 달려들었다. 갑작스러운 공격에 뒤로 넘어진 바튼의 얼굴을 사정없이 핥아대는 커다란 강아지 한 마리와 옥신각신 레슬링을 하고 있다보면 어느새 셔츠에 온갖 풀과 잡초들이 엉켜붙어 있었다. 브랜트가 또 잔소리하겠는데. 어느새 가정의 엄마 역할을 하고 있는 브랜트를 떠올리며 바튼은 킥킥대며 웃었다.
"빨래 하기 곤란하지 않은가?"
누워있는 자신을 내려다보며 웃고 있는 스티브를 보며 바튼은 여전히 웃는 얼굴로 말했다.
"이단이 빨래를 아주 잘해서 괜찮아요. 힘이 좋거든요."
바튼이 먼저 팔을 뻗자 스티브가 그 손을 잡아 당기며 바튼을 일으켜세웠다. 셔츠에 묻은 풀과 흙먼지를 털어내고는 스티브를 바라본 바튼은 갑자기 목이 막혀오는 것을 느꼈다.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지만, 이제 그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오랜만이군요, 만나서 반가워요. 왜 이렇게 살이 많이 빠졌어요? 입이 탔다.
스티브는 그런 바튼을 보며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기다리려는 것도, 재촉하려고 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는 그냥 그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다 천천히 팔을 들어올리고는 텅 비어있는 오른쪽 눈가를 매만졌다.
"미안, 했네."
"......"
"나 때문에 자네가 이렇게 된 게."
바튼은 왜 브랜트가 자신에게 사과하는 것을 그렇게 못마땅해 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바튼은 스티브에게 사과를 받을 생각은 꿈에도 없었다. 타워에서 나온 것도 다 그 때문이었다. 바튼이 그 곳에 있으면 스티브는 영원히 바튼에게 죄책감을 가지고 살아갈 것만 같았다. 그랬기에, 그래서 나온 거였다. 스티브는 조심스럽게 바튼의 왼쪽 눈가에 입을 맞췄다. 감각이 없는 오른쪽과는 달리, 생경하게 느껴지는 촉감에 바튼은 아주 잠깐, 몸을 떨었다.
"그런데 그 무엇보다도, 그냥 자네가 너무 보고 싶었어."
"...스티브."
"자네가, 다시 그 눈으로 나를 봐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
나는 원래 욕심도 많고, 아주 이기적인 사람이지. 모두가 선량하고 정의롭다 말하는 캡틴 아메리카와는 다르게. 스티브의 말에 바튼은 자신의 뺨을 감싸고 있는 스티브의 손에 제 손을 겹쳤다.
"알고 있었습니다."
바튼의 말에 스티브가 고개를 끄덕였다.
"늦었지만 말이네, 클린트. 내가 자네의 눈이 되고 싶네. 나는 멀리 있는 것을 그리 잘 보지는 못하고, 시력도 자네만큼 좋지는 않고 턱없이 모자라지만..."
말 끝을 흐리는 스티브의 입술을 손가락으로 살짝 짓누른 바튼이 고개를 저어보이며 말했다.
"이 세상에서 제일 예쁜 눈이 생겼네요."
스티브는 말 없이 웃어보였다.
9.
"1/2 칼로리로 사오라고 했잖아요."
"미안하네, 그 제품이 다 떨어져서..."
"그럼 큰 거라도 사왔어야지!"
"윌, 그렇게 우리 살찌워서 뭐에 쓰려고?"
이제 그만하라는 듯 브랜트의 이마에 입을 맞추는 이단을 보며 브랜트가 미소 지었다.
"내가 다 잡아먹으려고."
"스티브, 빨리 일어나요. 이러다가 마녀의 손에 바짝 익혀진 쿠키가 될지도 몰라요."
"그럴까?"
"거기 두 사람은 내가 예쁘게 장식해줄거야."
브랜트의 말에 스티브가 웃음을 터트렸다.
10.
탁자 위 놓여있던 액자에는 네 사람의 사진이 들어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