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이슨은 너무나도 익숙하게 저장고에서 숙성된 와인 병을 꺼내 들고는 무식하게 마개를 따 나발을 불며 걸음을 옮겼다. 지나치게 넓은 복도에 유일하게 제이슨의 발걸음 소리만 울렸다. 아무거나 집어온 탓에 이게 몇 년이나 숙성된 와인인지 조차 모른다. 그러나 설마하니, 브루스 웨인의 대 저택의 와인 저장고에 ‘싸구려’라는 것은 있을 수 없는 노릇이다. 향을 음미하고 천천히 입 안에서 혀를 굴리며 와인을 마시는 품위 있는 행동과는 다르게 제이슨은 억지로 목구멍 안으로 고급 와인을 밀어 넣었다. 사실 이렇게 마셔봤자 전혀, 조금도 취하지 않는다는 것은 웃긴 일이다. 억지로 사람을 살려놓더니, 괴물이 됐잖아. 제이슨의 입가에 한 단어가 맴돈다. ‘괴물’, ‘괴물’.

익숙한 방 문 앞에 자연스럽게 발걸음이 멈추었다. 이미 다 마시고 텅 비어버린 병을 차마 버리지도 못하고 어정쩡하게 들고 있는 폼으로. 저택과 제이슨의 모습은 어딘지 모르게 낮과 밤의 모습과 비슷하게 보였다. 감히 어디가 어떻게 비슷하냐하면, 서로의 영역에 침범하는 것이 지독하게도 어리석다는 것이 비슷했다.

방의 문은 또 다른 잠금장치로 잠겨있었지만 제이슨은 그 잠금장치를 푸는 법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확신은 없었다. 조심스럽게 문 앞에 와인 병을 내려놓은 제이슨이 잠금장치의 앞에 바짝 입술을 붙이고는 그 누구에게도 들리지 않을 만큼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작게 덜컹거리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자 제이슨의 얼굴이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구겨졌다. 마음 한 지편에서 불이 붙은 분노가 순식간에 제이슨을 집어 삼켰다. 그러니까, 대체, 왜! 제이슨은 부러 쿵쾅거리며 방 안으로 들어갔지만 익숙한 뒷모습이 보이자 자기도 모르게 발걸음을 우뚝 멈춰 세우고 말았다.

그의 전신을 충분히 감싸 안을 수 있을 정도로 넓은 침대에는 보기에도 고급스럽고 편안한 이불 속에 파묻혀 있는 브루스 웨인이 있었다. 이미 새벽이 한참 세상에 머물고 있는 시간인지라 ‘타인’을 눈앞에 두고도 미동조차 하지 않는 모습이 기분을 이상하게 만들었다. 지금이라도 당장 일어나 침입자가 누구인지 확인을 해야 하는 눈은 굳게 닫혀있었고, 그 답지 않게 새근거리는 숨소리가 제이슨의 기분을 더욱 이상하게 만들었다. 심지어 제이슨이 그의 곁에 자리를 잡고 앉을 때 까지만 해도 브루스는 그저 잠만 잘 뿐이었다. 충동적으로 브루스를 양 팔 안에 가둔 제이슨이 마음속으로 물었다. 이래도 깨어나지 않을 생각인거야? 브루스가 대답하지 않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제이슨은 천천히 고개를 숙여 브루스에게 입을 맞췄다. 그와 동시에 굳게 잠겨 있던 눈이 부드럽게 열리며 이 세상의 그 어떤 바다보다 차가우면서 따뜻한 세상이 제이슨을 반겼다.


“……피곤해.”


잠에 잔뜩 취한 브루스의 목소리는 카울을 쓰고 있는 배트맨의 것을 닮아있었다. 그에게 묻고 싶은 것이 많다. 대체 어째서 아직도 웨인 저택의 보안 프로그램에 ‘제이슨 토드’가 인식되어 있는 것인지. 그러나 제이슨은 그에게 그런 것을 묻는다는 것 자체가 아무런 의미가 없는 행동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브루스는 제이슨의 멱살을 바짝 잡아당겨 느리지만 확실하게 입술을 훑어 내고서는 아예 제이슨을 자신의 옆에 매다 꽂아버렸다. 눈 깜짝할 새에 브루스의 옆에 처박힌 제이슨은 코웃음을 쳤다.


“……빌어먹을.”


제이슨은 자신의 가슴에 얼굴을 묻은 채 잠이 든 브루스를 보며 밀려 내려간 이불을 다시 끌어올렸다. 새삼 얇은 천위에 닿은 맨 피부가 따뜻하다 못해 뜨겁다는 사실을 깨닫기 전까지, 제이슨은 단 한숨도 자지 못했다.

잘 수 없었다.


'DC'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할뱃] 너와 나의 시간  (0) 2016.05.16
[숲뱃] 첫 키스  (0) 2016.05.16
[슨뱃] 죽음의 냄새  (0) 2016.05.16
[숲뱃] 시나몬과 크렌베리  (0) 2016.05.16
[숲뱃] 공중산책  (0) 2016.05.16


클락은 몹시도 긴장하여 쿵쾅거리는 심장소리가 차마 그의 귀에 들어가는 것이 부끄러워져 떡 벌어진 어깨를 억지로 움츠리며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아, 언제부터 이런 멍청이가 된 거지. 이래서는 정말이지 굿모닝, 스몰빌! 하며 놀림을 당해도 할 말이 없다. 딱 봐도 고급스러운 향이 물씬 풍기는 와인이 담긴 잔을 한 입에 싹 비워버리면 될까, 라는 정말이지 멍청한 생각도 아주 조금 들었다. 크립토니안은 쓸데없이 별 이상한 곳에서도 힘을 내지. 술은 좀 취해도 되잖아. 클락은 축축하게 젖은 손을 연신 바지춤에 주물러댔다.

이 세상에 두려울 것 하나 없는 남자, 슈퍼맨이 왜 이렇게 긴장을 하는가 하니 오늘은 다름 아닌 ‘슈퍼맨’, 혹은 ‘데일리 플래닛’의 기자 클락 켄트로써가 아닌 ‘평범한 남자‘ 클락 켄트의 신분으로 브루스의 집에 첫 발을 디딘 날이었다. 당연히 긴장할 수밖에! 클락은 자신이 브루스와 새로운 연애를 시작한지 3개월 하고도 26일째란 사실을 기억하고 있었다.


“어디 불편한 곳이라도?”


브루스는 진심으로 그렇게 묻고 있었고 클락은 차마 너무 긴장해서 토가 나올 것 같다는 말을 할 수 없었다. 대신 결국에는 손에 들린 와인 잔을 깔끔하게 원 샷으로 넘겨버리는 기행을 저지르며 호두까기 인형처럼 뻣뻣한 발걸음으로 브루스의 앞에 섰다.


“아니요.”

“전혀 안 믿기는데.”

“그렇죠? 아니, 네, 으음…….”

“이봐, 미스터 켄트. 진정 하라고.”


그러니까, 이러면 안 되는데. 클락이 가장 걱정하던 것은 수십 년까지는 아니더라도 적당히 터울이 있는 그와의 나이차에서 비롯되는 ‘무언가’였다. 그것은 사용하는 언어가 될 수도 있었고, 풍겨오는 기품이나 분위기가 될 수도 있었다. 직접적으로 말하자면 그에게 어리기만 한 연하 애인이라는 포지션이라던가. 그러나 연하라면 연하만의 끈기와 패기로 얼버무릴 수 있는 것도 많다. 클락은 그 사실을 방패삼아 브루스의 양 팔을 손으로 단단하게 붙잡고는 바로 입을 맞췄다. 부드럽게 서로 오가는 숨이라던가, 한 번 짧게 들이키는 것만으로 코를 마비시켜버리는 고가 브랜드의 향수라던가. 계속 마음 속 어디 한 구석에서는 엑셀을 밟으라고 요동치는 것을 겨우겨우 진정시키며 바쁘지 않게, 보채지 않으며, 느긋하게, 천천히. 클락은 탄성과도 비슷한 숨을 내뱉었다. 상상 이상으로 만족스러운 흡사 포만감 -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굶주렸을지도 모르는 법이었다. - 과도 같은 황홀한 기분은 대체 어디에서부터 비롯되었는가, 조금 고민해 볼 필요는 있었지만 말이다.


“이제 좀 괜찮아졌나?”

“…아주 많이요.”

“슈퍼맨이 키스하기 전에 동공이 요동칠 정도로 긴장하는 남자라는 걸 온 세상이 알아야 하는데.”

“네, 네. 그래요, 저 굿모닝 스몰빌, 이랍니다. 그렇지만 어떡해요. 첫 키스잖아요. 긴장이 안 될 수가 있나.”

“정말 순수한 의미로 첫 키스는 아니잖아?”

“브루스.”


클락이 보기에 브루스는 다소 얄미운 얼굴로 웃고 있었다. 그러나 동시에 브루스가 자신의 넥타이를 바짝 잡아당기며 입을 맞추는 탓에 콧등에서 안경이 살짝 밀려났다. 가볍게 입을 맞추고 떨어져 나가는 사이를 아쉬워하던 찰나, 브루스가 제법 나른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럼 방금이 두 번째 키스네.”

“나 사고 치게 만들려고 작정했죠, 지금?”

“칠 수는 있고?”

“브루스, 난 가끔 당신이 너무 싫더라.”

“그래? 난 아닌데.”


아, 진짜. 이건 다 당신 탓이야. 클락은 엉성하게 걸쳐져 있던 안경을 거칠게 잡아 빼며 말했다.


'DC'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할뱃] 너와 나의 시간  (0) 2016.05.16
[슨뱃] 잠  (0) 2016.05.16
[슨뱃] 죽음의 냄새  (0) 2016.05.16
[숲뱃] 시나몬과 크렌베리  (0) 2016.05.16
[숲뱃] 공중산책  (0) 2016.05.16


결코 의도한 것도 아니었고, 원했던 일도 아니었지만 어쨌거나 명백하게 죽었다 살아 돌아온 것은 사실이다. 제이슨은 그 자체가 불쾌하게만 느껴졌던 적도 있었다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기억해냈다.

지금은? 그걸 말이라고 해? 불쾌하지. 다 낡아빠진 소파에 몸을 기울이고 곰팡이가 필 듯 말듯 눅눅한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별로 집중할 필요도 없이 남자가 있는 곳이나 그 주변이나 몹시도 조용한 탓에 고른 숨소리가 퍼지고 사그라지는 반복적으로 움직이고 있는 것이 들렸다. 제이슨은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며 가늠해본다. 저 천장에 곰팡이가 피는 것이 먼저일까? 아니면, 아니면?


빌어먹을. 제이슨은 바닥에 누워있는 남자의 숨소리가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무엇이 마음에 들지 않았냐하면, 금방이라도 아예 사라져버릴 것 같이 너무나도 작다는 것이었고 남자의 주변을 감싸고 있는 공기의 냄새가 너무나도 불쾌했고 짜증이 난다는 것이었다.

제이슨은 그 공기의 냄새를 역겨울 만큼 잘 알고 있었다. 결코 지워지지 않을 죽음과 가까운 냄새. 그 땐 몰랐지. 한 번 죽고 살아본 후에야 남자의 곁에는 늘 이런 냄새가 지독하리만큼 풍기고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 누구 마음대로. 그건 안 되지. 절대 안 돼. 제이슨은 가볍게 몸을 일으키고는 남자의 곁에 바로 누웠다. 남자는, 그는, 정말로 곧 죽을 사람처럼 가만히 눈을 감고 누워있었으나 소파 위에서 들었던 것보다는 조금 더 생기 있게 들리는 숨소리에 눈곱만큼의 안도감을 느끼며 제이슨은 둥글게 등을 말고서는 그의 곁에 쥐 죽은 듯이 소리죽여 누웠다.


언젠가, 그 언젠가에는 당신을 바라보며 누운 적도 있었는데. 제이슨의 얼굴이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듯 울상이 되었다가 눈 깜짝할 사이에 딱딱하게 굳어 차가워진다. 하루에도 수십 번, 남자에 대해 생각할 때마다 정신 이상자처럼 왔다 갔다 하는 감정의 높낮이에 처음에는 많이 혼란스러워했던 적도 있었던 것을 안다. 그러나 여전히 마음 한 구석에는 가장 작고도 큰 의문점이 남아있다는 것 또한 안다. 제이슨은 아주 조심스럽게 남자의 얼굴을 바라볼 수 있게 몸을 돌렸다. 둥글게 만 등은 여전했다. 남자의 곁에 누워있는 동안 그 등이 펴질 일이 있기나 할까.


브루스. 제이슨은 결코 소리 내어 남자의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입을 다물고 그 이름을 속으로 중얼거리며 혼란스러운 감정을 감내하면 마지막에는 누군가 자신을 향해 묻는다. 그 목소리의 주인이 누구인지는 모른다. 그 자신일수도, 혹은 브루스일수도 아니면 그 빌어 처먹을 자식일지도 모르는 법이었다.

어쨌거나 분명한 것은, 그 목소리는 자신을 향해 묻는다. 무엇을 원하는 거야? 제이슨은 그 물음에 입을 다물어버렸다. 그 스스로도 확신할 수 없었다. 그의 숨을 자신의 손으로 끊기를 원하는 것인지, 아니면-.


“……밤에 늦게 자면 건강에 안 좋다.”


그 시리도록 차가운 다정한 눈이 자신을 바라보기를 원하는 것인지. 제이슨은 그저 두 눈을 깜빡일 뿐이었다.

무슨 상관이야.


'DC'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슨뱃] 잠  (0) 2016.05.16
[숲뱃] 첫 키스  (0) 2016.05.16
[숲뱃] 시나몬과 크렌베리  (0) 2016.05.16
[숲뱃] 공중산책  (0) 2016.05.16
[딕뎀] 꿈  (0) 2016.05.16


맹세컨대 클락은 배트맨의 정체를 함부로 훔쳐본 적이 없었다. 대체 어떻게 슈퍼맨의 투시 능력은 납을 사용하면 막을 수 있다는 정보를 구한 것인지는 몰라도 그의 카울에는 얇지만 납 처리가 되어 있었다. 아마도 평생을 배트맨만큼 철저하고 완벽한 사람을 볼 수 있을 리가 없을 것이라는 생각을 할 정도였다.

그의 얼굴을 볼 수 없는 만큼 클락은 그의 주변 것들에 더 감각을 곤두세우고는 했다. 예를 들면 여느 때와 다름없어 보이는 발차기의 지축이 되는 발의 부츠 밑창이 바닥에 쓸리는 소리라던가-. 별 쓸데없는 것에 절로 쫑긋 세워지는 감각의 촉을 어떻게 해도 도무지 손을 쓸 수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배트맨이 의심이 가득한 눈초리로 슬금슬금 자신의 곁에 가까이 오지 않는다는 것을 느꼈을 때였다.

그가 자신의 정체를 아는지 궁금해지려던 찰나, 클락은 그와는 전혀 어울릴 것이라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희미한 단내를 맡았다. 그 달콤한 향기는 절로 입 안에 군침이 돌게 만들 정도로 향긋했다. 초콜릿? 그러나 분명 초콜릿의 향기라고 하기에는 조금 더 달게 느껴지는 향에 클락은 굉장히 의외라는 얼굴로 배트맨의 어깨를 붙잡고는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중얼거렸다.


“…맛있는 냄새가 나. 단 내가.”


배트맨과 만난 지 약 4개월 만에 처음으로, 그가 당황하는 것을 느낀 클락 또한 그 못지않게 당황하여 횡설수설할 동안 슈퍼맨이 배트맨에게서 ‘맛있는 냄새’가 난다고 한 사건은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널리 퍼지고 말았다.

그 뒤로 배트맨은 이상한 무리들의 표적이 되었다. 이상한 무리라 하면은, 대표적으로는 그린랜턴과 플래시가 있었고, 샤잠과 사이보그도 퍽 궁금하다는 얼굴로 배트맨의 뒤를 졸졸 쫓아다녔으나 돌아오는 것이라고는 짜증과 한숨이 섞인 꾸짖음뿐이었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의 원흉이 된 슈퍼맨은 반경 5m 안 접근금지 명령을 받았으며, 혹 그것을 어길시 휘황찬란한 초록빛 세상을 구경시켜주겠다는 그의 협박 아닌 일방적인 통보에 천하의 슈퍼맨도 얌전히 꼬리를 접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클락의 코끝에는 여전히 배트맨에게서 느껴지는 달콤한 향이 선명하다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강렬하게 느껴졌다. 그린랜턴은 달콤한 냄새는커녕 쓸데없이 향이 짙은 향수 냄새만 풀풀 풍기는 것 같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플래시는 그 향수가 보통의, 일반적인 직장인의 월급으로는 감당하기 힘든 브랜드의 제품이라는 것을 눈치 챘으나 입을 다무는 것을 택했다.





최근 클락에게는 새로운 취미가 생겼다. 데일리 플래닛에 퍽 상큼한 소문이 돌았다. 요새 들어 클락의 자리에서 단 내가 며칠 째 빠지지 않고 풀풀 풍긴다는 소문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클락의 자리에는 이곳저곳의 수많은 간식거리들이 책상 한 가득 쌓여있었다. 비단 클락의 자리뿐만이 아닌 그 주변 동료들의 책상에도 가득했다. 도넛부터 시작해서 쿠키, 케이크, 마카롱…. 그 종류도 워낙 많아 일일이 다 셀 수 없을 정도였다. 덕분에 신경질적인 표정으로 자판을 두드리는 경우가 많은 ‘기자’들의 사무실에 아주 조금이나마 웃음꽃이 폈다. 거의 매일같이 군것질을 사오기 시작하는 클락을 보며 로이스는 한 가지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었는데, 원래 클락은 단 것을 그리 즐기는 편이 아니었다. 그런 그가 하루에 다 먹기도 벅찬 양의 디저트들을 사오는 것이 궁금할 수밖에. 심지어 클락은 그 많은 것들 중 한 두 개 정도 먹을까 말까했다. 디저트들은 대부분 다른 사람의 뱃속으로 들어갔고, 클락은 그저 그 디저트가 담겨있던 상자를 빤히 보며 미간을 살짝 찌푸릴 뿐이었다.

클락이 사온 디저트의 맛은 훌륭했고, 로이스는 체중이 2kg이나 늘었다며 푸념을 내뱉을 뿐이었다.


“대체 무슨 일이야?”


늘어난 체중이 아슬아슬하게 3kg을 채우기 전에 로이스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클락을 바라보았다. 오늘도 여전히 클락의 자리에는 새로운 케이크 박스가 놓여있었고, 클락은 유심히 그 상자를 들여다볼 뿐이었다. 물론 그 안에 들어있던 케이크는 벌써 누군가의 뱃속으로 들어간 지 오래였다.


“뭔가, 좀 더…….”

“더?”

“달면서 달지 않은 듯한 냄새가 나는 게 뭘까?”

“클락?”

“초콜릿은 아니었는데.”

“클락.”

“응?”


로이스는 클락의 앞에 가볍게 손가락을 튕겨 소리를 내었고, 클락은 그제야 로이스를 바라보았다. 도수가 너무나도 높게 맞춰져있는 안경알에 비친 그의 새파란 눈은 전에 없던 호기심에 깊게 잠기어 더욱 반짝였고, 로이스는 그 사실 자체를 꽤 흥미롭게 여겼다.


“어떤 걸 찾는 거야?”

“음, 말로 설명하기가 어려워. 적당히 달지만 그렇다고 코끝을 찌를 정도로 달지는 않아. 그 향이 너무 은은해서 금방 잊혀져버릴 것 같다가도 익숙하게 계속 맴돈단 말이지.”

“정말 어려운 걸.”

“그렇지?”


요컨대 클락은 그 자신이 설명한 그러한 향기를 내는 종류의 디저트를 찾고 있었고, 벌써 며칠 째 동네의 모든 디저트 전문점을 뒤졌지만 그 향기의 단서조차 잡지 못한 채 방황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요 며칠 클락이 사온 디저트는 모두 한두 번쯤은 이름을 들어본 적이 있는 상표가 있는 집의 것이었고, 로이스는 손뼉을 치며 클락의 어깨를 두드렸다.


“고담으로 향하는 다리 끝에 있는 가게는 가봤어?”

“음?”

“팬케이크 집말이야.”


아, 아아. 클락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곧장 고개를 다시 갸웃거렸다. 그 가게가 있다는 것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지만 어쩐지 그 가게는 그에게 어울리지 않을 것이라는 편견이 알게 모르게 깔려 있었다. 클락은 자신의 편견이 어디에서부터 비롯되었는가를 곰곰이 생각했다. 왜 그라면 좀 더 크고, 이름만으로도 유명한 곳의 향이 어울릴 것이라 생각했는가.

클락은 곧장 자리에서 일어났고, 그의 반동 때문에 덜컹거리는 의자를 대신 잡아준 로이스의 뺨에 입을 맞추며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쏜살같이 달려 나갔다. 클락의 눈은 방금 로이스가 발견했던 것보다 더욱 더 반짝이고 있었다.





가게에 점점 가까워질수록 익숙하게 코끝을 간질이는 향은 분명히 그의 것이었다. 정확히는 그의 곁에서 머물던 희미한 그 달콤한 향기였다. 클락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가게로 들어섰고, 가게 안은 확실히 바깥에서 느껴지던 것보다 훨씬 강하고 진한 향이 클락의 전신을 휘감았다.

겨우 한 두 자리 있을까 한 아주 조그마한 가게에는 보통의 가게에서 풍겨오는 달콤한 설탕이나 크림의 향기에 더해져 독특한 시럽의 향기가 물씬 풍겼다. 시나몬? 클락은 비로소 너무나도 희미했던 그 향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향수와 뒤섞여 은은하게 그를 감싸고 있던 공기 중에 퍼져있던 것은 명백히 시나몬 향기였다. 너무나도 희미하지만 꾸준히 자신의 향기를 어필하던 그의 정체를 알아내자 클락의 얼굴에도 미소가 번졌다.


“무엇으로 드릴까요?”

“아, 음……. 모카 시럽으로 주세요. 크림은 빼고.”

“드시고 가실 건가요?”

“네.”


다행히 자리가 있었기에 클락은 망설임 없이 자리에 앉았고, 주문한 팬케이크가 나오는 동안 연신 화사한 미소를 지으며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점심시간이라고 하기에는 늦은 시간인지라 길거리에 걸어 다니는 사람의 수는 그리 많지 않았다. 꽤 오래간만에 느껴보는 느긋함에 푹 젖어있을 때 쯤, 클락은 아주 의외의 인물이 가게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멍청한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미스터 웨인?”


그 이름조차 입에 담기가 생소한 남자는 정말이지 어울리지 않는 곳에 발걸음을 했다는 생각이 들 때 쯤, 클락은 본능적으로 그대로 가게를 나가려는 브루스의 팔을 붙잡았다.


“잠깐, 웨인…… 배트……?”

“주문하신 케이크 나왔습니다.”


주문 대를 앞에 두고 오묘한 신경전이 아주 잠깐 스쳐 지나가고, 브루스는 클락 대신 그의 접시를 받아들며 말했다.


“항상 시키던 것으로 부탁드립니다.”

“시나몬 시럽 크랜베리 팬케이크 맞으시죠?”


브루스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고, 클락은 여전히 그의 팔을 붙잡고 있었다.

놀랍게도, 그것은 가까운 미래에 다시금 회상하게 될 그들의 첫 번째 데이트가 된다.


'DC' 카테고리의 다른 글

[숲뱃] 첫 키스  (0) 2016.05.16
[슨뱃] 죽음의 냄새  (0) 2016.05.16
[숲뱃] 공중산책  (0) 2016.05.16
[딕뎀] 꿈  (0) 2016.05.16
[클락브루스/숲뱃] 인간의 세계  (0) 2016.04.06


브루스는 아주 가끔 자신이 배트맨이 아니었다면, 하는 생각을 하고는 했다. 가령-.


“움직이지 마! 다 닥치고 무릎 꿇어!!”


오밤중도 아닌 한낮에 감히 웨인사를 습격한 한 무리의 괴한들을 만났을 때 말이다. 브루스 웨인은 배트맨이었기 때문에 억지로 브루스 웨인임을 연기할 때가 필요하고는 했다. 지금이 바로 그런 때다. 브루스는 괴한들이 시키는 대로 행동하며 직원들은 다치게 하지 말아달라는 자상한 회장의 얼굴을 해 보인다. 물론, 일반 시민에 지나지 않는 직원들을 보호하는 일은 당연한 것이었다. 적의 동정심과 자비를 바라는 표정과 몸짓을 보이느냐 혹은 그 전에 먼저 상대의 코뼈를 박살 내버리느냐와 같은 방식의 차이일 뿐이었다.

사실 건물에 괴한들이 어떻게 침입했는지부터가 의문이었다. 웨인사의 보안은 브루스가 직접 고안한 것으로, 그 말은 곧 케이브를 보안하고 있는 시스템을 기초로 만들어진 것이다. 배후에 누가 있는 건가. 그렇지만 누가, ‘브루스 웨인’을? 하긴, 생각해보니 일일이 그 숫자를 세지 않을 뿐이지 꽤 많을지도 모르는 법이었다.

단순한 강도짓을 하기 위함이었다면 차라리 은행을 터는 것이 더 안전한 게 현실이다. 특히나 웨인사의 직원들은 그 직원들조차 찬란하게 빛나는 ‘웨인’의 품격에 걸맞게 쉽게 당황하는 법이 없이 침착하게 구는 요령도 잘 알고 있었다. 딱히 교육을 시킨 적이 없음에도 말이다. 이미 뉴스에서는 웨인사를 점거한 괴한들의 이야기가 특보를 탔음이 분명했다. 섣불리 진압을 하지 못하는 이유는 순전히 브루스 자신 탓이리라. 브루스는 이 소식이 저스티스 리거들에게 언제 전해질 수 있는가를 가늠해본다. 꼼짝없이 다른 누군가의 도움을 바라기만 해야 한다는 것도 참 피곤했다. 그랬기에 브루스는 한 번 더 자신이 배트맨이라는 특별한 존재가 아니었다면, 하는 생각을 했다. 그랬다면 다른 누군가의 도움을 바라는 일이 이렇게 피곤하고 무력하다는 것을 조금이라도 덜 느낄 수 있었을까.


“……!”


아차, 하는 순간 총성이 울리고 단단한 유리벽이 산산조각이 나며 부서지기 시작했다. 그 때만큼은 누구의 것인지 모를 비명소리가 났다. 브루스는 침착하려 노력했지만, 곧 우악스러운 손길로 자신의 목을 잡아채는 손길에 몸을 뒤틀며 반항해보았지만 헛수고로 돌아갔다. 마음만 먹으면, 할 수만 있다면 지금이라도 이 상황을 벗어나는 방법은 많았다. 단지 브루스는 카울을 쓰고 있지 않았을 뿐이었다.


“이봐요, 돈이 필요한 거라면……!”

“돈은 곧 받을 거야.”

“뭐?”

“당신이 죽고 나면 말이지!”

“…!!”


젠장, 브루스는 자신의 몸이 고층 빌딩에서 내던져지는 것을 똑똑히 보았고, 똑똑히 느꼈다. 와이어가 있는 것도 아니었기에, 브루스가 할 수 있는 일은 이대로 추락하거나,


“브루스!”


하늘의 품에 안기는 것을 기다리거나. 공중에 붕 뜬 몸은 너무나도 편안한 상태로 그의 품에 안겨 있었다. 브루스는 자신의 팔 다리가 잘게 떨리는 것을 애써 무시했다. 그렇다고 해서 그의 품에 더 안겨든다거나 하는 짓은 하지 않았지만.


“이름 한 번 부르기가 그렇게 어려워서야.”

“…….”

“내가 몇 초라도 더 늦었으면 어쩌려고 그랬어.”


브루스는 드물게 긴장이 역력한 그의 표정을 보며 가만히 눈을 감고는 결국 그의 가슴에 머리를 기대었다.


“그럼 지금 내 눈 앞에 있는 사람은 누구지?”


클락은 당장이라도 브루스에게 입을 맞추고 싶어 안달이 난 얼굴이었지만 지금은 영 때가 좋지 않았다. 클락이 무사히 브루스를 구할 동안 이미 괴한들은 그린랜턴과 플래시의 손에 깔끔하게 정리가 되어 있었다. 브루스는 답지 않게 당황한 얼굴로 클락을 바라보았다.


“대체, 이게…….”


누구를 불렀느냐는 물음보다는 누구를 부르지 않았냐는 물음이 더 어울릴 정도의 소집 인원을 보며 브루스는 경악했다. 이렇게 화려해서야 아주 대놓고 ‘브루스 웨인’이 배트맨이라고 광고하는 꼴은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이래야 그 누구도 함부로 ‘브루스 웨인’을 건들지 못하겠지. 공식적으로 와치타워는 물론이요, 우리들의 활동 자금은 대부분이 웨인의 이름으로 들어오는 후원금 아닌가. 다들 ‘돈줄’을 위해서라면 이 정도는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을까?”

“이럴 때는 퍽 인간답군.”

“그럼. 누구한테 배운 건데.”

“그래서 언제까지 이러고 있을 거야? 내려줘. 가서 정리를…….”

“브루스.”

“…왜?”

“데이트 하러 갈까?”


브루스는 순간 터져 나오는 어처구니없는 한숨을 차마 다 삼키지 못했다. 하, 하고 터지는 브루스의 목소리에 클락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어깨를 들썩이며 웃다 곧장 브루스의 몸을 더욱 힘주어 끌어안고는 하늘 높이 솟아올랐다. 브루스는 본능적으로 클락의 목을 두 팔로 끌어안았다.


“클락!”

“한 번 쯤은, 낮에도 이렇게 해보고 싶었는걸!”


어쨌거나 브루스의 몸은 인간의 것이었으니 이대로 대기권을 뚫고 와치타워를 향해 날아가는 것은 무리였다. 적당한 높이에 – 말이 적당한 높이지, 까무러칠 정도로 높았다. - 머무른 클락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숨 쉬기는 괜찮아?”

“그럭저럭.”


빈말은 아닌 모양인지 평소와 다름없는 표정은 물론이거니와 규칙적으로 뛰고 있는 브루스의 심장소리를 들으며 클락은 또 한 번 경외심과 안타까움을 동시에 느꼈다. 고작해야 보통 사람의 몸이 이 정도를 아무렇지도 않아 할 정도면, 그의 몸은 이제껏 얼마나 많은 고통을 겪어야 했는가.


“딱히 날 수 있다는 게 부럽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었는데.”


브루스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한 눈에 쏙 들어오는 고담은 물론이요, 광활하게 펼쳐진 도시들을 바라보며 깊고 깊은 눈을 반짝였다. 배트윙의 창 너머로 보이는 것은 확실히 직접 눈에 담는 것하고는 차원이 달랐다.


“누구 씨가 너무 바빠서 이런 것도 잘 보여주지 못해서 서운하단 말이지.”

“애 같이 굴지 마, 클락.”

“지금은 네가 더 애 같은 거 아나?”


클락은 가볍게 브루스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딱히 동의하는 것은 아니지만 마땅히 반박할 말을 찾지 못한 채 브루스는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밤은 어떤 풍경일지 궁금한 걸.”


브루스는 그 목소리를 클락이 듣지 못했을 거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DC'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슨뱃] 죽음의 냄새  (0) 2016.05.16
[숲뱃] 시나몬과 크렌베리  (0) 2016.05.16
[딕뎀] 꿈  (0) 2016.05.16
[클락브루스/숲뱃] 인간의 세계  (0) 2016.04.06
[숲뱃/클락브루스] 이름  (0) 2016.04.06